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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杯(聖杯)는 없다? 聖杯(聖杯)는 못 찾았다!|신동아

聖杯(聖杯)는 없다? 聖杯(聖杯)는 못 찾았다!

事實(事實) 證明의 誤謬

  • 오항녕│全州大 歷史文化學科 敎授 hallimoh@hanmail.net

    入力 2013-02-21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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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하는 일이 社會에 寄與하기를 바란다. 社會의 不條理나 不合理를 고치는 데 寄與하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慰勞나 希望이 됐으면 하는 것이다. 歷史라는 건 이미 實際로 일어났던 經驗이므로 그 經驗에 對한 理解는 곧 只今의 나나 우리 社會를 理解하는 有力한 方法이다. 이 連載는 그 理解 過程에서 있을 수 있는 汚染이나 誤解를 살펴보는 것이다. 眞實을 잘 드러내기 위해, 汚染을 줄이기 爲해.
    성배(聖杯)는 없다? 성배(聖杯)는 못 찾았다!
    告白하거니와 막상 歷史의 眞實과 歪曲을 신중하게 생각하기 始作한 뒤로, ‘아, 그동안 참 別로 苦悶 없이 歷史를 硏究하고 글을 썼구나’ 하는 自愧心이 들었다. 甚至於 ‘내가 歷史學者가 맞나, 하는 슬픈 생각’까지 들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社會에 이른바 ‘歷史的 思考(思考)’가 脆弱하다는 것도 發見했다.

    1月 25日 포털사이트 다음의 메인 畵面에 筆者가 ‘신동아’에 連載하고 있는 꼭지 中 1月號에 실린 ‘李舜臣 將軍이 없었다면? 質問 自體가 虛構다’ 技師가 올라왔다. 어찌 반갑지 않으랴. 그런데….

    -무슨 記者가 글을 이렇게 어렵게 쓰냐

    -보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技士 내려라

    -왜 이리 길어. 스크롤바 있어서 多幸이네



    이런 댓글은 오히려 理解가 간다. 아예 글쓴이가 記者인지 敎授인지도 모르고, 記事는 演藝人 身邊雜記 읽듯 휙 읽고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니까, 그러려니 하면 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댓글은 苦悶이다.

    ① ‘李舜臣이 없었다면’, 왜 이 質問이 안 돼?

    ② 이 글의 要旨는 ‘朴正熙가 없었다면’, 이런 質問은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朴正熙의 經濟發展을 正當化하려는 論理인가?

    ③ 왜 李舜臣이야? ‘李承晩이 없었다면’ ‘전두환이 없었다면’, 이런 質問을 해야지

    1月號에서 내가 했던 얘기는 이렇다. 歷史學에서는 李舜臣 將軍이 그 일을 했다는 事實만, 卽 壬辰倭亂의 終戰에 決定的인 貢獻을 했다는 事實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다. 歷史學에서는 ‘李舜臣 將軍이 없었다면’ 海戰에서 勝利했을지 敗北했을지에 對해선 論議할 수가 없다. 왜? 일어난 일이 아니니까! 일어나지 않았으니 飼料(史料)가 없다. 그러니까 論議할 수 없다는 거다. 勿論 映畫나 小說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家庭 아래 歷史를 쓸 수는 없다. 그럼 이미 歷史(학)가 아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지난 2月號에서 ‘판 페르詩 없는 맨유’에 對한 英國 ‘더선’지의 記事를 통해 復習까지 한 것이다.

    位 댓글에서 ‘虛構的 質問의 誤謬’를 理解하는 것이 歷史 探究의 基礎라는 事實을 다시 한 番 確認할 수 있다. ①은 虛構的 質問의 誤謬, ②는 意圖 擴大의 誤謬다. 나의 意圖를 넘겨짚은 데서 發生하는 誤謬다. ③은 非一貫性의 誤謬다. 李舜臣에 對해서는 그런 家庭을 하면 안 되고, 李承晩 전두환에 對해서는 그런 家庭을 해도 된다는 二重 잣대의 誤謬다. 내가 連載하는 글은 바로 이런 誤謬를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뜻이다.

    正確性은 義務 아닌 美德?

    지나간 過去를 證明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歷史的 眞實은 決코 單純하지도 않고 純粹하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더욱이 歷史學者가 歷史的 眞實을 이야기하는 過程은 歷史的 事件이 말하는 事實(事實) 그 自體보다 훨씬 더 얽히고설켜 있다. 나아가 歷史家는 眞實을 말해야 할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그것의 眞實性도 보여줘야 한다. 말하자면 歷史家는 誠實性에 依해서 評價될 뿐 아니라 證明하는 能力에 依해서도 評價받는다.

