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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코에 꿰인 삶 그 希望의 노래|新東亞

그물코에 꿰인 삶 그 希望의 노래

慶北 蔚珍

  • 최학 │우송대 韓國語學科 敎授 hakbong5@hanmail.net

    入力 2013-04-18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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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일하는 學科의 學生들은 베트남에서 온 두세 名을 除外하곤 全員이 中國人 留學生이다. 韓國語를 배우겠다고 굳이 바다 건너온 이들을 위해 學期마다 한 番씩 우리네 文化遺跡地를 踏査하는 科目을 開設해놓았다. 나는 慶州, 安東을 가더라도 꼭 바다를 거치는 日程을 固執한다. 大陸에서 나고 자란 녀석들이기에 스무 해를 살면서도 바다를 본 經驗이 거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異國의 땅에서 生前 처음 茫茫大海를 對하며 갖는 感慨는 실로 形言키 어려운 것이 된다.

    安東을 찾아간 지난해 가을에 굳이 蔚珍을 旅程에 包含시킨 것도 같은 理由에서였다. 도산書院에서 청량산을 거친 뒤 불영계곡을 通過해 蔚珍 亡羊海水浴場까지 가는 코스였다. 훤칠한 金剛松 春陽木이 우거진 山間을 通過하는 내내 골짝 물이 잘생긴 바위들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멋진 風景이 車窓 밖에 펼쳐졌다. 그런데도 이를 보겠다고 눈瞳子를 빛내는 녀석은 없었다. 온終日 車를 달려도 山의 模樣새를 볼 수 없는 大平原에 익숙한 녀석들이라, 굽이굽이 山길을 돌아 달리는 이곳 車間에서는 금세 멀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望洋亭의 望洋之歎

    녹초가 된 學生들이 心身을 추스르도록 佛影寺 駐車場에 車를 세웠다. 다리를 건너고 숲길을 걸어 이윽고 마주한 절집 風光은 여느 때 찾아도 정갈하고 소담스럽다. 周邊 山勢가 引渡의 천축山을 닮았다고 해서 ‘천축山 佛影寺’라고 이름 붙였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른 절間에서 쉬이 보기 어려운 蓮못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蓮못은 안팎으로 가지가지 水生植物들을 키우며 畫幅人 양 둘레의 風景까지 죄 담고 있다. 特히 物價의 배롱나무들이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는 때는 자못 夢幻的인 雰圍氣를 빚어내기도 한다.

    불영계곡을 흐르는 鑛泉의 물줄기는 蔚珍의 민물고기硏究센터 앞에서 王避川 本流와 合해져 東海로 든다. 內陸의 河川이 긴 旅程을 마치고 바다로 드는 곳에 모래톱이 만들어졌는데, 그곳이 亡羊海水浴場이다. 바다를 만난 外國의 젊은이들이 언제 지쳐 떨어졌던가 싶게 歡呼聲을 지르며 다투어 모래밭을 내달린다. 그리고 마주한 茫茫大海. 넘실대는 짙푸른 바다, 쉼 없이 밀려오는 물결 앞에서 그들은 한瞬間 넋을 앗기고 만다. 바다는, 그들에게 驚異(驚異) 自體였다.



    江이 어떻게 바다의 품을 파고들며, 뭍과 바다가 어떻게 만나 속살거리는지 볼라치면 그 모래톱 어귀의 허름한 마을 뒤便 길로 해서 야트막한 山꼭대기에 오르면 된다. 겹처마에 八作지붕을 한 날렵한 亭子 하나가 이곳에 서 있다. 望洋亭(望洋亭)이다. 날갯짓하듯 지붕을 펼치고 있는 모습은 가벼운 듯하면서도 堂堂하다.

    亭子에 오르면 王避川 물줄기가 하얀 泡沫을 일으키는 바다와 만나는 모습이 내려다보이고 가없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亭子에서 바라보는 景致가 關東八景 가운데 으뜸이라 하여 朝鮮 肅宗이 ‘關東第一루(關東第一樓)’라는 懸板을 하사했다고 하지만 只今의 程子는 예전의 그 精子가 아니다.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하고 松江 鄭澈이 ‘關東別曲’의 마지막을 望洋亭으로 裝飾하고 있지만 그 또한 只今의 望洋亭이 아니다. 本來의 望洋亭은 蔚珍 기성면 망양리에 있었는데 歲月이 흐르면서 오래 허물어진 채로 放置돼 있었다. 1858年(哲宗 9年) 새로 亭子를 지을 때 只今의 자리로 옮겼으며 2005年 旣存 精子를 完全 解體하고 새로 建立했다.

    亭子에는 鄭澈의 關東別曲과 함께 肅宗이 하사한 扁額과 時, 正祖의 어제時(御製詩), 이산해, 金時習의 詩 等이 걸려 있다. 望洋亭을 單純히 ‘바다를 바라보는 亭子’라고 새기기보다는 ‘自身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歎息한다’는, 亡羊之歎(望洋之歎)에서 나온 말로 보는 것이 훨씬 그럴싸하다.

