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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太平洋의 眞實과 虛構|新東亞

南太平洋의 眞實과 虛構

인도네시아에 발리하이는 없다

  • 권주혁 이건산업 副社長jhkwon@eagon.com

    入力 2004-09-07 15: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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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宇宙人이 만들었다는 이스터섬 모아이의 祕密은 虛構다. 얍 環礁 原住民은 돌 돈을 만들기 위해 無動力船을 이끌고 無慮 400㎞를 航海했다. 南太平洋 곳곳에 점점이 박혀 있는 섬들의 祕密은 무엇인가. 20餘 年間 南太平洋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筆者의 體驗談을 통해 그 祕密을 벗겨보자.
    筆者가 南太平洋이라는 單語를 처음 들은 것은 大學校 1學年이던 1970年代 初였다. 當時 우리나라에서는 ‘南太平洋’이라는 映畫가 旋風的인 人氣를 끌었다. 幻想的인 景致를 지닌 南太平洋의 섬을 舞臺로 한 이 映畫는 太平洋戰爭을 時代的 背景으로 삼아 美男 俳優 로사老 브라地와 美女 俳優 밋地 게이盧가 主演한 뮤지컬 映畫다.

    映畫의 原作은 太平洋戰爭 當時 美國 海軍 少領으로 南太平洋의 뉴헤브리디즈(1980年 ‘바누아투’란 國名으로 獨立函) 섬에 勤務했던 제임스 미치너가 쓴 小說集 ‘南太平洋 이야기(Tales of the South Pacific)’에 실린 短篇小說 ‘4달러(Fo’ Dolla’)’다. 映畫 全篇에 흐르는 ‘발리하이(Bali Hai)’란 題目의 音樂은 더없이 감미롭고 스크린에 펼쳐지는 景致는 限없이 浪漫的이었다. 映畫를 본 젊은 우리는 南太平洋의 섬을 地上 樂園으로 想像하게 되었다.

    筆者는 大學을 卒業한 後 合板會社에서 일하면서 20餘 年間 南太平洋의 나라들에서 勤務할 수 있는 機會를 가졌다. 業務次 太平洋 이곳 저곳에 박혀 있는 작은 섬들을 訪問하면서 見聞을 넓힌 筆者는, 太平洋戰爭의 痕跡을 追跡해 ‘헨더슨 飛行場’이란 題目의 單行本을 出刊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南太平洋에 對해 잘못 알려져 있는 것들을 바로잡고자 한다.

    칠레령人 이스터섬을 訪問하기 前 筆者는 우리나라의 雜誌와 新聞에서 이 섬을 미스터리의 섬으로 描寫해놓은 記事를 많이 읽었다. 記事는 千篇一律的으로 ‘큰 石像(모아이)을 만들 수 있는 돌이 이스터섬에는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某아이가 세워져 있는가’라는 疑問을 적고 있다.

    어떤 雜誌는 한술 더 떠서 ‘이스터섬에는 이 섬에는 勿論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도 없는 돌로 만든 石像이 櫛比하게 서있다’며, ‘이 石像은 外界人이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誇張하고 있다. 이런 雜誌들은 大槪 이스터섬의 石像은 世界 몇 代 不可思議 가운데 하나라고 主張하고 있다.



    이스터섬은 地球에서 가장 孤立되어 있는 섬 中의 하나다. 이 섬은 宗主國인 칠레와도 3700km나 떨어져 있다. 東쪽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섬인 핏캐인까지의 距離는 1900km이고, 休養地로 有名한 타히티섬과는 4050km 떨어져 있다.

    이스터섬은 밑邊이 20km, 짧은 邊이 15km인 二等邊 三角形 模樣이다. 1888年 以後 칠레의 領土가 되었는데, 現地人은 이 섬을 ‘큰 섬’이라는 뜻을 가진 ‘라파누이’라고 부른다. 3000餘 名 程度인 現地人은 섬 南西쪽에 있는 ‘港가로아’ 마을에 모여 살고 있다.

