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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像] 김경율 “70年代生 色彩 첫 政治人 한동훈은 韓國 政治 所重한 資源”|新東亞

[映像] 김경율 “70年代生 色彩 첫 政治人 한동훈은 韓國 政治 所重한 資源”

[정혜연의 사람in] 政治판에 波動 일으킨 國民의힘 非對委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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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연 記者

    grape06@donga.com

    入力 2024-03-2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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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只今 민주당은 火天大有와 다를 바 없어

    • ‘國會議員 曺國’은 코미디… 오만 形態 非理 雜犯日 뿐

    • 國民의힘은 목소리 없는 政黨, 한 사람에 다 맡겨

    • 政治 5日 先輩 한동훈, 試鍊 잘 버텨내면 좋겠다

    • 非對委員이 쓴소리 않으면 義務 放棄

    • 앞으로도 監視 對象엔 匕首 꽂을 것

    [映像] 김경율 激情吐露<1>



    [映像] 김경율 激情吐露<2>



    나이가 들수록 信念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絶對’라는 말로 許容하지 않았던 선(線)을 어느 瞬間 넘기도 하고, ‘남들 다 하는데’라며 適當히 妥協하기도 한다. 廉恥를 모르는 人間이 된 줄도 모른 채 고개를 들고 살아가는 이가 적지 않은 世上이다. 他人은커녕 自身과의 妥協조차 許容하지 않는 사람이 貴해졌다. 그렇게 올곧은 사람은 어디에 있든 뾰족하게 存在가 드러난다.

    김경율(55) 國民의힘 非對委員 兼 選擧對策委員會 副委員長은 後者에 屬하는 사람이다. 그는 一生 妥協하지 않고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滋養分이 된 건 1980年 光州다. 1969年 全南 海南에서 태어난 그는 光州에서 10代를 보내던 中 5·18民主化運動을 現場에서 겪었다. 그날 以後 그는 信念 하나를 가슴에 아로새겼다. 그러곤 1988年 연세대 哲學과 入學 後 곧장 民主化運動에 投身했다. 示威, 手配, 勞動運動을 겪고 復學한 그는 1998年 會計士 試驗에 合格한 뒤 곧장 참여연대에 合流했다.

    김경율 국민의힘 비대위원. [지호영 기자]

    김경율 國民의힘 非對委員. [지호영 記者]

    69年生 光州 出身 김경율

    참여연대에서 그는 잘 드는 칼이었다. 2009年 雙龍車 解雇 無效 訴訟, 2015年 三星바이오로직스 粉飾會計 公論化, 2019年 曺國 前 長官 私募펀드 非理 疑惑 提起 等 巨大 權力과 싸울 때마다 決定的 役割을 했다. 참여연대 共同執行委員長에 오를 程度로 持分이 相當하던 그가 2019年 9月 27日, 그곳을 박차고 나왔다. 曺國 前 長官 一家의 非理에 핏대를 높였다는 理由로 그 바닥에서 公共의 敵이 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와서도 그는 홀로 巨大 權力과 繼續 싸웠다. 2021年 1月 檀君 以來 最大 土建 非理라는 大庄洞 開發 特惠 疑惑을 條目條目 分析해 公論化한 것도 바로 그였다.



    這間의 事情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國民의힘행 消息에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그는 2023年 12月 28日 國民의힘 非對委員職을 맡았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總選을 앞두고 그에게 政治 懸案에 對한 質問이 쏟아졌다. 그때마다 그는 率直하게 答했다. 正義連·盧武鉉財團 非理 疑惑, 이종석 等 野圈 人士 非違, 김건희 리스크 等 與野를 가리지 않고 關聯 人士들을 向해 直言을 날렸다. 그 德에 政治權에 발을 들인 지 두 달餘間 旣存 政治人보다 더한 輿論의 集中砲火를 맞았다.

