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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아시아 號令한 高句麗는 中國도 認定한 匈奴의 王”|新東亞

“東北아시아 號令한 高句麗는 中國도 認定한 匈奴의 王”

史料를 통해 본 中國의 高句麗史 編入 主張의 誤謬

  • 글: 이종호 科學國家博士 mystery123@korea.com

    入力 2003-12-29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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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國이 高句麗를 自國 邊方의 少數政權이라 主張하며 ‘高句麗 훔치기’에 나섰다.
    • 그러나 高句麗는 中國을 威脅하며 東北아시아를 號令한 北方 騎馬民族의 後裔다. 中國의 皇帝가 高句麗의 王을 中國이 그토록 警戒했던 타자(他者)인 匈奴의 王으로 여긴다는 中國 文獻이 發見됐다. 이로써 中國의 터무니없는 主張을 正面으로 反駁할 根據가 마련된 셈이다.
    “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
    中國이 尋常찮다. 中國은 高句麗가 中國의 邊方史에 包含되어야 한다면서 高句麗史(高句麗史)가 自身들의 歷史라고 主張하고 나섰다. 中國 옌볜對 류쯔民(劉子敏) 敎授는 ‘中華天下秩序(中華天下秩序)의 高句麗’라는 論文에서 高句麗는 中國의 郡縣 中에서 갈라져나간 割據政權이며, 北方 少數民族(匈奴와 그 後裔를 뜻함)의 蹶起로 形成된 分裂局面의 틈을 타서 중원의 廣大한 管轄地球를 奪取하였다고 主張했다. 그는 또 高句麗가 平壤으로 遷都한 後 韓半島 支配權을 둘러싸고 百濟, 新羅와 角逐戰을 벌였다고 했다. 中國이 南北朝 時代에 들어선 後 高句麗가 中國과는 獨立된 國家로 나아갔지만, 南北朝와 迅速(臣屬) 關係를 維持했다는 點 等을 考慮할 때 高句麗는 中國의 邊方史에 包含되는 것이 當然하다는 說明이다.

    中國은 왜 高句麗史를 노리는 것일까? 그 契機는 1997年 北韓이 ‘조선전사’를 發刊하면서 高句麗와 渤海의 歷史를 特別히 强調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中國은 이에 對한 反撥로 于先 中國 東北地方(遼寧省·吉林省·黑龍江省) 歷史學者들을 中心으로 高句麗史를 詳細하게 硏究하기 始作, 只今까지 無慮 1000篇이 넘는 論文을 發表했다.

    高句麗 壁畫 유네스코 登載로 이슈化

    執着이라 할 만큼 活潑한 硏究에도 高句麗史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 2001年 北韓이 高句麗 壁畫를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으로 登載 申請하면서 高句麗史는 다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古墳壁畫가 世界文化遺産으로 登載되면 ‘高句麗=中國史’라는 中國의 視角에 큰 打擊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中國은 北韓에 遺跡을 共同으로 登載하자고 勸誘했다. 그러나 北韓은 中國의 提案을 一擧에 拒絶했고, 이에 中國도 獨自的으로 高句麗 遺跡을 世界文化遺産으로 申請했다.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北韓 單獨 登載가 確實한 것으로 豫測됐지만 막판에 審議가 保留되었다. 이때부터 高句麗 問題는 中國의 國家的 課題로 急浮上했다.



    中國은 중국사회과학원을 中心으로 하여 ‘東北工程(東北工程)’이라는 大型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5年間 約 200億위안(藥 3兆원)을 投入할 이 프로젝트의 主要 目標는 高句麗가 中國 邊方의 少數政權임을 鞏固히 하는 것이다.

    中國이 이처럼 高句麗의 領土였던 中國 東北方을 重視하게 된 理由는 어디에 있을까. 中國이 改革·開放政策을 實施하면서 東北地域의 戰略的 價値가 높아진 건 分明하다. 따라서 中國은 朝鮮族이 살고 있는 東北地域에 對한 緣故權을 再確認하고 境遇에 따라서는 北韓 地域에까지 介入할 수 있는 歷史的 名分을 蓄積하겠다는 高度의 戰略을 驅使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中國의 이러한 歷史 歪曲은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不幸하게도 高句麗 領土 大部分이 現在 中國 땅에 屬한다는 點은 否定할 수 없다. 때문에 中國의 高句麗史 ‘脫臭’에 對應하기 위해서는 中國의 試圖가 얼마나 矛盾에 차 있는지를 積極的인 對處 論理를 가지고 밝혀야 한다.