    이 섬의 名物은 앞서 말한 대로 石像(石像)인 모아이(Moai)다. 火山巖으로 만들어진 某아이는 높이가 2m에서 10m 程度인데, 이스터섬에는 只今도 1000餘 個가 넘는 모아이가 이곳 저곳에 서있거나 넘어진 狀態로 남아있다. 모아이의 遺跡을 찾아 돌아다니다 보면 이 섬에서는 某아이를 만들 수 없다는 記事는 完全 거짓임을 깨닫게 된다.

    섬 東쪽에는 死火山(死火山)인 ‘라노라라쿠’ 山이 있는데, 이 山이 바로 모아이의 製造 工場이다. 山 기슭 곳곳에는 各其 다른 模樣을 한 모아이가 놓여 있는데, 그 數가 400餘 個에 이른다고 한다. 某아이를 만든 材料는 바로 이 山에 묻혀 있는 火山巖이다. 산 到處에서 큰 火山巖을 파서 某아이를 만들다 中斷한 現場을 볼 수 있다. 만들다 中止한 모아이는 當然히 水平으로 누워 있는데, 큰 것의 길이는 21m, 무게는 50t에 이른다.

    이스터섬 사람들이 某아이를 많이 만들어 세울 수 있었던 祕訣은 라노라라쿠産의 火山巖이 무른 데 있다. 돌이 단단하지 않아 쉽게 떼어내 組閣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 說明했으면 宇宙人의 모아이 製作說은 完全 虛構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元來는 天然 洞窟이었던 곳인데 太平洋戰爭 때 日本軍이 콘크리트를 補强해 地下 防禦陣地를 만들었다. 진지 옆에는 砲彈과 爆彈에 견디도록 콘크리트로 두껍게 지붕을 만들고 그 위에 흙까지 덮은 벙커들이 있다. 只今은 벙커 위에서 자란 큰 나무들이 벙커 밑으로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있다. 벙커 앞에는 日本軍이 使用했던 탱크와 野砲들이 부서진 채로 櫛比하게 늘어서 있다.

    觀光 가이드는 觀光客들 앞에서 바로 이곳을 가리키며 ‘日本軍 最後의 司令部였다’고 說明한다. 그러나 이러한 說明은 事實이 아니다. 日本軍 最後의 司令部는 이곳에서 南쪽으로 4k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이판 防衛司令官 사이토 요시쓰구(齊藤義次) 陸軍 中將과 眞珠灣 奇襲視 日本 海軍의 機動部隊 司令官을 맡았던 나丘某 쥬理致(南雲忠一) 海軍中將은 사이判이 陷落되자 그곳에서 自決했다.

    그러나 歲月이 흐르자 日本軍의 眞짜 司令部는 잊혀지고, 觀光地 近處에 있던 陣地가 最後의 司令部로 脚光을 받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러한 일이 反復되다 보면 南太平洋에 對한 歷史 認識마저도 歪曲될 것이다. 過去의 歪曲을 풀어가면서도 한便으로는 未來가 풀어야 할 歪曲을 만들어가는 것이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이스터섬 사람들은 모아이를 라노라라쿠山에서 어떻게 끌고 내려왔을까? 이러한 궁금즘도 現場을 둘러보면 簡單히 풀린다. 라노라라쿠 山에서 잘라낸 통나무를 밑에 깔고 某아이를 올려놓은 後, 조금씩 밀고 당기며 海岸 쪽으로 내려오면 되는 것이다. 目的地에 到達한 다음에는 ‘아후(Ahu)’라고 부르는 30m 程度의 돌로 만든 바닥 대(臺)에 놓고 일으켜 세운다. 그렇게 해서 ‘宇宙에서 옮겨왔을지도 모른다’고 想像했던 巨大한 石像이 되는 것이다.

