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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김정남은 ‘노아웃’|新東亞

北 김정남은 ‘노아웃’

“勞動黨 海外情報·資金 背後 總括” 김옥·張成澤과 ‘反김정철’ 聯合?

  • 황일도 동아일보 新東亞 記者 shamora@donga.com

    入力 2007-08-09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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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繼構圖에서 탈락해 全世界를 떠도는 浪人이 됐다.” 2001年 日本 나리타 空港 密入國 해프닝 以後, 김정일 北韓 國防委員長의 長男 김정남(36)은 그렇게 各國 言論의 웃음거리로 轉落했다. 異腹同生인 鄭澈(26), 정운(24)李 後繼者 授業을 받는 동안 海外에서 放蕩한 生活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그러나 最近 들어 確認되는 그의 行步는 이러한 ‘定說’을 뒤집기에 充分하다. 5月 金 委員長의 心血管 手術 當時 醫療陣과 同行入國, 以後 2個月 남짓 平壤에 머물며 勞動黨 39號室 業務를 맡고 있다는 消息, 劇的으로 權力核心에 復歸한 張成澤 組織指導部 第1副部長이나 金 委員長의 새 夫人 김옥과의 오랜 因緣…. 金 委員長의 세 番째 夫人 고영희 死亡 以後 차츰 水位가 높아진 後繼構圖 勢力다툼이 最近 들어 마침내 팽팽한 接戰 局面에 이르렀다는 徵候가 곳곳에서 確認된다.


    # 場面 1

    北 김정남은 ‘노아웃’

    2001年 5月 日本 나리타 空港으로 不法 入國하다 摘發돼 言論에 露出된 김정남. 當時 30歲였다.

    2003年 6月 初 平壤 大同江邊 의암동의 住宅街 銀덕촌. 김정일 委員長의 核心 側近들이 모여 사는 이 最高級 빌라村에서 한 高位將星의 生日맞이 저녁파티가 열렸다. 모여든 이들은 銀덕촌에 함께 사는 軍部 實力者들. 이들은 서로 술盞을 부딪치며 나지막이 “大將님 膳物은 받았나?”라고 챙겨 물었다. 現場에 있었던 한 脫北 人事의 回顧다.

    “膳物은 얼린 노루와 山蔘이라고 했다. 金 委員長은 ‘將軍님’으로 불리므로 ‘大將님’은 分明 다른 사람일 터였다. 누구를 말하는지 궁금해 그中 親分이 있던 이에게 조용히 물으니 김정남이라는 答이 돌아왔다. 5月10日 自身의 生日을 맞아 軍部 人士들에게 膳物을 보낸 것을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이들끼리 서로 確認하는 模樣이었다.”



    언뜻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이 回顧가 意味深長한 것은 그 時點 때문이다. 2003年 6月은 김정남이 日本에 密入國하다 摘發된 2001年 5月로부터 2年餘가 지난 때로, 大部分의 內外信과 專門家들은 그가 ‘浪人 아닌 浪人이 되어 海外를 떠돈다’고 端正하던 時期다. 더욱이 이른바 ‘고영희 崇拜’ 文件이 確認돼 ‘김정남은 後繼構圖에서 탈락했고, 後繼者는 鄭澈 아니면 정운’이라는 定說이 確固해진 後의 일이다.

    # 場面 2

    2005年 末, 北韓을 擔當하는 한 情報機關은 김정남에 對한 精密分析 報告書를 靑瓦臺에 提出했다. 그間 主로 海外에 머무르던 그에 對한 各種 言論報道와 諜報를 綜合的으로 分析한 報告書였다. 結論은 ‘김정남은 後繼構圖에서 탈락했다고 볼 수 없으며, 向後 그를 더욱 눈여겨볼 必要가 있다’는 것. 이는 以前에 또 다른 情報機關이 靑瓦臺와 國會에 報告한 北韓 後繼構圖 動向, 卽 “김정남은 完全히 脫落된 것으로 보인다”는 內容과 全혀 달랐다.

