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半地下房에 머무는 날이 漸漸 늘어났다. 바닥에 널브러져 TV를 보며 燒酒를 마시는 게 日常이었다. 取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個月이 지난 어느 날. TV 소리를 뚫고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떠나지 않았다.
家族들은 널 싫어해.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송곳으로 머리를 쿡쿡 찌르는 듯한 痛症과 함께 찾아온 그 목소리.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혼자 있을 때만 그 목소리가 다가왔다.
그 목소리를 避하려면 어떻게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빈손으로 房을 뛰쳐나와 古物 自轉車를 타고 無酌定 달리기 始作했다. 精神없이 달리다 보니 서울로 들어서 있었다. 처음 멈춘 곳은 汝矣島 漢江公園이었다. 사람들이 三三五五 짝을 지어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목소리를 멈추려면 저들과 이야기를 해야 해.’ 切迫한 마음과 달리 몸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結局 누구에게도 다가서지 못했다. 나 같은 루저와 누가 어울리겠는가···.
그때부터였다. 蒸發者의 삶에 발을 디딘 것은.
‘配達존 2’. 나의 安息處였다. 汝矣島 漢江公園을 찾은 사람들이 電話로 飮食을 시킨 뒤 配達員과 만나는 곳.
사람들이 버리고 간 망가진 텐트를 주워 公園 水泳場 뒤便 우거진 수풀에 나의 집을 세웠다. 사람들이 먹다 남긴 치킨과 피자로 나의 床을 차렸다. 自轉車를 타고 漢江을 돌아다니다 해가 지면 汝矣島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을 請했다. 나의 집에서 고개를 내밀면 KB國民銀行 看板이 보였다. 고개를 쳐들면 LG 로고가 보였다. 하지만 나는 銀行에 갈 일도, 携帶電話를 살 일도 없었다. 누군가는 요즘 韓國에 携帶電話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連絡해야 할 사람도, 連絡하고 싶은 사람도 없던 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렇게 蒸發字로 보낸 歲月이 6年. 그 사이 많은 것을 잃었다. 營養失調와 各種 自轉車 事故 때문에 이가 우수수 빠졌다. 몸은 漸漸 말라갔다. 스스로 選擇했지만, 蒸發의 代價는 참으로 殘忍했다.
힘들었지만 家族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부끄럽고 未安해서. 언젠가 어머니와 아이들이 사는 집 近處에 간 적이 있었다. 애들 몰래 뒷모습이라도 보고 오려 했지만 그냥 今方 돌아왔다. 내 存在 自體가 아이들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다. 高層 建物에서 뛰어내리려고 苦悶한 적도 두 次例. 죽고 싶었지만, 죽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