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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新東亞

김수영

온몸으로 밀고 나간 參與詩의 거침없는 삿대질

  • 윤무한│言論人, 現代史硏究가 ymh6874@naver.com

    入力 2009-02-03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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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不溫한’ 詩人 金洙暎은 마흔여덟에 世上을 달리했다. 或者는 30代 金素月의 죽음보다 金洙暎의 죽음을 더 안타까운 夭折로 느낀다. 갑갑하게 옥죄는 社會檢閱에 反動하고, 自己檢閱의 壓迫에 가슴을 풀어헤치며 온몸으로 自由를 履行(履行)하려 했던 그는 누구보다 젊었기 때문이다.
    김수영
    1968 年 ‘사상계’ 1月號(雜誌 事情上 2月에야 發刊)에 ‘知識人의 社會參與’라는, 當時로서는 매우 挑戰的인 評論이 실렸다. 日刊新聞의 論說을 相對로 해서 쓴 이 글에서 金洙暎은 言論이 現實問題에 對해 ‘이 빠진’ 소리를 하거나, ‘傍觀的’ 姿勢를 取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예컨대 1967年의 6·8 不正選擧 糾彈이나 서울大生의 民族主義比較硏究會(世稱 ‘閔妃(民比)’)事件과 關聯, 示威者들의 發言이 地下로 埋葬되거나 被告人들을 斗頓하는 發言은 “모조리 休紙桶에 쓸어넣는” 等 言論이 事實上 ‘檢閱官’의 機能을 하고 있다고 批判했다.

    그해 ‘朝鮮日報’ 社說欄에 이어령의 ‘우리 文化의 方向’李 실렸다. 이어령은 이 글의 書頭에 “우리 社會는 經濟建設 다음에 文化發展을 이룩한다는 序列을 매기지 말고 發電의 表裏로서 文化를 생각해야 한다”는 前提를 내세우면서, “(文化)의 方向의 問題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동백림事件”이라며, “相當數 文化人이 그 事件에 關聯되었다는 自體는 間諜行爲 以上의 事件이 아닐 수 없다. 그 行爲의 밑에 만의 일이라도 ‘인터내셔널’韓 생각이 깔린 所致였다면, 이는 關聯者에 局限할 것이 아니라 一般文化人의 性向과 관련시켜 深刻히 생각해볼 일”이라고 指摘했다.

    金洙暎은 이 社說의 經濟와 文化에 對한 前提에 對해 너무나 當然한 것을 내세우는 것은 問題의 核心을 回避하는 가장 典型的인 安易함에서 비롯됐다고 批判했다. 이어서 그 社說은 ‘本論’인 동백림事件에 對해 ‘인터내셔널’이란 曖昧한 表現을 써서 混亂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一般 文化人의 性向’과 ‘관련시켜 深刻히 생각해’ 봐야 한다고 搜査를 늘어놓고 있는데, 都大體 어떻게 關聯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詰難했다.

    要컨대 文化와 藝術의 自由 原則을 認定한다면, 學問이나 作品의 獨立性은 어떤 權力의 審判에도 屈할 수 없고 굴해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無識한 爲政者들은 文化도 水力發電所의 댐처럼 建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最高의 文化政策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金洙暎은 主張했다.

    “文化는 本質的으로 不溫하다”



    金洙暎은 이 評論에서 이어령이 1967年 末 ‘朝鮮日報’에 發表한 ‘에비가 支配하는 文化’라는 詩論에 對해서도 批判했다. “創作의 自由가 抑壓되는 原因을 지나치게 文化인 自身의 責任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 같은 感을 주는 것이 不快하다. 우리나라 文化人이 허약하고 卑怯한 것은 事實이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더 큰 原因으로 近代化해가는 資本主義의 高度한 威脅의 複雜하고 巨大하고 敏捷하고 조용한 破壞 作業을 이 글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過小評價하고 있는 것 같다.”

    金洙暎은 이어서 우리 文化를 支配하는 ‘에비’는 이어령이 보는 것처럼 “具體的인 對象을 가리키는 名詞”가 아닌, “假想敵인 어떤 禁制(禁制)의 힘”李 아닌, “가장 明確한 禁制의 힘”이라고 主張했다. 金洙暎에게 그것은 바로 ‘想像的 强迫觀念’이었고, 그런 强迫觀念에서 벗어나 모든 ‘不溫한’ 作品이 거리낌 없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 限 危機는 未來에 있는 것이 아니라 “只今 當場 이 瞬間에 있다”고 했다.