    巨大한 某아이를 아후 위에 세우는 方法도 簡單하다. 섬 住民들은 이 섬에서 自生하는 ‘하우하우’라는 灌木으로 만든 밧줄을 利用해 某아이를 세웠다. 밧줄로 묶어 모아이의 한쪽을 위로 若干 잡아당긴 後, 모아이 밑에 잽싸게 통나무를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한쪽이 들려진 모아이 밑에 흙을 퍼붓고 통나무를 살살 굴려 빼낸다. 이러한 作業을 反復하면 水平으로 누워 있던 某아이는 徐徐히 일어서게 된다.

    勿論 某아이가 直立(直立)할 때까지 繼續해서 흙을 퍼붓고 밧줄로 당길 수는 없다. 어느 程度 세워졌다고 判斷되면 밧줄을 당겨 某아이를 바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모아이 세우는 데 특별한 祕密은 없는 것이다.

    眞짜로 우리가 놀라워해야 할 것은 섬 住民들이 이렇게 많은 某아이를 세웠다는 點이다. 섬 住民들은 外敵의 侵入을 막기 위해 某아이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 目的 때문에 모아이는 하나같이 等을 바다 쪽으로 돌리고 있다.

    이스터섬의 모아이를 破壞한 것은 유럽人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某아이는 ‘이방인’인 유럽人보다는 이 섬의 不足들로부터 더 큰 受難을 받았다. 16∼17世紀 이 섬에서는 不足끼리의 싸움이 있었는데, 이때 部族들은 競爭的으로 相對便 땅에 있는 모아이를 부수거나 넘어뜨렸다.

    이스터섬에는 엄청나게 큰 滑走路가 있는 飛行場이 있다. 1989年 宇宙往復船 發射에 들어간 美國의 航空宇宙局(NASA)은, 宇宙往復船이 美國이 아니라 太平洋으로 歸還해야 할 境遇에 對備해 1500萬달러를 投資해 南太平洋 외딴 곳에 있는 이 섬의 滑走路를 幅 3300m로 擴張했다. 只今도 이 섬에는 NASA에서 지은 觀測所에 要員이 勤務하고 있다.

    이스터섬의 南쪽 部分, 卽 空港 滑走路의 東쪽 끝을 따라서 가다보면 海岸가에서 航空油를 貯藏한 큰 油類탱크를 볼 수 있다. 이 油類탱크 附近에 築臺를 쌓듯이 큰 돌을 쌓아올린 세 個의 石造物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후 비나푸(Ahu Vinapu)’라고 불리는 곳이다.

    아후는 6世紀에 처음 만들어지기 始作했는데, 元來는 성스러운 儀式을 行하던 祭壇이었다. 葬禮터나 祭祀터로 만들어진 境遇도 있었다. 住民들이 政治 行事와 宗敎意識을 行하던 中心地인 아후는 主로 海岸가에 있다. 그런데 哀惜하게도 오랜 歲月에 걸쳐 일어난 不足 싸움으로, 아후 또한 모아이만큼이나 많이 破壞되었다.

    오래 前 筆者는 우리나라의 한 雜誌에서 ‘이스터섬은 陸地와 이어져 있었다. 그 證據가 바로 아후 비나푸다. 아후 비나푸의 한쪽 끝은 바닷속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는 아후 비나푸를 이고 있던 땅이 바다로 가라앉았기 때문이다’고 쓴 記事를 본 적이 있다. 筆者는 이 記事를 생각하며 아후 비나푸를 찾아갔다가 엉터리 記事였음을 알고 크게 失望했다. 아후 비나푸의 한쪽은 바다 속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

    칠레의 考古學者 곤잘로 피구에로아에 따르면, 아후 비나푸의 築造 方法은 페루에 있던 옛 잉카帝國 遺跡地인 마추픽추의 石造物 築造方式과 똑같다고 한다. 이스터섬에는 南美大陸에서 왔다는 ‘긴 귀 不足’의 後孫과 폴리네시아에서 왔다는 ‘짧은 귀 不足’의 後孫이 17世紀에 서로 싸워서, 짧은 귀 部族이 勝利했다는 歷史가 傳해진다. 아후 비나푸는 南美大陸에서 건너왔다는 긴 귀 部族이 쌓았을 것으로 推定되고 있다.

