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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球 溫暖化가 반가운 ‘커피 農夫’ 박종만|新東亞

地球 溫暖化가 반가운 ‘커피 農夫’ 박종만

“우리 땅 至賤에서 커피나무가 자라는 風景, 想像만 해도 신나지 않나요”

  • 송화선│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10-07-30 1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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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피에 미친 男子가 있다. 京畿道 南楊州市, 風光 좋은 곳에서 우리 흙 우리 물로 커피나무를 기른다. 겨울 한番 날 때마다 열에 아홉이 얼어 죽고, 살아남은 나무의 太半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 “地球가 繼續 따뜻해진다는데, 언젠가는 우리 땅에서 난 커피를 마실 수 있지 않겠어요?” 이 바람 하나로 그는 지난 15年間 죽은 나무를 뽑고 새 씨앗을 뿌려왔다.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박종만(50)氏를 만나러 가는 건 逍風 같았다. 덕소에서 양수리로 이어지는 6番 國道와 양수대교에서 春川까지 뻗은 45番 國道, 두 道路를 연이어 달리는 동안 車窓 밖으로는 줄곧 漢江이 내다보였다. 한여름 소나기에 흠뻑 젖은 山등성이는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津草綠빛으로 반짝였다. 朴氏는 이 길이 닿는 京畿道 남양주시 조안면 北韓江가에서 커피나무를 기르고 있다. 1995年 첫 씨앗을 뿌린 뒤 오늘까지, 15年間 이 일에 매달려왔다.

    한겨울 추위가 매서운 韓國 땅에서 커피 栽培가 可當키나 한 일이냐고, 긴 歲月 수많은 사람이 타이르고 說得했다. 그러나 朴氏는 뜻을 꺾지 않았다. 챙 있는 帽子에 카키色 作業服, 農夫 或은 探險家 같은 차림의 그는 “우리 땅에서 난 커피를 마시고 싶다. 춥고 비가 덜 오는 環境에서도 커피 열매가 열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繼續 實驗中”이라고 했다.

    “에티오피아, 브라질, 美國 커피보다 우리나라 커피가 더 맛있을 것 같지 않아요?”

    理由가 참 담백하다. 내가 마시고 싶어 기른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問題는 커피 栽培가 願한다고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點이다. 커피는 아무 데서나 나지 않는다. 北緯 25℃부터 南緯 25℃사이, 무덥고 濕氣 많은 亞熱帶 氣候權이 커피의 主産地다. 氣溫 分布로 보면 映像 11℃에서 26.5℃사이. 겨울 氣溫이 零下 10℃아래로 떨어지기 일쑤인 우리나라에서는 焉敢生心 꿈꿀 일이 아닌 셈이다.

    굳이 커피를 얻고 싶다면 溫室을 만들어야 한다. 江原道 江陵의 한 農夫는 지난 봄 이 方法으로 커피 40㎏을 收穫했다. 言論 報道에 따르면 大關嶺 기슭에 大型 溫室을 짓고 平均 氣溫 15℃, 濕度 60% 以上의 環境을 維持했다. 그런데 朴氏는 이 길을 따라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우리 氣候, 우리 土壤에서 自生的으로 싹트고 열매 맺는 커피나무라야 眞짜 우리 것이라는 것이다. ‘自然의 法則’도 거스르는 莫無可奈 固執이다.



    映像 6℃에서 자라는 커피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 우리나라가 亞熱帶 氣候가 되기 前엔 不可能한 일 아닐까요.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문득 모든 生命體는 環境에 適應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지 않나, 그걸 利用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프리카에 있는 커피나무를 우리나라에 옮겨 심으면 얼마 못 가 죽을 게 分明하다. 하지만 이 땅에 原産地와 똑같은 環境을 만들어놓고 조금씩 溫度, 濕度를 낮춰가며 適應 訓鍊을 시키면 살아남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게 朴氏의 主張이다. 50年이 걸릴지, 100年이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韓國 環境에 適應한 커피나무가 誕生하지 않을까, 四季節 變化에 익숙해지고, 추운 겨울과 낮은 濕度를 받아들이는 完全히 다른 品種의 韓國型 커피나무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只今 朴氏가 南楊州에서 하고 있는 作業이 바로 이 實驗이다.

