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熱情’으로 두드리니 希望의 길 열리더라|주간동아

週刊東亞 929

..

‘熱情’으로 두드리니 希望의 길 열리더라

  • 송화선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14-03-17 09:33: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박시형 쌤앤파커스 代表

    “主人으로 사는 사람은 環境이나 남 탓하지 않는다”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아프니까 靑春이다’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出版社 쌤앤파커스가 펴낸 베스트셀러들이다. 이 題目들에는 工巧롭게도 企劃者 박시형(51) 쌤앤파커스 代表의 삶이 오롯이 담겼다. 그의 靑春은 아팠다. 또래보다 늦은 出發에 괴로워했고, 때로는 挫折感에 모든 걸 抛棄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긴 苦難의 時間 동안 멈춰서 바라본 것들이 오늘의 朴 代表를 만들었다.

    “책임져야 할 일이 끝없이 쏟아졌어요. 얼마쯤 지나면 整理되겠지, 그러고 나면 내 人生이 달라지겠지 하는 期待조차 할 수 없었죠.”



    朴 代表가 젊은 時節을 떠올리며 한 얘기다. 苦難의 始作은 高等學生 時節, 아버지 事業이 沒落하면서부터였다. 맏딸인 그에게 家族 生計가 떠맡겨졌다. 카프카를 사랑하던 文學少女는 一般 大學 進學을 抛棄하고 就業할 수밖에 없었다. 以後 동생들 공부시키고, 結婚시키고, 편찮은 父母 病구완하며 歲月을 보냈다. 건국대 夜間部 獨文科에 들어가 時間을 쪼개가며 工夫했지만 삶의 突破口는 열리지 않았다.

    “出版企劃者가 되고 싶은데 길이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出版社가 얼마 안 됐거든요. 좋은 大學 나온 분들끼리 先後輩 因緣으로 일하는 곳이 大部分이라 夜間臺를 卒業한 저는 들어갈 方法이 없었죠.”

    生計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이 建物 저 建物 다니며 多寶塔, 거북船 따위 模造 記念品을 파는 일도 했다. 憤痛 터지는 瞬間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抑鬱하기도 했다. 힘겨운 나날을 견디게 한 건 ‘내가 이렇게 살다 끝날 사람은 아니다’라는 自矜心이었다. 朴 代表는 “밑도 끝도 없이 나를 믿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때 機會가 찾아왔다. 製品을 販賣하려고 다니다 偶然히 示唆年鑑을 내는 出版社 事務室에 들어서게 된 것. 社長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마침 그 會社에 하나뿐이던 職員이 막 退社한 참이었다.

    “一般的인 出版社는 아니었지만 놓칠 수 없는 機會였어요. 그 자리에서 社長을 說得해 저를 採用하라고 했죠.”

    朴 代表는 當時가 떠오르는 듯 微笑를 지었다. 每瞬間 切迫했고, 더 나은 삶에 對한 꿈과 熱情이 넘치던 時節이었다. 한동안은 年鑑 만드는 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領域을 넓혀나갔다. 社長을 說得해 單行本 出版을 始作했고, 企劃부터 出刊까지 全 過程을 도맡았다. 그의 손끝에서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人生이 너무 짧다’ 等의 밀리언셀러와 우리나라 經濟經營 專門書 市場을 開拓한 ‘經營 硏究 시리즈’가 태어났다. 朴 代表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서울 게 없다. 失敗를 두려워하지 않고 願하는 일을 하니 世上이 反應해왔다”고 回顧했다.

    오랜 時間 쉽지 않은 삶을 살아오며 차곡차곡 쌓은 經驗도 以後 ‘새로운 冊’을 企劃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安定的인 삶을 사는 사람은 體驗 幅이 좁을 수밖에 없다. 나는 힘든 일을 겪을 때면 속으로 ‘이 苦痛이 내 삶에 資産이 될 것’이라 여겼고, 正말 그랬다”고 했다. 오늘 힘겨운 삶의 고비를 지나는 사람에게 그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바로 이것이다. “只今의 아픔을 所重히 여기라”는 것, 그리고 根性과 熱情, 自信感으로 새로운 길을 開拓하라는 것. “自身의 삶을 環境에 맡겨두고 남 탓만 하는 건 主人으로서의 態度가 아니다”라는 게 朴 代表 생각이다.

