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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價에 죽고 산다 그러나 ‘眞짜 評價’는 싫다!|신동아

評價에 죽고 산다 그러나 ‘眞짜 評價’는 싫다!

  • 허태균 │고려대 心理學科 敎授

    入力 2014-11-19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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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人에게 評價는 ‘누가누가 잘했나, 참 잘했어요’가 아니라 ‘누가누가 못했나, 참 안됐어요’를 區分하는 節次로 비친다.
    • 그러니 評價를 통해 얻는 것은 없고, 뭔가를 잃는 사람만 생긴다. 이런 社會에서 제대로 된 評價를 좋아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평가에 죽고 산다 그러나 ‘진짜 평가’는 싫다!

    大學修學能力試驗을 보름 앞둔 10月 28日 서울 이화여고 3學年 學生들이 眞摯하게 授業을 듣는다.

    또 다시 大學修學能力試驗(修能) 시즌이 돌아왔다. 아니, 이 글이 ‘신동아’에 실려 읽히고 있을 때는 修能이라는 全國的 빅 이벤트를 또 한 番 치른 直後가 될 것이다. 每年 이때쯤 온 나라를 뒤집어놓는 한판 勝負가 全國에서 펼쳐진다. 每年 約 60萬 受驗生과 그들의 120萬 父母는 그 勝負에 直接 뛰어드는 選手들이다. 受驗生의 할아버지, 할머니, 兄弟姊妹는 링 밖에서 應援을 하거나, 언제든지 뛰어들 準備가 된 候補 選手다.

    어찌 보면 每年 全國에 社는 最小 約 200萬 名에서 最大 約 400萬 名의 國民이 이날 하루의 勝負를 위해 길게는 12年 동안 칼을 갈아왔다. 受驗生의 家族뿐 아니라 韓國 社會의 公敎育과 私敎育 市場, 學院街 食堂들, 甚至於 學院버스 技士들까지, 이 勝負에 動員된 人員의 規模는 가늠하기 힘들 程度다. 修能 英語듣기 評價 時間에는 飛行機 離着陸도 禁止된다. 全 世界 어디에도 없고, 아마 全 世界의 많은 航空社가 理解하기도 힘든 이런 일이 每年 可能한 것을 보면 우리 社會에서 修能이 차지하는 重要性과 意味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그 意味가 얼마나 社會的으로 合當한지와 바람직한지를 떠나서, 그냥 單純히 客觀的으로 보면 大部分의 國民이 一生에서 몇 番은 直接 또는 間接的으로 參與하는, 每年 國家가 運營하는 한판의 巨大한 賭博판과 類似해 보인다. 사람마다 目標로 하는 바는 다를 수 있지만, 已往이면 ‘SKY’와 같은 名門大 合格 大舶을 꿈꾼다. 賭博에서는 絶對 돈을 딸 수 없는데도 마치 自身은 딸 수 있다는 非現實的 樂觀主義에 빠져 베팅額을 키우는 賭博中毒者의 모습과, 누가 봐도 工夫로는 勝負가 나지 않을 것 같은 子女가 名門大에 갈지도 모른다는 非現實的 期待를 가지고 學院費를 내는 學父母의 모습에 큰 差異가 있을까.

    巨大한 賭博판

    受驗生의 試驗 當日 컨디션, 問題의 難易度와 類型, 試驗場의 環境 等 受驗生이 統制할 수 없는 수많은 要素가 ‘運’또는 ‘팔자’라는 이름으로 介入된다. 最少 12年 동안 들인 敎育費用에 對한 補償率(反換率)은 얼마나 될까. 明白한 賭博이라는 카지노 룰렛 게임은 確率上으로 한 게임에서 베팅한 돈의 返還率이 競技 方式에 따라 38分의 18에서 38分의 1 사이에 있다. 競馬에서도 全體 베팅額의 約 70%가 넘는 돈을 돌려준다.



    요즘은 이미 受驗生 數와 大學 定員에 差異가 거의 없어서 登錄金만 내면 누구든지 大學은 갈 수 있게 됐으니, 아마 ‘꽝’이 없는 게임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受驗生이나 父母도 ‘꽝’이 아니라는 事實에, 그저 當籤됐다고 滿足할 수 없다. 敎育에 들어간 費用 對比 最小限 競馬나 룰렛의 反換率 程度로 그 投資金을 返還받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런저런 修能의 本質을 苦悶해보면, 修能이 賭博에 가깝다는 말이 안 되는 主張도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賭博판은 짧은 時間에 無數한 反復을 통해 徐徐히 거덜 나지만, 修能은 이미 긴 時間 동안의 敎育費 베팅을 통해 거의 거덜 난 狀態에서 마지막 한판을 한다는 程度의 差異만 있을지도 모른다.

