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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진 아버지

멀어진 아버지

코로나가 영원히 지웠다

강정식(假名) 氏는 1月 13日 午後 서울 서초구 서울追慕公園에서 큰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火葬됐다.
姜 氏의 屍身은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 事後 確診 判定을 받고 葬禮 意識도 치르지 못한 채 火葬場으로 옮겨졌다.
그의 棺이 놓여 있었던 火葬 施設을 取材記者가 應試하고 있다. 송은석 記者 silverstone@donga.com
“쾅쾅쾅!”

“39號! 令監님! 계세요? 門 좀 열어보세요!”
서울 동대문구의 한 考試院. 4層 39號는 如前히 對答이 없었다. 모두 24個의 房이 모여 있는 이곳. 겨우 사람 하나 누울 자리가 마련된 個人실은 꼼지락거리기만 해도 壁을 넘어 소리가 새어나온다.

한데, 門 두드리는 소리가 저 끝에서도 울리건만. 39號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發見
2021年 1月 11日. 考試院은 午前부터 시끄러웠다. 期於코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李 이곳마저 덮쳤다. 35號室에 사는 住民이 確診됐다는 消息. 이영숙(假名) 院長은 모든 房을 노크하고 다녔다.

“우리 考試院度 確診者 나왔대. 다들 檢査받으러 가셔야 해.”

하지만, 39號는 如前히 反應이 없다.

“이 兩班 아침부터 안 보이더니, 어디 外出이라도 나갔나?”

뭔가 不吉했다. 或是나 싶어 門을 힘껏 밀어본다. 겨우 요만한 틈새로 안쪽 風景이 비쳤다. 시커먼 손이 보였다. 微動도 하지 않는 손이.

깜짝 놀란 李 院長은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携帶電話를 꺼내들었다.

“119, 119 ··· .”

그때가 午後 5時 59分이었다.

緊急 出動한 救急隊員들. 아무리 밀어도 門이 꼼짝하질 않는다. 結局 複道로 난 窓門을 뜯고 進入했다. 午後 6時 20分. 이미 숨이 끊긴 채 싸늘히 식은 屍身.
강정식 氏는 考試院 院長의 申告로 1月 11日 午後 6時 20分 1坪 남짓한 房 안에서 숨진 채 發見됐다. 姜 氏가 지낸 곳에는 이미 다른 住民이 居住해 같은 構造의 다른 放漫 確認할 수 있었다. 송은석 記者 silverstone@donga.com
享年 79歲. 강정식(假名) 氏는 그렇게 世上을 떠났다.

1月 12日. 防疫守則에 따라 病院에 옮겨진 屍身은 코로나19 檢査부터 進行됐다. 陽性 反應이 나왔다. 剖檢도 할 수 없는 狀況. 死亡原因은 ‘不明’.

“어젯밤만 해도 기척이 들렸는데 ··· .”

옆房 住民의 陳述에 따라 死亡一時는 ‘11日 0時 推定’으로 남았다.
‘死亡 後 코로나19 陽性 判定.’ 그리고, ‘서울 2萬1915番 確診者.’
三兄弟
이날 午後. 강상준(假名·50) 氏의 携帶電話가 울렸다.

“여보세요?”

“或是, 강상준 先生님이 맞으실까요?”

“네, 접니다.”

··· 住民센터입니다. 아버님이 강정식 先生님이시죠? 父親께서 어제 午後에 小天下셨습니다. ···

暫時 흐르는 沈默. 상준 氏는 “아 ··· ”라 입을 떼다 한참 뜸을 들였다. 아버지란 單語를 입에 담아보는 게 얼마 만일까.

“아버지는 ··· . 어떻게 지내다가 떠나셨습니까?”

“돌아가시기 前까지 考試院에서 혼자 지내셨어요.”