    多少 길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論爭의 進行을 좀 더 따라가 보자. 1968年 2月20日子 ‘朝鮮日報’에 이어령의 ‘오늘의 韓國文學을 威脅하는 것’이라는 ‘文藝詩評’李 揭載됐다. 이에 金洙暎은 ‘實驗的인 文學과 政治的 自由’를 發表, 文學의 前衛性과 政治的 自由의 問題가 얼마나 有機的으로 密着해 있는지에 對해서는 좀 더 理解가 뒷받침된 前提가 있어야 한다고 反擊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이어령)는 모든 眞正한 새로운 文學은 그것이 內向的인 것이 될 때는-즉 內的 自由를 追求하는 境遇에는-기존의 文學形式에 對한 威脅이 되고, 外向的인 것이 될 때에는 旣成社會의 秩序에 對한 不可避한 威脅이 된다는, 文學과 藝術의 永遠한 鐵則을 疏忽히 하고 있거나, 或은 一方的으로 適用하려들고 있다.”(김수영 散文選集 ‘퓨리턴의 肖像’, 1976, 민음사)

    김수영

    金洙暎 詩人의 女同生 김수명氏(왼쪽에서 네 番째)가 後援하고 있는 ‘金洙暎 文學賞’.

    金洙暎은 모든 實驗的인 文學은 必然的으로 完全한 世界의 具現을 目標로 하는 進步의 便에 서지 않을 수 없다고 堂堂하게 宣言했다.

    “모든 前衛文學은 不溫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文化는 本質的으로 不溫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文化의 本質이 꿈을 追求하는 것이고 不可能을 追求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金洙暎에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文化를 政治社會의 이데올로기와 同一視하는 것이 아니라, 文化를 單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同一視하는 것이었다. 나치스가 뭉크의 繪畫까지 頹廢的이라는 理由로 그 前衛性을 認定하지 않았듯이, 하나의 政治社會 이데올로기만을 强要하는 社會에서는 文學과 藝術의 前衛性 乃至 實驗性이 제대로 循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文化의 操縱(弔鐘)을 치는가

    金洙暎은 劃一主義가 强要하는 社會的 메커니즘에서 類型·無形 代制度(文化機關)의 ‘檢閱官’과 ‘大衆의 檢閱’을 共存시켜-이들의 代名詞를 金洙暎은 ‘秩序’라고 했다-거기에서 얻은 均衡을 現代文學의 創造的 出發點으로 認定할 수는 없을까 하는 問題를 提起한다. 共存의 摸索이다. 事實 金洙暎이 보기에 ‘大衆의 檢閱者’는 文化에 對해 ‘操縱(弔鐘)’을 칠 만한 能力도 없는 ‘鐘지기’에 不過했다. 글을 씀에 있어 自己檢閱을 몰랐고 直線의 散文家이기도 했던 金洙暎은 이 글의 結論을 이렇게 맺었다.

    “‘秩序는 偉大한 藝術이다’-이것은 政治權力의 市政(施政)口號로서는 알맞지만, 文學百年의 大計를 세워야 할 前衛的인 評價가 내세울 만한 奇拔한 示唆는 못된다.”

    이어령도 물러서지 않았다. 곧바로 ‘文學은 權力이나 政治理念의 侍女가 아니다’라는 反論을 폈다. 이어령은 이 글에서 “모든 前衛文學은 不溫하다” “모든 살아 있는 文化는 本質的으로 不溫하다”는 金洙暎의 表現에 意味를 두고, “不溫하니까 그 作品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不溫하니까 그 作品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만 그 主張과 判斷이 다를 뿐 文學作品을 文學作品으로 읽지 않으려는 態度에 있어 서로 一致한다”고 했다. 이어령은 文化의 創造的 自由와 眞正한 前衛性은 歷史의 進步를 追求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人生과 歷史, 그것을 保守와 進步의 두 토막으로 칼질해놓은 固定觀念과 圖式化된 이데올로기의 偏見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始作되어야 한다고 主張했다.

    金洙暎은 다시 ‘不穩性에 對한 非科學的인 臆測’을 發表하고 이어령의 ‘不穩性’ 是非에 對해 反駁했다. 이어령이 ‘前衛’나 ‘不穩’을 “政治的인 不穩性으로만 故意的으로 좁혀 規定하면서, 自身의 持論을 이데올로기에 副應하는 全體主義의 同調者 程度의 것으로 規定하는데… 人間의 思想史·文化史·藝術史는 그런 前衛性이 創造하고 이끌어온 歷史”라고 反駁했다.

    金洙暎과 이어령의 이 有名한 論爭은, 文學作品은 社會現象과의 聯關 속에서 判讀되어야 한다, 文學作品은 文學內的 現象에서 判斷되어야 한다는 두 가지 克明한 對立的 立場에서 나왔다. 그런 面에서 이 論爭은 韓國人들의 意識과 無意識 속에 內在해 있던 ‘禁制의 소리’를 밖으로 드러내 論理化했다는 點에서 重要한 意味를 지닌다. 그 對應論理 또한 人間性·純粹性 같은 抽象的이고 普遍的인 次元을 넘어 文學內的 問題로 展開되었다는 데 크나큰 意味가 있다. 이들의 論爭은 우리 文壇史(史)에 記錄될 傳說的인 事件의 하나로서, 文學人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으레 話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知識社會 全般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헛소리가 참말 되는 詩의 奇跡

    이 論爭이 있은 뒤인 1968年 4月13日, 金洙暎은 白鐵·李軒求·安壽吉·毛允淑 等과 함께 釜山펜클럽 主催의 文學 세미나에 參席했다. 金洙暎은 演壇에서 40餘 分에 걸쳐 우리 文學史에 길이 남을 有名한 詩論을 瀑布처럼 쏟아냈다.

