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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遠한 王子兵 金永三·愉快한 獨裁者 金於俊|新東亞

永遠한 王子兵 金永三·愉快한 獨裁者 金於俊

  • 入力 2006-08-11 1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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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 前大統領과 金於俊 딴지일보 總帥는 ‘自己 自身에 對한 認識’의 重要性을 各其 다른 方法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고소영처럼 젊고 魅力的인 女俳優가 황신혜만큼의 나이가 되어 인터뷰를 할 때 흔히 하는 얘기가 있다. 젊은 時節에는 드라마 속의 役割과는 關係없이 自己가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나올 것인가에만 神經을 곤두세웠는데 어느 程度 나이가 드니까 그제야 相對 俳優와의 呼吸도 생각하면서 自身의 配役에 沒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젊은 時節에는 ‘나 自身’을 除外하곤 모든 게 小品이었다는 告白인데 所謂 말하는 ‘公主病的 氣質’이다.

    公主病 或은 王子甁을 精神醫學的으로 分析해보면 ‘徹底하게 自己 中心的인 價値觀으로 世上을 바라보는 思考方式’이며, 한마디로 ‘宇宙의 中心이 나’라는 前提가 깔린 思考方式이다. 本能에 가까운 性向이긴 하지만 大體로 人格的으로 未成熟한 境遇에 자주 發生한다.

    그런데 問題는 成人이 되어서도, 아니 어떤 面에서는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漸漸 더 固定觀念이나 偏見에 사로잡혀 自己 中心的 思考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데 있다. 自己中心的 思考는 ‘自己 自身에 對한 認識의 不在’와 짝을 이룬다. 大部分의 사람들은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믿어 疑心치 않는다. 그러나 果然 그럴까.

    김영삼 前 大統領과 金於俊 딴지일보 總帥는 ‘自己 自身에 對한 認識’의 重要性을 各其 다른 方法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김영삼과 金於俊’이라는 人物 組合 自體를 陰謀論(?)의 視角에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前職 大統領을 敢히 어디다가 比較하는가. 사람에게도 級이 있는데 여기에는 어떤 陰謀가 있을 것이다. TV 討論 프로그램 PD들이 가장 어려울 때가 出演者들이 ‘나는 누가 나오면 안 나간다’거나 ‘누구 以上은 나와야 나도 나간다’는 等으로 等級을 따질 때라고 한다. 그런 우리의 現實을 勘案한다면 筆者의 被害意識도 나름대로 妥當性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歲月의 흐름이나 죽음 같은 自然의 現象이나 自己認識, 生(生)의 意味 같은 哲學的 命題 앞에서 ‘사람의 級’을 따지는 건 無意味하다.



    YS 毒舌, 病的인 自己 中心主義

    김영삼과 金於俊을 ‘自己認識’이라는 精神醫學的 코드로 解釋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生物學的 나이나 社會的 位置를 考慮하지 않고 김영삼과 金於俊이라는 男子를 ‘自己認識’이라는 側面에서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級을 따지기 以前에 充分한 意味가 있을 것이다.

    김영삼은 1993年 2月25日부터 1998年 2月24日까지 滿 5年 동안 大韓民國 第14代 大統領이었다. 法律的으로는 大韓民國을 代表하는 憲法機關이었고 現實的으로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 가장 큰 影響을 끼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他人에 對한 影響力 擴大를 人生의 目標로 삼고 살아온 YS에게는 가장 幸福한 時期였을 것이다.

    그러나 大統領 就任 첫해 90%臺까지 치솟았던 YS의 人氣는 任期 末에는 10% 以下로 떨어졌고, 退任 後 2年 6個月이 지난 現 時點에는 아예 바닥을 치고 있다. 近者에 YS를 擔當하는 記者들이 私席에서 털어놓는 苦悶을 들어보면 그의 人氣가 바닥이라는 게 더 實感이 난다. YS에 關한 記事를 쓰면 “제발 YS를 그만 봤으면 좋겠다”는 讀者들의 抗議가 빗발친다는 것이다. 甚至於 “YS와 붙어먹는 記者 너도 돌대가리”라는 暴言도 퍼붓는단다. YS에 對한 否定的 輿論은 그의 代辯人 노릇을 하는 박종웅 議員의 育成으로도 어김없이 證明된다.

    “내 홈페이지에 글이 많이 올라온다. 그런데 10件 中 9件은 辱이다. 甚至於 YS를 왜 자꾸 따라다니느냐며 ‘둘이 호모냐’라는 辱까지 올라온다. 사람들이 YS를 ‘또라이’라고 하고 나를 ‘꼴통’이라고 하는 것 다 안다. 또 나를 大學도 안 나온 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다 안다.”

    朴議員은 YS에 對한 辱은 이제 頂點을 지났으므로 앞으로는 좋아질 것이라고 展望한다. 누가 맞는지도 時間이 지나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確信한다.

