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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邦人들의 故鄕 仁川|新東亞

異邦人들의 故鄕 仁川

包容과 融合의 鎔鑛爐인가, 서울로 向하는 臨時停車場인가

  • 최호열 동아일보 新東亞 記者 honeypapa@donga.com

    入力 2006-09-06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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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마다 全體 人口 10% 以上이 들고나는 都市
    • 失鄕民 哀歡 서린 만석동, 용현동
    • 50年代 避亂民, 60年代 忠淸人, 70年代 前라인 삶의 터전, 水道國産
    • ‘移動性’ 높아 地域 問題에 無關心
    • ‘仁川사람 意識’ 눈뜨는 移住民 2, 3世들
    • 19世紀 近代化 關門에서 21世紀 東北亞 中心都市로
    • ‘배꼽 떨어진 龍’李 如意珠 물고 하늘 오르는 風水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문학산에서 내려다 본 仁川 前景. 1900年代 初 濟物浦 모습(작은 寫眞).

    仁川(仁川)은 우리 近現代史의 屈曲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舊韓末엔 外勢 侵略의 關門이었고, 日帝 强占期에는 收奪과 大陸侵略의 最前線이었다. 光復 後엔 戰爭을 避하기 위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故鄕을 등진 失鄕民들의 集結場이었다. 自然히 都市는 異邦人들로 가득 찼다. 只今도 仁川은 해마다 15萬名이 流入되고 15萬名이 떠난다.

    歷史에 ‘仁川’이라는 地名이 처음 記錄된 것은 1413年, 朝鮮 太宗13年이다. 하지만 이미 1400年 前부터 이곳의 歷史는 始作됐다. 高句麗를 建國한 朱蒙이 첫째夫人 예씨에게서 낳은 琉璃에게 王位를 물려주자 둘째夫人 소서노가 自身이 낳은 두 아들(비류와 온조)을 데리고 南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

    온조는 只今의 서울 풍납동 一帶에 백제를 세웠고, 큰아들 飛流는 더 좋은 곳을 찾겠다며 西海 바닷가로 가서 터를 잡고 彌鄒忽이라 이름지었다. 하지만 그곳은 바다와 너무 가까워 물이 짜서 農事를 지을 수 없었다. 飛流는 自身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며 自決한 것으로 ‘三國遺事’는 傳한다. 沸流가 처음 나라를 세운 彌鄒忽이 只今 仁川市 南區 문학동 一帶다.

    仁川은 백제 初期 中國과의 海上交易通路로 活用되기도 했다. 松島 玉바위 陵허대가 그곳이다. 하지만 高句麗에 占領當한 뒤부터는 줄곧 邊方의 작은 漁村으로 머물렀다. 高句麗, 新羅, 高麗, 朝鮮의 歷代 王朝는 모두 陸路를 통해 中國과 交易했다. 굳이 險한 뱃길을 利用할 必要가 없었기 때문이다.

    土박이는 失鄕民으로



    오늘날의 仁川을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開港地 濟物浦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아 京仁線을 타고 제물포역에서 내렸지만 浦口는 보이지 않는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中區廳 쪽이 옛 濟物浦라고 일러줬다.

    1883年 朝鮮은 濟物浦條約을 締結하며 鎖國政策을 抛棄하고 開港을 한다. 當初 政府에서는 仁川이 ‘都城(서울)의 인후(목구멍)’라 하여 反對했지만 1884年 1月1日 日本이 强要해 門을 열었다. 當時만 해도 仁川은 都市라 하기엔 초라했다. 人口래야 겨우 7000名 程度였고, 더욱이 濟物浦는 人口 70餘 名의 작은 漁村이었다. 하지만 開港 以後 濟物浦는 國際港으로 急變하기 始作했다.

    세창洋行, 이화洋行 같은 外國 貿易會社들이 자리를 잡았고, 西歐 文物이 쏟아져 들어왔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港口라 貨物作業이나 道路公社, 建設工事 等 일거리가 넘쳐났다. 迫害를 避하려는 天主敎人들, 東學敎徒들, 貪官汚吏의 收奪에 못이긴 貧農들이 故鄕을 등지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以內 忠淸道 사람들이 모여 사는 洞네가 생기더니 濟州道 골목, 慶尙道 마을도 登場했다.

    仁川 土박이인 오광철(71) ‘인천일보’ 主筆에 따르면 開港 後 仁川의 商工業은 繁昌一路였지만 그 惠澤이 仁川 土着民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當時 最大 利權團體이던 米穀仲買人業體 ‘人千斤業所’ 會員들만 해도 日本人을 따라 仁川으로 온 嶺南人들이었어요. 이들은 居間으로 活動하거나 精米所 等을 하며 財産을 蓄積했죠. 율목동에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異邦人을 받아들이기 始作한 代身 土박이를 失鄕民으로 만들기도 했다. 1902年 濟物浦港에서는 仁川 내리敎會 敎人들을 中心으로 121名이 겐카이호(號)에 올라 하와이로 떠났다. 移民史(史)의 첫 章을 연 것이다. 以後 많은 사람이 濟物浦를 통해 하와이로, 멕시코로 移民을 떠났다.

    “奴隸처럼 일하는 고된 勞動 속에서도 하와이 移民者들은 祖國을 등지지 않았어요. 日帝 强占期엔 獨立運動資金을 댔고, 光復이 되자 誠金을 모아 學校를 세우는 데 보탰어요. 그게 바로 仁川의 ‘人(仁)’字와 하와이의 ‘下(荷)’字를 따서 이름을 지은 仁荷大예요.”

