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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食 삶’ 硏究家 김정덕|新東亞

‘自然食 삶’ 硏究家 김정덕

“오르가슴이 뭔 줄 알아? 머리와 마음이 하나 되는 게야”

  • 김서령 自由寄稿家 psyche325@hanmail.net

    入力 2005-08-29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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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재주를 타고난 스물일곱 靑孀寡婦, 子息도 잃은 채 이 악물고 디자인에 매달렸다. 黃土의 治癒力에 魅了돼 ‘황토 硏究가’가 됐고, 삼베옷 짓고 醬 담그며 平生을 自然 속에 살았다. “世上은 祝福투성이야!”라고 외치는 自然食 삶 硏究가, 김정덕. 그의 거침없는 態度와 번개 같은 洞察에서 眞正한 自由人의 모습을 본다.
    ‘자연식 삶’ 연구가 김정덕
    忠南天安 병천에 가서 김정덕(金貞德·71) 할머니의 黃土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바깥은 불볕인데 房안은 거짓말처럼 서늘했다. 바닥엔 고운 새끼줄을 촘촘히 엮어 만든 짚자리를 깔았고 房 가운데는 고슬고슬한 흙더미가 그대로 드러났으며 베개는 소나무를 半으로 쪼갠 硬寢이다. 눈앞엔 멍석만한 蓮잎들이 넘실거리고 뜰엔 봉숭아, 百日紅, 菜松花가 各其 무리지어 피고 키 작은 千日紅이 막 붉은 꽃을 피워 올렸다.

    마실 거리로 연달아 나오는 탱자, 수세미 酵素, 千日紅 酵素, 맨드라미 酵素는 지난해 바로 이 땅에서 자란 것들로 그냥 입속에 털어넣기 아까울 만큼 香 좋고 빛깔 고왔다. 밭에서 꺾어 갓 쪄낸 옥수수, 소금 두어 알 얹은 수박 맛도 서울서 먹던 것과는 確實히 달랐다(수박은 音이니 良人 소금을 섞어 먹어야 頉이 없단다).

    나는 主人이 내준 黃土물들인 人造絹 바지에 자투리천을 모아 지은 삼베 적삼을 입고 날아갈 듯 가벼워져서 연신 뱃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흐뭇한 웃음을 웃어댔다. 모처럼 맛보는 颯爽한 衣食住의 體驗이었다. 前에 分明 이렇게 살았건만 잊고 있던 自然主義的 삶이었다.

    쪽빛 기저귀, 人造絹 잠옷

    김정덕 할머니! 黃土집 짓고 野菜 酵素 만들며 天然纖維에 自然 染色해 한땀 한땀 옷을 지으며 醬 담그고 장아찌 만들고 차 우리고 農事짓는 그를 일쑤 ‘황토 硏究가’라고들 부르는 模樣이지만 그의 關心은 黃土에 局限된 게 아니라 衣食住 全般에 걸쳐 있다.



    올해 일흔하나, 할머니라 부르기엔 몸매도 皮膚도 態度에도 여태 팽팽한 緊張이 흐르고, 縱橫無盡, 天衣無縫하게 솟아나는 아이디어와 好奇心은 차라리 아이 같고 새로움을 좇는 瞬發力과 推進力, 關心의 다양함은 어느 靑年에 못지않다. 그러면서 문득 다 내려놓고 물러서는 고요와 비움을 말하는 그를 나는 一旦 ‘自然食 삶 硏究가’라고 稱한다.

    “나의 專攻은 衣裳 디자인이었다. 스페셜 코스로 纖維組織學徒 工夫했다. 그러나 그때 배운 암홀이니 웨이스트 라인이니 하는 規定들은 내 衣生活에 別 影響을 주지 못한다. 나는 삼베에 쑥물들인 넉넉한 바지를 입고 베 쪼가리로 만든 上衣에 굵은 삼베와 가는 삼베를 섞어 만든 帽子를 쓰고 다닌다. 石油에서 뽑은 化學纖維의 汎濫, 오존層이 깨져서 直射하는 紫外線, 排氣가스 等의 뒤범벅으로 아토피 皮膚病은 늘어만 가는 趨勢다.

    天然織物에 天然染色한 옷은 이 殺伐한 時代를 살아가는 防衛服이 될 것이다. 붉은 洪貨物은 나쁜 細菌을 막고 바닷빛을 내는 쪽은 皮膚를 保護한다. 그래서 아기들 기저귀에 쪽물을 들이면 좋고, 梔子나 金盞花로 虜亂물들인 人造絹 잠옷은 觸感이 가실가실해서 좋다. 비바람에 떨어진 풋감을 짓이겨 물들인 감물옷, 이보다 더 優雅하고 高尙한 奢侈가 또 있을까….

    나는 우리 洞네 韓服집에다 사람을 자주 紹介한다. 베 자투리를 얻기 위한 目的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中의 하나는 彫刻 모아 옷 만들기다. 洞네 韓服집 아주머니의 脾胃를 맞춰 얻어온 白玉 같은 모시, 노르스름한 安東布, 누런 삼베를 이리저리 매치해서 옷을 짓는다. 누구와 만나 筆(feel)李 좋으면 그를 위해 無條件 옷 한 벌을 만드는 마음, 그게 바로 내 財産이다.”

