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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夢龍은 三角紙에서 동작나루까지 어느 길로 갔을까|신동아

李夢龍은 三角紙에서 동작나루까지 어느 길로 갔을까

龍山 옛길 사라진 歷史를 찾아서

  • 金賢美 記者

    khmzip@donga.com

    入力 2023-05-2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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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 120年, 되살리는 600年

    • 龍山어린이庭園 ‘街路樹길’과 13番 게이트에 숨은 事緣

    • 李舜臣 將軍의 白衣從軍과 三南大路

    • ‘燕山君日記’에도 나온 ‘이태원路’, 只今은 어디?

    • 20番 게이트 앞에서 끊긴 朝鮮 通信社 길

    • 眞짜 이태원은 용산基地 안에 있었다

    5월 4일 개방된 용산어린이정원 중 가로수길 구간. 120년 동안 끊겼던 해남로(삼남로)의 주요 구간 중 하나다. [동아DB]

    5月 4日 開放된 龍山어린이庭園 中 街路樹길 區間. 120年 동안 끊겼던 海南로(삼남로)의 主要 區間 中 하나다. [東亞DB]

    서울 용산구 漢江大路38길 21(용산동5街 2-1). 尹錫悅 大統領의 就任 1周年을 앞두고 5月 4日 開放한 ‘龍山어린이庭園’의 公式 住所다. 이番에 臨時 開放된 區域은 大統領室 隣近 約 30萬㎡(藥 9萬 坪)로 龍山基地 約 243萬㎡(藥 74萬 坪) 中 지난해 大統領室의 龍山 移轉을 契機로 早期 返還된 58.4萬㎡(藥 18萬 坪)의 一部分이다.

    龍山基地 터는 大統領室, 戰爭記念館, 國立中央博物館 區域을 包含해서 全體的으로 위가 좁고 아래가 둥근 福주머니 形態다. 北쪽 메인포스트와 南쪽 사우스포스트를 東西로 가르는 道路가 이태원路인데 地圖上에서 보면 마치 福주머니 入口를 묶은 끈처럼 보인다. 三角地域과 녹사평역을 잇는 地下鐵 6號線이 그 길 아래를 通過한다. 大統領室은 福주머니 둥근 部分의 上段 왼쪽에 있고, 이番에 造成된 龍山어린이庭園은 그 아래 볼록하게 튀어나온 部分이라고 보면 된다.

    地下鐵 信用山役 1番 出口에서 漢江대로38길을 따라 걸으면 龍山어린이庭園의 主 出入口가 나온다. 용산基地의 總 21個 出入口 中 14番 게이트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 綜合案內센터를 通過하면 次例로 龍山弘報館, 용산서가, 展示館, 이음마당, 이벤트하우스를 지나 카페어울림에 이른다. 여기서 右回轉하면 南쪽 方向으로 쭉 뻗은 길이 나온다. 길 兩옆으로 플라타너스가 심어져 있어 ‘街路樹길’로 불린다. 이 길 끝에 13番 게이트가 있다. 지난해 尹錫悅 大統領이 就任式 다음 날 出勤길에 利用한 바로 그 門이다. 13番 게이트를 나오면 二村驛이 있다. 國立中央博物館 訪問者들이 主로 利用하는 地下鐵驛이다.

    5月 4日 龍山어린이庭園이 開放되자 言論은 一齊히 ‘120年 禁斷의 땅이 市民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標題를 뽑았다. 그렇다. 너무나 오랜 歲月 이곳은 大韓民國 國民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는 ‘남의 나라’였다. 返還 前 龍山 美軍基地의 公式 住所는 캘리포니아州. 大統領의 出勤길을 따라 들어가보자. 13番 게이트를 通過하면 넓은 잔디廣場을 놓고 兩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이 보그 애비뉴, 오른쪽이 윌리엄스 애비뉴다. 이 가운데 보그 애비뉴가 이番에 龍山어린이庭園의 街路樹길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보그 애비뉴 以前에 이 길은 무엇이었을까.