    過去事를 正確히 알기 위해서는 論難의 餘地가 있는 時代의 事件을 正確히 把握하는 것이 最善이다. 그러나 타임머신은 存在하지 않는다. 結局 只今까지 남아 있는 飼料와 遺物을 參照해 우리 歷史를 再構成해야 한다.

    그러나 韓民族에 對한 資料가 國內에 未洽해 多分히 隣近 國家들의 史料들을 引用하는 것이 現實인데, 이 亦是 斷片的인 데다가 나라마다 編纂者의 利害得失이 엇갈려 事實과 다르게 歪曲되거나 加筆되었을 可能性 또한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肯定的인 側面도 있다고 볼 수 있다. 韓民族이 韓民族史를 記錄하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韓民族이 스스로를 曲筆하지는 않았다는 傍證이기 때문이다. 中國이 歪曲하고 있는 歷史에 對해 中國側이 作成한 史料를 통해 適切하게 對應한다면, 中國側에서 더 以上 是是非非를 따질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다. 中國과의 過去事 論爭에서 첫 단추를 잘 끼느냐 잘못 끼느냐는 中國보다 韓國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中國人들은 所謂 中國人이 아닌 民族을 모두 오랑캐라 불렀다. 特히 韓民族과 關聯되는 民族은 東이(東夷)라고 불렀다. 동이란 ‘東쪽 오랑캐’란 意味로, 古代 中國人들은 中國이 世界의 中心에 位置해 있다는 이른바 中華思想(中華思想)에 기초하여 그들의 東方에 있는 民族들을 모두 ‘東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中國이 中國人이 아닌 民族이라고 부른 동이와 中國人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把握하는 것이 重要한 問題가 된다.

    筆者는 훈族(匈奴(匈奴))의 移動經路에서 發見된 遺物과 飼料 等을 통해 ‘게르만 民族 大移動을 觸發시킨 훈族과 韓民族의 親緣性에 關한 硏究’(‘白山學報’ 第66號)와 ‘古代유럽 號令한 훈族 首長 아틸라는 韓民族’(‘신동아’ 2003年 11月號)을 통해 375年 西유럽을 攻擊, 게르만족 大移動을 觸發시킨 훈族과 韓半島 南半部의 가야·신라와의 親緣性을 提起했다. 中國과 끊임없이 競爭을 벌였던 匈奴 中 한 部類가 舒川(西遷)하여 훈族으로 成長하고, 또 한 部類가 韓半島 南部地域으로 洞天(東遷)하여 가야·신라 等을 建設했다는 것이다.

    中國은 적어도 北方 騎馬民族인 匈奴가 中國人이 아니라고 認識하고 이들을 中國에 敵對的인 勢力으로 看做했다. 그런데 伽倻·新羅가 匈奴의 一派인 훈族과 親緣性이 있다면 가야·신라보다 匈奴와 가까운 地域에 있던 高句麗는 匈奴와 어떤 關係였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中國 歷史에서 匈奴가 나타나기 前까지 主로 東夷(東夷)들이 살고 있던 東北 地域은 韓民族의 源流가 定着한 地域이자 扶餘와 高句麗의 根據地였다. 따라서 匈奴와 高句麗의 連繫를 明確히 밝히는 作業은 中國의 高句麗史 歪曲에 根本的으로 對處할 수 있는 方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匈奴란 中國 北方에서 처음으로 遊牧民 國家를 建設한 帝國의 名稱이지, 決코 單一한 民族이나 部族의 名稱은 아니라는 點을 念頭에 두어야 한다. 匈奴는 몽골-투르크족의 混合으로 推定되며, 紀元前 600年頃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鐵器를 받아들이면서 漸漸 强盛해졌다. 그러다 紀元前 4世紀부터 비로소 여러 遊牧民 部族들을 網羅하여 하나의 包括的인 騎馬民族 集合體를 構成하게 된다.

    그러나 大多數 韓國人들은 ‘匈奴’라는 이름에 拒否 反應을 일으킨다. ‘흉(匈)’은 오랑캐를 뜻하고, ‘盧(奴)’는 漢字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奴隸’란 뜻으로 그들을 蔑視하는 意圖에서 ‘匈奴’로 불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匈奴에서 흉(匈)字를, 선비(鮮卑)에서도 非(卑)字를 떼어내고 읽어야 한다는 主張이 있을 程度다.