    그는 이렇듯 글도 잘 쓴다. 쉽고 鮮明해서 더욱 힘찬 글이다.

    그는 1987年에 이곳 병천으로 내려왔다. 병천으로 오게 된 事緣, 그게 또 여느 삶과는 宛然히 다르다. 1970年代 末葉 日本에서 自然健康法을 工夫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周邊엔 養生法과 自然療法을 支持하는 사람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韓國양명회란 團體를 만들었다. 自然健康回, 한마음會 같은 모임도 그를 中心으로 생겨났다. 그 무렵 김정덕은 사람을 만나면 그들 心身의 狀態를 환하게 읽었다. 處方도 今方 떠올랐다.

    “‘當身은 黃土찜질을 어떻게 하고 율무粥을 한 달만 먹으라’는 式으로 불쑥 말해놓고도 내가 깜짝 놀라, 나도 몰래 내 안에 內在된 힘을 믿게 됐어요. 宇宙와 靈通하는 어떤 部分이 있었다고 할까.”

    그게 所聞이 나 절로 自然健康法의 傳道師가 돼버렸다. 全國을 돌며 講演을 다니던 무렵 병천 사는 한 老人이 찾아왔다.

    “와세다 大學 通信講義를 받는다는 깨인 農夫였어요. 粉紅色이 살짝 도는 ‘보까詩’ 無를 가지고 왔는데 너무 예쁜 거야. 달이 農事에 決定的 影響을 미친다는 루돌프 슈타이너式 農法을 實踐하는 그 老人에게 當時 내가 가진 돈 全部를 投資했어요. 근데 그 돈을 못 갚게 되자 代身 이 땅 3000坪을 날 준 거예요. 빌려준 돈이야 7000~8000坪을 살 수 있는 額數였지만.”

    그 땅엔 知能이 좀 모자란 老人의 아들 內外가 살고 있었다. 젊은 孫子도 있었다. 병천 내려와 黃土집을 지으면서 김정덕은 老人의 孫子 김안식을 아들로 삼았다. 땅은 모두 養아들 名義로 했다. 며느리를 맞아 떡두꺼비 같은 孫子 셋을 얻었고 語訥해서 더 착하고 부지런한, 養아들의 親父母까지 여덟 食口가 어울려 함께 살고 있다.

    큰孫子 용희에게 “世上에서 가장 좋은 사람?” 물으면 대뜸 “우리 할머니!”라 對答한다. 아무리 더워도 그는 세 孫子를 끼고 잔다. 아이들도 할머니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孫子를 爲한 投資엔 아까울 게 없고 훌훌 떠난 旅行길에서도 아이들이 보고 싶어 얼른 집에 돌아온단다. 그가 具現하는, 피로 얽히지 않은 新槪念 家族의 아름다움을 나는 놀라움으로 지켜봤다.

    食相이 보인다

    올해 그는 병천면 탑원리 3000坪의 밭에다 아들 內外와 함께 오이를 심었다. 병천에서 唯一하게 無農藥 農産物에 붙이는 品字 마크를 獲得한 ‘아우내 오이’다. 병천에서 그는 農夫다. 그냥 農夫가 아니라 農藥과 肥料 없이 땅과 사람 사이의 眞正한 意味를 살피면서, 씨앗이 싹터 자라는 일에 感激하고 마침내 맺히는 열매를 눈물어린 監査로 收穫하는, 本質的 意味의 農夫다.

    그에겐 땅에서 솟은 雜풀 하나도 虛套로 난 게 없다. 다 理由 있게 솟았으므로 제 쓸모를 알뜰히 찾아낸다. 山野草는 제철 가기 前에 뜯어 흰설탕에 재워 酵素를 만들고 일찍 떨어진 과일은 짓이겨 천을 물들이고 돋아나는 싹과 뿌리들은 찌거나 말려 나물飯饌으로 갈무리한다.

    “나는 宇宙무당이라는 말을 좋아해. 人間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日月星辰의 힘을 빌려오면 못 이룰 게 없지. 日月星辰의 힘? 나는 그게 바로 마음이라고 봐. 人間은 호르몬의 作用으로 움직이는 存在지? 사람의 感情이 바로 호르몬이거든. 氣分을 자꾸 잡치면 사람은 죽는거야. 黃土집이 암만 좋다고 떠들어도 마음이 느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지. 나는 머리와 마음이 하나 되는 게 오르가슴이라고 생각해. 내가 나니까 내 人生에 오르가슴을 느끼도록 살아줘야 할 거 아냐?”

    그는 直觀이 유난히 發達해 사람을 척 보면 周邊에 흐르는 기운을 本能的으로 感知해낸단다.

    “한番은 어떤 사람과 마주앉아 있는데 비린내가 몹시 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다는데 내 코에만 그 냄새가 자꾸 나는 거예요. 알아봤더니 그의 父母 職業이 漁夫였다는 거지. 고깃내가 유난히 나던 사람은 집에서 精肉店을 했다고 하고…. 뭔 소리냐 하면 只今까지 먹어온 飮食이 現在의 그 사람을 만들었다는 거지. 銳敏한 사람에겐 냄새로까지 느껴지는 거고.”

