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剝製가 된 天才 音樂家 精麤 “統一 祖國 노래를 부르고 싶다”|주간동아

週刊東亞 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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剝製가 된 天才 音樂家 精麤 “統一 祖國 노래를 부르고 싶다”

알마티 居住 精麤의 삶과 音樂…北韓서 버림받고 苦難의 삶 끌어안아

  • 글·구해우 未來戰略硏究院 理事長 haewookoo@hanmail.com 企劃·송홍근 記者 carrot@donga.com

    入力 2011-06-20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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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北韓은 2009年 5月 2次 核實驗을 했다. 지난해엔 天安艦 爆沈, 延坪島 砲擊으로 南北關係를 緊張 局面으로 몰아넣었다. 南北 間 對立, 衝突은 光復 以後 66年이라는 歲月이 흐르도록 이어진다. 離散의 아픔을 겪은 이가 적지 않다. 北韓을 脫出해 韓國에 定着한 移住民도 늘고 있다.

    여기, 66年 分斷 歷史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映畫처럼 살아온 男子가 있다. 犧牲, 苦痛이 가득한 삶을 살았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사는 天才 音樂家 精麤(88). 韓國에서도, 北韓에서도 버려진 悲運의 天才다. 尹伊桑(1917~95年)은 韓國에서 버림받았을지언정 北韓에서는 歡待받았다.

    精麤는 祖國愛가 强하다. 차이코프스키 音樂스쿨 卒業作品 이름이 ‘曺國’. 交響曲 ‘1937年 9月 11日 스탈린’은 民族을 向한 뜨거운 사랑을 表現한 것이다. 그가 마지막 노래로 作曲한 ‘내 祖國’은 統一祖國을 念願하며 쓴 것이다. 그럼에도 曺國은, 그러니까 韓國과 北韓은 半世紀 넘도록 그를 머나먼 異國땅에 내버려두었다.

    5月 27日 알마티로 가는 飛行機에 올랐다. 6時間 남짓한 飛行時間 동안 共産主義者 精麤와 天才 音樂家 精麤, 北方 遊牧民 文明의 象徵인 톈산(天山)과 실크로드 톈산북로(天山北路)의 中心都市이던 알마티를 생각했다. 그는 一行을 반갑게 맞았다. 未遂(米壽)를 넘긴 老音樂家 얼굴에서 쓸쓸함, 그리움이 느껴졌다.

    “집으로 모셔야 하는데 아내가 아파서요. 未安합니다.”



    犧牲과 苦痛 映畫처럼 살아온 男子

    그는 韓國人이 運營하는 民泊집으로 一行을 案內한 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그와 함께 톈산에 올랐다. 海拔 4000m가 넘는 톈산이 내뿜는 氣像이 雄渾하다. 産銀 萬年雪을 녹여 講을 發源했고 都市를 建設했으며 文明을 키웠다. 北方 遊牧民은 서(西)로는 톈산, 桐(東)으로는 白頭山에 이르는 地域을 號令했다. 大草原을 떠돌면서 高句麗帝國, 몽골帝國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와 文明을 建設했다.

    “50年 넘게 이곳에 살면서 카자흐스탄 地域과 民族文化의 連結고리를 찾으려고 努力했습니다. 高麗人이 運營하는 商店을 둘러볼 때조차 우리 民族의 長久한 歷史를 생각했고요. 카자흐스탄 國立博物館이 所藏한 遺物을 살펴보면서 우리 文化와의 同質性도 찾아봤습니다.”