    “始作(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心臟’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正確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同時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김수영 散文選集 ‘詩여 침을 뱉어라’, 민음사, 1975)

    ‘온몸으로 同時에 밀고 나가는 것’은 바로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고, 詩의 世界에서 볼 때 온몸에 依한 온몸의 履行은 사랑이고, 그것이 바로 詩의 形式이라고 金洙暎은 主張했다.

    김수영

    서울 道峯山 자락에 세워진 김수영 是非.

    詩의 形式 및 內容과 關聯, “內容의 面에서 完全한 自由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實狀 ‘內容’李 하는 말이 아니라 ‘形式’李 하는 혼잣말로, ‘內容’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自由가 없다”는 말을 繼續 지껄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繼續 지껄이는 것이 金洙暎에게는 이를테면 38線을 뚫는 길이며, 詩人의 그런 ‘헛소리’가 繼續되다 보면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驚異, 그것이 바로 ‘南無阿彌陀佛의 奇跡’이고 ‘詩의 奇跡’이다.

    金洙暎에게 自由는 아무런 援軍도 없는, 援軍을 必要로 하지 않는 孤獨하고 莊嚴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文學에의 勇氣가 없는 文學風土, 政治的 禁忌에 依해 傷處 입지 않는 風土에서 새로운 文學은 決코 나올 수 없다고 했다. 世界가 自由를 保有하는 限 混亂은 許容돼야 한다고 主張했다. 自由와 사랑의 同義語로서 混亂은 文化의 本質的 根源을 發效시키는 누룩이고, 그것이 眞正한 詩의 任務라고 했다. 金洙暎이 이날 情熱的인 語調로 表現한 詩論은 우리 文壇은 勿論 人文·社會科學 分野에서도 널리 膾炙된 有名한 宣言이었다.

    ‘巨大한 뿌리’ 詩人의 肖像

    1968年 6月15日 金洙暎은 신동문·이병주·정달영과 함께 청진동에서 燒酒를 마시고 다시 무교동으로 옮겨 麥酒를 마셨다. 金洙暎은 醉해 있었고 걸음은 비틀거렸다. 그가 을지로 入口 버스停留場에서 버스를 타고 西江 終點에 내린 것은 子正을 바로 앞둔 時間이었다. 金洙暎은 人跡이 끊긴 밤길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때 座席버스가 印度로 뛰어들면서 金洙暎의 뒤통수를 들이받았다. 金洙暎은 곧 赤十字病院으로 실려갔으나 다음날 아침 눈을 감았다. 享年 48歲였다. 葬禮式은 6月18日 禮銃會館(只今의 世宗文化會館 오른쪽) 廣場에서 文人葬(葬)으로 치러졌고, 遺骸는 서울 道峯山 先塋에 묻혔다.

    金洙暎은 過去的 意味보다 現在性으로 ‘살아 있는’ 人文精神에 가깝다. 그가 萬若 살아서 오늘과 같은 地球文明의 巨大한 暴風을 만났다면, 人類文明의 앞날에 對해 果然 어떤 前衛的 패러다임을 내놓을까. 팍스아메리카나의 終焉 속에서 果然 어떤 未來에의 꿈과 ‘예지’를 보여줄까. 그리고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우리 社會의 總體的 危機局面과 混亂, 葛藤의 회오리 속에서 그는 어떻게 ‘사랑의 變奏曲’에 表現된 ‘고요한 단단함’을 배우라고 했을까.

    48歲의 짧았으나 ‘巨大한 뿌리’ 같았던 自由인 金洙暎의 生涯를, 자칫 驛(逆)走行으로 치달을지 모르는 오늘의 時代狀況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보자.

    金洙暎은 1921年生으로 서울 鍾路바닥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 土박이다. 先天的으로 病弱해서 잔病치레가 잦았다. 1935年에 善隣商業學校에 入學해 1941年에 卒業했다. 그해에 도쿄로 건너가 미즈詩나 하루키(水品春樹) 演劇硏究所에 들어갔다. 留學時節 함께 下宿生活을 했던 英文學者 이종구의 證言에 따르면, 그는 蘇聯의 寫實主義的 演劇理論家 스타니슬라프스키의 ‘藝術과 나의 生涯’에 心醉해 있었다. 미즈詩나 演劇硏究所의 前身은 쓰키지(築地)小劇場으로, 1920年代에 主로 社會主義 思想을 담은 演劇을 舞臺에 올렸으며, 演劇이 끝난 後에는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天皇制를 顚覆瑕疵”고 熱辯을 吐했다.

