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劇團 미추(美醜) 代表 손진책|新東亞

劇團 미추(美醜) 代表 손진책

“나는 參拜客 없는 寺院의 鐘지기, 藝術이 世上 바꾼다는 믿음 있기에…”

  • 황호택 동아일보 首席 論說委員 hthwang@donga.com

    入力 2007-05-04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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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觀客이 劇場 다시 찾는 건 ‘人間의 呼吸’ 때문
    • 韓國 映畫 ‘붐業’ 周易은 ‘眞짜 演技’ 하는 演劇俳優들
    • 마당놀이 ‘鼈主簿傳’의 文魚는 全斗煥 象徵
    • 演劇은 唯一한 ‘複製 不可能 商品’…가난은 淑明
    • 내 演劇의 基本精神은 ‘人間사랑’
    • 資格 없는 사람이 자리에 戀戀…民主化 否定하는 行爲
    • 藝術 大衆化가 下向平準化, 雨中化(禹衆化) 의미하진 않는다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美醜山房으로 가는 길은 서울 구파발에서 京畿道 松楸를 지나 景致 좋은 山들의 허리를 가로지른다. 戀人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제格이다. 松楸 長興 遊園地가 가까워서인지 山紫水麗(山紫水麗)韓 골짜기마다 러브호텔 團地가 들어섰다. 구파발 電鐵驛에서 車를 태워준 俳優 김동영氏는 “極端에 빨리 가서 練習하고 싶은데, 아베크족 差가 앞길을 막고 時速 30km로 遊覽하면서 달리면 片道 1車線 道路라 追越할 수도 없고 갑갑하다”고 말했다.

    京畿道 楊州市 백석읍 홍죽리 美醜山房 앞에는 樹齡 500年이 넘은 느티나무가 서 있다. 劇團 미추 손진책(孫桭策 · 60) 代表가 1992年 이곳을 찾아왔을 때 느티나무를 보고 欲心이 생겨 터를 잡았다. 美醜山房 사람들은 每해 告祀를 지내며 막걸리 열다섯 말을 느티나무에 붓는다. 500年의 渴症을 채우자면 막걸리를 많이 부어야 하는 模樣이다. 느티나무 앞에는 하회別神굿탈놀이 履修者이자 장승쟁이 김종흥氏가 깎은 장승들이 堵列해 손을 맞는다.

    美醜山房 建物 1層은 劇場, 2層은 事務室과 俳優들의 寄宿舍 및 食堂으로 쓰고 3層은 손 代表와 俳優 김성녀(金星女·57) 夫婦의 살림집이다. 野外劇場과 演劇學校 建物이 倉庫처럼 딸려 있다. 團員들이 상추, 가지, 오이, 고추를 심는 菜麻밭은 아직 철이 일러 비어 있었다. 劇團 미추의 團員들은 共同體 生活을 한다. 그래서 演技와 舞踊의 앙상블이 잘된다고 손 代表는 자랑했다.

    2層 손 代表 執務室에는 한쪽 壁面을 演劇, 演戱(演戱), 歷史 書籍이 가득 채우고 있다. 다른 쪽 壁面에는 劇團 미추의 公演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冊과 演劇 臺本 사이마다 작은 佛像이 數十個 놓여 있다.

    손 代表는 美國 로스앤젤레스에서 ‘壁속의 妖精’ 公演을 마치고 뉴욕에 들렀다가 이날 새벽 4時頃 仁川空港에 到着했다. 손 代表가 따라주는 綠茶를 마시며 인터뷰를 始作했다.



    “演劇은 가장 오래갈 藝術”

    ▼ 僑胞 觀客의 反應이 어땠습니까.

    “생각보다 좋았어요. 두 次例 公演에서 1200席이 거의 賣盡됐습니다. 僑胞 社會에서 演劇 公演치곤 보기 드물게 觀客이 다 찼다고 말하더군요.”

    ▼ 黑字 公演이었습니까.

    “俳優와 演出, 스태프까지 16名이 갔습니다. 티켓 販賣만으로 費用을 充當하기는 어려워요. 티켓 한 張當 50~70달러 받는데, 그中에는 招待券도 있고…. LA KBS에서 放送協贊 支援을 받고 篤志家 몇이 도와줬습니다. 後援者 中 한 군데에서 펑크가 나 招請者가 赤字를 냈을 겁니다. 그렇지만 僑胞들의 稱讚이 藉藉해 보람을 느낀다고 메일이 왔더군요.”

    ‘壁속의 妖精’은 김성녀氏가 1人 30役을 하는 모노드라마. 김성녀의 歌唱(歌唱)과 演技의 眞髓를 드러내는 演劇이다. 그女는 國內에서 120回 公演을 하며 東亞 演劇賞 等 主要한 賞을 휩쓸었다. 戰爭과 이데올로기가 몰고 온 苦痛과 家族愛를 그린 이 모노드라마는 演劇을 보는 재미와 演劇을 통한 삶의 再認識을 同時에 충족시킨다. 筆者는 지난해 7月 예술의전당 自由小劇場의 公演을 담은 DVD로 ‘壁속의 妖精’을 보면서 몇 番씩 배를 움켜쥐고 웃었고, 더러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美醜山房 2層 손진책 代表의 執務室.

    ▼ 뉴욕에서는 어떤 公演을 봤습니까.

    “하루에 한두 篇씩 7篇을 봤습니다. 世界 演劇의 메카인 런던과 뉴욕에 가면 새로운 흐름을 느낄 수 있어 좋아요. 이番에는 좀 쓸쓸했습니다. 뮤지컬만 蕃盛하고 正極(正劇) 劇場은 客席이 비기 始作하더군요. 너무 엔터테인먼트로만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長期 公演하는 뮤지컬로는 어떤 게 있습니까.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幽靈’ ‘맘마미아’ 같은 것들이죠. ‘캣츠’는 요즘 幕 내렸습니다. 10年씩 하는 뮤지컬도 있어요. 演劇은 그렇게 長期 公演하는 게 없죠.”

    ▼ 大衆이 몰리는 映畫, 드라마, 뮤지컬의 틈바구니에서 演劇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까.

    “演劇은 가장 오래된 藝術이면서 가장 오래갈 藝術이기도 합니다. 演劇은 어떻든 複寫가 안 되죠. 現場에서 살아 있는 俳優와 살아 있는 觀客이 만나야 演劇이 成立됩니다. 요즘 필름 카메라가 다시 人氣를 모은다고 하더군요. 結局 人間의 呼吸이 그리운 觀客이 다시 劇場으로 찾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엔터테인먼트의 時代라서 演劇이 외면당하는 거죠. ‘演劇의 危機’ ‘仕樣藝術’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悲觀的으로 보지만은 않습니다.”

