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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家 최인훈 딸 최윤경|新東亞

인터뷰

作家 최인훈 딸 최윤경

“너는 즐겁고 재미있는 글 쓰라던 아버지”

  • 송화선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19-09-08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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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廣場’의 作家 최인훈이 世上을 떠난 지 7月 23日로 꼭 1年이 됐다. 최인훈은 生前에 韓國 現代史와 政治 現實을 깊이 있게 省察한 作品들로 評壇과 讀者의 큰 사랑을 받았다. 20代 初盤 登壇해 平生을 作家로 活動했지만 日常生活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딸 최윤경 氏를 만나 大作家의 숨은 面貌에 對해 들었다.
    [동아일보]

    [東亞日報]

    고 최인훈(1936~2018)은 作品으로 記憶되는 小說家다. ‘廣場’ ‘灰色人’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作家 個人은 平生 大衆의 注目 밖에 머물렀다. 無表情한 얼굴과 精製된 言語 表現. 種種 言論에 登場할 때 최인훈이 보인 모습은 한결같았다. 그는 生前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基本的으로 이 社會에서 살고 있으니까 市民으로서 最小限의 義務를 지키고, 그다음에 에너지가 좀 남아 있어 始作한 일이 藝術家·科學者·硏究者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子息 앞에서도 술에 醉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을 만큼 端正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乾燥하고 딱딱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딸 최윤경(45) 氏가 가진 아버지에 對한 記憶은 이렇다. 

    “추운 겨울 學校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내 두 손을 잡고 안房으로 데려가 아랫목에 깔아두는 이불 아래 나를 묻어두곤 했다.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꽁꽁 언 손과 발을 冷氣가 가실 때까지 주물러줬고, 부지런히 비벼서 熱을 낸 손바닥을 차가운 이마나 뺨에 代 따뜻하게 녹여줬다. 나는 거기서 눈을 감고 두 時間이고 세 時間이고 아주 푹 잤다.”

    따뜻함과 細心함, 地力과 올곧음

    [지호영 기자]

    [지호영 記者]

    大作家는 種種 딸에게 “아빠 손 한番 잡아봐라” 하기도 했다. 꽉 손을 잡으면 “힘이 이것밖에 안 되냐. 더 씩씩해야지” 하며 “Girls, be ambitious(少女야, 野望을 가져라)”라고 말하곤 했다. 지난해 7月 23日, 아버지가 世上을 떠난 뒤 崔氏는 記憶 속에 남은 이 ‘아빠’의 모습들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났다고 告白했다. 平生 作家를 아빠라고 부르며 살았다는 그는 “葬禮式場에서 遺族 代表 人事를 하며 처음 ‘아버지’라는 單語를 썼다. 그 瞬間 ‘이제 完全히 다른 時間이 始作되는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고도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崔氏는 몇 番 無心코 ‘아빠’라는 單語를 입 밖에 냈다. 그러고는 곧 “제가 아직도 이런다”며 수줍게 웃다 살짝 목이 메었다. 큰 눈 가득 고인 눈물을 참느라 暫時 숨을 고르는 일도 있었다. 그에게 아버지의 不在는 現在進行形의 苦痛으로 보였다. 崔氏는 “나는 아버지가 좋았다. 아버지의 따뜻함과 細心함, 地力과 올곧음이 두루 좋았다”고 했다. 

    崔氏는 20代 中盤 結婚해 家庭을 꾸렸고, 두 딸을 낳아 키웠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 끈끈한 紐帶關係를 이어갔다. 서로의 집에 자주 오갔고, 電話通話도 많이 했다. 大作家는 딸을 만나면 늘 가볍게 안아주는 것으로 人事를 代身했다. 때로는 “몸이 차갑다, 얼른 녹여라” “살 좀 쪄야겠다, 왜 이리 말랐느냐” 같은 가벼운 걱정을 곁들였다. 그렇게 따스히 自身을 감싸주던 아버지의 손길을, 崔氏는 只今도 鮮明히 記憶한다. 그는 말했다. 