    修能뿐 아니라 公務員採用試驗, ‘三星考試’라 부르는 SSAT, 各種 國家考試를 볼 때도 나라가 들썩거릴 程度로 큰 판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다. 最近 여러 社會·經濟的 環境 때문에 競爭率이 더 높아졌다지만, 科擧試驗을 치르던 朝鮮時代부터 各種 試驗이라면 유별나게 亂離가 나는 것이 韓民族의 特性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韓國人은 元來 이렇게 評價를 좋아하는 사람들일까.

    評價를 싫어하는 韓國人  

    敎授로서의 經驗을 皮相的으로만 생각해보면 우리 社會가 評價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一般的으로 敎授가 國家에서 硏究費를 支援받는 境遇는 韓國硏究財團의 支援事業에 選定되거나, HK, BK 等과 같은 大規模 國策硏究事業에 選定되거나, 政府 部處의 用役課題를 受託하는 것이다. 이런 硏究를 遂行하다보면 敎授들은 다 ‘돌아버린다’.

    敎授들끼리 흔히 하는 弄談 中 하나로, 그런 國家硏究事業에서 敎授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은 硏究가 아니라 評價用 報告書를 作成하는 것이라고 한다. 大部分의 多年 課題는 每年 報告書를 提出한다. 短期 課題도 着手 報告에, 中間 報告에, 最終 報告까지 하고, 報告書가 다 끝나도 그 硏究 結果에 對한 外部 評價까지 進行한다. 아주 始作부터 끝까지, 끝나고 나서도 評價의 連續이다. 마치 評價를 받기 위해 硏究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런 現象을 보고 韓國人이 評價를 좋아한다고 結論내리는 것은 좀 性急하다. 왜냐하면 大部分의 그런 評價에서 韓國人은 差異가 그리 크게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評價를 하는 사람이나 評價를 받는 사람이나 모두 서로 비슷비슷한 點數를 주고받는 것을 더 選好한다.

    그렇다보니 모든 領域에서 수많은 評價를 實施하지만, 實質的으로는 形式的이고 要式行爲에 不過한, 評價를 위한 評價가 되는 境遇가 許多하다. 오죽하면 웬만한 評價에서 요즘은 半强制的으로 相對評價를 實施하도록 한다. 無條件 몇 %는 最上位, 몇 %는 中間, 몇 %는 最下位를 定해놓고 强制로 配分하게 한다든지, 無條件 몇 %는 떨어뜨리라는 强制 規定이 있는 境遇도 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全혀 差異가 나지 않는 評價를 하니 억지로 만든 規定이다. 이런 規定이 있어도 머리 좋은 韓國人은 서로 돌아가면서 좋은 評價와 나쁜 評價를 받게끔 그 評價를 要式行爲로 만드는 機智를 發揮한다.

    評價는 매우 많이 하는데 그 評價를 모두 無力化하는 이런 奇現象은 왜 일어날까. 勿論 要式行爲이지만 그 수많은 評價를 實施해야만 하는 理由는 基本的으로 韓國 社會의 信賴 水準이 낮아서다. 2005년 世界價値觀調査(World Values Survey·WVS)에서 “一般的으로 大部分의 사람은 믿을 만하다”라는 問項에 對해 韓國人의 30.2%만이 그렇다고 應答했다. 이는 스웨덴(68.0%)과 같은 先進國은 勿論 中國(52.3%)이나 베트남(52.1%)보다 낮은 數値다. 特히 公共機關에 對한 信賴 不足을 如實히 보여주는데, 國會가 10.1%(OECD 平均 38.3%), 政府는28.8%(OECD 平均 34.6%)다. 2009年 國家別 腐敗指數(Corruption Percep-tions Index·CPI)에 따르면, 韓國은 10點 滿點에 5.5點을 記錄해 OECD 國家 中 最下位圈을 記錄(Transparency International, 2009)했다. 이런 狀況이니 뭔가 客觀的으로 나오는 資料가 없으면 어떠한 結論을 내릴 수도 없고, 믿지도 않는 韓國 社會인 것이다. 그러니 形式上으로는 評價가 萬能인 韓國 社會가 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元來 그 評價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韓國 사람의 心理的 特性은 不信 社會에서 그 評價를 要式行爲로 만들고 더욱 큰 不信을 키워낸다. 基本的으로 韓國 文化는 擴張된 家族主義的 性向을 띤다. 一般的인 西洋 社會보다 더 넓은 範圍의 親戚까지 家族에 包含시키고 血緣을 重要視한다는 面에서 아시아 國家들의 家族主義와 南美의 家族主義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굳이 韓國을 包含한 아시아 文化를 言及하지 않고도, 家族主義(familism)라는 槪念은 美國과 南美를 比較하는 比較文化心理學에서 이미 널리 硏究됐다.