    그러나 ‘흉(匈)’字는 ‘훈(Hun 或은 Qun)’에서 따온 淫祀이며, ‘훈’은 퉁구스어로 ‘사람’이란 뜻이다. 또 常識的으로 생각해봐도 匈奴가 ‘奴隸 같은 오랑캐’란 뜻이었다면 匈奴 帝國이 이런 이름을 容納했을 理 없다. 特히 秦나라의 뒤를 이어 들어선 한(漢)李 匈奴에게 朝貢하는 立場에서 相對를 卑下하는 뜻으로 ‘匈奴’라 稱할 수 없었을 것이다.

    匈奴에 對한 보다 說得力 있는 解釋은 高句麗 初期에 ‘나(那)’나 ‘국(國)’으로 表記되는 集團이 相當數 있었다는 點에서 類推할 수 있다. ‘나(那)’는 盧(奴) 內(內) 量(壤) 等과 同義語로, 土地(土地) 或은 水邊(水邊)의 土地를 의미했다. 高句麗의 5代 不足인 絶奴部(絶奴部) 順奴部(順奴部) 灌奴部(灌奴部, 貫那部) 消奴部(消奴部, 涓奴部)에도 匈奴와 마찬가지로 盧(奴)字가 들어 있다. 이들은 高句麗 成立 以前 鴨綠江 中流地域 附近에 자리잡은 土着勢力으로 高句麗에 征服, 融合된 것으로 推定된다.

    또한 원臺(元代)의 極 ‘工作淡(孔雀膽)’ 臺詞에 登場하는 ‘盧(奴)’나 ‘衙奴(阿奴)’의 語義를 살펴보면, 이는 男便을 指稱하는 ‘낭(郎)’이나 ‘娘子(郎子: 그대, 그이, 郞君)’의 뜻이다. 卽, ‘盧(奴)’字가 사람에 對한 呼稱으로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匈奴의 語感과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先入見은 버려도 좋지 않을까.

    漢에게서 朝貢 받은 匈奴

    匈奴를 具體的으로 說明하려면 秦始皇이 中國을 統一한 紀元前 3世紀頃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中國과 匈奴 間 本格的인 對立의 歷史는 秦始皇이 紀元前 221年 中國을 統一한 後 匈奴를 막기 위해 萬里長城을 쌓았다는 記錄부터 始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秦始皇은 天下를 統一한 지 10餘年 만인 紀元前 210年 死亡한다. 後任者인 호해가 登極했지만 곧 項羽에게 敗하고 秦나라는 滅亡한다. 項羽와 乳房이 天下를 놓고 싸운 結果 劉邦이 勝利하고 統一 中國人 한(漢)을 세운다. 當時 北쪽에 있는 匈奴는 中國을 牽制할 수 있는 唯一한 强大國이었다. 漢나라는 滅亡할 때까지 北쪽 匈奴와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怨讐처럼 으르렁거리며 지냈다.

    匈奴는 몽골 中央部인 上院(上原; 現在의 山西省 北部, 운중(雲中)에 相當하는 位置) 地域에 本營을 設置하여 鮮于(터키-몽골語에서 ‘하늘의 아들’, 卽 匈奴의 王을 뜻한다)가 直接 統治하고 左舷王과 又玄王으로 나누어 各其 東西地域을 統治하게 했다. 上院 地域은 廣闊하면서도 肥沃한 草原地域이자 東西南北 交通의 要衝地다. 匈奴를 비롯해 칭기즈칸, 突厥, 위구르 等이 모두 이 地域에 本營을 設置했다.

    劉邦은 紀元前 202年 在位 5年에 비로소 皇帝라 稱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한다. 그런데 紀元前 201年 노관이 匈奴에 投降하는 事件이 發生한다. 乳房은 匈奴가 갓 誕生한 漢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豫想하고 40萬 名의 大軍을 動員, 匈奴의 始祖인 묵특선우((冒頓單于, 紀元前 209∼174)를 攻擊한다. 그러나 紀元前 200年 乳房은 백登山에서 一週日 동안이나 包圍되었다가 가까스로 救出되는 等 온갖 受侮를 겪고 난 뒤 匈奴와 和親을 맺는다.

    當時 匈奴와 恨이 맺은 和親의 骨子는 다음과 같다. 그에 依하면 恨은 거의 匈奴의 屬國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恨의 公主를 匈奴 선우에게 義務的으로 出家시킨다(이 冠禮는 問題(文帝, 紀元前 179∼157) 때까지 繼續되었다).

    둘째, 限이 每年 술 緋緞 穀物을 包含한 一定量의 朝貢을 한다.

    셋째, 恨과 匈奴가 兄弟盟約(兄弟盟約)을 맺어 同等한 地位를 가진다.

    넷째, 萬里長城을 境界로 兩國이 서로 相對의 領土를 侵犯하지 않는다.