    沿海州에 居住하던 高麗人은 1937年 9月 10日 “다음 날 새벽 沿海州를 떠나라”라는 스탈린의 命令을 傳達받았다. 몸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의 살림살이만 챙긴 채 中央아시아行 列車에 올랐다. 알마티와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近處 荒蕪地에 到着했다. 그해 겨울은 추웠다. 먹을 것, 입을 것이 不足했다. 많은 이가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그럼에도 죽는 이가 多少나마 줄어든 것은 카자흐人의 도움 德分이었다. 살아남은 高麗人은 瘠薄한 荒蕪地를 開墾해 農事를 지었다. 카자흐人에게 農事法도 가르쳤다. 中央아시아에서 最初로 벼農事에 成功한 이들이 高麗人이다. 現在 우즈베키스탄에 約 20萬 名, 카자흐스탄에 約 10萬 名이 산다. 天才 音樂家 精麤는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鄕愁를 달랬고, 그들에게서 조국의 오래된 노래를 採譜했으며, 그들의 아픈 歷史를 大敍事詩를 닮은 ‘1937年 9月 11日 스탈린’이라는 交響曲에 담아냈다. 中央아시아 高麗人의 苦痛과 아픔, 그리고 南北에게 버림받은 精麤의 삶은 韓國 近現代史가 演出한 悲劇이다.

    그는 1923年 全南 光州에서 태어났다. 湖南 符號이던 外할아버지는 藝術에 造詣가 깊었다. 藝術人을 집으로 招請해 孫子들에게 藝術的 感受性을 일깨워주었다.

    “1930年代 外할아버지 宅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藝術人 집안이었죠. 外三寸도 베를린 音大를 卒業했어요.”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1 모스크바 留學 時節 精麤(맨 왼쪽)와 김원균(왼쪽에서 세 番째). 2 精麤와 精麤의 兄 정춘재(오른쪽).

    全南 光州→平壤→모스크바→카자흐스탄

    그는 여덟 살 때 노래를 作曲하는 等 어릴 적부터 天才性을 드러냈다. 藝術的 感受性을 간질이는 집안 雰圍氣 德分에 才能을 일찍 發見한 것이다. 그의 兄인 정춘재는 朝鮮프롤레타리아映畫人同盟 初代 書記長을 지냈다. 1950年代까지 北韓이 자랑하는 映畫監督으로 活動했다. 서울에 사는 그의 동생은 어린이에게 친숙한 노래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을 만든 童謠作曲家다.

    “어릴 적부터 愛國心이 强했어요. 1938年 光州書中을 다닐 때 朝鮮語 使用 問題로 日本人 敎官과 다퉈 退學당했죠. 迂餘曲折 끝에 양정고에 編入해 卒業狀을 받았습니다. 1942年 니혼臺 音樂學科에 入學해 音樂을 正式으로 工夫하기 始作했어요. 滿洲로 가서 獨立運動을 하고 싶었는데, 恩師께서 專門性을 먼저 키운 뒤 그에 기초해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助言하더군요. 그래서 日本 留學길에 올랐고 1944年 日本軍에 强制 徵集됐습니다. 韓國人 學生들과 함께 脫營을 圖謀할 때 解放을 맞이했어요.”

    이즈음 그는 兄의 影響을 받아 社會主義者가 돼 있었다. 解放空間에서 左翼 映畫界의 中心人物이던 정춘재는 1946年 社會主義 革命 雰圍氣가 枯凋하던 北韓으로 건너갔다. 그는 北韓에 到着한 直後 동생을 平壤으로 불러올렸다.

    “어머니가 나를 끔찍이 사랑했어요. 며칠 동안 北韓에 다녀오겠다고 어머니에게 말씀 드리고 38線을 넘었죠.”

    그렇게 祖國을 떠난 그는 平壤音大 敎授를 맡았다. 北韓 音樂界의 中心에서 乘勝長驅하는 듯했으나,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系 肅淸이 이뤄지면서 그의 立地가 多少 좁아졌다. 1953年 그는 現在 北韓이 가장 자랑하는 音樂家 김원균과 함께 社會主義 宗主國의 首都이면서 社會主義圈 文化藝術의 中心地이던 모스크바로 留學을 떠났다. 차이코프스키 音樂스쿨에 함께 入學한 김원균은 北韓에서 英雄으로 불린다. ‘김일성將軍의 노래’를 作曲했으며, 北韓 最高 音大(김원균音樂大學)에 自身의 이름을 붙이는 榮譽도 누렸다. 精麤와 김원균은 親舊이자 라이벌이었다고 한다.

