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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難에 빠진 尹氏, 수지킴 家의 죽음, 安企部의 人格殺人|新東亞

女難에 빠진 尹氏, 수지킴 家의 죽음, 安企部의 人格殺人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on@donga.com

    入力 2004-11-15 1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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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2의 申相玉-崔恩喜 拉致 事件이기를 期待했던 安企部 ● “尹氏는 北韓大使館에서 脫出해 온 것이 아니라, 美國大使館에서 데려왔다” ● 事件 當時 北韓大使館은 犯行을 夫人,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 싱가포르 駐在 外交官들은 尹氏의 行跡을 疑心, 安企部 職員들과 葛藤 ● 安企部가 尹氏 記者會見을 열라고 하자, 李長春 臺詞가 決死 反對 ● “尹氏는 安企部 調査에서 橫說竪說한다는 理由로 相當히 맞았다.” ● 眞實을 알고도 隱蔽한 情報機關, 金女人의 人權을 放棄한 安企部 ● “安企部와 홍콩 警察의 對北 커넥션이 尹氏 搜査를 막았다.” ● 尹氏는 放送社 PD, 矯導所 敎化活動家 等 여러 女性과 同居 및 結婚 ● 尹氏는 女性의 도움으로 일어나, 그 女性과 葛藤을 빚으면 헤어졌다. ● 尹氏, 臺灣 女歌手의 도움으로 上海 浦東地區 分讓事業 펼치기도 ● 尹氏, 某 言論社 社長의 도움으로 指紋認識시스템 開發 會社 引受 ● 尹氏 會社는 한때 前職 經濟部處 長官을 會長으로 迎入했다. ● 金女人 오빠의 悲劇的인 죽음, “나와 우리 家族은 正말 抑鬱하다” ● 法律的인 觀點에서만 본다면 尹氏는 無罪로 釋放될 可能性이 높다. --------------------------------------------------------------------------------------

    刑法 第250條는 殺人罪의 公訴時效를 15年으로 規定하고 있다. 殺人할 意圖를 갖고 사람을 죽였더라도 15年 동안 搜査機關을 잘 避해다녀 起訴되지 않으면, 그는 ‘合法的으로’ 罰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公訴時效 滿了를 두 달도 남기지 않은 時點에 서울地檢 外舍部(박영렬 部長檢事)에 依해 殺人罪로 起訴된 ‘不幸한 사나이’가 있다. 輪對職(假名·43)氏가 바로 그 張本人. 檢察이 作成한 公訴狀에 따르면 尹氏가 殺人을 한 것으로 疑心되는 時點은 只今으로부터 거의 15年 前인 1987年 1月2日부터 3日 사이다.

    尹氏는 決코 單純한 殺人 容疑者가 아니다. 起訴되기 前 그는 ‘未來의 빌 게이츠’로 불릴 程度로 注目받는 벤처事業家였다. 그가 이끄는 會社는 經濟部處 長官을 지낸 李某氏를 會長으로 모셨다(현재는 退職). 그의 會社는 指紋認識이라는 新技術을 開發해 왔는데, 이 技術에 注目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 技術로 인해 그는 여러 次例 國內 言論에 報道됐고, CNN과 AP 等 外信에도 報道됐다. 이 벤처事業家가 殺人嫌疑 時效 滿了를 채 두 달도 남기지 않은 時點에서 起訴된 것이다.

    殺人罪 時效 滿了 51日 前에 起訴

    來年 1月3日만 되면 永遠한 自由인(無罪)이 될 수 있었을 尹氏는 왜 殺人嫌疑로 起訴된 것일까. 尹氏 事件에는 5共 時節 서슬이 시퍼렇던 安企部의 威勢가 숨어 있다. 安企部와 關聯된 韓國 現代史의 어두운 그림자가 尹氏 事件을 덮고 있는 것이다. 暗鬱했던 韓國 現代史와 連結돼 있는 尹氏 事件의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해, 記者는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取材手帖을 다시 열었다. 尹氏 事件과 記者는 不可分의 關係에 있다. 尹氏 事件이 일어나기 直前의 韓國 現代史를 살펴보자.



    尹氏 事件이 일어나기 두 달 보름 前인 1986年 10月14日 신민당의 兪成煥(兪成煥) 議員이 “88서울올림픽에 東歐國家를 參與케 하려면 우리의 國是(國是)는 反共이 아니라 統一이어야 한다”고 主張해 큰 波紋을 일으켰다. 1986年 5月3日 仁川에서는 大規模 勞動者 示威가 있었는데(5·3 仁川事態), 政府는 背後者로 문익환(文益煥) 牧師를 指目해 執匙法 違反 嫌疑로 拘束했다. 文牧師 事件은 1986年 下半期 韓國의 핫이슈가 됐다. 文牧師 拘束과 柳議員의 國試 發言은 韓國社會가 權威主義的인 5共의 終末을 告하고 民主化로 가는 巨大한 陣痛의 始作이었다.

    그 이듬해인 1987年 1月14日 治安本部 對共搜査團 남영동 分室에서는 서울대生 박종철(朴鍾哲)君이 拷問을 받다 死亡한 事件이 일어났다. 박종철君 拷問致死 事件이 民主化의 洑물을 터뜨렸다. 그해 6月 韓國은 民主化運動으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전두환(全斗煥) 政權은 마침내 6·29宣言을 發表한다.

    尹氏 事件은 民主化勢力과 權威主義 政權勢力이 勝敗를 가리지 못하고 尖銳하게 對立하던 時點에 일어났다. 北韓에 拉致됐던 申相玉(申相玉)·최은희(崔銀姬)氏 夫婦가 1986年 3月13日 오스트리아 빈 駐在 美國大使館으로 劇的으로 脫出해 왔다. 申相玉·崔恩喜氏 脫出事件은 南北對決을 핑계로 政權을 再創出하려 한 權威主義 政權의 ‘防牌’가 됐다. 이러한 事件이 또 한番 일어난다면, 權威主義 政權이 政權을 再創出할 수 있는 可能性이 그만큼 높아진다. 當時 國家安全企劃部(安企部)는 對北工作은 勿論이고 政權 再創出을 위한 國內 政治工作에도 깊이 關與하고 있었다. 尹氏 事件은 이러한 政治的 構圖에서 發生했다.

    尹氏 事件은 北韓 工作組織에 依한 尹氏 拉北 未遂事件을 말한다. 이 事件은 서울地檢 外舍部가 推定한 김옥분氏 被殺 時點(1987年 1月2日)으로부터 6日째 되는 1987年 1月8日子 國內 新聞을 통해 처음 報道되었다. 國內 新聞은 1面 或은 社會面 사이드 톱으로 ‘홍콩 僑民(尹氏를 指稱), 拉北中 劇的 脫出’ ‘우리 商社員(尹氏), 拉北中 劇的 脫出’ “살아서 돌아온 게 꿈만 같다” 等의 題目을 붙여 尹氏 事件을 報道했다.

    (注: 이때 尹氏는 殺人 嫌疑를 全혀 받지 않은 때라 實名과 함께 그가 關係한 會社 이름 等이 全部 公開됐다. 지난 11月13日 서울地檢 外舍部는 尹氏를 起訴하면서 연 記者會見에서 尹氏의 實名과 그가 關係한 會社 이름을 公開했고, 言論 亦是 事實대로 적었다. 그러나 現在 尹氏는 被疑者 身分이므로 여기에서는 假名으로 表記한다. 그와 관계된 사람과 그가 關係한 會社 이름도 이니셜로 處理한다).

    포트빌 포트가 19番地

    當時 言論에 報道된 北韓의 尹氏 拉北 祈禱 未遂事件을 詳細히 살펴본다.

    法人 設立後 尹氏는 事業資金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金女人이 日本의 親舊에게서 빌려왔다며 500萬엔(當時 換率로 約 4000萬원)을 주었다. 尹氏는 이 돈으로 홍콩 駐在 韓國總領事館이 들어 있는 코리안센터(韓國大廈) 103號에 ‘유나이티드 모션 픽쳐’의 事務室을 準備했다. 이 事務室은 1987年 1月15日 開業할 豫定이었다.

    金女人이 尹氏에게 事業資金을 提供한 것은 尹氏의 事務室을 韓國 總領事館에 接近하는 據點으로 活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창 事務室 開業을 準備하던 1987年 1月2日 日本에서 온 朝總聯 工作員 두 名이 尹氏의 아파트로 찾아와, 金女人을 데리고 事業 이야기를 하겠다며 金女人과 房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다른 房에 있던 尹氏를 불러 담배를 사다 달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尹氏가 담배를 사갖고 돌아오니 세 사람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1月3日) 사라졌던 朝總聯系 男子 한 名이 아파트로 찾아와 尹氏에게 “金女人이 負債를 갚지 않아 싱가포르로 데려갔으니, 當身이 싱가포르에 와서 代身 負債를 갚겠다는 覺書를 쓰고 夫人을 데려가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尹氏는 夫人을 찾아올 생각으로 그 다음날(1月4日) 유나이티드 에어(UA) 805篇을 타고 싱가포르 空港에 到着했다. 싱가포르 空港에는 한 女人이 尹氏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마중나와 있었다. 金女人의 親舊라고 自身을 紹介한 이 女人은 尹氏를 샹그리라(Shangri-La) 호텔로 案內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月5日 이 女人이 샹그리라 호텔로 尹氏를 찾아와 ‘포트빌 포트가(街) 19番地(19 Fortville Fort Rd.)’라고 씌어 있는 쪽紙를 주며 찾아가라고 했다. 이 住所地로 찾아가자, 그곳에는 北傀大使館이 있었다. 北傀大使館임을 確認한 尹氏가 들어갈 것을 망설이자, 안에서 그 女人이 나타나 들어오라고 해 따라들어갔다. 이 女人은 北傀大使館 公館員의 夫人으로 보였다. 北傀大使館 안에서 尹氏는 리창用이라고 하는 北傀 大使代理를 만났는데, 리창用은 이렇게 脅迫했다.