    이몽룡 路程記 “청파배다리, 돌모루, 밥錢거리, 모래톱 지나”

    동아일보 1925년 12월 4일자 이광수 연재소설 ‘대춘향’. 거지꼴로 변복한 이몽룡을 그린 삽화가 실려 있다. [동아일보 캡처]

    東亞日報 1925年 12月 4日子 이광수 連載小說 ‘臺春香’. 거지꼴로 變服한 李夢龍을 그린 揷畵가 실려 있다. [동아일보 캡처]

    春園 李光洙는 1925年 9月 30日부터 이듬해 1月 3日까지 동아일보에 小說 ‘臺春香(大春香)’을 連載했다(1929년 ‘一說春香傳’이라는 題目으로 出版). “여봐라 房子야!”로 始作해 總 96回에 걸쳐 連載된 小說은 第66回(1925年 12月 4日子)에서 드디어 李夢龍이 壯元及第를 한다. 御命을 받아 全羅御史로 行次하기 前 李夢龍이 거지꼴로 變服하는 場面이 꽤나 흥미롭다.



    “御殿에 下直하고 囚衣(繡衣?數를 놓은 옷, 暗行御史의 別稱) 鍮尺(鍮尺·놋쇠 者), 三馬牌(三馬牌)를 고두리뼈에 단단히 차고(…)철대 없는 破笠(찢어진 갓)에 무명실로 끈을 달고 黨만 남은 헌 網巾에 갓풀貫子 종이당줄 걸어 매고 다 떨어진 베道袍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七푼짜리 목통대에 다 해어진 맛部値를 웃대님 질끈 매고 변죽 없는 負債를 들고 暗行御史란 父母妻子에게도 알리지 못하는 法이라 告祠堂 下直만 하고 청파역卒 分付하고 南大門 썩 나서서 全羅道로 내려간다.”

    漢陽 都城을 빠져나온 이묭룡이 全羅道로 가려면 漢江을 건너야 했다. 江邊까지 오늘날 崇禮門~서울驛~三角紙로 이어지는 길을 利用했다.

    “칠패, 팔牌, 이門골, 度저골, 쪽다리를 지나 청파배다리, 돌모루, 밥錢거리, 모래톱 지나 動作이(동재기나루, 동작진) 바삐 건너 승방뜰 건너 남태령 넘어 인덕원 지나 果川에서 中和하고(中火·길을 가다 點心을 먹음)….”

    이는 판소리 ‘烈女춘향 守節家’ 中 ‘李夢龍 路程記’의 內容과도 一致한다. 낯선 地名들이지만 實際 있는 곳이다. 칠패와 팔牌는 朝鮮時代 巡邏軍들이 8牌로 나뉘어 都城을 巡察한 데서 나온 이름으로 現在 中區 봉래동에 칠패市場터라는 標石이 있다. 팔牌는 칠패 바로 아래쪽 洞네로 봉래동2街 附近이다. 利文골은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마을로 南關王廟(南關王廟)의 이문(里門·도둑을 團束하기 위해 마을 入口에 세운 門)에서 由來했다. 南關王廟는 나중에 說明하기로 하고 到底골로 넘어가자. 度저골 또는 徒弟골은 이 一帶에 복숭아나무와 닥나무가 많은 데서 由來한 이름으로 오늘날 中區 남대문로 5街와 용산구 동자동 一帶에 該當한다.

    쪽다리와 청파배다리(청파主敎)는 만초천(蔓草川)을 건너는 다리였다. 이곳에 처음 돌다리가 놓인 것은 燕山君 때. 만초천은 北쪽 仁王山과 무악산에서 發源해 南쪽으로 흘러온 물줄기(本流)와 南山 골짜기에서 始作해 용산基地를 가로질러 西쪽으로 흐른 물줄기(支流)가 南營驛 附近에서 만나 漢江으로 合流하는 천이다. 1900年代 初 만초천 本流 一帶가 鐵道敷地로 編入되면서 물길이 바뀌고, 1967年 覆蓋工事로 靑把撈가 생기면서 땅밑으로 사라졌다. 現在 靑坡洞1街 161番地에 청파배다리 標石이 있으나, 이순우 民族問題硏究所 責任硏究員에 따르면 實際 배다리는 現 位置에서 300m남짓 北쪽으로 올라간 支店이라고 한다.