    政治人이 돼서인지 會計士일 때보다 인터뷰 涉外가 어려웠다. 1月 末부터 인터뷰를 여러 次例 要請했는데 電話와 文字에 始終一貫 默默不答이던 그가 3月 中旬에야 答을 했다. 黨 次元의 인터뷰 自制令이 풀린 것인지 묻자 “그런 게 全혀 아니다. 그동안 내가 記者 분들을 일부러 避했다. 말만 했다 하면 여러 사람 힘들어지니 自制한 것”이라고 말했다.

    政治가 잘 안 맞는 模樣이다.

    “汝矣島 政治 領域은 全혀 안 맞다. 예전에 親한 政治評論家들이 ‘너는 政治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하기에 속으로 ‘뭐 그게 어렵다고…’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그 말이 떠오르더라(웃음). 政治와 市民社會 일은 결이 完全히 다르다. 市民社會에서도 汝矣島 政治人처럼 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가 해오던 市民運動 方式과는 180度 다른 것 같다.”

    그런데 選對委 副委員長職도 맡았다.

    “어쨌든 汝矣島 政治에 발을 디뎠고, 短期 目標는 總選 勝里니까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싶다. 選對委 副委員長 提案받았을 때 苦悶하지 않고 맡았다.”

    非對委員 受諾 當時의 目標는 무엇이었고 어느 程度 達成했나.

    “目標는 市民社會에 있을 때랑 같다. 公共善을 이루는 것이다. 다만, 汝矣島 文法대로 하는 거다. 正確히 非對委員을 始作한 지 75日(3月 14日 基準)이 지났는데 到達할 수 있었던 게이지가 100%라면, 只今 한 20% 程度 온 것 같다. 꽤나 스스로에게 失望스럽고, 제가 斟酌했던 곳과 完全히 다른 곳이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몰랐다.”

    김경율 委員은 1月 初부터 한 달間 大韓民國 政治판에서 第一 뜨거운 사람이었다. 1月 8日 國民의힘 指導部 가운데 처음으로 ‘김건희 리스크’를 公開的으로 言及하며 “正面으로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일은 尹錫悅 大統領과 한동훈 非對委員長의 葛藤으로까지 飛火했다가 尹 大統領이 2月 7日 KBS와 인터뷰하면서 見解를 밝히고 마무리됐다. 그사이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議員 地域區인 麻布乙에 出馬하기로 했던 金 委員이 不出馬를 宣言하며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 뒷맛이 개운치 않았으나 金 委員은 “1校時 試驗은 끝났다”며 더 는 言及하지 않았다.

    黨內·外 懸案에 對해 發言할 때 어떤 原則과 基準으로 하는지 궁금하다.

    “國民의힘 非對委員으로서 言論이 묻는 것에 眞實되게 答할 義務가 있다. 政治 或은 言論의 目的과 機能이라는 것이 國民과 政治人 間의 疏通이라고 생각한다. 몸으로 比喩하자면 血管처럼 이어지게끔 말이다. 많은 소용돌이와 風波를 지났지만 언제고 다시 물어본다면 똑같이 對答할 거다. 記者 분들 電話 받기 前에 ‘眞實과 맞닥뜨릴 勇氣가 있는가’ 스스로 묻는다. 그게 政治와 言論의 役割이라고 본다.”

    大統領을 相對할 때도 거침없었다.

    “내가 萬若 汝矣島 政治에 발을 안 디뎠다면 김건희 리스크에 對해 말을 안 했을 것이다. 入黨하기 훨씬 前에 尹 大統領, 김건희 女史와 같이 밥도 먹었는데 내 性格上 그런 私的 因緣 때문에 發言을 안 했을 것 같다. 그러나 非對委員이라는 公的 地位에 있고, 公共善을 實現해야 하는 限, 말을 하지 않는 건 ‘義務의 放棄’라고 생각한다. 말 안 할 거면 자리를 내려놔야지.”