    意見이 엇갈렸지만 調整은 이뤄지지 않았고, 機關 間의 見解差異는 現在까지 繼續되고 있는 것으로 傳해진다. ‘綜合된 結論’을 注文해도 所用 없었다는 게 當時 靑瓦臺 關係者들의 說明. 앞서의 情報機關은 以後에도 여러 次例 ‘김정남에 關한 精密 觀察 必要’를 主張하는 報告書를 靑瓦臺에 提出한 것으로 알려졌다.

    # 場面 3

    2001年 5月 김정남이 日本 나리타 空港에서 逮捕되어 全世界 言論의 카메라 洗禮를 받은 直後, 各國 情報當局에서는 그가 大學 卒業 以後 國家安全保衛部 幹部를 歷任했다는 說明이 나왔다. 國家安全保衛部는 反黨(反黨), 反體制 事件을 監視, 索出하는 社會統制機構로 主로 政治 査察을 擔當하는 一種의 祕密警察. 2002年 6月 ‘오마이뉴스’는 國精院 高位關係者의 말을 引用해 “김정남의 職銜은 國家安全保衛部 副部長”이라고 報道했다. 脫北 官僚들에 따르면 김정남이 이 자리에 任命된 것은 1999年으로, 2001年 以後 海外에 主로 머물면서도 이 職銜은 繼續 維持해온 것으로 傳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部署의 最高責任者인 部長과 차선임人 제1부부장이 不明確하다는 事實. 1987年 當時 部長이던 二進數가 死亡한 以來 後任者가 任命되지 않았고, 以後에는 김영룡 第1副部長 中心으로 運營됐으나 그 亦是 1998年 4月 肅淸됐다. 近來 들어 部長은 繼續 空席인 채 副部長 가운데 한 사람이 第1副部長으로 昇進됐다고 傳해지지만, 國家情報院은 그間의 慣例와는 달리 新任 第1部部長이 누구인지에 對해 嚴密한 保安을 걸어두고 있다. 2006年 가을 南北頂上會談 問題를 打診하기 위해 中國 베이징에서 韓國側 ‘비선(秘線)’ 人士들과 接觸한 리湖南 北韓側 慘事의 뒤에 ‘김정일 委員長을 說得할 만한 影響力을 가진’ 國家安全保衛部 副部長級 人事가 있다는 說이 播多했지만, 具體的으로 누구인지는 確認되지 않았다.

    # 場面 4

    ‘신동아’ 7月號는 지난 5月 中旬 김정일 委員長의 心血管 治療를 위해 베이징에서 平壤으로 入國하던 獨逸 醫療陣과 김정남이 同乘하고 있었다는 內容의 國精院 諜報報告를 報道한 바 있다. 以後 김정남이 繼續 平壤에 머무르고 있다는 事實은 6月 下旬 入北한 EU(유럽聯合) 議會 代表團 人士들을 통해 다시 確認됐다는 것이 關係者들의 說明이다. 한 北韓 專門家는 이와 關聯해 다음과 같은 分析을 傳한다.

    “當時 김정남의 平壤行은 單純히 金 委員長의 安否를 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예 平壤에 定着하기 爲한 것이었던 듯하다. 最近 그가 北韓 勞動黨의 資金問題를 總括하는 中央黨 39號室에서 勤務하고 있다는 消息이 들리는 것도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海外生活을 整理했다는 것, 中央黨에서 業務를 始作했다는 것은 그가 後繼構圖에서 탈락했다는 그間의 推測을 뒤집기에 充分하다.”

    김평일의 先例

    北 김정남은 ‘노아웃’
    北韓의 後繼構圖를 豫測하는 일은 뒤엉킨 온갖 諜報와 說을 풀어가는 혼란스러운 作業이다. 北韓體制의 特性上 明確한 情報公開와 事實確認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 그러나 2001年 以後 長男인 김정남은 後繼構圖에서 탈락했다는 分析이 굳어졌고, 이는 如前히 흔들림 없이 維持되고 있다. 國內外 專門家들과 言論, 各國 情報當局의 公式 브리핑 亦是 이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最近 들어 確認되는 몇 가지 徵候들은 이러한 ‘定說’에 疑問을 품기에 充分해 보인다. 後繼者가 決定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最小限 ‘김정남은 탈락했다’는 前提下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 進行되고 있기 때문. 金 委員長의 아내이자 次男 鄭澈, 3男 정운의 生母인 高永喜가 살아 있을 때는 김정남의 位置가 極히 不安定했던 것이 事實이지만, 2004年 高永喜가 死亡한 後 狀況이 달라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觀測이 有力하게 擡頭되는 것. 쉽게 말해 김정남과 동생들 사이 或은 그들을 등에 업은 勢力 間에 後繼構圖를 둘러싼 權力鬪爭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는 一連의 徵候들이 나오고 있다.