    “김원균은 別名이 ‘使道’였어요. 留學時節 함께 어울려 다녔죠. 우리의 運命이 갈린 것은 北韓 留學生이 1957年 모스크바에서 벌인 김일성 偶像化 反對 示威 때문이었어요. 祖國 獨立을 苦悶하는 過程에서 社會主義者가 됐지만, 나는 스탈린주의는 옳지 않다고 여겼어요.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가 執權하면서 蘇聯에서 스탈린 格下 運動이 벌어졌습니다. 그 過程에서 北韓의 김일성 偶像化 行態에 對한 批判的 輿論이 모스크바 留學生 사이에서 폭넓게 擴散했죠. 勿論 나도 偶像化 反對 움직임에 同參했고요.”

    1956年부터 北韓에서는 김일성 主導로 反宗派 鬪爭을 推進했다. 남로당系에 이어 蘇聯派, 沿岸波를 肅淸하면서 蘇聯 留學生에 對해서도 史上 檢閱을 했다. 精麤를 비롯한 一部 留學生은 ‘反宗派 鬪爭은 김일성 偶像化로 가는 길이며, 그것은 스탈린주의의 偶像崇拜와 다를 게 없다’고 結論지었다. 그러곤 김일성 偶像崇拜 反對 示威를 組織했다. 1957年 이뤄진 反(反)김일성 示威의 主動者가 바로 情추다. 北韓 當局은 그를 逮捕하라는 命令을 내렸고, 그는 逃亡者 生活을 始作했다. 北韓 當局은 모스크바 留學生 全員을 北韓으로 召喚했다. 親舊이자 라이벌이던 김원균度 이때 平壤으로 되돌아갔다. 김원균은 反김일성 示威에 加擔하지 않았고, 歸國 後 北韓 音樂界를 主導하면서 北韓에서 最高 榮譽로 여기는 ‘김일성 勳章’을 받았다. 정의롭지 못한 權力에 抵抗한 藝術家는 不遇했고, 權力 품에 안긴 藝術家는 榮譽를 누린 것이다. 北韓 當局은 蘇聯 政府에 精麤를 逮捕해 送還하라고 要求했으나 蘇聯 當局은 折衷案을 提示했다. 蘇聯派 肅淸으로 當時 北韓-蘇聯 關係는 哽塞해 있었다. 蘇聯 政府는 精麤를 北韓에 送還하는 代身 알마티로 流配를 보냈다.

    “數日間의 汽車 旅行 끝에 톈산 아래 都市, 아는 사람이 單 한 名도 없는 알마티에 到着했어요. 異邦人으로서의 삶은 그렇게 始作됐습니다.”

    强制移住 交響曲 ‘1937年 9月 11日 스탈린’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筆者와 鄭追加 對話하고 있다.

    알마티로 居處를 옮기기 前 逃亡者로 살면서 그는 차이코프스키 音樂스쿨을 卒業했다. 그의 才能을 아낀 敎授들의 配慮로 卒業狀을 받았다. 卒業作品인 ‘曺國’은 學校 歷史上 처음으로 滿點을 받았다. 指導敎授는 蘇聯에서 차이코프스키의 3代 弟子로 불렸다. 그는 ‘4代 弟子’라는 稱號를 얻었다. 蘇聯 政府도 그의 才能을 認定했다. 蘇聯 當局이 1961年 盛大하게 主催한 ‘가가린 快擧 祝賀 公演’에서 演奏된 ‘뗏木의 노래’가 그의 作品이다. 유리 가가린은 人類 歷史上 最初로 宇宙飛行에 成功한 宇宙人이다.

    그는 알마티로 追放돼서도 民族魂을 잊지 않았다. 1937年 스탈린의 强制移住 政策으로 沿海州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荒蕪地로 밀려온 高麗人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에게서 口傳 歌謠를 採譜하는 일에 10年 동안 情熱을 쏟아 부었다.

    “高麗人이 일하는 農場에 찾아가 그들이 부르는 傳來民謠, 勞動歌謠를 1000曲 넘게 採譜했어요. 失鄕의 아픔, 조국에게 버림받은 아픔을 그렇게 달랬습니다.”