    “70年代生 色彩 가진 最初 政治人”

    2月 初 挺對協, 盧武鉉財團 非理 疑惑을 提起했을 때 한동훈 委員長이 “저런 일 하시라고 모신 분”이라고 말했다. 同意하는가.

    “韓 委員長의 그 發言은 같은 風波를 지난 處地에서 弄談 半, 眞談 半으로 한 것 같다. 過去부터 여러 次例 政治權에서 ‘政黨에 加入해 달라’ ‘議員 자리 줄 테니 들어와라’ 했을 때 모두 拒絶했다. 文在寅 政府와 曺國 事態를 거치면서 어느 時點부터 한 委員長과 私的 連絡도 했다. 한 委員長이 저보다 政治 5日 先輩인데(웃음), 무너진 價値를 復元해 내는 데 저런 분과 함께라면 한番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迎入 電話 받았을 때 같이 하자고 하는 것들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숱한 提案을 拒絶하고 한 委員長을 選擇한 거면 正말 마음에 들었나 보다.

    “韓 委員長이 文在寅 政府 時節 네 番 좌천당할 때 나도 ‘飯(反) 曺國, 反(反) 민주당’을 외쳐 비슷한 處地였다. 그 以後 法務部 長官으로서 하는 發言들을 지켜보면서 ‘함께 할 만하다’는 생각이 있던 次에 連絡이 와 기꺼이 受諾했다. 또 政治가 市民團體 活動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하려는 일에 政治는 하나의 手段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國民의힘 公薦이 速度感 있게 이뤄졌다. 이른바 國民의힘 ‘시스템 公薦’을 어떻게 評價하나.

    “민주당도 시스템 公薦을 했다. 시스템이라는 것이 어떤 老職을 內藏했는지에 따라 結果가 다르다. 김영주 議員이 特定 領域에서 0點, 朴用鎭 議員이 어떤 基準에 따라 下位 10%로 나올 수 있다. 시스템에 어떤 論理를 內藏하느냐가 重要하지 시스템대로 公薦했다고 稱讚할 일은 아니다. 그런 意味에서 國民의힘 시스템 公薦에 厚한 點數를 주기 어렵다. ‘車가 잘 굴러갔냐’를 따지면 잘 굴러갔다. 그런데 어느 瞬間부터 ‘結局 公薦이란 人材를 잘 뽑아내는 시스템인데 人材풀 自體가 너무 좁은 것 아닌가’ 하는 疑問이 들었다. 메이저리그와 KBO리그는 人材풀 自體가 다르지 않나. 國民의힘 22代 公薦 人材풀을 보자면 많이 아쉽다.”

    國民의힘에서 人材 迎入에 꽤 功을 들이지 않았나.

    “人員數는 많았지만 (質的 側面에서) 아쉬웠다. 過去에 어떤 人士와 21代 國會 이야기를 하다가 ‘國會를 바꾸려면 딱 10名만 있으면 된다’고 하더라. 相當히 共感했다. 10名만, 或은 5名만이라도 合理的이고 改革的인 분이 있다면 充分히 바꿀 수 있다. 우리 國民의힘 公薦이 國民 눈높이에서 그런 10名의 候補, 最小 5名의 候補를 公薦했냐 하면 조금은 懷疑的이다.”

    迎入 人材 가운데 “한동훈 委員長의 말에 마음이 움직여 入黨했다”는 사람이 많던데.

    “韓 委員長은 所重한 資源이다. 結局은 政治人도 國民과 糖이 키운다고 생각한다. 이분을 우리 國民의힘, 乃至는 韓國 政治에서 어떻게 발전시켜 내느냐에 따라 우리나라 政治의 未來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X世代 政治人’이자 70年代生의 色彩를 가진 最初의 政治人이다. 旣存의 70年代生 政治人은 5060年代生 政治人을 따라가는 形態였다면 이분은 새로운 목소리를 내는 面貌를 갖춘 政治人이다. 한 委員長의 政治 經歷이 80日 程度인데, 그間 저로 인해 順坦치 않아서 다른 사람의 800日 或은 8年과 같은 時間을 보냈을 거다. 只今 이 時點이 첫 試鍊이지 않을까 싶은데 잘 버텨냈으면 좋겠다.”