    中區廳으로 가는 길에 무지개 模樣의 돌門(虹霓門)을 지나자 色다른 거리 風景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100年 前 日本 거리에 선 듯한 느낌을 주는 日本式 建物들이 印象的이었다. 오늘날 日本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1900年代 初 세워진 日本式 建物들이 남아 있는 ‘재팬타운’이다.

    華僑들의 衰落

    中區廳 入口를 지나자 이番엔 中國風 建物들이 늘어선 차이나타운이 나타났다. 開港과 함께 仁川에 들어와 120年 넘게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華僑들의 根據地다. 차이나타운은 仁川驛까지 이어지는데, 곳곳에 ‘북경반점’ ‘파이란’ ‘피아노’ ‘육남매’ 等 이곳이 映畫와 드라마 撮影地였음을 알리는 標識板들이 눈에 띄었다.

    化敎는 開港 後 仁川과 中國 산둥半島를 오가며 仲介貿易을 통해 商權을 掌握했지만, 1937年 中日戰爭이 일어나면서 商圈이 痲痹되자 大擧 臺灣, 美國, 東南아시아로 떠났다. 남은 化敎들은 主로 雜貨商과 飮食店을 하며 살았다. 一部는 埠頭勤勞者로 轉落하기도 했다.

    光復 直後 中國과의 貿易이 再開되면서 化敎社會가 반짝 活氣를 띠기도 했다. 仁川市社(史) 編纂委員인 김양수(73)氏는 “當時 돈 있는 仁川 사람은 다 華僑라는 말이 있을 程度였다”고 傳했다. 하지만 中國에 共産政權이 들어서면서 國交가 斷絶되자, 化敎들은 다시 那落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李承晩, 朴正熙 政權의 華僑에 對한 差別과 排他政策에 따라 困窮한 삶을 살아야 했다.

    “1961年에 外國人의 土地取得 및 管理에 關한 法을 만들었는데 外國人은 1家口 1住宅 1點砲만 所有할 수 있게 했습니다. 住宅面積은 200坪 以下, 店鋪는 50坪 以下로 制限했고요. 또한 店鋪는 自身만 使用할 수 있고 他人에게 賃貸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논밭이나 林野 取得도 不可能했고요. 事實上 財産을 增殖할 機會를 剝奪한 셈이죠. 이 政策은 1998年 IMF 外換危機 以後 外國人 土地 所有 規制가 풀릴 때까지 繼續됐습니다.”

    그는 韓國에 定着한 華僑들이 外國의 華僑들처럼 財産을 蓄積하지 못한 데는 自招한 面도 없지 않다고 했다.

    “外出服 한 벌을 3代(代)가 같이 입을 程度로 근검하게 살았던 것은 認定해요. 그런데 1950年代 해마다 보릿고개 時期가 되면 中國人들이 밀가루를 買占賣惜했어요. 當然히 밀가루 波動이 일었죠. 이를 안 이 大統領이 火가 나서 中國飮食값을 凍結해버렸어요. 게다가 化敎들은 돈을 銀行에 넣어두기보다는 집 안에 쌓아뒀습니다. 그러다 두 次例 貨幣改革이 이뤄지면서 休止가 돼버렸어요. 一定額 以上은 새 貨幣로 交換해주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華僑 밑에서 자장면 配達하던 韓國人들이 어깨너머 배운 技術로 中國집을 開業하면서 競爭이 심해졌죠.”

    ‘짱꿰’와 ‘꺼우리房’

    그 사이에 化敎는 衰落의 길을 걸었다. 1942年 全國的으로 8萬名에 達하던 化敎는 只今 2萬餘 名에 不過하다. 이들 中 仁川에 사는 化敎는 2800餘 名으로 推算된다. 仁川華僑學校 學生들은 初中高校를 合쳐도 500名이 안 된다고 하니 앞으로 華僑 數字는 더 줄어들 듯하다.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松峴洞 一帶는 가난한 移住民들의 첫 定着地였다. 只今도 곳곳에 달동네 痕跡이 남아 있다(왼쪽). 오른쪽은 仁川의 첫 移住民이라 할 수 있는 華僑들의 集團 居住地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한 韓國 老人은 華僑에 對한 感情을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距離感이 있지. 開港 때는 婦女子를 잡아다 肝을 빼먹는다는 말이 있었고, 내가 어릴 때도 밤에 혼자 다니는 아이들 잡아다 판다는 말이 있었거든. 勿論 밤에 못 돌아다니게 하려고 어른들이 지어낸 말이지만 如前히 腦裏에 남아 있어. 게다가 中國人에 對한 괜한 優越感이 있었어. 우리도 못살았지만 化敎들은 더 못사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래서 ‘떼놈’이라고 놀렸어. 自己들이 하도 ‘大國(大國)’이라고 내세우니까 ‘大’字에 악센트를 줘서 떼놈이라고 부른 거지.”

    한 中國飮食店에 들어갔다. 자장면 값이 3000원이니 싼 便이다. 40代 後半의 社長은 韓國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華僑가 韓國에서 就業하기가 決코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도 運 좋게 中國貿易을 하는 會社에 就業할 수 있었습니다. 熱心히 일했지만 外換危機 때 構造調整에서 第一 먼저 잘리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韓國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자장면집말고는 없습니다.”

