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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聞 15個 읽는 ‘活字中毒’ 新東亞 政治記事 ‘狂팬’|新東亞

新聞 15個 읽는 ‘活字中毒’ 新東亞 政治記事 ‘狂팬’

世界舞臺 데뷔 10年, 팝페라 테너 임형주

  • 김유림 記者 | rim@donga.com

    入力 2013-12-19 15: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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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愛國歌 少年’ 꼬리票, 한때 不便했지만 이젠 靈光”
    • “政治 無關心, 大統領 戱畫化 사라져야”
    • 100億 出演해 代案 幼稚園 設立
    • 輸入 折半 以上 寄附하는 ‘熱血’ 弘報大使
    신문 15개 읽는 ‘활자중독’ 신동아 정치기사 ‘광팬’
    임형주. 그의 이름을 부르면 아직도 떠오르는 單 하나의 場面, 2003年 第16代 盧武鉉 大統領의 就任式이다.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검은色 燕尾服을 입은 열일곱 少年은 유난히 검은 눈瞳子를 빛내며 고운 목소리로 愛國歌를 불렀다. 雄壯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淸雅하면서도 깊이 있는 音聲. 누군가는 ‘새 政權을 應援하는 天使의 목소리’라 했고 ‘傷處받은 靈魂을 慰勞했다’는 讚辭도 있었다.

    그리고 政權이 두 番 바뀌었다. 少年은 스물여덟 靑年이 됐다. 就任式의 主人公은 浮沈(浮沈) 끝에 歷史 너머로 사라졌지만, 임형주는 그間 單 한 番의 슬럼프도 없이 꾸준히 앨범을 내고 國內外 有名 舞臺에서 公演하며 屬望받는 젊은 藝術家로 成長했다.

    지난 12月 3日 서울 서초구 염곡동 아트원文化財團에서 임형주를 만났다. 다음 날 日本 도쿄 쇼케이스를 앞두고 猛練習 中이던 그는 疲困한 氣色에도 잔뜩 上氣된 모습이었다. 禮義 까만 눈瞳子와 머리칼이 반짝거렸다.



    그의 面貌는 다채롭다. 大韓赤十字社, 사랑의 열매 等 여러 社會團體의 弘報大使로 積極的으로 活動하며 동아일보 等 有力 日刊紙에 每週 記名 칼럼을 쓴다. 3年 前에는 張禧嬪에 對한 歷史冊을 내기도 했다. ‘임형주의 太平洋 人脈’이란 말이 있을 만큼 人的 네트워크가 넓다. 世界舞臺 데뷔 10周年을 記念해 지난 10月 6日과 11月 3日 서울 國立劇場 大劇場과 서울 世宗文化會館에서 열린 公演 때는 李明博 前 大統領 夫人 김윤옥 女史, 엄기영 前 MBC 社長, 歌手 광희 氏 等 名詞들이 눈에 띄었다. 文化財團을 運營하면서 敎育事業에까지 손을 뻗쳤다.

    어머니의 放牧型 敎育

    아트원文化財團은 그가 2008年 設立한 文化財團으로 代案 幼稚園 ‘소르高 幼兒學校’를 運營한다. 소르高 幼兒學校는 開院 當時 ‘임형주의 100億 幼稚園’으로 불리며 關心을 모았다. 地下 1層, 地上 4層의 建物은 발레 레슨室, 피아노 레슨室 30餘 個, 갤러리, 200席 規模의 公演場 等을 갖췄다. 林 氏의 어머니 김민호 氏가 理事長을 맡으며 “형주를 키우며 겪은 施行錯誤는 빼고 좋았던 點만 投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貴族學校’ 이미지와는 달리 元妃는 一般 國公立 幼稚園 水準이고 專攻生 아닌 一般 學生만 받는다. 幼稚園 運營을 통해 얻은 收益으로 低所得層 藝術 英才에게 無料 레슨을 해준다.

    ▼ 왜 就學 前 아이들을 對象으로 한 幼兒學校죠?

    “敎育은 백년지대계라잖아요. 요즘 ‘글로벌 리더가 돼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글로벌 리더가 뭔가요? 國際中, 特目高 나와 留學 갔다 온 뒤 大企業에 就職하는 게 眞正한 글로벌 리더는 아니잖아요. 요즘은 아이들 成長速度가 워낙 빠르니까 幼稚園 때부터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한 準備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英語, 音樂은 基本으로 가르치고 무엇보다 自己主導學習을 할 수 있는 土壤을 길러주려고 합니다.”