    왜 只今이 첫 試鍊인가.

    “最近 한 委員長 體制 以後 輿論調査에서 나온 國民의힘 支持率 上昇 氣流가 꺾였다. (3月 8日 基準 韓國갤럽 輿論調査에서 國民의힘 支持度는 37%로 지난週보다 3%포인트 낮아졌다. 仔細한 內容은 中央選擧輿論調査審議委員會 홈페이지 參照) 李鐘燮 前 國防部 長官의 週(駐)濠洲大使 就任 等 여러 惡材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狀況이다. 그에겐 只今이 하나의 試驗臺다.”

    個人이 홀로 惡材를 突破할 수 있을까.

    “國民의힘에 쓴소리日 수 있는데, 어느 政治評論家에게 ‘國民의힘은 다른 목소리가 안 나온다’고 했더니 ‘國民의힘은 다른 목소리가 아니라, 한동훈 以外에 목소리가 自體가 안 나온다’라고 하더라. 그게 現實이다. 목소리 없는 것이 國民의힘의 컬러일 수도 있지만, 한 委員長이 克服해야 할 課題라고 생각한다. 저도 그間 민주당, 正義黨과 疏通했지만 이곳은 참 妙하다. 목소리가 없는 政黨 같다. ‘나 말고 다른 사람, 只今은 한동훈 委員長이 해줄 거야’ 이런 式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疑懼心이 든다.”

    內 業은 問題 提起

    김경율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그가 普通 사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20代부터 50代가 된 只今까지, 찢기고 밟힐 줄 알면서도 ‘아닌 건 아니다’라는 생각 하나로 불구덩이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왔다. 財閥 會長부터 大統領까지, 相對가 누구든 두려워하는 氣色도 없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물으면 答은 하나다.

    光州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只今의 김경율은 없었을 것 같다.

    “劇的인 意味로 5·18 마지막 날의 衝擊이 컸다. 道廳에서 가까운 달동네에 살았는데 銃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그날 以後 光州 사람들 人生의 方向은 定해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누군가 마지막 날에 ‘너 只今 道廳에 들어갈래? 안 들어갈래?’ 물으면 어떻게 答할지 가끔 생각해 본다. 들어간다는 건 죽는다는 뜻이다. 20代, 30代 때는 當然히 들어가겠지만 40代 때는 안 들어갈 것 같다. 50代 때는? 어휴, 銃도 들지 않았을 거다. 이런 말을 왜 하냐면, ‘光州에서 犧牲당한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 ‘이야기해야 할 瞬間과 行動해야 할 瞬間에 부끄럽지 않게 살자’는 생각이 늘 있기 때문이다.”

    20代 때 總學, 手配, 勞動運動을 거친 7年의 時間은 무엇을 남겼나.

    “88學年度에 入學해서 그런 일을 겪었다. 음…. (苦心하다가) 그때는 주어진 課題만 생각하고 달렸다. 30代에 뒤늦게 會計士 合格하고 나서도 어떻게 하면 繼續 運動을 해볼까 생각했으니까. 辯護士는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 모임(民辯), 醫師라면 人道主義實踐醫師協議會가 있는데 會計士는 그런 게 없어서 참여연대에 발을 디뎠다. 只今의 나는 서른 살에 참여연대에 발을 디딘 그때 그 問題意識에서 如前히 벗어나지 않았다고 自負한다.”