    于先 5月 金 委員長의 手術 當時 김정남이 平壤에 들어갔다는 事實부터 살펴보자. 獨逸 醫療陣이 直接 診察하기 前까지는 어떤 手術이 될지 確認하기 어려운 만큼, 이때는 權力構圖가 不安定해질 可能性이 充分한 매우 敏感한 時點이었다. 이 時期에 김정남이 平壤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가 平壤에서 排斥당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根據를 提供한다. 김정철의 後見勢力이 敏感한 時期에 長男이 돌아오는 것을 坐視할 理 없는 까닭이다.

    김정남이 2003年에도 軍部 高位層에게 ‘大將님’으로 불리며 膳物을 돌릴 만한 位置였다는 것 亦是 마찬가지다. 1980年代 김정일의 後繼者 地位가 鞏固해지던 무렵, 後繼構圖에서 탈락한 그의 異腹同生 金平一은 ‘곁가지’로 불리며 事實上 軟禁狀態에 處해졌다. 헝가리와 불가리아 等 東歐圈에 大使로 나가 거의 平壤에 들어가지 못했고 大使館 職員들에게도 따돌림을 當할 程度로 遮斷당했다. 하물며 平壤의 人士들에게 膳物을 돌리는 일은 想像조차 어렵다는 게 金平一과 함께 勤務했던 前職 北韓 外交官의 말이고 보면, 2003年에도 김정남이 後繼構圖에서 完全히 탈락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루아침의 轉落

    김정남에 對한 김정일 委員長의 愛情 亦是 여러 次例 確認된 바 있다. 러시아로 亡命한 김정남의 姨母 성혜랑이나 김정남과 어린 時節을 함께 보낸 外四寸 이한영의 手記, 脫北 高位官僚들의 回顧 等을 綜合하면, 金正日은 ‘남의 아내를 빼앗아 얻은’ 첫아들을 公開的으로 키울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파 幼年時節 내내 愛情을 쏟았다는 것이다(김정남의 生母 성혜림은 1960年代 北韓 最高의 女俳優로 이미 結婚한 몸이었지만, 金 委員長은 離婚을 시키고 自身의 아내로 삼았다). 서너 살 먹은 아들이 밤中에 小便을 보려 하면 김정일이 內衣 바람으로 直接 牛乳甁을 들고 오줌을 받아냈다거나, 1980年 아홉 살의 김정남이 스위스 留學을 떠나게 되자 술을 마시며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처럼 울었다는 內容 等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2000年代 初盤까지 國內外와 北韓 內部를 莫論하고 김정남이 後繼者가 될 可能性이 높다는 分析에는 異見이 없었다. 以前부터 컴퓨터를 비롯한 IT産業과 通信事業의 幕後 調停役을 맡고 있는 것으로 傳해졌던 그는, 2001年 2月 김정일 委員長의 中國 상하이 訪問 當時 同行하며 中國 內 IT業界 人士들을 接觸했다는 報道가 나왔다. 다른 한便으로는 大(對)中東 미사일 輸出에 關與해 資金 樹齡 過程에 直接 關與했다는 諜報도 있었다. 그의 生母 성혜림이 러시아로 떠난 後에는 關聯 事實을 接한 모스크바의 北韓 留學生들을 一一이 召喚해 입團束을 시키는 等 ‘皇太子’의 地位를 保護하기 위한 北韓 當局의 努力도 確認됐다.