    김정덕 할머니에 따르면 사람에겐 食傷(食相)이란 게 있다 한다. 飮食 먹는 것을 보면 運命이 보인다는 것이다. 바른 姿勢로 밥을 먹느냐, 씹는 模樣이 어떠냐 하는 程度가 아니라 무슨 飮食을 좋아하느냐, 얼마나 貪食하느냐, 밥 먹는 態度가 飮食을 貴히 여길 줄 아느냐 같은 건데, 그게 사람의 健康과 運命에 關與한다는 게 確實하다는 主張이다.

    “사람 얼굴은 뱃속에서부터 먹어온 食品의 明細表예요. 人相學의 權威者인 시즈打 南部코도 ‘式(食)은 運命이다’라고 主張하거든. 난 이제 사람을 한番 보면 그가 먹어온 食品이 뭔지 알아요. 聽診器보다 더 正確하지. 그걸로 過去나 未來를 점칠 수도 있다고. 사람의 一生은 먹는 것에 依해 정해져요. 吉凶(吉凶), 禍福(禍福), 현우(賢愚), 需要(壽夭), 미추(美醜), 善惡(善惡)李 飮食에 依해 決定된다면 내 말을 疑心하겠지?

    난 善惡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먹을거리에 依해 善惡이 左右된다고 보는 거지. 고기 먹지 말고 穀食과 菜蔬를 먹으면 기운이 맑아져. 動物性 飮食말고도 穀食과 열매에 더 훌륭한 蛋白質이 얼마든지 들어있거든.”

    “소젖으로 엉터리 첫 키스 말라”

    ‘자연식 삶’ 연구가 김정덕

    베 자투리를 모아 옷을 만드는 일은 김정덕 할머니의 가장 큰 樂이다.

    그에게서 숱한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듣는 誹謗이기도 했지만 體驗에서 나온 覺醒과 洞察이 內容에 빛을 씌워 말에 힘이 있었다. 나는 거의 恍惚하게 이야기에 沒入했다. 먼저 아기 낳는 이야기!

    “아기가 태어나면 3~4日은 아무것도 먹이지 않는 게 原則이야. 胎줄을 짧게 자르지 말고 한 뼘 以上(13㎝쯤) 남겨두고 잘라야 해. 며칠 굶겨도 胎줄에 남은 도시락으로 充分히 살 수 있어요. 엄마 젖은 3日 뒤에 나오는 게 宇宙의 法則인데 괜히 無謀한 어른들이 배고플 거라면서 고무 젖꼭지에 소젖을 넣어 貴한 生命에게 엉터리 첫 키스를 시킨단 말이야.

    맨 처음 엄마 젖꼭지를 빨리고 初有를 먹인 아기는 머리가 明晳해지고 人間性이 좋아져요. 3~4日間 아기 배를 비워야만 뱃속에 쌓인 배내똥이 말끔히 빠지지. 낳는 瞬間 아기를 씻기는 건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지 몰라요. 아기가 子宮 밖으로 나오면 胎紙가 묻어 있는 채로 1時間40分 程度 그냥 눕혀둬야 해. 혼자 손발을 움직이면서 大宇宙와 同化하도록 기다려주는 嚴肅한 瞬間이지. 손가락 발가락을 버둥거리는 某貫運動을 통해 毛細血管까지 피가 도는 것을 스스로 感知하게 하는 거지. 1時間40分 동안 발가벗겨놓으면 卵圓孔(左心房과 右心房 사이에서 胎內 血液循環을 擔當하는 곳) 閉鎖가 빨라지면서 初生兒 黃疸도 생기지 않아요.

    그 時間이 지나면 沐浴을 시키는데, 冷水(30℃)에서 始作해서 溫水(40℃)로 바꿔가며, 얼굴만 빼고 물속에 담그기를 두 番 反復하고 끝에 冷水로 헹군 後 옷을 입혀요. 이게 아기를 제대로 받는 方法이에요. 그리고 이 모든 過程은 빛이 너무 밝지 않은, 어스름 속에서 이뤄져져야 해요. 그걸 깨버리면 새 生命에 담긴 宇宙의 調和로운 기운을 뺏길 念慮가 있지. 多幸히 내 孫子 셋은 産婦人科 醫師가 내 말에 共感해서 다 이런 方法으로 받았어요. 病院 한番 가는 일 없이, 흔한 感氣 한番 앓지 않고 총명하게들 자라고 있지. 누구든 아기 낳을 집에서 믿고 불러준다면 난 使命感을 가지고 기꺼이 달려갈 겁니다.”

    다음은 房 한 켠에 놓인 傾斜板에 關한 이야기! 그의 房엔 한쪽은 바닥에 닿고 다른 한쪽은 바닥에서 35~38㎝쯤 들린, 길이 180㎝ 幅 45㎝假量의 길쭉한 나무板이 놓여 있었다. 첨에 나는 널뛰기하는 널인가 해서 神奇하게 만져봤다. 그는 일흔 나이에도 染色하지 않은 검은 머리를 維持하는 것과 얼굴 筋肉이 아래로 처지지 않는 祕訣이 바로 이 傾斜板에 있다고 믿는다.

