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쾅쾅!”
“39號! 令監님! 계세요? 門 좀 열어보세요!”
서울 동대문구의 한 考試院. 4層 39號는 如前히 對答이 없었다. 모두 24個의 房이 모여 있는 이곳. 겨우 사람 하나 누울 자리가 마련된 個人실은 꼼지락거리기만 해도 壁을 넘어 소리가 새어나온다.
한데, 門 두드리는 소리가 저 끝에서도 울리건만. 39號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發見
2021年 1月 11日. 考試院은 午前부터 시끄러웠다. 期於코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李 이곳마저 덮쳤다. 35號室에 사는 住民이 確診됐다는 消息. 이영숙(假名) 院長은 모든 房을 노크하고 다녔다.
“우리 考試院度 確診者 나왔대. 다들 檢査받으러 가셔야 해.”
하지만, 39號는 如前히 反應이 없다.
“이 兩班 아침부터 안 보이더니, 어디 外出이라도 나갔나?”
뭔가 不吉했다. 或是나 싶어 門을 힘껏 밀어본다. 겨우 요만한 틈새로 안쪽 風景이 비쳤다. 시커먼 손이 보였다. 微動도 하지 않는 손이.
깜짝 놀란 李 院長은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携帶電話를 꺼내들었다.
“119, 119
···
.”
그때가 午後 5時 59分이었다.
緊急 出動한 救急隊員들. 아무리 밀어도 門이 꼼짝하질 않는다. 結局 複道로 난 窓門을 뜯고 進入했다. 午後 6時 20分. 이미 숨이 끊긴 채 싸늘히 식은 屍身.
강정식 氏는 考試院 院長의 申告로 1月 11日 午後 6時 20分 1坪 남짓한 房 안에서 숨진 채 發見됐다. 姜 氏가 지낸 곳에는 이미 다른 住民이 居住해 같은 構造의 다른 放漫 確認할 수 있었다. 송은석 記者 silverstone@donga.com
享年 79歲. 강정식(假名) 氏는 그렇게 世上을 떠났다.
1月 12日. 防疫守則에 따라 病院에 옮겨진 屍身은 코로나19 檢査부터 進行됐다. 陽性 反應이 나왔다. 剖檢도 할 수 없는 狀況. 死亡原因은 ‘不明’.
“어젯밤만 해도 기척이 들렸는데
···
.”
옆房 住民의 陳述에 따라 死亡一時는 ‘11日 0時 推定’으로 남았다.
‘死亡 後 코로나19 陽性 判定.’
그리고,
‘서울 2萬1915番 確診者.’
三兄弟
이날 午後. 강상준(假名·50) 氏의 携帶電話가 울렸다.
“여보세요?”
“或是, 강상준 先生님이 맞으실까요?”
“네, 접니다.”
“
···
住民센터입니다. 아버님이 강정식 先生님이시죠? 父親께서 어제 午後에 小天下셨습니다.
···
”
暫時 흐르는 沈默. 상준 氏는 “아
···
”라 입을 떼다 한참 뜸을 들였다. 아버지란 單語를 입에 담아보는 게 얼마 만일까.
“아버지는
···
. 어떻게 지내다가 떠나셨습니까?”
“돌아가시기 前까지 考試院에서 혼자 지내셨어요.”
당황스러웠다. 슬프진 않았다. 그냥 당황스러웠다. 이미 오래前 우리를 떠났던 사람. 單 한 番도 따뜻하게 안아준 記憶이 없는 사람. 그가, 혼자 世上을 떠났다.
現在
過去
1975年 어느 날. 아버지가 집을 떠났다. 當時 상준 氏는 네 살, 동생은 갓 돌을 지났을 때였다. 離婚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서울로 가셨다고 했다. 論山에 남은 三兄弟는 結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父母가 떠난 아이들. 삶은 豫想보다 더 困窮했다. 찢어지게 가난하단 表現이 딱 들어맞았다. 할머니는 논에서 이삭을 주워가며 孫子들을 거둬 먹였다. 상준 氏의 兄은 먼 登校길을 古物自轉車로 버텼다. 그들은, 아버지가 미웠다.
論山
서울
2009年 1月 늦은 밤. 강정식 氏는 이제야 몸을 누였다. 서울 都心 속 좁아터진 낯선 天障의 考試院. 예순일곱. 늙어버린 몸.
手中에 돈이라곤 없었다. 隱退 뒤 두 番째 離婚. 月貰 23萬 원이 없어 親舊가 빌려줬다. 손끝이 아리는 추운 겨울. 홀로 移徙짐을 날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차마 아이들에게 손 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홀로 始作한 考試院 生活은 想像보다 더 괴로웠다. 考試院은 ‘외딴 섬’이었다. 누우면 외로움이 물밀 듯 몰려왔다. 그럴수록 姜 氏는 더 몸부림쳤다. 아침마다 場을 봐 直接 料理를 해먹었다. 꼭 다림질한 셔츠와 正裝을 갖춰 입고 外出했다.
강정식 氏가 셔츠와 正裝 洗濯을 자주 맡겼던 서울 東大門區 洗濯所. 그는 老年에 考試院에서 홀로 生活하면서도 恒常 다림질한 셔츠와 正裝을 갖춰 입고 다녔다. 송은석 記者 silverstone@donga.com
“姜 先生님은 여느 分課는 좀 달랐어요. ‘순둥이’라고나 할까. 점잖으시고, 남한테 弊 끼치는 行動은 絶對 안 하셨어요. 언젠가 넌지시 子女 얘기를 에둘러 꺼내신 적도 있긴 한데,
왠지 남모를 아픔이 느껴져 仔細히 여쭤보지도 못했죠.”(당시 考試院의 김종근 院長)
歲月은 그들의 關係를 돌려놓지 못했다. 時間이 흘러 아버지와 아들들은 가끔 安否 電話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오가는 形式的인 말들뿐. 따뜻한 慰勞나 걱정은 주고받질 못했다.
상준 氏는 한참 뜸을 들였다. 아버지가 考試院에서 혼자 生活한다는 걸 알게 된 뒤 苦心 끝에 동생에게 털어놨다. 그래도 아버지인데, 用돈이라도 모아드리자고. 동생의 反應은 차가웠다.
“글쎄요, 兄. 전 좀 생각해볼게요.”
充分히 理解가 됐다. 말도 떼기 前에 子息을 떠난 아버지. 힘들 때 옆에 없었던 아버지. 情이 남아있을 理가 없었다.
“아버지 없이 커서 삶이 팍팍했어요. 世上살이에 지치기도 많이 지쳤고요. 2016年 永登浦驛 近處에서 잠깐 뵌 게 마지막이네요. 누굴 돌볼 餘力조차 없었습니다.”(상준 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