    그는 仁川에 愛情도 있지만 서운함도 크다고 했다.

    “어려서 ‘짱꿰’라고 놀림받았습니다. 자장면과 發音이 비슷해 우리를 비꼬아 부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놀림 받는 게 싫어 臺灣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差別을 받았어요. 우리를 ‘꺼우리房(考慮房)’이라고 놀렸습니다. ‘난 都大體 어떤 사람인가’ 하는 苦悶을 많이 했습니다.”

    仁川 化敎協會 事務室을 찾았다. 언덕 위에 있는 事務室에 들어서는 瞬間, 1960年代 映畫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室內 裝飾은 勿論 事務室 冊床, 椅子, 캐비닛 等 小品 하나하나가 요즘은 찾아보기 어려운 낡은 것들이었다. 化敎協會에서 일하는 勞效만(26)씨는 젊은 華僑들의 苦悶을 들려주었다.

    “思春期에 접어들면서 苦悶이 많아져요. 나는 韓國人인가 中國人인가 하는 正體性에 對한 苦悶, 就職 苦悶…. 韓國에선 제대로 된 職業을 갖기 어려워요. 그렇다고 中國보다는 韓國에 더 익숙한 우리들이 臺灣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그렇고…. 그래도 저나 제 親舊들이나 結婚은 韓國人이 아닌 華僑와 하고 싶어해요.”

    避亂民 몰려 살던 ‘똥마당’

    自由公園에 올랐다. 自由公園은 西洋人들이 이 땅에 만든 最初의 西洋式 公園이다. 하지만 只今은 冷戰의 遺物을 간직한 公園이 됐다. 公園 한 켠에 세워진 맥아더 銅像 때문이다. 文學評論家 이희환(40)氏에 따르면 當初 市民團體에서는 맥아더 銅像 撤去가 아니라 松島 仁川上陸作戰記念館으로의 移轉을 推進했다고 한다. 그런데 撤去 主張이 나오면서 理念 問題가 덧씌워졌다는 것. 戰爭의 傷痕이 아직도 우리 社會를 짓누르고 있는 證據다.

    銅像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 세 老人이 閑談을 나누고 있었다. 故鄕을 물으니 黃海道와 咸鏡北道라고 했다. 仁川은 그 어느 地域보다도 以北 失鄕民이 많이 살고 있다. 仁川以北5道民會에서는 仁川 居住 以北失鄕民 家族(2, 3歲 包含)李 77萬餘 名에 達한다고 主張한다.

    장회준(80)氏는 서울의 金融機關에서 일하다 戰爭을 맞았다고 한다.

    “避亂을 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서울로 들어갈 수가 없더라고. 多幸히 仁川에 내가 다니던 會社 地點이 있어 이곳으로 왔지. 그래도 난 職場이 있어 크게 어렵지는 않았는데, 아무것도 없이 내려온 사람들은 月尾島나 만석동 같은 海岸가에 움幕 짓고 살면서 막勞動으로 겨우 입에 풀漆을 했어. 만석동을 예전엔 ‘똥마당’이라고 불렀어. 避亂民이 너무 많아 公衆便所의 똥물이 넘친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아. 松峴洞에도 避亂民이 많이 살았지.”

    옆에 있던 도영수(78)氏도 거들었다.

    “6·25 前에 내려온 사람과 戰爭 때 내려온 사람은 形便이 달랐어. 戰爭 前에 내려온 사람들 中엔 知識層이 많아 일찍 이곳에 定着할 수 있었지만, 戰爭 때 내려온 사람들은 苦生 많이 했지. 집 지을 板子가 없어 땅窟에 사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나도 그때 彰顯國民學校에서 配食 타다 먹으며 겨우겨우 延命했던 記憶이 나.”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最尖端 技術로 丹粧될 松島新都市는 仁川港, 인천국제공항과 함께 東北亞 中心都市로 仁川의 트라이포트를 이룰 展望이다.

    그後 만석동에 對한 開發이 이뤄지면서 失鄕民들은 겨우 일군 삶의 터전에서 또다시 쫓겨나야 했다. 이들이 간 곳은 一名 毒쟁이고개라 부르는 南區 용현동과 학일동 一帶였다.

    “억척스럽게들 살았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切迫함이 있었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土박이들이랑 葛藤을 빚기도 했어. 우릴 ‘以北놈’이라고 蔑視하기도 했지. 그래도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았으니까 여기에 定着할 수 있었던 거지. 土박이보다 以北 失鄕民이 더 잘사는 境遇가 많아. 물불 안 가리고 이 악물고 번 結果枝.”

    失鄕民들은 大部分 50年 넘게 仁川에 살았으니 이젠 仁川이 故鄕이라고 할 만도 하건만 그렇지가 않은 模樣이다. “이제 뼈를 묻어야 할 곳이 仁川 아니냐”고 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率直히 살아서 北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안 해. 그래도 故鄕이 그리워. 失鄕民들은 大部分 통일동산에 묏자리를 定해놓았어. 나도 그렇고.”

    죽어서라도 故鄕을 볼 수 있는 곳에 묻히고 싶다는 뜻이다. 이들은 요즘 나들이 삼아 江華島 교동섬이나 金浦를 자주 찾는다고 했다. 멀리나마 故鄕 땅 黃海道가 보이기 때문이다.