    타히티섬은 프랑스領 폴리네시아의 中心地로 人口의 70%에 達하는 15萬名이 이 섬에 살고 있다. 이 섬 西北쪽 海岸에 있는 首都 ‘파피테’에서 西쪽으로 난 海岸道路를 따라 40km 程度 달려가면, ‘파페아리__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프랑스가 낳은 代表的인 後期 印象主義 畫家 고갱의 博物館이 있다.

    타히티에 到着한 고갱은 이 博物館 자리에서 몇 年間 作品을 만들었다고 한다. 타히티의 原色에 魅了된 고갱은 빨강·노랑·파랑의 三原色을 使用해 情熱的이고 華麗한 색면(色面) 構成 作品을 製作했다. 이러한 고갱의 畫風은 유럽의 繪畫 發展에도 큰 影響을 끼쳤다.

    博物館은 고갱이 世上을 떠난 지 62年째이던 1965年 建立됐는데, 여기에는 고갱의 作品은 勿論이고 말키저스 制度의 히바오바섬에 있던 고갱의 作業室과 고갱이 使用하던 物件이 展示돼 있다. 고갱은 이곳에서 66點의 그림을 그리고 열 個가 넘는 彫刻 作品을 만들었다. 1980年 以前까지 그의 作品 中 一部는 이 博物館에 展示돼 있었으나 全部 파리로 옮겨가고, 只今은 模造品만 展示돼 있다.

    고갱博物館에는 고갱이 日本 그림을 많이 模倣했다며, 그 證據들을 作品別로 보여주고 있다. 日本 作家가 그린 日本 女子 두 名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림 옆에는 고갱이 그린 타히티 女子 두 名이 이야기하는 그림이 있다. 두 그림은 옷과 背景만 다르지 基本 構圖가 똑같다. 이런 式으로 博物館은 고갱의 그림과 日本 그림을 比較하며 고갱이 日本 그림을 模倣하였음을 詳細히 보여주고 있다.

    筆者가 고갱博物館을 처음 訪問한 것은 1992年이다. 以後 筆者는 우리나라 畫家들이 타히티의 고갱博物館을 訪問하고 쓴 글을 여러 篇 읽어보았으나, 그 누구도 고갱이 日本 그림을 模倣하였다고 쓴 것을 보지 못했다(이미 썼는데도 筆者가 寡聞해서 읽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反日感情 때문에 고갱이 日本 그림을 模倣했다고 쓰지 않았다면 이는 옳지 못한 態度다. 現地에서 滿天下에 公開된 事實을 우리만 모르고 있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한 프랑스人 親舊에게 “고갱이 日本 그림을 模倣한 것에 對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藝術家는 山과 하늘과 바다 같은 自然物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事物에서도 靈感을 받아 作品을 만든다. 고갱이 日本 그림에서 靈感을 받아 作品을 만든 것에 對해 相關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우리도 藝術에 對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게 筆者의 생각이다.

    프랑스領 폴리네시아에 屬해 있는 소시에테 制度의 한 섬인 ‘모레아’는 타히티에서 西쪽으로 20km 程度 떨어져 있다. 타히티섬의 파피테港口에서 每日 出發하는 連絡船을 타고 30分쯤 航海하면 하트 模樣으로 생긴 이 섬 東쪽의 ‘바이아레’ 만에 到着할 수 있다.