    “夫人을 만나려면 平壤에 가야 한다. 그前에 當身은 遺稿로 가서 우리 案內員을 만나 스위스로 가라. 그리고 스위스에서 ‘나는 서울에서 事業을 하며 문익환 牧師와 유성환 議員에게 政治資金을 提供했다. 그런데 檢察이 두 사람을 拘束하고 搜査를 擴大해 홍콩으로 避身해 있다가 이렇게 政治 亡命을 하게 된 것이다. 最近 西方으로 脫出한 申相玉·최은희는 南朝鮮에서 殺害되었다’고 밝혀라.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夫人을 만날 수 없고, 韓國에 있는 當身의 家族도 죽는다. 우리의 要求를 받아들이면 夫人을 다시 만날 수 있고, 홍콩에서의 事業資金度 支援해 주겠다. 脫出할 생각은 아예 말라.”

    이러한 脅迫을 받고 나온 尹氏는 宿所를 좀더 작은 콕피트(Cockpit)호텔로 옮기고, 다시 리상용 北韓 大使代理를 만나 유고行 飛行機를 豫約하러 旅行社에 갔다. 그러나 票가 없어 사지 못하고 호텔로 되돌아왔다. 그러다 그날 午後 監視가 疏忽한 틈을 타 尹氏는 콕피트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韓國大使館으로 脫出했다.>

    北韓大使館은 犯行 否認

    尹氏의 夫人 김옥분은 尹氏보다 여섯 살이나 많지만 體軀가 작고 예쁘장했다. 一部 言論은 이런 事實에 注目해 北韓이 美人計를 써서 尹氏를 拉致하려 했다고 報道했다. 韓國 政府는 이러한 報道를 眞實로 믿은 것으로 보였다. 外務部의 김흥수(金興洙) 代辯人이 “過去 北傀는 映畫俳優 윤정희(尹靜姬)氏 拉致 祈禱, 申相玉·崔恩喜氏 拉致 等 수많은 不法 拉致를 恣行했다. 이러한 非人道的이고 野蠻的인 行動을 卽刻 中斷하라”는 論評까지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 駐在 北韓大使館은 全혀 달랐다. 北韓大使館은 “尹氏의 主張은 거짓말이다. 우리는 어떠한 犯罪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主張했다(당시 新聞 報道). 하지만 北韓의 主張에 關心을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尹氏가 싱가포르 主宰 韓國大使館으로 脫出해온 것은 1月5日 午後高, 國內 新聞이 尹氏 事件을 報道한 것은 1月8日이다. 이 3日間 尹氏는 싱가포르 韓國大使館에서 여러가지 調査를 받았다. 尹氏 事件에는 北韓이 介入해 있었으므로 當然히 安企部도 調査에 參與했다. 그런데 尹氏 調査에 參與했던 外務部 職員들에 따르면 이 3日 동안 싱가포르 大使館에서는 安企部와 外務部 職員들 사이에 엄청난 意見 對立이 있었다. 하지만 言論은 이러한 事實을 全혀 눈치채지 못했다(외무부와 安企部 職員間의 對立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尹氏가 韓國에 들어오기 前인 1月8日 安企部는 尹氏를 泰國의 방콕으로 데려가고, 홍콩에 있는 韓國 特派員들을 방콕으로 불러 尹氏 記者會見을 가졌다. 安企部가 尹氏에 對한 記者會見을 한다면, 常識的으로 記者會見지는 事件 發生地인 싱가포르여야 한다. 그런데 安企部는 방콕으로 옮겨 記者會見을 연 것이다. 이에 對해 싱가포르大使館에 勤務했던 外交官들은 하나같이 “이장춘(李長春) 大使를 비롯한 外務部 公務員들이 尹氏 記者會見을 싱가포르에서 여는 것을 反對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방콕에서 열린 記者會見에서 尹氏는 “北傀의 리창龍 大使代理는, 이름을 ‘현정길’로 바꾸고 外出時에는 眼鏡을 끼고 다니고 鬚髥을 길러 日本人 行世를 하라고 要求했다.” “當身(尹氏)은 이미 우리 돈을 썼고 우리 祖國에 왔으니 서울에 가도 죽는다고 脅迫했다.” “韓國에서 요즘 벌이고 있는 平和의 댐 建設 募金에 對해 (리창用은) 돈 없는 政府의 人民 搾取라고 誹謗했다.” “그들은 내 妻家 地上樂園人 平壤에 있다고 말했다. 내가 妻의 所在地가 어째서 日本·싱가포르·平壤 等으로 종잡을 수 없냐고 묻자, 그들은 未安하게 됐다고 얼버무렸다”고 말했다.

    1月9日 서울 金浦空港에 到着한 尹氏는 貴賓室에서 또 記者會見을 갖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反共(反共)의 참 意味를 理解 못했는데, 이番 일로 反共은 바로 나 自身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事實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鬚髥을 깎지 않은 텁수룩한 모습으로 記者會見을 한 尹氏는 會見 내내 오른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記者들이 “왜 가슴을 문지르는가”라고 묻자, 尹氏는 “그동안 너무 恐怖에 질려 心臟이 울렁거린다”고 對答했다. 이날 記者會見을 끝으로 尹氏 拉北 未遂事件에 關한 記事는 新聞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尹氏가 서울에 到着한 날로부터 17日째 되는 1月26日, 김옥분氏가 尹大職氏와 함께 살았던 홍콩 침사推移 감파리도(道) 러푸아파트(樂福大廈) 9層 13-A湖의 안房 寢臺 밑에서 목 졸려 숨진 屍體로 發見되었다. 金女人은 얼굴에 베개 커버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목 部分이 旅行用 가방을 묶는데 쓰는 끈으로 졸려 있었다. 홍콩 警察은 死亡 原因을 絞殺(絞殺, 목을 졸라 窒息死시키는 것)로 判斷했다. 金女人은 옷을 입은 채였고, 집안에는 侵入한 痕跡은 없었다. 1月27日子 國內 言論은 ‘拉北 未遂事件 輪對職氏 妻 김옥분 女人 홍콩서 被殺體로 發見’ ‘홍콩의 아파트 寢臺 밑에서’ ‘홍콩 警察 2週 以前에 他殺된 것으로 推定’ 等의 題目을 붙이고 다음과 같이 報道했다.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에 덮혀

    尹氏의 陳述대로라면 金女人은 홍콩을 떠났어야 하는데 그女는 自身의 旅券과 함께 尹氏와 살던 아파트에서 被殺體로 發見되었다. 그렇다면 北韓 工作組織(或은 朝總聯 組織)은 尹氏가 金女人을 찾아 싱가포르로 出發한 後에 金女人을 죽여 아파트로 옮겨놓은 것일까? 北韓 工作組織이 金女人을 죽인 것이 事實이라면, 이들이 金女人을 죽여야 했던 理由는 무엇일까. 尹氏 拉北 未遂事件을 크게 報道한 言論들은 金女人 被殺事件에 對해 갖가지 疑問을 提起했다.

    金女人이 被殺된 以上 尹氏를 데려온 安企部는 韓國 및 홍콩 警察과 協助해 金女人 被殺 部分에 對해 搜査했어야 한다. 그러나 尹氏에 對한 제대로 된 搜査는 全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事件에 對해 疑問을 提起했던 言論이라도 追跡에 나섰어야 하는데, 言論마저도 後續 報道를 하지 않았다. 이로써 尹氏 拉北 未收 및 金氏 被殺事件은 사람들의 腦裏에서 까맣게 잊혀지게 되었다. 이 事件이 잊혀지게 된 것은 當時의 時代狀況 때문인 것으로 推定된다.

    金女人이 被殺體로 發見되었다는 記事가 있기 11日 前인 1月16日 동아일보는 서울대生 박종철 君이 治安本部 對共分室에서 고문받다 死亡했다는 것을 特種報道했다. 이 報道를 契機로 民主化勢力과 權威主義政權은 熾烈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해 4月13日 5共 政府는 “13代 大統領 選擧는 現行 憲法에 依해 間接選擧로 하겠다”는 內容의 ‘4·13護憲(護憲)措置’를 發表했다. 이에 對해 民主化勢力은 直選制로의 改憲(改憲)을 要求하며 大規模 示威에 들어갔다. 이 示威 途中 연세대生 이한열(李韓烈)君이 警察이 쏜 催淚彈에 맞아 死亡하자, 事態는 걷잡을 수 없이 擴大돼, 그 有名한 6月 市民鬪爭이 展開되었다. 친(親)정부적인 言論을 除外한 絶對 多數의 言論은 紙面을 통해 民主化勢力을 支援하느라 精神이 없었다. 尹氏 拉北 未遂 事件과 金女人 被殺事件은 이러한 時代 雰圍氣 속에서 쉽게 잊혀졌을 可能性이 높다.

    事件이 發生한 時點으로부터 滿 8年 4個月이 지난 1995年 5月 初 한 先輩 言論人으로부터 搖動치는 韓國 現代史 속에 묻혀버린 이 事件을 取材해 보라는 귀띔을 받았다. 1987年 1月, 記者는 4學年 進級을 앞둔 大學 復學生이었다. 따라서 웬만한 事件은 記憶할 수 있는데,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이 事件은 기억나지 않았다. 1987年 當時 이 記事를 썼던 홍콩 特派員들도 “그런 記事를 쓴 것 같은데, 너무 오래돼서 記憶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할 程度로, 이 事件은 까맣게 잊혀져 있었다.

    美國大使館에서 “데려가라” 連絡

    記者는 1987年의 新聞을 뒤져 拉北 未遂事件으로 始作됐다가 殺人事件으로 變質된 後 갑자기 사라져버린 事件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確認했다. 口味가 당긴 記者는 取材를 決心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漠漠했다. 記者는 外務部를 찾아가 1987年 싱가포르 大使館에 勤務했던 外交官부터 찾았다. 記者는 두 名의 外交官을 만났는데 그들은 이 事件을 記憶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말이다.