    그러나 한 네티즌은 YS의 막가파式 毒舌을 非難하며 “이젠 손명순女史가 나서야 한다”며 비아냥거린다. 레이건 大統領이 알츠하이머病에 걸렸다는 事實을 美國 國民에게 公開한 낸시女史처럼 孫女史가 YS에 對해 率直히 國民에게 告白하고 某種의 措置를 取하라는 것이다. 대단한 毒舌이지만 그게 YS에 對한 요즘 一般 市民들의 率直하고 感情的인 反應인 듯하다.

    어쩌면 뒷골목 술집에서 按酒삼아 話題에 올릴 만한 얘기까지를 모두 擧論하는 것은 ‘YS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筆者 나름의 苦悶 때문이다. 요즘은 YS에 對한 非難과 貶毁의 發言이 차고 넘친다. 자칫 YS를 向한 ‘입 뭇매’ 하나를 더 보태는데 그치지 않으려면 認識의 제로베이스가 必要하다는 게 筆者의 생각이다. 바닥까지 내려가 YS를 支配하는 心理的 메커니즘을 살펴보자는 말이다.

    YS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自己中心的이라는 評價를 받는데, 問題는 그 程度가 거의 病的이라는 데 있다. 그는 典型的으로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스캔들’式 思考를 한다. 내가 沈默하는 건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거고, 네가 말이 없는 건 생각이 없어서 그렇다는 式이다.

    올해 初 모든 歷史를 自身 中心으로 再構成한 冊이라고 評價받는 그의 回顧錄이 出刊되었을 때 한 雜誌에 실린 漫評이 傑作이다. 祕書官이 그에게 自敍傳에 對한 市中 輿論이 ‘저질스럽기까지 하다’는 쪽이라고 傳한다. 그랬더니 YS는 “그러게 내가 종이도 最高級으로 쓰고 表紙에도 金箔을 넣자고 했잖아”라며 興奮하고 있다. 이보다 더 絶妙하고 的確하게 YS의 ‘내 멋대로’式 思考를 表現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現實世界에서 YS의 엉뚱한 解釋과 堂堂하고 眞摯한 發言은 漫評家의 奇拔한 想像力을 뛰어 넘는다. 美國 大統領 클린턴은 걸핏하면 그에게 電話를 걸어 “YS의 목소리를 듣는 게 내 人生의 樂”이라고 했단다. 勿論 그의 말이다. 지난 5月 ‘신동아’인터뷰에서는 김대중 大統領을 獨裁者라고 非難하면서 “只今 아마 大部分의 사람들이 김대중이 獨裁者다 하는 내 말이 옳다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確信한다. 强力한 野黨의 必要性을 力說하는 그의 말도 예사롭지 않다.

    “내가 野黨 때는 참 무섭게 싸웠어요. 그래서 結局 朴正熙가 죽은 거예요. 나를 國會議員 除名 안했으면 朴正熙는 안 죽었죠.”

    그러나 ‘내 멋대로’式 事故의 金메달감은 斷然 김일성 死亡原因에 關한 그의 診斷이다. 金日成이 頂上會談을 앞두고 갑자기 죽은 건 (自己처럼 氣가 센) 사람과 會談할 準備에 過度하게 神經을 쏟다가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이 程度면 듣고 있던 사람은 할 말을 完全히 잃게 된다. 그럴 때 氣가 막힌 表情으로 YS를 쳐다보고 있으면 아마도 그는 ‘내 氣에 질려 相對方의 얼굴이 파랗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實際로 그렇게 믿고 있다.

    統制力의 錯覺

    心理學 用語 中에 ‘統制力의 錯覺’이라는 게 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世上에 對한 統制力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錯覺인 境遇가 많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現象에 對한 自身의 統制力은 過大 評價하고, 偶然이나 統制 不可能한 要因으로 인한 것은 過小 評價하는 傾向이 있다. 이 現象은 때로는 世上을 肯定的으로 보게 해서 自身의 精神健康을 지키는 要因이 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自己中心的 世上보기에 빠지게도 한다.

    ‘얼마前 韓日戰 蹴球 競技 때 내가 直接 蠶室 運動場에 가서 觀覽을 했더니 우리나라가 1對 0으로 이겼다’ 라거나 ‘내가 아침에 아내와 甚하게 말다툼을 하다가 遲刻을 했더니 오늘 우리 會社 株價가 곤두박질쳤다’ 따위의 생각들이 바로 그것이다. 특정한 狀況이나 다른 사람의 말에 對해서 엉뚱한 解釋을 일삼는 YS의 性向은 一次的으론 그러한 心理的 메커니즘에서 起因한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主人公을 除外한 모든 人物이나 特定 狀況들이 아무런 蓋然性도 없이 主人公 中心으로 展開되는, 3流 作家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感(感)의 政治人’이라거나 ‘政治 9段’이라는 搜査의 正體는 무엇이었을까.