    ▼ 演劇은 空間과 時間의 制約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볼 수 없죠. 그래서 收益構造가 脆弱하고, 어떻게 보면 貧困의 惡循環이 發生하는 듯합니다. 演劇을 DVD로 製作해 販賣하면 어떨까요.

    “日本에 DVD로 販賣하는 劇團이 있습니다. 演劇은 俳優와 觀客이 呼吸을 서로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런 쿨 媒體를 통해 보면 感動이 떨어지죠. DVD로는 演劇의 情報는 읽을 수 있어도 살아 있는 感動은 느끼기 어려워요. 마당놀이를 錄畫해 放映하는 것을 보면 一般 觀客은 재미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보기 憫惘합니다. 요즘 오페라를 비디오로 찍어 劇場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패턴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演劇은 亦是 現場에서 俳優들의 숨소리를 느끼면서 봐야 제 맛이 납니다.”

    演劇은 舞臺藝術의 인프라

    ▼ 디지털과 映像의 時代에 冊이나 新聞 같은 活字媒體度 演劇과 비슷한 苦悶을 안고 있죠. 基礎가 튼튼해야 다른 學問과 藝術 分野가 發展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演劇이 舞臺藝術의 인프라 같은 役割을 합니다. 演技藝術의 母胎(母胎)입니다. 텔레비전 放送이 갑작스럽게 생겼을 때 演劇俳優들이 뒷받침을 했기 때문에 드라마가 可能했죠. 오늘날 韓國映畫가 이렇게 붐업(boom up)됐지만, 이것도 演劇俳優들이 延期를 强力하게 맡아줌으로써 可能했습니다. 人文學的 바탕이 튼튼해야 學問이 發展할 수 있듯, 그 나라 文化의 尺度는 演劇 한 篇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政策 支援에서 演劇이 恝視를 받고 있습니다.”

    ▼ 映畫나 드라마에서도 演劇俳優 出身의 演技가 훨씬 더 탄탄하다는 印象을 받을 때가 많아요. 基礎가 잘 닦여서 그런지….

    “映畫하는 사람들한테 失禮가 될지 모르지만 한때는 충무로 監督들이 演技를 잘 몰랐어요. 거짓말 演技와 眞짜 演技를 區別 못했다고 할까요. 이제야 眞짜 演技와 假짜 延期를 區別하면서 作品다운 作品이 나오기 始作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권택 監督이 그렇지요. 眞짜 演技를 할 수 있는 俳優를 演劇 쪽에서 찾게 된 거죠. 演劇俳優들이 韓國 映畫의 國際的 크레디트를 높여줬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죠.”

    演劇俳優 出身 映畫俳優는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문성근 정진영 金甲洙 유오성 김석훈 박해일 金首露 이문식 이원종 임원희 정재영 강신일 성지루 유해진 정은표 박노식 李在鎔…. 女俳優로는 抽象美 이혜영 오정해 오지혜가 있다. 演劇俳優 出身 탤런트는 박인환 김상중 권해효 최종원 안석환 정홍채 최철호 박광정을 들 수 있다.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 1996年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 洞네가 깊은 山골이었다면서요. 非鋪裝道路로 軍用트럭만 오갔다고 하던데요. 서울 동숭동 大學路를 버리고 交通 不便한 곳으로 옮겨온 理由가 뭡니까.

    “劇團 食口도 많아지고 小品, 衣裳 같은 짐이 늘어나면서 大學路 事務室이 너무 複雜해졌어요. 북적북적하는 델 떠나서 외진 곳에서 演劇만 할 수 있는 센터를 만들었으면 하는 꿈이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양수리 쪽으로 가려고 땅을 契約했어요. 그런데 ‘時間의 그림자’라는 演劇을 하다가 크게 밑져서 約束한 날짜에 中途金을 못 줬어요. 契約 破棄를 當했지요. 全體 敷地는 1000坪假量 됩니다. 1992年에 坪當 31萬원을 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2倍 以上 비싸게 샀더군요.”

    劇團 미추는 오는 8月27日로 創團 20周年을 맞는다. ‘美醜’라는 極端의 이름은 檮杌 김용옥이 지어주었다. ‘美’는 羊(陽) 字 밑에 大(大) 字가 붙어 있다. 크고 아름다운 孃을 놓고 祭祀를 지낸 데서 ‘美’가 由來했다. 演劇의 起源도 提議(祭儀)이다. ‘醜’는 酒(株)를 놓고 무당(鬼)李 춤을 추는 形象이다. 老子(老子)는 큰 아름다움에는 追加 調和를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美醜山房 2層 事務室 入口에는 도올이 쓴 ‘美醜’ 懸板이 걸려 있다.

    筆者가 “도올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안티도 많은 것 같다”고 말하자 손 代表는 “그런데 檮杌만큼 熱心히 사는 사람도 드물어요. 暫時도 虛費 않고 뭔가를 하지요”라고 했다.

    4强 進出에 가려진 월드컵 開幕式

    孫氏는 2002年 월드컵 開幕式과 文化行事 總演出을 맡았다. 上巖洞 월드컵競技場에서 꼬박 1年을 살았다. ‘東方으로부터’(From the East)라는 主題로 歡迎-疏通-어울림-나눔 4個 마당으로 進行된 開幕式은 ‘韓國 傳統藝術과 尖端 通信의 調和’(로이터通信)라는 評價를 받았다. 그는 88올림픽 때도 前夜祭 演出을 했다.

    그는 월드컵 行事를 치르고 나서 꽁지머리(ponytail)를 只今의 斷髮 스포츠型 머리로 바꿨다. 포니테일 머리를 하는 사람 中에는 藝術人이 많다. 個中에는 原形脫毛를 감추기 위해 포니테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孫氏도 原形脫毛다.

    “월드컵 開幕式 끝내고 그냥 마음의 整理를 하자는 意味로 잘랐습니다. 새로운 氣分으로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월드컵 開幕式을 銃演出할 때는 나름대로 國家 大使를 맡아서 한다는 責任感이 있었죠. 그間 마당놀이라는 公演을 해왔으니까 월드컵 開幕式도 一種의 마당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多幸히 製作團 팀들이 좋았어요. 모두들 正말 熱情을 갖고 했기 때문에 成功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韓國 蹴球가 16强에 오르기 쉽지 않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開幕式이라도 잘하자는 게 우리 생각이었죠. 그런데 韓國팀이 4强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월드컵 開幕式은 그 熱氣에 묻혀서 잊힌 것 같아요.”

