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嫌惡의 끝판, 南아共 아파르트헤이트와 르완다 內戰|週刊東亞

週刊東亞 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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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앤씨財團 嫌惡 컨퍼런스 地上中繼

嫌惡의 끝판, 南아共 아파르트헤이트와 르완다 內戰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0-10-21 15: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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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한건수 강원대학교 文化人類學科 敎授
    한건수 교수.

    한건수 敎授.

    人類 歷史에서 人種主義가 만든 嫌惡는 커다란 悲劇을 만들어냅니다. 오늘 말씀드릴 事例는 아프리카 두 나라에서 벌어진 人種主義와 民族虐殺에 關한 것입니다.

    ●正義의 回復이 무엇인지 보여준 南아共

    아프리카 大陸에는 黑人들만 살고 있었던 게 아니죠. 植民支配 過程에서 白人들도 定着했고, 유럽의 帝國이 植民統治에 必要한 人力을 擴充하면서 아시아人 特히 많은 印度人들이 官吏나 商人으로 大擧 進出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처음 到着한 유럽人은 네덜란드系 移住民들이었습니다. 네덜란드系 移民者들은 自身들의 國家도 만들고 言語를 비롯한 文化體系를 만들어 냅니다, 아프리카너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죠. 英國이 이 地域의 네덜란드 移民者를 統合하고 植民化하면서 少數 白人들이 絶對 多數인 黑人들을 統治합니다. 南아메리카 共和國의 白人 政權은 白人의 支配權을 永遠히 維持하기 위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政策을 導入합니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人種이 各自 살면서 서로의 文化를 保存하자는 名分을 내세웠지만 實質的으로는 極甚한 人種差別이었습니다. 

    살기 좋은 땅은 모두 白人들이 차지하고 白人들 居住地에서 黑人들을 몰아냈으니까요. 그러면서 白人 政權은 支配體制에 抵抗했던 黑人 指導者들을 暗殺하거나 投獄했습니다. 이 過程에서 많은 사람들이 犧牲되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政策에 抵抗했던 代表的인 사람이 바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입니다. 그는 白人 政權에 對抗하다 27年間 監獄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釋放되어 1994年 直接選擧를 통해 大統領에 當選됩니다. 

    넬슨 만델라는 大統領에 執權한 後 白人들에 對한 復讐나 報復이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前 構成員들이 함께 새로운 共同體를 만들어나가자고 主張합니다. 그 結果가 ‘眞實과 和解 委員會’입니다. 1996年부터 委員會를 構成하고 노벨平和賞을 受賞한 黑人 人權運動家였던 투투(Desmond Tutu) 主敎를 委員長으로 任命합니다. 투투 主敎는 委員會가 追求해야할 基本 原則을 宣言하면서 ‘回復的 正義(restorative justice)’ 槪念을 말합니다. 少數인 白人은 多數인 黑人이 執權하면 自身들은 復讐의 對象이 될 거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는 새로운 共同體를 만드는 데 集中했고 이를 위한 社會的 合意를 回復的 正義에 둔 것입니다. 人種差別 過程에서 사라진 定義는 共同體가 回復될 수 있는 正義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單純히 加害者를 處罰하고 被害者들 世上을 만드는 것으로는 共同體를 復元할 수 없다고 본 거죠. 



    ‘眞實과 和解 委員會’는 세 가지 核心 段階를 거칩니다. 첫째, 告白입니다. 過去 白人政權의 앞잡이로서 黑人들을 彈壓했던 祕密情報員이나 人權彈壓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自己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犯罪를 告白하기만 하면 刑事 處罰을 免除해 준 것이죠. 處罰보다는 歷史的 眞實糾明이 더 重要하다고 본 겁니다. 그리고 眞實을 告白한 사람을 處罰하지 않고 容恕했습니다. 이게 두 番째 段階였습니다. 세 番째는 賠償이었습니다. 加害者들이 最大限 自己 힘으로 被害者에게 賠償하도록 한 거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試圖는 全 世界에 많은 影響을 주었습니다. 캐나다는 過去 白人들이 定着하면서 原住民들에게 저질렀던 罪惡을 糾明하는 委員會를 運營했고 우리도 光州 民主化抗爭 以後에 眞實과 和解 委員會를 運營했습니다. 그러나 그 結果는 남아공이 보여주었던 告白과 容恕와 賠償으로 이루어지는 委員會의 成果를 成就하지 못 한 것 같습니다.