    實狀 YS가 자랑하는 ‘감의 政治’라는 건 多分히 ‘某 아니면 度’式의 意思決定 方式이다. 나름대로는 根據가 있겠지만 萬能이 될 수는 없다. 野球 競技에서 監督이 히트앤드런 作戰을 걸어서 的中하면 그 效果는 暴發的이다. 그렇다고 時도 때도 없이 走者만 나가면 히트앤드런 作戰을 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황산벌 싸움을 앞둔 階伯 將軍이 家族의 後날을 걱정해 血肉의 목을 베는 歷史的 場面의 한 귀퉁이에서 ‘或是라도 이기면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라는 疑問을 가져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YS는 秋毫의 疑心도 없다. YS의 突破力이나 破壞力이 남달라 보이는 理由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自身이 設定한 目標에 對해서는 놀랄 程度의 執念과 確信을 가지고 밀어붙인다. 그러한 스타일은 그와 側近들이 즐겨 使用하는 ‘陰謀論’의 端初가 되기도 한다. 이런 式이다. 午後에 비가 올 거라는 確實한 ‘感’을 가지고 雨傘을 準備해서 나갔는데 햇볕만 쨍쨍하다. 이런 때 YS의 政治的 感覺은 유감없이 發揮된다. 雨傘을 활짝 펴들면서 ‘나를 망신시키고 나의 이미지를 失墜시키기 위해서 비가 올 것 같은 歪曲된 情報를 내게만 주었다’는 陰謀論을 외치는 것이다.

    昨年 5月 페인트鷄卵 事件 때 보인 그의 瞬發力이 바로 그 例가 된다. 個人的인 亡身으로 끝날 뻔(?)했던 일이었는데, 옷을 갈아입으러 自宅으로 돌아가는 車안에서 側近에게 電話를 걸어 自身을 죽이려는 김대중 政權의 陰謀論을 提起한 것이다. 後날 YS는 그 事件을 回顧하면서 野黨에도 問題가 있다고 診斷한다. 民主主義에 依해 國民이 뽑은 大統領이 그 꼴을 當했는데도 野黨이 한마디도 안 했다는 것이다. 獨裁政權과 맞서 싸우던 時節 不退轉의 民主鬪士로서 YS가 보여주었던 엄청난 破壞力은 多分히 그의 이런 特性에서 비롯된 側面이 없지 않다.

    近者에 날개도 없이 墜落하는 그의 行步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많다. YS 特有의 政治的 感覺이 失踪된 듯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筆者는 그것이 ‘거울보기(Mirroring)’에만 固着된 그의 深刻한 精神狀態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自己에 對한 他人의 反應을 통해서 自身을 規定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精神分析學에서 말하는 ‘거울보기’다. 自己 얼굴을 直接 볼 수 없고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例를 들어 아기에게 ‘거울’은 엄마다. 그렇기 때문에 아기는 自己가 하는 行動을 엄마라는 거울에 비춰 보면서 自身을 만들어간다. 엄마가 自己를 보고 웃어주면 自身의 行動이 괜찮았다고 判斷하고, 反對로 엄마가 自己를 보고 火를 내면 그때 自身의 行動은 나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이렇게 사람은 反復的인 거울보기 過程을 거쳐서 自己像(像)을 確立하게 된다.

    1954年 政治에 入門한 以後로 거의 半世紀 동안 YS의 거울은 言論이었다. 그는 言論이 自身을 어떻게 보았느냐에 따라 自身의 現在를 評價하고 또 言論이 잘 보아줌직한 쪽으로 自身의 行動을 맞추어 왔다. 지난 40年 동안 新聞 1面 톱을 가장 많이 차지한 사람이 바로 YS라고 한다. 言論에 對한 YS의 執着은 거의 光跡이다. 言論은 YS 精神世界의 알파와 오메가다.

    勿論 言論이라는 거울이 비춰야 하는 것은 ‘宇宙의 中心’인 YS 自身이다. 言論의 紙面에서 밀리면 自身의 몸을 던져서라도 輿論의 中心에 서야 한다는 게 그의 確固한 믿음이다. 1983年 5月18日 民主化를 要求하며 生命을 건 23日의 斷食鬪爭에 들어갔을 때도 그의 隱密한 關心은 言論이었다.

    斷食을 始作한 當日 國內 新聞의 톱기사가 半달곰 密獵 關聯 事件이었다는 事實은 그를 憤怒케 했다. 斷食 4日째부터 夕刊 1面에 自身의 斷食에 對한 記事가 迂廻的으로 실렸다는 事實을 只今도 그는 正確하게 記憶하고 있다. 23日間 繼續된 斷食鬪爭 期間에 國內外 言論이 어떤 反應을 보였는가를 빠짐없이 記錄한 사람이 바로 YS다. 監獄에 가는 게 軟禁을 當하는 것보다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言論이 直接的인 理由다. 軟禁된 事實은 新聞에도 안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71年 大統領 選擧에서 김대중 候補 支援 遊說를 하던 YS는 4月18日의 奬忠壇 公園 遊說를 言及하며 憤怒를 터뜨린다. 그의 肉聲을 들어보자.