    ▼ 2008年 베이징올림픽 開幕式도 搖亂하겠죠.

    “저도 期待가 큽니다. 世紀의 쇼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 월드컵 때 記事를 읽어보니까 굿, 탈춤, 판소리, 民謠에 하이테크를 椄木했다는 評이 있던데요.

    “世界的인 行事이니만큼 韓國이 IT 文化强國이라는 걸 주지시켜달라는 注文이 있었어요. IT와 關聯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냈죠. 豫算 때문에 아이디어를 欲心껏 實現하기 어려웠죠. 모니터를 통해 제대로 보여주려면 放送局 하나가 있어야 하는데 出演者들이 캠코더 스위치를 作動하면서 했습니다. 조금 부끄러운 일이지요.”

    ▼ 藝術의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듯한 印象을 주더군요.

    “比較的 그랬던 便이죠. 제가 政府 行事도 여러 番 맡아 했습니다. 이벤트 行事도 했고. 마당놀이, 唱劇, 音樂劇, 舞踊, 何如튼 實驗的인 장르를 많이 했죠. 演劇을 하게 된 것도 演劇이 綜合藝術이라서 演劇을 하면 音樂, 文學, 美術, 舞踊을 가깝게 할 수 있겠구나 하는 單純한 생각에서였죠.”

    그는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演戱 장르를 開拓했다. 판소리, 舞踊, 唱劇이 어우러진 演戱이다. 1981年 MBC 創社 20周年 作品으로 企劃됐다. 마당놀이가 初期에 힘을 받은 데는 當時 이진희 社長의 支援이 컸다. 李 社長은 廳舍를 둘러보다가 偶然히 體育館에 들어와 公演을 끝까지 觀覽했다. 感動이 컸는지 ‘韓國的 코미디의 銓衡’ 마당놀이를 1982年 1月1日 온 家族이 모여 텔레비전을 視聽하는 午前 10時에 放映하라고 指示했다. 마당놀이 ‘許生傳’은 높은 視聽率을 記錄했고 프로그램으로서도 큰 成功을 거두어 只今까지 脈을 이어온다. 올 6月에는 中國에 輸出된다.

    中國 進出하는 마당劇 ‘三國志’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劇團 미추 團員들과 함께.

    ▼ 이진희 社長은 1980年代 初盤 문화방송 社長과 文化公報部 長官을 지내며 獨裁政權의 거친 입으로 惡名이 높았죠. 그분이 마당놀이 發展에 寄與했다는 것은 興味롭습니다.

    “마당놀이는 1回用으로 企劃한 것인데 워낙 反應이 좋아 繼續하게 됐죠. 李 社長은 대단히 파워풀하고 惡名이 높았어요. 그런데 反應이 좋아 두 番, 세 番 하다보니까 그게 傳統처럼 돼서 27年을 하게 된 거죠. 當時에는 檢閱이 꽤 甚했기 때문에 行間에 많은 것을 집어넣었어요. 둘째 作品이 ‘鼈主簿傳’인데,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內容이 放送될 수 있을까 疑訝해할 程度였죠. 民族文學作家會議 所屬 안종관氏 原作에 김지일氏가 劇本을 썼죠. 文魚와 싸움을 하는 場面이 나오는데 文魚는 전두환氏를 象徵했거든요.”

    그 殺伐한 體制에서 이진희 社長과 檢閱의 눈을 避한 것이 神奇하다.

    “當時 TV 製作局 표재순 副局長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했으면 마당놀이가 없어졌을 거예요. 저한테 演出을 맡기고 試演會 때 한 番 보더니 ‘이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하지 않고 ‘孫兄, 이것은 이렇게 하면 어때’ 하고 勸誘하는 式으로 했죠. 그 다음에 放映할 때는 臺詞를 좀 자르기도 하고 編輯해 檢閱을 通過했지요.”

    마당놀이는 27年째 꼭두쇠는 김종엽, 男子俳優는 윤문식, 女子俳優는 김성녀로 내려오고 있다. 김성녀는 뮤지컬 ‘에비타’ 初演 때문에 첫回 ‘許生傳’에만 빠지고 2回 때부터 繼續 主演을 맡는다.

    ▼ 꼭두쇠는 요즘 用語로 하면 MC 같은 겁니까.

    “옛날 流浪 演藝集團 男사당牌의 大將을 꼭두쇠라고 했거든요. 團員들이 演戱를 하는 동안 꼭두쇠가 團體의 代表로 觀客하고 얘기하는 걸 맡은 거죠.”

    2004年 末 배삼식 劇本의 마당놀이 ‘三國志’는 8萬名이 넘는 有料 觀客이 들었다. 마당과 客席을 三國으로 分割했고 우리나라 地方(全羅·忠淸·慶尙道)을 中國의 三國(危·蜀·午)에 代入해 구성진 사투리를 썼다. 앙코르 公演까지 할 程度로 人氣를 끌었다.

    ▼ 마당놀이 ‘三國志’가 오는 6月 中國 난징(南京)에서 공연된다죠. 마당놀이의 첫 海外輸出이 되겠군요.

    “월드컵競技場 앞 天幕劇場에서 ‘三國志’ 公演할 때 中國의 톈親信(田沁)이라는 有名한 演出者가 봤어요. 形式이 재미있고 劇本도 흥미롭다고 하더군요. 톈친신이 장쑤(江蘇)省 演藝集團에서 ‘桃花扇(桃花扇)’이라는 演劇을 演出할 때 제가 藝術監督으로 參加했어요. 장쑤省 演藝集團의 演劇團, 舞踊團, 歌舞劇團, 오페라단, 管絃樂團을 合쳐 有限會社를 만들었어요. 거기서 처음으로 製作한 것이 ‘桃花扇’인데, 두 番째 作品으로 나한테 ‘三國志’를 한番 演出하는 것이 어떠냐고 提議했습니다.”