    ●悲劇的인 虐殺을 統合의 契機로 만든 르완다

    두 番째 事例는 르완다라고 하는 東아프리카 작은 國家에 살고 있는 두 民族 투치(Tutsi)와 후투(Hutu)에 對한 이야기입니다. 이 두 民族은 오랫동안 함께 섞여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勿論 外貌上 差異도 있었습니다. 身體的으로 투치족이 좀 더 크고 皮膚色이 軟하며 조금 더 마른 體型입니다. 反面에 후투족은 典型的인 黑人 모습입니다. 生計 樣式에 있어서도 투치는 主로 牧畜을 했고 후투는 農事를 지었습니다. 

    두 民族은 別途의 區別된 集團正體性을 갖고 있지 않은 狀態로 서로 交流하며 살다가 15世紀 以後에 單一 王國을 만듭니다. 王國은 初期부터 투치족이 統治 勢力을 차지합니다. 그러다 18世紀 以後 유럽의 植民地體制로 編入됩니다. 

    1884年 베를린에서는 유럽 國家들이 아프리카를 分割하여 統治하는 宏壯히 重要한 會議가 열리는데 1885年 年初까지 이어진 이 會議에서 르완다는 獨逸 支配를 받게 됩니다. 

    獨逸은 처음에는 르완다의 制度를 그대로 존속시키며 統治했지만 1次 大戰에서 獨逸이 敗戰하자 벨기에가 르완다와 부룬디 地域을 차지하게 됩니다. 벨기에 植民政府는 투치와 후투로 나뉘어 살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集團正體性을 附與하기 始作합니다. 투치족을 다른 아프리카人들보다 조금 더 優秀한 사람들이라고 評價했습니다. 그러면서 에티오피아에서 넘어온 유럽人들이 過去에 믿었던 聖經에 나오는 함族의 後孫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1920年부터 벨기에는 후투와 투치 族에게 身分證을 發給해 투치인지 후투인지를 明記하게 하는 所謂 西歐式 民族槪念을 附與합니다. 그 結果 少數의 투치 對 多數의 후투라고 하는 民族 集團이 公式的으로 登場하고 두 集團 모두 이러한 正體性을 活用하기 始作합니다. 

    벨기에 政府는 더 나아가 이 두 集團을 自身들의 便利대로 統治에 利用하기 始作합니다. 벨기에는 初期에 투치 中心 統治를 해 나가다 2次 大戰이 끝나면서 獨立을 向한 아프리카人들 要求가 늘어나자 갑자기 多數인 후투족 便을 들기 始作합니다. 植民統治의 긴 歷史 속에서 두 集團의 集團正體性을 强化시켜 分離시키고 必要에 따라 두 集團을 統治에 交代로 活用했던 것입니다. 結局은 후투와 투치 間에 怨恨과 競爭心이 커져 갑니다. 

    이 過程에서 투치족 相當數가 르완다를 떠났습니다. 1960年代 以後에 1990年代까지 30餘 年間 相當數 투치人들은 隣接國家에서 難民으로 生活했습니다. 많은 젊은 世代들은 르완다를 가보지도 못 한 狀態에서 難民 캠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후투족들은 이들이 돌아오는 것을 막고 오로지 르완다를 自身들만의 國家로 발전시키려는 政策을 펼쳤습니다. 

    이 過程에서 隣接한 아프리카 國家나 유럽의 舊 植民支配國의 利害關係가 複雜하게 連結됩니다. 프랑스는 후투족을 支持했고 우간다를 비롯한 隣接國은 투치족을 志願했습니다. 及其也 르완다는 美國, 프랑스를 비롯한 先進國과 이웃하고 있는 아프리카 國家의 利害關係에 따라 內戰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1994年 悲劇的인 事件이 始作됩니다. 

    르완다와 隣接國의 紛爭을 終熄하고 平和協定을 推進하기 위한 國際社會의 努力에 同參했던 르완다와 부룬디의 두 頂上이 暗殺된 것입니다. 두 頂上은 平和協定 會議를 마치고 함께 專用機로 歸國하다가 키갈리 空港 隣近에서 미사일 攻擊을 받고 死亡합니다. 

    이 事件의 背後에 투치족이 있다는 후투족 政治人의 煽動은 르완다 情勢를 混亂에 빠트립니다. 興奮한 후투족은 100日 동안 투치족 人口의 3分의 2에 該當하는 80萬 名을 虐殺합니다. 人類 歷史上 가장 짧은 期間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虐殺된 事件입니다. 虐殺 過程은 너무나 끔찍하고 悲劇的이었습니다. 함께 살던 이웃 후투족이 갑자기 民族이 다르다는 理由, 투치족 이웃을 죽였고, 虐殺을 避해 敎會와 聖堂으로 避身한 사람들을 追跡해서 攻擊했습니다. 聖堂과 敎會에서도 民族正體性에 따라 保護받지 못한 투치족 犧牲者가 發生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悲劇 앞에서 國際社會는 介入을 躊躇했습니다. 르완다에는 遺傳도 없고 所謂 世界 經濟에 影響을 미칠 만한 威脅 要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自國의 利害關係를 앞세우는 國際社會의 冷靜함과 無責任함이 드러나는 瞬間이었습니다. 