    이 合意는 紀元前 198年 가을, 中國 宗室의 公主가 匈奴에 到着함으로써 發效되었다. 特記할 事項은 量 調整(朝廷)에 王位 變動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婚姻으로 同盟을 갱신했다는 點이다. 또 中國이 匈奴에 내는 朝貢 額數도 恨과 匈奴 사이의 力學 關係에 따라 隨時로 바뀌었는데, 大體로 恨의 朝貢額은 每年 늘어났다. 紀元前 192年부터 135年까지 적어도 아홉 次例에 걸쳐 恨이 匈奴에 對한 朝貢額을 引上했다는 記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限이 匈奴의 屬國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否定할 수 없는 事實이다.

    恨을 匈奴의 屬國으로 만든 묵특선우는 匈奴의 全盛時代를 열었으며 우리 韓民族과 매우 密接한 關聯을 갖고 있다. 當時 동호(東胡; ‘東쪽 오랑캐’를 意味하는 漢字語. 古朝鮮 外에 扶餘, 藝脈, 眞番, 臨屯, 진국 等 다양한 國家가 있었다고 推定하는 見解가 있다)가 매우 强盛하였는데, 동호는 匈奴를 輕蔑하며 묵특의 千里馬와 蓮池(匈奴의 后妃(后妃)의 稱號)를 要求했다. 部下들이 董狐의 無禮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要求를 拒絶하라고 하자 묵특은 ‘隣接한 나라 사이에 어찌 말 한 마리와 女子를 아끼겠는가’라며 順順히 董狐의 意見을 따랐다. 當時 두 나라 사이에는 1000餘里의 荒蕪地가 펼쳐 있었는데, 동호가 이를 갖겠다고 나섰다. 臣下들은 버려진 땅이므로 주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根本이다’라며 동호를 襲擊하여 王을 殺害하고 百姓과 家畜을 鹵獲했다.

    敗戰한 동호를 代身하여 匈奴는 遊牧騎馬民族의 敗者로 떠올랐고, 묵특은 自身의 治世 동안 大大的인 征服活動을 벌여 아시아 草原에 있는 거의 모든 民族을 服屬시켰다. 그의 領土는 東으로 韓半島 北部(藝脈朝鮮을 뜻하며 司馬遷은 동호를 藝脈朝鮮이라 적었다), 北으로 바이칼湖와 이르티슈 江邊, 西로는 아랄해, 南으로는 中國의 衛戍(渭水)와 티베트 高原에 이르렀다.

    한족이 이른바 ‘匈奴 恐怖症’에서 벗어난 것은 紀元前 141年 漢나라 武帝(武帝)가 卽位하면서부터다. 괄괄한 性味의 武帝는 高祖 劉邦 以後 60 年間 持續된 屈辱的인 大(對)匈奴 宥和政策을 버리고 强勁 對應에 나섰다. 武帝는 紀元前 129年부터 紀元前 119年까지 10年 동안 여섯 次例에 걸쳐 위청과 霍去病 等으로 하여금 騎兵隊를 이끌고 匈奴를 攻擊하게 했다.

    10年間의 한·匈奴 戰爭으로 漢나라도 莫大한 損失을 입었지만 匈奴의 被害는 더욱 컸다. 武帝가 죽은 後 漢나라와 匈奴는 大略 300年에 걸쳐 共存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그後 두 나라는 모두 解體의 길을 걷게 된다. 于先 匈奴는 紀元前 57年에 東西로 나누어지고, 洞匈奴는 다시 南北으로 갈라진다. 以後 中國과 繼續 對立하다 350年 한족과의 戰鬪에서 北匈奴가 決定的인 敗北를 當하면서 匈奴는 中國의 歷史에서 사라진다.

    匈奴 便을 든 高句麗

    韓國史는 北滿洲 地域에 存續했던 예맥족界(濊貊族系)의 國家로 인정받는 扶餘(夫餘)에서 東扶餘가 나오고, 東扶餘에서 高句麗의 支配層이 된 朱蒙集團(桂婁部, 桂婁部)李 나왔다고 推定한다. 高句麗의 起源과 成立過程에 對한 記錄은 文獻마다 若干씩 差異는 있으나, 朱蒙(同名)의 建國內容(南下 및 定着)에 關해서는 大同 小異하다(‘광개토태왕비’에 追慕(鄒牟)로 되어 있다).