    蔚珍을 찾아가는 方法은 나처럼 奉化 쪽에서 불영계곡을 통해 가는 方法도 있지만 많은 사람은 江陵에서 東海, 三陟을 지나 7番 海岸道路를 타고 南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擇한다. 이 境遇 蔚珍 땅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浦口가 죽변港이다. 예부터 죽변은 漁業基地로 이름이 난 浦口였는데, 近來는 드라마며 藝能 프로그램 撮影地로 有名해 찾는 이가 많다. 特히 죽변燈臺와 그 周邊은 그 獨特한 風光으로 有名稅를 치르고 있다.

    봉평 新羅碑가 傳하는 이야기

    죽변을 벗어나 南으로 조금 내려오다 보면 最近에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새 名所 하나가 있다. 新羅時代의 碑石 하나가 發見돼 갑작스레 有名해진 봉평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小說 ‘메밀꽃 필 무렵’의 舞臺가 되는 平昌郡의 蓬平과 地名이 같아 괜히 親近感을 주기도 한다. 1988年 죽변면 봉평리에 살던 農夫 한 사람이 밭갈이를 하다가 偶然히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發見하는데, 그것이 곧 봉평 新羅碑다. 專門家들의 調査 結果 이 비의 製作 連帶는 524年(法興王 11年)께로 當時의 律令과 管制 等이 적혀 있어 史料的 價値가 매우 높은 石碑로 評價되었다. 이 비는 그해 國寶로 指定됐다.

    碑文에는 이 비가 세워지기 前 이곳의 奴婢들이 險峻한 酸性에 함부로 불을 지르는 重大한 事件이 일어났으며, 朝廷에서는 大軍을 일으켜 事態를 鎭壓했고 以後 王과 臣僚들이 모여 事後處理의 一環으로 얼룩소의 배를 가르고 피를 뿌리는 儀式을 치르는 한便 現地의 關聯者에게 責任을 물어 60代 或은 100代의 棍杖을 치는 兄을 내렸다는 內容이 적혀 있다.

    새 國寶의 發見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좋은 契機가 됐다. 軍(郡)에서는 巨金을 投入해 展示館을 짓고 公園을 꾸몄다. 글字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碑石 하나만으로는 興行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여겨 廣開土大王碑, 眞興王 척경비 等 所聞난 碑石들을 實物 크기의 模型으로 製作 展示하는가 하면, 예전 고을 守令들의 頌德碑들까지 잔디밭에 堵列시켰다. 中國 시안(西安)의 碑林(碑林) 같은 名所를 이곳에 꾸미겠다는 式의 意欲은 엿볼 수 있지만, 實物이 아닌 模型들이 빚어내는 그 어정쩡한 느낌은 끝내 떨칠 수가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碑文이 적고 있는 事件을 形象化해 當時 民衆의 生活相이며 支配層의 祭禮 等을 볼 수 있게 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越松亭에서 神仙 되는 꿈

    越松亭(越松亭)은 蔚珍空港 아래便의 구산海水浴場에 있는 이름난 程子다. 평해중學校 뒤쪽 進入路를 통해 솔숲으로 들면 이 빼어난 亭子를 만나게 된다. 그 옛날에도 이곳엔 松林이 우거졌던 模樣, 新羅의 花郞들이 鬱蒼한 솔숲에서 달을 즐기고 바다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傳한다. 最初의 精子는 高麗時代에 세워졌다.

    關東 8景의 하나인 이 亭子에 오르면 鬱蒼한 松林 사이로 뽀얀 모래밭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쪽빛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숲과 모래와 바다가 한 덩어리가 되어 自然의 津逮를 보여주는 자리에 亭子가 서 있는 것이다. 여기에 눈부신 햇살이 있고 淸凉한 바람이 있으며 世上에서 가장 어여쁜 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진다. 鄭澈이 이곳의 아름다움과 雰圍氣에 醉해 神仙이 되는 꿈을 꾼 것도 無理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소나무 뿌리를 베고 누워 선잠에 설핏 들었는데, 꿈에 한 사람이 나에게 이르는 말이 그대를 내가 모르겠는가, 그대는 하늘에서 온 神仙이시네’라는 關東別曲의 그 넉넉한 품도 이곳에서는 充分히 그럴 성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程子는 成宗 임금의 逸話를 곁들이면서 한層 有名해졌다. 왕이 化工(畵工)에게 命한다. “朝鮮 八道의 精子 中에서 景致가 가장 좋은 곳을 그려 오라.” 化工이 여러 精子의 그림을 바쳤는데 王이 그림들을 살펴보곤 “越松亭에 비할 것이 없다”고 斷言했다는 것이다. 直接 가보지도 못하는 곳을 고작 그림으로 구경하는 王의 處地가 딱하며, 제 땅의 景致에 1, 2等 等數를 매기는 審査도 刻薄하기는 마찬가지다. 越松亭은 日帝强占期 日本軍에 依해 撤去됐다가 1980年 옛 모습으로 復元됐다.