    評價萬能社會

    基本的으로 家族의 範圍 內에서 適用되는 分配의 原則은 投資와 結果에 比例하는 公平(equity)의 原理가 아니라, 다 같이 똑같이 가져가는 平等(equality)이나 必要한 만큼 가져가는 必要(need-based)의 原則을 따른다. 그러니 家族 間에는 差異를 있는 그대로 反映하는 正確한 評價는 別 意味가 없고, 오히려 쓸데없이 매정하게만 보인다.

    不幸히도 같은 家族主義에 該當하는 南美 社會와는 달리 韓國 社會는 獨特하게 血緣에서 한 段階 더 나아가 社會 全體 시스템을 家族의 形態로 理解하려는 性向이 있다. 南美 사람들은 넓은 範圍의 親族까지 家族의 範圍에 넣지만 家族의 境界는 오히려 明確해 누가 家族인지 묻는다면 明快히 對答할 수 있다.

    하지만 韓國 社會는 國家나 會社, 그 外의 다양한 社會까지 擴張된 槪念으로 理解하려 한다. 父母 같은 大統領, 아버지 같은 上司, 어머니 같은 軍隊 上士는 國民, 部下職員, 後任兵士를 子息과 같이 (막?)對하며 無限責任을 진다. 이런 社會에선 아무리 公式的으로 必要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殘忍하게 드러내는 評價結果는 適切하지도 않고 아무도 바라지 않는다. 한마디로 ‘우리가 남이가?’의 評價 버전이다.

    擴張된 家族主義를 넘어 韓國人이 評價를 類달리 싫어하는 또 하나의 理由는 바로 韓國 文化의 豫防的 特性이다. 動機 理論 中 하나인 調節焦點(regulatory focus) 理論에 따르면, 사람들은 같은 結果를 얻으려 해도 크게 두 가지 다른 接近 姿勢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假令 좋은 大學에 合格하려는 마음과 좋은 大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은 質的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같은 다이어트를 해도 더 健康해지려는 目的과 病에 걸리지 않으려는 目的은 그 사람의 思考와 行動에 큰 差異를 만들어낸다. 前者는 向上的(promotion) 動機로, 後者는 豫防的(prevention) 動機로 불린다.

    이런 調節焦點 硏究에 따르면 韓國 社會는 豫防的 特性을 가진 것으로 分類된다. 豫防的인 韓國人은 一般的으로 失敗에 더 銳敏하다. 現在의 狀況을 더 向上시키려는 向上的 動機와 달리, 現在 狀況이 나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性向이 豫防的 動機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더 나아지는 것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에 더 神經을 쓰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더 잘하는지보다는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더 못하는지를 살펴보고, 같은 結果도 나빠지지 않았으면 成功한 것으로 보게 된다.

    이런 韓國人에게 評價는 좋은 結果, 잘난 사람을 찾아내는 過程이 아니라 나쁜 結果, 못한 사람을 찾아내는 過程으로 認識된다. 韓國人에게는 ‘누가누가 잘했나, 참 잘했어요’가 아닌 ‘누가누가 못했나, 안됐어요’를 區分하기 위한 節次가 바로 評價인 것이다. 그러니 評價를 통해 얻는 것은 없고, 뭔가를 잃는 사람만 생긴다. 이런 韓國 社會에서 제대로 된 評價를 좋아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쉬운 修能, 어려운 修能  

    모든 國民이 매달리는 評價의 象徵인 大學入試와 修能에서도 評價를 싫어하는 韓國 文化의 特性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修能의 難易度가 늘 이슈가 된다. 高等學校에 다니는 두 아들이 學校에서 돌아와서 第一 많이 하는 일은 學校에 對한 不滿을 늘어놓는 것이다. 敎室, 運動場, 給食, 先生님, 特히 거의 對話를 나눠보지도 않고 마주칠 일도 없는 校長先生님에게까지 不滿은 끝이 없다. 그 不滿의 絶頂은 當然히 試驗問題에 對해서다. 問題가 거지 같다느니, 쪼잔하다느니, 到底히 그게 왜 答인지 理解가 안 된다는 둥 가지가지다. 結局 問題가 銳利했든지, 自己가 仔細히 工夫하지 않았든지, 答을 알려줘도 그게 왜 答인지도 모를 만큼 아는 게 없다는 眞實의 다른 表現이다.