    석우(石隅)라고도 하는 돌모루는 南營洞 窟다리 附近으로 推定하는데, 배우리 韓國땅이름學會 名譽會長은 仁王山과 南山에서 흐르는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支店에서 물줄기가 휘어돌아 돌모루가 됐다고 풀이한다. 밥展거리는 漢字로 反戰거리(飯廛巨里)다. 글字 그대로 밥을 파는 집들이 모여 있다 해서 생긴 地名으로 三角地 附近으로 推定한다. 隣近 漢江大路62길에 먹자골목이 形成돼 있는 것도 이와는 無關치 않아 보인다.

    暗行御史 李夢龍은 모래톱을 지나 동작진에 다다랐다. 崇禮門에서 12里, 約 4.7km를 걸은 셈이다. 이묭룡은 여기서 배를 타고 漢江을 건너 승방뜰(관악구 남현동에 있는 관음사 앞쪽 地域), 남태령, 인덕원을 次例로 지나 果川에 到着해 點心을 먹었다. 그런데 三角紙에서 動作나루까지는 어떤 길로 갔을까.

    三角地域에서 二村驛 잇는 지름길

    古山子 金正浩가 編纂한 ‘大東地志(大東地志)’ 卷27 ‘整理高(程里考·漢陽에서 全國 重要 地點까지의 距離 情報를 整理한 冊)’에는 都城을 나와 全國으로 갈라지는 10個 대로가 나온다. 金正浩는 이를 ‘城門分路(城門分路)라고 했다. 이 가운데 漢陽에서 南쪽(忠淸, 全羅, 慶尙)으로 가는 세 갈림길은 동작나루를 건너는 海南로(8대로), 西氷庫(또는 漢江나루)에서 넘어가는 東來로(4대로), 露梁나루와 連結되는 水原로(7대로)다.

    一旦 崇禮門을 나서면 청파배다리~청파역을 지나 석우참에서 세 갈래로 갈라졌다. 交通의 要地인 석우에 驛站이 생긴 理由이기도 하다. 이순우 氏는 “이러한 行路를 살펴보면 오늘날의 용산 地域 全體가 그 옛날 三南 地方을 向해 나아가는 길목 役割을 했다”고 說明한다.

    19세기 중반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 중 도성을 중심으로 한강 유역까지 그린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하단에 과천로로 표기된 길이 해남로 또는 삼남로의 한 구간이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世紀 中盤 金正浩가 製作한 ‘東輿圖’ 中 都城을 中心으로 漢江 流域까지 그린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下段에 과천로로 表記된 길이 海南로 또는 三南로의 한 區間이다. [서울歷史아카이브]

    1921년에 제작된 조선지형도. 굵은 선 부분이 삼각지에서 동작나루까지 연결되는 지름길이다. 강변으로 둥글게 모래톱이 형성돼 있는 것도 보인다. [김천수]

    1921年에 製作된 朝鮮地形度. 굵은 線 部分이 三角紙에서 동작나루까지 連結되는 지름길이다. 江邊으로 둥글게 모래톱이 形成돼 있는 것도 보인다. [김천수]

    네이버 지도에서 이몽룡의 암행어사 길(과천로, 삼남로)을 따라가 보면, 오늘날 지하철 삼각지역(밥전거리)에서 이촌역(모래톱, 동작나루)을 잇는 지름길이 나온다. 5월 4일 개방된 용산어린이정원의 가로수길이 바로 그 구간의 일부다.

