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軍이 돕지 않았으면 大韓民國은 只今처럼 幸福하게 못 살아요” [+映像]|新東亞

“美軍이 돕지 않았으면 大韓民國은 只今처럼 幸福하게 못 살아요” [+映像]

[Special Report | 美國, 손 놓을 수 없는 帝國] 美軍과 生死苦樂 함께한 ‘最初의 카투사’ 류영봉

  • reporterImage

    김지영 記者

    kjy@donga.com

    入力 2023-09-29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學校 가다 거리에서 카투사로 徵集, K軍番 달아

    • 美國 政府 勳章만 4個

    • “제가 銃알을 避한 게 아니라 銃알이 저를 避했어요.”

    • 三修·甲山 戰鬪에서 戰死한 美軍 衛生兵 우드

    • 中國人民支援軍 攻擊 받아 얼어 죽은 長津湖 戰鬪 屍體들

    [+映像] “美軍이 돕지 않았으면 大韓民國이 只今처럼 幸福하게 못 살아요”



    “제 목숨은 하늘이 내린 것 같아요. 제가 銃알을 避한 게 아니라 銃알이 저를 避했어요.”

    9月 8日 大邱에서 만난 最初의 ‘카투사(KATUSA)’ 류영봉(91) 翁은 6·25戰爭에 參戰해 큰 負傷 없이 살아남은 祕訣을 이렇게 說明했다. 카투사는 말 그대로 ‘美軍에 屬한 韓國軍 遙遠(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이다. 1950年 7月 苦戰(苦戰)을 거듭하던 美軍은 카투사를 創設해 韓半島 地形을 잘 아는 韓國人 靑年들로 채웠다. 류영봉 翁은 그해 8月 15, 16日 美軍이 大邱에서 徵集한 카투사 2000名 中 한 名이다.

    류영봉 옹. [홍중식 기자]

    류영봉 翁. [홍중식 記者]

    兄의 助言으로 배운 英語의 힘

    “學校 가는 途中에 警察官 아저씨가 길 가는 男子들을 無條件 檢問하는 거예요. 나도 부르기에 ‘왜 부릅니까? 工夫하러 가야 합니다’ 했죠. 뒤에 車가 서 있었는데 벌써 여덟 名假量이 타고 있었어요. ‘아이고 난 學生이고 나이도 안 됐습니다’ 카니까 ‘키가 커서 된다’며 트럭에 태웠어요. 길에서 徵集돼 집에 連絡도 못 하고 카투사가 됐죠.”

    高等學校 3學年이던 열여덟 살 때 徵集된 류영봉 翁은 배를 타고 日本으로 건너가 3週 동안 軍事訓鍊을 받았다. 美 陸軍 7步兵師團 17聯隊 義務部隊에 配屬돼 救護法, 應急治療法, 들것 드는 法 等을 배웠다. ‘K1101755’ 軍番을 달고 카투사로 北韓軍, 中國人民支援軍(中共軍)과 싸웠다. K로 始作하는 軍番은 카투사 1기에만 附與됐다. 美軍은 部隊에서 韓國人을 區分하고자 軍番에 K를 붙였다.



    “戰鬪 衛生兵이어서 患者를 輸送하며 軍醫官을 補助하는 役割을 맡았어요. 兄님의 先見之明으로 英語를 미리 익혀둔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저보다 스무 살 위인 큰兄님이 醫師였어요. 兄님은 美軍이 韓國에 駐屯해 있으니 英語를 배워두면 要緊하게 쓰일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英語辭典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모르는 單語를 외웠는데, 그 말이 딱 들어맞았어요. 카투사 中에 英語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只今은 토익 780點 以上만 카투사에 支援할 수 있지만 創設 初期에는 英語는커녕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無學者가 많았다. 카투사 兵士들의 敎育 水準 差異와 年齡 隔差도 컸다.

    “카투사가 처음에는 6·25戰爭 때 急造된 軍人인데 戰鬪에서 勇猛하게 싸우고, 命令에 잘 따르며 일을 잘 處理하니까 오늘날까지 존속시키는 거예요. 戰爭이 났을 境遇 美軍 處地에서 我軍과 敵軍을 區分할 수 있는 사람이 必要하고 戰力에도 도움이 되니까요. 카투사는 仁川上陸作戰을 始作으로 主要 戰鬪에서 赫赫한 戰果를 올렸어요. 敵과 我軍을 區別하는 데 能했고, 民間人·捕虜를 相對로 많은 情報를 얻어 美軍이 戰略을 짜는 데도 도움을 줬죠.”

    徵集 當時 카투사 服務 期間은 1年 6個月이었지만 류영봉 翁은 1954年 7月까지 3年 11個月을 美軍 部隊에 있었다. 英語 實力이 出衆하고 責任感 剛한 面貌를 美軍이 높이 評價해서다.