    “輪對職은 綜合商社에서 派遣된 商社員(S通商 홍콩本部長)인 것처럼 報道됐는데, 그것은 엉터리다. 그는 貿易會社 上司원이 아니다. 當時 우리는 韓國大使館으로 온 輪對職을 여러 角度로 調査했는데, 그는 橫說竪說 都大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公務上 取得한 일이라 다 말할 수 없지만, 또 只今은 證明할 證據도 없는 狀態지만, 아무튼 當時 우리는 尹氏가 金女人 被殺과 關聯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로 인해 外務部는 싱가포르에서 尹氏 記者會見을 열라는 安企部와 크게 摩擦을 빚었다. 金女人이 被殺體로 發見된 後 尹氏에 對한 搜査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安企部의 입김 때문이다.”

    尹氏가 金女人 被殺과 關聯이 있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安企部는 왜 尹氏를 警察에 넘겨 搜査하게 하지 않았나. 質問은 이어졌지만, 이 外交官은 “더 以上 말할 수 없다”며 입을 닫았다. 記者는 싱가포르 大使館에 勤務했던 또 다른 外交官을 만났다. 그의 말이다.

    “尹氏는 싱가포르 駐在 北韓大使館에서 바로 韓國大使館으로 도망쳐 왔다고 主張했고 言論 또한 그렇게 報道했는데,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尹氏는 北韓大使館이 아니라 美國大使館에서 왔다. 當時 우리는 美國大使館으로부터 ‘夫人을 찾기 위해 北韓大使館에 갔는데, 北韓이 自己를 拉致하려고 해 美國大使館으로 도망쳐왔다고 하는 韓國人 男子가 있으니 데려가라’는 連絡을 받고 美國大使館에 가서 尹氏를 데리고 왔다. 나는 殺人 事件에 對해서는 客觀的인 證據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尹氏를 美國大使館에서 데려온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事實이다.

    尹氏는 橫說竪說 一貫性 없는 陳述을 했는데, 特異한 것은 그가 갖고 있던 韓國 旅券에 홍콩 出國 圖章이 두 個 찍혀 있었다는 事實이다. 尹氏는 1月4日 싱가포르에 到着했으니 그가 홍콩을 떠난 것은 1月4日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의 旅券에는 1月3日 홍콩을 出國했다가 그날 入國하고, 다시 1月4日 홍콩을 出國한 圖章이 찍혀 있었다. 우리는 尹氏에게 ‘1月3日 홍콩을 出國했다 다시 入國한 것은 무슨 理由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對해 尹氏는 ‘元來는 1月3日 싱가포르로 오기 위해 홍콩空港에서 出國手續을 밟고 飛行機에 搭乘했다. 그런데 飛行機가 故障이 나 出發이 하루 늦춰졌다. 그래서 入國 圖章을 찍고 다시 홍콩 市內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날 나는 航空社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인 1月4日 싱가포르에 왔다’고 解明했다(그러나 서울地檢 外舍部는 이 호텔이 두 사람이 살던 집에서 不過 2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밝혔다).

    여기서 우리들은 ‘飛行機 出發이 하루 늦춰졌으면 집에 가서 자지, 왜 호텔에서 잤느냐?’라고 물었다. 尹氏는 ‘아내를 데려간 사람들로부터 連絡이 올지 몰라 호텔에서 잤다’고 對答했다. 우리가 ‘아니, 連絡이 오면 집으로 오지, 아내를 데려간 사람들이 航空社에서 잡아준 호텔을 어찌 아느냐’라고 묻자, 尹氏는 ‘連絡은 호텔로 오게 돼 있었다’고 우겼다. 尹氏의 陳述은 이런 式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尹氏의 主張을 全혀 信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外務部 職員들은 尹氏의 陳述을 信賴하지 않았으나, 安企部는 尹氏의 陳述을 믿으려고 했다. 더 正確히 말하면 尹氏의 陳述을 믿으려 한 것은 南某氏를 비롯한 싱가포르에 있는 安企部 職員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安企部 幹部들이었다. 이들은 싱가포르 主宰 安企部 職員들에게 尹氏의 陳述이 事實일 수도 있으니 좀더 알아보라고 壓力을 加했다고 한다. 本部로부터 壓力을 받은 安企部 職員들은 尹氏 記者會見을 準備했다. 그러자 이장춘 大使가 强力하게 制動을 걸고 나섰다.

    金女人의 家族 追跡

    이에 對해 安企部는 李大使 앞으로 장세동(張世東) 安企部長 名義로 된 公文을 보내 記者會見을 열라고 要求했다. 그러자 李大使는 總務處에 ‘安企部長이 外務部 職員(李大使)에게 命令을 내릴 수 있는지 有權解釋을 해달라’는 內容의 公文을 보내면서까지 맞섰다. 때문에 尹氏의 記者會見은 싱가포르가 아닌 방콕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外務部 職員들의 記憶이다(이대사는 2000年 2月10日 문화일보에 外交通商部의 問題點을 條目條目 揭載하는 글을 쓰고 辭退해 波紋을 일으켰다. 李大使는 매우 꼬장꼬장한 사람이다).

    記者가 이 事件을 取材할 때인 1995年 5月 李大使는 필리핀 駐在 大使를 맡고 있었다. 記者가 李大使에게 電話를 걸어 “찾아가겠다”고 하자, 그는 “오지 마라. 그 事件의 主役은 우리가 아니라 安企部다. 나는 그 事件의 主人公도 아닌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하며 끊었다. 當時 安企部長은 장세동氏高, 海外와 北韓을 擔當하는 2次長은 이학봉(李鶴捧)氏였다. 記者는 이들에게도 電話를 걸었으나 이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答을 傳해왔다.

    外務部 取材를 통해 自信感을 얻은 記者는 取材 範圍를 擴大했다. 1987年에 나온 記事 中에는 尹氏의 住民登錄 住所와 金女人의 本籍地 住所가 실린 것이 있었다. 記者는 먼저 金女人의 家族을 찾아보기로 했다. 金女人의 本籍地가 있는 郡廳의 戶籍係로 電話를 걸어 本籍地 住所를 불러주고 “濠洲 이름을 알려달라”고 付託한 것이다. 職員은 “그 本籍地는 只今은 충주시로 바뀌었다”며 “濠洲(金女人의 父親)는 1974年에 死亡했고, 濠洲의 아들이 한 名 있다. 아들 이름은 김만식이다”라고 알려주었다(당시만 해도 이 程度는 協助해 주었다).

    ‘김만식이라는 이름은 알았는데 이 사람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記者는 無酌定 忠州市 電話局으로 114를 돌려, 김만식이라는 이름을 대고 그 이름으로 登錄된 電話番號를 全部 알려달라고 付託했다. 電話局 職員은 12名의 電話番號를 불러주었다. 이 番號를 들고 하나씩 다이얼을 눌러 “김옥분氏의 오빠 되는 분의 집입니까?” 하고 물어갔는데, 다섯番째로 다이얼을 돌렸을 때 “왜 김옥분에 對해 물어요” 하는 날카로운 외침을 들었다. 電話를 받은 사람은 김만식氏의 夫人(李明水)이었다. 이 夫人은 쌓인 恨을 쏟아냈다.

    김만식氏의 抱恨

    “우리 媤누이를 間諜으로 몰 때 忠州市 警察署에서 얼마나 우리를 못살게 굴었는가. 우리 애들은 ‘間諜의 家族’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 學校에도 가지 못했다. 男便은 每日 술만 마시고 다녔다. 그러다 媤누이가 屍體로 發見되었다니까 못살게 굴던 사람들이 나타나 손을 싹싹 빌고 돌아갔다. 그後로는 單 한番도 얼씬하지 않더라. 우린 너무 抑鬱하다. 그런데 뭐 더 調査할 게 있다고 記者가 電話를 거느냐. 우린 正말 抑鬱하다!”

    記者는 夫人을 달래 집住所를 알아내고, 1995年 5月24日 충주시로 내려갔다. 충주시는 작은 都市인지라, 택시技士는 住所만 갖고도 金女人의 오빠 집을 찾아주었다. 구멍가게를 겸한 집이었는데, 한눈에 窮塞함을 斟酌할 수 있었다. 집에는 夫人만 있었다. 夫人은 “男便은 택시 運轉을 하는데 곧 올 것”이라고 했다. 삶의 고단함에 지친 夫人은 記者를 警戒하면서도 넋두리를 쏟아냈다.

    “媤누이를 만나기 前에 윤대직에게는 다른 女子한테서 낳은 딸이 있었다. 事件이 나기 前 媤누이와 輪對職은 輪對職의 딸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었다. 그때 媤누이도 前 男便인 中國人 우민밍(吳敏明)과의 사이에서 낳은 ‘쏘냐’라는 딸이 있었다. 媤누이는 홍콩에서 輪對職과 同居에 들어가며 쏘냐를 우리집에 맡겼다. 그런데 媤누이가 죽은 事實이 알려진 後 우민밍이 이곳에 와 쏘냐를 데려갔다. 輪對職의 딸도 우리집에 잠깐 있었는데 事件이 있은 後 輪對職의 母親이 데려갔다. 우리는 媤누이의 變死體가 發見되었다는 消息을 듣고도 屍體를 거두지 못했다. 홍콩에서는 關係機關을 通해 ‘媤누이 屍身을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왔으나, 우리는 홍콩에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處地라 ‘알아서 處理하라’고 했다. 媤누이가 쓰던 物件도 돌려받지 못했다.”