    네이버 地圖에서 李夢龍의 暗行御史 길(과천로, 三南로)을 따라가 보면, 오늘날 地下鐵 三角地域(밥錢거리)에서 二村驛(모래톱, 동작나루)을 잇는 지름길이 나온다. 5月 4日 開放된 龍山어린이庭園의 街路樹길이 바로 그 區間의 一部다.

    全羅御史 李夢龍이 간 길은 海南로다. 民間에서는 삼남대로나 三南길이라는 名稱이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 19世紀 中盤 金正浩가 製作한 ‘東輿圖’ 中 都城을 中心으로 漢江 流域까지 그린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서는 과천로라고 表記했다.

    다시 李夢龍이 동작나루에서 배를 타기 直前 行路를 살펴보자. 밥전거리에서 모래톱으로 가는 지름길은 오늘날 三角地域에서 二村驛을 直線으로 이으면 나온다. 김천수 知音建築都市硏究所 附設 龍算學硏究센터腸은 “李夢龍의 暗行御史길을 따라가 보면 三角地域 附近에서 龍山어린이庭園을 通過해 二村驛 方向으로 이어진다. 現在도 옛길이 남아 있다”고 했다. 오늘날 龍山어린이庭園에서 13番 게이트와 連結되는 ‘街路樹길’이 바로 그 區間이다. 1921年 製作된 ‘朝鮮地形度’를 보면 이미 日帝에 依해 兵營化가 進行됐음에도 이 옛길의 痕跡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 길은 小說 속 이묭룡만 다닌 게 아니다. 김천수 氏는 “三南大路(海南로) 옛길은 漢陽 崇禮門에서 全南 海南까지 軍士는 勿論 主要 物資가 移動하는 經路로서 韓半島의 動脈과 같다. 오늘날 國道 1號線이 바로 이 三南大路를 根幹으로 形成됐다. 아쉽게도 한 世紀 前 日帝의 龍山 兵營이 들어서면서 主要 區間이 막혀버렸다”고 說明했다. 2019年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發刊한 ‘경기학廣場’은 삼남대로를 이렇게 紹介했다.

    “삼남대로는 目的地가 海南과 濟州道이며 湖南으로 向하는 가장 큰 길이다. 海南과 濟州는 朝鮮時代 代表的인 流配地이기도 하여서 流配를 떠나거나 流配에서 풀려 돌아온 많은 이들이 밟은 길이기도 하다. 全南 강진과 新安으로 流配를 갔던 丁若鏞과 정약전 兄弟가 밟은 길이며 抑鬱한 獄살이가 끝나고 白衣從軍을 위해 李舜臣 將軍이 밟았던 經路이기도 하다.”

    5月 4日 龍山어린이庭園 開場과 함께 三南大路 主要 區間이 120年 만에 連結됐다. 어쩌면 李舜臣도, 丁若鏞도 지나갔을 이 區間에 ‘街路樹길’이라는 普通名詞가 아니라 옛길의 品格에 걸맞은 새 이름이 必要한 理由다.

    “南廟, 梨泰院 지나 곧장 西氷庫로 가는 게 첩길”

    3月 15日 ‘朝鮮時代 通信社 行路 漢陽(龍山) 區間 踏査’ 行事가 열렸다. 朝鮮時代通信社顯彰會, 造船社行路硏究回, 龍山學硏究센터가 主催한 이 行事에서 踏査한 區間은 崇禮門~도저동 三거리~남墓터~우수현~후암동~典牲署터~南端 고개.

    朝鮮 通信社(通信使)란 朝鮮 後期 日本과 交流하기 위해 派遣한 外交使節로, 300~500名 規模의 使節團이 平均 9個月에 걸쳐 往復 4000㎞가 넘는 大長程을 했다. 2017年 朝鮮 通信社가 남긴 記錄物 333點이 유네스코 世界記錄遺産에 登載되기도 했다.