    劇本, 演出, 作曲, 按舞, 舞臺美術, 照明은 韓國에서 맡고 俳優와 나머지 製作은 中國이 하는 方式이다. 난징은 過去 오(吳)나라의 中心이니까 吳의 視角에서 解釋한 三國志를 하고, 위(魏)나라 地方에 가서는 위 中心의 三國志, 燭(蜀)나라 地方에 가서는 燭 中心의 三國志를 한다. 中國 全域에서 2000回 公演할 豫定이다.

    “演劇 ‘죽음과 少女’는 우리 얘기”

    韓國 文化가 옛 蘇聯 땅에 처음 선보인 것은 1990年 9月 동아일보가 만든 唱劇 ‘아리랑’을 통해서였다. ‘아리랑’ 巡廻公演은 極東地方의 高麗人들이 中央아시아로 强制 이주돼 겪은 苦難의 歷史에 關心을 喚起시키는 契機가 됐다. 異國땅에 흩어져 살던 蘇聯 同胞들이 韓民族임을 確認한 一帶 事件이었다.

    “當時 동아일보 김병관 會長이 唱劇을 하자기에 저는 神(新)唱劇을 하자고 提案했지요. 그래서 ‘林꺽정’ ‘尹奉吉’ ‘洪範圖’ ‘아리랑’을 했지요. 蘇聯 旅行이 可能해진 1989年 모스크바에 갔다가 스타니슬라프스키 劇場에서 高麗人이 만든 ‘트란지트(移住) 37’이라는 作品을 보았습니다. 1937年 高麗人 强制 移住를 다룬 것이었죠. 高麗人 俳優들이 서툰 韓國말로 延期했지만 대단히 感動的이었습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김지일氏가 ‘아리랑’ 臺本을 썼습니다.

    모스크바, 타슈켄트, 알마타를 비롯해 高麗人이 사는 곳이라면 작은 都市라도 찾아가 公演했죠. 韓國語를 잘 모르는 同胞들도 內容을 쉽게 理解했습니다. 直接 經驗한 自身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죠. 祖國에서 公演團이 왔다는 事實 自體만으로도 感激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리랑’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잠을 못 잤다는 僑胞들도 있었어요.”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筆者와 함께 點心을 먹는 손진책 代表.

    ▼ 칠레 出身 作家 아리엘 도르프만의 作品을 세 篇이나 演出했더군요. ‘죽음과 少女’ ‘The Other Side’ ‘Readers’. 칠레와 우리는 長期間 軍事獨裁에 시달린 共通點이 있는데요.

    “런던에서 1991年 ‘죽음과 少女’가 공연됐을 때 反響이 컸어요. 그때 우리도 軍部獨裁가 막 끝나고 民主化로 접어드는 무렵이었잖아요. 저는 飜譯劇을 잘 안하고 主로 創作劇을 했죠. 이 作品은 飜譯劇이라기보다는 ‘우리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作家와 連絡해 正式으로 로열티를 주고 作品을 公演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우리나라에서 正式으로 原作者의 承認을 받아 로열티 주고 舞臺에 올린 첫 番째 作品입니다.

    公演 評은 좋았는데 觀客은 意外로 들지 않았어요. 아마 韓國 觀客은 軍事獨裁 이야기가 지겨웠던 것 같아요. 只今 했으면 달라졌을지 모르죠. 1994年 프랑스에서 로만 폴란스키가 映畫化했죠. 再演할 때는 아리엘 도르프만이 와서 봤습니다. ‘죽음과 少女’를 全世界에서 公演 안 한 나라가 없습니다. 도르프만은 ‘韓國 고연은 아주 印象깊은 公演이었다’고 하더군요.

    ‘The Other Side’는 2004年 4月 日本 신국립극장 招請으로 日本에서 演出한 作品입니다. 구리야마 다미야와 監督이 도르프만에게 新作을 依賴해 받은 作品을 제게 맡긴 거죠. 그게 두 番째 因緣이죠. 世上을 네 便과 내 便으로 區別하고 相對方을 認定 안 하려는 現實에 對한 諷刺이기도 합니다.”

    在人(才人)의 딸

    ▼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氏가 ‘藝術은 高等詐欺’라고 말했죠. 그 말에 同意합니까.

    “재미있는 表現이죠. 그러나 藝術은 犯罪的 意味의 詐欺와는 다르죠. 藝術은 發想을 轉換해주는 機能도 하고 一般人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의 虛點을 치고 들어가기도 하죠. 그런 意味로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創作에는 起承轉結과 論理에 바탕을 두는 것도 있지만, 逆發想으로 突然變異 같은 創作이 나올 수 있죠. 그런 것이 妙한 反響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요. 그런 것을 통해 내가 詐欺당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죠.”

    손 代表는 正裝을 입지 않는다. 公式的인 자리에 나갈 때는 차이나 칼라를 입는다. 正裝 兼 作業服으로 便하게 입기 위해서다.

    “우리는 어떤 데 매여 있지 않으니까요. 經濟的으로 뭘 못 누리는 代身에 精神的인 自由를 누리는 것이죠.”

    ▼ 演劇에서 가난은 宿命 같은 것입니까. 映畫, 音樂, 그림 같은 藝術은 돈도 따르는 境遇가 많은데요.

    “大學 다닐 때 보면 演劇과 學生들은 大部分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거나 가난한 집안 出身이었어요. 매스미디어 時代에 唯一하게 複製가 안 되는 것이 演劇이죠. 經濟的인 自生力이 있을 수가 없지요. 저는 演劇이 가난하다는 얘기를 싫어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宿命的으로 가난과 함께 태어난 것 같아요.”

    夫人 김성녀氏는 중앙대 國樂敎育大學院長 兼 國樂大學長이다. 金氏는 在人(才人)의 피가 흐르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박옥진氏는 國劇(國劇)의 프리마돈나였다. 國劇은 一種의 唱劇으로 女性들만 舞臺에 나와 男子 驛까지 맡는다. 國劇 배우는 演技도 좋아야 하지만 판소리와 歌唱 實力도 뛰어나야 했다. 朴氏는 심청이, 춘향이 같은 女性 主人公 役을 主로 했다.

    國劇은 日本의 다카라즈카(寶塚)라는 演劇을 본뜬 것이다. 다카라즈카는 女子들만 하는 演劇으로 100年 넘은 歷史를 갖고 있다. 國劇은 1950, 60年代에 旋風的인 人氣를 끌었으나 只今은 消滅했다. 아버지 김향氏는 國劇의 劇本을 쓰고 演出을 했다. 어머니는 열여섯 살 때 金氏를 낳았다. 金氏는 扮裝室 衣裳 바구니 속에서 크다시피 했다. 걸음마를 始作하고 다섯 살 무렵부터 兒役俳優로 舞臺에 섰다. 동생 성일(按舞家), 性愛(國樂人), 성아(國樂人)氏도 藝術人으로 活動한다. 손 代表는 劇團 ‘민예’에서 演出을 할 때 ‘한네의 昇天’이라는 作品의 女主人公을 오디션 하다가 아내를 만났다.