    以北 失鄕民들은 結束力이 남달랐다. 그래서 政治的 입김이 거셌고, 失鄕民 出身 國會議員을 排出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옛이야기라고 푸념한다. “다들 늙었으니까. 게다가 子息들은 故鄕에 對한 愛情이 없어. 故鄕 이야기를 해도 시큰둥하고, 以北5道民 行事에도 無關心해. 하긴, 그 놈들 故鄕은 以北이 아니라 仁川人 셈이지” 하며 씁쓸한 微笑를 지었다.

    ‘밑바닥 人生들의 場터’

    1960年代 仁川은 다시 한番 異邦人들로 북적대기 始作했다. 特히 瑞山, 唐津 사람이 많이 올라왔다. 이희환氏도 태어난 지 50日 만에 父母 품에 안겨 올라와 仁川市民이 됐다.

    “어린 時節 水道國産이라 불리던 松峴洞에서 살았어요. 송현동은 1900年代 初엔 日本人에게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仁川市民들이 터잡기 始作했어요. 6·25戰爭 때는 避亂民의 洞네였고요. 그러다 1960年代엔 忠淸道에서, 1970年代엔 全羅道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이곳으로 왔어요. 아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처음에 터를 잡는 달동네였던 셈이죠.”

    仁川 土박이들에 따르면 水道國産은 山비탈을 따라 3000個가 넘는 板子집이 거미줄처럼 얽힌 洞네였다고 한다. 골목이 좁아 손수레度 제대로 다니기 힘들고, 집은 허술하고 낡아 언제 무너질지 모를 危險이 있었다는 것. 어린 이희환의 눈에 비친 仁川은 豐饒로운 機會의 땅이 아닌, 그날그날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밑바닥 人生들의 場터였다.

    다시 京仁線을 타고 부평역에 내렸다. 1930年代 日帝는 中國侵略을 위해 이곳에 조병창(造兵廠)을 세우고 各種 武器와 潛水艦을 만들어 最前方에 供給했다. 日本이 武器工場을 海外에 만든 것은 이곳이 唯一하다. 또한 勤勞報國隊라는 名分 아래 갖가지 公社에 韓國人들을 强制 動員했다. 이때 韓人들이 모여 살던 곳 가운데 하나가 只今의 부평역 近處, 동아아파트 入口에서 北仁川郵遞局 사이, 一名 다다구미라 불리던 곳이다.

    日帝가 敗亡하며 조병창이 門을 닫자 갈 곳 없는 人夫들이 다다龜尾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6·25 때 廢墟로 變했지만 戰爭이 끝나자 흩어졌던 住民들이 다시 모이고 避亂民들까지 合勢해 巨大한 달동네를 이루었다.

    富平이 기지개를 켜기 始作한 것은 1960年代 末 輸出産業工團으로 指定되어 自動車工場들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일자리를 찾아 다시 8度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始作했다.

    ‘바다는 물을 뿌리치지 않는다’

    以後에도 桂陽과 富平 等 서울 隣接 地域을 中心으로 베드타운이 形成되면서 外地人들이 밀려들어왔다. 서울에 職場이 있지만 서울에서 살 形便이 안 되는 庶民들에게 仁川은 地理的으로 가깝고 집값도 싼 適格地였다. 仁川은 서울 衛星都市들 中에서도 집값이 가장 싸다. 게다가 大部分 外地人들이어서 다른 都市처럼 異邦人에게 閉鎖的인 雰圍氣가 없어 定着이 容易하다는 點도 作用했다.

    仁川과 全國 投票率 比較
    鳶島 選擧 仁川 全國
    1991 地自體 68% 75.8%
    1992 大選 80.3% 81.9%
    1995 地自體 62% 68.3%
    1996 總選 60% 63.9%
    1997 大選 80% 80.7%
    1998 地自體 43.2% 52.7%
    2000 總選 53.4% 57.2%
    2002 地自體 39.3% 48.9%
    2002 大選 67.8% 70.8%
    2004 總選 57.4% 60.6%
    2006 地自體 44.2% 51.6%


    仁川을 構成하는 異邦人은 또 있다. 朝鮮族, 海外 移住勞動者들이다. 市에서 把握한 바에 따르면 朝鮮族 8200餘 名, 海外 移住勞動者 9400餘 名에 이른다. 여기에 不法 就業者까지 合하면 만만치 않은 規模다. 海外 移住勞動者들은 主로 南東工團, 부평공단에 密集해 있는데, 이 地域엔 이들을 위한 專用 슈퍼마켓이 생기는 等 華僑처럼 또 다른 文化를 形成해가고 있는 中이다.

    인하대 政治外交學科 정영태(49) 敎授가 1998年 調査한 바에 따르면 仁川에서 태어난 사람은 全體 人口의 30%가 채 안 됐다. 아버지 故鄕부터 따지면 土박이는 13%에 不過하다. 나머지는 모두 外地에서 온 異邦人들이다. 그래서 새얼文化財團 지용택(69) 理事長은 仁川을 ‘海不讓水(海不讓水)’라고 했다. ‘바다는 물을 뿌리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양수氏는 ‘仁川合衆視’라고 表現했다.

    仁川學硏究院 金昌洙(48) 常任硏究員은 ‘이주성(移住性)’이야말로 仁川의 肯定的인 特徵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國際都市치고 移住民이 主軸의 하나를 形成하지 않은 都市가 없다는 것.