    通信社들은 東來로(4대로, 嶺南大路)를 利用해 釜山까지 가서 배를 타고 日本으로 갔다. 西氷庫나루 또는 漢江나루에서 江을 건너 龍仁~忠州~鳥嶺~大邱~東來까지 960里(藥 377㎞)다. 그렇다면 崇禮門을 나선 通信社들이 西氷庫나루까지 어떤 길로 갔을까. 金正浩의 ‘大東地志’ 整理高에는 釜山으로 가는 行路가 이렇게 整理돼 있다.

    “崇禮門 南쪽으로 이문동을 지나 主敎, 청파역, 석우참까지 4里이다. 석우참 東南쪽으로 둔지산을 지나 西氷庫나루에 이르기를 6里(漢江鎭 아래 卽 漢江나루 아래에 있고 崇禮門에서 10里 距離다. 4대로를 보라. 이문동에서 도저동을 經由하여 南廟, 이태원을 지나 곧장 西氷庫에 이르는 것이 첩로다.”

    釜山으로 가려면 普通 청파배다리, 돌모루, 둔지산을 거쳐 西氷庫나루로 가는데 南廟와 이태원에서 곧장 가는 샛길이 지름길이라는 說明이다.

    1951년 3월 16일 미군 항공촬영 사진 속 폐허가 된 남묘와 그 주변.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김천수]

    1951年 3月 16日 美軍 航空撮影 寫眞 속 廢墟가 된 南廟와 그 周邊. 美國國立文書記錄保管廳. [김천수]

    梨泰院 옛길의 痕跡, 도저동 關羽新

    仁祖 2年(1624) 通信使가 된 강홍중(1577~1642)은 도저동~南廟~이태원을 지나는 지름길을 利用한 것으로 보인다. 강홍중이 쓴 ‘동사록’에 射倖길 첫날 家族 親知들과 餞別式을 하고 도저동 三거리에서 잤다고 記錄했다. 도저동 三거리는 現 서울驛 맞은便 南大門警察署 附近이다. 도저동, 道童으로 불리다가 이제는 地名조차 사라지고 後癌三거리 모퉁이에 있는 ‘道童집’이라는 食堂 이름으로 記憶될 뿐이다.

    도저동 隣近에 南廟가 있었다. 南廟의 正式 名稱은 ‘南關王廟(南關王廟)’. 壬辰倭亂 때 關羽(蜀나라 將帥)의 祭祀를 지내기 위해 南大門 밖에 세운 祠堂이다. 當時 朝鮮에 派兵된 明나라 將帥 眞人이 倭軍과의 戰鬪에서 關羽가 自身을 保護했다며 關王廟 建立을 始作했고, 서울에는 東廟(신설동)와 南廟가 세워졌다. 特히 宣祖의 名으로 세워진 南廟는 壬亂 克服의 象徵처럼 여겨져 大韓帝國 時期까지도 國家 祠堂의 機能을 했다. 關羽神을 모시는 民間信仰이 널리 퍼지게 된 것도 南廟의 影響이 적지 않았다.

    1922年 東亞日報 記錄을 보면 端午날 南廟 앞에서 그네타기를 비롯해 各種 行事가 열렸고, 所願을 비는 아낙네들로 南廟 앞이 門前成市를 이뤘다고 한다. 6·25戰爭 때 爆擊으로 廢墟가 됐다 光復 後 復舊했으나 1979年 대우빌딩과 힐튼호텔이 建立되는 過程에서 祠堂은 사당동으로 옮겨졌고 只今은 廢墟만 남았다. 오늘날 南廟 터는 中區 남대문로5街 GS駐車빌딩 앞이다.

    우수현(牛首峴)은 용산구 동자동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를 넘어갈 때 模樣이 마치 소머리를 닮아서 優秀재라 했다거나 優秀先生이라는 선비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傳해진다. 每年 正月大보름이나 端午날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돌싸움을 하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놀이라고 하지만 다치거나 죽는 사람까지 나와 義禁府에서 禁止했다는 記錄도 있다.