    그는 1995年 溫室을 짓고, 世界 15個國에서 커피種子를 들여다가 苗木으로 키웠다. 커피 栽培 技術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하와이 코나 地方의 커피 農場에 就業해 1年間 雜夫로 일하고, 뒤늦게 江原大 園藝學科 大學院에 進學해 專門 知識도 쌓았다. 곧이어 커피나무가 韓國 季節과 溫度, 濕度에 適應하도록 하는 이른바 ‘耐寒性(耐寒性) 訓鍊’을 始作했다. 그는 처음 實驗을 始作하던 날 ‘種子 改良에 成功하면 우리 땅 至賤에서 커피가 열리겠구나’생각하니 가슴이 뛰더라고 했다.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춥고 눈 내리는 두메山골에서도 커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집 마당 한쪽에 커피나무를 심어 直接 收穫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말하는 모습이 幸福해 보인다. 그의 溫室 中 한 곳에 들어가봤다.(박씨는 다양한 實驗을 할 수 있는 溫室 여러 個를 가지고 있다.) 成人 男子의 키만한 커피나무 數十 그루가 줄지어 선 사이로, 에어컨이 찬바람을 내뿜고 있다. 朴氏는 “지난 겨울 映像 6℃의 추위를 이기고 살아남은 녀석들”이라고 자랑했다.

    “元來 커피나무는 映像 15℃아래서는 못 살아요. 하루 이틀 사이에 다 죽지요. 그런데 ‘얘네’는 낮은 溫度에 次次 適應해온 德分에 버티는 겁니다. 아직도 相當數는 죽어나가요. 再昨年 겨울, ‘映像 8℃’ 環境을 實驗했을 때는 나무의 80%가 얼어 죽었죠. 그때 山 나무 中에서 이番 겨울을 또 견딘 건 10% 程度밖에 안 되고요.”

    多幸인 건 그래도 꾸준히 살아남는 나무들이 있다는 事實이다. 最高 記錄을 가진 커피나무는 이미 韓國에서 12番째 겨울을 넘겼다. 그 나무의 子息의 子息의 子息, 그러니까 4世代 커피 씨앗이 올해 싹을 틔웠다.

    1989年, 日本

    朴氏는 “이런 種子 안에는 分明 原産地에선 存在하지 않던 추위 適應 遺傳子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그게 다음 世代로 傳해지고, 漸漸 剛해지면 언젠가는 韓國 땅 어디서나 뿌리내릴 수 있는 커피나무가 生産될 거라는 얘기다. 30代 靑春이 50代가 되기까지, 긴 歲月 커피農事에 매달린 끝에 그가 얻은 것은 이 確信뿐이다. 如前히 커피나무는 溫室 속에 있고, 추위 適應 遺傳子가 언제 完成될지는 期約이 없다. 많은 사람의 생각처럼 커피 耐寒性 訓鍊은 끝내 實現되지 않은 채, 失敗한 프로젝트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왜 이 勝算 없는 實驗을 繼續하는 걸까. 都大體 무슨 理由로 韓國型 커피 生産에 매달리는 걸까. 커피 한 盞을 앞에 두고 朴氏와 마주 앉았다. 實驗用 溫室 바로 옆에 마련된 그의 事務室에서다. 미리 밝혀둘 게 있다. 朴氏는 사람들에게 農夫보다는 ‘館長님’ 或은 ‘社長님’으로 더 많이 알려진 人物이다. 앞서 말한 北漢江邊, 그림 같은 場所에 그의 ‘커피 王國’이 있다. 우리나라 最初의 커피 專門 博物館이자 카페 兼 레스토랑인 ‘왈츠와 닥터만’이다. 그의 溫室과 事務室은 붉은 甓돌로 지어진 이 建物 3層에 있다.