    그러나 2001年 5月 日本 나리타 空港에 家族과 함께 도미니카共和國 旅券으로 入國하려다 摘發돼 身分이 露出된 일을 契機로 狀況은 하루아침에 180度 變했다. 後繼構圖에서 밀려났다는 分析이 洑물을 이룬 것. ‘國際的인 亡身’에 대로(大怒)韓 金 委員長이 그를 아예 外國에 머물게 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以後 中國 베이징과 마카오,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等에서 確認된 그의 行跡은 實際로 外國을 떠돌며 浪人 生活을 하고 있다는 分析을 確認해주는 듯했다.

    여기에 決定的인 契機를 提供한 것이2002년 8月 朝鮮人民軍出版社가 만들어 配布한 ‘學習製鋼’ 內容이었다. 金 委員長을 向한 ‘尊敬하는 어머님’의 한없는 忠誠心을 强調하는 學習製鋼의 配布는 高永喜를 偶像化함으로써 金 委員長과 高永喜 사이의 아들인 鄭澈이나 鄭運을 後繼者로 擁立하기 爲한 準備作業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前職 情報當局 最高위關係者는 “問題의 製鋼은 實際로 2003~04年에 人民軍 前方部隊에 大大的으로 配布돼 講演資料로 活用됐다”고 말했다.

    “韓國에도 連繫고리 있다”

    김정남이 長男이기는 하지만, ‘越北者 出身의 離婚女로 西方에 亡命 試圖까지 한 生母’라는 背景은, 정철과 정운의 生母가 이 무렵 金 委員長의 公式 婦人과 다름없었던 것과 比較하면 매우 脆弱했다. 實際로 2001年 以後 그가 海外로 떠돌게 된 것은 事實上 高永喜의 作品이라는 解釋이 支配的이다. 2001年 美國으로 亡命한 高永喜의 동생 고영숙度 美國 情報當局에 같은 內容으로 陳述한 것으로 傳해지고 있다. 다음은 한 情報當局者의 말이다.

    “事實 日本에서의 해프닝은 그리 深刻한 問題도 아니고, 김정남이 책임져야 할 事案도 아니었다. 日本 法務省 調査 當時 그는 ‘디즈니랜드 觀光을 위해 入國했다’고 陳述했지만, 그 말을 믿는 情報當局者는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 名義의 旅券을 使用한 것이 ‘不法 入國’의 核心인데, 그 與圈은 僞造旅券度 아니고 借名(借名) 旅券이었다.

    北 김정남은 ‘노아웃’
    全世界 어느 나라든 情報要員들은 모두 借名 旅券을 使用하고, 友好國 情報機關에 協助를 要請해 餘卷을 빌리기도 한다. 世上의 어떤 아버지가 그 程度 事件으로 長男을 完全히 내치겠는가. 오히려 그 前에도 外國을 數없이 드나들었던 그가 그 時點에 摘發된 理由가 무엇인지, 日本 當局이 法的으로 問題가 없는 旅券을 使用한 그를 事前에 기다리다가 制止 할 수 있었던 背景이 무엇인지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以後 最近까지는 鄭澈 或은 정운으로의 世襲 徵候가 두드러진다는 觀測이 支配的이었다. 두 사람이 金 委員長의 軍部隊 視察 等에 자주 同行한다는 消息이나, 鄭澈이 2001年부터 2006年 4月까지, 정운이 2002年부터 올해 4月까지 軍幹部 養成機關인 김일성軍事綜合大學 特設班에서 ‘主體의 領軍술’ 等 軍事學을 極祕裡에 工夫했다는 情報 等이 有力하게 擧論됐다. 學界에서든 情報當局 內部에서든, 關聯 論議는 오히려 두 살 터울인 정철과 정운 가운데 누가 後繼者로 指目될 것인지에 焦點이 모아지는 雰圍氣였다.

    이 時期 김정남은 中國과 마카오에 主로 머물면서 유럽 等地를 頻繁하게 드나든 것으로 傳해진다. 日本 入國 時도 當時 함께 카메라 洗禮를 받았던 夫人 신정희와 ‘김남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열세 살짜리 아들은 主로 베이징에 居住하고 있으며, 아들은 韓國 僑民 子女들도 많이 다니는 國際學校에 在學 中인 것으로 傳해진다. 한 情報當局者는 “김정남 本人이 濟州島 等 韓國에 다녀갔다는 說은 事實 與否가 確認되지 않았지만, 最小限 韓國에도 連繫고리가 있다는 徵候는 充分하다”고 말했다.