    解放空間에서 金洙暎은 朴寅煥이 經營하던 말리敍事(茉莉書舍)에서 當時 尖端을 걷던 김기림 金光均 吳章煥 金炳旭 이시우 박일영 같은 藝術家들과 交遊했다. 이 무렵 演劇을 하다가 市로 轉向, 이미 相當한 習作을 하고 있었으며, 光復 後 最初로 나온 同人誌 ‘藝術部落’에 ‘廟庭(廟庭)의 노래’를 發表했다. 活字로 나온 金洙暎의 첫 作品이다.

    말리敍事가 사라지고 얼마 뒤 戰後 모더니즘의 嚆矢가 되는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嚴格히 말하면 ‘申詩論’ 同人의 同人誌. 1949年 4月에 發刊)李 첫선을 보였다. 이 詞華集(詞華集)은 金起林, 以上의 1930年代的 모더니즘을 1950年代 모더니즘으로 擴散시키는 길목에서 징검다리가 되었다.

    金洙暎은 이 詞華集에 ‘孔子의 生活難’이란 모더니즘 系列의 典型的인 難解詩를 發表했다. “꽃이 열매의 上部에 피었을 때/너는 줄넘기를 한다”로 第1聯을 始作한 詩는 意味의 混亂과 斷絶, 突然한 轉換, 엉뚱한 飛躍 같은 것을 노렸다는 解釋에서, 從來의 詩的 慣習의 굴레를 大膽하게 벗어나면서 詩人의 構圖的 姿勢가 이미 그 싹을 보였다는 評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反應을 낳았다.

    “生活은 高절이며 悲哀”

    光復 後 初期 모더니즘 視運動은 우리 文學史에 記錄할 만한 자취였으나, ‘申詩論’ 同人이 解體되고 ‘後半期’ 同人의 形成이 摸索되는 過程에서 6·25戰爭이 터졌다. 金洙暎은 戰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義勇軍으로 끌려갔다가 巨濟島 捕虜收容所에 收容되는 等 酷甚한 苦痛을 겪었다. 1953年에 發表된 ‘달나라의 장난’에서 그는 “都會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어느 小說보다도 신기로운 生活이며” “生活은 孤節(孤絶)이며 悲哀이었다/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고 悽絶하게 獨白했다.

    1953年이 저물어가는 10月 어느 날 金洙暎은 서울로 올라왔다. 戰爭통에 모든 것이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였다. 그의 家族은 이제 집도 없었다. 詩를 써서는 입에 풀漆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發表할 紙面도 없었다. 그 무렵 金洙暎은 數없이 많은 飜譯을 했다. 美國 雜誌나 單行本을 파는 露店에서 飜譯할 資料를 찾아 재미있는 글들을 추려내어 여기저기 雜誌社나 出版社를 기웃거려 보여주고 밤을 새워 飜譯했다.

    1953年 12月부터 이듬해 12月 사이에 쓴 그의 詩를 보면 ‘설움’이란 單語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의 代表作 中 하나인 ‘나의 家族’에 이런 대목이 있다. “차라리 偉大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유순한 家族들이 모여서/죄 없는 말을 주고 받는/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房 안에서/나의 偉大의 素材를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限없이 順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같은 사랑, 낡아도 좋은 사랑을 渴望했던 것이다. 1955年 6月 金洙暎은 마포구 구수동으로 移徙했다. 거기서 金洙暎은 菜蔬를 가꾸고 닭을 길렀다. 그런 生活이 金洙暎의 疲弊해진 몸과 마음을 오랜만에 安定시켜주었다. 事實 그는 養鷄나 밭일에 있어 아내의 ‘助手’에 不過했다.

    “4月은 猛烈히 灼熱하고 있소”

    現代에 와서 우리나라의 抒情詩들은 낡기 쉬운데, 金洙暎은 모더니즘的 實驗의 遺産과 自身의 抒情的 資質을 獨自的인 스타일로 發展시켰다. 그中 1957年에 發表된 ‘瀑布’ 같은 作品은 單純한 抒情을 넘어 知的으로 堅固한 陳述을 이루고 있다. 4·19 直後의 酬酌인 ‘푸른 하늘을’은 ‘瀑布’의 延長線에서 오랜 詩的 修鍊을 쌓고 歷史的 事件을 막 目擊한 詩人의 成熟함을 보여준다고 백낙청은 評價했다.

