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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像] ‘갤럭시 아버지’ 高東眞 “只今 민주당, 우리가 아는 進步 아냐”|신동아

[映像] ‘갤럭시 아버지’ 高東眞 “只今 민주당, 우리가 아는 進步 아냐”

[2024 總選_이 사람] 國民의힘 選對委 副委員長?前 三星電子 社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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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준 記者

    mrfair30@donga.com

    入力 2024-03-3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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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동훈 應援에 勇氣 내 政治 入門

    • 企業人, 政治人 삶 本質的으론 같아

    • 國家 進一步 爲해 必要한 國民의힘 總選 勝利

    • 每日 汝矣島에 깨끗한 물 한 그릇씩 들이붓는 心情으로

    • ‘政治人 高東眞’의 ‘갤럭시’는 ‘普通 市民’ 모습으로 記憶되기

    [映像] 釜山 가서도 電話하는 한동훈이란 男子…



    3월 11일 고동진 서울 강남병 국민의힘 후보는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국민에게 국민을 위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정치인 고동진’의 ‘마스터피스’”라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3月 11日 高東眞 서울 江南丙 國民의힘 候補는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國民에게 國民을 위하는, 平凡한 사람으로 記憶되는 것이 ‘政治人 高東眞’의 ‘마스터피스’”라고 말했다. [조영철 記者]

    1月 11日 各種 媒體에 ‘고동陣’이라는 이름이 大書特筆됐다. 이 이름이 뉴스에 登場한 게 낯선 일은 아니다. 그는 삼성전자에서 38年間 일하며 스마트폰 ‘갤럭시’를 탄생시킨 主役이다. 세간은 그를 ‘갤럭시의 아버지’ ‘갤럭시 神話 主役’이라고 일컬었다. 갤럭시가 好評을 받든, 酷評을 받든 갤럭시 關聯 뉴스엔 언제나 高東眞이 登場했다.

    이날 그의 이름이 낯설게 비친 까닭은 ‘經濟’가 아닌 ‘政治’ 섹션에 登場한 데 있다. 國民의힘이 4月 總選을 앞두고 그를 迎入하려고 한다는 뉴스였다. 한동훈 非對委員長이 人材迎入委員長이 된 後 直接 迎入을 試圖한 첫 人物이라는 事實도 곁들여졌다.

    1月 22日 이 消息은 現實이 됐다. 高東眞은 汝矣島 國會에서 歡迎式을 열고 國民의힘에 入黨했다. 한동훈 委員長은 ‘갤럭시의 아버지’에 對한 禮儀를 갖추듯 쓰던 ‘아이폰’을 내려놓고 갤럭시를 꺼내 그와 함께 ‘셀카’를 찍었다. 入黨 後 比例代表 出馬說이 돌다가 3月 5日 戰略公薦을 받아 서울 江南丙 國民의힘 候補가 됐다. ‘政治人 高東眞’의 本格 始作이다.

    “釜山 가서도 電話하는 그 마음에…”

    高 候補는 政治에 큰 關心이 없던 사람이다. “우리나라 企業은 2流, 官僚·行政組織은 3流, 政治는 4流”라는 故(故) 李健熙 會長의 말을 새기고 살았다. 混濁한 물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職場人으로서 그저 熱心히 일했다. 몸을 너무 酷使한 탓에 갑자기 쓰러져 한쪽 귀 聽力을 잃고 補聽器를 끼게 됐을 程度다. 1984年 社員으로 始作해 2015年 社長에 오르고 2022年 退社했다. 職場人이라면 누구나 우러러볼 立志傳 커리어다.



    會社를 나온 後에도 政治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會社에서 거둔 成功 經驗을 社會와 나누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還元(還元)’이 그가 살면서 내내 품어온 삶의 價値라서다.