    朴氏가 커피 事業을 始作한 건 1989年. 日本 出張길에 ‘왈츠’라는 커피숍을 본 게 契機가 됐다. 當時 그는 인테리어 會社를 經營하고 있었다. 젊은 事業家의 눈에 日本式 커피하우스가 印象的으로 다가왔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커피를 파는 空間이라면 으레 建物 地下에 자리 잡은 다방밖에 없던 時節이다. 大部分의 사람들은 ‘커피’라는 單語를 들으면 프림과 雪糖을 듬뿍 넣은 인스턴트 커피를 떠올렸다. 그런데 ‘왈츠’는 환하고 깔끔한 室內에서 直接 볶은 原豆커피를 팔고 있었다.

    “그때 日本에서 세 가지를 눈여겨봤어요. 깨끗한 커피숍, 現代式 美容室, 프랜차이즈 빵집. 우리나라의 茶房, 美粧院, 製菓店과 比較하면 確實히 競爭力 있어 보였죠. 뭘 들여오면 가장 잘될까 이리저리 생각했어요.”

    그中에서 커피숍을 하게 된 건 ‘왈츠’ 커피工場에서 받은 强烈한 印象 때문이다. 그곳에서 본 光景이 只今도 눈에 선하다. 50年 넘은 工場 門을 연 瞬間 커피 볶을 때 피어나는 자욱한 煙氣 사이로 짙은 커피香이 코끝을 휘감았다. 잘 볶아진 커피를 꺼내기 直前 搖亂하게 팝핑하는 소리,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서로에게 소리치며 커피 나르는 소리가 오케스트라 演奏처럼 雄壯하게 들렸다. 커피가 그런 건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大部分의 韓國 사람들도 接하지 못한 新世界日 것이 분명했다. “야, 이거 되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커피에 미친 男子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그해 가을 그는 서울 홍대 앞에 原豆커피 專門店 ‘왈츠’를 열었다. 日本 ‘왈츠’와 契約을 맺고 이름과 커피 원두, 抽出 技術 等을 全部 傳受받은 것이다. 競爭者가 없던 터라 事業은 期待 以上으로 잘 풀렸다. 分店을 내고 싶다는 提議가 쏟아졌다.

    “瞬息間에 체인店이 70個까지 늘어났어요. 제가 하던 인테리어 業體에서 가게 工事를 다 맡았으니, 말 그대로 제 人生의 黃金期였죠.”

    加盟店을 管理하느라 全國을 돌아다니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成功은 그만큼 急速度로 사그라지기 始作했다. 大學街를 中心으로 原豆커피 專門店이 늘면서 新鮮함을 넘어서는 ‘內功’이 必要해진 탓이다. 그는 如前히 커피에 對해 아는 게 없었다. 속이 탔다.

    ▼ 必要에 依해 커피 工夫를 始作하셨겠군요.

    “糊口之策이었죠. 아무리 찾아봐도 커피를 가르쳐주는 곳이 없어서 日本 冊 求해 떠듬떠듬 읽으며 獨學했어요. 커피 맛을 익히느라 하루에 30盞씩 마셨고요. 그러면 손이 덜덜 떨리는 거 알아요? 꽤 오랫동안 手顫症 患者처럼 손을 떨고 다녔어요. 커피 로스팅을 혼자 해보다가 커피콩과 機械까지 몽땅 태우기도 하고…. 左衝右突이었죠.”

    ▼ 그러다가 眞짜 커피 맛에 빠지기 始作한 건 언제부턴가요.

    “글쎄요. 커피맛에 빠진 적은 없는 것 같아요. 冊 보면서 커피를 배워서, 늘 내가 느끼는 게 신맛이냐 쓴맛이냐, 아까 마신 것보다 剛하냐 弱하냐 그런 생각만 했거든요. 커피를 즐기는 方法은 몰랐어요. 거의 病的으로 工夫에 매달렸죠.”

    커피 等級은 커피콩 300g 안에 缺點頭가 몇 個인지에 따라 決定된다. 그는 커피 品種을 求해다놓고 缺點두 個數가 等級에 맞는지 一一이 歲곤 했다. 베토벤이 每日 커피콩을 60알씩 넣고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는 內容을 읽으면, 커피가 59알日 때와 61알日 때는 各各 어떻게 다른 맛이 나는지 알아내기 위해 一一이 커피를 끓여보곤 했다. 커피 品種에 가장 적합한 水溫을 알아내려고 品種마다 50℃에서 100℃까지의 물을 부어가며 커피를 내리기도 했다. 勿論 그 커피를 모두 다 마셨다. 손이 덜덜 떨릴 때까지.