    南廟 터를 보고 우수현 고개를 넘어 西氷庫로 가는 길목에 典牲署(典牲署)가 있었다. 典牲署란 朝鮮時代에 宮中 祭享에 쓸 祭物을 管掌하는 官衙로 只今은 그 터에 영락보린원이 있다. 朝鮮時代 通信社들은 典牲署를 쉼터로 活用했다. 英祖 39年(1763) 通信使로 日本에 갔다가 고구마 種子를 가져온 門匿空 趙曮이 典牲署에서 쉬는데 領議政 洪鳳漢이 飮食을 차려 餞送했다는 記錄을 남겼다.(조엄 ‘海士日記’)

    木覓山 南쪽, 이태원은 어디에 있었나

    典牲署에서 두텁바위로 쪽으로 내려오면 龍山中高等學校 正門 앞에 세워진 ‘梨泰院(梨泰院)터’ 標識石을 볼 수 있다. 標識石에는 ‘朝鮮時代 一般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서울 近郊 네 宿所의 한 곳’이라는 文句가 새겨져 있다. 朝鮮時代 驛은 말을 빌려주는 곳, 원은 宿食을 提供하는 곳이었다. 漢陽 4代 원이란 南大門 밖 梨泰院, 東大門 밖 보제원, 西大門 밖 洪濟院, 光熙門 밖 前官員을 가리킨다.

    中宗 25年(1530)에 刊行된 ‘新增東國輿地勝覽(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태원은 木覓山(南山) 南쪽에 있었다”고 했다. 朝鮮時代 이태원은 漢陽에서 嶺南으로 가는 主要 길목인 청파역과 社評度(沙平渡·모래펄나루라는 뜻으로 오늘날 江南區 新沙洞 附近) 사이에 設置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龍山中古 4거리에서 南쪽으로 가는 길은 相當한 경사로다. 이 길을 南端 고개라고 부르는 것은 이곳에 朝鮮時代 王들이 祈雨祭를 지낸 南端(南壇)이 있었기 때문이다. 正祖 12年(1788)에 유의양이 王命을 받아 朝鮮時代 國家 祭禮를 整理한 ‘春官通告(春官通考)’에 따르면 南端 가운데 風雨雷雨神, 왼쪽에 城隍之神, 오른쪽에 山川地神을 모셨다. 人組, 景宗, 英祖, 正祖 等 歷代 王들이 이곳에서 祈雨祭를 지냈다는 記錄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南端이 있었던 곳으로 推定되는 場所는 龍山 美軍基地(캠프 코이너 자리) 안에 돌무지 形態로 放置돼 있다. 김천수 氏는 “現在 南端으로 推定되는 丘陵地 바로 옆이 駐韓 美國大使館 新築 敷地여서 早速한 發掘 調査와 南端의 歷史性에 對한 硏究가 必要하다”고 했다.

    南端 附近을 記憶해야 하는 또 다른 理由는 이곳이 壬午軍亂(1882) 때 興宣大院君이 淸나라 軍隊에 拉致를 當한 歷史의 現場이라는 데 있다. 淸나라 황사림 部隊 駐屯地였고, 日本軍 龍山練兵場이었으며, 嚴福童이 前 朝鮮자전차競走大會에서 優勝한 場所이고, 大韓民國 最初 砲兵訓鍊소가 있었던 場所다. 只今은 駐韓 美國大使館 移轉 豫定地다.

    아직 열리지 않은 祕密의 門 20番 게이트

    1956년, 현재 20번 게이트와 거의 동일한 위치에서 바라본 풍경. 북쪽의 서울 산들이 훨씬 더 잘 보인다. [김천수]

    1956年, 現在 20番 게이트와 거의 同一한 位置에서 바라본 風景. 北쪽의 서울 山들이 훨씬 더 잘 보인다. [김천수]

    20번 게이트 앞에서 북쪽을 바라본 전경. 2022년 1월 1일 촬영한 것이다. 왼쪽이 용산 미군기지 캠프 코이너 담벼락이고 오른쪽은 옛 방위사업청(현재 국방홍보원과 국방부가 일부 사용)이다. 길 끝에 백악산(북악산)이 보인다. [김천수]