    모레아섬에는 높은 山이 없다. 그러나 西北쪽에서 誤푸나後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山봉우리는 꽤 雄壯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 有名한 뮤지컬 映畫 ‘南太平洋’은 바로 이곳에서 撮影하였다. 以後 이 봉우리가 있는 地域은 映畫 속의 이름을 따서 발리하이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리하이는 公式 名稱이 아니다.

    발리하이는 原作인 제임스 미치너의 小說 ‘南太平洋 이야기’에 나오는 假想 섬의 이름일 뿐이다. 이곳에서 發賣되는 地圖에는 발리下이라는 地名이 나오지 않는다. 映畫 속 발리하이는 이름이 비슷한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에 자주 登場한다.

    언젠가 발리섬의 旅行 案內書를 읽다 한 호텔의 이름이 발리하이로 나와 있어, 그들의 장삿속에 失笑를 禁치 못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에 가보면, 호텔뿐만 아니라 麥酒와 遊覽船에도 발리下이라는 名稱을 使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正말 대단한 장삿속이다. 다시 한番 强調하거니와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은 발리하이와 全혀 相關이 없다. 발리하이는 미치너의 小說에 나오는 假想 섬이고, 映畫 ‘南太平洋’을 찍은 곳은 모레아섬이다.

    小說 ‘南太平洋 이야기’에는 假想 섬 발리하이가 솔로몬 群島와 바누아투 사이에 있는 것으로 描寫되고 있다. 이 섬은 周圍가 높은 絶壁으로 이뤄져 있고, 絶壁 한쪽에 아름다운 白沙場이 펼쳐져 있다. 이 小說을 原作으로 한 映畫 ‘南太平洋’은 발리하이섬에 사는 통킹 女人의 딸 ‘리앗’이, 要衝地인 헨더슨 飛行場을 占領하기 위해 美國과 日本이 벌인 과달카날 戰鬪에 參加한 美國 海兵隊 中尉 케이블과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始作한다. 映畫 속의 리앗은 케이블과 結婚하지 못하고 프랑스人 農場主 버누아와 結婚하게 됨으로써 보는 이의 心琴을 울린다.

    그러나 小說의 原作者인 미치너는 모레아섬을 모델로 발리하이를 그리지 않았다. 미치너가 발리하이의 모델로 삼은 섬은 바누아투 東쪽에 있는 ‘癌베’라는 작은 섬이다. 또 발리하이의 海岸과 絶壁을 描寫하는 데 아이디어를 준 섬은 西部 솔로몬 群島에 있는 ‘모노’ 섬이라고 한다.

    1521年 3月 마젤란의 探險隊가 西洋人으로서는 最初로 괌 南部 海岸에 上陸했을 때 그곳에는 原住民 차모로族이 살고 있었다. 차모로族은 바다 近處에서 살았기 때문에 堅固하고 빠른 카누를 만드는 技術이 發達했었다. 生鮮가시나 큰 조개 껍데기로 만든 미끼로 고기를 낚는 技術도 發達했다.

    이러한 차모로族의 文化 가운데 耳目을 끄는 것이 ‘라테 스톤(Latte Stone)’이라는 돌이다. 이 돌은 石灰巖으로 된 아랫部分과 石灰巖 또는 산호석으로 된 윗部分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라테 스톤도 우리나라에는 잘못 알려져 있는 代表的인 事例다.

    지난 1月 대한항공 飛行機를 탄 筆者는 大韓航空의 機內地 ‘모닝캄’에 나온 라테 스톤 이야기를 읽고 失笑했다. 이 記事는 ‘괌에는 무덤인지 祭床(祭床)인지 用途를 알 수 없는 라테 스톤이라는 돌기둥이 있다’고 적고 있었다. 이러한 미스터리性 記事는 讀者들에게 괌에 對한 幻想을 심어줄 수 있겠지만, 그릇된 知識을 알려준다는 問題가 있다.