    “낮에는 커피숍 日課 인테리어 事業을 해야 하니까 工夫할 時間이 없잖아요. 가게 門 닫고 밤이 되면 혼자 커피를 끓여 마셨어요. 그러고 있다 보면 어느 瞬間 東이 터요. 아, 내가 高3 때도 안 해본 밤샘을 서른 살 넘어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참 자주 했죠.”

    ‘듀마高’의 追憶

    ‘커피學槪論’에 익숙해진 뒤엔 이탈리아, 프랑스 等 커피 先進國으로 ‘出張’을 다니며 새로운 世界를 만났다. 日本에서는 커피를 블렌딩할 때 세 가지 品種 異常을 섞지 않는 게 原則이다. 그런데 유럽 카페에선 열 가지 스무 가지 以上의 品種을 섞어 만든 커피를 내놓곤 했다.

    커피가 文化의 一部로 받아들여지는 事實도 新鮮했다. 유럽 거리의 數百年 된 카페 골목에는 어디를 가나 그곳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大文豪가 詩를 發表하고, 畫家가 그림을 그리고, 音樂家가 樂想을 떠올린 空間이 櫛比했다. 사람들은 그 空間에서 커피뿐 아니라 歷史의 香氣까지 들이마셨다.

    “프랑스 파리의 카페 ‘듀마高’에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앉아 原稿를 썼다는 테이블이 있어요. 언제 가도 늘 豫約 中이죠. 파리 사람들뿐 아니라 世界 곳곳의 觀光客들이 오직 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려고 찾아오더군요.”

    日本 ‘왈츠’의 커피 工場에서처럼, ‘듀마高’에서 그는 또 한 番 衝擊을 받았다. 單 한 番도 커피 맛에 빠진 적이 없던 그는, 커피 自體보다 그 液體를 둘러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커피가 만들어내는 삶의 餘裕,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사람 사이의 交流와 文化와 歷史. 이런 커피의 眞짜 魅力이 韓國에는 傳해지지 않았다는 게 안타까웠다.

    朴氏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커피 사랑은 世界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水準이다. 두메山골 늙은 農夫도 새참과 함께 믹스 커피를 마시고, 西海岸 漁夫들이 滿船 旗발 휘날리며 들어와 가장 먼저 찾는 것도 커피 아닌가. 서울에선 채 몇 걸음 옮기기도 前에 多國籍 커피 체인店, 直接 커피콩을 볶아 커피를 내려주는 로스터리숍, 食堂 안팎에 놓인 自販機까지 種類도 다양한 커피 販賣店을 숱하게 만난다. 하지만 그게 全部다. ‘韓國 커피’에서는 유럽의 그것에서 느껴지는 魅力과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다. 文化와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朴氏가 유럽 커피 文化의 魅力에 홀려 世界를 떠도는 동안, 事業은 惡化一路를 걸었다. 처음 門을 열었던 홍대 앞 왈츠 本店만 艱辛히 命脈을 維持하는 狀態였다. 그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거 다 整理해서 우리나라에도 100年 以上 이어질 수 있는 커피숍을 만들자, 거기서는 커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文化와 이야기까지 만들어 팔아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1994年의 일이다. 全國을 돌며 커피숍 자리를 보러 다닌 끝에, 탁 트인 江 風景이 印象的인 只今의 자리를 救한 뒤 인테리어 노하우를 總動員해 ‘100年 갈 집’을 지었다. 高强度 橋梁龍 콘크리트를 使用해 爆彈을 맞아도 끄떡없는 틀을 만들었다. 建物 1層은 카페 兼 레스토랑으로 꾸미고, 2層에는 커피를 테마로 한 博物館을 세웠다. 3層에는 韓國型 커피 栽培를 위한 溫室을 넣었다. 다른 한便으로는 慶熙大 호텔經營學科에 進學해 카페 經營에 對해 體系的으로 배우기도 했다. 가게 터를 보러 다니던 때부터 ‘왈츠와 닥터만’ 門을 열기까지 꼬박 2年 동안, 그는 커피를 直接 기르고, 世界의 커피 文化史를 工夫하며 또 다른 方式으로 커피의 世界를 파고들었다. ‘닥터만’은 博士를 뜻하는 ‘닥터’에 그의 이름 끝字 ‘만’을 붙여 만든 相互. 大韓民國 最高의 ‘커피博士’가 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옛날 茶房에 가다