    “外出해서 돌아왔을 때나 疲困할 때는 이 傾斜板 위에 몸을 턱 맡기고 自然스럽게 누워요. 물구나무서기하듯 머리를 낮게 다리를 높게 놓는 姿勢는 아래로 내리누르기만 하던 脊椎와 內臟을 正常的인 位置로 安定시켜주고 얼굴이나 턱線을 거꾸로 잡아당겨 血行을 바꿔주거든. 弱해진 腹筋을 剛하게 해주고 볼이나 인후, 턱 筋肉의 피가 아래로 흘러 血液循環이 活潑해지니 顔色이 좋아지고 毛髮이 潤澤해지지.

    午後에 한 番, 자기 前에 한 番, 15分씩 하루 두 番만 傾斜板에 누워 있어도 다리는 重力에서 解放되고 血流나 組織도 徐徐히 뭉친 鬱血에서 回復되는 것을 實際로 느낄 수가 있어요. 다리보다 머리 쪽을 낮게 해서 누우면 胃下垂나 貧血, 中耳炎, 視力强化, 코골이, 頭痛에도 다 效果가 있고 腦 活動이 20%나 增加한다는 硏究結果도 나와 있지. 그리고 이게 얼마나 쉽고 簡單해? 사람은 休息을 잘해야 健康하고 健康해야 幸福해질 수 있거든요.”

    洋파 와인과 냉이씨주

    그리고 洋파 와인 만드는 方法! 洋파 와인이란 洋파를 두세 個 채 썰어 붉은 葡萄酒 한 甁에 넣고 봉했다가 2~3日 後 洋파 건더기는 건져내고 葡萄酒만 密封하는 方式으로 만들어진다. 이 簡單한 製造法의 와인은 무릎 痛症에 卓越한 效能을 發揮한다고 한다. 糖尿病 患者의 血糖을 떨어뜨리고 血壓도 正常化하며 老眼에도 效果가 있고 手足冷症, 便祕, 耳鳴도 손쉽게 고쳐진다는 것을 實際 여러 사람을 통해 證明해봤다. 봄에 먹는 냉이와 쑥이 가을에 씨를 맺으면 그 씨를 손바닥으로 훑어내 냉이氏株와 쑥氏株를 담글 것도 勸한다.

    要컨대 그에게는 森羅萬象이 다 藥이다. 우리 몸을 支撐해주는 기운, 病을 다스리는 기운이 다 땅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病이 있으면 반드시 藥도 있어요. 病이 흔하면 藥도 그만큼 흔해요. 내 몸은 내 땅에서 나온 植物로 다 다스릴 수 있다고…. 植物은 봄이면 기운이 잎사귀로, 가을이면 뿌리로 가요. 端午 移轉 쑥은 色과 香이 그윽하고 산뜻하지만 늦가을엔 땅에 묻힌 쑥뿌리를 캐서 缸아리에 꾹꾹 눌러담고 度數 높은 술을 부어 쑥株를 담가. 3個月 後에 건더기를 건져내고 진국株를 하루 한 盞씩만 마시면 지칠 줄 모르는 스태미나가 생겨. 쑥으로 만들어 맛이 쓸 것 같지만 오히려 감미로워. 色깔과 香은 조니워커 같은 건 저리 가라지. 우리집에 오는 술꾼 中 이 술 싫다는 사람은 내가 한 名도 못 봤네.

    사람들은 내게 ‘라이선스가 있느냐?’ ‘大覺(大覺)을 이루었느냐?’ 묻지만 나는 그런 데 戀戀하지 않아. 一生이 다 배움인걸. 時節마다 내 코드에 맞는 學業이 눈앞에 있어 그걸 혼자 探究했을 뿐. 그러니 라이선스가 있을 게 뭐야.”

    스물일곱에 靑孀寡婦가 되어

    그는 仁川에서 태어났다. 집은 仁川地域 乾魚物을 集散해 中國, 日本과 貿易하는 擧上이었다.

    “商人上廻라면 다들 알아줬지. 큰오빠가 日本 중앙대 法大를 나온 眞빨갱이였는데 마루 밑에 그 冊이 얼마나 쌓였어도 우리집은 뒤支持를 못했어요. 아버지는 길가에 끄나풀 하나가 떨어져도 꼭 주워오는 사람이지만 周邊에 人心을 잃지 않았거든.”

    살림살이가 넉넉하니 飮食과 옷에 奢侈를 맘껏 부렸다.

    “이만한 民魚알을 말려서 참기름 발라 먹고 民魚 대가리와 부레를 넣은 매운湯을 끓였지. 金은 論作論作하게 굽고 게를 까서 고추醬 넣고 무쳐 먹었어. 콩나물은 콩의 한 倍 半 길이로만 키워서 먹고 그때 이미 玄米를 싹 틔워 먹을 줄 알았다니깐.”

    박문소學校를 다닐 當時부터 그에겐 남들과는 다른 눈이 있었다.

    “飯 아이 얼굴을 턱 보면 像이 보여요. 엄마가 없는 것 같다든지, 집이 亡한 것 같다든지 하는 느낌이 傳해져 와. 물어보면 엄마가 分明 있는데도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런데 放學을 마치고 오면 그 아이 엄마가 죽었다는 거예요. 내가 무당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寬容察色(觀容察色)이라고, 잘 살피면 사람의 運命과 健康은 겉으로 드러나게 돼 있어요.”

    서울로 留學 와 배화고녀를 다니다 卒業 무렵 인천고女로 轉學했다. 外交官 夫人이 되길 꿈꿨다. 파티, 音樂, 드레스類의 少女다운 想像에 不過했지만. 서울대 佛文科에 다니는 오빠 親舊와 戀愛感情 비슷한 걸 나누면서 프랑스 留學을 計劃했다.