    特히 2004年 5月 高永喜가 癌으로 死亡한 以後(一角에서는 事故死를 假裝한 暗殺 疑惑이 提起되기도 했지만 事案의 特性上 確認은 不可能하다) 김정남의 活動空間은 漸次 넓어졌다. 當初 알려진 것처럼 平壤 出入이 完全히 禁止된 것도 아닐뿐더러, 海外情報를 擔當하는 勞動黨 35號室(옛 對外情報調査部) 業務에 關與하며 周邊國에 工作員을 둘 程度로 積極的인 活動을 벌여온 것으로 傳해지고 있다. 2004年 12月에는 김정남과 베이징 空港에서 만나 名銜을 주고받은 日本 記者들에게 그를 自處하는 야후코리아 計定의 e메일이 發送돼 話題가 되기도 했다.

    情報當局 關係者들에 따르면, 이 時期 그는 周邊國 關聯 部處에 情報員을 둘 수 있을 만큼 對外情報 分野에 깊숙이 介入한 것으로 보인다. 重要事項의 境遇 自身이 報告받은 內容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報告할 程度로 金 委員長과의 關係도 密接하게 維持돼온 情況이 露出되기도 했다는 것. 2006年 1月 김정일 委員長이 中國을 訪問했을 때는 베이징에 머물던 그가 아버지와 同行하며 主要 人士들을 接見한 것 같다는 外信報道가 나온 바 있다.

    出入國 記錄의 ‘조광貿易 責任者’

    올해 들어 김정남의 行步는 더욱 거침없다. 2月 베이징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남은 日本 후지TV와 짧은 인터뷰를 갖고 “北韓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가끔씩 아버지를 만난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그가 마카오에서 베이징行 飛行機를 타면서 自身의 身分을 ‘조광貿易 總責任者’로 적었다는 事實. 이 때문에 베이징 空港에는 非常이 걸렸고, 이 消息이 記者들에게 傳해져 그의 베이징 到着 瞬間이 카메라에 捕捉됐다. 조광貿易은 勞動黨 39號室 傘下 會社로 마카오에 設立돼 對外資金 決濟와 貿易에 關與해왔으며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여 있던 北韓 預金 2500萬달러의 相當部分을 管理해온 機關이다.

    그가 베이징에 到着한 때는 工巧롭게도 BDA 資金 問題 解決을 論議하기 위한 6者會談이 열리던 渦中이었다. 또한 조광貿易의 新任 總支配人으로 任命된 것으로 報道된 이름과 김정남이 베이징에서 使用한 與圈의 假名이 ‘김철’로 同一하다는 點도 疑懼心을 增幅시키기에 充分했다. 이러한 情況을 들어 日本 言論에서는 그가 BDA 資金에 相當部分 關與해왔고 앞으로도 北韓 國際金融 決濟를 一定部分 責任지는 位置에 있는 것 같다고 報道했다.

    ‘술과 女子만 밝히는 放蕩兒’라는 이미지 亦是 相當部分 誇張됐다고 前現職 對北 情報當局 關係者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스위스에서 國際學校와 제네바綜合大學을 다니며 엘리트 敎育코스를 거친 그는 英語와 프랑스語, 中國語 等 外國語에 能通해 空港 等에서 마주친 記者들과도 英語로 자유롭게 인터뷰했다. 젊은 時節부터 對外經濟業務에 從事해 國際金融과 貿易에도 밝을 뿐 아니라 長期間의 外國生活로 開放的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評價다. 特히 베이징에 머물면서 中國 高位層과도 두터운 親分을 쌓아 적잖은 支持를 確保하고 있다는 것. 앞서의 前職 最高委 情報當局者는 “아버지를 닮아 遊興을 즐기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허술하거나 만만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와 關聯해 一部 脫北官僚들 사이에는 그가 北韓 經濟가 한창 最惡으로 치닫던 1990年代 後半 經濟實務를 익히며 金 委員長에게 “中國式 改革·開放路線으로 가야 한다”고 强力히 建議했다는 얘기가 傳해진다. 勞動黨과 人民軍의 主要 幹部들에게도 비슷한 發言을 했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그의 主張은 金 委員長의 뜻과 맞지 않았고, 이러한 葛藤이 累積되면서 父子 사이가 漸次 멀어졌다는 것이다. 情報當局者들 亦是 ‘路線 葛藤說’李 充分히 蓋然性 있다고 認定하지만, 그의 海外 滯留는 亦是 고영희 때문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아내의 등쌀에 시달린 金 委員長이 “바깥世上을 좀더 經驗하며 내 눈이 돼달라”는 名目으로 그를 내보냈으리라는 것이다.