    “누가 김성녀에 關해 말하길래 ‘그 程度라면 보지 않고 決定할 테니까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박옥진氏 딸이라면 그 程度 役은 充分히 消化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金氏는 스물일곱 살 때 演出家 孫氏를 처음 만났다. 그는 “隣接 藝術을 잘 알아야 좋은 俳優가 된다”며 劇場, 博物館, 美術館, 音樂感想室, 오페라, 舞踊 等 장르를 區分하지 않고 金氏를 끌고 다니며 俳優修業을 시켰다.

    ‘한네의 昇天’이 끝나고 演出者와 배우는 사랑하는 關係로 發展했다. 딸이 태어난 날로부터 結婚式 날짜를 歷山(逆算)해보면 ‘速度違反’이다. 손 代表의 現在 모습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좀체 구경할 수 없는 團員들은 그가 速度違反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한다.

    ‘떡잎부터 演劇인’

    ▼ 夫人이 學校와 俳優 일로 바빠 內助를 받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저는 職業 없이 演劇만 했기 때문에 집사람이 버는 돈으로 살림을 꾸렸어요. 내 平生 固定給을 받은 것이 結婚 直後 國軍放送 PD로 1年 일한 것이 全部예요. 집사람은 국립창극단, 國立劇團에서 固定給을 받았죠. 固定 放送프로도 있었고, 音樂會와 텔레비전 드라마를 많이 하니까 살림은 김성녀 쪽에서 다 책임졌습니다. 저는 演劇만 했어요.”

    두 사람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들이 夫婦라기보다 作品 完成을 위해 精神的으로 依支하는 同志에 가깝다고 말한다. 俳優 아내가 自己 管理에 바빠 男便을 仔詳하게 챙겨주지 못할 텐데도 아내의 좋은 點만 이야기했다.

    손 代表의 故鄕은 浮石寺가 가까운 慶北 榮州. 故鄕에서 中學校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왔다. 그런데도 慶尙道 抑揚이 全혀 남아 있지 않다.

    “俳優들한테 演劇 臺詞法을 가르치면서 제 抑揚도 標準말로 바뀐 것 같아요. 演劇은 標準말로 하지만 親舊들을 만나면 영주 말로 합니다. 영주가 慶尙道 中에서도 北쪽이라 南쪽의 짙은 慶尙道 抑揚하고는 조금 다르거든요. 영주는 江原道 橫城과 忠淸道 丹陽 어름입니다.”

    ▼ 榮州邑 場터에 들어온 樂劇을 자주 봤다면서요. 어릴 때 그런 經驗이 人生 行路에 影響을 끼쳤나요.

    “榮州邑에 서커스가 들어오면 엄기태라는 先輩 집이 크고 마당이 넓어서 그 집에 本部가 차려졌어요. 서커스는 1部 曲藝, 2部 演劇, 3部 버라이어티 쇼로 進行됐습니다. 2部 演劇은 每日 밤 프로가 바뀌었지요. ‘홍도야 울지 마라’ ‘激情 3萬浬’ 같은 新派劇(新派劇)이었는데 그것 보는 재미에 每日 밤 서커스를 갔어요. 樂劇이나 女性國劇이 들어와도 꼭 봤습니다. 初等學校 때 애들 데리고 演劇도 만들어봤죠.”

    아버지는 농협에 다니고 어머니(황봉한·1921年生)는 子女 敎育熱이 대단해 딸들을 모조리 大學에 보냈다. 頑固한 영주 兩班 洞네에서 女子가 大學에 간 것은 손씨네 딸들이 처음이었다. 큰누나 靜肅(西洋畫家)氏는 이화여대에 進學했고 둘째딸 화숙은 경희대에 다녔다. 셋째딸이 民主黨 議員인 손봉숙氏이고 그의 男便은 안청시 서울大 政治學과 敎授. 慰勞 妹兄 셋이 全部 敎授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른들한테 逼迫을 當했어요. 딸들 媤집 안 보내고 大學 보낸다고. 어머니가 初等學校만 다니신 게 恨이 돼 못 먹어도 敎育은 시켜야 된다는 것이 確固한 哲學이셨죠.”

    그 時節에 시골 女性이 初等學校를 마쳤으면 高學歷이다.

    끼 많고 속情 많은 慶尙道 사내

    ▼ 손 代表가 演劇할 때도 집안에서 反對가 甚했다지요. 어머니만 역성을 들고….

    “어머니는 내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옳다고 생각하고 支援하셨지만 아버지는 失望하셨지요. 맏아들에다가 어릴 때는 工夫를 꽤 잘했거든요. 班에서 1, 2等 다투고 月半島 했어요. 뭐가 될 줄 알았는데 藝術을 좋아하는 큰누나한테 물들어 演劇을 하게 됐죠. 제가 처음엔 音大 가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피아노 치고 다니니까 아버지가 크게 火를 내셨죠. 서라벌예대 演劇映畫科에 들어간 것도 그 後에 아셨죠.”

    團員들이 언젠가 손 代表 집에 招請받아 한창 興에 겨웠을 때 그가 甲子가 일어나 나가더니 作故한 어머니 寫眞을 들고 와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다. “어머니가 혼자 심심하시다”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한 慶尙道 사내지만 속情이 많다.

    그의 演劇과 演戱에는 늘 좋은 音樂이 따라다닌다. 그는 브람스와 쇼팽, 베토벤의 絃樂 4重奏를 좋아한다.

    “큰누나가 ‘鳴動派’였어요. 明洞에 流行도 몇 가지 만들고, 明洞 藝術人들하고 잘 알고 지냈죠. 當時 說破音樂室이라고, 클래식 音樂 하던 곳에 藝術家들이 자주 모였죠. 高等學校 다닐 때 鳴動에서 ‘山불’(차범석 作) ‘無翼鳥’(이어령 作) 같은 演劇을 보며 影響을 받았지요.”