    김만식氏는 저녁 무렵 집으로 들어왔다. 金氏는 깊게 한숨을 쉬더니 “그때 일은 惡夢이었다. 侮辱과 毆打를 當한 것은 좋다. 어머니는…, 設使 어머니가 間諜이라고 하더라도 大韓民國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한쪽 房에서 調査받을 때 들어보니 옆房에서 어머니를 調査하는 搜査官들이 ‘이년 저년’하고 있었다. 그들도 어머니가 있을 텐데…, 間諜을 낳았다는 理由만으로 어머니는 常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搜査官들로부터 어머니가 辱을 듣는 것은, 내가 맞는 것보다 더한 恥辱이었다. 그러다 동생이 屍體로 發見되었다는 消息이 있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싹 빌고 사라졌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大韓民國 사람 待接을 받지 못했다.”

    日本 손님을 맞는 호스티스

    이어 金氏는 “나는 내 동생 事件의 眞實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眞實을 立證할 수 있는 證據는 없다. 언젠가 누군가에 依해, 내 동생 事件의 眞實과 우리 家族의 悔恨이 제대로 알려지기 바란다”며 동생 이야기를 꺼내기 始作했다. 豫想했던 대로 김옥분은 아주 고단한 삶을 살아온 女人이었다(1987년 尹氏 事件 當時 言論은 中間中間에 金女人의 當時 行跡으로 斟酌되는 事實을 揭載했다. 2000年 2月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팀도 이 事件을 取材했다. 여기서는 김만식氏의 이야기와 當時 新聞 記事 그리고 SBS가 取材한 資料를 混合해 金女人의 行跡으로 整理한다).

    김옥분은 1男5女 집안의 둘째딸인데, 위로 언니와 오빠인 김만식氏가 있다. 1952年生인 김옥분은 國民學校를 卒業하고 집에서 놀다 1972年 自身의 입이라도 덜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市內버스의 案內孃이 되었다. 그리고 몇 年 後 술집 從業員으로 變身했다. 호스티스가 된 것이다. 얼굴이 예쁘장한 金女人은 日本人의 現地妻가 되었고 서울 장충동에 살림을 차렸다. 이때부터 金女人은 가끔 故鄕에 내려오면 어머니 앞에 當時로서는 매우 큰돈인 10萬원 或은 20萬원을 내놓고 갔다. 家族들은 金女人이 하는 일을 알았으나 돈이 고마워 ‘알고 있다는 事實’을 一切 내色하지 않았다. 日本人의 現地妻 노릇을 하며 金女人은 기초적인 日本語를 익혔다.

    現地妻 生活을 통해 間接的으로 外國 生活을 익힌 김옥분은 1970年代 中盤 外國 進出을 摸索하게 되었다. 홍콩 男子와 僞裝結婚하여 홍콩으로 進出하는 것이었다. 1976年 9月30日 김옥분은 홍콩人 輛칭화(梁靑華)와 僞裝結婚하는 形式으로 홍콩 旅券을 發給받아,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輛칭화와 곧 離婚하고 韓國 술집인 ‘코리아가든’ ‘리무진’ ‘가림’ 等에서 호스티스 生活을 했다. 이때 金女人이 使用한 이름이 ‘수지킴’이다. 김옥분은 日本語 繪畫가 可能했기 때문에 韓國 손님과 함께 日本 손님도 자주 맞았다고 한다.

    1981年부터 김옥분은 이따금 日本에 다녀왔다. 때문에 그女가 朝總聯과 接觸했다면 그 時期는 이때부터일 것이다. 그러나 김옥분과 가까이 지냈던 홍콩의 同僚들은 “홍콩 國籍을 갖지 못한 사람은 滯留 期間을 늘이기 위해 홍콩 밖으로 나갔다 올 必要가 있었다. 술집生活에서 쌓인 스트레스도 풀 兼 主로 日本에 가서 놀다 오곤 했다”고 말하고 있다. 金女人은 홍콩 國籍을 가졌으므로 滯留問題에 對해 苦悶할 必要는 없었으나 親舊들과 어울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日本 旅行을 자주 했다는 것이 이들의 說明이다.

    1982年부터 金女人은 마카오의 카지노에 出入했는데, 여기서 많은 돈을 蕩盡했다. 이 무렵 김옥분은 여러 男子와 짧은 同居를 거듭하다 敏捷建築工事(敏捷建築公司)와 合요투자유한공사(合耀投資有限公司)·유환유한공사(裕有限公司)를 運營하는 홍콩사람인 우민밍(吳敏明)을 만나면서 長期 同居에 들어갔다. 우민밍은 本妻가 있었으므로 김옥분은 그의 ‘세컨드’가 된 것이다(1995년에 만났을 때 김만식氏는 우민밍氏가 주고 간 名銜을 保管하고 있다가 記者에게 내밀었다). 우민밍은 김옥분에게 生活費를 대주는 條件으로 술집에 나가지 말 것을 要求했다. 우민밍의 妾이 된 後 김옥분은 고단한 술집 生活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둘 사이에서는 딸 ‘쏘냐’가 태어났다.

    김만식氏의 말이다. “우민밍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免稅 술을 사갖고 대여섯 番 우리 집에 왔었다. 妻家 내놓은 飮食도 잘 먹고…, 그런 사람과 헤어진 동생이 바보다. 술집에도 나갔고 現地妻度 했기 때문에 동생에게 바람氣가 있었다. 동생은 우민밍이 本妻에게 갔다가 自己에게 오는 것에 짜증을 내고 生活費를 더 달라고 要求하며 싸웠을 것이다. 그러다 우민밍이 本夫人에게 동생과 바람피운 것을 들켜 亂離가 났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後 동생은 다시 술집에 나간 것 같은데, 그 얼마後 輪對職을 만났다. 우리는 옥분이가 輪對職과 함께 故鄕에 나타날 때까지 우민밍과 헤어진 것을 알지 못했다.”

    1986年 中盤 김옥분은 日食집人 ‘마쓰(松)’에서 일하다 3個月 豫定으로 日本 旅行을 準備했다. 長期間 집을 비우게 된 金女人은 빈집을 봐줄 사람을 찾았는데 이때 작은 百貨店을 運營하는 韓國人 金某氏가, 비디오事業을 하기 위해 홍콩에 온 輪對職을 紹介했다. 아무 緣故 없이 事業을 위해 홍콩에 온 輪對職은 金女人이 長期間 비우기로 한 집에 暫時 寄宿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두 사람의 同居와 結婚으로 이어졌다. 10月16日 두 사람은 婚姻申告를 했다. 이어 두 사람은 日本을 旅行한 後 韓國에 들어가 金女人의 親淸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尹大職 拉北 未遂事件과 김옥분 被殺事件은 두 사람의 結婚 時點에서부터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것이다.

    홍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輪對職이 運營할 ‘유나이티드 모션 픽쳐’ 事務室을 코리안센터 103號에 設置하는 일에 着手했다. 이에 必要한 資金은 金女人이 提供했다. 이 무렵인 12月24日 金女人이 한때 從業員으로 勤務했던 日食집 마쓰로 日本人 男子 두 名이 金女人과 같이 찾아왔다. 마쓰 從業員 U氏에 따르면 金女人은 “홍콩에 처음 온 觀光客인데 길을 몰라 내가 案內해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U氏는 “두 日本人이 나이가 들어보이고 金女人과 初面은 아닌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日本人은 1987年 1月2日 金女人과 尹氏의 아파트로 찾아와 “빌려간 돈을 어디다 썼느냐…”며 高喊을 쳤다고 한다(당시 新聞에 실린 內容).

    홍콩 警察은 未濟事件으로 處理

    이 무렵 金女人은 故鄕 충주시로 電話를 걸어 遑急히 “돈을 빌려달라”고 付託했다. 金女人의 올케는 “媤누이는 單 한番도 故鄕집에 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돈을 付託해 記憶을 한다. 媤누이는 ‘年末年始라 돈이 마련되지 않는다. 곧 갚을테니 300萬원 程度를 마련해 달라’고 付託했으나 들어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後 輪對職氏 拉北 未遂事件이 일어났다. 김만식氏는 그 直後 安企部 충북도支部로 끌려가 調査를 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1978年부터 1982年 사이 나는 동아建設·삼성건설 等에 木手로 採用돼 사우디 建設 現場에 나가 일한 적이 있었다. 安企部는 이러한 내 經歷을 찾아내 海外에 있을 때 北韓과 接觸하지 않았냐고 採根했다. 동생과 나는 가난 때문에 外國生活을 했는데, 安企部는 外國生活을 根據로 間諜 嫌疑를 調査한 것이다. 正말로 나와 동생이 빨갱이였다면, 우리집에서 亂數表나 無電機 같은 거라도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다 홍콩에서 동생이 被殺體로 發見됐다는 消息이 날아들자, 安企部 職員들은 두손을 싹싹 빌며 未安하다고 謝過했다. 동생이 眞짜 間諜이라면 그들이 謝過할 理가 있겠는가?”

    김옥분이 被殺體로 發見되자, 卽刻 홍콩警察은 搜査에 着手했다. 名寶(明報)를 비롯한 홍콩 言論들은 尹氏 拉北未遂 事件이 韓國 言論에 크게 報道된 것을 알기 때문에 이 事件에 北韓이 介入했을 可能性 等을 提起했다. 홍콩 警察은 우민밍을 비롯해 김옥분과 살다가 헤어진 男子들에 對해 容疑點을 두고 集中 調査했으나, 嫌疑點을 찾는 데 失敗했다. 홍콩 警察은 日本에까지 가서 容疑者들을 調査했으나 結果는 마찬가지였다. 홍콩 警察은 韓國에 對해 尹氏를 調査할 수 있게 해달라고 要請했다.