    2006年 1月의 공교로움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지난해 金 委員長의 네 番째 夫人이라고 報道된 김옥 亦是 高永喜의 ‘牽制’를 받아 그가 死亡할 때까지 相當期間을 마카오 等 海外에 머물렀다는 事實이다. 工巧롭게도 김옥과 김정남의 마카오 滯留 期間은 數年이 겹친다. 김정남이 김옥의 마카오 生活을 돌봐준 것 아니냐는 觀測이 나오는 背景이다. 김옥은 고영희 死亡 以後 김정일의 첫 海外訪問人 2006年 1月 訪中(訪中) 때 國防委員會 課長 資格으로 同行해 中國側으로부터 퍼스트레이디 待接을 받았다. 김정남이 아버지와 同行한 것으로 보인다는 報道가 나온 바로 그 海外 訪問길이었다.

    北 김정남은 ‘노아웃’

    2004年 失脚했다가 2年 뒤 復歸한 張成澤 勤勞團體 및 水道建設部 第1副部長. 2002年 서울 訪問 當時 撮影된 寫眞이다.

    공교로운 대목은 또 있다. 2004年 봄, 北韓의 第2權力者로 불리던 金 委員長의 妹弟 장성택 勞動黨 組織指導部 第1部部長이 失脚해 公開 舞臺에서 사라진 바 있다. 張成澤은 2002年 서울을 訪問해 南側 關係者들에게 깊은 印象을 남겼을 程度로 代表的인 ‘親中派(親中派) 테크노크라트’로 알려져 있다. 그의 失脚 直後 김정남은 프랑스에 머물던 장금송 等 張成澤의 家族에게 慰勞와 助言을 아끼지 않는 等 여러 도움을 줬다는 情況이 確認됐다(장성택은 김정남의 姑母夫이고 場金松은 김정남의 姑從四寸이다).

    情報當局은 張成澤의 失脚 以後 後任으로 任命된 리제강 現 組織指導部 第1副部長을 自他가 公認하는 親(親)김정철派의 리더로 分類한다. 張成澤의 左遷 以後 그의 側近인 최春荒 宣傳煽動部 第1部部長과 리광근 貿易商 等을 除去하는 데 리제강 副部長이 主要 任務를 擔當했다는 것. 張成澤 副部長이 리제강, 리用鐵 組織指導部 軍士擔當 第1部長 等 親김정철派에 依해 축출당한 것 같다는 分析이 나온 背景이었다.

    “後宮과 外戚의 暗鬪”

    그러나 周知하다시피 張成澤은 2006年 1月 勤勞團體 및 水道建設部 第1副部長으로 갑작스레 再起에 成功한다. 그의 勢力擴大를 憂慮해 失脚시킨 金 委員長이, 이番에는 리제강으로 權力이 集中되는 것을 警戒해 그를 다시 불러들인 것 같다는 評價가 支配的이다. 妙하게도 張成澤의 復歸 事實 公開는 앞서 說明한 김정일의 中國 訪問과 겹치는 時期였다. 이 때의 中國 訪問은 國精院 對北파트가 靑瓦臺에 “可能性이 없다”고 事前 報告했다가 ‘亡身’을 샀을 만큼 뜻밖의 電擊 訪問이었다.