    ▼ ‘聲樂家 임형주’가 運營하는 幼稚園의 音樂 授業이 궁금하네요.

    “亦是 가장 큰 特徵은 임형주가 直接 講義한다는 거죠. 제가 直接 授業資料를 準備해서 講義해요. 클래식 作曲家에 對한 이야기도 해주고, 公演 에티켓에 對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요. 直接 노래를 부를 때도 있어요. 근데 아이들을 가르칠 때 注意할 點은 한 時間에 딱 한 가지 이야기만 해야 하는 거예요. 아무리 많은 內容을 말해도 다는 못 알아듣거든요.”

    ▼ 처음에는 ‘貴族學校’라는 批判도 있었죠.

    “여긴 非營利財團이에요. 여기서 나오는 收益으로는 家庭 形便은 어렵지만 藝術的 才能이 있는 音樂 專攻 靑少年들에게 ‘멘토 앤 멘티’ 프로그램으로 個人 레슨을 해줘요. 每年 10餘 名에게 惠澤을 주고 있습니다. 只今까지 가르친 學生이 100名쯤 되죠.”

    ▼ 임형주 氏에게 어머니는 어떤 存在였나요.

    “事實 전 방목됐어요. 어머니는 工夫하라는 말을 한 番도 안 했어요. 제가 藝苑學校 다닐 때 數學, 科學을 못해서 30點 맞은 적도 있어요. 근데 한 番도 혼나지 않았어요. 代身 局社, 國語, 英語 等은 工夫 안 해도 成績이 잘 나왔거든요. 어머니는 콩쿠르나 個人 레슨 때도 늘 저를 혼자 보내셨어요.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 於此彼 藝術家는 舞臺 위나 아래에서 혼자예요. 늘 외로운 存在죠.”

    “極端的인 것 嫌惡”

    신문 15개 읽는 ‘활자중독’ 신동아 정치기사 ‘광팬’

    2003年 第16代 盧武鉉 大統領 就任式에서 愛國歌를 부르는 임형주.



    2003年은 임형주에게 이래저래 잊을 수 없는 해다. 그해 大統領 就任式에서 愛國歌를 불렀을 뿐 아니라 6月 美國 카네기홀에선 男子 聲樂家 中 最年少로 데뷔 獨唱會를 열었다. 첫 世界 데뷔 公演은 成功的이었고 海外 進出의 발板이 됐다. 그해 初 낸 音盤 ‘샐리 가든’은 45萬 張이 나갔는데 이 中 8萬 張은 海外에서 팔렸다. 프랑스 살 家譜, 오스트리아 미라벨宮殿,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等 全 世界 音樂人들이 憧憬하는 舞臺를 모두 涉獵한 그를 如前히 우리는 ‘愛國歌 少年’으로 記憶한다.

    ▼ ‘愛國歌 少年’이라는 꼬리票, 이젠 지겹지 않아요?

    “全혀 싫지 않아요. 영광스럽죠. 國家를 代表하는 愛國歌가 제 代表曲이라는 게.”

    ▼ 그래도 좀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한때는 國家 行事의 愛國歌 獨唱 提議가 들어오면 拒絶한 적도 있어요. ‘愛國歌 少年’ 꼬리票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요. 하지만 只今은 다 기쁜 마음으로 해요. 2013年에도 韓國戰爭 유엔軍 參戰 및 停戰 60周年 記念式 等 여러 次例 舞臺에 섰어요.”

    ▼ 2009年엔 盧武鉉 前 大統領을 追慕하는 曲 ‘千 個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어요. 就任式 因緣이 길었나봐요.

    “그분에겐 最高의 瞬間이었을 就任式에 제가 함께했으니 떠나실 때도 제가 慰勞해드리고 싶었어요.”

    ▼ 盧 前 大統領과의 因緣 때문에 ‘左派’라는 꼬리票가 붙기도 했어요. 2012年 全國투어콘서트에서는 한 觀客이 ‘빨갱이’라고 소리를 치기도 했고.

    “就任式에서 노래할 때 열일곱이었어요. 當然히 ‘노사모’도 아니고 投票權도 없었어요. 大統領職引受위의 招請을 받아 영광스럽게, 즐겁게 가서 노래했을 뿐이에요. 그 後로도 盧 前 大統領을 國家 行事에서 몇 番 뵀지만, 다 公的인 자리여서 對話를 거의 못해봤어요. 그냥 저를 韓國에, 그리고 世界에 알리게 도와주신 고마운 분이죠. 저는 李明博 大統領 때도 國家行事에 자주 參席하면서 김윤옥 女史님과 가까웠어요. 저는 極端的인 걸 正말 嫌惡해요. 저더러 가장 偉大한 大統領 2名 꼽으라고 하면 朴正熙 前 大統領과 김대중 前 大統領을 꼽겠어요. 한 분은 經濟를 부흥시키고 또 한 분은 民主主義의 기틀을 만드셨잖아요.”