    박준영 辯護士

    “事故뭉치 아이들 辯護하며 非主流 콤플렉스 克服”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아이들이 抑鬱한 獄살이에 對해 金錢的으로나마 補償받아 多幸입니다. 하지만 事件이 끝난 건 아니에요. 國家와 搜査 檢事를 相對로 낸 損害賠償 請求訴訟이 아직 進行되고 있거든요.”

    박준영(40) 辯護士의 表情은 決然했다. 그는 ‘이 事件’을 契機로 다시는 國家機關이 힘없는 이에게 罪를 떠넘기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 事件’은 2007年 京畿 水原에서 發生한 露宿少女 殺害事件을 말한다. 한 高等學校 花壇에서 少女 死體가 發見되면서 事件이 始作됐다. 警察은 곧 知的障礙人 2名을 少女 殺害 嫌疑로 逮捕했고, 犯行 一切를 自白받았다. 이들에게는 各各 懲役 5年과 罰金 200萬 원이 宣告됐다. 이듬해 10代 靑少年 4名이 또 이 事件 犯人으로 拘束됐다. 朴 辯護士는 이들의 辯護를 맡았다. 아이들이 따로 辯護士를 選任하지 않자 水原地方法院이 그에게 國選辯護를 맡긴 것이다.

    알고 보니 ‘犯人’이라 불리던 이들은 家出을 數次例 反復한 이른바 ‘非行靑少年’이었다. 그들의 釋放에 家族조차 關心이 없었다. 警察 搜査 過程에서 犯行 事實에 對해 自白도 한 狀態였다. 形式的으로 辯護人 구실을 할 뿐, 딱히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들을 돌보던 京畿道 靑少年相談志願센터 敎師들이 朴 辯護士를 찾아왔다. “아이들이 그랬을 理 없다”는 것이었다. 接見한 아이들도 그에게 “사람은 죽이지 않았다”고 呼訴했다. 警察, 檢察에서 ‘絶對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뭔가 釋然치 않다’는 생각이 들기 始作했다. 1審에서 이들에게 懲役 2~4年이 宣告되자 朴 辯護士는 卽刻 抗訴했다. 그리고 直接 搜査記錄을 뒤지기 始作했다. 事件 現場을 探問하고, 檢察의 映像錄畫물도 閱覽했다. 그 過程에서 搜査上 問題點이 드러났다.

    “搜査記錄을 보면 아이들이 嫌疑 內容을 强하게 否認해요. 그런데 정작 調書에는 그 內容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더군요. 映像錄畫물에는 搜査檢事가 ‘共犯이 모두 自白했다. 너도 自白하면 執行猶豫를 받을 수 있다’며 懷柔하는 모습이 記錄돼 있고요.”

    搜査官이 事件 情況을 알려주고 答辯을 誘導하는 等 짜깁기 搜査를 한 情況도 드러났다. 結局 아이들은 긴 裁判 끝에 2009年 大法院에서 無罪 判決을 받았다. 最近에는 나라로부터 拘禁 期間에 對한 刑事補償金度 받았다. 朴 辯護士가 “金錢的으로나마 補償을 받아 多幸”이라고 한 건 이 때문이다. 朴 辯護士가 事件을 맡기 前 이미 兄이 確定됐던 知的障礙人 2名은 再審을 통해 無罪가 됐다. 朴 辯護士는 “拷問 같은 國家機關에 依한 犯罪가 아니라 一般 刑事事件에서 再審이 이뤄지고, 被告人의 無罪가 確定된 건 이番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事件을 進行하는 동안 負擔이 컸다. ‘一介’ 辯護士가, 그것도 國選 事件을 主로 하는 個人 辯護士가 檢察과 法院을 向해 “잘못을 認定하라”고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世上 天地에 믿을 곳 하나 없는 이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 마음을 外面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受任料조차 받지 않고 이 일에 매달린 데는 남다른 삶의 軌跡도 影響을 미쳤다.