    그는 採譜한 音樂을 ‘蘇聯의 高麗歌謠’라는 이름으로 集大成해 世上에 내놓았다. 그러곤 스탈린에 依한 高麗人 强制移住의 슬픈 歷史를 담은 交響曲 ‘1937年 9月 11日 스탈린’을 完成했다.

    1991年 그는 北韓 民主化를 實現하고, 統一祖國을 建設하는 데 一助하겠다는 마음으로 救國戰線에 參與했다. 救國戰線은 蘇聯과 東유럽 社會主義圈이 崩壞한 1980年代 末, 1990年代 初의 歷史的 背景에서 孕胎한 組織. 1957年 北韓을 脫出해 日本에 定着한 남로당 마지막 責任者 박갑동과 鄭追加 主導해 만들었다. 救國戰線은 北方政策을 推進하던 노태우 政府와도 線이 닿았다. 그런 因緣으로 그는 故鄕인 光州를 訪問해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歸鄕人事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老亡命客이 主軸이던 救國戰線 活動은 以後 遲遲不進했다.

    2009年 3月 알마티에서 ‘精麤 誕生 記念 音樂會’가 열렸다. 統一祖國을 그리면서 그가 作曲한 ‘내 祖國’李 演奏됐다. 分斷된 두 個의 祖國에게 버림받은 그는 統一祖國 建設을 懇切히 祈願한다.

    “統一祖國의 愛國歌가 되길 念願하면서 만든 曲이에요. 音樂家로서 살아온 人生의 마지막 作品이죠.”

    그의 祖國, 그러니까 韓國과 北韓에선 ‘精麤의 音樂’을 모른다. 異邦人으로 半世紀 넘게 살아온 카자흐스탄에서는 그를 기리는 音樂會가 이따금 열린다. 슬프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카자흐스탄 音樂界가 尊敬하는 巨匠이다. 그들은 ‘검은 머리의 차이코프스키, 精麤’를 사랑한다. 카자흐스탄 音樂 敎科書에 실린 作品이 60曲에 達한다.

    ‘검은 머리 차이코프스키’로 사랑받아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에게 統一祖國 建設이 可能하겠는지를 물었다. 老音樂家의 얼굴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北韓은 社會主義 國家가 아닌 김일성, 김정일 王朝國家日 뿐이에요. 스탈린주의的 偶像崇拜國家죠. 하루빨리 民主化를 實現해야 해요. 改革, 開放과 民主化가 이뤄져야 統一祖國을 建設할 수 있습니다. 統一祖國 建設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그의 삶은 波瀾萬丈하다. 植民地 朝鮮의 少年으로 살다가 社會主義者가 됐고, 革命國家 建設에 一助하겠다면서 38線을 넘었으며, 김일성 偶像化에 反對하다 苦難의 삶을 끌어안았다. 그가 作曲한 音樂은 그를 닮았다. 韓國 近現代史의 수많은 苦痛과 試鍊, 統一祖國 建設에 對한 所望이 담겨 있다.

    ‘曺國’ ‘1937年 9月 11日 스탈린’ ‘내 祖國’은 언제쯤 서울과 平壤에서 울려 퍼질 수 있을까.

    톈산 아래 터 잡은 都市 알마티에 머무르는 동안 民泊집 高麗人 아주머니는 食事 때마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온 韓國飮食’을 내놓았다. 서울의 食堂에서 내는 飮食과는 格이 달랐다. 서구화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韓國飮食 말이다. 그래선지 정추도 一行이 묶은 民泊집에서만 食事하려고 했다. 精麤는 南北이 잃어버린, 剝製가 돼버린 天才다. 그의 交響曲 ‘曺國’과 ‘1937年 9月 11日 스탈린’, 그리고 그가 統一祖國의 愛國歌가 되기를 바라면서 作曲한 ‘내 祖國’李 하루빨리 서울에서 공연되기를 期待한다. 世宗文化會館에서 그의 音樂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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