    그런데 特異한 點은 匈奴와 동이에 屬하는 藝脈(扶餘)의 國境이 서로 맞닿아 있는 데도 두 나라가 交戰한 記錄이 單 한군데에서도 發見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匈奴는 遊牧 生活을 하면서 氣候나 食糧供給에 問題가 생기면 곧장 掠奪에 나섰다고 推定할 수 있는데, 서로 이웃한 種族間에 衝突이 없었다는 點은 多少 異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匈奴가 동호를 擊破한 後 扶餘가 匈奴의 勢力圈 안에 屬해 있었다면 이들間에 戰爭이 없었다는 것은 오히려 當然한 일이다. 이러한 情況을 證明할 수 있는 資料도 發見됐다. 陳(秦)나라 복생(伏生)이 쓴 ‘上書臺서’에 ‘해동의 모든 彝族(夷族)들은 扶餘의 族屬이다’라는 記錄이 있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

    中國이 ‘高句麗 歷史 奪取’를 위해 高句麗 遺跡이 散在한 지린(吉林)省 지안(集安) 一帶 高句麗 遺跡을 大大的으로 整備하고 나섰다. 지안에 位置한 高句麗 廣開土大王碑.

    扶餘와 匈奴처럼 高句麗와 匈奴의 關係 또한 특별했음을 類推할 수 있는 事件이 있다. 王莽이 中國 前漢(前漢) 王朝를 罷하고 神(新, 8∼23)을 세운 後 匈奴를 征服하겠다며 高句麗에 兵力을 要請하자 高句麗는 이에 應하기는커녕 거꾸로 遼河(遼河)를 넘어 神(新)을 攻擊해 要서태수 專擔을 戰士시키고 持續的으로 王莽의 領土를 蹂躪하는 事件이 發生한다.

    汪茫은 匈奴의 一族인 休도왕의 後孫으로 中國을 멸망시키고 新(新)을 세웠으므로 匈奴도 自身의 勢力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推定된다. 匈奴는 桐·西 匈奴로 갈라졌는데, 여기서는 洞匈奴로 볼 수 있다. 汪茫은 洞匈奴가 그의 支配를 拒否하자 匈奴의 다른 一波이자 高句麗의 別種인 小水貊으로 하여금 洞匈奴를 攻擊하도록 命令했는데, 小水貊은 洞匈奴를 攻擊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망을 攻擊한 것이다.

    한便 新羅 金氏의 始祖인 金閼智가 匈奴 休도왕의 後孫이라는 것이 文武王의 陵碑文에도 적혀 있다. 여기에는 金閼智가 匈奴의 後裔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內容이 적혀 있는데, 이에 對해서는 ‘高句麗와 匈奴의 親緣性에 關한 硏究’(‘白山學報’ 第67號)를 參照하기 바란다.

    南滿洲 및 시라무렌(Siramuren) 流域에서 牧畜, 狩獵 및 粗放耕作(粗放耕作)을 하던 선비(鮮卑)는 高句麗史에서 重要한 意味를 가진 民族이다. 선비는 동호가 匈奴에게 擊破된 後 선비와 烏桓으로 分離된 다음 북중국을 統一하여 最初의 王朝를 建設한 北方 騎馬民族이다. 선비가 建立한 王朝는 全然, 後燕, 南燕, 南凉, 北緯, 同位, 西魏, 北齊, 北周 等이며 선비의 文化가 當代까지 存在했던 點 等을 미루어보아 선비가 中國 歷史에 끼친 影響은 매우 크다. 中國에서는 北方 騎馬民族이 割據하며 중원을 支配하던 時代를 5號16國(五胡十六國)時代라 부른다. 이러한 선비가 高句麗와 特別한 類緣 關係가 있는 것이다.

    歷史에서 선비와 高句麗의 特別한 關係는 여러 次例 發見된다. 于先 高句麗 儒理王 11年(紀元前 9年)에 高句麗가 선비를 擊破하고 屬國으로 삼은 일이 있다. 또 後漢 光武帝가 요동태수 채東으로 하여금 高句麗가 芙蓉(附庸)勢力化하여 支配하고 있던 선비足 一部를 策動, 高句麗로부터 離脫하게 한 일도 있다(48년). 이에 高句麗는 모본왕 2年(49年) 後漢帝國이 大匈奴 消極政策에 따라 北쪽防禦線을 華北 산서線으로 후퇴시킨 것을 틈타 厚한 領域 깊숙한 북평 어양 상곡 太原 等地를 攻擊하는 等 積極的 攻勢를 펼쳤다. 이에 唐慌한 後漢은 高句麗에게 撤收의 代價로 相當한 物質的 給付를 提供하는 同時에, 선비족 一部를 策動하여 高句麗로부터 離脫하도록 使嗾한다.