    “이 날 모든 言論의 關心은 그 當時로서는 記錄的인 數字의 群衆이 모여든 서울의 奬忠壇으로 集中되었다. 그러나 이 날 나는 안타까운 心情으로 忠南地域의 僻村을 돌아야 했다. 서울 集會가 열린 바로 그 時刻, 나는 黨의 指示대로 忠南 牙山의 面 所在地에서 비를 맞으면서 쓸쓸한 遊說를 했다. 나의 遊說에는 한 사람의 記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대중 候補와 빚은 政治的인 葛藤을 暫時 論外로 하고 살펴보면 그 쓸쓸함의 根源은 그곳에 記者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인제 前 京畿知事가 自身의 懇曲한 挽留로 不出馬 宣言을 하기로 한 날 連絡도 없이 潛跡해버리자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단다. ‘그 날 言論의 톱은 나리羊 誘拐犯 檢擧 記事였는데, 이인제가 自己 記事를 톱으로 만들기 위해 行方을 감추고 記者會見을 暫時 미루었을 것이다’라고. 勿論 좋게 생각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高利貸金業者처럼 뉴스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게 그다. 그런데 退任 以後 YS는 言論을 통한 거울보기의 機會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

    限껏 治粧하기 좋아하는 女子가 거울을 못보는 苦痛처럼 ‘거울보기’가 어려워진 YS의 焦燥感과 喪失感은 想像을 超越하는 苦痛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한 番만 몸을 던져도 輿論의 中心으로 復歸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두 番 세 番 몸을 던져도 겨우 邊두리 身世니 焦燥할 수밖에 없다.

    YS富者의 心理的 關係

    그는 왜 이처럼 ‘거울보기’에 執着하는 것일까. 그는 生의 初期에 確立되어야 할 正常的인 ‘거울보기’ 過程에 問題가 있었다. 그런데 精神醫學的으로 ‘거울보기’에 問題가 생길 때 나타나는 病이 바로 ‘나르시즘 人格障礙’다. 나르시즘 人格障礙는 두 가지 經路로 생길 수 있다.

    첫째는 어린 時節부터 基本的인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境遇다. 自身의 모습을 肯定的으로 비춰주는 거울이 全혀 없었던 사람들. 이들은 逆說的으로 自己 自身을 뻥튀기(나르시즘火)하면서 虛한 自己 像을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無意識的인 切迫感에서 스스로를 過大하게 包裝하는 것이다.

    둘째는 自身을 지나치게 理想化(overidealization)하는 反應만 보면서 자란 境遇다. 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卽刻的으로 提供되고 그의 欲求는 最優先的으로 考慮된다. 아주 貴한 子息이거나 類달리 過剩 保護的이고 犧牲的인 父母를 가진 아이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現象이다. YS는 典型的으로 둘째 類型이다.

    YS의 할아버지는 巨濟島에서 漁場을 하며 큰 富를 蓄積했는데 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YS의 아버지도 어린 YS를 안아볼 수 없을 程度로 손주를 끔찍이 여겼다고 한다. YS의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이룬 漁場을 물려받아 默默하고 誠實하게 아들의 政治的 뒷바라지를 平生의 業으로 알고 살아온 人物이다.

    政治資金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팔 때마다 아들에게 새로 집을 마련해주는 것은 基本이고 YS의 人間關係 構築에 만만치 않은 役割을 했던 어마어마한 量의 ‘민주멸치’를 提供한 것도 아버지였다. 大統領 當選 直後 “이걸 따는 데 40年이 걸렸습니다”하고 大統領 當選症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感激하는 아들에게 “이제 됐으니 不正 같은 것은 絶對로 하지 마라. 돈이 不足하면 내가 멸치잡아 댈 테니까” 라고 한 아버지의 對答은 그들 父子間의 心理的 關係를 그대로 보여준다.

    父子之間의 살가운 情을 보여주는 美談程度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예순 넷이 된 아들에게 멸치잡아 돈을 繼續 대겠다는 아버지의 配慮는 第3者의 눈에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籠球天才 허재의 아버지가 아들의 氣를 살려 주기 위해서 한 달에 한 番씩 허재가 다니는 學校 近處를 돌아다니면서 아들의 飮食店 외상값을 갚아주었다는 에피소드와 비슷한 脈絡이다.

    그가 젊었을 적 家族들과 찍은 어느 寫眞을 보니 YS는 소파에 다리를 꼰 채 여유롭게 앉아 있고 孫女史가 그 옆에 있는데, 아버지 김홍조翁은 손주들과 함께 뒷자리에 서 있다. 여느 家族 寫眞이라면 年老한 아버지를 中心으로 나머지 食口들이 자리를 잡을 법한데 그 家族의 中心은 明白히 YS인 模樣이다.

    모든 人間은 出生 後 1年까지는 正常的인 發達過程의 一部로 나르시즘機가 存在한다. 이때 아기는 自身의 本能的 欲求를 채우는 것에만 關心이 集中되어 있다. 배고프면 울고, 울면 卽時 自己 입으로 젖꼭지가 들어와야만 한다. 이때 아기는 엄마가 어떤 存在인지 알지 못하며 알 必要도 없다. 關心의 對象은 배고픔을 달랠 엄마 젖 뿐이다. 그것이 누구 젖이건 相關없다. 고무 젖꼭지라도 牛乳만 나온다면 엄마의 젖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때의 아기에게 엄마는 自己 欲求를 解決해줄 수 있는 젖을 提供하는 對象으로만 意味가 있게 된다. 나르시즘期의 人間에게 對象이란 對象(object) 그 自體가 아니다. 自身의 欲求를 채워주는 意味로만 存在하는 部分 客體(part object)일 뿐이다.