    하지만 眞짜 두 아들을 화나게 만드는 境遇는 그나마 工夫한 게 아무런 所用이 없도록 問題가 나왔을 때다. 그래서 누가 봐도 自己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學生의 成績이 더 좋은 것을 알았을 때, 두 아들은 한마디로 ‘뻑 간다’. 父母로서 “더 工夫를 熱心히 했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으냐”고 다독거리고 慰勞하지만, 더러는 내가 봐도 不合理할 때가 있다.

    試驗이 너무 어려웠을 때와 正反對로 너무 쉬웠을 때다. 試驗問題가 너무 어려우면 大部分의 學生이 完全히 풀 수 없는 問題가 많아진다. 主觀式이어서 어떻게든 풀 수 있는 데까지 쓰고, 그에 對한 部分點數를 認定하는 境遇에는 例外지만, 修能과 같이 客觀式이 主를 이루는 問題에서는 正答을 모르면 찍어서라도 答을 쓰게 된다. 全體 30問題 中 平均 25問題 程度를 풀 수 있는 境遇, 찍게 되는 5問題의 點數는 結局 運에 依해 決定된다. 하지만 學生들이 平均的으로 20問題만 풀 수 있을 程度로 試驗이 어려워지면, 運에 依해 決定되는 點數는 10問題에 該當되고 結局 運의 比重이 두 倍가 된다.

    萬若 두 달을 熱心히 工夫한 學生이 그렇지 않은 學生에 비해 平均的으로 約 2問題를 더 맞힐 수 있는데, 問題가 너무 어려워서 두 學生 모두 4問題 또는 6問題를 찍어야 한다면 두 달間의 努力이 報償받을 確率은 줄어드는 不合理한 狀況이 일어나게 된다.

    反對로 問題가 너무 쉬우면 아무런 問題가 없을까. 問題가 쉬워서 相對的으로 많은 學生이 實力으로 더 많은 問題를 풀 수 있게 되면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境遇 훨씬 많은 學生이 비슷비슷하게 좋은 點數를 받게 되고 實力에 따른 點數 差異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물론 下位圈에서는 如前히 差異가 나겠지만). 이때는 矛盾的이게도 한 問題만 틀려도 相對的인 順位나 等級이 急落한다. 그래서 實力이 아닌 失手로 틀리는 한 問題가 致命的인 結果를 낳는다.

    흔히 子女를 더 熱心히 工夫하게 만들고 싶은 父母들은 失手도 實力이라고, 失手도 實力이 있으면 안 저지른다고 主張하지만, 本質的으로 失手는 그냥 失手다. 그리고 그 失手는 거의 運에 依해 決定된다. 그래서 萬若 試驗이 그 사람의 實力을 가장 잘 反映해야 한다는 當然한 原則만 생각하면 試驗이 너무 어려워도, 너무 쉬워도 모두 정의롭지 않게 된다. 

    錯覺的 統制감

    ‘定義란 무엇인가’라는 쉽지 않은 冊을 美國에서보다 더 많이 사서, 著者인 마이클 샌들 하버드대 敎授를 깜짝 놀라게 한 韓國人은 그만큼 정의로운 社會를 願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社會는 只今 쉬운 試驗에 執着한다. 甚至於 大統領이 나서서 修能試驗을 쉽게 내야 한다고 할 程度다. 왜 우리 社會는 쉬운 修能에 꽂힐까. 評價와, 評價에 依한 差異를 根本的으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잘하는 學生, 그냥 그런 學生, 못하는 學生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試驗의 本質을 싫어한다. 누가 잘해서 어떤 補償을 줄지보다 누가 못해서 가슴 아플지에 더 關心을 갖는 豫防的 特性은, 差異를 極大化하느니 差異를 줄이는 試驗 形態를 더 選好한다. 그러니 適切한 難易度보다는 아주 쉽거나 아주 어려운 試驗을 더 選好하게 된다.

    평가에 죽고 산다 그러나 ‘진짜 평가’는 싫다!

    賭博 中毒者들은 絶對 돈을 딸 수 없는데도 마치 自身은 딸 수 있다는 非現實的 樂觀主義에 빠져 베팅額을 키운다.



    게다가 私敎育을 줄여야 한다는 政治的 要求가 結局 쉬운 修能을 選好하게 만든다. 修能이 쉬우면 學生들의 工夫 負擔을 덜고 私敎育이 줄어들 거라고 믿는 것 같다. 한 心理學 硏究에서 사람들에게 두 個의 주사위를 던져 特定 點數가 나오도록 하는 게임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10, 11, 12와 큰 番號를 目標로 주면 주사위를 세게 던졌고, 2, 3, 4와 같은 작은 番號를 目標로 주면 주사위를 살살 던지는 傾向을 보였다. 윷놀이를 봐도, 윷이나 모를 외치면서 윷을 살살 던지는 사람은 別로 없고, 度를 외치면서 윷을 세게 던지는 사람이 別로 없는 것도 같은 現象이다.