    金女人 집에 드나들었던 필리핀人 派出婦와 金女人의 親舊들에 따르면 1月2日 낮 金女人과 親舊들은 金女人 집에서 오징어 볶음을 해먹었다. 그런데 金女人의 死體를 剖檢한 홍콩 警察은 金女人의 위에서 오징어를 찾아냈다. 그렇다면 金女人은 日本人이 찾아온 1月2日 밤이나 1月3日 새벽 사이 自己집에서 殺害되었을 可能性이 높다. 그렇다면 왜 尹氏는 1月3日 필리핀人 家政婦를 찾아가 “移徙를 갔다. 이제는 淸掃하러 올 必要없다”며 집안 열쇠를 찾아갔는지 疑問이 남는다.

    只今도 그렇지만 韓國과 홍콩은 犯人 引渡協定을 맺고 있지 않다. 當時 홍콩은 安企部의 對北(對北)前線 前哨基地였다. 최은희·신상옥氏는 1978年 1月14日과 7月19日 홍콩에서 各各 北韓으로 拉致됐다. 때문에 홍콩 駐在 韓國總領事館에는 相當數의 安企部 要員들이 派遣돼 있었다. 홍콩 政廳(政廳)에는 情報機關이 없으므로, 홍콩에서는 警察이 情報業務를 擔當한다. 安企部 要員들은 홍콩 警察과 자주 接觸하며 北韓 關聯 諜報를 蒐集했다. 이 時期 海外에서 歸順하는 相當數의 北韓人들이 홍콩을 통해 韓國으로 왔는데, 이는 安企部와 홍콩警察間의 오랜 信賴關係 때문에 可能했다.

    이러한 信賴가 尹氏에 對한 홍콩 警察의 調査를 막았다. 한 消息通은 “홍콩 警察은 比較的 關係가 좋았던 安企部側이 積極的으로 막았기 때문에 尹氏를 調査하지 못했다. 安企部는 尹氏를 사지(死地)에서 脫出해온 反共鬪士로 만들어놓았으니 尹氏가 殺人 容疑者로 調査받는 狀況을 容納할 수 없었던 것이다. 泄瀉 安企部가 막지 않았더라도 韓國과 홍콩間에는 犯人 引渡協定이 없으므로 韓國은 尹氏를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 境遇 韓國에서는 警察이 自發的으로 尹氏를 搜査해야 하는데 韓國 警察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尹氏는 安企部에서 맞았다”

    어느 나라 警察이든 强力事件이 일어나면 搜査本部를 設置한다. 그런데도 事件이 풀리지 않으면 事件이 풀릴 때나 時效가 滿了될 때까지 擔當者를 定해 놓는다. 따라서 時效가 滿了될 때까지 풀리지 않은 事件은 搜査가 繼續되는 ‘未濟(未濟, 풀리지 않은)사건’이 되고, 時效가 滿了돼 犯人 追跡을 抛棄하게 되면 ‘永久未濟事件’李 된다. 金女人 被殺事件은 現在 홍콩 警察에서는 美製事件이다. 2000年 1月 이 事件 擔當者인 홍콩 警察의 스페튼 태런트氏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尹氏를 除外한 모든 사람을 調査했으나 犯人을 찾지 못했다. 尹氏를 調査할 때까지 이 事件 搜査는 繼續 進行될 것”이라고 말했다.

    尹氏를 除外한 모든 人物에 對한 홍콩 警察의 調査가 끝날 때쯤 우민밍이 韓國 충주시로 날아와 김만식氏를 만났다. 金氏의 말이다. “동생이 없으니 서툰 韓國語로 손짓발짓에 筆談(筆談)까지 써가며 이야기했다. 우민밍은 警察 調査를 받느라고 魂이 난 것 같았다. 우민밍은 동생 死亡事件을 제법 크게 報道한 ‘名寶’를 비롯한 홍콩 新聞을 들고 왔다. 우민밍은 韓國에 오려고 여러 番 試圖했는데, 韓國 總領事館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아 이제야 韓國에 왔다며 매우 未安해 했다. 그리고 딸 쏘냐를 데리고 돌아갔다.”

    왜 韓國은 于氏에게 韓國 訪問비자를 내주지 않았던 것일까. 그後 記者는 다른 일로 홍콩에 出張갈 때마다 우민밍을 찾아보았으나 電話番號가 바뀌어 失敗했다. 홍콩 警察에게도 김옥분 事件에 對해 물어보았으나 遺憾스럽게 記憶하는 警察官을 만나지 못했다.

    拉北 未遂事件이 일어날 當時 輪對職은 S通商 홍콩本部長으로 報道되었다. 記者는 尹大職氏를 찾아볼 料量으로 電話番號簿를 통해 S通商을 찾았는데, 8年 以上이 지났음에도 이 會社는 같은 이름으로 存在했다. S通商은 비디오가게 等에 비디오 等을 供給해 주는 조그만 會社로 서울 서초구에 있었다. 電話로 位置를 確認하고 이 會社를 찾아가 “윤대직이란 사람이 이 會社에 있었다는데 事實이냐? 그의 連絡處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 多幸히도 S通商에는 輪對職氏를 記憶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이다.

    “輪對職은 우리 會社 職員이 아니었다. 1986年에는 비디오事業이 人氣가 좋았다. 尹氏는 우리 會社를 찾아와 홍콩에 가서 잘나갈 비디오를 골라 보내줄 테니 職銜을 하나 달라고 해, 우리 會社 홍콩本部長이라고 적힌 名銜을 알아서 만들게 했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 會社에 홍콩産 비디오를 供給해 주는 에이전트인 것이다. 當時 言論은 尹氏를 商社員으로 報道했는데 그는 上司원이 아니다. 우리 職員이 아닌 만큼 우리는 그에 關한 書類를 받아두지 않았다. 나는 輪對職이 서울에 온 後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安企部에서 調査받으며 많이 맞았다며 가슴을 문지르곤 했다. 그가 金浦空港에 到着해 記者會見하는 것을 TV로 보았는데, 그때도 (가슴을) 문지르고 있었다. 서울로 오기 前에도 그는 安企部 職員들에게 많이 맞았던 것 같다.”

    尹氏에 對한 追跡 抛棄

    記者가 “尹氏는 安企部 職員들에게 왜 맞았다고 했는가”라고 묻자, 그는 “尹氏의 말로는 自己 陳述에 一貫性이 없다며 安企部 사람들이 가슴을 때렸다고 對答했다”고 말했다. S通商에서 尹氏의 住所地를 아는 데 失敗한 記者는 다른 方法을 物色했다. 1987年 事件 當時 新聞에 난 尹氏의 나이와 住所地를 根據로 追跡해 보기로 한 것이다. 當時 나이를 根據로 逆算하면 尹氏는 1958年生이 된다. 記者는 한 機關을 통해 言論이 잘못 報道했을 可能性을 考慮해 1956年부터 1960年 生 사이의 男子로 輪對職이라는 이름을 쓰고 新聞에 났던 住所地와 聯關 있는 男子를 찾았다.

    結果는 매우 싱겁게 나왔다. 1958年 生의 尹氏가 1987年 事件이 일어날 當時와 똑같은 住所地에 살고 있는 것으로 確認된 것이다. 尹氏의 住所地인 서울市 성동구 B洞 一帶는 이른바 ‘달동네’다. 尹氏의 歸家 時間이 늦을 것으로 計算한 記者는, 尹氏에게 물어볼 말을 整理하며 時間을 보냈다. “金女人을 죽인 사람은 누구냐? 짚히는 사람도 없는가?” “當身은 왜 1月3日 싱가포르行 飛行機가 取消됐을 때 집에 들어가지 않고 호텔에서 잤냐?” “김옥분과 日本에 갔을 때 그女가 朝總聯系로 보이는 사람을 만난 것을 본 적이 있나?” “安企部 職員들에게 맞은 理由는 무엇이냐?” “金女人은 朝總聯과 關係했느냐 아니면 日本人 손님과 關係했는가” 等等 質問할 말을 머리에 집어넣은 記者는 子正 무렵 B棟을 찾아갔다.

    그러나 뜻밖의 光景에 失色하고 말았다. 尹氏의 住所地 一帶 住宅街가 아파트를 짓기 위해 모두 撤去되었던 것이다. 집이 사라진 땅은 달빛 아래 허연 속살을 反射하고 있었다. 虛脫해진 記者는 附近에 있던 B洞 派出所로 들어가 黨職 警察官을 붙잡고 “여기에 住所地를 둔 사람들은 어디로 移住했는가?”라고 물었다. 警察官은 “住所地를 바꾸지 않았다면 알 수가 없는 것 아니냐”며 심드렁하게 對答했다.

    尹氏를 찾을 수 있는 方法은 하나뿐이었다. 한국통신을 찾아가 尹氏나 尹氏 家族이 使用하는 電話番號를 찾아내 實際 居住地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追跡은 警察이나 檢察 같은 搜査機關만 할 수 있다. 여기서 記者는 尹氏에 對한 追跡을 抛棄했다. 나중에 안 事實이지만 設使 記者가 尹氏나 그 家族의 實際 居住地를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이때는 尹氏를 만날 수 없었다. 記者가 찾아 헤매던 時節 尹氏는 詐欺 嫌疑로 矯導所에 收監돼 있었기 때문이다(윤씨의 收監 事實에 對해서는 뒤에서 說明한다).

    그리고 그때까지 取材한 것을 整理해 記事로 作成했다. 記事는 1987年에 일어난 두 事件을 紹介한 後 當時 金女人은 朝總聯의 使嗾를 받은 工作員으로 報道됐는데, 金女人이 北韓 工作員이라는 證據는 全혀 없다는 것이 主內容이다. 當時 記者는 ‘주간조선’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記事는 ‘주간조선’에 실리지 못했다. 編輯長이 記事 揭載에 同意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以後 金女人 事件은 記者에게는 큰 負擔이 되었다. 3年 後인 1998年 記者는 ‘시사저널’에서 일했는데 이때 또 한番 揭載를 試圖했다. 그러나 그때도 編輯長을 說得하는 데 失敗해 揭載하지 못했다. 그리고 ‘週刊東亞’에 勤務하던 時節 송영언 部長(現 동아일보 論說委員)과 游泳을 次長(現 週刊東亞 部長)의 配慮로 이 記事를 싣는 데 成功했다(주간동아 2000年 1月20日子). 事件 發生 時點으로 따지면 萬 13年 만에, 取材한 時點으로부터 따지면 4年 6個月 만에 記事化한 것이다.