    高句麗의 太祖 大王은 더 以上의 선비足 離脫을 막기 위해 同王 3年(55)에 ‘軸夭逝十聖(築遼西十城)’이라는 軍事的 對應 措置를 取하였고 同王 69年(121)에는 선비勢力과 合勢, 한제국의 요동據點을 攻擊하여 高句麗의 軍事行動 幅을 擴大시켰다.

    鮮卑는 高句麗의 芙蓉勢力

    芙蓉(附庸)이란 元來 小國(小國) 그 自體를 의미하지만, 同時에 大國(大國)에 服屬되어 있는 狀況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帝國이 當時 解放 奴隸가 그들의 옛 主人인 自由民을 保護者(patronus)로 삼는 代身 勞役 및 軍役에 奉仕하는 不용민(clientes) 制度를 帝國의 避靜福祉 統治方式으로 採用했는데, 高句麗와 선비의 關係도 이러한 保護-從屬關係라는 것이다.

    高句麗의 支配集團은 戰爭을 主體的인 生存方式으로 認識하고 軍事力量을 提高하는 데 注力하여 戰士國家(戰士國家)化했다. 强力한 軍事力을 바탕으로 周邊勢力에 對한 軍事的 膨脹政策을 貫徹시켜 나가면서 內部的인 統合으로 政治社會的 中央集權化政策을 堅持해갔던 것이다.

    高句麗는 이런 內外 整備를 통해 後代에 들어서 ‘專制的 軍事國家’에서 脫皮, 東北아시아 一帶에서 獨自的 生存權을 確保한 하나의 帝國(empire)을 成立한다. 高句麗가 선비 等 匈奴(匈奴가 東西 및 南北으로 나뉘기 全義 匈奴를 意味)에서 派生된 遊牧國들을 自身이 意圖하는 作戰에 隨時로 動員할 수 있었던 것은 高句麗와 被征服民이 芙蓉 關係였기 때문이다.

    高句麗는 말갈 선비 거란 지斗牛(地豆于) 같은 이種族(異種族)에게 그들 本來의 共同體的 秩序와 生産樣式을 保障해주는 代價로 稅金을 받고, 特히 勞役과 軍役을 確保했다. 이를 貢納적 受取關係(貢納的收取關係)에 基盤한 俗民制度(屬民制度) 또는 異種奴隸制(異種奴隸制)라고도 한다.

    高句麗帝國은 復屬된 騎馬民族들을 有效 適切하게 驅使하였으므로 새롭게 誕生한 한족의 國家 數·黨에게 큰 威脅이 되었다. 수·糖이 高句麗와 血鬪를 벌인 것은 高句麗가 中國의 北方에 散在한 匈奴의 後裔들과 聯合하여 自身들을 攻擊할 境遇 致命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當時 수·黨은 高句麗와의 戰鬪를 한-흉노간 戰鬪로 認識했다고 볼 수 있다.

    隋나라 問題가 30萬名을 動員하고도 慘敗했음에도 그의 아들 煬帝가 또 다시 高句麗 侵攻에 매달린 것은 高句麗가 거란과 말갈족을 支配하고 있는 東北亞의 霸者이기 때문이었다. 特히 煬帝가 高句麗 侵攻을 決心하게 된 것은 607年 煬帝가 突厥 可汗의 幕舍를 訪問했을 때 때마침 高句麗 獅子와 마주친 後 高句麗와 突厥이 聯合하여 隋나라를 攻擊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推定된다. 그러므로 高句麗와 芙蓉勢力 間의 聯合을 妨害하는 것이 兩制로서는 急先務였다. 마침 高句麗의 南下를 警戒한 百濟와 新羅가 援助를 要請하는 等 侵攻 名分까지 만들어주자 隋나라는 高句麗에 對해 總力戰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隋나라는 高句麗와 말갈 聯合 勢力에게 敗退했고 唐 太宗의 攻擊 또한 無爲로 돌아갔다. 以後 歷史는 唐나라가 新羅와 聯合하여 高句麗를 멸망시키나 統一新羅와의 抗爭에서 敗北해 韓半島의 主導權을 新羅에 넘겨주었음을 보여준다.

    高句麗 王을 匈奴의 선우로 認定

    中國人들은 ‘北方 少數民族 勢力의 蹶起’였던 5號16國이 中國을 統治했다는 事實을 매우 否定的으로 認識한다. 中國人이 아니라고 여기는 北方 騎馬民族이 中國을 統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中國 東北方에 位置한 騎馬民族 高句麗는 匈奴가 東北아시아를 支配했을 때는 匈奴에 屬했으나, 漸次 獨自的인 帝國으로 發展해 匈奴가 滅亡한 後에는 東北亞의 敗者로 君臨했다. 이 같은 事實은 高句麗가 5號16國을 建設한 主導 勢力인 선비 等을 芙蓉勢力化하여 屬國으로 取扱하면서 北方 騎馬民族의 盟主 中에서도 盟主 役割을 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中國의 한 飼料가 이러한 情況을 確認해주고 있다.