    딸 支援(29)은 禮願豫告와 단국대 演劇映畫科를 나온 後 英國의 매킨토시 컴퍼니 멤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2年 동안 뮤지컬 ‘미스 사이공’ 투어를 했다. 매킨토시 컴퍼니는 ‘캣츠’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을 製作한 世界 最大의 뮤지컬 製作會社. 아들 地形(27)은 藝術 經營에 關心이 있다.

    손 代表네는 離散家族이다. 夫人은 月曜日부터 木曜日까지 중앙대 안성캠퍼스 敎授 아파트에서 살다가 週末에만 온다. 週末에도 公演으로 바쁠 때는 만나지 못한다. 아들은 中國에 가 있고 딸은 英國에서 건너온 뒤로 불광동에 房을 얻었다.

    “父母로서 좀 無責任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냥 너희가 하고 싶은 거 하라는 것이 우리 생각이에요. 우리 夫婦는 일하기 바빠서 事實 애들은 어릴 때 어머니와 장某 두 분이 키워주셨거든요. 어머니 두 분이 애들 敎育을 잘 시켜서 價値觀은 바르게 갖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애들대로 怨望이 있겠지요. 우리 딸은 좀 反旗(反旗)도 들었지요. 無條件的인 愛情을 보여달라고 要求하더군요(웃음). 우리가 稱讚을 잘 안하니까요. 只今 스페인에서 800km를 40日間 걸어가는 裝幀을 하고 있어요. 自己를 새롭게 하는 電氣를 만든다고.”

    ▼ 民衆藝術이라는 分野에 對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基本的으로 내 演劇이 조금 그런 쪽에 있다고 評論家들이 얘기하지요. 저는 演劇의 社會的인 效用性을 생각하는 便이라 그런 作品을 主로 고릅니다. 窮極的으로는 人間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演劇이라고 생각합니다. 人間사랑, 人本主義가 내 演劇의 基本精神이죠. 假令 사람을 獵奇的으로 죽이는 內容이 들어간 作品은 내 心性에 안 맞아요. 제 作品에 나오는 사람들은 따뜻하다고 합니다. 性格이 모질지 못하기 때문이죠. 藝術은 人間을 한番 代身 살아보게 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살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나름대로 判斷하게 하는 機能을 갖죠.”

    國民 신명나게 하는 大統領…

    ▼ 藝術이 世上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적어도 그런 믿음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믿음이라도 있기에 演劇行爲가 可能한 것이죠. 돈 벌거나 有名해지기 위해서 演劇을 하기에는 與件이 너무 劣惡하니까요.”

    ▼ ‘參與政府’ 出帆 後에 民衆藝術 쪽 사람들이 藝術團體長을 獨食한다는 批判이 新聞紙面에 가끔 보이더군요.

    “저는 事實 그前부터 純粹藝術, 民衆藝術 兩쪽과 다 親했어요. 마당劇運動 하면서도 民衆藝術 쪽도 잘 알고 지냈는데, 할 만한 사람이 하는 거야 뭐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던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 戀戀하는 것을 보면 보기 안 좋습니다. 自己네 스스로 只今까지 한 作業에 對해 나름 自負心도 있었을 테고, 저로서는 그런 自負心을 尊敬했죠. 그런데 制度圈 자리에 執着하는 것은 自己네들이 했던 民主化 作業도 否定하는 行爲로 보여 좀 씁쓸합니다.”

    ▼ 손 代表도 자리를 提議받은 적이 있습니까.

    “저도 모르게 이름이 오르내린 적도 있고 또 提議도 받았죠. 그러나 劇團 團員들이 事實 저 하나 믿고 여기 와 있습니다. 團員 數字도 第一 많거든요. 責任 때문에 갈 수 없죠. 事實은 國立劇場을 맡아 正말로 내 뜻을 펼칠 수 있다면 한番 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데 괜히 자리에나 戀戀해서는 우스워질 것 같아 마음을 접었습니다.”

    ▼ 全斗煥 政權 末期에 護憲(護憲) 撤廢를 위한 演劇界 署名運動을 主導했더군요.

    “그때 異常하게 제가 主動者가 돼 逃亡다니고 그랬죠. 文人들 다음에 바로 演劇人들이 署名運動을 했죠. 오늘을 사는 知識人의 良心으로 그냥 沈默하는 것은 卑怯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의 목소리가 얼마만큼 效用性이 있을지 모르지만 一旦 얘기는 해야 된다 싶었죠.”

    ▼ 다가오는 大統領選擧에 對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요즘 演劇 때문에 中國을 자주 왔다 갔다합니다. 中國이 發展하는 모습을 보면 波濤가 밀려오는 것 같은 힘이 있어요. 이건희 三星그룹 會長도 韓國이 中國과 日本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 같은 處地라고 했는데, 우리는 國家的인 動力을 왜 잘 살리지 못할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죠. IMF 經濟危機 때 金半指 모으기를 한 國民인데…. 다음 大統領은 어떻든 國民이 신명나게 하는, 國民의 興을 動力으로 活用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人間 心性이 演劇의 材料

    그는 日刊紙를 4個 購讀한다. 아들이 “아버지 돌아가시면 棺 속에 新聞과 沙果를 넣어주겠다”고 말할 程度다.

    “演劇하는 後輩들이 新聞 안 읽으면 나무라죠. 演劇이 이 社會와 無關할 수 없는 장르입니다. 社會 問題를 모르고 우리가 뭔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演劇하는 後輩들에게 歷史 問題나 社會 現實에 對해 工夫하라고 採根합니다.”

    그는 아침食事 代身 沙果를 깎아 먹는다. 故鄕 榮州에서 좋은 沙果가 많이 난다. 氣候 溫暖化로 榮州에서도 沙果밭이 山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했다.

    ▼ 演劇에서는 人物 解釋이 重要하다지요.

    “人間이 정형화될 수 있는 性質의 것이 아니잖아요. 人間의 心性이야말로 正말로 끝이 없는 無限大의 材料입니다. 演劇이라는 作業 自體가 性格 만들기거든요. 俳優로 하여금 役割의 性格을 잘 構築해내게 하는 것이 演劇 作業입니다. 版에 박힌 人物을 보면 오히려 觀客이 食傷할 수 있죠. 그래서 人物 分析이 演劇에서 時間과 努力을 割愛하는 重要한 作業입니다. 人間의 心性이 無限한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 演劇 中에는 難解한 作品도 많지 않습니까. 이것을 大衆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努力하는 過程에서 藝術家로서의 苦悶도 있을 텐데요.