    “처음엔 그런 瞬間이 永永 잊히지 않을 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우리 둘이 나눈 追憶은 繼續 내 안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時間이 흐르니 달라지더라. 記憶이 아무 警告도 없이 사라져갔다.” 

    崔氏가 “아버지에 對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더 많이 써둬야겠다”고 마음먹은 理由다. 그는 2月 무렵부터 本格的으로 펜을 잡았고, 아버지 1週期를 맞아 그間 쓴 글을 모은 冊 ‘灰色人의 자장歌’를 펴냈다. 이 冊에는 作家 최인훈을 評價하거나 그의 作品 世界를 照明하는 內容이 하나도 없다. 오직 최인훈의 딸만 알고 傳할 수 있는 ‘私的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崔氏는 이 冊을 쓰는 동안 “아버지의 딸이라는 地位와 體驗을 限껏 濫用했다”며 웃음 지었다. 藝術高等學校에서 繪畫를 專攻하는 崔氏의 딸, 卽 최인훈의 孫女가 揷畵를 그려 意味를 더했다. 

    崔氏에 따르면 최인훈은 글과 그림의 어우러짐을 좋아했다. 崔氏에게 “네가 나중에 漫畫家가 돼도 좋겠다”고 한 일도 있다. 崔氏는 “내가 어릴 때는 아직 漫畫에 對한 偏見이 적잖던 時節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겐 그런 게 全혀 없었다”고 回想했다.

    “네 생각이 옳다”

    최인훈은 權威意識도 없는 아버지였다. 그는 子息들에게 “내 아버지 世代 때는 ‘家長은 權威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내 생각은 다르다. 家族이랑 잘 지내는 게 좋은 아버지”라고 말하곤 했다. 實際로도 그렇게 行動했다. 최인훈의 집에서 집안일은 “엄마 몫”李 아니라 “누구든 먼저 보는 사람이 하는 것”이었다. 崔氏는 “아버지는 淸掃, 설거지 같은 일을 거리낌 없이 하셨다”고 傳했다. 

    家族 앞에서 自尊心을 내세우는 法도 없었다. 최인훈은 글을 쓰면 아내와 딸·아들 等 全體 食口에게 돌려 읽히며 意見을 求했다. 小說 ‘話頭’를 쓸 때는 每日 새 原稿가 家族들 손에 ‘配達’됐다. 崔氏는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가 前날 밤 쓴 原稿를 들고 나오시길 기다렸다. 마치 連載小說을 읽는 느낌이었다”고 回顧했다. 

    최인훈은 當時 이미 온 世上이 알아주는 小說家였다. 하지만 家族들이 내놓는 작은 意見도 無心히 지나치는 法이 없었다. 

    “내가 初等學生 무렵에는 아버지 戱曲을 舞臺에 올리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가 演劇 팸플릿에 들어갈 글을 자주 쓰셨다. 그것들도 亦是 食口들에게 읽어보도록 했다. 하루는 내가 ‘아빠, 이 文章 調査 ‘道’를 ‘만’으로 고치는 게 어때요?’ 하니 바로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다. ‘아빠 이 글에서는 이 段落을 맨 앞으로 보내는 게 좋겠어요’ 했더니 正말 맨 앞으로 옮겨주신 일도 있다.” 

    최인훈은 子女들과 “過하다 싶을 만큼” 많은 時間을 함께 보내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灰色人의 자장歌’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봄에는 마당에서 봄꽃을 살피고 와서 冊을 읽는 아버지가,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며 소파에서 冊 읽는 아버지가, 가을에는 人蔘茶를 마시며 冊 읽는 아버지가, 겨울에는 書齋의 이불 안에서 엎드려 冊 읽는 아버지가 있었다.” 