    흔히 커피狂이라고 하면 커피의 맛과 香에 心醉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자메이카山 블루마운틴은 부드럽지만 香이 剛하고, 에티오피아産 모카는 뒷맛이 詩며, 하와이 커피가 부드럽다면 콜롬비아産은 津하다’ 같은 情報를 꿰고 다닌다. 커피 맛에 對한 趣向도 分明하다. 이런 基準에서 볼 때 朴氏는 커피狂이라고 하기 힘들다. 그는 커피라면 뭐든 잘 마시고, 甚至於 인스턴트 커피도 가리지 않는다. 인터뷰 途中 우리 앞에 놓인 커피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잘 모르겠는데…, 꼭 알아야 해요?” 하고 反問했다.

    “한때는 커피 맛을 區別하기 위해 밤을 새운 적이 있어요. 이젠 그런 게 아무 意味가 없다는 걸 알지요. 어느 커피에서는 달콤한 꽃香氣가 나고, 어느 건 톡 쏘는 신맛을 낸다…. 그런 情報는 事實 많이 歪曲된 거예요. 京畿道 驪州쌀은 어떻고 全北 井邑쌀은 어떻다 얘기하는 거나 똑같죠. 驪州쌀이라고 맛이 다 똑같겠어요. 金氏네 논, 黃氏네 논, 朴氏네 논 쌀 맛이 다 다르고 가물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도 또 달라지잖아요. 어느 地方에서 난 무슨 品種 커피인지 따지는 것보다 重要한 건 커피를 멋지고 近似하게 즐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커피를 마실 때 品種보다 自身이 좋아하는 茶盞, 自身이 좋아하는 溫度, 自身이 좋아하는 音樂을 더 많이 따진다. 2007年부터 해마다 ‘커피歷史探險隊’를 꾸려 世界의 커피 文化를 ‘探險’하고 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커피를 즐겼을까 알아내는 것이 커피 品種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즐겁다. 그는 커피 文化에 關心 있는 大學生 等으로 探險隊를 꾸린 뒤 自身이 全額 經費를 댄다. 探險 첫해에는 커피의 故鄕으로 알려진 아프리카 地域 7個國을 踏査했다. 커피의 主産地인 케냐와 탄자니아부터 에티오피아, 예멘의 아덴과 모카항,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이집트, 시리아, 터키까지 커피의 初期 移動經路를 따라 움직였다.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우리나라 文獻에는 韓國人이 커피를 처음 接한 게 1896年 俄館播遷 때로 나옵니다. 高宗 皇帝가 러시아公使館에 避身했을 때 커피를 마셨다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옛 資料를 찾아보니 1800年代 中盤에 이미 宣敎師들에게 커피를 待接했다는 記錄이 나와요. 아무리 公信力 있는 情報라도 내가 直接 確認해보는 게 重要하다는 걸 알게 됐죠. 커피의 原産地가 에티오피아라는 것도 果然 眞實인지, 그렇다면 그곳에서 커피가 어떻게 誕生 成長 變化했는지 내 눈과 내 발로 確認하고 싶었어요.”

    이듬해엔 커피 文化 發祥地 아랍 3個國 探險, 2009年에는 커피 文化를 꽃피운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獨逸 等 유럽大陸 探險을 다녀왔다. 韓國 커피 歷史를 찾기 爲한 探險도 꾸준히 하고 있다. 우리나라 最初로 大衆에게 커피를 販賣한 곳으로 알려진 仁川開港地의 대불호텔 터, 50餘 年 前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鎭海의 黑白茶房, 우리나라 最北端 靑솔다방 等 2000餘 곳의 茶房을 直接 다녀왔다. 그곳에서 遺物을 모으고 옛 이야기를 採集해 ‘왈츠와 닥터만’에서 여는 ‘所重한 우리 文化, 茶房 전’을 통해 公開한다. 1950~60年代 茶房을 再現해놓고 달걀 노른자가 동동 뜬 그 時節 모닝커피를 提供하는 이 展示會는 文化史 硏究家들 사이에서 꽤 話題다. 이런 ‘探險’을 통해 蒐集한 옛날 茶房의 낡은 커피盞, 마담들이 커피 配達을 갈 때 使用하던 褓자기, 局番 없는 電話番號가 적힌 茶房 성냥匣 等은 그가 只今도 所重하게 保管 中인 커피 遺物들이다.