    “美國도 끊임없이 移住民을 받아들이고 融和하면서 成長한 나라예요. 이주성이 力動的인 힘이 된 거죠. 저는 大邱가 繼續 沈滯되는 理由가 이주성이 작기 때문이라고 봐요. 純粹血統이 剛하면 都市가 박제화할 수밖에 없어요. 反面 仁川의 包容力과 融合力은 仁川 文化를 더욱 豐富하게 만들었습니다. 代表的인 事例로 黃海道 失鄕民들이 내려와 仁川 文化로 吸收된 殷栗탈춤과 豐漁祭가 있어요.”

    化敎 亦是 마찬가지다. 華僑의 傳統文化는 仁川 文化를 豐富하게 만들었다. 特히 자장면과 胡떡은 仁川의 代表的인 飮食文化로 자리잡았다.

    “자장면은 濟物浦 埠頭 勞動者들의 點心食事 거리로 開發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胡떡도 淸日戰爭 後 生計가 漠然해진 華僑들이 만들어 팔던 것이고요. 한 世紀 안에 國民飮食이 되기란 대단히 어려운데, 자장면은 中國에 輸出될 程度로 有名해졌잖아요.”

    反面 오광철氏는 “移住民이 너무 많다보니 仁川이 서울살이에서 탈락한 사람들과 서울로 가려는 사람들이 暫時 머무르는 停車場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仁川을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돈만 벌면 當場 서울로 가겠다고 생각하죠. 그러다 보니 地域 問題에 關心이 없죠. 옛날에 名聲을 날리던 송도海水浴場이 ‘똥물’李 되고, 大氣汚染이 서울보다 더 심해지고… 갈수록 交通이 混雜해지고, 汚染의 都市로 낙인찍혀도 憤怒하지 않아요.”

    鄕土史學者 조우성(58)氏는 “仁川市民들의 愛鄕心이 낮은 건 태어난 곳을 重視하는 農耕時代의 事故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分析했다. 태어난 곳을 重히 여기다 보니 自然히 鄕友會가 活潑하다. 特히 以北, 忠淸道, 全羅道 鄕友會가 强해 市郡 單位까지 組織되어 있을 程度다. 이희환氏에 따르면 1980年代까지만 해도 仁川公設運動場을 빌려 西山郡民會를 열었다고 한다.

    仁川市民은 勿論 政黨關係者나 學界 사람들도 “仁川은 忠淸 出身이 30%, 全羅 出身이 30%, 以北5道民이 20%로 大部分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하대 정영태 敎授가 1998年 調査한 바에 따르면 父親의 故鄕을 基準으로 忠淸 出身이 21.5%, 全羅 出身이 16.4%, 以北5度 出身이 10.4%에 不過했다. 이들 鄕友會가 얼마나 結集力이 剛하고 積極的인지를 보여주는 例라 할 수 있다.

    “仁川에서 이겨야 大權 잡는다”

    故鄕에 對한 移住 1世代의 執着은 2∼3世代로 내려오면 顯著히 弱해진다. 그들에게 태어나고 자란 故鄕은 바로 仁川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仁川의 文化와 歷史를 共有한다. 김양수氏는 이들 새로운 土박이들을 注目해야 한다고 말한다.

    “1980年代 初盤만 해도 仁川 土박이가 10%도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只今은 여기가 故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60%가 넘어요. 新(新)仁川 土박이들이 생겨난 거죠.”

    光復 直後 仁川은 ‘韓國의 모스크바’로 불렸다. 그만큼 左翼勢力이 剛했다. 北韓에서 副主席을 지낸 이승엽이 이곳 出身이다. 仁川은 港口都市인데다 工業都市여서 日帝 强占期부터 勞動者가 많았다. 使用主는 日本人이나 親日派였고, 勞動者는 韓國人이었기에 階級 問題와 民族 問題가 一致한데다 서울과 가까워 左派 知識人들이 이곳에 내려와 勞動者들을 意識化했다. 그 影響 때문인지 野黨 巨物이었던 曺奉巖과 場面을 輩出했고, 7代 大選 때도 김대중 候補에게 56.9%의 높은 支持를 보냈다. 말 그대로 ‘野道(野都)’였다.

    仁川의 人口增加 推移
    1759年 6800名
    1897年 1萬4280名
    1911年 3萬2701名
    1926年 5萬3741名
    1936年 10萬303名
    1946年 22萬242名
    1955年 30萬3760名
    1965年 48萬5511名
    1979年 104萬3744名
    1987年 152萬6435名
    1992年 207萬616名
    1999年 252萬4251名
    2005年 263萬2178名


    그러나 언제부턴가 政治性向이 바뀌었다. 1987年부터는 各 政黨의 全國 得票 結果와 仁川 得票率이 거의 비슷하게 맞아떨어져 仁川이 우리나라 全體 有權者 性向을 가늠하는 尺度가 됐다. “仁川에서 이겨야 大權(大權)을 잡는다”는 말까지 생겼다.

    仁川은 投票率이 全國에서 가장 낮기로 有名하다. 그런데 仁川의 歷代 選擧 投票率과 全國 平均 投票率을 比較해보면(표 參照) 特異한 現象을 發見할 수 있다. 大統領選擧, 國會議員選擧, 地自體選擧로 내려갈수록 投票率 隔差가 크게 벌어진다. 이에 對해 정영태 敎授는 “移動性이 높기 때문”이라고 分析했다.