    투치족에 對한 大虐殺은 隣接 國家에 避身해 있던 투치족 武裝 勢力 特히 르완다愛國戰線이 르완다로 進擊하여 首都 키갈리를 占領하면서 멈춥니다. 투치족 武裝勢力에 依해 占領된 르완다는 이제 거꾸로 후투족들의 大量 避亂으로 이어집니다. 투치족을 虐殺한 후투족이 報復을 避해 도망치기 始作한 것입니다. 또 다른 大 虐殺이 進行될 危機에서 투치족 武裝勢力은 政府를 掌握한 以後 후투족에 對한 集團 報復을 하지 않았습니다. 

    代身 解決策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眞實과 和解 委員會가 取했던 政策을 이어받습니다. 虐殺에 責任이 있는 主要 犯罪人들은 國際司法裁判所(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에서 審判을 받았지만, 르완다 國內의 수많은 關聯者들은 르완다의 傳統 慣習 法廷(街차차 法廷)에 回附되었습니다. 慣習 法廷은 事案과 規模에 따라 다양하게 構成되었는데, 마을 單位에서의 慣習 法廷은 地域의 元老가 裁判을 主宰했습니다. 裁判에서 主眼點을 둔 것은 加害者 處罰이 아니었습니다. 共同體의 回復이었습니다. 

    그리고 南아共에서와 마찬가지로 法廷에서 加害者에게 要求했던 것은 單 하나. 告白이었습니다. 自身이 저지른 罪를 告白하면 刑事 處罰하지 않는 代身 被害者에게 本人이 할 수 있는 最大限의 賠償을 하라고 判決합니다. 農事를 돕거나 自己가 키운 家畜 一部를 나누는 겁니다. 마을 單位에서 加害者와 被害者가 함께 살아가는 努力을 하자는 것이 르완다가 選擇한 解決 方法이었습니다. 

    이제 르완다에서는 더 以上 후투와 투치를 區別하지 않으려 합니다. 모두가 ‘르완다人’이라는 國民正體性을 强化하고 있습니다. 虐殺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한 다양한 努力도 하고 있습니가. 犧牲者에 對한 追慕와 歷史의 敎訓을 잊지 않으려는 다양한 努力이 追慕館, 記念館, 博物館으로 表現되고 있습니다. 

    以後 르완다는 經濟成長 面에서도 오늘날 아프리카 國家 中에서 情報通信技術을 가장 强力하게 導入한 國家가 됐고 國家 公務員이나 政府의 腐敗 問題를 가장 熱心히 解決한 國家 中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國家 中에서 政府 淸廉度가 4位에 該當한다는 評價도 받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虐殺 以後에 르완다 女性들의 政治 參與 比重이 宏壯히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2010年代 總選에서 當選된 女性 議員 比重이 全體 議員의 60% 以上을 차지합니다. 

    이는 虐殺로 因해 男性 人口가 急減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虐殺 過程에서 많은 女性들이 강간당하는 等 女性들이 恥辱을 當했기 때문에 女性權利 伸張을 위한 努力의 結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르완다는 悲劇的인 虐殺을 통해 分裂되는 것이 아니라 傷處를 싸매고 共同體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摸索했습니다.

    ●集團正體性의 肯定性

    오늘 저는 集團正體性이라고 하는 것과 그 集團正體性이 만들어낸 嫌惡의 問題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人種差別과 르완다의 民族虐殺을 事例로 說明드렸습니다. 

    集團正體性은 否定的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規定함으로써, 集團에 對한 所屬感과 忠誠, 熱情을 갖게 합니다. 이러한 所屬感과 熱情은 人類 文化 發展에 많은 寄與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熱情이 反對로 相對를 嫌惡하고 差別하고 彈壓하고 甚至於 虐殺하기까지 합니다.

    集團正體性이라는 것은 그 自體가 惡한 것도 아니고 善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日常에서 어떻게 認識하고 受容하고 活用하는가의 問題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質問은 持續的으로 던져야 될 質問입니다. 그에 對한 明確한 省察이 없으면 우리라는 이름으로 相對方을 對象化하고 差別하고 彈壓하고 無視할 수 있습니다. 

    民族이라는 正體性도 마찬가지입니다. 民族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絶對的이고 固有하고 本質的이고 變化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點을 思考하는 것이 重要합니다. 그래야 民族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民族을 虐殺하는 愚를 犯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集團正體性이 人類 歷史와 發展에 肯定的으로 寄與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維持하고 발전시키고 새로운 環境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悠然한 思考가 必要한 때입니다. 感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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