    朴 辯護士의 故鄕은 全南 莞島郡 蘆花島. 木浦에서도 배를 타고 5~6時間은 가야 닿는 작은 섬마을이다. 그는 이곳에서 疾風怒濤의 靑少年期를 보냈다. 中學生 時節 겪은 어머니의 죽음과 權威的인 아버지에 對한 反撥心 때문이었다. 無時로 家出했고, 停學과 懲戒도 자주 받았다. 自轉車 事故를 낸 뒤 被害者와 合意하지 못해 拘束된 적도 있다. 3兄弟 맏이인 그에게 아버지는 “제발 高等學校만 마쳐달라”고 付託했다. 老化綜合高를 卒業함으로써 아버지 뜻을 이뤄드린 뒤 그는 故鄕을 떠나 世上을 注油했다. 木浦大를 1年 다니다 自退하고, 돈을 벌었다. 막勞動부터 養魚場 日까지 主로 몸 쓰는 일을 했다.

    그가 불쑥 司法試驗에 挑戰하게 된 건 軍隊 選任이 考試 準備生이었기 때문이다. 除隊 後 選任이 考試 書籍을 사러 서울 신림동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無酌定 따라나섰다. 그는 “돌아보면 自尊心이 傷해서였던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前까지는 저도 工夫를 제법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瞬間 돌아보니 形便없이 살고 있는 거예요. ‘親舊들은 좋은 大學 다니는데 나는 뭔가,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동안 모은 돈으로 月 9萬 원짜리 考試院 房을 얻고, 削髮한 채 홀로 工夫를 始作했다. 1997年 7月의 일이다. 論理的이고 精巧한 法 世界는 꽤 흥미로웠다. 工夫의 재미를 처음 알았다. 以後 2002年 司法試驗에 合格할 때까지 그는 스스로 ‘이 以上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工夫에 매달렸다. 그사이 아버지가 莫大한 빚을 남기고 世上을 떠나 더 切迫해졌던 面도 있다.

    마침내 司法試驗에 合格했을 때 그는 새로운 世上이 열릴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많지 않았다. 朴 辯護士에 따르면 ‘綜合高 卒業에 地方大 中退 學歷, 判檢事 經歷조차 없는 辯護士’는 競爭力이 없었기 때문이다. 結婚市場에서도, 就業市場에서도 番番이 높은 壁에 가로막혔다. 突破口를 마련하려고 마라톤을 完走하며 ‘熱情과 體力’을 어필했지만, 如前히 그를 뽑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結局 緣故도 없는 水原에 자리 잡고 國選辯護를 始作했다.

    “그때 露宿少女 事件을 만났어요. 辯護士로서 살아남는 데만 精神이 팔려 正義에 對한 생각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생각도 못했는데, 어린 時節 저 같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새로운 눈을 뜨게 됐죠.”

    國家機關을 相對로 한 긴 싸움에서 勝利하면서 法律家로서 自信感도 갖게 됐다. 그래서 그는 學閥에도, 스펙에도 더는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저는 如前히 英語를 잘 못하고 미적分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分野를 찾았고, 그 일을 熱心히 하고 싶어졌어요.”

    김홍국 夏林그룹 會長

    “學閥과 스펙보다 眞짜 사랑하는 일 熱情 쏟아”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열한 살 때 外할머니가 병아리 열 마리를 膳物로 주셨어요. 잘 키워서 한 마리에 250원씩 總 2500원 받고 팔았죠. 그 돈으로 7원짜리 병아리를 100마리 샀는데, 그러고도 1800원이 남더군요.”