당황스러웠다. 슬프진 않았다. 그냥 당황스러웠다. 이미 오래前 우리를 떠났던 사람. 單 한 番도 따뜻하게 안아준 記憶이 없는 사람. 그가, 혼자 世上을 떠났다.
現在 過去
1975年 어느 날. 아버지가 집을 떠났다. 當時 상준 氏는 네 살, 동생은 갓 돌을 지났을 때였다. 離婚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서울로 가셨다고 했다. 論山에 남은 三兄弟는 結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父母가 떠난 아이들. 삶은 豫想보다 더 困窮했다. 찢어지게 가난하단 表現이 딱 들어맞았다. 할머니는 논에서 이삭을 주워가며 孫子들을 거둬 먹였다. 상준 氏의 兄은 먼 登校길을 古物自轉車로 버텼다. 그들은, 아버지가 미웠다.
論山 서울
2009年 1月 늦은 밤. 강정식 氏는 이제야 몸을 누였다. 서울 都心 속 좁아터진 낯선 天障의 考試院. 예순일곱. 늙어버린 몸.

手中에 돈이라곤 없었다. 隱退 뒤 두 番째 離婚. 月貰 23萬 원이 없어 親舊가 빌려줬다. 손끝이 아리는 추운 겨울. 홀로 移徙짐을 날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차마 아이들에게 손 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홀로 始作한 考試院 生活은 想像보다 더 괴로웠다. 考試院은 ‘외딴 섬’이었다. 누우면 외로움이 물밀 듯 몰려왔다. 그럴수록 姜 氏는 더 몸부림쳤다. 아침마다 場을 봐 直接 料理를 해먹었다. 꼭 다림질한 셔츠와 正裝을 갖춰 입고 外出했다.
강정식 氏가 셔츠와 正裝 洗濯을 자주 맡겼던 서울 東大門區 洗濯所. 그는 老年에 考試院에서 홀로 生活하면서도 恒常 다림질한 셔츠와 正裝을 갖춰 입고 다녔다. 송은석 記者 silverstone@donga.com
“姜 先生님은 여느 分課는 좀 달랐어요. ‘순둥이’라고나 할까. 점잖으시고, 남한테 弊 끼치는 行動은 絶對 안 하셨어요. 언젠가 넌지시 子女 얘기를 에둘러 꺼내신 적도 있긴 한데,

왠지 남모를 아픔이 느껴져 仔細히 여쭤보지도 못했죠.”(당시 考試院의 김종근 院長)

歲月은 그들의 關係를 돌려놓지 못했다. 時間이 흘러 아버지와 아들들은 가끔 安否 電話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오가는 形式的인 말들뿐. 따뜻한 慰勞나 걱정은 주고받질 못했다.

상준 氏는 한참 뜸을 들였다. 아버지가 考試院에서 혼자 生活한다는 걸 알게 된 뒤 苦心 끝에 동생에게 털어놨다. 그래도 아버지인데, 用돈이라도 모아드리자고. 동생의 反應은 차가웠다.

“글쎄요, 兄. 전 좀 생각해볼게요.”

充分히 理解가 됐다. 말도 떼기 前에 子息을 떠난 아버지. 힘들 때 옆에 없었던 아버지. 情이 남아있을 理가 없었다.

“아버지 없이 커서 삶이 팍팍했어요. 世上살이에 지치기도 많이 지쳤고요. 2016年 永登浦驛 近處에서 잠깐 뵌 게 마지막이네요. 누굴 돌볼 餘力조차 없었습니다.”(상준 氏)

2020年 12月 20日. 姜 氏는 12年을 보낸 考試院을 떠났다.
建物이 再開發되며 쫓겨나듯 나와야 했다.

어렵사리 찾은 동대문구의 다른 考試院. 더 낡고 퀴퀴했지만
비슷한 月貰에 滿足했다.

또다시 낯선 天障. 좁디좁은 房과 어두운 複道.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지만 강정식 氏가
이곳에 머문 건 겨우 3週밖에 되질 않았다.

강정식 氏가 生前에 3週間 머물렀던 考試院의 複道. 複道는 成人 男性 1名이 艱辛히 지나갈 수 있을 程度로 비좁고 어둡다. 송은석 記者 silverstone@donga.com
姜 氏의 죽음은 考試院을 뒤집어놓았다. 이른바 集團感染. 4層에 머무는 24名 가운데 6名이 確診 判定을 받았다.