    참여연대는 1990年代 末부터 2010年代까지 國家權力과 財閥을 監視하는 役割에 忠實해 왔다. 적어도 2019年 前까지는 그랬다. 粉飾會計를 일삼던 大企業과 國家權力을 등에 업고 활개 치던 政官界 人士들이 市民社會와 國民 눈치를 보기 始作한 데는 참여연대의 功이 크다. 權力을 相對할 때 김경율 非對委員은 어떤 마음으로 달려들었을까. 그는 “問題 提起할 때는 그렇게 悲壯하지 않았다”며 다만, 參與連帶 안에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이가 적어 힘들었음을 告白했다.

    “누구든 던져야 하는 質問이라고 생각하면 回避하지 않고 부딪쳤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疑問이 들 뿐이었다. 草創期에 現代建設 件을 하는데, 참여연대에 會計士가 4~5名 程度로 많았다. 너무나 뚜렷하게 잘못된 事案인데 다른 모두가 아니라고 하더라. 아직도 記憶 날 程度로 衝擊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이 反復됐다. 三星바이오로직스, 다스 等을 다룰 때도 集團知性을 떠나 적어도 같은 職業군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힘이 빠지더라. 이 일을 하면서 ‘왜 問題 提起를 안 할까. 왜 부딪히지 않을까’ 하는 疑問이 늘 있었다. 祖國에 對한 問題 提起도 비슷하다. 當然히 던져야 하는 質問인데 回避하니까 會議가 들었다.”

    2月 5日 三星바이오로직스 粉飾會計 事件의 1審 判決에서 이재용 會長은 無罪를 宣告받았다. 判決 나왔을 때 衝擊이 컸을 듯하다.

    “우스개로 ‘只今 無罪判決이 나와서 가장 唐慌하는 쪽은 三星’이라고 하더라. 充分히 그럴 거라고 본다. 裁判 判決文을 읽었다. 裁判部가 ‘40點 科落만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낸 그런 落書帳 같은 答案紙에 100點을 준 거다. 우리는 財閥 裁判에 恒常 目標를 執行猶豫로 잡는데, 이番에 萬若 執行猶豫가 나왔어도 나는 批判했을 거다. 그 程度로 嫌疑가 분명한데 無罪라고 해버리니까 힘이 빠진다.”

    嫌疑가 분명하다고 보는 理由는.

    “三星바이로직스 事件의 核心 中 하나는 會計變更이다. 會計變更이라는 手法만으로 數兆 원의 利益이 發生하는 일이 생겼다. 그 根據를 公示해야 하는데 안 했다. 三星바이오로직스 事件을 맨 처음 보고 自信했던 端初 中 하나가 바로 ‘公示 漏落’이었다. 그 같은 支配構造 變更을 惹起하는 公示를 漏落한 것 때문에 自身 있게 金融監督院에 問題 提起를 했다. ‘三星이 A에서 B로 會計變更을 하면서 數兆 원의 利益을 만들어냈는데 主席 公示를 해야 하는데 안 했습니다’라고 했더니 金監院도 ‘眞짜네?’ 했다. 金監院, 金融委員會, 檢察도 이 事實은 認定했다. 그런데 이것마저 無罪가 났다. 只今은 바빠서 내가 못 건드리지만 總選 끝나면 期待해도 좋다. 이番 件은 判事가 너무 하셨다.”

    曺國은 道를 벗어났다

    金 委員은 이른바 祖國 事態로 참여연대와 訣別했다. 罪를 지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辱은 그가 다 먹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 그는 “一抹에 아쉬움도 없다. 人間關係가 아쉬우면 讀書 討論會나 山岳會에 가면 된다”고 말했다. 國家權力 非理와 드러난 犯罪를 묻어버리자고 하는 사람들과는 한배를 타기 어렵다는 意志가 確固했다. 只今 그를 向해 非難의 화살을 날린 여러 사람이 國會 入城을 앞두고 있다. 曺國 前 長官도 그 가운데 한 名이다. 子女 入試 非理와 監察 撫摩 嫌疑로 起訴된 그는 2月 8日 2審에서도 1審과 마찬가지로 懲役 2年을 宣告받았다. 그럼에도 3月 3日 曺國革新黨을 創黨하고 代表職을 맡고 있다.