    김만식氏를 取材하고 週刊東亞에 처음 이 記事를 揭載하는 4年 6個月 사이, 金氏 집안에는 두 가지 큰 일이 있었다. 1987年 安企部의 調査를 받았던 金氏의 母親이 ‘間諜’이라는 恨을 풀지 못하고 世上을 뜬 것이다. 金女人의 언니도 失性해서 死亡했다.

    2000年 1月18日 記者는 週刊東亞 記事를 읽고 찾아온 SBS-TV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의 남상문(南相汶) PD를 만났다. 南PD는 “수지킴 事件을 取材하고 싶다”고 했다. 記者는 두 가지 當付를 받아준다면 資料를 提供하겠다고 말했다. 첫째는 김만식氏를 만나되 그의 이름과 얼굴을 公開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5年前 對面에서 記者는 金氏를 ‘代가 弱한 사람’으로 判斷했다. 그는 自身과 自己 家族의 抑鬱함을 풀 自信感이 없는 사람이었다.

    13年 만에 처음 記事化

    이런 部類의 사람은 外部에 自己便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동안 當해온 抑鬱함을 한瞬間에 暴發시키는 習性이 있다. 더구나 放送을 통해 그의 얼굴과 實名이 나가면 그는 生業을 抛棄하고 世上을 怨望할 可能性이 있다. 둘째로 “金女人이 間諜이었다는 證據는 없다. 그런데도 當時 言論은 金女人을 間諜으로 몰았으니 이것만은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고 要求했다. 南PD는 이러한 條件을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그는 約束을 지켰다.

    남PD가 찾아갔을 때 김만식氏는 1987年 事件을 다시 調査해 달라는 內容으로 大統領에게 보내는 歎願書를 作成하는 等 조금씩 興奮하기 始作했다. 이러한 金氏를 取材한 後 남PD는 홍콩으로 날아가 김옥분 被殺事件을 搜査한 홍콩 警察과 金女人의 親舊 等을 만나고, 싱가포르로 移動해 韓國大使館에 오래 勤務해 輪對職氏 拉北 未遂事件을 記憶하는 職員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해 2月12日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을 통해 “누가 數지킴을 죽였는가”란 題目으로 그가 取材한 것을 放映했다. 이 프로에서 남PD는 記者가 찾아내지 못한 두 가지 事實을 새로 밝혀냈다.

    1987年 모든 言論은 尹氏를 3死 出身의 豫備役 大尉로 報道했다. 그러나 한 新聞만은 “尹氏는 3死 出身임에도 陸士 出身으로 行世하고 다녔다”고 指摘했다. 이 新聞은 金氏가 陸士 出身을 假裝한 것은 밝혀냈지만 3死 出身이 아니라는 事實까지는 밝혀내지 못했던 것이다. 當時 한 新聞은 情報 關係者의 말을 引用해 北傀는 ‘몇 年 前부터 士官學校 出身者를 包攝하라는 指令을 내렸다. 北傀는 尹氏가 眞짜로 陸士 出身인지 알고 金女人을 통해 拉北하려 한 것 같다’고 報道했다. 이처럼 當時 言論은 尹氏를 3死 出身의 豫備役 大尉로 報道했기 때문에, 記者도 尹氏를 3死 出身의 豫備役 大尉로 믿었다.

    그러나 남PD는 尹氏가 士官學校는 勿論이고 軍隊에도 갈 수 없는 中學校 1年 中退者라는 事實과 防衛兵(一等兵)으로 除隊했다는 事實을 밝혀냈다. 따라서 北韓의 尹氏 拉致 意圖와 우리側 情報 關係者의 分析이 正確하다면, 北韓마저도 尹氏에게 속은 셈이 된다.

    둘째로 남PD는 輪對職氏를 直接 만나는 데 成功했다. 南PD는 記者가 준 資料를 根據로 尹氏의 住所地를 追跡해 집을 찾아냈으나 집에서는 尹氏를 만나지 못하고, 尹氏가 勤務하는 한 벤처會社에서 만났다. 뜻밖에도 尹氏는 注目받는 벤처企業의 核心 幹部가 돼 있었다. 南PD는 記者가 묻지 못한 것을 물었으나 尹氏는 答辯을 回避했다.

    尹氏는 1987年 事件에 對해 言及을 回避하는 데 그치지 않고, 自身이 關聯된 事件을 取材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의 放映 禁止를 要請하는 假處分申請을 法院에 냈다. 이에 對해 法院은 尹氏의 이름과 얼굴을 밝히지 않은 채로 放映하라는 決定을 내려, SBS는 2月12日 이 프로를 放映하게 되었다. 이 프로는 相當한 影響을 끼쳤다. 이 프로에 記者도 몇 番 얼굴을 비췄는데 뜻밖의 提報者들이 連絡을 해온 것이다.

    이들은 電話나 이메일로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온 男子가 尹大職氏가 아니냐”고 묻고,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한 女性 讀者는 윤대직씨임을 確認한 後, “自己 親舊가 尹氏와 結婚하려고 하는데, 親舊는 尹氏를 美國에서 工夫한 留學生 出身으로 알고 있다. 親舊가 속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提報는 尹氏에 對한 取材를 擴大하는 契機가 되었다.

    女性PD와 結婚 生活

    이番에 서울地檢 外舍部는 尹氏를 살인 과 함께 詐欺嫌疑로 起訴했다. 尹氏에게 附加된 詐欺嫌疑는 1987年 以後 일어난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1987年 以後 尹氏는 記者가 全혀 豫想하지 못한 人生을 살아왔는데, 그 삶이 詐欺 是非로 이어진 것이다. 1987年 以後의 尹氏 人生은 1987年 事件 當時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記者는 1987年 以後 尹氏를 만나 오랫동안 사귀어온 C氏를 만나 小說 같은 尹氏의 人生 油田 이야기를 들었다. C氏에 따르면 이 時期 尹氏는 外國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輸入해 複寫해서 비디오가게에 供給하는 일을 했다.

    이때 尹氏는 某 放送局의 女性PD와 結婚해 家庭을 꾸리고 있었다(C씨와 D氏 等 尹氏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中1 中退者인 尹氏가 女性PD와 結婚한 經緯에 對해서는 알지 못했다). 尹氏는 女性PD와의 사이에 아이를 하나 낳았다. 이때 尹氏는 經濟事情이 좋았던 듯 漢江에서 제트 스키 等을 타며 餘暇를 즐겼다. 이렇게 잘나가던 尹氏가 1993年쯤 자취를 감추었다. 詐欺嫌疑로 警察의 追跡을 받게 돼 몸을 숨긴 것이다. C氏는 한참 지난 後 尹氏가 詐欺罪로 議政府 矯導所에 收監돼 있다는 事實을 알았다. 尹氏는 다른 사람 名義로 銀行信用카드를 만들어 돈을 빌려쓰고 갚지 않아 詐欺罪로 懲役 2年型을 言渡받았다. 尹氏는 1994年 2月에 拘束起訴돼 1996年 7月까지 獄살이를 했다(기자가 尹氏를 찾아나선 것은 1995年 5月이다).

    이番에 서울地檢에 拘束되면서 尹氏는 세 名의 辯護士를 選任했다. 이中 한 辯護人은 1994年 尹氏가 詐欺嫌疑로 收監된 데 對해 이렇게 說明했다. “尹氏는 丈人의 집을 잡혀 돈을 빌렸는데 그 바람에 丈人의 집까지 날리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尹氏는 PD夫人과 離婚했다. 그러나 尹氏는 出所後 離婚을 했음에도, 전 丈人에게 진 빚을 全部 갚았다. 尹氏는 배운 것은 없지만 義理가 있고 友情이 무엇인지 아는 괜찮은 사람이다. 檢察은 尹氏를 誹謗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無理하게 起訴했다.”

    議政府矯導所 收監時節 尹氏는 한 社會團體에 所屬돼 在所者 敎化活動을 하는 女性과 펜팔을 했다. 尹氏 辯護人은 이에 對해서도 仔細히 說明했다. “尹氏가 拘置所에 있을 때 만난 사람이 그 女性을 紹介해 주었다. 拘置所 收監者들은 이 사람을 많이 괴롭혔는데 尹氏가 이를 막아주자, 그에 對한 報答으로 그는 이 女性을 紹介해준 것이다. 그後 이 女性은 尹氏에게 便紙를 보내고 私食을 넣어주는 等 좋은 關係를 維持했다. 그리고 尹氏가 出所한 後 두 사람은 同居에 들어갔다.”

    尹氏와 가까이 지냈던 D氏도 이 女性을 記憶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은 그 女子가 살던 富川의 傳貰집에서 同居에 들어갔다. 그러다 尹氏는 月貰로 서울의 아파트를 求해 옮긴 後 그 女子 名義로 月賦로 그랜저 乘用車를 마련했다. 그리고 남은 돈을 社債市場에 넣어 利子를 받았다. 尹氏는 私債市場에서 나온 利子를 그 女子에게 生活費로 가져다주었는데, 어느날 그 女子가 妊娠한 몸으로 나를 찾아와 ‘輪對職이 生活費를 주지 않는다. 月 70萬원씩 내야 하는 아파트 月貰도 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소연했다. 이 女子는 괜찮은 사람인데, 人道主義 精神으로 在所者人 尹氏를 돕다가 完全히 人生을 망쳐버렸다.”