    “戀愛라고 해봤자 휘파람을 불면서 내 房 窓門 앞을 지나가면 오빠 몰래 호롱불을 들고 窓門 앞에 가서 내다보는 거지. 詩 같은 戀愛便紙나 주고받고…. 이화대학에 合格은 했는데 그 오빠가 이대는 첩딸들만 다니는 學校니 가지 말라는 거야.

    當時 헬싱키올림픽 사이클 選手로 出戰했던 임상조란 사람이 헬싱키에서 바바리코트를 사 입고 仁川에 나타났어. 얼마나 멋지던지 그 바바리코트에 反해 내가 갑자기 그 사람을 좋아했다니깐.”

    그러다 留學은 霧散되고 스물두 살에 軍 特務對에 勤務하던 將校와 結婚한다. 婚姻 前 찾아갔던 무당집에선 “봄에 갔다 가을에 올 걸 뭐하러 가?” 했지만 相關없이 婚姻은 急速度로 進行됐다. 아이 둘을 낳았고 男便은 事故로 죽는다. 그의 나이 27歲, 그야말로 靑孀에 寡婦가 된 것이다.

    “男便과는 情이 없었어. 그가 김창룡(當時 陸軍特務隊長)李 麾下에 있었는데 그때가 曺奉巖을 잡아 죽일 때였거든. 曺奉巖은 큰오빠 親舊였어요. 멋있었지. 나 어릴 때 우리집에 놀러오면 귀엽다고 내 볼에다 뺨을 비비곤 했는데…. 그 오빠를 이 사람이 죽였나 싶어 그렇게 무섭고 싫었어. 飮食을 너무 맵게 먹는 것도 惡人이라서 그렇지 싶고…. 別일 아닌 일에도 拳銃을 들이대고 해서 내가 鬱火病이 났었어.”

    이 時節을 그는 아주 詳細히 記憶한다.

    “그 사람은 少領인데 特務對 經理將校였거든. 집에 돈을 하루 한 자루씩 가지고 와. 當時는 山에서 집채만한 나무들을 베서 서울로 싣고 오는데 特務對 大將의 人家가 없으면 트럭이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週日 모으면 돈이 이런 櫃짝에 가득 차는데 土曜日이면 그걸 다 自己 아버지를 갖다줘. 나중 내가 日本에서 돌아오니 그게 다 날아가고 없어졌데….”

    ‘자연식 삶’ 연구가 김정덕

    黃土물로 두 孫子를 沐浴시키는 김정덕 할머니. 더운 여름에도 歲 孫子를 꼭 안고 잘 만큼 그의 孫子 사랑은 至極하다.

    男便이 죽자 媤집에선 財産과 함께 아이들을 데려가버린다. 그 무렵 親庭에 들렀을 때 映畫를 하나 봤다. 題目이 ‘野生女’였다.

    “수전 헤이워드와 타이론 파워가 나오는 映畫였어. 水戰이 나처럼 寡婦가 되어 墓地 앞에 섰는데 비가 내리고 어찌어찌해서 사랑이 싹트는 場面이 나와. 그걸 보고 決心했어. 3年喪이 다 뭐냐? 그건 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僞善일 뿐이다. 난 수전처럼 좋은 사람 만나 마음껏 戀愛도 하면서 살 거다!”

    “人生도 실루엣이 重要한 거야!”

    홀로 된 그를 日本 社는 큰언니가 불러들였다. 갓 서른이었다. 于先 文化服裝學院이라는, 神父授業을 主로 하는 學院에 登錄한다. 거기서 日本式 高級 敎養을 마스터한다. 衣裳 디자인, 재봉뿐 아니라 調理法, 次, 꽃꽂이, 인테리어, 에티켓을 두루 배웠다. 文化學院에서 어린 아이들 틈에 끼여 ‘名實共히 寡婦가 된’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갈급하게 빨아들였다. 勿論 길 가다 서울에 두고 온 아이들만한 또래를 만나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만큼 숨이 막혔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견뎠다.

    그는 손재주도 造形感覺度 빼어난 사람이다. 어느 날 偶然히 신주쿠에서 종이접기 워크숍을 구경한다. 커피숍에 50餘 名이 둘러앉아 畫紙(닥나무로 만든 日本 종이)로 그날의 테마인 대나무와 참새를 접는 行事였는데, 그날 모임을 主導한 이는 日本 오리加味의 代價 다카하마 都市에였다. 그 精巧한 立體와 다채로운 想像力에 한눈에 반했다.

    그날 以後 그는 冊床 한켠에 恒常 色종이를 備置하고 종이접기 광이 되었다. 종이접기에는 名匠마다 固有한 法이 있고 위(位)가 있어 盜用하면 法에 抵觸되기도 했지만 그는 혼자 自身의 法을 만들어 나갔다. 종이를 접고 있으면 萬事를 잊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던 꽃과 새와 動物이 눈앞에 나타났다. 종이를 접노라면 “숨은 다듬어지고 꿈은 이루어졌다.” 定期信保 귀本院(精氣神寶歸本源)의 三昧境을 맛봤다.