    曺國 代表의 國會 入城이 코앞이다.

    “이것은 戱畫化(코미디)다. 道를 벗어났다. 우리나라 政治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마치 本人이 良心囚人 것처럼 行動하는데 그는 ‘傲慢 形態의 非理 雜犯’일 뿐이다. 非理 雜犯이 ‘檢察 獨裁, 反尹錫悅’을 외치면 免罪符가 되나. 最近 나타나는 支持率 躍進도 우리나라 政治 現實을 赤裸裸하게 비춰주는 것 아닌가 싶다. 많은 분이 反省해야 하는 部分이다. 뭐라고 言及하기 힘들 程度로 悽慘하다. 2019年 曺國 事態가 始作됐고, 5年 뒤인 2024年에조차 우리가 曺國의 江을 못 건너고 있다면, 30年 뒤에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正말 있을 수 없는 政治的 退化라고 생각한다. 回歸, 反動이라고 봐야지.”

    曺國 代表는 不法은 없었다고 主張한다.

    “妄想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조국 氏(그는 職銜을 붙이지 않고 ‘씨’라고 呼稱했다)는 제 이름을 擧論하면서 私募펀드 運用에 무슨 罪가 있냐고 한다. 아니, 鄭慶心 女史 判決文에 이미 私募펀드 關聯 有罪 嫌疑가 認定됐다. 起訴조차 안 된 內容 中에는 이런 것도 있다. 조국 氏가 民政首席이었을 때 5寸 조카가 50億 원 相當 株式을 받았다. 데칼코마니 事例가 있다. 郭尙道 議員은 自己 아들이 50億 원을 받아서 只今 어떤 位置에 處해 있나. 마찬가지로 조국 氏가 民政首席日 때 조범동이 50億 원 相當의 株式을 받은 일이 公訴狀에 없다는 理由로 傳혀 不法이 아닌 게 되나. 道德的으로 最高 公職者로서 合理化할 수 있는 事案인지 묻고 싶다. 只今 생각났는데, 조국 氏가 한 熊東學院 社會 還元 約束은 어떻게 됐나? 이분은 公的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金 委員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름은 曺國 以外 한 名 더 있다. 그는 2021年 大庄洞 開發 特惠 疑惑 公論化에 端初를 提供한 人物이다. 當時 大庄洞 一黨 7名이 總 3億5000萬 원을 投資해 配當金 4040億 원을 가져간 事實이 드러났을 때 많은 國民이 憤慨했다. 大庄洞 一黨과 李在明 代表가 檢察 搜査를 받고 있지만, 民主黨은 大庄洞 事件 關聯해 李 代表 및 그 一黨의 辯護를 맡았던 辯護士 5名을 公薦했다.

    民主黨 公薦에 對해, 只今의 민주당에 對해 어떻게 評價하나.

    “李在明에 依해 公薦 虐殺이 이뤄진 現在의 민주당을 韓國 政黨史에 어떤 式으로 位置 매김할 수 있을까. 한민당으로부터 내려오는 民主黨 系統 속에 넣을 수나 있을까. 말 그대로 李在明 私黨化, 李在明 지킴이, 私組織이 된 것 아닌가 싶다. 大庄洞에 投資한 天火同人, 火天大有 이분들이 10萬% 利益이라는 돈을 챙겼다면, 公薦받은 大庄洞 辯護士들은 10萬%의 權力을 챙겼다. 只今의 민주당은 火天大有와 다를 바 없다. 一例로 言論人 出身 양문석은 막말만 일삼다가 懲戒까지 받았는데 電解鐵 議員을 밀어내고 安山甲 候補가 됐다. 이게 무슨 公的 政黨인가. 私債業者 窓口가 돼버린 것 같다. 過去 민주당에서 財閥 이슈, 會計 이슈로 찾아오면 欣快히 도와드렸는데 참 안타깝다.”