    비록 學歷은 짧지만 尹氏는 實力은 있었다. 出所後 尹氏는 컴퓨터 分野의 일을 했다. 尹氏는 詐欺 前科者이므로 信用카드를 만들 수 없다. 그래서 尹氏는 이 女性의 이름으로 信用카드를 만들어 컴퓨터 等을 샀는데, 카드 代金을 完納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쓴 돈이 모두 6500餘萬원이었다. 當然히 이 女性과 尹氏 사이에는 葛藤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番에 서울地檢이 作成한 公訴狀에도 이 女人과 關聯된 詐欺嫌疑가 올라 있다.

    이에 對해 尹氏의 辯護人은 “그 일로 인해 그 女性은 當時에 이미 尹氏를 婚姻憑藉姦淫과 詐欺嫌疑 等으로 告訴했다. 그러나 詐欺 部分에 對해서 尹氏는 6500萬원을 다 갚아 ‘嫌疑 없음’ 處分을 받았고, 婚姻憑藉姦淫에 對해서도 無嫌疑 判定을 받았다. 이番에 서울地檢이 만든 公訴狀에는 이때 尹氏가 다 갚은 6500萬원을 詐欺嫌疑로 摘示됐는데, 이는 이미 檢察에서 無嫌疑 判定을 내린 것을 再錄(再錄)한 데 不過하다. 過去 檢察에서 無嫌疑 決定을 내린 것을 法院이 有罪로 認定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고 말했다.

    尹氏는 이 女人과 호된 葛藤을 치르고 헤어졌는데, 尹氏의 親舊인 C氏와 D氏 等에 따르면 “그때 尹氏는 그 女性을 美國으로 留學보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尹氏는 中國 상하이(上海)市 푸둥(浦東)地球에 住商複合建物을 지어 分讓하는 全혀 새로운 事業을 펼쳤다. 이 部分에 對해서는 尹氏 辯護人의 說明을 들어본다.

    “議政府矯導所에 收監되기 前에 尹氏는 비디오事業을 하며 臺灣의 한 人氣 女歌手를 알게 되었다. 그女를 韓國으로 招請한 적도 있었는데, 이 女歌手는 尹氏를 ‘오빠’로 부르며 가까이 지냈다. 그後 그女는 리덩후이(李登輝) 總統과 아주 가까운 有力 집안의 아들과 結婚했다. 이 歌手의 男便이 상하이 푸둥地區 開發事業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歌手는 尹氏에게 電話를 걸어 ‘우리 男便이 푸둥地區 開發事業을 하니 參與해보라’고 勸誘했다. 그래서 尹氏는 周圍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에 ‘Q國際貿易有閑公社’란 會社를 만들고 푸둥地區에 進出하려는 韓國 業體를 物色하게 되었다.”

    前科者일지라도 旅券이나 비자를 받는데는 制限이 없다(注: 經濟犯罪 嫌疑로 有罪 判決을 받은 經濟人들이 釋放 後 外國旅行을 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尹氏는 中國을 들락거리며 푸둥地區 分讓(長期 賃貸) 事業을 했는데, 이때 SBS TV의 아침 프로그램은 尹氏를 招待해 푸둥地區 分讓事業을 하는 사람으로 紹介했다. 그러던 어느날 中國에 가려고 金浦空港에 나갔던 尹氏는 出國停止者로 分類돼 있는 것을 알고 中國으로 가지 못했다. 尹氏가 出國停止自家 된 것에 對해서는 두 가지 主張이 맞서고 있다.

    尹氏를 非難하는 側은 “尹氏가 푸둥地區 分讓事業을 한다면서 事業 參與者로부터 數百萬원씩 받아썼는데, 實績이 없자 投資者들이 詐欺嫌疑로 그를 出國停止시켰다”고 主張한다. 그러나 尹氏 辯護人은 ‘尹氏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前提下에, “尹氏의 說明에 따르면 安企部가 尹氏의 出國을 막았다고 한다. 安企部는 北韓이 상하이에 나타나는 尹氏를 없애 버리려고 한다는 諜報가 있어 尹氏의 出國을 막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說明했다. 尹氏가 Q國際貿易有閑公社를 運營할 때 돈을 投資했다 날린 사람들의 事例는 서울地檢이 提出한 公訴狀에 사기 證據로 羅列돼 있다.

    이무렵 安企部는 僞造달러 流通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때문에 僞幣 鑑別期 製作이 一時的으로 關心을 끌었는데 이때 尹氏가 僞幣 鑑別氣를 들고 나타났다. 銀行에 가면 紙幣 計數器(計數器)를 볼 수 있다. 尹氏가 들고 나온 僞幣 鑑別期는 計數器 機能을 하면서 同時에 僞幣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塵肺(眞짜 紙幣)는 특수한 종이와 特殊 잉크로 製作된다. 그러나 僞幣犯들은 이러한 종이와 잉크를 求하지 못하므로, 一般 종이에 一般 잉크로 僞幣를 만든다. 따라서 計數器에 特殊 종이와 特殊 잉크를 區別하는 裝置를 만들어 집어넣으면, 係數와 同時에 僞幣를 잡아낼 수 있다. 尹氏가 들고 나온 鑑別期는 이런 方式의 機械였다.

    僞造紙幣 鑑別祈禱 失敗

    그러나 世界的으로 僞幣를 流通시키는 組織은 훨씬 더 靈惡하다. 달러는 1달러짜리나 100달러짜리나 크기가 똑 같고 模樣도 비슷하다. 따라서 1달러를 100달러로 變造해 100달러 묶음에 집어넣으면, 尹氏가 들고 나온 鑑別期는 이를 識別하지 못한다. 塵肺를 製作하는 데 쓰이는 特殊 종이와 잉크는 各國의 政府 機關만 購入한다. 그런데 北韓·이라크·이란 等 ‘테러 支援國’의 諜報機關은 그 나라 紙幣를 만든다는 名目으로 輸入한 特殊 잉크와 特殊 종이로 僞造달러를 만들고 있다는 諜報가 있다. 尹氏가 들고 나온 鑑別期는 이렇게 만들어진 僞幣는 全혀 識別하지 못한다.

    尹氏의 辯護人도 이 部分은 認定했다. 그는 “僞幣 鑑別期는 尹氏가 開發한 게 아니고 中國에서 開發한 것이다. 尹氏는 이를 들여다 若干 改造해 各 銀行에 팔려고 했는데, 事業性이 없어 完全 失敗했다”고 말했다. 僞幣鑑別期 事業을 하는 過程에서 尹氏는 또 다시 詐欺 是非에 휘말렸다. 辯護人의 說明이다.

    “尹氏가 僞幣 鑑別期 事業을 할 때 E氏가 5000萬원을 내고 參與했다. 尹氏는 이 돈을 E氏가 投資한 것으로 알았는데, E氏는 이 돈을 R氏에게 빌려왔던 模樣이다. 그런데 事業이 失敗하자 5000萬원의 임자인 R氏가 尹氏를 詐欺嫌疑로 서울地檢에 告訴했다. 그러나 1998年 서울地檢은 이 告訴件에 對해서도 ‘嫌疑 없음’ 決定을 내렸다. 그런데 서울地檢 外舍部는 이番에 尹氏를 起訴하며 이 事件을 尹氏의 詐欺嫌疑 리스트에 다시 올렸다.”

    尹氏는 正말로 여복(女福)이 넘치는 사람이다. 辯護人에 따르면 婚姻申告를 하거나 그와 同居를 하다 그의 아이를 낳은 女子는 다섯 名이다. 그外에도 숱한 女子들이 登場하는데 이러한 女福은 尹氏에게 決코 유리한 條件으로만 作用하지는 않았다. 尹氏 辯護人은 “檢察은 尹氏가 사귄 女子가 10餘 名도 넘는다며 尹氏를 完全 人間 末種으로 만들어놓았다. 어찌 되었든 尹氏는 女子가 너무 많아서 不幸한 사람이다”고 말했다.

    이어 尹氏는 서울 신촌의 한 商街 分讓 件으로 또 한番 騷動을 겪은 後 家具商을 經營하는 한 言論社 社長 夫人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言論社 社長 夫人이 運營하는 建物에 指紋(指紋)認識裝置를 開發하는 G콤(假名)이라는 벤처會社가 貰들어 있었다. G콤이 開發하는 指紋認識시스템은 劃期的인 發明品이다. 이를 많은 사람들이 使用하는 現金引出 카드에 빚臺 說明해 보자.

    사람들은 現金引出機에 現金카드를 넣고 祕密番號를 누른 後 돈을 찾는다. 現金引出機의 處地에서 본다면 引出機는 現金카드와 祕密番號만으로 돈을 찾으려는 사람이 計座의 實際 主人임을 確認하는 것이다. 때문에 被害者로부터 銀行카드를 빼앗고 祕密番號를 알아낸 强度가 現金 引出을 試圖한다면 現金引出機는 ‘고스란히’ 現金을 내줄 수밖에 없다(이러한 問題를 줄이기 爲해 引出機 앞에 CCTV를 設置했지만 犯人 檢擧率은 그리 높지 않다).

    指紋認識 開發 會社 引受

    指紋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G콤은 이에 注目해 現金카드와 祕密番號 代身 指紋으로 現金을 찾는 시스템을 開發했다. 預金主는 計座를 만들 때 10個 손가락 中 使用할 손가락의 指紋을 미리 入力해 놓는다(정상 指紋). 그리고 强度의 威脅을 받아 억지로 現金을 出金할 때 使用하는 손가락의 指紋도 入力해 놓는다(비상 指紋). 現金引出機를 利用할 때 預金主는 頂上 指紋이 있는 손가락을 센서에 갖다 대 本人임을 證明한 後 돈을 찾는다. 그러나 强盜를 當해 억지로 引出機 앞에 섰을 때는 非常 指紋으로 入力해 놓은 손가락을 센서에 갖다대는 것이다.