    “大統領이나 國會議員은 國家的인 이슈니까 다른 地域과 큰 差異가 없지만 地自體選擧는 달라요. 仁川에 뿌리내리고 살기보다는 機會가 되면 서울이나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많으니까 地域 懸案에 對한 關心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自己 삶에 큰 影響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조우성氏는 이런 政治 民心 때문에 仁川이 損害를 본다고 말했다.

    “仁川은 서울과 釜山 다음으로 큰 都市인데도 場面 總理 以後 巨物 政治人을 排出하지 못했어요. 3年 前, 科技處 長官 한 名 나온 後로는 변변한 長官조차 없어요.”

    仁川 出身의 政治 리더가 없다 보니 仁川이 逆差別을 받기도 한다는 것. 仁川은 2014年 아시안게임 開催를 目標로 하고 있지만 可能性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해 江原道 平昌이 冬季올림픽 誘致를 目標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IMF 經濟危機 以後 京畿銀行, 동화은행 等 仁川地域 金融機關은 大部分 退出됐어요. 그런데 이들 銀行보다 決코 財務狀態가 좋다고 할 수 없던 忠淸, 湖南圈 地方銀行은 살아남았어요. 仁川에 힘있는 政治人이 있었다면 그랬겠냐는 거죠.”

    오광철 主筆은 仁川의 位相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고 걱정했다.

    “1960年代 中盤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의 이전지를 놓고 水原과 仁川이 競爭을 벌였는데, 어느 모로 보나 仁川이 훨씬 큰 都市였는데도 水原으로 갔어요. 只今 다른 廣域市들은 다 道廳所在地가 있던 곳이고, 그 地域의 맏兄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仁川은 그러지 못해요. 오히려 損害보는 일이 더 많았죠. 인천방송도 이름이 京仁放送으로 바뀌었잖아요.

    元來 京仁地域이란 서울과 仁川 사이를 말하는 거예요. 京仁公團은 九老, 富平, 富川 等 서울과 仁川으로 이어지는 工業團地를 일컫는 거죠. 그런데 只今 京仁地域이라고 하면 뭐가 聯想됩니까? 京畿와 仁川이잖아요. 自尊心 傷하죠.”

    ‘이반’은 많아도 ‘準빠’는 없는 都市

    우리 社會의 永遠한 異邦人 가운데 하나가 ‘이반’李 아닐까 싶다. 同性愛者들은 一般(一般)的인 異性愛者들과 自身들을 區分해 ‘이반(二般)’이라 부른다. 서울에선 鍾路3歌가 離叛들의 아지트이듯 仁川에선 부평역轉移 離叛들의 아지트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부평역 一帶를 헤맸지만 離叛들이 모인다는 DVD房도, 찜질房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들이 看板을 걸고 營業하는 게 아니어서 모르는 사람은 全혀 찾을 수 없다.

    골프演習場과 旅館村 사이 골목을 지나다 끄트머리쯤에서 建物 2層에 있는 허름한 카페가 눈에 띄었다. 或是나 하고 서성거리는데 建物 1層 ‘D燒廚房’이란 看板을 내건 가게에서 “누굴 찾아왔냐”며 50代 初盤의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中年 男子들이 閑談을 나누고 있었다. 壁에 걸린 그림들로 보아 한눈에도 離叛의 아지트임을 알 수 있었다. 仁川 離叛들의 現況을 取材 中이라고 하자 선선히 이야기를 꺼냈다.

    “仁川엔 서울 다음으로 이반이 많이 살아요. 人口比率로 따지면 서울보다도 더 높을 걸요. 이반 카페나 사이트 會員들과 채팅하다 마음에 들어 만나자고 하면 30∼40%는 仁川에 산다고 해요.”

    D燒廚房 主人 김석철(40)氏의 이야기다.

    “仁川의 이반 人口가 얼마나 되냐”고 묻자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離叛이 얼마나 되는지는 어디서도 把握이 안 된다는 것. 워낙 陰性的으로, 다양하게 만나기 때문이다. 特記할 點은 仁川의 이반 人口에 비해 關聯 遊興施設은 發達하지 못했다는 것. 地理的으로 서울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한다.

    “仁川의 離叛들은 大部分 서울로 가요. 아무래도 規模가 크니까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고, 匿名性이 保障되잖아요. 그래서 仁川에는 前부터 이반 專用 遊興業所가 別로 없었어요. 朱安, 석바위, 濟物浦 等 驛 周邊에 몇 個씩 있는 程度였죠. 그러다 4年 前, 부평역에 롯데마트가 들어서고 商圈이 發達하면서 業所가 이곳으로 모이기 始作해 只今은 15個 程度 있어요. 동암에 2∼3個 있고요.”

    그는 仁川의 이반 專用 遊興業所가 數的으로나 施設 水準에서 서울은 勿論 釜山, 光州, 大邱, 大田에 비해서도 떨어진다고 했다. 그만큼 손님이 없다는 뜻이다. D燒廚房만 해도 손님이 적을 땐 하루 5名, 많아도 20名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부평역 一帶 業所를 모두 합쳐도 하루 平均 200∼400名. 顧客이 적으니 業所間 競爭도 熾烈해 새로운 遊興業所라도 생기면 甚하게 牽制한다고 한다.

    “仁川엔 ‘準빠’도 없어요.”