    류영봉 翁은 6·25戰爭이 끝난 뒤 記憶을 되살려 參戰한 戰鬪와 移動 經路를 한 張의 地圖 위에 記錄했다. 얼마나 많은 戰鬪에서 美軍과 生死苦樂을 함께했는지 한눈에 보이는 指導다. 깨알 같은 點과 글씨가 섞인 地圖를 들여다보면서 그는 잊지 못할 戰鬪와 戰友를 떠올렸다.

    류영봉 옹이 6·25전쟁이 끝난 뒤 기억을 되살려 참전한 전투와 이동 경로를 기록한 지도. [류영봉 제공]

    류영봉 옹이 6·25戰爭이 끝난 뒤 記憶을 되살려 參戰한 戰鬪와 移動 經路를 記錄한 地圖. [류영봉 提供]

    傳貰 뒤집은 仁川上陸作戰

    “埋伏한 中共軍의 奇襲攻擊을 받아 많은 死傷者가 났던 長津湖 戰鬪가 가장 記憶에 남아요. 이미 얼어 죽어 治療가 無色해진 我軍 屍體들을 보며 너무도 가슴이 아팠던 記憶이 납니다. 13萬 中共軍에게 包圍됐다가 끊어진 黃草嶺 다리를 復舊해 가까스로 脫出에 成功한 일도 잊히지 않아요. 무엇보다 더글러스 맥아더 將軍과 함께한 仁川上陸作戰을 잊을 수 없어요. 國軍과 유엔軍이 仁川 上陸에 成功한 德에 빼앗긴 지 3個月 만인 1950年 9月 28日 서울을 되찾고 傳貰를 뒤집었어요. 그때 저와 함께 負傷兵을 돌본 美國人 衛生兵이 있어요. 우드라는 이름의 戰友인데 鴨綠江으로 進擊하던 途中 咸鏡南道 三水·甲山 戰鬪에서 戰死했어요. 大韓民國의 共産化를 막으려고 參戰해 목숨을 바친 거예요. 참으로 고맙고 未安한 戰友입니다. 저보다 한 살 많은 서재용 兄도 몹시 그립습니다. 戰爭이 끝난 後 連絡이 끊겼는데 살아 있다면 꼭 다시 만나 못다 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1952년 류영봉(왼쪽) 옹이 카투사 동기인 서재용 전우와 중부전선에서 찍은 기념사진. [류영봉 제공]

    1952年 류영봉(왼쪽) 옹이 카투사 動機인 서재용 戰友와 中部戰線에서 찍은 記念寫眞. [류영봉 提供]

    그는 카투사로 徵集된 지 두 달 半 만에 어머니와 劇的으로 다시 만난 일도 생생하게 記憶했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學校 간다고 집을 나간 막내가 돌아오지 않아 날마다 四方八方 그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仁川上陸作戰이 成功해 서울을 奪還한 後 우리 部隊가 大邱로 돌아온 날이 1950年 10月 27日이에요. 그날 大邱 驛前 廣場에서 偶然히 어머니를 만났어요. 흰 옷을 입은 女子가 나를 찾는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軍醫官에게 말했더니 唯一하게 英語를 하는 내가 달아날까 봐 처음엔 못 가게 했어요. 그래서 같이 가보자고 했죠. 어머니가 맞았어요. 서로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部隊로 돌아왔어요, 그때부터 어머니와 다시 連絡이 됐죠.”

    류영봉 翁은 1950年 8月 16日부터 1954年 7月 4日까지 3年 11個月 동안 카투사로 美軍과 生死苦樂을 함께했다. 一一이 列擧하기 힘든 많은 戰鬪에 投入됐고 停戰協定 當日(1953年 7月 27日) 새벽까지 交戰을 치렀다. 休戰이 됐을 때 階級은 1等 中士였다. 1等 中士 以上은 試驗을 거쳐 美軍이 新設한 師團으로 갈 수 있었다.

    美軍 德에 孝道하고 네 子女 교육시켜

    “그 무렵 새로운 師團이 많이 創設됐어요. 通譯官 試驗에 合格해 美軍에 繼續 남으려고 했는데 어머니를 모실 사람이 집에 아무도 없었어요. 司令官에게 家庭事를 말하고 辭職했습니다. 카투사 除隊 後 1年 남은 高校 學業을 마치고 就職할 곳을 알아봤어요. 學閥이 변변치 않은데다 技術도 없어서 받아주는 곳이 없었어요.”