    그런데 YS의 아버지는 그의 어린시절뿐 아니라 平生 동안 그의 아들에게 部分 客體로 存在했던 것 같다.

    집안·言論·地域의 YS 過剩保護

    그는 1남5女 中 長男이다. 四寸을 통 틀어서 男子 兄弟가 한 名 뿐인 그의 집안에서 “그의 出生은 그 自體만으로 엄청난 祝福이요 傾斜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온 집안의 귀여움을 獨차지하면서 자랐다. YS는 平生에 걸쳐 세 곳으로부터 過剩保護를 받았다는 評價를 받는데, 그의 집안과 言論과 地域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診斷이다.

    大部分의 사람들은 生後 1年 間의 나르시즘 時期가 지나면 차츰 이 構圖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反해, YS는 平生 동안 繼續된 過剩保護로 自己欲求만 생각하게 되는 症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주 指摘하는 YS의 傲慢과 獨善은 이러한 心理的 패턴을 바탕으로 한다. YS는 敎會에서 祈禱를 할 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成長했고 그런 態度를 信念化했다.

    그의 寫眞을 가만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게 있다. 寫眞 속의 그는 大部分 뒷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中學校 때 寫眞에서부터 그런 習慣이 나타난다. 初選議員 時節 自身의 精神的 代父라고 할 수 있는 趙炳玉 博士 等의 政治先輩와 寫眞을 찍을 때도 뒷짐을 지고 있으며, 46歲의 最年少 野黨 總裁로 國會에서 代表演說을 할 때도 그렇다.

    山行을 하면서 찍은 寫眞 속의 YS도 大部分 뒷짐을 지고 있다. 남들에게 訓示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取하는 제스처가 뒷짐이며, 自身의 堂堂함이나 强者로서 自身의 地位를 나타내는 象徵的 제스처가 뒷짐이다.

    YS는 다른 사람을 言及할 때 呼稱을 붙이는 境遇가 거의 없다. 그가 擧論하는 大部分의 사람들은 所謂 社會的 公認 位置에 있는 사람들인데도 특별한 境遇가 아니면 呼稱없이 이름만 擧名한다. 김대중이가, 이인제가, 이회창이는… 每事가 그런 式이다.

    DJ가 自己보다 나이가 몇살 많지만 自身이 國會議員이 먼저 되고 大統領을 먼저 했으므로 政治的 先輩라는 게 그의 主張이다. 自由黨 때의 원용덕 將軍이나 維新時代의 김형욱 前情報部長 等과의 關係를 回顧하면서, 그들 모두가 自身보다 年上이었지만 自己에게 兄님이라고 불렀다는 事實을 빼놓지 않고 밝힌다. 勿論 自身이 그만큼 대가 셌기 때문에 可能했다는 것이다.

    또 그가 잘 使用하는 말 中 하나는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는 것이다. 鄭周永 名譽會長이나 朴泰俊 前抛撤會長, 박철언 議員 等은 모두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YS에게 困辱을 치른 사람들이다. 甚至於 日本이라는 國家에 對해서도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한다고 말한다.

    YS에게 善惡의 基準은 오로지 自身이다. 自身이 統制할 수 있고 自身을 支持하면 線이요, 自身의 影響力이 미치지 않거나 自身과 反對의 立場을 取하면 그건 바로 惡이다. 그는 自身의 精神世界 안에서 稱頌받고 尊敬받아야 할 人物로 自身을 規定한다.

    나르시즘은 對人關係 自體를 存在하지 않게 한다. 그의 精神世界에는 自身과 自身의 欲求만 存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他人의 存在를 前提로 하는 批判을 受容하는 일 따위는 나르시즘과 애初에 同寢이 不可能한 짝이다.

    YS에게 火를 내거나 그의 意見에 反對한 사람은 비록 그가 어제의 同志일지라도 그 瞬間부터 敵이 된다. 그는 只今도 未分化된 心理構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狀態에서 ‘自己 自身에 對한 올바른 認識’을 注文하는 것 自體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지난 해 한 時事 週刊誌에서 1年 동안 가장 影響力이 있는 言論媒體 順位를 調査했더니 인터넷 미디어로서는 最初로 딴지일보가 17位로 選定되었다고 한다. 이쯤되면 새로운 形態의 言論權力이라고 評價받을 만하다. 制度圈 言論權力의 傲慢放恣함에 對한 膺懲을 標榜하고 있는 딴지일보 쪽에서 보면 別로 愉快하지 않은 解釋일 수도 있겠지만, 心情的인 次元과는 別個로 現實 世界에서 딴지일보의 影響力은 漸次로 莫强해지는 느낌이다.