    “職場 生活을 하면서 後輩들에게 늘 말한 게 있어요. 三星만을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요. 몸은 三星에 있지만 窮極的으론 大韓民國의 經濟와 未來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强調했습니다. 三星이 잘돼서 내는 稅金이 다 우리나라에 보탬이 되니까요.”

    高 候補가 擇한 還元法은 出版이다. 지난해 7月 職場 生活 노하우, 洞察을 담은 冊 ‘일이란 무엇인가’(민음사)를 냈다. 講演도 숱하게 다니며 職場 生活이 苦悶인 職場人, 豫備 職場人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그는 생각보다 젊은이들의 苦悶이 깊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의 힘듦을 나눠 질 수 있을까 苦心에 빠져들었다. 國民의힘이 그에게 손을 내민 건 이 무렵이다.

    “지난해 10月부터 國民의힘으로부터 連絡이 오긴 했습니다. 裵賢鎭 議員이 몇 番씩 連絡해 入黨을 勸하고 집에 찾아오기도 했죠. 苦悶은 됐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決心이 서진 않았어요. 그러다 지난해 末 國民의힘 指導部가 바뀌는 過程에 들어갔고, 自然스레 제 政界 入門도 흐지부지되는 것 같았습니다. 苦悶을 내려놓고 다시 元來 삶에 集中하며 살았는데, 1月 3日 한동훈 委員長에게 電話가 왔죠. 事實 모르는 番號라서 이땐 안 받았어요. 그랬더니 ‘한동훈입니다’라고 文字가 오더군요. 이때까지도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한 委員長 番號를 아는 누군가가 ‘한 委員長이 맞다’고 알려줘서 그제야 眞짜 한 委員長이라는 걸 알았습니다(웃음).”

    1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인재 영입 환영식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갤럭시 휴대전화를 꺼내 고동진 서울 강남병 국민의힘 후보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1月 22日 서울 汝矣島 國會에서 열린 國民人材 迎入 歡迎式에서 한동훈 國民의힘 非常對策委員長이 갤럭시 携帶電話를 꺼내 高東眞 서울 江南丙 國民의힘 候補와 記念撮影을 하고 있다. [뉴스1]

    이때부터 한 委員長과 高 候補는 ‘通話하는 사이’가 됐다. 첫 對話 主題는 ‘靑年의 未來’. 高 候補가 한창 苦心하던 問題다.

    “韓 委員長이 제 苦悶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充分히 苦悶해 보라’며 時間을 줬죠. 苦心하며 차차 ‘制度圈으로 進入해 問題를 解決하는 것도 方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勇氣가 나지 않았어요. 初等學校 때 班長 程度 해본 거 말곤 出馬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한 委員長의 ‘眞心’李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몇 番에 걸쳐 連絡하는데, 甚至於 釜山에 내려갔을 때도 電話를 걸어 저를 說得하더라고요. 그 모습에 政治에 뛰어들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決心을 굳히니 煩惱가 사라졌다.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自信感을 불어넣었다. 企業人으로서 거둔 成功 經驗이 政治의 領域에서도 發揮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새겼다.

    “政治의 本質은 國民이 便安하고 幸福한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觀點에서 企業人의 삶도 本質的으로 政治와 같다고 봐요. 企業人의 德目은 製品과 서비스를 통해 消費者를 幸福하게 하는 것이고, 그런 삶을 살았으니까요. 結局 ‘작은 政治’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勿論 政治人이 되면 特定 消費者가 아니라 國民 全體로, 對象이 宏壯히 넓어지겠죠. 하지만 제가 藥 40年間 한 會社에서 勤務하며 얻은 經驗과 노하우를 發揮한다면 成功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좋아하는 낱말은 ‘中庸’

    高 候補는 會社의 末端에서 꼭대기 層에 다다른 人物이다. 社會를 하나의 會社로 본다면 그의 삶 自體가 그가 겪은 職場 生活과 닮았다. 高 候補는 1961年 서울 西大門區 굴레房로 아현시장에서 6男妹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자랐다. 집안 經濟 事情이 좋지 않았다. 큰兄과 둘째 兄, 큰누나는 高等學校만 卒業 後 生業에 뛰어들었다.