    只今 우리는 歷史探究 過程의 誤謬를 살펴보는 中이다. 크게 探究-敍述-論爭에서 나타나는 誤謬를 살펴보고 있다. 歷史探究 過程은 質問을 하고(문제 提起, 問題意識), 事實을 檢證하고, 事實의 意味를 따지는 作業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그 세 段階마다 나타나는 誤謬가 있다. 지난 號까지는 歷史探究 中 質問이나 問題 提起에서 나타나는 誤謬를 살펴봤고 이番에는 事實 證明에서 나타나는 誤謬를 살펴보려고 한다.

    성배(聖杯)는 없다? 성배(聖杯)는 못 찾았다!

    1923年 關東大地震 當時 虐殺된 朝鮮人들. 관동대학살이 日本 自警團의 煽動으로 일어났다는 主張은 그 말하는 意圖와 相關없이 참이다.

    그런데 學問的 訓鍊過程에서 이러한 誤謬에 對한 責任性 問題는 그리 注目받지 못한다. 그 理由는 첫째, 事實 證明을 너무도 當然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實際로 나조차 어떤 眞實을 發見하고 그 眞實性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問題를 敎科課程에서 眞摯하게 다뤄본 記憶이 없다. 專門 硏究過程이 그러니 一般 讀者가 그런 訓鍊에 익숙할 理 萬無하고, 댓글 中에 論旨를 벗어나거나 不正確한 게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다음 陳述을 보자.

    “그 큰 戰鬪(1066年 헤이스팅스 戰鬪)가 1065年이나 1067年이 아니라 1066年에 벌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스트本이나 브라이턴이 아니라 헤이스팅스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은 分明히 重要하다. 歷史家는 이런 것들에서 틀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이런 種類의 問題들이 提起될 때 ‘正確性은 義務이지 美德은 아니다’라는 하우스먼(1859~1939)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歷史家를 正確하다는 理由로 稱讚하는 것은 어떤 建築家를 잘 말린 木材나 適切하게 混合된 콘크리트를 使用해 집을 짓는다는 理由로 稱讚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의 作業의 必要條件이지만 그의 本質的인 機能은 아니다. 바로 그러한 種類의 일들을 위해서라면 歷史家는 歷史學의 ‘補助學問’-考古學, 金石學(金石學), 古錢學(古錢學), 年代測定學 等과 같은-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依支할 資格이 있다.”(‘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 김택현 옮김, 까치, 1997, p.21)

    이 대목은 歷史를 工夫한 사람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特히 ‘正確性은 義務이지 美德은 아니다’라는 經句(警句)는 마치 歷史學徒가 됐음을 自負하듯 常套的으로 듣고 말했던 表現이기도 하다. 그런데 카의 말에 對해, 只今 내가 底本으로 삼고 있는 ‘歷史家의 誤謬( Historian′s fallicies)’의 著者 D H 피셔는 ‘傲慢한 態度’이며, ‘不幸한 習慣’이라고 指摘했다. 왜 그럴까? 피셔는 이렇게 말한다.

    “歷史家들은 種種 特定 陳述이 正確할 것이고, 누군가가 그 正確性에 責任을 질 것이라고 斟酌한다. 이는 明白한 事實이다. 이런 態度야말로, 왜 그토록 많은 歷史的 陳述이 實際로 不正確한지를 說明해준다.”

    歷史學者가 自身이 한 陳述의 事實 證明을 위해 便하게 動員할 수 있는 補助學問은 없다. 이런 點에서 또 自身의 責任을 免除해줄 사람도 없다. 카의 見解는, 歷史 探究와 뗄 수 없는 複雜한 過程을 單純化한 데서 나왔다.

    相對主義者의 誤謬

    事實 檢證 過程에 對해 歷史學界가 疏忽하게 된 두 番째 理由로는 相對主義의 蔓延을 들 수 있다. 이 ‘어리석고도 有害한’ 敎理는 1930年代부터 大衆的으로 流行했다. 흔히 ‘보기 나름’이라고 諒解하거나 配慮하는 行態는 歷史學과 歷史家에 對한 冷笑나 無力感과 같은 온갖 否定的 視角을 孕胎했다. 歷史學者가 마치 實際 일어난 일보다는 그가 믿고 있는 것을 다루는 사람처럼 여겨졌고, 甚至於 歷史 無用論, 歷史 輕蔑論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차츰 相對主義에 對한 批判이 蓄積됐다. 그 批判은 다음 몇 가지로 整理할 수 있다.

    첫째, 相對主義者들은 知識을 갖게 되는 過程과 知識의 明徵性 間의 差異를 混同한다. 韓國의 歷史學者들은 1910年에 日本이 朝鮮을 占領했다는 主張을 ‘民族主義的 觀點에서’ 할 수도 있다. 이 陳述은 ‘그렇게 말한 意圖가 무엇이든 間에’ 事實이다. 한便 日本 歷史學者들도 ‘어떤 意圖에서’ 1910年에 日本이 朝鮮에 依해 强點됐다고 主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陳述은 거짓이고, 앞으로도 거짓일 것이다. 慰安婦 强制動員度, 이스라엘의 가자地區 爆擊도 마찬가지다.