    中國 中原이 오·蜀·魏 三角 關係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을 때 ‘三國志’의 主役인 吳나라 皇帝 孫權은 동천왕 7年(234), 當時 遼東半島를 掌握하면서 吳나라와 高句麗에 對해 敵對的 態度를 보인 公孫淵을 挾攻하자며 社굉(謝宏)과 陳淳(陳恂)을 高句麗에 派遣한 일이 있다. 이때 孫權은 高句麗 東川王을 匈奴의 首長을 의미하는 ‘鮮于(單于)’라 부르면서 衣服과 寶物을 함께 보냈다. 이화여자대학교 신형식 敎授의 說明에 따르면 當時 狀況은 다음과 같다.

    233年 오(吳)의 孫權이 사신 診斷, 長位, 두덕 等을 公孫淵에게 보냈다. 그러나 公孫淵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診斷과 황강 等이 달아나 高句麗의 동천왕에게 가서 自己들은 元來 孫權의 密命을 받아 高句麗로 오던 中에 風浪으로 搖動海岸에 漂流해 公孫淵의 官憲들에게 文書와 방물을 모두 빼앗기고 艱辛히 살아서 高句麗로 들어왔다고 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奸計를 모르고 그들을 吳나라로 돌려보내면서 禮物을 보냈다. 二에 吳의 孫權이 234年 獅子 社굉, 中서, 陳淳을 高句麗에 보내 동천왕을 선우에 冊封하고 禮物을 보낸 것이다(책봉이란 正式 修交(修交)의 外交的 慣例로 主從 上下 關係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三國志’의 原文은 다음과 같다.

    犬使者社굉(遣使者謝宏) 重서진순(中書陳恂)배궁위선우(拜宮爲單于) 家事衣服進步(加賜衣服珍寶)

    그러나 孫權의 政略은 失敗했다. 동천왕은 236年 吳나라 使臣의 목을 베어 位(魏)로 보냈으며 238年 위의 太尉 駟馬船왕이 遼東地域의 公孫淵을 攻擊할 때 救援兵 數千 名을 보내 支援했다. 그러나 동천왕 16年(242), 高句麗의 支援으로 搖動의 公孫淵이 滅亡했음에도 위가 遼東地域 全體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鉏安平을 攻擊하여 占領했다. 그러자 246年 위의 毌丘儉이 高句麗를 攻擊했는데 동천왕은 步兵과 騎兵 2萬으로 沸流水에서 이들을 맞아 擊破한다. 그러나 毌丘儉을 擊破한 東川王이 餘勢를 몰아 介馬武士로 武裝된 鐵器甁 5000名으로 毌丘儉을 繼續 攻掠했다가 크게 敗하여 首都인 丸都城이 陷落되는 受侮를 겪으며 高句麗 建國 以來 最大의 危機를 맞게 된다.

    高句麗는 邊方 少數勢力 아니었다

    高句麗가 아시아의 東北方에서 世界를 주름잡던 騎馬民族의 後裔라는 事實은 매우 意味深長하다. 또 吳나라 孫權이 동천왕을 선우로 認定했다는 것은 高句麗의 位相과 特性을 設定하는 데 매우 重要한 資料가 된다. 匈奴가 中國과 끊임없이 血鬪를 벌여 興亡盛衰를 겪는 동안 高句麗는 中國과 堂堂히 맞서 싸우거나 親善 使節을 交換하는 等 平和를 維持하면서 帝國의 位相을 지켜나갔다.

    中國의 天子를 自任하는 孫權이 高句麗 王을 선우라 稱하며 協力하자고 使臣을 보냈다는 것은 高句麗의 位相이 匈奴의 首長級이란 것을 意味한다. 中國의 孫權이 이미 認定하였듯, 高句麗는 中國에 從屬된 邊方 少數勢力이 아니었다. 卽 中國이 高句麗史를 中國의 邊方社로 끼워넣으려는 試圖에 源泉的인 問題點이 있음을 바로 中國人이 記錄한 史料가 提示한 셈이다.

    高句麗는 北方 騎馬民族으로 匈奴의 몽골系에 屬한다는 點에 疑心의 餘地가 없지만, 特記할 것은 高句麗가 匈奴의 여러 習俗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點이다.