    커피가 품은 이야기

    “명동예술극장 앞거리 바닥에는 ‘이 거리는 예전에 돌체茶房 喝采茶房 等이 있어 文學家와 藝術家들이 즐겨 다니던 距離입니다. 喝采茶房과 돌체音樂茶房은 文人, 大學生, 知識人들의 社交場으로서의 役割과 함께 다양한 文化行事로 當時 經濟的으로 窮塞했던 젊은 藝術家들의 知的인 豐足感을 충족시켜주던 文化의 張이었습니다’라고 적힌 돌이 박혀 있어요. 只今은 사라졌지만 우리에게도 커피 文化가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內容이죠. 그런 걸 現代에 다시 살려내는 게 제 꿈이에요.”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석 盞의 커피가 바닥을 보였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처음의 質問을 던진다. 그는 왜 우리나라에서 커피나무를 기르려 하는가. 왜 커피나무 種子를 求하기 위해 南아시아 中南美 아프리카와 太平洋, 카리브 해의 작은 섬을 누비고 다니고, 하와이 코나의 커피農場에서 1年間 雜夫로 일했는가. 지난 15年間 繼續한 實驗이 변변한 成果를 내지 못했는데도 繼續 그 作業에 매달리는 理由는 뭔가. 그는 “커피나무를 기르는 것이 韓國에 아름다운 커피 文化를 만드는 出發點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커피가 맛있는 건 그 안에 文化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50年, 누군가 제 뜻을 이어 100年 더 커피 農事를 지은 끝에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栽培한다면, 그 커피가 로스팅되고 抽出돼 누군가의 茶盞 속에 담겼을 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솟아날까요. 韓國 커피의 世界가 얼마나 깊어지고 넓어지겠어요. 저는 그 꿈을 抛棄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요즘 우리 젊은이들의 커피에 對한 關心이 바리스타 資格證 같은 技術的인 部分에만 集中되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것은 커피의 世界에서 한 部分에 不過하다는 것이다. 朴氏가 一般人을 對象으로 進行하는 커피 敎室에서는 커피의 生態와 栽培 方法, 文化와 歷史, 韓國 커피의 變化像 等 커피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알려준다. 授業에 忠實히 參與하는 사람들에게는 自費로 奬學金을 支給한다. 커피 技術者가 아닌 專門家를 길러내기 위해서다.

    ▼ ‘왈츠’로 돈을 많이 버셨나봐요.

    내내 궁금하던 質問을 던졌다. 커피에 미쳐서 벌이는 일이, 하나같이 돈벌이와는 距離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젓는다.

    “通帳 보여줄까요? 사람들이 그런 얘기 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空港에 가면 늘 두 가지 感情이 交叉해요. 아련함과 무서움. 旅行 準備할 때마다 늘 어쩌면 그렇게 돈이 없는지, 집사람이 배웅하고 돌아서는 거 보면 가슴이 미어져요. 무서운 건 커피 遺物 들고 들어오는 것 때문에 그래요. 稀貴한 커피盞, 커피 種子, 手動 그라인더 같은 것들, 博物館에 展示하려고 直接 갖고 들어오다 망가뜨리기도 하고 稅關에 걸려서 잡혀 들어간 적도 있어요. 돈이 많아서, 虛榮에 들떠서 이 일 하는 거 아닙니다. 正말 커피가 좋아서, 그 마음 하나로 이러는 거예요.”