    라테 스톤은 무덤도 제상도 아니다. 집을 지을 때 使用하는 돌이다. 차모로族은 通風이 잘되는 집을 짓기 위해 라테 스톤을 놓고 그 위에 집을 지어 올렸던 것이다(그림 參照). 차모로族은 라테 스톤을 海岸線과 나란히 配置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었다. 때문에 只今도 괌에 가보면 海岸線을 따라 나란히 놓여 있는 라테 스톤을 볼 수 있다.

    라테 스톤 中에는 높이가 7m에 이르는 것도 있다. 따라서 疑問을 품어야 할 것은 이렇게 큰 라테 스톤을 어떻게 옮겨왔느냐 하는 點이다. 라테 스톤은 괌섬에 있는 採石場에서 만들어져 옮겨온 것으로 推定되는데, 옮겨온 方法이 무엇이었는지에 對해서는 아직도 明確한 설이 없다.

    라테 스톤은 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이判과 티니안 等 마리아나 制度의 다른 섬에도 라테 스톤이 있다. 現在 티니안섬에는 라테 스톤 위에 만든 라테집이 있는데, 指標에서부터 지붕까지의 높이가 無慮 15m에 이른다.

    西部 太平洋에 있는 마이크로네시아 聯邦(FSM)은 美國의 信託統治를 받다가 1990年 獨立한 조그만 나라다. 이 나라는 네 個 州(州)로 構成돼 있는데, 이中 가장 西쪽에 있는 얍週는 15個의 環礁섬으로 이뤄져 있다. 人口 1萬2000千餘 名의 얍注意 中心地는 얍 環礁다.

    얍 環礁에서는 ‘스톤 머니(Stone Money)’라고 하는 큰 돌로 만든 돈(石錢)李 到處에서 發見된다. 이 돌 돈은 現地에서는 ‘라이(Rai)’라고 불리는데, 돌 돈은 實際 貨幣로 使用됐다고 한다. 只今 마이크로네시아의 公式 貨幣는 美國의 달러지만, 땅을 사고 팔 때나 이웃과 補償問題를 解決할 때는 如前히 돌 돈을 貨幣로 使用한다.

    돌 돈은, 直徑 70cm, 가장자리 두께 3cm 程度의 작은 것에서부터 直徑 4m, 두께 30cm에 이르는 큰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種類가 있다. 돌 돈 中에는 中心部와 가장자리의 두께가 같은 것도 있으나, 普通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가장자리를 얇게 만들었다(중심부는 가장자리보다 2∼4倍 두껍다). 이러한 돌 돈은 통나무를 끼워서 運搬하기 좋도록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第2次 世界大戰 前 이 섬은 日本의 支配를 받았다. 日本이 統治하던 1929年 얍 環礁에는 1萬3000餘 個의 돌 돈이 있었다고 한다. 歲月이 가면서 많이 부서져 그 數가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只今도 적잖은 돌 돈이 집 밖이나 마을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처마 밑에 놓여 있는 돌 돈은 그 집의 部(富)와 主人의 社會的 身分을 보여주는 證票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돌 돈을 만든 돌을 얍 環礁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點이다. 이 돌은 400km 西쪽에 떨어져 있는 팔라우 諸島 한가운데 있는 ‘바위 制度’에서 카누에 실어 運搬해온 것이다. 얍 環礁의 原住民은 옛날부터 三角 돛을 단 아웃離居(outrigger : 慶州用 倍) 카누를 타고 멀리 航海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들은 카누를 타고 마리아나 制度나 팔라우 諸島·南部 日本·캐롤라인 諸島의 東쪽 섬·뉴기니섬의 北쪽까지 가서, 珍奇한 조개껍데기를 가져와 貨幣로 使用하였다.