    于先 積石木槨墳은 匈奴 等 北方 遊牧民들의 典型的인 무덤 樣式인데 高句麗에서는 이런 形態의 무덤이 發見되지 않는다. 積石木槨墳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어 屍體와 副葬品을 安置한 後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 흙으로 커다란 封墳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高句麗와 백제, 中國, 그리고 日本에는 없는 무덤 形態이다.

    北方 騎馬民族이 後代까지 堅持했던 殉葬(殉葬)의 習俗도 高句麗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伽倻와 新羅, 그리고 高句麗의 前身인 夫餘에서는 發見되고 있다.

    廣大한 領土에 屬해 있던 韓民族 源流들이 모두 똑같은 習俗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學者들은 그 理由를 簡單히 說明한다. 古代 中國 記錄에서는 韓民族의 源流가 居住한 地域의 民族이 예·맥·한·부여·옥저 等으로 區分되어 불렸지만, 이들은 모두 韓民族이라는 것이다. 같은 韓國人이지만 全羅道, 忠淸道, 咸鏡道 사람으로 불리는 것과 다름아니며 같은 民族이라도 地域에 따라 風習이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高句麗가 匈奴로 分類되던 巨大한 帝國 안에서 優越的인 讀者帝國을 形成했으며 習俗도 獨自的으로 維持했음을 의미한다.

    우리 古代史 硏究 强化해야

    近來 言論들이 中國의 高句麗史 ‘脫臭’에 對應해 우리 政府가 古代史 關聯 分野 硏究者들을 모아 對策을 세우고, 必要하다면 北韓과도 積極的으로 共助해야 한다고 指摘한다. 그러나 韓國史 歪曲 問題는 이番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日本의 韓國史 歪曲으로 우리가 얼마나 憤慨했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시 中國으로부터 虛를 찔렸다.

    韓國史를 歪曲하는 事件이 繼續 發生하는 데도 韓國이 適切한 對備策을 講究하지 못하는 理由는 簡單하다. 韓民族史를 큰 틀에서 硏究하고 分析하는 專門硏究機關이 없는 데다, 南北韓으로 갈라져 있는 現實 탓에 統一된 歷史조차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歷史 硏究者들은 다음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筆者는 생각한다. 短期的으로는 2004年 6月 中國 쑤저우(蘇州)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傘下 세계유산위원회(WHC) 總會에 效率的으로 對處하는 것이다. 이 會議에서 한·中 두나라가 申請한 高句麗 遺跡의 ‘所有國家’가 決定될 豫定인데, 現在 中國이 좀더 유리한 雰圍氣라고 한다. 中國에서 文化遺産委員會가 열리는 것은 勿論이요, 遺跡 規模나 整備 狀態도 北韓보다 優秀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우리 立場에서 이는 最惡의 시나리오이다. 世界文化遺産委員會 會員國들에게 高句麗가 우리의 歷史라는 事實을 明白히 밝혀 中國의 單獨 記載 試圖를 積極 沮止하는 일이 時急하다.

    長期的으로는 韓民族史를 體系的으로 蒐集·分析하고 空白狀態나 다름없는 우리 古代史 硏究를 强化해야 한다. 이를 통해 韓民族史에 對한 어떠한 問題에도 卽刻的으로 對處할 수 있는 힘 또한 길러야 한다. 北韓과의 共助가 必須的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韓民族史 硏究에 科學을 椄木시킬 必要가 있다. 古代史는 飼料와 함께 發掘되는 遺物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앞으로는 科學의 支援 없이 古代史 硏究에서 正確한 事實을 糾明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遺物 發掘과 古代史 硏究를 ‘國立科學技術硏究所’의 古代史 硏究팀 主導로 進行하는 것도 이 같은 理由 때문이다.



    中國이 高句麗史 硏究를 위해 5年間 約 200億위안(藥 3兆원)을 投入하는 現實에 비춰볼 때, 우리가 斷片的인 硏究 結果로 中國側의 物量攻勢를 이겨낼 수는 없다. 韓國도 中國에 相應하는 豫算을 投入해 專門家들이 民族史 硏究에 앞장서도록 해야 한다. 보다 많은 情報를 蓄積해야 中國 等의 歷史 歪曲에 積極的으로 對處할 方案을 導出할 수 있다. 勿論 이를 위해 우리 國民의 全幅的 支持를 이끌어내야 한다. 中國의 高句麗史 歪曲 事件을 恨民族史에 남겨진 퍼즐의 빈칸을 채우는 機會로 轉換하는 智慧가 必要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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