    “瀑布는 곧은 絶壁을 무서운 氣色도 없이 떨어진다/…고매한 精神처럼 쉴사이 없이 떨어진다…”

    1958年 11月1日 金洙暎은 第1回 한국시인협회賞을 受賞했다. ‘瀑布’를 비롯해 ‘꽃’ ‘봄밤’ 等이 受賞作으로 列擧됐다. 이듬해 춘조사(春潮社)에서 ‘오늘의 詩人選集’ 第1卷으로 金洙暎의 詩集 ‘달나라의 장난’을 刊行했다. 第2卷은 김춘수의 詩集, 第3卷은 全鳳健의 詩集이 選定됐다. 金洙暎은 印稅로 받은 冊들을 褓자기에 싸들고 親舊들을 찾아다니면서 寄贈했다. 가슴이 뿌듯했다. 첫 詩集을 矯導所에 뿌렸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理解될 듯했다.

    1950年代는 實로 견디기 어려운 時節이었다. 金洙暎에게 이 連帶는 刻薄한 生活에서 오는 한없는 고달픔, 正直하고 眞實되게 살려는 渴望, 生活의 窮乏과 정신의 渴症에서 오는 自責과 罪意識,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悲哀와 憂愁의 時節이었다. 强靭한 社會意識과 熱烈한 參與精神은 金洙暎 文學의 商標처럼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實狀 1950年代 全 期間에 걸친 이런 苦惱의 過程을 거쳐 마침내 이뤄진 決定이다.

    4·19革命 當日 金洙暎은 라디오 앞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市內로 나갔다. 그로부터 1週日 後 李承晩이 下野聲明을 發表하기까지 金洙暎은 미친 듯이 거리와 골목, 茶房과 술집을 쏘다녔다. 金洙暎은 4·19革命일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統一되는 戰慄에 빠졌다. 그 무렵 每日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詩를 썼다. 그러면서 不過 몇 달 사이에 1年値 詩를 지었다. ‘기도’ ‘六法全書와 革命’ ‘晩時之歎은 있지만’ ‘나는 아리조나 카우보이野’ 等이 이때 發表됐다. 그中 ‘가다오 나가다오’ 같은 詩는 當時 韓國 社會가 受容하기 어려운 作品이었다. 한 句節만 보자.

    “너희들 美國人과 蘇聯人은 하루바삐 가다오/미국인과 蘇聯人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差異가 있을 뿐/말갛게 個人 글 모르는 百姓들의 마음에는/‘미국인’과 ‘蘇聯人’도 똑같은 놈들/가다오 가다오”

    1960年에 金洙暎은 마침내 難解의 껍질을 벗고 ‘푸른 하늘을’을 發表한다. 오늘에 와서도 그의 代表作으로 꼽히는 이 詩의 2聯을 보자.

    “自由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自由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孤獨한 것인가를”

    4·19 當時 金洙暎의 興奮과 歡喜, 사랑, 思想의 激動成果 前進性·예각성은 北으로 올라간 그의 親舊 金炳旭에게 보내는 便紙에 잘 나타나 있다. 受信者도 적어 넣을 수 없었던, 그래서 차라리 方伯(傍白)에 不過했던 이 便紙에서 金洙暎은 4·19革命에 對한 感動을 民族統一과 時, 自由에 對한 壇上으로 展開하고 있다. 重要한 한 대목만 보자.

    “事實 4·19 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統一’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正말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偉大性을 모를 것이오. 그때는 正말 ‘남’도 ‘北’도 없고 ‘美國’도 ‘蘇聯’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온통 ‘自主獨立’ 그것뿐입디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그러니까 나의 몸은 全部가 바로 ‘主張’입디다. ‘自由’입디다. …以南은 ‘4月’을 契機로 해서 다시 태어났고, 그는 아직까지도 灼熱하고 있소. 猛烈히 灼熱하고 있소. 以北은 이 ‘灼熱’을 느껴야 하오.…반드시 이 ‘灼熱’을 느껴야 하오. 그렇지 않고서는 統一은 안되오.”(‘詩友 金炳旭兄에게’, ‘민족일보’ 1961年 5月9日子. 이 글은 季刊 ‘世界의 文學’ 1993年 여름號에도 실렸음)