    룸살롱의 女性 接待婦를 호스티스라고 한다. 男性 接待婦는 호스트라고 부른다. 호스트 바는 男性 接待婦가 나오는 곳을 말한다. 男性 接待婦가 相對하는 顧客은 女性인 境遇가 一般的이지만 男子손님(이반)을 相對하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을 俗稱 ‘準빠(‘準호스트 바’의 줄임말)’라 부른다. 박석일(51)氏는 2年 前까지 大邱에서 準빠를 運營했다고 했다.

    “6大 都市 가운데 準빠가 없는 곳은 仁川뿐이에요. 이 地域의 所得水準이 낮아 準빠가 成功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다른 業所들의 牽制가 甚하다고 할 수 있어요. 지난해인가, 準빠가 하나 생겼는데 다른 이반 휴흥업소에서 손님을 빼앗길까봐 當局에 繼續 不法 營業申告를 해 結局 門을 닫았어요.”

    仁川의 經濟事情이 넉넉지 못하다는 것은 트랜스젠더 바가 없다는 것에서도 確認된다. 주머니 事情이 넉넉한 一般人이 好奇心에 찾는 게 트랜스젠더 바다. 간석동에 트랜스젠더 바가 하나 생겼지만,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今方 사라졌다. 反面 女性 離叛인 레즈비언들은 自己들의 아지트 카페를 갖고 있다고 한다.

    仁川 出身 選手 드문 SK와이번즈

    蹴球가 1882年 仁川 앞바다에 머물던 英國 軍艦 플라잉 피시號(號) 水兵들에 依해 우리나라에 傳해졌듯이 野球 또한 仁川을 통해 들어왔다. 1899年 仁川英語夜學會 學生들 사이에서 이미 野球가 流行했다. 1920年代엔 한勇斷 같은 韓國人 野球團이 있어 日本 팀과 겨루기도 했다. 이런 傳統을 이어받아 인천고와 東山高가 釜山, 光州, 서울의 高校野球 名門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仁川 짠물 野球’란 말이 나올 程度였다.

    하지만 仁川의 프로野球는 試鍊의 連續이었다. 1982年 프로野球 出帆 當時 仁川을 緣故로 프로野球팀을 創團하겠다는 企業이 하나도 없었다. 迂餘曲折 끝에 出帆 前날 삼미그룹이 電擊的으로 仁川팀 創團을 發表, 삼미슈퍼스타즈가 만들어졌지만 삼미의 사세(社勢)만큼이나 選手들 水準도 떨어졌다. 國家代表 出身 選手가 한 名도 없는 팀이었다.

    인터넷사이트 ‘仁川의 짠물野球(bruce2k.com.ne.kr)’를 運營하는 野球팬 김훈희(35)氏는 仁川의 프로野球는 始作부터 꼬였다고 했다.

    “1970年代는 仁川 高校野球의 沈滯期였어요. 그러다 보니 프로野球 出帆 무렵인 1980年代 初에 잘하는 成人野球 選手가 적었죠. 그나마 인호봉, 김진우, 임호균 選手가 있었는데, 그들마저 1983年 世界野球選手權 大會에 出戰해야 한다는 理由로 國家代表로 묶여 프로팀에 들어오지 못했어요.”

    開幕 當時 仁川野球場은 라이트 施設이 없어 夜間競技를 수원구장에서 했다. 스타級 選手가 없어 成跡도 안 좋은데다 仁川에서 景氣조차 안 하니 熱誠 팬이 생겨날 理 없었다. 이듬해인 1983年 ‘너구리’ 장명부가 突風을 일으키며 仁川에 다시 野球 붐을 일으켰지만 삼미그룹은 社勢가 기울어 1985年 청보로 野球團을 넘겼다. 仁川 프로野球팀은 다시 1988年 太平洋, 1996年 現代로 繼續 넘어갔다. 마지막인 줄 알았던 현대마저 4年 만인 2000年 地域緣故를 서울로 옮기겠다며 仁川을 떠났다.

    “仁川市民의 사랑을 듬뿍 받은 팀은 太平洋돌핀스였어요. 特히 1994年이 絶頂이었죠. 처음으로 韓國시리즈에 進出했을 뿐 아니라 仁川 出身 選手들로 이뤄져 짜임새가 있었어요. 현대유니콘스는 優勝을 하기도 했지만 今方 仁川을 ‘背信’하고 떠났잖아요.”

    仁川 土박이 조우성氏

    “仁川에선 ‘地域感情’을 더 키워야 해요”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仁川이야기 100場面’ 等을 쓴 仁川의 鄕土史學者 조우성(58)氏는 履歷이 特異하다. 大學(한양대 國文學科)을 卒業한 後 國語敎師로 出發해 仁川地域新聞 記者로 일하다 다시 敎鞭을 잡고 있다. 하지만 그가 一貫되게 하는 일은 하나다. 仁川의 歷史를 正確히 밝히고, 仁川의 自矜心을 되살리는 일이다.

    “사람들이 3·1運動 때 仁川에서는 萬歲運動이 없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게 事實이라면 부끄러운 일이죠. 그런데 제가 史料들을 調査해봤더니 當時 無慮 한 달 以上 萬歲運動이 激烈하게 繼續됐다는 事實을 確認할 수 있었어요. 日本 땅 바깥에서는 唯一하게 조병창(武器製造廠)이 있던 이 敏感한 地域에서 그렇게 獨立運動을 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죠.”

    잘못 알려진 歷史는 또 있다. 鐵道의 始發點이 서울 鷺梁津이라는 것도 事實과 다르다는 게 그의 說明이다.