    김홍국(57) 夏林그룹 會長 얘기다. 닭은 繼續 잘 자랐고, 돈도 쑥쑥 불어났다. 初等學校 6學年 때는 돼지 18마리를 살 程度가 됐다. 일손이 달려 사람까지 썼다. 그렇게 始作한 事業이 이제는 年賣出 4兆5000億 원에 이르는 中堅企業으로 成長했다. 金 會長은 “製造業 分野에서 選對 도움 없이 이 程度 會社를 일군 사람은 내가 唯一할 것”이라며 “어릴 때부터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일에만 集中한 結果”라고 했다.

    돌아보면 처음엔 가볍게 始作한 일이었다. 그러나 家畜 키우는 재미에 빠지면서 工夫는 漸漸 뒷전으로 밀렸다. 새벽 5時에 일어나 닭과 돼지에게 아침밥을 챙겨주고 學校에 갔고, 돌아와서도 밤늦도록 動物을 돌봤다. 中學生 무렵부터 ‘養鷄와 養豚을 내 길로 삼자’고 眞摯하게 마음먹었다. 똑똑한 아들을 敎育者나 公務院으로 키우려 했던 父母가 펄쩍 뛰며 反對했지만, 家出까지 敢行한 끝에 이리農高에 進學할 수 있었다.

    “우리 兄弟가 六男妹인데, 오죽하면 어머니가 나머지 다섯 키우는 것보다 너 하나 키우는 게 더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多幸히 事業은 乘勝長驅했다. 高3 때는 아예 事業者登錄을 냈다. 軍 全體에 서너 臺 남짓 있던 250cc 오토바이를 타고 學校에 다녔고, 쉬는 時間이면 40~50代 아저씨들이 決裁를 받으려고 敎室 門 앞까지 찾아오곤 했다. 以後 몇 次例 危機도 겪었지만, 現場에서 익힌 畜産 技術과 事業 手腕은 每番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社會的으로 名譽도 얻었다. 1993年 新韓國人, 99年 新知識人에 選定됐고 2006年 金塔産業勳章을 받았다. 大統領人事諮問 委員, 大統領 直屬 國家競爭力强化委員會 民間委員으로도 活動했다.

    “事業이 成功한 뒤에도 어머니는 아들이 高卒인 걸 못내 아쉬워하셨어요. 恨을 풀어드리려고 뒤늦게 夜間臺를 卒業하긴 했지만, 굳이 大學에 갈 必要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只今은 서울대를 비롯해 우리나라 有數 名門高와 各種 政府機關에서 제게 講演 要請을 해옵니다. 李明博 政府 出帆 當時 初代 農林水産食品部 長官 提議를 받기도 했고요. 이제는 어머니도 저를 많이 자랑스러워하시죠. 成功의 열쇠는 學閥이나 스펙이 아니라 眞짜 사랑하는 일을 發見하는 熱情, 그리고 最善을 다해 그 일에 沒頭하는 삶의 姿勢에 있는 거예요.”

    최학수 美國 하버드대 醫大 副敎授

    “젊은 날의 오랜 彷徨 目標 定立 트레이닝 過程”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2011年 우리나라 여러 言論에 한 地方大生의 ‘成功 神話’가 報道됐다. 전북대 工大를 卒業한 최학수(39) 氏가 美國 名門 하버드대 醫大 助敎授가 됐다는 消息이었다. ‘네이처’ 等 世界的으로 權威 있는 學術誌에 數次例 論文을 揭載하며 實力을 인정받은 崔 敎授는 그사이 副敎授로 昇進했다. 하버드대 醫大 硏究室에서 癌 治療 物質 硏究에 沒頭하고 있는 그를 電話로 인터뷰했다.

    崔 敎授는 “몇 年 前 韓國에서 나에 對한 報道가 나갈 當時 한창 開發 中인 藥品의 FDA(美國 食品醫藥局) 承認을 앞두고 있었다. 記者들에게 그에 對해 說明하고, 科學者로서의 目標와 앞으로 하고 싶은 硏究 等에 對해서도 얘기했는데 나중에 記事를 보니 그 內容은 다 빠졌더라”며 “‘하버드대 任用’만 浮刻된 걸 보고 아직도 우리 社會는 看板을 가장 重要하게 여기는구나 싶어 씁쓸했다”고 털어놓았다.