    20番 게이트 앞에서 北쪽을 바라본 前景. 2022年 1月 1日 撮影한 것이다. 왼쪽이 龍山 美軍基地 캠프 코이너 담벼락이고 오른쪽은 옛 防衛事業廳(現在 國防弘報員과 國防部가 一部 使用)이다. 길 끝에 白岳山(北岳山)李 보인다. [김천수]

    朝鮮 通信社길 踏査는 龍山 美軍基地 20番 게이트 앞에서 끝난다. 여기서 몸을 돌려 北쪽을 바라보면 놀라운 風景이 펼쳐진다. 쭉 이어진 길 끝에 正確히 三角山(北漢山)과 白岳山(北岳山)이 있다. 오른쪽으로 南山 頂上까지 視野에 들어온다. 왼쪽은 高層 建物들에 가렸지만 朝鮮時代였다면 仁王山과 무악산까지도 보였을 것이다.

    20番 게이트 안쪽은 非開放 區間이라 一般人은 들어갈 수 없지만 길은 이어진다. 그 길이 平地가 아니라 緩慢한 丘陵人 것은 둔지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龍山 美軍基地 一帶가 元來 ‘鈍地方(屯之坊)’이라는 朝鮮時代 行政區域이었다는 事實도 앞으로 考證돼야 할 部分이다. 現在 大統領室이 자리한 언덕도 둔지산 자락이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過去 우주목 또는 神木이라 불린 數百 年 된 老巨樹(엄나무와 느티나무)들이 自然스럽게 길손에게 쉼터를 提供하고, 이어 옛 日本軍 將校 宿所로 쓰였던 고풍스러운 西洋式 建物이 나온다.

    이태원의 位置가 龍山中古 앞이 아니라 龍山 美軍基地 안이라는 主張은 相當한 說得力을 얻고 있는데, 가장 有力한 場所가 衛戍病院 자리다. 1906年 러일戰爭에서 勝利한 後 용산에 駐屯한 日本軍은 이태원을 없애고 그 자리에 衛戍病院을 세운 것으로 推定된다. 김천수 氏는 1906年 日本軍이 製作한 ‘韓國龍山軍用수用地明細도’에 標示된 이태원의 位置로 推定해 衛戍病院 자리일 可能性이 높다고 말한다. 日本人들이 남긴 ‘京城府史’ 第3卷(1941)에도 이태원의 位置를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射擊場 西쪽으로 흐르는 작은 內에서 바로 西쪽에 물길이 꺾어지는 곳에 俗稱 ‘자개우물’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우물이 바로 원에 所屬된 것이라고 傳해진다.”

    여기서 ‘怨’은 이태원을 가리킨다. 梨泰院 터는 向後 本格的인 發掘 調査가 必要한 地域 中 하나다. 옛 衛戍病院 옆 냇가가 南山 西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만든 만초천 支流다. 只今은 풀만 茂盛한 乾川이지만 비가 오면 如前히 맑은 물이 흐른다. 仁王山에서 흘러내린 만초천 本流가 청파로 아래로 사라진 것과 比較된다.

    衛戍病院 建物을 지나 21番 게이트에 到着하면 담牆 너머로 아파트 團地가 보인다. 이 門을 나가면 경리단길, 녹사평역으로 이어진다. 朝鮮 通信使들은 20番 게이트와 21番 게이트를 잇는 길을 지나 곧장 西氷庫나루로 갔을 것이다. 20番 게이트~우주목 쉼터(엄나무와 느티나무 쉼터)~龍山基地 메인포스트(將校官舍, 衛戍病院, 만초천 支流)~21番 게이트~梨泰院~녹사평~西氷庫를 잇는 ‘梨泰院 옛길’李 하루빨리 開放돼야 한다.