    일찍 철이 들어야 했다. 고기를 배불리 먹는 게 所願이었다. 中學生 때 ‘마흔이 되면 點心에 언제든 불고기 白飯을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을 程度다. 成功에도 목이 말랐다. 三星電子 入社 첫날부터 ‘이 會社의 社長이 되겠다’ 마음먹고 수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目標를 達成했다. 經濟的 不渡, 成功도 이뤘다. 點心은 勿論 三時 세끼 언제든 불고기를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도, 社長도 됐다. 退職할 때 받은 돈만 118億3800萬 원(給與·喪輿·退職金 包含)이다. 그럼에도 젊을 적 고단한 삶이 몸에 밴 까닭인지 그는 如前히 素朴함을 지니고 있다. 3月 11日 동아일보 忠正路社屋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목이 마르다”며 80원짜리 믹스커피를 찾았다. 익숙하다는 듯 홀짝이더니 한 盞을 다 비웠다.

    社會의 모든 層位를 經驗해 본 그다. ‘進步’를 외칠 수도, 마음먹기에 따라 國民의힘 外에 다른 政黨을 갈 수도 있었다. 그가 國民의힘을 選擇한 理由는 努力이 背信당하지 않는 社會를 바라기 때문이다.

    “제가 어렸을 땐 다들 事情이 어려웠어요. 勿論 富者인 사람도 있었죠. 中學校 때 汝矣島 아파트에 사는 親舊 집에 놀러 갔는데, 뜨거운 물이 나오고 化粧室이 집 안에 있는 걸 보고 큰 衝擊을 받았습니다. 率直히 그때만 해도 전 富者들은 나쁜 方法으로 돈을 모았을 거라고 생각했죠. 高等學校 1學年 때 擔任先生님의 말을 듣기 前까진요. 先生님께선 ‘동진아, 世上엔 正當한 努力을 통해서 成功을 거둔 사람이 많다. 그 德分에 이 社會와 나라가 굴러가는 거야’라고 하셨어요. 이 말씀이 제 價値觀을 바꿨습니다.”

    高 候補는 아직 짙은 政治的 色彩를 發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中道’라고 말한다. 第一 좋아하는 말도 ‘中庸’이다. 그는 國民의힘이 報酬가 아니라, 오히려 이 價値에 더 가까운 政黨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均衡을 追求합니다. 勿論 어쩌면 中間에서 若干 오른쪽으로 와 있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只今 ‘進步’라고 하는 민주당이 15~20年 前 봤던 進步입니까. 脫(脫)權威, 脫權力을 나타내며 庶民과 脆弱 階層에게 다가가던 그 모습이 남아 있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保守라고 불리는 國民의힘이 훨씬 더 나아지고, 發展하고 있어요. 제가 追求하는 國家는 戰爭 中에도 굴러가는 나라지만 只今 大韓民國은 그러지 못하고 있어요. 立法·行政·經濟 모든 面에서 時急한 問題가 너무나 많은데, 絶對 多數席을 차지한 野黨에 依해 國家는 멈춰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進一步하기 위해서라도 4月 總選에서 國民의힘이 勝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내 ‘마스터피스’는 사람”

    한番 始作하면 제대로 한다. 3月 13日 故 候補는 中央選擧對策委員會 副委員長을 맡았다. 比例代表로 出馬하려다가 地域區 議員으로 마음을 바꾼 것도 地域 이곳저곳을 다니며 黨을 支援하기 위함이다. 準聯動型 比例代表制가 維持되며 衛星政黨人 國民의미래 所屬 比例代表로 出馬하면 國民의힘 選擧를 支援할 수 없어서다.