    98年 7月4日 ‘웹진 形態의 個人 홈페이지’로 出發한 딴지일보는 349日 만인 昨年 6月16日 照會數 1000萬 番을 突破했고, 2000年 9月 現在 照會數가 約 2900萬 番에 達하고 있다. 하루에 3萬 番 以上, 한 달에 100萬 番 以上의 照會數를 記錄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趨勢라면 10月이나 11月쯤에는 照會數 3000萬 番이라는 경이로운 記錄이 達成될 것이고, 影響力있는 言論 媒體의 順位調査에서도 上位에 랭크될 것이 틀림없다.

    이 莫强한 딴지일보의 總帥이자 發行人이 바로 金於俊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을 金於俊을 紹介하면서 北韓의 指導者를 紹介하듯 巨創하고 긴 修飾語를 붙이는 데는 나름의 理由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의 級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딴죽걸기를 被害報告 싶은 마음에서다. 單 몇千部를 發行하는 新聞社 發行人도 地域 有志로 行世할 수 있는 우리 風土에서 거의 3000萬 番의 照會數를 記錄하고 있는 言論社의 發行人이라면 그의 位相에 對해서 더 말할 必要가 없다.

    김어준은 1968年 慶南 鎭海에서 出生했다. 서울에서 高等學校를 卒業하고 서울대에 試驗쳤다가 세 番 떨어진 後 弘益大學校 電氣工學科에 入學했다. 마음을 비운 뒤 工夫에 沒頭하고 싶어 大學 1學年 때 最初의 背囊旅行을 다녀왔는데 그 以後 無慮 3年 동안 이스라엘, 터키, 이집트 等 40餘 個國을 旅行했다.

    미당의 詩句를 빌려서 表現해 본다면 只今의 金於俊을 키운 건 9割이 旅行이었다. 95年 大學卒業 後 浦項製鐵 海外營業部에 勤務하던 어느날 ‘金代理는 只今 背囊旅行 中입니다’라는 某그룹의 新聞廣告를 보고 入社 8個月 만에 退社했단다. 勿論 旅行을 가기 위해서다. 집에는 出張간다고 말한 後 짐을 꾸려서 이집트로 날아갔다.

    김어준은 이집트라는 나라에 남다른 愛情이 있는 模樣이다. 이집트에 가면 詐欺꾼도 많고, 바가지도 甚하고, 나라 全體가 市場通같고 어수선한데, 그런 게 마음에 든단다. 그 理由가 재밌다. 主流라는 게 없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냥 다들 떠들고 祝祭 같고 무엇보다도 個人의 삶에 對한 抑壓이나 不當한 要求, 속임數 이런 게 없어서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가 이집트에서 느끼는 親近함이나 好感은 그대로 金於俊과 딴지일보가 追求하는 哲學과 一致한다.

    이집트에서 歸國 後 旅行關聯 IP事業과 이벤트 事業, TV 다큐멘터리를 企劃 製作하는 일에 從事한다. 特히 背囊旅行中에 만났던 入養兒들을 素材로 한 作品으로 다큐멘터리 映畫祭에서 對象을 受賞하면서 그는 예사롭지 않은 企劃能力을 드러내기 始作한다. 背囊旅行과 인터넷을 結合한 新種 旅行商品을 開發해서 經濟的 豐饒를 謳歌하던 김어준은 IMF를 맞아 數千萬원의 빚을 지고 猝地에 失業者 身世가 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딴지일보는 그때 時間은 남는데 할 거는 없고 그래서 심심풀이로 만들어 본 個人 홈페이지라고 한다. 딴지일보를 만들고 처음 몇個月間 김어준은 發行人 執務室이었던 안房 구석에서 그룹總帥, 發行人, 編輯長, 取材記者,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輪轉機社, 淸掃夫 노릇을 혼자서 다 堪當해냈다. 밤 10時부터 始作해 새벽 5時까지 일을 하는 밤샘作業이 大部分이었다. 當時 딴지일보를 통한 收益이나 薔薇빛 靑寫眞이 없는 狀況에도 그처럼 꿋꿋할 수 있었던 뒷심은 旅行 經驗이었다는 게 金於俊 自身의 診斷이다.

    旅行 經驗에서 얻은 易地思之

    김어준은 틈만 나면 旅行의 重要性을 强調한다. 딴지일보를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視角이나 豐富한 素材, 사람을 愉快하게 하는 패러디 等은 大部分 그의 旅行經驗에서 비롯한다. 그가 글이나 인터뷰에서 자주 言及하는 中東地方의 旅行談을 들어보자.

    그는 아랍을 旅行하기 前까지는 아랍人들에 對해서 宏壯히 否定的인 先入見이 있었다고 말한다. 宗敎心이 强하고 排他的이고 어설프고 게다가 테러리스트, 한마디로 나쁜 놈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猶太人은 머리 좋고 逆境을 이겨낸 民族, 우리便이라는 생각이 强했다고 한다. 그런데 實際로 아랍을 旅行하면서 김어준은 큰 衝擊을 받는다. 아랍 버스에 올라와 檢問을 하는 이스라엘 軍人은 아랍의 便에서 보면 日本巡査였고, 팔레스타인人의 爆彈投擲을 그들의 등뒤에서 봤더니 바로 우리 尹奉吉 義士의 도시락 爆彈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게 그의 主張이다.