    “藝術의 大衆化는 相當히 重要하게 생각하지만 大衆化와 雨中化(愚衆化)는 다르다고 봐요. 藝術이 下向平準化 하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大衆이 좋아하는 마당놀이 같은 장르를 만들고 그것을 27年間 持續한 것에 自矜心을 갖고 있죠. 그러나 한便으로는 現代劇에도 關心과 愛情이 많거든요.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大衆藝術을 만드는 水源池(水源池) 노릇을 하게 하죠.”

    筆者는 얼마 前 그가 演出한 ‘熱河日記萬步’(熱河日記漫步)라는 演劇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觀覽하고 그와 처음으로 人事를 나눴다.

    ▼ ‘熱河日記萬步’도 臺中한테는 多少 어렵겠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熱河日記萬步’에서 觀客에게 傳達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거기서도 人間에 對한 사랑이 基本이라고 생각합니다. 作品의 主題를 規定하기 좋아하는데, 그런 것도 좀 西歐的인 演劇 읽기에 익숙해져버린 탓이죠. 西歐 演劇은 어떤 集團精神을 要求하지 않습니까. 各自가 自己의 삶, 經驗, 環境을 통해 그 作品을 反芻해 그中에서 主題를 골라갈 수도 있죠. 그것을 통해서 自己한테 도움이 되는 部分을 攝取해갈 수 있는 겁니다. 基本的인 것은 人間에 對한 사랑이지만 그속에서 딱 한 마디로 ‘이것이 뭐다’라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 作品이 ‘熱河日記萬步’였어요, 作家나 나나 마찬가지로.”

    ▼ 大學의 演劇과 學生들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줍니까.

    “演劇에 들어오는 것 自體가 聖職(聖職)을 選擇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演劇은 ‘參拜客 없는 寺院의 鐘지기’입니다. 聖職은 억지로 시켜선 안 되죠. 演劇은 人間에 對한 얘기이고, 人間에 對해 分析하고, 人間에 對해서 생각하게 하는 藝術이죠.

    演劇科를 나와서 演劇을 꼭 하라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죠. 저는 後輩들이 演劇한다고 찾아오면 ‘꼭 해야 하느냐’ ‘正말로 하지 않고는 못 배길 뭐가 있더냐’ ‘타고난 재주가 있느냐’라고 묻고 이 세 質問에 모두 肯定的인 答辯을 할 수 있을 때 하라고 하죠. 演劇해서 成功하기가 工夫해서 成功하기보다 훨씬 힘들다고 挽留하는 便이지요.”

    ▼ 김성녀氏 外에 演技를 참 잘한다고 생각하는 俳優가 있으면….

    “가끔 그런 質問을 받는데 말하기 좀 곤란해요. 演劇판이 좁은데 서로 다 알고 있죠. 다른 나라에 비해 演劇俳優層이 너무 얕습니다. 캐스팅을 가장 理想的으로 하려고 할 때 俳優 數字가 적다는 생각이 들어요.”

    名監督 테오 앙겔로플로스

    ▼ 隣接 藝術인 映畫는 가끔 보는가요.

    “보기는 좋아하는데 생각보다 많이는 못 보죠. 映畫를 보면서 演劇을 보러 오라고 얘기하는 게 참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映畫는 가까운 곳에서 하루 終日 上映하는데도 가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짧은 日程에 끝나는 演劇을 그때 꼭 본다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찾아오는 觀客이 正말로 고맙죠.”

    ▼ 映畫俳優 中에는 누가 演技를 잘한다고 봅니까.

    “메릴 스트립을 좋아해요. 最近에 나온 ‘惡魔는 프라다를 입는다’도 좋았어요. 다양한 人物을 表現해내요. 男子俳優로는 로버트 드 니로를 좋아합니다. 演技의 깊이가 있죠. 말론 브랜도度 좋고….”

    ▼ 가장 記憶에 남는 映畫 한 篇을 꼽으라면 어떤 映畫를 꼽겠습니까.

    “프레드 진네만 監督에 버트 랭커스터, 몽고메리 클리프트, 데버러 커 等이 出演한 ‘地上에서 永遠으로’가 印象 깊게 남은 映畫예요. 正말로 나를 오랫동안 감동시킨 映畫죠.”

    이 말을 끝내고 그는 어질러진 冊床을 뒤졌다. 그는 “只今 時差 克服이 안 돼 어질어질 해서 사람이름이 생각 안 나요”라고 했다. 한참 뒤진 끝에 테오 앙겔로플로스(Theo Angelopoulos) 監督의 팸플릿을 찾아내 “이 兩班이 요즘 第一 훌륭한 映畫監督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리스 出身의 앙겔로플로스 監督은 1989年 베니스國際映畫祭 黃金獅子賞, 1998年 칸映畫祭 黃金棕櫚賞을 受賞했다.

    ▼ 가장 感銘 깊게 읽은 冊을 든다면.

    “‘레미제라블’입니다. 冊은 젊을 때 많이 읽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詩集오자 할머니께서 ‘얘들아, 이빨 좋을 때 많이 먹어라’는 얘기를 자꾸 하시더래요. 어머니는 그 뜻을 몰랐다고 그래요. 나중에 어머니도 나이 드시니까 그 말뜻을 아셨죠. 저도 우리 後輩들한테 눈 좋을 때 많이 읽으라고 하죠(웃음).”

    ▼ 用돈을 어디에 第一 많이 씁니까.

    “先輩님들을 모셔야 하고 後輩들에게도 사야 하니까 아무래도 그쪽에 돈이 들죠. 제가 젊을 때는 가난해서 얻어 먹었지만 이젠 조금은 사줄 수 있는 處地가 됐으니까, 돈 내기 좋아합니다. 돈이 많지는 않으니 燒酒집에 갑니다.

    이제는 好機로 마실 때는 아니고 즐기면서 마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6, 7年 前에 와인으로 바꿨어요. 칠레産 에스쿠드 로호를 좋아했는데 그게 요즘 韓國에서 第一 많이 팔리는 와인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비싼 와인은 잘 안 마셔요. 1萬원臺 칠레 와인을 主로 삽니다.”

    ▼ 財産을 키운 건 아내 德이라고 말했는데 어느 程度나 모았습니까.