    ▼ 뜻밖이네요.

    “제 또래 親舊들이 大統領에 對해 함부로 이야기하고 戱畫化하는데, 큰 問題라고 생각해요. 大統領은 國民 大多數가 選擇한 나라의 代表잖아요. 大統領들은 저마다 剛한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確實히 나라의 代表가 되려면 天運(天運)을 받아야 하나봐요. 特히 이 前 大統領 뵐 때마다 正말 안타까웠어요. 제가 海外에서 많이 生活하다보니 實感하는 건데, 이 前 大統領 때 正말 韓國의 對外的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거든요. 그런데 정작 韓國에서는 그 效果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 지난 10月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獨唱會에 프랑스를 公式 訪問 中이던 朴槿惠 大統領이 찾았죠.

    “네, 참 感謝한 일이죠. 朴 大統領은 누구를 만나도 늘 먼저 고개 숙여 人事하고 웃으시는데, 그 微笑의 힘이 대단해요. 앞으로도 海外 巡訪을 많이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 意義를 貶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頂上의 海外 巡訪을 통해 國家 이미지가 改善되고 兩國 交流가 活潑해지는 傾向이 分明 있거든요.”

    “政治部 記者 됐을 것”

    ‘스물여덟 藝術家’라는 ‘스펙’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政治 이야기를 즐겼다. 그 힘은 바로 新聞이다. 自身이 ‘活字中毒症’ 患者라고 했다. 每日 15種의 新聞을 購讀하고, 海外에 있을 때는 現地 新聞까지 챙겨 본다. ‘신동아’도 7年째 購讀하고 있다. 빈말이 아닌 것이, 그는 2011年 韓國新聞協會가 選定한 ‘올해의 新聞읽기 스타’에 올랐고 2010年엔 東亞日報 歷代 最年少 칼럼니스트로 登用됐다. 스스로 “音樂家가 되지 않았다면 社會部나 政治部 記者가 됐을 것”이라고 말할 程度. 그와 新聞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마치 다른 言論社 記者와 對話하는 氣分이었다. 各 新聞의 特徵을 明確하게 꿰뚫고 있었고 ‘나와바리’(取材區域) ‘1段’ ‘單獨’ ‘5板’ 같은 言論界 ‘專門用語’도 自由自在로 驅使했다.

    ▼ 2010年 25歲 나이로 東亞日報 칼럼니스트가 됐죠.

    “처음 提議가 왔을 때 正말 神奇했고 기뻤죠. 내가 쓴 칼럼으로 누군가가 論述工夫를 한다니…. 제가 죽은 뒤에도 제 글은 동아일보 歷史에 남는 거잖아요. 게다가 2010年 동아일보 創刊 90周年을 함께한다는 건 正말 榮光이었죠. 只今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로부터 ‘이 兩班은 노래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글도 잘 쓰더라’라는 말을 들으면 ‘노래 잘 부른다’는 얘기보다 더 좋아요.”

    신문 15개 읽는 ‘활자중독’ 신동아 정치기사 ‘광팬’

    2003年 美國 카네기홀에서 歷代 最年少로 데뷔 舞臺에 섰다.

    ▼ 讀書量이 相當하다고 들었어요.

    “많을 때는 한 달에 40~50卷 읽어요. 적어도 한 달에 20卷쯤. 親舊들은 저를 ‘間諜’이라고 해요. 單 한 番도 스타크래프트 같은 컴퓨터 게임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TV도 잘 안 봐요. 週末 하루만 投資해도 3卷은 거뜬히 읽어요.”

    ▼ 讀書 效果를 實感할 때가 있나요.

    “제가 卽興的 스피치를 잘해요. 어떤 主題에 對해서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 머릿속에 單語들이 차곡차곡 記錄돼 있나봐요.”

    ▼ 每日 15個나 되는 新聞을 읽으려면 나름대로 읽는 方法이 있겠어요.

    “一旦 單獨 報道부터 보고, 풀 記事(言論社 共有 記事)는 넘어가요. 머리記事나 1段 記事를 主로 보면서 그 言論社에서 어떤 情報를 가장 重視하나 보기도 하고요.”