    文化學院을 다니던 中 한 美術雜誌에서 ‘當身의 재주를 테스트해보지 않으시렵니까?’란 懸賞公募를 봤다. 종이를 접어 보냈다. 시니컬한 主題였다.

    “人生을 비웃고 戱弄하는 內容이었어요. 男女 性器를 꽃처럼 접어 큰 板에다 여러 個 붙인 거였지. 난 寡婦니까 아름다운 섹스를 할 수 있는 處地가 못 된다고 떠들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그게 一等으로 當選 됐다. 副賞은 主催側인 고단샤(講談社)에서 運營하는 디자인 스쿨(美國 패이머스 스쿨의 分校)에서 2年間 無料로 工夫할 수 있는 特典이었다. 김정덕은 비로소 날개를 달았다. 디자인뿐 아니라 그래픽, 레터링, 일러스트 等 生活美術 全 分野를 배웠다.

    “날마다 하네다 空港에 스케치하러 다녔어요. 國際空港이라 2分에 1臺씩 外國 飛行機가 到着하고 飛行機 안에서 패셔너블한 國際 멋쟁이들이 와르르 내리거든. 거기 가서 사람들을 스케치해 와서 그걸 함께 評價하고 分析하는 게 工夫였어요.

    그때 우리 디자인 先生이 했던 말이 只今도 쟁쟁해요. 살다가 疲困이 몰려오거든 汽車旅行을 해라, 바느질을 꼼꼼하게 하는 건 全혀 重要하지 않다, 重要한 건 실루엣이다, 人生도 디테일이 아니라 실루엣이 重要한 거다!”

    服裝學院이 日本 滯留의 口實이었다면 패이머스 스쿨은 그를 全方位 디자이너로 키웠다. 只今 병천에서 쓰다 남은 자투리천으로 그가 만드는 치마, 바지, 저고리, 블라우스, 母子, 褓자기들…. 머리가 散亂해지거나 조금의 틈만 생겨도 들어앉아 그것들을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의 바느질 中毒症勢는 當時 몸에 밴 病통이다.

    그가 만드는 이 世上 하나뿐인 치마나 저고리의 디자인과 配色과 比例感에 나는 아주 반했다. 다 그만두고 이런 天然染色, 손바느질 옷만 만들어도 김정덕은 그 方面 最高가 될 것이다, 眞心으로 치켜세워도 그는 “돼서는 뭐하는데?” 시들해할 뿐이다.

    美國에서 종이접기 招待展

    1992年 종이접기 作品을 갖고 美國 보스턴 近處 아름다운 小都市, 렌덤의 한 갤러리에서 자그마한 展示會를 연 적이 있다. 렌덤 地方 新聞에 김정덕 오리加味 作家 招待展이 報道돼 東部 美國人들이 몰려와 그 巧妙한 종이 造形에 讚歎을 퍼붓기도 했다.

    “‘知(紙) 千年, 犬(絹) 五百年’이라고 하거든. 千年 가는 종이에 時間을 超越하는 드라마를 펼쳐내는 게 종이접기野. 다람쥐가 웅크리고 앉아 도토리를 까는데 곁에 흩어진 옥수수알 數百個를 一一이 접고 韓紙를 결 있게 훑어 껍데기를 만들고 환한 해바라기 몇 송이를 세워두는 거지. 종이접기는 精巧한 幾何學이야.

    몇 해 前 샌타모니카에 있는 建築家 프랑크 게리의 作業室에 가서 建築模型을 보고 느낀 건데 종이접기는 建築과도 恰似하더라고. 종이접기를 하면 머리가 좋아지고 늙지 않아요. 日本이나 中國의 종이접기 大家들은 거의가 90歲 넘도록 生存하지.”

    年末이 되면 그는 華麗한 行事를 벌인다. 韓紙를 染色해 다음해의 象徵動物을 접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새해 人事로 보내는 것이다. 지난해는 원숭이였고 올해는 닭이다. 닭 두 마리가 올려진 카드를 나도 뒤늦게 받았는데, 수세미를 붙여 만든 둥지와 實際 닭털을 뽑아 만든 꼬리와 紅花물을 들인 볏이 볼수록 精密하고 아름답다. 心術通을 그린 漫畫가 李楨文은 十數年째 김정덕 年賀狀을 모아 壁裝飾을 하는 中이다.

    “그이는 날더러 열일 제치고 色종이만 접으라지만 그것만 접어서 뭘 하게. 蘭 農事짓고 黃土집 普及하고 醬 담그고 지장수 만들고 酵素 만드는 게 더 急한 걸.”

    日本에서 學校 다닐 때 하루는 오빠 親舊가 만나자는 傳喝을 보냈다. 日本 에 會社를 10餘 個 가지고 있는 企業家였다. “籌板 놓을 줄 아느냐?”고 묻길래 그날부터 一週日間 籌板을 배우느라 밤을 새웠다. 난데없이 오사카에 있던 ‘城西金屬株式會社’란 肺金屬을 녹이는 會社가 그에게 맡겨졌다. 그의 配布를 오빠가 알아본 것일 게다.

    “一旦 아타미 溫泉에 房을 28個 豫約했어요. 技術者가 28名이었거든. 村놈들이니까 華麗하게 誤入을 시켜주자 생각했던 거지.”