    急進的 自由主義者로 履行

    4·19는 金洙暎의 文學的 生涯에 있어 하나의 分水嶺이었다. 이를 契機로 그의 文學에서 社會的인 性格이 짙어졌고, 人間의 삶을 規定 짓는 政治的 狀況에 對한 날카로운 關心이 나타났다. 金洙暎은 모더니즘의 김기림적 遺産을 물려받았으나, 한便으로 그 虛僞와 欺瞞性을 痛烈하게 攻擊했다. 韓國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觀念으로서는 存在하나 當代의 具體的 現實로부터 遊離돼 있었고, 따라서 大多數의 讀者에겐 難解하고 共感할 수 없는 것이었다. 一種의 文學的 虛僞가 자리 잡아간 것이다. 염무웅은 이에 對해 “좋은 以上의 詩가 假짜의 陋名을 쓸 餘地를 남겨놓고 있는 反面에, 나쁜 惡類의 모더니즘의 詩가 失格의 執行猶豫를 받을 수 있는 餘地가 또한 생기는 것은 當然한 歸結”이라고 했다. (‘金洙暎論’, ‘創作과 批評’ 1976年 봄號)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詩人이 바로 김수영이다. 그는 ‘모든 眞正한 새로운 文學’을 ‘旣成社會의 秩序에 對한 不可避한 威脅’으로 把握했다. 當代에 金洙暎은 위험스러울 程度의 過激한 急進 自由主義者로 알려졌으나, 그는 모더니즘 詩의 內容 없는 形式主義에 健康한 社會意識을 結合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形式과 內容은 卓越한 意味에서 同時的인 것이고 高度로 統一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詩人의 스승은 現實이다. 나는 우리의 現實이 時代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現實을 直視하지 못하는 詩人의 態度이다.” (‘모더니티의 問題’, ‘퓨리턴의 肖像’, 민음사, 1976)

    詩의 形態를 決定하는 것이 思想이고, 思想의 變化를 가져오는 것이 生活의 變化라고 하면, 새로운 詩는 새로운 生活과 새로운 實踐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金洙暎은 自己 時代의 現實이 너무나 劣惡한 條件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그 무엇보다 自由가 너무나 抑壓받고 監禁돼 있다고 했다. 甚至於는 ‘自由의 回復’이야말로 自身의 信仰이라고까지 告白한다. (‘나의 信仰은 自由의 回復’, ‘詩여 침을 뱉어라’)

    사랑은 自由의 實踐을 抑壓하는 現實的 條件에 對한 抵抗이며 實踐의 總體였다. 金洙暎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自由를 追求함으로써 自由의 完全에 ‘이르려’ 하고 있다. 그는 完全한 自由, 完全한 革命을 꿈꾸었다. 그러나 ‘完全한’은 不可能하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이르려’는 꿈, 不完全한 革命(自由)을 ‘完全革命’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꿈’이 必要하며, 그에게는 그 ‘꿈’이 곧 詩였다. 金洙暎은 1960年 6月17日 日記에 이렇게 적었다.

    “말하자면 革命은 ‘相對的 完全’을, 그러나 詩는 絶對的 完全을 遂行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現代에 있어서 革命을 幇助 或은 同調하는 詩는 무엇인가. 그것은 相對的 完全을 遂行하는 革命을 絶對的 完全에까지 승화시키는, 或은 승화시켜 보이는 役割을 하는 것이 아닌가.” (‘金洙暎全集’ 2卷 ‘산문’篇, 민음사, 1982)

    “썩어빠진 大韓民國이 惶悚하다”

    5·16은 金洙暎의 自由를 根本的으로 뒤엎어버리는, 反動 그 自體였다. 5·16 直後 쓴 ‘檄文(檄文)’ ‘모르지?’ 等 聯作詩에는 5·16을 빗대 쓴 詩句가 자주 나타난다. 그는 ‘伏中(伏中)’이란 詩에서 “미친놈처럼 라디오를 튼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미칠 것 같아서”라고 했고, ‘이놈이 무엇이지?’에서는 아무 데나 담뱃재를 떨 만큼 性急해지며, “이데올로기도 없다/밀모(密謀)는/전혀 없다… 낚시질도 안 간다… 하물며 中立思想硏究所에는 그림자조차 비친 적이 없다”고 躁急性을 보이고 神經質을 부리기도 한다.

    時間이 지나 1960年代 中盤부터, 그러니까 後期詩로 들어서면서부터 金洙暎은 特有의 反復과 逆說, 飛躍과 反轉, 斷絶과 壓縮 等 갖가지 技法을 動員해 뛰어난 作品을 쏟아냈다. 달라진 것은 過去의 팽팽한 緊張感과 速度感의 餘韻이 남아있는 가운데, 좀 더 幅이 넓어지고 너그러워졌으며, 力動的인 槪念의 ‘사랑’으로 集約되어가는 것이라고 評論家들은 解釋했다. ‘巨大한 뿌리’(1964年),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1965년), ‘눈’ ‘泄瀉의 알리바이’(1966年), ‘VOGUE야’ ‘사랑의 變奏曲’ ‘꽃잎 1·2·3’(1967年) ‘椅子가 많아서 걸린다’ ‘풀’(1968年) 等이 이때 發表됐다.

    1964年에 發表된 ‘巨大한 뿌리’는 詩的 이미지 整頓에 逆行하는 散文體로 日常의 經驗的 制約을 넘어 歷史的 體驗에까지 거침없이 肉薄한다.