    越松亭에서 나와 海岸道路를 끼고 南쪽으로 더 내려가면 防波堤가 길게 바다로 빠져나간 後浦項에 이른다. 오징어, 대게, 꽁치 等 語族의 集散地로 이름난 후포의 元來 地名은 ‘後리포’. 陸地에서 그물의 兩끝을 끌어당겨 고기를 잡던 ‘후리그물질’이 盛行한 浦口라서 이런 地名을 얻었다. 바다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浦口에 서면 이 바다와 이 땅이 키운 한 詩人이 떠오른다. 후포가 낳은 詩人 김명인(金明仁)이다. 그가 예전 후리포의 生動感 넘치는 漁撈 作業을 追憶한다.

    “어릴 적만 해도 遠洋에서 쫓겨온 멸치떼가 시커멓게 洞네 앞바다를 물들이면, 마을의 先導(先導)가 동산에 올라 목청껏 高喊을 지르거나 횃불을 흔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壯丁들이 그물을 실은 배를 부리나케 띄워 밀려온 고기떼를 가두면 男女老少 할 것 없이 온 洞네가 달려 나가 그물의 兩끝을 끌어당겼다. 그물 幅이 좁혀질수록 찢어져라 요동치던 고기떼의 長官으로 內 어린 時節은 얼마나 生動했던가.”

    그러나 그의 詩가 그리는 후포는 훨씬 더 高段과 寂寞에 기울어져 있다. 그립고 아픈 追憶의 땅이다.

    바다는 조용하다, 헛所聞처럼

    장마비 洋鐵지붕을 後둘記다 지나가면

    낮잠도 茂盛한 잔물결에 부서져 延邊 가까이

    떼지어 날아오르는 새떼들

    보인다, 어느새 비 걷고

    그을음 같은 안개 비껴 山그늘에는

    채 씻기다만 버드나무 한 그루

    이따금씩 原動機소리 늘어진 가지에 와 걸리고 있다

    바람은 城砦(城砦)만한 구름들 하늘 가운데로 옮겨놓는다

    歲月 속으로, 歲月 속으로, 끌고 갈 무엇이 남아서

    寂寞도 저 홀로 힘겨운 勞動으로

    문득 병든 無人島를 파랗게 질리게 하느냐

    누리엔 놀다가는 波濤가 쌓아놓은

    덕지덕지 그리움, 한 꺼풀씩 벗어야 할 허물의

    쓸쓸한 時節이 네 마음속 캄캄한 石炭에 구워진다

    뼈가 휘도록, 이 바닥에서, 너는,

    그물코에 꿰여 삶들은, 모른다 하지 못하리

    凶漁(凶漁)에 엎어져도 우리 함께 견뎠던 여름이므로

    키 큰 長다리 제 철 내내 마당가에 꽃을 피워 더 먼

    바다를 내다보고 섰는데

    스스로 받아 챙기던 欲望은 다 그런 것일까

    멈칫멈칫 나아가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자다깨다 자다깨다 눅눅한 꿈들만 어지럽게

    헤매며 길을 잃는다

    그래도, 눈을 들어 보리라, 저 山들과

    山들이 끊어놓은 자리

    다시 이어져 달려 나가는 눈물겨운 水平線을

    - 김명인 時 ‘후포’ 專門

    內 모래알의 時間

    天刑(天刑) 같은 가난에 依해 그물코에 꿰인 삶을 살면서도 눈물겨운 水平線에서 希望을 엿보던 후포의 時間들이 그의 詩가 되고 그의 生存이 됨을 알 수 있다. “…무섭게 다가왔던 가난에는 언제나 束手無策으로 放棄(放棄)되었던 사람들의 마을. 한낱 生存의 싸움에서조차 無氣力하게 마침내 諦念을 宿命으로 받아들이던 素朴한 이웃들의 터전이 나의 故鄕”이었다고 吐露하는 詩人은 “멀리 뻗어나가는 水平線은 이곳에 내가 갇혀 있음을 逆說로 보여주면서, 한便으로는 어디론가 끝없는 憧憬으로” 自身을 이끌었다고 告白한다.

    최학

    1950年 慶北 慶山 出生

    고려대 國文科 및 大學院 卒業

    1973年 경향신문 新春文藝 小說 當選

    創作集 ‘暫時 머무는 땅’ ‘食口들의 歲月’ 等

    長篇小說 ‘西北風’ ‘안개울음’ ‘彌勒을 기다리며’ ‘和談明月’ 等


    膾집들이 줄지어 서 있고 바다를 찾아온 觀光의 車들이 浦口 駐車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늘의 후포에는 詩人이 거느렸던 그 過去의 時間들마저 지워지고 없다. “이 宇宙的인 바다의 어디에 내 모래알의 時間이 痕跡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하고 오늘의 후포에서 詩人이 歎息調로 諮問하지만 이는 곧 살아 있는 모든 이가 저 自身에게 묻는 質問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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