    “演劇 해서 財産을 많이 모을 수는 없죠. 우리가 이 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어머니 德分이에요. 제가 일을 저질러서 損害가 나면 집사람이 熱心히 갚았죠. 김성녀가 奢侈를 안 하거든요. 알뜰해요. 化粧品도 低廉한 피어리스를 씁니다. 新婚 初에는 家計簿에 10원짜리도 다 적은 사람이에요. 어머니와 아내 德에 방배동에 아파트가 하나 있었고 그것을 판 돈이 美醜山房을 짓는 財源이 됐죠.”

    演劇과 인터뷰의 共通點

    ▼ 삶을 돌아보면서 후회스러운 點은 없습니까.

    “後悔가 되는 것은 但只 딱 하나죠. 내 性格이 圓滿하지 않아요. 先入觀을 갖고 사람을 評價하죠. 平生 크게 나쁜 짓 하고 산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게 後悔돼요. 제가 두루 넓게 사귀는 性格이 못 돼서.”

    筆者가 “싫은 사람은 아예 안 만나는 거군요”라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答辯이 짤막짤막해 準備해간 100個假量의 質問이 2時間을 조금 넘겨 동났다. 그는 “제가 元來 ‘短答型’이라 늘 인터뷰가 빨리 끝나죠”라고 했다.

    點心때가 돼 團員들이 食卓을 차렸다. 男女 區分 없이 當番을 定해 炊事를 한다고 했다. ‘食用油와 간醬은 特大(特大)를 산다’ ‘우리는 化學調味料를 안 쓴다’라고 쓴 쪽紙가 炊事場에 붙어 있다. 손 代表가 膳物로 받은 거라며 칠레産 아르볼레다 와인을 내놓았다. 展望 좋은 곳에서 와인까지 곁들인 點心 맛이 특별했다.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 오는 길에 보니까 景致 좋은 골짜기마다 러브호텔 團地가 들어섰더군요.

    “여기 와서 第一 괘씸하게 생각하는 部分입니다. 처음에 올 때는 참 雰圍氣가 좋았어요. 제가 楊州市長한테 이 洞네에 러브호텔 許可 내주면 劇團 미추는 撤收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市場이 許可를 안 내주려고 해도 財産權 侵害가 돼서 裁判을 걸면 안 내줄 道理가 없다는군요.”

    ▼ 그間 스캔들은 없었습니까.

    “없는 便이지요(웃음).”

    ▼ 러브호텔 利用할 일은 없겠네요.

    “만날 러브호텔 옆으로 熱心히 지나다니기는 해요.”

    그와 英國에서 함께 自炊를 하며 演劇 工夫를 했던 演出家 윤호진氏는 그를 일러 “私生活도 演劇 빼면 없는 사람”이라고 保證을 선다.

    正面으로 보이는 높은 山자락에서 新綠(新綠)이 始作되고 있었다. 손 代表는 “新綠은 山자락에서 始作해 꼭대기로 漸次 올라가고, 丹楓은 頂上에서 始作해 밑으로 내려온다”고 툭 던졌다.

    食事를 마친 뒤 筆者가 請을 넣어 3層 살림집을 둘러보았다. 演劇에서 小品으로 썼던 鏡臺, 欌籠, 文匣 等으로 집안을 裝飾하고 있었다. 살림집과 事務室 書齋에 冊이 많았다. 筆者의 인터뷰집도 3卷이나 한쪽에 쌓여 있었다. 이 인터뷰를 성사시킨 劇團 企劃室長 박현숙氏는 代表와 自身이 ‘신동아’ 인터뷰의 팬이라고 말했는데 ‘믿거나 말거나’지만, 演劇과 인터뷰가 人間 探究와 묻고 答하는 疏通이라는 點에서는 비슷한 대목이 있다.

    應接室에는 부처 立像이 자리잡고 있다. 곳곳에 크고 작은 佛像이 100餘 個 놓여 있었다. 千불(千佛)을 모을 생각이었으나 執着하는 것 같아서 蒐集 趣味를 놓아버리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膳物로 하나씩 주고 있다고 했다. 그는 筆者에게도 하나 골라보라고 勸해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한 中國製 蜜蠟 佛像을 집었다. 부처님의 大慈大悲(大慈大悲)를 느끼기에는 작은 佛像이었으나 가까운 곳에 놓고 바라다보면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宗敎에 對해 “佛敎냐고 물으면 그렇게 答한다”고 말했다.

    산이 파도치는 浮石寺 安養루

    “우리 어머니가 불자셨고 저도 스님들과 敎友가 많습니다. 절에 가기도 좋아하죠. 그렇지만 저는 基督敎, 圓佛敎 다 認定합니다.”

    다른 佛子(佛子)들처럼 補身湯을 먹지 않는다. 佛子는 개를 사람과 한솥밥을 먹는 食口라 여겨 먹지 않는다고 한다.

    ▼ 山과 절에 熱心히 다닌다면서요. 절집 中에서 嘉藍의 配置나 造景 藝術性에서 推薦할 만한 곳은 어디인가요.

    “名刹이야 많지요. 저는 故鄕이 領主이기도 하지만 浮石寺를 第一 좋아하는 便이에요. 浮石寺 安養壘에서 내려다보는 山의 波濤가 17, 18굽입니다. 그런 절이 거기밖에 없거든요. 繼續 山이 끝없이 보이죠. 安養壘에 서서 내려다보기를 좋아합니다. 無量壽殿을 비롯해 國寶度 많죠. 거기에 여러 가지 傳說도 서려 있어요. 初等學校 同窓인 이두식(홍익대 美大 學長) 敎授와 함께 每年 가을에 浮石寺에서 華嚴祝祭를 펼칩니다. 初等學校 때 逍風 가던 節이죠. 제가 故鄕에 對한 膳物로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始作한 것입니다.”

    ▼ 浮石寺 外에 몇 곳 더 推薦한다면.

    “좋은 절이 하도 많아서…. 順川 松廣寺度 部處 때문에 아주 좋아하죠. 거기 石佛이 많습니다. 全南 和順의 천불천탑(千佛千塔) 雲住寺度 좋습니다. 彌勒思想을 가진 民衆이 만든 와불(臥佛)李 좋습니다. 그야말로 民衆이 만든 部處지요. 百潭寺度 좋아하는데 전두환氏가 가서 조금 그렇긴 한데…. 百潭寺는 溪谷이 特히 좋아요.”

    應接室에 통琉璃를 달아 周圍 景觀이 한눈에 들어왔다. 應接室에서 沙溪(四季)의 變化를 읽는다고 했다. 美醜山房을 떠나 世俗으로 나서려니 하늘이 흐리고 비가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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