    600年 길의 歷史 未來 용산公園에 담아야

    용산어린이정원 조감도. [국토교통부]

    龍山어린이庭園 鳥瞰圖. [國土交通部]

    梨泰院 옛길이 언제부터 利用됐는지 正確히 알 수 없지만, 高麗時代 청파역과 社平原(現 紳士驛 附近) 사이를 잇는 區間이었을 것으로 推定한다. ‘이태원路’라는 名稱이 登場하는 것은 ‘燕山君日記’ 1504年 10月 10일자다.

    “綠楊役부터 광릉山, 黃酸, 묘적山, 廣津, 漢江, 왕십리 近處까지 모두 禁標 안에 넣고, 다만 南大門 밖 梨泰院길만 통하도록 하라.”(연산군일기 56卷 1504年 10月 10日)

    燕山君은 사냥과 遊興을 위해 議政府에서 漢江에 이르는 主要 길을 모두 막아버렸지만 梨泰院길만큼은 열어두게 했다. 王朝車 東來로 가는 重要한 길을 막을 수는 없었던 듯하다.

    ‘옛길 위의 朝鮮 通信社’의 著者이자 史學者인 양효성 氏는 “길은 單純히 용산의 한 區間을 잇는 것이 아니라 東萊, 統營까지 그리고 朝鮮 通信社 行路의 境遇 日本 東京까지 길게 이어지고, 北으로는 漢陽 都城에서 義州와 北京까지 連結되는 것”이라며 끊어진 길을 連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길을 어떻게 活用하느냐가 重要하다고 말한다.

    “蛇行로의 境遇 龍山 청파역에서 出發해 漢江鎭을 건너 聞慶 鳥嶺關門을 넘고 釜山浦에 이르기까지 32役을 거친다. 釜山에서 大麻(大馬)~日記(壹岐)~南道(藍島)까지 8站(站), 65役(驛)을 거쳐 도쿄에 到着했다. 2015年 이 길을 直接 걸었는데 日本 區間에는 옛날 驛站의 遺跡 表示와 案內板, 記念館 造成, 市場 開設, 旅館까지 마련해놓아 利用하는 이들이 많았다. 甚至於 朝鮮인가도(朝鮮人街道)라는 表示까지 해두었다. 우리는 龍山公園火 過程에서 이태원 옛길 復元과 함께 길의 活用에 對해 苦悶해야 할 때다.”

    2022年까지 서울市 都市戰略事業팀에서 龍山公園化 事業의 實務를 進行한 김홍렬 都市工學博士는 ‘梨泰院 옛길’에 對한 記憶부터 復元해야 한다고 말한다.

    “日本이 만들고 美軍이 使用해온 용산基地에 왜 20番 게이트와 21番 게이트가 생겼을까하는 疑問에서 出發해야 한다. 日本이 兵營을 만들기 훨씬 前부터 사람이 다니던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目的에서 最短距離로 移動하기 위해 길을 만들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들어갈 수 없는 地域이다 보니 日本軍이 차지하기 前 그곳에 길이 있었다는 事實 自體를 忘却했다. 그렇게 사라진 代表的인 地名이 둔지산과 鈍地方이다. 大統領室 龍山 移轉에 對해 왜 何必 ‘汚辱과 恥辱의 歷史’ 現場으로 가느냐고 批判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옛 記錄을 보면 分明히 그 길로 수많은 사람이 다녔고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앞으로 만들어지는 龍山公園에는 그 이야기를 담아내야 한다.”

    이 記事를 作成하는 데 김천수 龍算學硏究센터醬의 ‘잃어버린 梨泰院 옛길을 찾아서-600년 歷史의 길을 함께 걷다’와 ‘용산基地 內 사라진 鈍智美 옛 마을을 찾아서’, 이순우 民族問題硏究所 責任硏究員의 ‘龍山 빼앗긴 異邦人들의 땅’, 學術 모임 龍山 집(yongsan_zip) 主催 ‘잃어버린 梨泰院 옛길의 歷史를 찾아서’ 세미나, 김홍렬 都市工學博士의 도움말과 서울市 龍山公園 關聯 資料집의 도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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