    “獨立新聞에 나온 京仁線 開通式 記事를 보면 ‘仁川에서 列車를 몰고 영등포에 가 高官大爵들을 태우고 다시 仁川으로 와서 開通式을 한 뒤 鷺梁津까지 試運轉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鷺梁津에는 ‘韓國鐵道 始發비’가 세워져 있고, 韓國鐵道公社가 發行한 韓國鐵道社에 關한 冊에도 鷺梁津이 始發點이라고 돼 있어요. 서울 中心의 歷史 技術이 낳은 歷史歪曲人 셈이죠.”

    그는 仁川은 開化期의 關門이었기에 歷史的 價値가 있는 ‘韓國 最初’가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아펜젤러 牧師가 草家집을 한 채 얻어 1885年 7月19日 첫 禮拜를 始作한 내리敎會가 우리나라 最初의 改新敎 敎會입니다. 自由公園은 서울 탑골公園보다 먼저 생긴 最初의 西歐式 公園이고요. 氣象臺도 仁川에 第一 먼저 생겼어요. 劇場도 仁川 ‘協律社’가 最初이고, 外國 貿易商社도, 호텔도 仁川에 먼저 생겼습니다. 그야말로 ‘仁川 最初’면 自動的으로 ‘韓國 最初’였죠.”

    그는 다른 地域 사람들이 제 고장만 아는 閉鎖性과 排他性이 問題라면 仁川은 거꾸로 地域意識이 稀薄해서 問題라고 꼬집었다. 그래서 仁川의 것을 알려 하고 所重히 여기려는 마음이 없다 보니 漸漸 仁川의 歷史와 文化가 사라진다는 것.

    “仁川은 좀더 地域化돼야 합니다. 흔히 嶺湖南을 例로 들면서 地域感情 助長하지 말라고 하지만 거꾸로 仁川은 地域化가 너무 안 돼서 發展이 느리다고 봅니다. 어느 程度 結束力은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仁川 野球팬들은 現代에 對한 感情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했다. 2000年에 仁川을 떠났으니 벌써 6年이 지났지만 아직도 응어리가 남은 模樣이다. 現在 仁川을 緣故로 하는 팀은 SK와이번즈다. 仁川 팬들은 아직 SK에 對한 評價를 留保하고 있다.

    “현대와 比較하면 아직 멀었어요. SK는 仁川에서 좋은 選手가 나와도 잘 키우질 못해요. 올해만 해도 仁川 出身의 슈퍼 루키 柳賢振을 제쳐놓고 1次 指名에서 捕手 李在鎔을 뽑았어요. 結果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只今 性的으로 봐서는 大魚를 놓친 거죠. 늘 그런 式이에요.”

    이들의 마음속엔 아직도 現代에 對한 未練이 있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仁川을 實質的으로 代表하는 프로野球팀이 어디냐에 對해서는 論難의 餘地가 있다. 8月初 現在, 현대 主戰 中 6名이 仁川 出身이다. 反面 SK에는 仁川 出身 選手가 3名뿐이다. 全北을 緣故로 한 쌍방울 레이더스 選手들을 主軸으로 팀을 創團한 탓에 全北 出身이 7名이나 된다. 大田 韓華이글스가 主戰 26名 가운데 忠淸地域 出身이 10名인 것에 比하면 SK는 마음을 줄 ‘내 故鄕 選手’가 絶對 不足하다.

    “현대가 仁川을 떠날 때 仁川 選手들을 많이 넘겨줬어야 했어요. 仁川 팬들이 强力하게 要求해서 김경기 選手 한 名 내놓았죠. 올해 박진만 選手가 仁川으로 올 줄 알았는데 돈 때문에 三星으로 가더라고요. 仁川 팬들로서는 아쉽죠. 그나마 위재영이라도 있어 慰安이라고 할까.”

    또다른 失鄕民 ‘仁川 土박이’

    開發이 한창인 仁川의 新都市 松都를 찾았다. 2010年이면 제법 威容을 드러낼 松都는 情報化 都市, 最尖端 디지털化 都市, 敎育都市로 建設될 豫定이다. 松島新都市가 完成되면 仁川은 仁川國際空港과 仁川港, 松島新都市가 트라이포트를 이루는 國際的인 都市가 될 것이다. 19世紀 末 近代化의 關門에서 20世紀 서울의 衛星都市로 轉落했던 仁川이 21世紀에는 東北亞의 中心都市로 飛躍하는 셈이다.

    이를 豫見이라도 했던 것일까. 최원식 인하대 敎授에 따르면 한 風水學者가 仁川에 對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仁川은 잠자는 龍이었다. 그런데 배꼽을 터뜨려(문학산 배꼽바위 烽燧臺를 없애고 美軍基地가 들어섰다) 龍이 깨어나 飛上하려 한다. 龍의 如意珠는 아암도(송도신도시 앞에 있는 작은 섬)다.”

    하지만 ‘21世紀 東北亞의 中心都市’란 薔薇빛 靑寫眞 뒤에도 그늘은 있다. 過去 土박이들이 産業化에 밀려 ‘近代都市’ 仁川을 喪失한 것처럼, 새로운 仁川 土박이들 亦是 어린 時節의 꿈과 追憶이 묻어 있는 現在의 仁川을 喪失할 것이다. 그게 仁川의 宿命일지도 모른다. 그런 點에서 仁川 土박이들도 또 다른 意味에서의 失鄕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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