    ▼ 왜 新聞을 그렇게 熱心히 보죠?

    “SNS나 인터넷은 迅速하긴 한데 正確性이 떨어져요. 新聞은 記者라는 ‘情報處理 專門家’들이 每日 會議를 거쳐 情報를 聚合하고 選擇한 後 重要度에 따라 記事를 配置하잖아요. 精製된 高級 情報죠. 新聞 보는 사람이 줄어드는 거, 正말 안타까워요. 요즘 CD 音盤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新聞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CD 販賣量이 줄어도 如前히 高級 LP版은 高價에 去來되잖아요. 技術이 發展해도 歷史的 意味가 있는 新聞은 살아남을 거예요.”

    張禧嬪에게 꽂히다

    ▼ 新東亞를 7年째 봤으면 스물한 살부터 본 거네요?

    “네. 나이가 들수록 신동아가 재밌어요. 只今도 書齋에 신동아가 쭉 꽂혀 있어요. 가끔 심심할 때 몇 年 前 신동아를 꺼내 보면서 ’아, 예전엔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며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 어떤 記事가 第一 재미있나요.

    “只今 政府에 對한 專門家들의 見解를 볼 수 있는 騎士요. 또 나이를 먹을수록 政治記事가 재밌어요. 이젠 新聞을 봐도 文化面보다 政治面부터 봐요. 親舊들에게도 政治에 關心을 가지라고 목놓아 외치는데, 親舊들은 無關心해요. 先進 市民, 國家에 寄與하는 市民이 되려면 政治를 알아야 해요. 投票도 안 해놓고 政府가 잘못됐다고 말할 資格이 없어요. 저는 1年에 3個月 以上 海外에 滯留하지만 크고 작은 選擧 投票 單 한 番도 거른 적 없어요. 요즘은 海外 不在者 投票도 되니까.”

    ▼ 2011年에는 冊도 썼죠? ‘임형주, 張禧嬪을 부르다‘라는.

    “칼럼을 쓰다보니 글쓰기에 自信感이 붙었어요. 어릴 때부터 外할아버지한테 歷史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張禧嬪에게 딱 꽂혔어요. 家父長的 儒敎思想이 支配하는 朝鮮王朝에 태어나 賤民의 身分으로 아무 政治的 背景 없이 自己 힘으로 國母의 자리에 올랐어요. 제가 東洋人으로서 西洋音樂을 했고, 팝페라라는 새로운 分野에 挑戰했잖아요. 張禧嬪의 挑戰精神에 同質感을 갖고 끌렸나봐요.”

    팝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팝페라’는 피아노, 바이올린 等 古典的 樂器로 編成된 오케스트라 伴奏에 大衆的인 팝 스타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1985年 키메라가 ‘더 로스트 오페라’라는 앨범을 내면서 팝페라라는 장르가 생겨났고 美國의 사라 브라이트만, 이탈리아의 안드레아 步챌리 等이 人氣를 끌면서 漸次 成長했다. 임형주는 예원학교를 首席 卒業하고 美國 줄리어드 音大 豫備學校에 審査委員 滿場一致로 合格했지만, 줄리어드를 마다하고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 피렌체 音樂院에 進學했다. 클래식이 아니라 팝페라를 工夫하기 위해서였다.

    신문 15개 읽는 ‘활자중독’ 신동아 정치기사 ‘광팬’

    2010年 韓國人 最初로 유엔 平和메달을 受賞했다.

    ▼ 왜 팝페라를 選擇했나요.

    “어릴 때 들은 音樂이 큰 影響을 미치는 것 같아요. 正統 클래식 聲樂을 工夫했지만, 어릴 때 어머니의 影響을 받아서 엘튼 존 等 팝音樂을 많이 들었어요. 제가 公演에서 많이 부르는 ‘애모’ ‘IOU’ 等도 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曲이에요.”

    ▼ 海外 公演도 많이 했죠.

    “네, 프랑스, 美國, 日本…. 特히 프랑스 公演이 좋았어요. 파리지앵이 콧대가 높은데, 저를 많이 좋아해주세요.”

    ▼ 임형주를 잇는 國內 팝페라 스타가 없다는 憂慮가 있어요.

    “임태경, 카이 氏 等이 있는데 이분들은 뮤지컬 俳優를 兼業하시니 저와는 分野가 좀 다르죠. 안타까워요. 팝페라라는 市場의 파이가 커져야 하는데. 제가 韓國 最初의 팝페라 테너잖아요. 제가 隱退하면 이 市場이 없어질지도 모르니 어서 後輩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별들의 잔치’

    ▼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隱退 생각을?