    “버드 비숍 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大韓民國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惶悚하다 歷史는 아무리/더러운 歷史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나에게 놋周鉢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追憶이/있는 한 人間은 永遠하고 사랑도 그렇다”

    金洙暎은 이 詩에서 歷史의 記憶을 反芻하며 未來進行形의 歷史로 힘차게 나아가고자 想像力을 劇化한다. 金洙暎은 이 詩에서 요강·網巾·長竹·種苗商·裝塡·구리개 藥房·申前·皮革點·곰보·애꾸·無識쟁이 等을 ‘카니발的’으로 呼名, ‘내가 뿌리박기 위해’ 어떻게 보면 하찮은 것들과 지지리 못난 이들을 共同體的 運命으로 抱擁하려는 熾烈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後期 代表作인 ‘사랑의 變奏曲’은 첫마디에서부터 大都市의 欲望 속에서도 사랑을 發見하겠다는 堂堂하고 거침없는 語調를 드러낸다. “欲望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發見하겠다 都市의 끝에서” 金洙暎은 이 詩에서 都市의 온갖 騷音마저 創造的 混沌의 힘 또는 日常의 具體性을 띤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랑과 欲望이 뒤엉킨 都市의 정글과 ‘가시밭’ 길을 每瞬間 헤쳐가는 삶에서 欲望을 사랑으로 끌어올리는 希望을 擔保할 수 있다고 외친다.

    陶醉的·幻想的 현대시

    金洙暎은 프랑스革命과 4·19革命을 包含, 人類가 겪은 모든 革命이 決코 單番에 成就될 수 없으며, 革命의 始初를 배반하는 숱한 反革命을 통해 革命은 鍛鍊된다고 했다. 그는 歷史를 바꾸는 힘을 ‘사랑의 變奏曲’으로 봤다. “暖爐 위에 끓어오르는 물이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革命 後에도 ‘熱烈한 사랑의 列島’를 내면화할 줄 아는 ‘사랑의 技術’이 必要하다고 그는 이 詩에서 描出(描出)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存在의 뿌리까지 뒤흔드는 온갖 試鍊을 고스란히 견뎌내고 난 뒤의 ‘고요한 사랑’이야말로 暴風에 쓰러지면서도 暴風을 일으킬 수 있으며, 사랑의 ‘고요한 단단함’을 알 때까지 成熟해야 한다고 힘찬 목소리를 내뿜는다. ‘사랑의 變奏曲’의 마지막 行들은 우리 現代詩의 가장 陶醉的이고 幻想的이며 莊嚴한 幸福의 約束을 보여주는 잔치다운 대목의 하나로 評價받았다.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인류의 終焉의 날에/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미대륙의 石油가 枯渴되는 날에/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前에 너의 가슴에/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배울 거다/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의심할 거다!/복사씨와 살구씨가/한번은 이렇게/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時間의/그릇된 名相이 아닐 거다”

    싸구려 飜譯의 原稿料, 6部 利子로 빌려온 돈, 헌冊房에서 사온 冊, 술, 라디오, 메밀국수, 養鷄, VOGUE 雜誌 等 生活現實의 稅目(細目)을 자주 導入하던 金洙暎은 이제 ‘人類의 終焉의 날’李 暗示하는 까마득한 時間, ‘美大陸’으로 喚起되는 空間的 距離까지 始作(詩作)의 世界를 거칠 것 없이 펼쳐나갔다.

    1968年에 發表된 ‘풀’은 金洙暎의 最後 作品이며 드물게도 短詩(短詩)의 形式을 띠고 있다. 흔히 ‘金洙暎 文學의 極點’이며 ‘幸福한 時間의 偶然’으로 評價되는 이 作品은 節制와 含蓄의 妙味가 卓越하게 織造(織組)된, 그의 詩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作品으로 評價된다. ‘풀’에 對한 解釋을 둘러싸고는 單純한 自然的 現象을 對象으로 했다고 보는가 하면, 뿌리 뽑힌 存在, 政治社會的 알레고리로 보는 觀點에 이르기까지 無數한 解釋이 있다. 이 詩에는 마치 動搖와도 같은 소리의 울림과 더불어 無窮無盡한 ‘意味의 울림’이 담겨 있다. ‘풀’과도 같은 民衆의 삶에 對한 생각은 이 詩에서 決코 군더더기가 아니다.