    지나치게 單純化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金於俊이 느낀 衝擊의 强度나 哲學的 苦悶이 그대로 실려 있는 에피소드다. 그렇게 先入見을 없애고 뒤집어서 생각해 본 經驗이 딴지일보를 만드는 原動力이 되었다는 것이다.

    獨逸 프랑크푸르트 空港도 그에게 값진 敎訓을 주었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金浦空港처럼 吸煙박스가 따로 없이 사람들이 廳舍 안에서 담배를 피운단다. 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의 權益을 尊重해 吸煙박스를 만들지 않느냐는 質問에 對한 對答이 意味深長하다. 換氣施設에 더 投資해 다른 사람에게 被害가 안 가게 하면 되지 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權利를 制約하는가.

    김어준은 그런 經驗들에서 人間을 中心으로 한 發想 轉換의 必要性을 體得한다. 그가 强調하는 다양한 視角이란 易地思之(易地思之)에 다름 아니며 均衡感覺의 또다른 表現이다. 그의 均衡感覺은 모차르트의 輕快함을 진중하게 表現할 줄 아는 신동처럼 多分히 天性的이다. 金於俊의 均衡感覺은 그의 分身이랄 수 있는 딴지일보에 그대로 묻어 있다.

    김어준은 올해 初 800億원이라는 天文學的인 金額의 딴지일보 引受 提議 件을 拒絶했다. 팔고 싶지 않은 게 첫째 理由고, 둘째는 앞으로도 自身이 생각한 方向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感傷的인 理由만으로 引受提議를 拒絶했다면 그건 딴지일보의 金於俊이 아니다. 그 理由를 들어보자.

    “8兆원짜리度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堂堂하고 호기롭다.

    김어준은 YS와는 또다른 側面에서 傲慢과 獨善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의 傲慢과 獨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꼬집지 않는다. 오히려 귀엽고 愉快하다. 딴지일보가 ‘우짜겠습니까, 니가 참아야지’ 따위의 徹底한 무(無) 서비스精神을 標榜하는 것도 그런 脈絡이다.

    딴지記者들은 自身들의 新聞을 組暴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김어준總帥가 짱이므로 딴지에 忠誠을 盟誓한 記者들은 自身의 모든 自由와 權利를 總帥에게 一任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傲慢과 獨善, 獨裁가 또 있겠는가. 김어준은 딴지일보를 ‘1人新聞’으로 運營할 때부터 이런 氣質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딴지 1號를 인터넷에 띄우고 혼자 하릴없이 照會數를 올리다가 야후코리아 서핑팀長에게 메일을 하나 보낸다.

    ‘任命狀. 貴下를 本誌의 第1號 弘報擔當 任員으로 職權에 依據 落下傘 임명함. 反抗은 禁物이며…. 딴지그룹 發行人’

    一面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야후의 서핑팀長은 딴지의 弘報擔當 任員이 되어 딴지일보를 네티즌들에게 알리는 1等 功臣이 되었단다. 創刊社說度 그러한 金於俊의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쓰윽 한番 돌아보자. 왜? 글쎄 보자면 한番 보자. 딴지일보는 이 巨大한 흐름 속에서 나름대로 제 목소리 한番 내보려는 작고 稀罕한 지랄빵이다. 때론 失手하고 그러더라도 봐주기 바란다. 귀엽잖은가. 發行人.”

    딴지의 報道原則이라는 것도 徹底하게 그런 傲慢과 獨善을 바탕으로 한다. 讀者의 抗議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讀者에게 辨明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딴지의 讀者들은 金於俊과 딴지의 ‘귀여운 傲慢과 獨善’을 充分히 受容하고 즐기기까지 한다. 潛在的인 被虐 性向의 充足 때문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適切하게 稼動되는 雙方向 關係이기 때문이다. ‘따로 또 같이’의 關係라고나 할까. 金於俊의 말을 直接 들어보자.

    “讀者들이 딴지와 關聯해서 어떤 ‘提案’을 해올 때는 充分한 答辯을 합니다. 하지만 딴지가 잘못한 部分에 對한 指摘이나 批判을 해오면 그냥 놔둡니다. 왜냐하면 그 指摘이나 批判 自體는 그 讀者가 言論으로 기능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於此彼 ‘1人言論’의 實現이 딴지의 모토이기 때문에 저는 指摘이나 批判을 하는 讀者도 하나의 言論으로 看做하고 싶은 겁니다. 딴지라는 하나의 言論媒體와 그것을 享有하는 讀者의 關係는 拒否합니다. 그래서 아무 대꾸도 안합니다. 情 귀찮게 구는 讀者가 있으면 저는 이렇게 對答합니다. ‘그래? 그럼 니가 만들어.’”

    얄미울 만큼 限界가 明確하다. 2年間 體重이 24kg이나 增加한 데다 鬚髥까지 길러 얼핏 散炙을 聯想케 하는 外貌지만, 金於俊을 볼 때마다 여우같다는 느낌을 받는 건 바로 그런 理由일 것이다.