    鐵鋼會社에서 황토방으로

    그렇게 主要 人力을 手中에 넣은 後 短時間에 도요타와 미쓰비시 같은 巨大 會社에 鐵鋼을 納品하는 會社로 키워낸다. 마침 오사카博覽會가 있어 鐵의 需要는 엄청났다.

    “내가 그때 오사카에 6代밖에 없던 하얀色 올드 모빌즈를 타고 다녔다니깐. 아침마다 鐵鋼訊問을 읽어 鐵博士가 다 됐지. 오사카博覽會에서는 納品商道 받았고.”

    그러나 그는 돈 버는 일에 큰 재미를 붙이진 못했던 模樣이다. 한 3年 熱心히 일하다 本社로 들어오라길래 그냥 辭表를 내버렸다. 黃土의 效能을 안 것은 그 무렵이었다. 鄕愁病인지 스트레스인지(그때는 아직 ‘스트레스’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퉁퉁 붓고 아파 견딜 수 없었다. 姑母가 人便에 黃土 한 더미를 보내줬다.

    “거기 손가락을 꽉 박고 있었더니 콕콕 쑤시던 게 없어지고 시원하더라고. 나중엔 아예 베개에 넣고 베고 잤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절로 그렇게 하고 싶어지더라고….”

    그 무렵 親舊를 따라 偶然히 미도리카이(綠會)라는 診療所에 가게 됐다. 親舊가 입이 비뚤어지는 症勢가 있었는데 藥 代身 附缸을 뜨고 鍼을 놓고 某官運動을 시키고 찜질팩으로 배를 따뜻하게 쬐고 닭우리만한 진흙집에 들어가 땀을 흘리는 게 治療의 全部였다.

    “日本에선 1960年代에 벌써 그런 걸 하더라고. 내가 自然療法의 巢窟로 들어간 거지. 쇼킹했어요. 나치가 사람을 죽여 眼鏡이 山처럼 쌓인 걸 본 以後 두 番째로 크게 놀란 거야. 풀밭에 앉아 꽃 따고 太陽빛을 받고 農藥 안 친 菜蔬를 汁내서 마시고 된醬과 장아찌 담그고 바느질이나 하면서 治療를 한다니…. 綠會議 모든 것이 너무 좋은 거야. 내게 內在된 어떤 것과 코드가 맞았던 거겠지.”

    綠膾가 하도 맘에 들어 鐵鋼이고 디자인이고 뒤로 밀어놓고 日本의 自然醫學 巨頭이던 니시 가즈兆 先生(書式 健康法)과 사쿠라 가와 先生(正式回)의 講義를 따라다니며 들었다. “ 元來 驛馬煞을 타고난지라” 日本 全域의 自然療法을 찾아다니고 長壽村을 涉獵했다. 우메보시(梅實에 소금을 넣고 절인 日本 飮食)란 우메보시는 다 먹어보고 所聞난 다쿠앙(가는 당근, 오이, 가지를 日本式으로 절인 것)은 모조리 찾아 맛봤다. 그러던 中 쌀겨와 玄美눈과 다시마와 쪽마늘과 찹쌀죽을 發效한 것에다 오이, 무, 가지를 박아 만드는 다쿠앙 만들기에 이골이 났고 물과 黃土와 酵素와 生菜食에 對해서도 一家見이 생겼다.

    “書式 健康法의 基本은 ‘病이 나면 스스로 고치고 平素 病나지 않는 生活을 해야 한다’였어요. 그걸 위한 法則이 硬寢(딱딱한 베개), 輕傷(딱딱한 寢臺), 消息(적게 먹기), 某官運動(바로 누워 손발을 直角으로 들고 흔드는 運動), 金붕어 運動(꼬리뼈를 붕어처럼 左右로 흔드는 것), 등배運動이죠.”

    ‘公主房’의 追憶

    15年을 日本에 머물렀다. 戀愛는 했으나 結婚은 念頭에 없었다. 두고 온 아이들, 이제 成人이 됐을 아이들 곁에 가고 싶었다. 祖父가 그 많던 財産을 다 까먹었다는 所聞도 들렸다. 歸化하라는 勸誘, 結婚 提議를 다 뿌리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70年代 中盤 韓國은 한창 土담집을 무너뜨리고 시멘트로 싸 바를 때였다. 3年을 아무것도 않고 놀리라 作定했다. 全國을 다니며 健康法 講義만 했다.

    그러다 이화여대 앞에 公主房이라는 自然食 專門食堂을 차렸다. 2歲를 낳아 기를 處女들에게 自然食 料理를 먹이고도 싶고 가르치고도 싶었다. 메뉴는 五分도(五分度) 玄米로 만든 김밥과 油腐醋밥, 쌀겨에 익힌 다쿠앙, 껍질째 빻아 만든 통밀빵과 요구르트였다.

    요구르트는 홍동에 있는 農業技術高等學校인 풀무學校 황영하 先生이 山羊젖을 醱酵해 만든 것이었다. 發效된 羊젖에 沙果잼이나 살구잼을 얹고 다시 잣이나 호두를 짓이겨 얹었다.