    얍 住民들은 카누를 타고 400km 떨어진 ‘바위 制度’로 가, 石灰巖 採石場에서 큰 돌을 잘라냈다. 그리고 물을 부어가면서 클램 조개껍데기로 문질러 돌 表面을 加工하였다. 當時에는 좋은 연장이 없었으므로 여러 名이 달려들어도 돌 돈 한 個를 만드는 데 一年餘의 歲月이 걸렸을 것으로 推定된다. 이렇게 만든 돌 돈을 카누에 싣고 이들은 얍 環礁로 되돌아왔다.

    普通 크기의 돌 돈은 카누에 실어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아주 큰 돌 돈은 카누에 실을 수 없다는 問題가 있다. 이때는 대나무나 아주 가벼운 木材로 뗏木을 만들고 그 위에 돌 돈을 실었다. 그리고 海流가 팔라우 諸島 쪽에서 얍 環礁 方向으로 흘러갈 때를 擇해 뗏木을 띄워 보냈다. 이中에는 얍 環礁에 到達하지 않은 뗏木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運 좋게 얍 環礁 海岸에 到着하면 젊은이들이 달려가 마을로 運搬하였다.

    400km 떨어진 섬까지 가서 돌 돈을 만들고, 그 돌 돈을 싣고 얍 環礁로 돌아오는 것이 可能할까. 얍 環礁 附近의 바다는 每年 6月이 가장 잔잔하다. 1992年 6月 얍 環礁의 住民 여섯 名은 先祖들이 바위 制度에서 돌 돈을 만들어왔다는 것을 立證하기 위해 길이 10m의 카누에 돛을 달고 얍 環礁를 出發해 3日 만에 바위 制度에 到着하였다. 그리고 한 달 동안 現代式 道具를 使用해 돌 돈 세 個를 만들어 카누에 싣고 다시 얍 環礁로 돌아온 바 있다.

    통가王國은 南太平洋에서는 唯一한 立憲君主國이다. 이 나라는 피지 東쪽에 200餘 個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首都인 ‘누쿠알로파’가 있는 빈대떡처럼 平平하게 생긴 ‘통가타푸’ 섬 東쪽 끝 海岸에는, ‘하몬街마우이’라고 불리는 三石塔(三石塔)이 있다.

    三石塔은 곧게 선 두 돌 위에 한 個의 돌을 얹어 놓은 模樣이다. 塔은 西紀 1200年쯤에 세워졌는데, 靑銅器時代에 세워진 英國의 스톤헨지와 그 模樣이 恰似하다. 三石塔의 높이는 5m이고, 밑바닥 긴 面의 길이는 4m에 達한다. 돌 하나의 무게는 30t 程度일 것으로 推定된다. 三石塔을 이루고 있는 돌은 珊瑚 石灰巖인데 이 돌은 통가타푸 섬에서 나오지 않는다.

    三石塔을 만든 珊瑚 石灰巖은 통가 制度의 다른 섬에 있는 바닷가에서 發見된다. 珊瑚 石灰巖은 모래와 조개 껍데기 그리고 海岸 土壤의 成分이 칼슘 카보네이트에 依해 오랜 歲月 동안 단단하게 뭉쳐진 것이다. 이러한 바위는 모래沙場과 바다가 만나는 水面 바로 밑에 形成되는데, 그 두께는 普通 30cm에서 1m에 이르고 있다.

    運搬 手段이 변변치 않았던 13世紀, 通加人들은 어떻게 이 돌을 통가타푸 섬으로 옮겨왔을까. 모아이를 製造하고 運搬해온 것이 더 以上 미스터리가 아니듯이, 三石塔을 만든 수수께끼도 하나씩 풀리고 있다.

    珊瑚 石灰巖은 단단한 層과 부드러운 層이 交叉해 있는 것이 特徵이다. 따라서 부드러운 層에 衝擊을 주면, 단단한 層을 分離해 떼어낼 수가 있다. 옛날 통가의 石工들은 이웃 섬에서 珊瑚 石灰巖을 發見하면 그 가장자리를 15∼20cm 幅으로 파내려 갔다. 그리고 단단한 層이 끝나고 부드러운 層이 나타나면, 크고 단단한 조개나 나무로 만든 지렛대를 넣고 용을 써 바위를 떼어냈다.