    ‘世界의 開陳(開陳)’으로서의 散文

    여기서 金洙暎의 散文을 言及하지 않을 수 없다. 金洙暎의 식을 줄 모르는 싱싱한 젊음과 自由에 對한 懇求, 그리고 眞實에 對한 渴症은 一切의 迂廻와 曲射(曲事)를 拒否하는 直線的 散文에서 眞짜 모습을 드러낸다. 金洙暎은 대중할 수 없는 無責任한 글이나 거짓말이나 흐리터분한 말은 一切 하지 말라고 同僚詩人이나 知人들에게 强調했다. 金洙暎의 散文은 以上(李箱) 以來의 一品이며, 爽快한 정신의 換氣裝置였다. 그의 散文은 그의 詩와 더불어 꼭 있어야 할 ‘時間과 空間의 必然’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金洙暎이 남긴 散文은 日記抄, 未完成 小說 한便(‘義勇軍’), 始作(詩作)노트, 書簡文, 市의 月評 및 書評, 그리고 에세이 等이다. 金洙暎의 明快한 會話組 散文은 1950年代에 私的인 水準에 머물렀으나, 1960年代 들어 ‘世界의 開陳(開陳)’으로 進展한다. 4·19에서 5·16까지의 散文들은 急進的 自由主義와 詩的 感受性의 政治를 主題로 삼고 있다. 假令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통해 革命의 當爲的 方向을 가늠하는가 하면, 1961年에 쓴 ‘詩의 뉴프런티어’에서 “알맹이는 다 以北 가고 여기 남은 것은 다 찌꺼기뿐이냐”라고 歎息했다.

    1960年代의 散文들에서는 이 글의 처음에 言及된 이어령과의 論爭에서와 같이 ‘不溫할 自由’를 擁護하는가 하면, ‘제 精神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청맥’ 1966年 5月號)에서는 “4·19를 公休日로 指定하지 못하고, 通行禁止가 解除되지 않고, 越南派兵을 反對하지 못하고, 勞動組合이 窒息하고, 言論自由가 없는” 現實을 慨歎한다. 그뿐만 아니라 1960年代 韓國社會에 彌滿했던 正義·自由·平和 精神의 後進性과 人類文明에 對한 安易한 逃避 等을 痛烈하게 批判한다. ‘詩여 침을 뱉어라’는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고자 했던 金洙暎만의 삿대질이었다. 한마디로 金洙暎의 散文은 1950,60年代 現實 속에서 世界私的 同時性을 追求했던 變革的 知識人이 當代를 向해 내리꽂은 가장 雄辯的인 宣言이었다.

    自我의 擴張, 社會的 解放

    신동문은 金洙暎을 목소리가 다듬어지지 않은 聖書의 요한과 같았다고 보았다. 申東曄은 金洙暎의 죽음은 이 民族의 ‘가슴아픈 損失’이라고 슬퍼했다. “30代에 맞은 金素月의 죽음보다 40代 後半에 當한 金洙暎의 죽음을 더욱 夭折로 느끼게 하는 것은 거푸 태어날 수 있었던 그의 젊음 때문”이라며 유종호는 아까워했다.

    지난해 金洙暎 詩人이 世上을 떠난 지 40年이 됐다. ‘創作과 批評’은 여름號에 그의 서랍 속에 묻혀 있던 ‘不溫한’ 詩와 日記 여러 篇을 찾아내 發表, 言論의 注目을 받았다. 염무웅은 이들 作品을 통해 金洙暎은 “詩人의 內部에서 作動하는 自己檢閱의 메커니즘에 挑戰”했고, 金洙暎 自身의 말을 빌리자면 自我의 擴張과 社會的 解放을 한몸 안에 統合한 ‘自由의 履行(履行)’을 이루려고 했다.

    金洙暎은 分明 하나의 挑戰이었다. 人物이건 作品이건 어떤 文學私的 事實이 後世 사람들의 삶과 意識에 끊임없이 膾炙되고 새롭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오늘에도 分明 ‘살아 있는’ 것이다. 金洙暎은 文學史的으로뿐만 아니라 韓國 人文學과 知識社會 全般에 걸쳐 함석헌·김지하 等과 함께 光復 後 가장 큰 影響을 미친 人物로 評價받았다. 그의 速度感 있는 參與 軌跡은 文學史의 緊張感은 勿論, 當代 및 後代 知識人들의 精神世界에도 하나의 變曲點이었다. ‘사랑의 變奏曲’에 登場하는 ‘人類의 終焉의 날에’나 ‘美大陸에서 石油가 枯渴되는 날에’ 같은 句節은 오늘의 人類가 當面한 限界狀況을 默示錄的 敍事로 豫知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김수영
    윤무한

    1943年 大邱 出生

    고려대 史學科 卒業, 同 大學院 修了

    동아일보 新東亞 記者, 京鄕新聞 政經文化部長·副局長, 民主日報 編輯局長

    1993~98年 大統領祕書室 統治史料祕書官, 강원대 史學科 招聘敎授

    著書 및 論文 : ‘人物대한민국사’ ‘韓國史 定立을 위한 새로운 時論’


    純粹와 參與, 尖端과 ‘停止’, 解脫과 諷刺 사이의 間隙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或은 詩의 藝術性과 社會性을 辨證法的으로 다루고, ‘無意味’로 ‘意味’를 뛰어넘으려 한 金洙暎은 只今 서울 道峯山 자락 是非(詩碑) 아래 ‘풀’처럼 누워 있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東風에 나부껴/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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