    “黃 先生 집에 처음 갔을 때 내가 至誠이면 感天이군, 歡呼했었지. 꿀 찾는 벌처럼 나는 사람을 찾아다녔거든. 全國에 흩어져 農事를 지으며 自己 所信을 實踐하는 貴한 사람들을! 飮食이 나오는데 보니 밥床은 통나무를 쫙 쪼개 자빠뜨린 것이고, 黃 先生 바지는 뒤가 터져 있고, 待接 세 個가 다 다른데 하나는 통밀빵, 하나는 순豆腐 같은 요구르트, 하나는 당근, 비트, 野生草 같은 菜蔬가 操作 없이 막 담겨 있었지.”

    부엌은 바깥에서 料理 過程이 훤히 보이게 만들었다. 衛生을 誇示하겠다는 게 아니라 서너 個뿐인 테이블에서 飮食을 기다리던 女學生들이 절로 調理法을 익힐 수 있도록! 줄서서 요구르트를 기다리는 學生들이 늘어났지만 結局 公主房은 얼마 안 가 門을 닫았다. 그는 너무 앞서갔다. 學生이 튀김과 콜라와 커피에 길들은 탓도 있었고 再建築되는 터에 자리잡은 탓도 있었다.

    이 무렵 KBS 라디오의 한 健康 프로그램에 固定出演했다. 거기서 主로 한 이야기가 黃土집을 짓자, 綠豆비누로 洗手瑕疵, 玄米와 통밀과 율무를 먹자, 적게 먹자, 콩나물은 제 키의 한 倍 半쯤만 길러 먹자 같은 것들이었다.

    公主房의 門을 닫고 서울 銅雀區 黑石洞 어느 절 아래서 土種 율무를 와글와글 간 것 6에 玄米가루 4를 넣고 粥을 끓여 팔았다. 元來 그 절 스님의 무릎 關節炎을 治療하려고 始作한 일이었으나 들깨가루 한 술에 누런 雪糖 한 숟갈을 끼얹어 먹는 율무粥은, 그릇 긁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周邊에서 抗議할 만큼 잘도 팔려 나갔다.

    “내가 只今도 自身 있는 게 몇 있지. 粥과 우거지국과 氷水인데 飮食店만 차리면 아마 손님이 미어터질 걸. 내가 아이디어를 줘서 食堂을 차린 집도 全國에 흩어져 있고.”

    김정덕 할머니 周邊엔 表情 맑은 사람이 유난히 많다. 그의 人生觀에 共感하는 이들이고 欲心을 버리고 自然에 묻혀 사는 이들이다.

    “가만 있어도 하늘에서 福이 내리는데 왜 똥내 나게 자꾸 欲心을 부려? 仔細히 보면 잘사는 사람은 잘살 짓만 하고, 못사는 사람은 못살 짓만 하더라고.”

    꿈꾸는 自由인

    김정덕, 그는 예전부터 自由를 꿈꿨다. 일흔 넘은 只今 스스로 거칠 것 없는 自由人이라고 自負한다. 나는 그의 豁達한 말과 거침없는 態度와 번개 같은 洞察에서 여러 番 그리스인 조르바를 聯想했다. 그에게 듣는 自由人의 定義는 ‘삶의 모든 것을 眞情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즐겁게 하며 事物에 對해 不平하지도 남의 弱點을 찾는데 時間을 浪費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逍風 映畫 冊 運動 音樂會 都市 農村 動物 산…. 世上의 어떤 것도 사랑할 줄 안다. 일부러 즐거운 척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才致 있게 受容하며 現實을 享有하는 能力을 가진 사람이다.

    直接 흙甓돌을 찍어 지은 黃土집이 세 채, 나무와 흙으로만 만들어진 이곳에서 그는 農事짓고 染色하고 바느질하고 冊 읽고 글 쓰고 종이 접고 茶 마시며 산다. 가끔 健康法을 講義하거나 相談하고 願하는 사람에겐 흙甓돌度 찍어준다. 가진 것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이다. 願하면 언제든 旅行을 떠나고 어딜 가든 親舊들이 껴안으며 반겨준다. 눈을 돌리면 世上은 祝福투성이라는 걸 그는 이미 안다. 더 부러울 게 있을까. 제 몸으로 낳은 아이들은 떠나가고 養아들 內外와 살 비비며 뒤엉켜 산다.

    “人生은 可能性이야.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아도 來日이면 새아침이 正말 오더라고. 愛憎을 없애고 텅 비워야 해. 나는 날마다 밭을 싹 갈아엎고 거름까지 뿌려놓고 잠이 들어. 來日 아침에 무슨 싹이 돋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天障에 늘어뜨린 끈을 잡고 讀者 開發한 춤을 내게 가르쳐주다 병천 黃土집 할머니 김정덕은 신명에 겨워, 比喩도 華麗하게 이렇게 말했다.



    “鶴이 千年을 사는 것은 均衡과 緊張을 잃지 않기 때문이지. 이 體操는 날 鶴으로 만들어줘. 무엇보다 世上을 사랑해야 해. 되도록이면 戀愛를 하라고. 그래야 온몸의 機關들이 웽~하고 稼動을 始作하거든. 아침이면 해가 눈부시고 새소리는 또 왜 저렇게 사랑스러워?

    날더러 젊다고 稱讚하지만 내가 噴水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지. 감자를 북북 닦다 하나가 툭 튀어나가면 쥐나 먹지 그걸 어따 써? 자배기 속에서 북북 닦여야 뽀얀 감자가 된다고! 그렇듯이 사람은 사람 속에서 서로 닦이며 살아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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