    이렇게 떼어낸 다음에는 分離한 돌 밑으로 줄을 집어넣고 두 隻의 카누로 하여금 줄 兩쪽을 붙잡고 있게 한다. 이러한 일은 海岸가의 珊瑚 石灰巖이 물 위로 드러나는 썰물 때 이루어졌다. 그리고 밀물이 들어와 카누가 떠오를 때 줄을 잡아당기면, 바위는 浮力을 받아 위로 들려진다. 이렇게 들어올린 바위를 끌고 살살 통가타푸 섬으로 카누를 몰고와, 願하는 石塔을 만든 것이다(그림 參照).

    그러나 通加人들이 三石塔을 세운 理由는 正確지 않다. 最近에는 옛날 通加人들이 夏至와 冬至를 알기 위해서 三石塔을 만들었다는 學說이 나왔다. 通家는 南緯 15度에서 23度 사이에 있어 옛날에는 夏至와 同志를 正確히 區分해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古代 通加人들은 그들의 主食인 얌을 夏至에 맞춰 收穫하고 잔치를 열었다. 따라서 夏至와 同志를 區分하기 위해 三石塔을 세웠다는 學說이 나왔으나 아직 定說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第1次 世界大戰이 일어나기 前 美國領인 괌섬을 除外한 마리아나 制度는 獨逸令이었다. 第1次 世界大戰이 일어나자 聯合國의 一員이었던 日本은 재빨리 獨逸令 마리아나 制度를 掌握했다. 마리아나 諸島에서 가장 큰 섬이 사이판인데, 1934年 日本은 사이判 섬 南쪽의 雅瑟吏吐(Aslito)에 軍用 飛行場을 만들었다.

    日本 海軍 機動部隊가 眞珠灣을 奇襲한 1941年 12月8日 바로 다음날 새벽, 雅瑟吏吐 飛行場에서는 새벽 空氣를 가르며 20餘 臺의 日本軍 航空機가 離陸했다. 午前 6時, 이 航空機는 美國領인 괌 上空에 到達해 下갓냐 市內와 港口를 爆擊했다. 마리아나 制度에서도 太平洋戰爭(第2次 世界大戰)李 勃發한 것이다.

    60年 前 美國領인 괌을 爆擊하기 爲해 日本 戰鬪機가 離陸했던 飛行場이 오늘날에는 사이判의 國際空港이 되었다. 사이判을 訪問하는 讀者들은 國際空港 滑走路 東쪽 끝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日本軍이 만들어놓은 防空壕 윗部分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944年 6月15日 午前, 海兵隊 第2師團과 第4師團, 陸軍 第27步兵師團을 主力으로 한 美軍 6萬7000餘 名이 日本軍의 海岸 防禦網을 뚫고 사이판 西南部 海岸에 上陸하였다. 사이判섬에는 第43步兵師團을 主軸으로 한 3萬2000餘 名의(해군 6200名 包含) 日本軍이 있었다. 日本軍은 決死的으로 抵抗했으나 戰車 48臺와 砲兵隊를 效率的으로 配置하며 攻擊하는 美軍에 敗退해 섬 北쪽으로 後退하였다.

    사이판 北端에 있는 말피串으로 가기 直前 길 오른便 언덕엔 當時 激戰을 치르며 犧牲된 젊은 靈魂을 慰撫하는 慰靈塔 軍(群)이 있다. 이 慰靈塔 中에는 1981年 10月1日, 海外 犧牲同胞追念事業會와 사이판 韓人會가 協助해 세운 ‘太平洋 韓國人 慰靈平和塔’도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그 옆으로 오키나와人과 日本人 慰靈塔이 서있다. 慰靈塔 뒤 絶壁으로 된 언덕에 日本軍이 쓰던 地下 陣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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