    學部 時節에도 ‘看板’ 때문에 씁쓸했던 때가 있었다. 高校 時節 한 番의 選擇으로 永永 未來가 決定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다. 崔 敎授는 “한동안 人生의 目標를 찾지 못해 彷徨했고 삶의 바닥까지 내려갔던 적도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게 學校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내가 眞짜 願하는 걸 發見하지 못했을 뿐이었다”고 回顧했다.

    그의 삶에 變化가 始作된 건 大學 4學年 때, 當時 時間講師였던 강길선 敎授의 授業을 들으면서부터다. 姜 敎授가 紹介한 ‘生體 材料(Bio Material)’라는 學問 分野가 好奇心을 刺戟했고, 처음으로 工夫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以後 軍服務를 마친 그는 그사이 전북대 敎授로 任用된 姜 敎授 硏究室에 大學院生으로 合流했다. 이때부터 그의 삶에 ‘2幕’이 열렸다.

    “그 무렵 한국화학硏究院에 계신 이해방 敎授님도 알게 됐어요. 30年 넘게 오직 硏究에만 邁進한, 正말 참 科學者시죠. 그분을 보면서 삶의 方向을 좀 더 分明히 定하게 됐어요.”

    하지만 未來에 對한 確信은 없었다. 남보다 늦게 始作한 만큼 더 熱心히 實驗하고 硏究했을 뿐이다. 崔 敎授는 “내가 얼마나 不足한지 아니까 暫時도 쉴 수 없었다”고 했다. 碩士課程을 마칠 무렵 비로소 ‘工夫를 繼續해도 되겠다’는 自身이 생겼다. JAIST(日本科學技術원)에서 博士 課程을 밟던 時節, 더욱 工夫에 沒頭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할머니가 癌으로 世上을 떠난 것이다. 崔 敎授는 “親家와 外家 할머니, 할아버지 네 분이 모두 癌으로 돌아가셨다. 꼭 癌 治療劑를 開發해 더는 사람들이 이런 苦痛을 當하지 않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고 했다. 以後 하버드대 醫大에서 博士後 課程을 밟을 때도, 그리고 敎授가 된 只今도 그는 이 目標를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늘 “最善을 다해 달리고 있다”고 한다.

    “돌아보면 어린 時節 彷徨恨 時期가 있어 只今 더 熱心히 달릴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비록 始作이 늦더라도, 언제든 自身의 길을 發見하고 그것을 向해 精進하는 사람에겐 機會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스템이 마련된 社會에서는 오랜 彷徨도 더 좋은 目標를 찾기 爲한 트레이닝 過程이 될 수 있겠죠.”

    그가 바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머지않아 이런 社會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직 답답한 現實 때문에 젊은 날의 自身처럼 彷徨하는 사람이 있다면 中途에 抛棄하지 말고 더 充分히 꿈을 찾아보라 말하고 싶다고 했다. “젊은 時節의 果敢한 投資와 勇氣 있는 選擇, 그리고 그 길을 걷기 위한 努力만이 自身의 未來를 바꿀 수 있다”는 게 崔 敎授의 助言이다.

    전광진 成均館大 敎授

    “夜間代…臺灣 遊學…工夫 즐거움이 나를 키웠다”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전광진(59) 成均館大 문과대 學長(中文科 敎授)은 ‘LBH(Learning By Hint)’라는 學習法을 創案하고 이를 바탕으로 初等學生用 漢字辭典을 開發, 編纂한 人物로 有名하다. 漢字 各各의 뜻을 풀이해 單語를 쉽게 理解하게 해주는 LBH 原理의 힘은 그가 펴낸 ‘初中敎科 속뜻學習 國語辭典’ 곳곳에서 確認할 수 있다. 一般 國語辭典에 ‘늘고 주는 彈力이 있는 螺旋形으로 된 쇠줄’ 程度로 풀이된 ‘龍鬚鐵(龍鬚鐵)’을 이 辭典에서는 ‘龍(龍)의 鬚髥(鬚)처럼 생긴 쇠(鐵)줄’이라고 풀이해놓았다. 負擔(負擔)은 ‘등에 짊어지고(負) 어깨에 멤(擔), 어떠한 義務나 責任을 짐’으로, 葛藤(葛藤)은 ‘칡(葛)덩굴과 藤나무(藤)덩굴처럼 서로 뒤얽힘. 見解, 主張, 理解 等이 뒤엉킨 反目, 不和, 對立, 衝突을 比喩해 이르는 말’로 說明했다.