좁은 複道, 不足한 換氣施設. 共用化粧室과 廚房. 密集 密閉 密接. 이른바 ‘3密.’ 코로나19에 脆弱한 典型的인 環境이었다.
考試院에선 강정식 氏를 包含해 總 6名의 코로나19 確診者가 나와 2週間 閉鎖됐다. 東大門保健所가 考試院 入口에 붙인 ‘一時的 閉鎖 命令書’가 남아 있다.
송은석 記者 silverstone@donga.com
痕跡
2021年 1月 13日 午後 5時頃. 흰 눈이 그대로 쌓인 서울追慕公園. 暫時 뒤 防護服을 입은 職員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一般 死亡子의 化粧이 모두 끝난 뒤. 코로나19 死亡者의 化粧이 始作됐다.

강정식 氏의 遺骨을 收拾하러 상준 氏의 큰兄(52)李 이곳에 왔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서. 그를 떠났던 아버지를, 다시 떠나보내기 위해.
강정식 氏가 化粧된 서울 서초구 서울追慕公園 內部의 電光板. 姜 氏가 化粧된 날에는 그의 큰아들이 이곳에 와 아버지의 遺骨을 引繼했다.
송은석 記者 silverstone@donga.com
考試院 39號室에 設置됐던 폴리스라인. 姜 氏가 숨진 뒤 一週日이 지나자 警察이 거둬갔다.

三兄弟는 考試院에 가지 않았다. 集團感染 탓에 갈 수도 없었다. 以後에도 그곳은 가고 싶지 않았다. 姜 氏의 痕跡은 숨질 當時 그대로 남았다. 三兄弟는 遺品 整理를 拒否했다.

널브러진 옷가지. 10원, 50원짜리 銅錢 뭉텅이. 먹다 남겨 까맣게 썩은 밥그릇. 이영숙 考試院長은 姜 氏의 遺品을 하나씩 자루에 담았다.

姜 氏에겐 뭐가 所重한 物件이었을까. 或是 世上에 남기고 싶은 건 없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남은 이는 그저 모두 쓸어 담았다. 그 한 모퉁이에서 박카스 빈 甁 10個가 나왔다.
“唯獨 기침소리가 컸어. 자다가 다들 깰 程度로 기침을 해댔지. 그러면서 박카스를 엄청 마시더라고. 딱히 藥을 먹는 거 같진 않았는데, 박카스가 어쩌면 그 사람이 唯一하게 健康을 챙기는 手段이 아니었을까.”(38호실 이웃)
서울 全州
“그저 당황스러웠어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단 電話에 멍했습니다. 結局 이렇게 떠나셨구나 ··· . 이 생각뿐이었죠.”

상준 氏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와 ‘正’을 나눈 記憶이 없어요. 그럴 機會조차 없었다고 해야죠. 같이 찍은 寫眞 한 張 남아있지 않거든요. 그저 우리에게 남은 건, 아버지 遺骨이 담긴 네모난 箱子뿐이네요. 저는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 걸까요.”
코로나19街 아니었어도, 아버지와 三兄弟의 關係는 回復되기 어려웠다. 뒤틀린 關係는 아무리 애써도 바로잡기 힘드니까.

하지만, 코로나19街 아니었다면 조금 더 먼 後날에라도 富者는 함께 웃을 수 있는 瞬間이 찾아왔을까. 강정식 氏는 三兄弟와 孫子, 孫女들을 안아줄 수 있었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저, 코로나19는 그 실낱같은 可能性마저 없애버렸을 뿐.
강정식 氏의 遺骨은 忠南 論山에 安置됐다. 서울 2萬1915番 確診者란 이름만 남긴 채.

發刊일 2021年 6月 15日

1話
  • 記事 取材 | 지민구 이기욱 이윤태 김윤이 記者
  • 寫眞 取材 | 송은석 記者
  • 그래픽 | 김충민 記者
  • 프로젝트 企劃 | 이샘물 李지훈 記者
  • 사이트 製作 |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開發 최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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