    이런 迷信的 行動을 心理學에서 ‘錯覺的 統制감(illusion of control)’의 한 現象이라고 한다. 이런 錯覺的 統制感에 빠져서, 쉬운 修能이 곧 私敎育 減少라는 錯覺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더 좋은 點數를 받고 싶어 하는 人間의 本性을 考慮할 때 修能이 쉬워지면 中位圈과 下位圈 學生들은 오히려 工夫를 더하고 私敎育도 더 받을 것이다. 왜? 工夫를 조금만 더 해도, 私敎育費를 조금만 더 늘려도 點數를 쉽게 올릴 수 있다는 統制感이 높아지기 때문이다(이 境遇 錯覺은 아니다). 同時에 上位圈 學生들은 모두 點數가 비슷해져서, 한 問題라도 失手하면 한 等級이 떨어지는 詛呪의 那落으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大槪 再修와 三修에 突入한다. 왜? 實力이 모자란 게 아니라 但只 運이 없었을 뿐이니까.

    評價 後가 더 問題  

    韓國人의 擴張된 家族主義的 特性과 豫防的 特性이 評價를 싫어하게 만드는 데 마지막 畫龍點睛은 韓國 社會의 短期的 事故 特性이다. 事故의 構成水準(construable level)李 抽象的(abstract)인 사람은 抽象的이고 創意的인 생각을 즐기고 長期的 行動戰略을 選好한다. 反面 具體的(concrete)인 사람은 細部的이고 섬세한 現實的인 思考를 하는 特性을 보이지만 同時에 短期的인 戰略을 選好하는 傾向이 있다. 短期的인 戰略을 選好하는 사람은 눈에 드러나는 短期的인 結果를 重要視한다. 그러니 評價의 結果가 무엇인지를 重要視하며, 매우 빠른 피드백을 좋아하고, 주어진 短期 課題에서 매우 훌륭한 成果를 보인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具體的인 構成水準의 結果가 나온 後 相對的으로 먼 未來에 對한 苦悶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結果를 얻는 것까지만 集中하지, 그 結果를 어떻게 活用할지에 對한 計劃은 없다. 韓國 社會에서 評價의 本質的인 問題가 바로 여기에 있다. 韓國 社會에서는 評價를 어떻게 할지는 具體的으로 苦悶하고 만들지만, 그 評價를 根據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거의 論議되지 않는다.

    企業에서 職員評價는 그냥 年俸과 昇進, 解雇를 決定하는 要素이지 그 評價를 根據로 職員들을 어떻게 向上시킬지에 對한 論議는 없다. 論難이 되는 學力評價는 어떤 學校가 成績이 좋은지만 얘기하지, 그래서 그 學歷評價 結果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對한 얘기가 없다. 이런 社會의 評價에는 未來를 위한 意味가 없다. 그냥 過去를 確認하기 위한, 特히 過去를 處罰하기 위한 評價만 存在한다. 이러니 누가 評價를 좋아할 수 있을까.

    그래서 修能에서 徹底하고 공정한 評價보다는 多少 쉽고 두루뭉술하고, 模糊한 評價를 만들고, 때로는 評價나 問題의 數를 줄이려고 試圖한다. 어떤 評價의 問題點은 그 評價의 基準을 뭉개버린다고 決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混亂만 加重시킨다. 모든 評價는 徹底하고 공정해야 한다. 다만 그런 徹底하고 공정한 評價에서 끝나면 絶對 안 된다. 그 評價를 根據로 어떻게 對處할지 苦悶해야 한다.

    평가에 죽고 산다 그러나 ‘진짜 평가’는 싫다!
    허태균

    1968年生

    고려대 心理學科 卒業, 美國 일리노이 주립대 文學碩士(一般心理學)·노스웨스턴대 哲學博士(社會心理學)

    著書 : ‘가끔은 제精神’


    일을 못하는 職員 또는 職員의 弱點을 把握해 더 나은 職員으로 발전시키는 方法을 開發해야 한다. 學力評價를 통해 잘 못하는 學校에 豫算과 支援을 集中해야 한다. 修能을 통해서 工夫를 잘 못하는 學生에게 다른 삶의 方法을 찾아줘야 한다. 이런 評價라면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評價에서 낮은 結果를 얻으려 努力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 後에 더 많은 惠澤이 기다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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