    “남보다 데뷔가 이른 篇이었으니 隱退의 瞬間도 남보다 이를 거라고 생각해요. 頂上의 技倆을 發揮할 때 내려오고 싶어요.”

    ▼ 목소리가 많이 變했습니까.

    “勿論 10代 때의 淸楚하고 淸雅했던 목소리는 안 나와요. 하지만 只今은 圓熟美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 컨디션 管理는 어떻게 하죠?

    “술, 담배를 안 해요. 와인이나 燒酒를 아주 가끔 입에 대긴 하지만. 布帳馬車에서 닭똥집 먹는 거 좋아해요. 술은 弱해도 한 盞 마시면 열 盞 마신 것처럼 놀아요.”

    ▼ 쉬는 날은 뭘 하죠?

    “제 別名이 ‘집돌이’예요. 집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집앞 잔디도 깎고 양재동 花卉市場에서 苗木 사다 심고. 親舊들과는 카카오톡이나 카카오 보이스톡 無料電話로 얘기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邪敎徒 좋지만 藝術家에겐 혼자만의 時間이 必要해요.”

    ▼ 人脈 넓기로 소문났더군요.

    “2012年 11月 오페라劇場에서 콘서트를 했는데 正말 ‘별들의 잔치’였어요. 현정은 現代그룹 會長, 박용만 두산그룹 會長,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館長, 한덕수 前 總理, 放送人 백지연 氏, 엄기영 前 MBC 社長님 等等 正말 많이 오셨는데 다 票를 사서 오셨어요. 얼마 前 盧 館長님을 만나 얘기했는데, 한 50分 흐른 줄 알았더니 5時間 동안 對話를 했더라고요. 한완상 前 大韓赤十字社 總裁님과는 얼마 前 映畫를 같이 봤어요. 1936年 生이시니 제가 曾孫子뻘이거든요. 또 江南에 40年 된 떡볶이집 아줌마도 저랑 ‘切親’이에요.”

    ▼ 누구와도 親舊가 될 수 있는 祕訣이 있나요.

    “누구를 만나도 말이 잘 통해요. 假飾的으로 ‘잘 보여야지’ 하지 않아요. 나이, 身分, 職業 超越해 누구를 만나도 할 말이 많아요. 아마 新聞을 많이 본 德分인 것 같아요. 저는 참 祝福받았어요. 靑瓦臺에서 午餐하고 午後에 廣長市場에서 부침개 먹는 거, 얼마나 幸福하고 짜릿한 일이에요. 有名한 舞臺에 몇 番 서면 ‘스타甁’에 걸리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舞臺에서 내려오면 一般人이라고 생각하고 行動해요.”

    ▼ 10年間 單 한 番도 슬럼프가 없었나요.

    “제가 생긴 건 여성스러워도 뚝심이 있어서 슬럼프가 못 비집고 들어왔어요. 몸이 아플 때는 있었죠. 七朔둥이로 태어나 몸 이곳저곳이 아파요. 正말 健康이 가장 重要해요.”

    “돈 管理도 잘해요”

    그는 겨울이면 더욱 바쁘다. 多樣한 分野의 弘報大使 活動 때문이다. 大韓赤十字社, 사랑의 열매, 월드비전, 韓國 YWCA, 綠色成長 國民聯合 等 8곳의 弘報大使로 活動한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좋은 일 하는 NGO (非政府團體)中 ‘유니세프’ 빼고는 모두 내가 弘報大使”라고 말한다. 인터뷰 當日에도 사랑의 열매 行事에 다녀왔다. 그의 옷깃엔 동글동글한 ‘사랑의 열매’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는 겨우내 ‘사랑의 열매’ 배지를 코트 주머니 가득 넣고 다니며 만나는 이들의 옷에 꽂아준다.

    ▼ 弘報大使 提議가 오면 다 應하나요.

    “네, 意味 있는 일을 하는 社會團體라면 無條件 道와야죠. 근데 돈은 안 받아요. 弘報大使랍시고 CF 찍고 개런티 받는 境遇도 있는데 그게 어떻게 弘報大使인가요, 廣告모델이지. 絶對 이름만 걸고 活動 안 하는 弘報大使는 안 해요. 그러다 보니 집에 國家機關, 慈善奉仕團體, NGO 같은 데서 준 功勞牌가 아주 많아요.”