    한便 最近 김정남의 平壤 復歸와 關聯해, 對北 消息通들 사이에서는 김옥의 請에 따른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鄭澈이나 정운이 後繼者가 될 境遇 自身의 地位를 인정받기 어렵다고 判斷한 김옥이 김정남을 불러들여 牽制構圖를 形成하려 한다는 것. 이를 위해 金 委員長에게 그의 復歸를 懇請했고, 金 委員長이 이를 受諾해 修交國과의 對外貿易 및 資金運用을 擔當하는 39號室 業務를 맡겼다는 것이다. 勿論 이는 아직까지는 權力構圖로 짜맞춘 ‘推測’에 가깝다.

    그러나 平壤 內部에 後繼構圖를 둘러싼 勢力葛藤이 存在한다는 事實 自體는 情報當局者들도 否認하지 못한다. 2004年 12月 ‘聯合뉴스’는 政府 關係者의 말을 引用해 “김정남이 오스트리아를 訪問하던 中 暗殺 危機에 處했다가 오스트리아 內務部 反테러國의 도움으로 謀免했다”고 報道하며 “정철과 정운의 周邊勢力이 後繼者 競爭相對인 그를 除去하려 했다”고 分析한 바 있다.

    張成澤과 김정남, 여기에 김옥까지 하나로 連結되는 그룹은 中國과의 오랜 親分과 改革·開放 性向이라는 無視하지 못할 共通點이 있다. 張成澤과 리제강의 對立構圖나 리제강이 김정철 後見그룹의 리더라는 情報當局의 分析을 勘案하면, 高永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게임이 되지 않던’ 兩側의 勢力 差異가 2004年 그의 死亡 以後 漸次 減少해 2006年 1月을 起點으로 팽팽한 ‘接戰 局面’으로 접어들었다는 解釋이 可能해진다. 다음은 한 情報當局者의 말이다.

    可能한 準備

    “北韓의 後繼構圖를 豫測하는 데는 여러 가지 尺度가 있겠지만, 王朝時代 世子冊封을 둘러싼 後宮과 外戚들 사이의 暗鬪를 代入하는 게 가장 正確하다고 본다. 金 委員長으로서도 早期에 後繼者를 具體化하기보다는, 可及的 아들들이 競爭하게 함으로써 能力을 키우도록 誘導하고 自身의 權力이 早期에 흔들리는 것을 막는 게 더 낫다고 判斷했을 수 있다.

    누가 뭐래도 김정철과 鄭運은 아직 20代 中盤에 不過하다. 그보다 열 살 以上 많은 老鍊한 김정남이 훨씬 유리할 것임은 不問可知다. 特히 儒敎的 傳統이 남아 있는 北韓에서 長男이라는 事實은 無視할 수 없는 메리트다. 김정남의 後繼構圖 排除를 斷定할 수 없는 理由다.”

    最近 數年間 北韓은 人民級 掌令級(將星級) 人事를 통해 꾸준히 主要 指揮官들의 年齡과 階級을 낮추고 있다. 60~70臺가 主流를 이루던 年齡이 大幅 낮아져 甚至於 40代 指揮官도 생겨났다는 것. 次數, 大將, 上場 等을 濫發하던 ‘階級章 인플레이션’도 많이 줄어 全般的으로 韓國軍과 恰似한 階級構造를 갖춰 나가고 있다. 이에 對해 한 情報當局者는 “젊은 後繼者와의 年齡差를 最少化해 ‘코드’를 맞추고 反感을 줄이기 爲한 準備作業으로 볼 수 있다. 後繼者 擁立이 멀지 않다는 徵候 가운데 하나”라며 다음과 같이 說明했다.

    “世間에는 김정일 委員長이 김일성 主席의 아들이라는 理由 하나만으로 權力을 世襲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事實과 다르다. 金 委員長은 1970~80年代에 三寸 金榮珠, 異腹同生 金平一 및 그 後見勢力과 熾烈한 權力다툼을 벌이며 아버지로부터 自身의 能力을 認定받아 後繼者 地位를 ‘爭取’했다. 그런 그가 어느 아들을 일찌감치 定해서 고스란히 權力을 물려줄 理 없지 않을까.

    北韓의 後繼構圖가 早晩間 可視化된다면, 特히 開放派로 알려진 김정남이 實權者가 된다면 最小限 南北關係는 只今보다 나아질 것이다. (우리 處地에서) 可能한 準備가 무엇인지 살펴볼 必要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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