    “已往 始作한 거 國民의힘 勝利를 위해 할 수 있는 바를 다해서 國家 發展에 이바지하려고 했는데, 衛星政黨으로 가면 그럴 수 없다고 해서 唐慌했습니다. 黨 全體 選擧를 돕기 爲해 地域區 議員으로 바꿨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家族, 特히 아내다. 30餘 年에 이르는 結婚 生活, 삶의 半平生 동안 그의 成功을 위해 物心兩面 內助와 犧牲을 아끼지 않은 伴侶者다. 高 候補의 携帶電話에 아내는 ‘寶物 1號’로 貯藏돼 있다.

    “아내에게 너무 未安해요. 제가 專務, 社長으로 일한 約 15年間 平均 出張 日數가 170~180日이었어요. 많이 할 땐 202일이었고요. 그런데도 아내가 집안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와 같은 狀況을 빼고는 한 番도 집안일로 제게 電話限 적이 없어요. 얼마나 고마워요. 默默히 제 옆을 지켜준 사람인데. 제가 職場에서 成功할 수 있었던 데 折半은 아내 몫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아내를 위해 退社 後엔 함께 時間을 많이 보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結局 約束을 깨게 됐죠. 事實 처음에 比例代表로 出馬하려고 한 理由에 아내를 위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比例代表는 地域區 管理를 하지 않아도 되니 立法·政策에 集中할 수 있고, 그나마 餘裕가 있다고 들었어요. 이 論理로 아내를 艱辛히 說得했는데…. 또 狀況이 바뀌니 참(웃음). 그래도 이젠 다 理解해 주고 누구보다 節 應援합니다.”

    밖에선 한 委員長, 안에선 아내의 應援을 받는다. 그에겐 든든한 支援軍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世界를 맞이하는 두려움은 남아 있다. 高 候補는 삶에서 ‘무엇을 남기는 것’이 남은 課業이라는 마음으로 두려움을 克服한다.

    “於此彼 한番 살다 가는 人生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記憶하라’라는 뜻이죠. 죽음을 記憶한다는 것은 結局 삶에 뭔가를 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國民의 마음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요. 國會議員이 된다면 每日 混濁한 汝矣島에 깨끗한 물 한 바가지를 들이붓는 마음으로 일할 겁니다. 變化가 없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성(至誠)이면 感天(感天)이라는 말을 믿습니다.”

    무언가를 남기는 것. ‘企業人 高東眞’은 갤럭시를 남겼다. 사람들이 그는 모를지라도 그것은 아는, 世界를 누비는 그의 ‘마스터피스’다. 高 候補는 ‘政治人 高東眞’도 갤럭시와 같은 力作을 남기길 바란다. 바로 ‘普通 사람으로 記憶되는 것’이다.

    “훌륭한 法이나 政策을 만들면 그것을 만든 사람이 記憶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이렇게 뛰어난 法을 만들었나’ ‘누가 惡法을 이렇게 올바르게 改正했나’라면서요. 이런 좋은 記憶으로 남고 싶습니다. 國會에 가면 靑年의 未來, 中小·中堅企業, 소프트웨어 産業, 社會的 弱者 關聯 만들고 싶은 法이 많습니다. 혼자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여야 相關없이 參與하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좋은 法을 만들기 위해 함께 工夫할 겁니다. 正말 國民을 위하는, 親近하고 平凡한 普通 사람의 모습으로 國民에게 記憶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政治人 高東眞’의 마스터피스입니다.”

    신동아 4월호 표지.

    신동아 4月號 表紙.



    2024 總選

    이현준 기자

    이현준 記者

    大學에서 保健學과 英文學을 專攻하고 2020年 東亞日報 出版局에 入社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新東亞로 왔습니다. 政治, 社會, 經濟 全般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世上에 關心이 많습니다. 設令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價値 있는 記事를 쓰길 願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責任感을 잊지 않고 옳은 記事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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