    韓國 땅에 커피를

    그는 ‘커피로 돈벌이한다’는 말이 듣기 싫어 커피 苗木을 八字는 周圍의 提案도 다 拒絶했다고 밝혔다. 그가 耐寒性 實驗을 위해 기른 커피 苗木은 한때 10萬株에 達했다. 只今은 거듭된 實驗 탓에 折半으로 줄었지만, 如前히 莫大한 量이다. 이 事實을 아는 知人들이 ‘아파트 베란다에 나만의 커피 農場을 만들자’는 콘셉트로 事業을 하면 어떠냐고 勸했단다. 四時四철 暖房이 되는 아파트 안에서는 커피나무가 얼마든지 자랄 수 있는 만큼, 제법 괜찮은 事業 아이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번 돈을 投資하면 커피 栽培 實驗도 좀 더 體系的으로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助言하기도 했다.

    “맞는 얘기죠.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안 할 겁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커피나무 기르겠다고 나서는 게 實은 苗木 장사 하기 위한 口實이었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저는 오랜 時間이 흐른 뒤에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커피文化를 만들려고 뛰어다닌 1世代로 記憶되면 좋겠어요. 가장 큰 꿈을 꾼다면 ‘왈츠와 닥터만’이 100年 넘게 이어지고, 제가 살아生前 커피나무 栽培에 成功하는 거죠. 언젠가 後孫들이 우리 카페에 앉아서 ‘여기 創業者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커피나무를 栽培한 사람이래’라고 얘기하며 커피를 마실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 사람들 집 마당에 韓國 커피나무가 한 그루쯤 자라고 있으면 좋겠고요. 그게 제 꿈의 全部입니다.”

    原豆커피 즐기는 方法

    커피는 맛보다 雰圍氣로 마신다. 박종만氏의 持論이다. 하지만 質 나쁜 園頭를 엉터리로 抽出한 커피는 아무리 좋은 雰圍氣에서라도 즐기기 어렵다. 朴氏에게 좋은 원두 고르는 法과 커피 맛있게 抽出하는 法에 對해 들었다.

    ■ 커피 원두 고르기

    園頭를 살 때 흔히 아로마밸브를 통해 香만 맡아보고 選擇한다. 되도록 눈으로 直接 원두의 狀態를 確認한 뒤 고르는 것이 좋다. 模樣이 반듯하고 곱게 볶아진 원두가 맛도 좋다. 新鮮度 亦是 커피의 맛과 香을 左右하는 要素. 原豆커피度 반드시 製造日子를 確認, 가장 近來의 製品을 購入하는 것이 原則이다. 볶은 지 2週日이 지난 製品은 購入하지 말아야 한다. 커피는 空氣 中 酸素와 結合하면 香이 사라지므로 開封 狀態에서 오래 保管하는 것은 좋지 않다. 必要한 量만큼 小包長 單位로 조금씩 購入해 그때그때 갈아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미 갈아놓은 原豆커피를 購入하는 것도 禁物. 갈아놓은 커피는 製造過程에서 香이 날아가버리기 쉬운 데다 원두의 品質도 確認하기 어렵다.

    ■ 원두 커피 우려내기

    원두는 마실 때마다 먹을 量만큼만 粉碎機에 가는 것이 좋다. 園頭를 곱게 粉碎할수록 물과 接觸하는 部分이 많아지므로 津한 커피를 願하면 곱게 가루를 내고, 順한 맛을 願하면 조금 굵게 가는 게 좋다. 너무 곱게 갈면 쓴맛이나 떫은맛이 지나치게 剛해질 수 있다.

    原豆커피를 우려내는 方法 中 가장 一般的인 것은 粉碎機에 간 원두가루를 濾過紙에 넣고 뜨거운 물로 걸러내는 드립式 抽出法이다. 드립 方式으로 커피를 抽出할 땐 于先 커피가루가 살짝 부풀어 오를 程度로 물을 넣은 다음 커피 全體를 골고루 적실 程度로 3∼4番에 나눠서 물을 부어야 한다. 可能하면 不純物이 적은 淨水器 물을 使用하고 水道물은 바로 받아서 팔팔 끓인 뒤 使用한다. 끓인 물은 90∼95℃ 되도록 暫時(藥 5秒) 식힌 狀態에서 부어야 最高의 맛과 香을 우려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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