    그는 自身의 이런 性向이 父母님의 影響 때문일 거라고 말한다. 좀 特異하게 김어준은 父母의 完全 放任 속에서 자랐다. 工夫를 잘해도 잘했다는 말을 안하고, 못해도 ‘工夫해’라는 말을 안하고, 그래서 한때는 父母님이 自身에게 아무 關心이 없다고 深刻하게 생각했단다. 맛있는 게 있으면 父母님들만 드시면서 ‘너는 먹을 날이 많이 남았잖아, 이 子息아’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金於俊의 아버지는 還甲이 넘은 아들에게 멸치잡아 돈을 대겠다는 YS의 父親과는 아주 對照的인 스타일인 模樣이다. 그러니까 簡單하게 말하면 父母가 子息에게 해주는 게 거의 없는 代身에 統制나 參見도 一切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그런 關係 속에서 해주는 것이 없다는 생각보다는 統制없는 시스템 속에서 自律的인 人間이 되었다고 告白한다. 마음대로 하되 그 結果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딴지일보가 말을 막 하는 것 같지만 實際로는 根據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無責任한 짓은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出版人 김규항은 金於俊을 獨特한 人間이라고 말한다. 運動圈이라든가 제대로 學習을 했다든가 하는 따위의 經驗이 거의 없으면서도 世上을 바라보는 눈이 대단히 正確하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늘 常識에 根據해 判斷하려 한다고 말한다. 實狀 딴지일보度 우리나라에서 30年 以上을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느낀 問題點을 發言하는 것으로, 그 以上이 없다고 한다. 그 單純하고 當然한 時刻에 3000萬 番 以上의 歡呼와 支持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처음에 “그러다 오빠가 잡혀가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많이 했단다.

    김어준은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좀 다르다.

    “저 페미니스트 아니에요. 戶主制를 廢止해야 하는 건 當然합니다. 男子 女子 差別 안 해야 하는 거 常識 아닌가요? 너무 當然한 걸 가지고 지가 페미니스트라고 잘난 척하는 男子들, 저 理解 못해요.”

    亦是 常識의 水準을 力說한다. 다른 웹진은 適當히 폼을 雜誌만 딴지가 그의 表現처럼 ‘씰데없는’ 폼을 잡을 必要가 없는 건 常識을 尊重하는 그의 믿음 때문일 것이다.

    均衡感覺을 擔保로 한 常識의 尊重

    常識의 尊重은 均衡感覺을 擔保로 한다. 均衡感覺이 鈍해지면 常識이 아닌 일도 常識이라고 우길 수 있기 때문이다. 均衡感覺을 잃지 않는 가장 좋은 方法은 나와 타자(他者)사이에서 ‘나에 對한 認識’을 確實히 하는 것이다. 勿論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서른 두 殺人 김어준은 그 쉽지 않은 일에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내던지고 있다. 只今 一部에서는 딴지일보가 이 社會의 不條理에 맞서서 어떻게 기능하고 어떻게 자리매김될 것인가를 社會的이고 學術的인 次元에서 接近하는 硏究들이 進行되고 있다. 有益하고 바람직한 試圖라고 생각한다.

    筆者는 그런 硏究에서 딴지일보가 우리에게 던지는 自己 認識의 重要性에 對한 言及도 한番쯤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딴지일보는 金於俊이라는 이 젊은 總帥와 ‘암수한몸’이기 때문이다.

    元來 總帥(總帥)란 大企業 等 큰 組織體나 集團을 거느리는 사람을 말한다. 어쩌면 그는 멀지 않은 將來에 딴지일보를 8兆원 規模의 會社로 키워 眞짜 總帥로 就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筆者는 金於俊이 ‘딴지그룹 總帥’로서만이 아니라 自身의 크고 複雜한 마음을 效率的으로 統制할 수 있는 ‘마음의 總帥’로 登極하기를 眞心으로 바란다.

    마지막으로 秋夕을 앞두고 易地思之(易地思之)의 精神을 說破하는 金於俊의 말을 들어보자.

    “왜 放送은 秋夕 때마다 성룡 映畫를 그토록 再訪 三防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거 PD들이 골라냈을 텐데, 그 사람들한테 묻고 싶어요. ‘니넨 그거 재밌니? 니들이 재미없으면 우리도 재미없어’.”

    재미있고 존경스러운 젊은 總帥다.

    美國의 어느 젊은 記者가 ‘美國 國會議員들은 모두 다 低能兒다’라는 新聞 記事를 作成했다고 한다. 그 文章을 미리 본 古參記者는 그에게 忠告했다. 그 記事가 나가면 國會議員들의 抗議가 빗발칠 것이다. 그러니 한 句節만 追加瑕疵. 다시 고친 文章은 이랬다.

    ‘美國 國會議員들은 한 名만 빼고 모두 다 低能兒다.’

    記事가 나간 後 抗議한 國會議員은 한 名도 없었단다. 國會議員들은 모두 그 ‘한 名’이 바로 自己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自己에 對해서 제대로 認識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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