    어린 時節 崔氏 눈에 비친 風景은 늘 이랬다. 최인훈은 外出을 꺼렸고, 敎鞭을 잡고 있던 서울예대에 講義하러 갈 때를 除外하고는 집에서 冊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오랜 時間을 함께 보낸 德에 “아버지가 했던 말, 아버지의 表情, 아버지의 情緖, 아버지의 論理”는 고스란히 崔氏 삶의 한 部分이 됐다. 

    崔氏는 “그런 아버지가 世上의 誤解를 사는 걸 보면 답답할 때도 있었다”고 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엔 아버지 弟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분들이 가끔 내 손을 잡고 廚房 같은 데로 데려가서 몰래 이렇게 묻곤 하던 게 기억난다. ‘윤경아, 아버지 집에서도 많이 무서우시니?’ 어린 마음에도 ‘아닌데. 우리 아빠가 그렇게 무섭기만 한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런 걸 나한테 물어볼까’ 생각하곤 했다.” 

    崔氏가 이番 冊을 통해 최인훈의 人間的 面貌를 世上에 公開한 건 이런 오래前 記憶 때문인지도 모른다.

    作家의 딸

    어린 시절 최인훈 작가 품에 안겨 있는 최윤경 씨.

    어린 時節 최인훈 作家 품에 안겨 있는 최윤경 氏.

    그는 “내가 어릴 때는 時節이 殊常했다. ‘우리 집 電話는 도청될 수 있으니 通話할 때 늘 操心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했다. 집에서 家族끼리 한 얘기를 無心코 傳達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世上이었다. 그래서 崔氏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속 얘기를 잘 하지 않는 性格이 됐다고 한다. 이番에 아버지에 對한 冊을 쓰며, 그는 오랫동안 自身을 짓누르던 이 禁忌를 비로소 깼다. 

    “처음엔 많이 조심스러웠다. 穩全한 내 얘기가 아니고 픽션도 아닌 글이라 걱정이 많았다. ‘아버지가 좋아하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어느 時點부터 ‘一旦 쓰자. 勇敢하게 쓰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아는 우리 아버지라면 分明히 쓰라고 하셨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崔氏가 아주 어린 時節부터, 최인훈은 딸이 글 쓰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어렵고 複雜한 얘기는 아빠가 많이 했으니, 윤경이는 나중에 즐겁고 재미있는 글 쓰는 사람이 돼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딸이 ‘野望’을 갖고 積極的으로 自己 삶을 開拓하는 사람이 되길 바랐던 아버지는, 그가 일찌감치 結婚하고 아이를 낳아 專業主婦의 길을 걷게 됐을 때 失望한 氣色을 감추지 않았다. 

    崔氏가 낳은 두 孫女를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아이들이 웬만큼 자라고 나면 ‘내 딸’李 自己 일을 始作할 수 있지 않을까 期待하는 마음만은 품고 살았다. 崔氏는 “돌아가시기 얼마 前 아버지가 우리 집 書架를 둘러보고 ‘좋은 冊이 많구나. 윤경이는 머릿속이 잘 整理돼 있어서 나중에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야’라고 하시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崔氏가 펴낸 ‘灰色人의 자장歌’를 읽으면 최인훈이 왜 딸에 對해 오래도록 期待를 품었는지 斟酌할 수 있다. 아버지에 對한 記憶을 묶어낸 이 冊은 잔잔하면서도 吸引力이 있다. 최인훈의 作品을 사랑한 讀者라면 大家의 새로운 面貌를 確認하는 기쁨이 클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自己 父母와의 記憶을 떠올리며 共感할 만한 대목이 많다. 

    崔氏는 이 글을 쓰며 앞으로 더 많은 冊을 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作家로 活動하는 딸의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른다. 崔氏는 “‘灰色人의 자장歌’가 出刊되기 前날 꿈에 아버지가 나왔다. 나를 보고 繼續 仁慈하게 웃으셨다. 그 모습에 힘을 얻었다. 아버지를 만난다면 ‘아빠, 저 冊 썼어요. 이제 始作이에요. 熱心히 할게요’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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