    이 境遇 돈은 正常的으로 引出된다. 하지만 銀行에서는 預金主가 危險에 處해 있다는 것을 알고 卽時 警察에 連絡해 追跡케 하는 것이다. G콤이 開發하려고 한 것은 이런 시스템이었다. 新型 ‘防牌’가 나오면 新型 ‘窓’도 나오는 法이다. 이렇게 되면 大膽하게도 正常 指紋이 있는 預金主의 손가락을 잘라서 現金 引出을 試圖하는 强盜가 나올 수 있다. G콤은 이러한 狀況에 對備해 또 하나의 技術을 開發했다. 指紋이 있는 사람 손가락에는 微細한 땀샘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땀샘은 꼬물꼬물 움직이지만, 죽은 사람의 땀샘은 움직이지 않는다. G콤은 땀샘이 움직이지 않는 指紋에 對해서는 非常 指紋을 갖다댔을 때와 마찬가지로 銀行에서 非常벨이 울리게 했다. G콤은 이러한 技術을 開發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7年 末 韓國은 IMF 經濟危機를 맞았다. 開發만 할 뿐 完製品을 내놓지 못한 G콤의 經營事情度 크게 惡化됐다. 이미 相當한 컴퓨터 技術을 갖추고 있던 尹氏는 G콤을 지켜보고 있다가 特有의 親和力으로 엔젤(벤처事業 投資家)을 끌어들여 G콤을 引受하고 ‘H 21’(假名)로 會社 이름을 바꾸었다. 尹氏는 指紋認識시스템을 ‘H폰’으로 명명했는데, H폰은 엔젤들 사이에서 큰 關心을 끌었다. H폰(假名)李 해킹이 不可能한 것으로 알려지자 한 市中銀行과 카드會社는 ‘H 21’과 H 폰 使用에 關한 業務提携를 맺었다. H폰과 尹氏에 對한 記事는 여러 言論에 실리게 되었다.

    벤처 創業基金을 빌려주는 한 技術保證基金과 한 市中銀行이 資金을 빌려주었고, H21은 코스닥 上場을 準備했다. 日本에 ‘H 21 字板’을 設立하고, 올해 7月에는 地文을 읽는 센서를 製作하는 美國의 ‘베리디컴’이라는 會社를 引受했다. ‘H 21’李 베리디컴을 引受한 것은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은 格’이었다. H 21이 베리디컴 引受를 試圖하자 CNN과 AP通信·로이터通信 等은 尹氏와 H 21에 對해 詳細히 報道하며 그를 ‘未來의 빌게이츠’로 描寫했다. 때마침 政府는 ‘電子署名에 關한 法’을 만들었는데, H폰은 電子署名時代를 열어갈 唯一한 代案으로 떠올랐다.

    2000年 3月 尹氏는 某 言論社 社長의 紹介로 經濟部處 長官을 지낸 李某氏를 會長으로 迎入했다. 그러나 李氏는 非常勤 會長으로 비즈니스 모델만 諮問해 주다 2000年 末 退任했다. 이렇게 H 21이 잘 나갈 때 記者는 週刊東亞에, 남상문 PD는 SBS에 各各 김옥분 女人 被殺 미스터리를 다룬 記事를 내보낸 것이다.

    김만식氏 母子의 죽음

    두 言論의 報道가 있은 後 김만식氏는 最惡의 狀況에 빠져들고 있었다. 어느 날 충주시에 있는 金氏 夫人이 電話로 “媤누이 事件報道가 있은 後 男便은 抑鬱하다며 일을 하지 않고 爆音만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며 울먹였다. 記者는 “絶對로 興奮하면 안된다. 동생 事件은 過去의 일이다. 男便께서는 家長으로서 家族을 끌고나가야 하니, 마음을 바꾸도록 說得하라”고 當付했다. 大統領 앞으로 歎願書를 作成했던 金氏는 2000年 3月9日 동생이 被殺됐으니 이 事件을 搜査해 달라는 訴狀을 檢察에 提出했다. 홍콩과 싱가포르를 舞臺로 한 事件이니 만큼 이 事件은 서울地檢 外舍部에 配當되었다.

    그해 6月 記者는, 동생 事件을 恨歎하며 술로 지내던 金氏가 술에 醉해 道路邊의 한 가게 마당에서 자다가 後進하는 車에 치여 죽었다는 뜻밖의 消息을 들었다. 金女人이 被殺된 後 어머니와 언니에 이어 오빠마저 죽은 것이다. 얼마後 金氏 家族이 加害者인 運轉士와 合意해 保險金을 받았다는 消息이 들려왔다. 輪對職氏가 事業家로 名聲을 날릴 때 金氏 집안에는 繼續해서 不幸의 그림자가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尹氏의 幸運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1年 10月8日 차근차근 內査를 해오던 서울地檢 外舍部는 이 事件을 맡은 고석홍 檢査를 홍콩에 보내 홍콩 警察로부터 金女人 被殺資料를 넘겨받아 檢討에 들어갔다. 그리고 10月24日 尹氏를 緊急逮捕하고 이틀 後 殺人 및 詐欺嫌疑로 拘束했다.

    이제 숨가쁘게 展開해 온 尹大職 拉北未遂와 김옥분 被殺, 그리고 尹大職 詐欺事件을 整理해 본다. 먼저 尹氏 拉北 未遂事件인데, 서울地檢 外舍部는 이 事件에 對해서는 法廷에서 有無罪 與否를 다툴 수 없다. 이 事件은 김옥분 被殺事件을 構成하는 要素로서만 擧論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事件의 眞實은 밝혀져야 한다.

    南北美수가 眞實이라면 김옥분 被殺事件은 한層 더 迷宮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이 事件이 거짓이라면, 누가 尹氏의 拉北 未遂事件을 造作했는지가 밝혀져야 한다. 當時 安企部에게는 國家安保만큼이나 政權安保가 重要한 課題였을 것이다. 그러나 情報機關에게 더 重要한 것은 眞實한 情報(intelligence)를 지키고, 한 사람의 人權을 保護해 주는 것이다. 眞實한 情報를 지키지 못하고 한 사람의 人權을 保護해주지 못했다면 安企部는 非難받아 마땅하다.

    둘째로는 金女人 被殺事件인데 이 部分은 尹氏 裁判에서 核心 爭點이 될 展望이다. 現在 金女人 被殺事件에 對해 가장 많은 證據를 갖고 있는 것은 홍콩 警察이다. 그러나 홍콩 警察이 作成한 資料는 韓國 法院에서 證據로 採擇되지 않는다(현재 韓國 法院은 韓國 警察에서 만든 資料도 證據로 認定하지 않고 있다). 韓國 法院은 오직 韓國 檢察에서 被疑者가 同意해서 作成한 것만 證據로 認定한다. 때문에 서울地檢 外舍部는 拘束 期間 尹氏를 追窮하여 陳述을 받아내는 것만이 殺人罪를 立證하는 唯一한 方案인데, 果然 尹氏가 自身에게 不利한 陳述을 할 것인가는 未知數다.

    檢察 說明에 따르면 拘束된 尹氏는 “金女人과 夫婦싸움을 하다 金女人이 죽는 바람에, 엉겁결에 놀라서 목을 졸랐다”고 解明했다고 한다. 이러한 主張은 殺害할 意圖 없이 金女人을 때렸는데(혹은 밀쳤는데) 金女人이 死亡해, 놀라서 목을 졸랐다는 게 된다. 이 境遇 直接 死因(死因)은 殺害할 意思 없이 때린 것(或은 밀친 것)이 되고, 목을 조른 것은 直接 사인이 되지 않는다. 殺害할 意思 없이 때렸는데 사람이 죽었다면 이는 暴行致死罪에 該當된다. 刑法 262條는 暴行致死罪의 時效를 7年으로 定하고 있어 法院이 致死罪로 判斷하면 尹氏는 無罪가 된다.

    尹氏 辯護人도 이 點에 注目하고 있다. 그는 “홍콩 警察의 資料는 法的으로 證據가 되지 않는다. 檢察이 그 資料에 依存해 殺人嫌疑를 立證하려는 것은 無理다. 致死인지 殺人인지도 不分明하다”고 指摘했다. 最近 法院은 實體的 眞實은 認定되더라도 證據가 不充分하거나 操作돼 있으면 起訴內容을 認定하지 않는 嚴格한 態度를 取하고 있다. 따라서 尹氏와 尹氏 辯護人이 이런 點에 置重한다면 尹氏의 殺人罪 部分은 無罪가 宣告될 可能性이 높다.

    金女人은 果然 北韓 工作員이었을까?

    尹氏의 詐欺罪 部分은 檢察이 尹氏의 有罪를 誘導하기 위해 副次的으로 붙인 罪目이라는 印象을 준다. 이 部分은 殺人 嫌疑와 더불어 法廷에서 많은 論難을 빚을 것이다. 設使 詐欺罪 部分이 有罪로 認定되더라도 法院은 尹氏가 H폰이라는 新技術을 開發해온 것을 頂上 參酌해, 酌量減輕(酌量減輕, 兄을 輕減해 주는 것)해줄 可能性이 높다. 그러나 過去 檢察에서 無嫌疑 決定을 내린 것에 注目해 起訴 內容을 排斥한다면 尹氏는 詐欺 部分에 對해서도 無罪를 받을 可能性이 있다. 法的인 檢討만으로 살펴본다면 尹氏는 풀려날 可能性이 매우 높은 것이다.

    지난 11月15日 國精院은 ‘수지킴 事件이 歪曲 隱蔽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며 謝過했다. 그렇다면 尹氏도 果然 金女人이 朝總聯系에 包攝된 北韓 工作員이었는지에 對해 眞實을 말해 주어야 한다. 金女人의 집안에서는 金女人이 北韓工作員으로 몰린 것 때문에 여러 사람이 恨을 품고 죽어 갔다. 尹氏는 金女人 집안의 沒落에 對해 道德的으로 責任을 져야한다. 그리고 金女人과 眞實을 保護하지 못한 安企部 亦是 수지킴 家族에게 眞心으로 머리 숙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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