    류영봉 翁은 그즈음 美軍 部隊에서 낸 募集 公告를 보고 應試해 優秀한 成績으로 合格했다. 英語 實力과 衛生兵으로 多樣한 患者를 돌본 經驗 德에 大邱에 位置한 駐韓美軍 部隊 캠프 워커의 病院에 就職했다. 남보다 10分 빨리 出勤, 15分 늦게 歸家했다. 萬 61歲가 停年이지만 71歲까지 46年을 勤務했다.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繼續 勤務할 수 없는데 多幸히 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美軍部隊에서 看護 試驗에 合格해 슈퍼바이저 首看護師 兼 應急室長으로 일했어요. 그 德에 아들 둘, 딸 둘을 다 大學에 보내고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어요. 제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혼자 9男妹를 키우셨어요. 세 名은 죽고 6男妹가 살아남았는데 저 말고도 兄님 두 분이 6·25戰爭에 參戰했어요. 한 분은 戰死하고, 다른 한 분은 負傷을 當했죠. 큰兄님은 시골에서 돌아가시고, 누님 두 분은 結婚하셨고요. 저까지 戰死했으면 어머니가 어찌 사셨겠습니까. 只今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어머니가 84歲까지 사셨어요. ‘막내랑 같이 살면서 幸福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죠.”

    류영봉 翁은 1958年 5月 25日부터 2004年 5月 25日까지 病院에서 일하며 美軍을 도왔다. 美國 政府는 그에게 勳章 4個를 授與했다. 그中에서도 美軍 醫務司令官이 直接 들고 온 勳章을 받은 것이 特히 뿌듯하다.

    류영봉(왼쪽) 옹이 1988년 10월 18일 미국 정부가 수여한 명예 훈장을 받고 있다. [류영봉 제공]

    류영봉(왼쪽) 옹이 1988年 10月 18日 美國 政府가 授與한 名譽 勳章을 받고 있다. [류영봉 提供]

    “제가 2710番째 授與者예요. 얼마나 대단한 勳章인지 美軍들이 보면 忠誠을 盟誓할 程度예요.”

    2004年 退職 後에도 美軍과 軟餌 끊이지 않았다. 美國 赤十字社 會員 資格으로 勤務하던 病院에서 18年째 奉仕活動을 하고 있다.

    “骨折 患者에게 깁스를 해주고 있어요. 技術을 배워 資格證도 取得했습니다. 骨折돼 부어 있을 때는 깁스를 못 합니다. 副木을 대고 있다가 浮氣가 빠진 다음에 措置합니다.”

    18年 동안 그가 奉仕한 時間은 無慮 5974時間에 達한다. 버락 오바마 前 美國 大統領은 在任 時節 그에게 感謝狀을 보냈다.

    “美軍 아니었으면 越南처럼 됐을 것”

    그는 尹錫悅 大統領의 가장 큰 業績으로 韓美同盟 强化를 꼽았다.

    “尹錫悅 大統領이 就任한 後 韓美同盟이 더욱 굳건해졌어요. 美軍이 이제 韓國에서 안 나갈 겁니다. 나가면 안 돼요. 北韓이 바로 쳐들어옵니다. 6·25戰爭 當時 鴨綠江에 到着했을 때 中共軍이 넘어왔어요. 그때 맥아더 將軍이 核爆彈을 터뜨리려 했는데 해리 트루먼 大統領이 反對했어요. 核爆彈이 그때 터졌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1953年 10月 1日 締結된 韓美相互防衛條約이 올해 10月 1日로 70周年을 맞았다. 6·25戰爭 當時 美軍이 돕지 않았다면 大韓民國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越南(남베트남)과 같은 일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越南이 共産化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犧牲됐어요. 軍人 家族, 警察 家族, 公務員 家族은 無條件 없앴습니다. 北韓이 6·25戰爭에서 이겼다면 北에 있는 사람은 남으로, 남에 있는 사람은 北으로 보내 韓半島를 完全히 共産黨 世上으로 만들었을 거예요. 數百萬 名을 處刑했을 거예요. 美軍이 돕지 않았다면 大韓民國은 只今처럼 幸福하게 못 살아요”

    류영봉 翁은 大邱 地域 初·中·高校에서 6·25戰爭 바로 알리기 講師로도 活動한다. “6·25戰爭이 北韓의 南侵으로 始作됐고 그 때문에 國土가 廢墟가 됐다는 事實을 學生들도 알아야 한다”는 信念에서다. 카투사 後輩들의 要請으로 카투사 1期로서 산 經驗을 들려준 적도 있다.

    “講義를 들으면서 가슴에 와닿았다는 사람이 많아요. 제 講義를 듣고 나서 初等學生들도 人事하러 달려옵니다. 우리는 美軍의 도움을 잊어서는 안 돼요. 고마운 마음을 恒常 갖고 있어야 합니다.”

    [신동아 10월호 표지 B컷]

    [신동아 10月號 表紙 B컷]



    김지영 기자

    김지영 記者

    放送, 映畫, 演劇, 뮤지컬 等 大衆文化를 좋아하며 人物 인터뷰(INTER+VIEW)를 즐깁니다. 요즘은 팬덤 文化와 不動産, 流通 分野에도 특별한 關心을 갖고 있습니다.

    “나를 팔딱팔딱 뛰게 하는 엔돌핀, 生涯 最高 膳物이죠”

    油菜꽃 구경하고 고추醬불고기 먹고…순창, 1泊2日 旅行地로 浮上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