    ▼ 弘報大使 일을 그렇게 熱心히 하는 特別한 理由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過分한 사랑을 받았어요. 그 사랑을 돌려드려야죠. 如前히 어렵게 사시는 분이 너무 많아요. 제가 노래로, 잠깐의 參與로 도와드릴 수 있다면 無條件 해야죠.”

    ▼ 寄附도 많이 한다고 들었어요.

    “제가 번 돈 中 當場 쓸 돈만 남기고 다 寄附해요. 多幸히 집이 裕福하기도 하고요. 只今까지 번 돈의 3分의 2는 다 寄附한 것 같아요. 한때 ‘내가 미쳤지. 그때 왜 그렇게 많이 寄附했지’ 하고 後悔한 적도 있지만 寄附하고 나면 大體로 홀가분해요. 이 돈은 不特定 多數로부터 過分한 사랑과 支持를 받은 代價니까 돌려드리는 게 當然해요. 더러 ‘나중에 政治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疑心을 받는데, 저는 政治할 생각 全혀 없어요. 그냥 音樂家로서 社會에 보탬이 되고 싶을 뿐이에요.”

    ▼ 節約하는 것으로도 有名하던데.

    “5年 前부터 제 收入을 다 제가 管理하는데, 저 돈 管理를 참 잘해요. 株式도 잘 하고요. 貯蓄도 많이 하는데 目標가 있으면 絶對 積金을 끊지 않아요. OK캐시백을 25萬 點까지 모은 적이 있고, 信用카드 포인트, 割引惠澤도 꼼꼼하게 챙기죠. 藝術 하는 親舊들이 世上物情 모르는 境遇가 많은데 저는 徹底한 便이에요. 하지만 스크루지 令監 같은 구두쇠 스타일은 아니에요. 값이 나가도 時計, 백 等 正말 갖고 싶은 건 꼭 사요. 다만 過消費하지는 않는 거죠. 於此彼 모든 物件은 時間이 지나면 古物이 되니까.”

    ▼ 임형주 氏와 同甲이고 같은 나이에 데뷔해 ‘天使의 목소리’로 注目받았던 英國 팝페라 소프라노 샬럿 處置는 天上의 목소리로 注目 받았지만 어린 나이에 妊娠과 流産을 反復하는 等 ‘스캔들 메이커’가 됐어요. 反面 임형주 氏는 데뷔 以來 單 한 番도 頂上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어요.

    “人生은 神이 주신 逍風이라고 생각해요. 제게 주어진 人生을 正말 잘 살아서 氣分 좋은 逍風을 마쳤으면 해요. 世界的인 오케스트라와 協演하거나 有名 콘서트홀에서 公演하는 것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저 스스로가 幸福한 사람이 돼서 ‘永遠히 幸福한 音樂인’으로 남고 싶어요.”

    “結婚 스케줄은 없네요”

    ▼ 이제 스물여덟인데, 結婚 생각은 없어요?

    “데뷔를 일찍 해서 다들 제가 30代 中盤쯤日 거라 생각하는데 저 아직도 20臺예요. 再昨年부터 親한 親舊들이 한둘씩 結婚하면서 歲月의 무게를 느껴요. 特히 藝苑學校 때부터 親했던 女子親舊 3名이 昨年에 모두 結婚했어요.”

    ▼ 2013年 채문선 愛敬産業 마케팅 部門課長(애경산업 채형석 副會長 長女)과 이태성 세아홀딩스 常務(세아그룹 故 이운형 會長 長男) 結婚式에서 15人組 오케스트라와 함께 祝歌를 불렀죠.

    “네, 채문선 氏가 제 藝苑學校 聲樂科 同門이에요. 가장 親한 親舊 中 한 名이라, 제가 15人組 오케스트라에 하프까지 갖춰놓고 祝歌 불렀죠, 祝儀金 代身. 賀客들이 콘서트에 온 것처럼 좋아하셨어요. 第一 親한 親舊가 같이 藝苑學校 入學式을 했던 정동교회에서 結婚하니 얼마나 기쁘고 뿌듯해요. 祝歌 費用은 하나도 안 받았어요. 代身 愛敬그룹에서 비누, 齒藥, 샴푸 三種 膳物세트 받았어요.”

    ▼ 그런 걸 봐도 結婚하고 싶지 않아요?

    “떠밀려서가 아니라 때가 될 때 하고 싶어요. 只今은 3年 程度 스케줄이 다 차 있는데, 그 안에 結婚이라는 스케줄은 아직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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