    前 敎授는 事前 編纂 背景을 “아이들이 初等學校 다닐 때 單語 뜻을 물어봐서 같이 國語辭典을 찾아봤더니 理解하기 어렵게 돼 있더라. 그래서 直接 만들기로 마음먹고 硏究를 始作한 것”이라고 紹介했다.

    “理由(理)를 풀어(解) 알게 해야 眞正한 理解(理解)가 可能하거든요. 1995年 構想을 始作해 2007年 첫 辭典을 펴낸 거죠.”

    別일 아닌 듯 말하지만, 大學에서 學生 가르치고, 硏究하면서 10餘 年間 또 다른 프로젝트에 매달려 마침내 結果物을 完成한 뚝심이 예사롭지 않다. 힘들지 않았느냐는 質問에 그는 “즐거움과 보람이 더 컸다. 工夫는 元來 自己가 좋아서 하는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正말 ‘좋아서’ 工夫를 한 사람이다. 慶北 金泉 가난한 農家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大學 進學 꿈을 접어야 했던 그는 誠意商高를 卒業하고, 1974年 韓國銀行에 入社했다. 하지만 社會生活을 할수록 工夫에 對한 未練이 커졌다. 그것도 顧問을 解釋하고 文化와 歷史를 배우는 ‘眞짜 工夫’가 하고 싶었다.

    “우리 집이 沒落한 兩班家였거든요. 어린 時節 집 壁紙가 全部 高서 冊欌이었어요. 漠然하지만 언젠가는 漢字를 익혀 저 內容을 다 읽어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銀行 業務를 마치고 저녁 時間에 華僑學校를 찾아다니며 中國語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1980年 成均館大 夜間部에 중어中文科가 생겼다는 消息을 듣고 이듬해 學校 門을 두드렸다. 商高 卒業 後 함께 入社한 同期들이 考試工夫를 하거나, 夜間臺에 進學해도 法學이나 經營學 같은 實用的인 分野를 選擇한 것과 比較하면 異例的인 일이었다. 뒤늦게 始作한 工夫에 빠져 85年 安定的인 銀行을 그만두고 臺灣으로 留學을 떠난 것도 平凡한 決定은 아니었다.

    “그때 성균관대에 在學生을 臺灣으로 留學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거든요. 每年 1~2名만 選拔해 競爭率이 20代 1 程度 됐는데, 夜間部 學生인 제가 거기에 合格한 거죠. 工夫를 더할 수 있다는 생각에 無酌定 飛行機에 올랐어요. 銀行에서 退職金 받은 걸로 어떻게든 生計를 꾸릴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죠.”

    美國 作家 맬컴 글래드웰은 著書 ‘다윗과 골리앗’에서 “다윗은 잃을 게 없었다. 그리고 잃을 게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設定한 規則을 비웃을 自由가 있었다”고 했다. 前 敎授가 그랬다. 夜間代 出身이라는 限界, 不確實한 未來에 對한 不安도 뒤늦게 알게 된 工夫 즐거움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는 1991年 마침내 博士學位를 받았고, 이듬해 8月 경희대에 助敎授로 任用됐다. 그때까지 1000萬 원 남짓한 退職金과 時間講師 月給으로 네 食口 生計를 꾸렸지만 幸福했다고 한다.

    “正말 懇切히 願하는 사람에게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아요. 當場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꼭 機會가 옵니다. 只今 人生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를 보고 이 말을 믿으면 좋겠어요. 꿈을 向해 끝까지 달려갈 意志만 있다면 꿈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댓글 0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