    모든 數式은 虛名일 뿐

    인터뷰 날짜 基準 政治人 經歷 75日. 金 委員은 아직 市民社會 活動家와 政治人, 그 中間 어디쯤에 있는 듯했다. 旣成 政治人이라면 으레 갖춰야 할 德目을 갖추지 않은 채로 變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솟구쳤다. 조금은 特異한 政治人으로, 保守 陣營에 없던 政治人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繼續 입바른 소리를 해주길 바라는 건 無理일까.

    國民의힘 非對委員으로 政治에 발을 들였는데, 總選 以後 行步가 궁금하다.

    “깊이 苦悶하는 部分이다. 過去에 市民運動하다가 政治한다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분들의 모습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싶더라. 率直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웃음). 어떤 式으로든 이제는 汝矣島 文法으로 살아가는 것이 必要치 않나 싶다. 公共善 追求, 財閥·政治權力·經濟權力 監視를 어떤 方法으로 해나갈지 깊이 苦悶하고 있다.”

    議員에 對한 꿈은 아예 접었나.

    “國會議員 되고 싶었던 理由가 하나 있었다. 市民社會에 있으면 資料 하나를 받으려고 해도 國會議員 통해서 받아야 한다. 그 國會議員이 내 問題意識과 맞닿아야 한다. 더군다나 財閥에 對한 거라면 國會議員 한 名 뚫기도 어렵다. 그런데 曺國 事態를 契機로 正義黨, 民主黨 窓口가 아예 없어졌다. 그런 意味에서 國會議員이 되고 싶다는 欲心을 갖기도 했다. 國會議員 꿈을 접은 以上 앞으로 누구를 통해 資料를 얻어야 할까 걱정은 된다.”

    23代 總選은?

    “그때가 되면 내가 60代다. 그때까지 知的 活動, 監視 活動은 繼續하겠지만 한便으로 그 나이에 國會議員 活動해서 뭐 하나 싶다. 한番 抛棄한 以上 國會議員 꿈은 접는 게 낫지 않은가.”

    인터뷰를 準備하면서 金 委員 같은 사람이 내 便이면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便 하자는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金 委員은 누구의 便이 되고 싶은가.

    “한 달 前, 힘들었을 때 親한 後輩가 밥 먹자고 하더라. ‘힘들다. 그런 말 하지마’ 했더니 우스개로 ‘兄 때문에 힘들어했을 사람들을 생각해 봐. 兄이 힘든 것보다 열 倍는 힘들었을걸’ 하더라. 근데, 난 누구의 便도 되고 싶지 않다. 只今 이瞬間의 答辯은 ‘弱한 者의 便에 서겠다는 생각도 이제는 하지 말자’다. 누구의 便도 아닌, 監視의 對象인 사람에게는 匕首를 꽂을 수 있는 그런 役割만 繼續할 거다.”

    앞으로도 三星, 大庄洞 같은 큰 件을 期待해도 좋을까.

    호기롭게 答할 줄 알았던 그가 意外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恒常 어떤 事案을 接할 때 조심스럽다. 조심스럽게 接近할 때만 成果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三星, 다스 等等 恒常 맨몸으로 부딪쳤다. 그때마다 ‘저쪽은 나를 죽일 수 있는 相對’라는 그런 무서움과 두려움을 가지고 對했다. 저한테 붙여진 모든 數式은 虛名(虛名)이라고 생각하고 恒常 조심스럽게 살려고 한다.”

    신동아 4월호 표지.

    신동아 4月號 表紙.



    2024 總選

    정혜연 차장

    정혜연 次長

    2007年 東亞日報 出版局에 入社. 여성동아, 週刊東亞, 채널A 國際部 等을 거쳐 2022年부터 신동아에서 勤務하고 있습니다. 金融, 不動産, 재태크, 流通 分野에 關心이 많습니다. 意味있는 記事를 生産하는 記者가 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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