    例를 들어 韓國의 政治家가, ‘어떤 意圖를 가지고’ 1923年 關東大地震 때 日本 自警團이 ‘朝鮮人들이 우물에 毒藥을 풀었다’는 말로 煽動해 在日 朝鮮人을 虐殺했다고 主張하더라도, 그 陳述은 참이다. 日本 敎科書 擔當者들이 ‘무언가의 意圖를 가지고’ 關東大地震 때 在日 朝鮮人 虐殺은 없었다고 主張한다면, 그 陳述은 意圖와 相關없이 誤謬다.

    이러한 어떤 知識(事實)의 意圖 또는 背景에 對한 不確實性이나 疑心을 事實 自體의 不確實性과 混同하는 事例는 많이 있다. 이를 論理學에서는 ‘意圖 擴大의 誤謬’라고 부른다. 勿論 相對主義의 이런 混同은 ‘人身攻擊의 誤謬’ 等 다른 誤謬와 複合的으로 나타나는 境遇가 大部分이다.

    둘째, 相對主義는 歷史의 說明이 事實上 全體가 誤謬인데도 部分的으로만 誤謬라고 잘못된 論意를 편다. ‘不完全하다는 意味에서 볼 때’ 모든 歷史 說明은 全體의 한 部分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不完全한 說明이 客觀的으로 참인 說明일 수 있지만, 그것이 全體的으로 眞實일 수는 없다, 卽 部分만 眞實이라는 것이다. 이런 點에서 相對主義者들은 ‘全體 眞實’을 말해야 한다는 觀念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 全體가 참이 아니면 認定할 수 없다는 억지가 相對主義者들의 强力한 武器다.

    似而非 證據

    셋째, 相對主義는 歷史와 科學의 差異를 잘못 設定하고 있다. 歷史學은 科學과 달리 實證을 통해 一般性, 法則性을 導出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歷史에 對한 知識은 先入見, 偏見, 信念, 信仰 等에 따라 歷史家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客觀的이고 불편부당한 歷史 敍述이 不可能하다고 말한다. 안된 말이지만 科學者도 이는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컴퓨터 科學者는 自身의 敎會에서 主張하는 創造論을 擁護하기 위해 時事誌 ‘타임’ 記事를 造作했다.

    넷째, 相對主義者들은 自身들이나 親舊들은 相對主義로부터 어느 程度 例外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相對主義者 카를 만하임은 인텔리겐차를 眞僞 判定의 擔當者로 想定했다. 하지만 이는 一貫性이 缺如된 見解다. 왜 인텔리겐차 外의 사람은 相對的인 眞實(거짓)의 保有者로 남아 있고, 인텔리겐차만 社會 診斷과 綜合化의 戰犯(典範)이 되는가. 이런 點에서 ‘一貫된 相對主義’는 自己論理를 否定하는 ‘知的인 自殺’이다.

    성배(聖杯)는 없다? 성배(聖杯)는 못 찾았다!
    다섯째, 相對主義者들이 使用하는 主觀性이란 觀念은 그 自體가 난센스다 ‘主觀的’이란 낱말은, 그 反對語가 意味가 없으면 그 말조차 意味가 없는 聯關 用語다. ‘모든 知識은 相對的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은 짧다’는 말과 같다. 뭔가가 길지 않으면 짧은 것은 있을 수 없듯, 어떤 知識이 客觀的이지 않다면 主觀的인 知識이란 있을 수 없다. 어떤 歷史學者도 實際로 일어났던 ‘歷史 全體’를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客觀的인 歷史 知識이 있을 수 없다고 主張하는 것은 틀렸다.

    似而非(似而非). ‘孟子(孟子)’에 나오는 말로, ‘비슷하지만 아니다’는 뜻이다. 證明에도 似而非 證明이 있다. 事件에 맞는 證據를 찾아 敍述하다보면, 첫눈에는 正確하고 實際에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던 證據가 意味 없는 것으로 판정날 수도 있다. 또 質問에 對해 엉뚱한 答辯을 내놓는 東問西答型 證據도 있다. 그中 잘 빠지는 誤謬가 ‘不正 證據(negative proof)의 誤謬’다.

    不正 證據란 事實 命題를 不正 證據로 떠받치려는 試圖다. 이런 境遇이다. 歷史學者가 “X가 일어났다는 아무런 證據가 없다”고 主張하고 난 뒤, 이를 根據로 “그러므로 비(非)-X가 事實이다”라고 結論을 내리는 일이다. 映畫 ‘인디애나 존스’의 主人公 해리슨 포드가 親舊들과 聖杯(聖杯)를 찾아 나섰으나 끝내 못 찾았다고 치자. 온갖 苦生을 다 하고, 찾아볼 만한 곳은 博物館부터 修道院의 保存所까지 다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所得이 없었다. 이때 해리슨 포드가 “聖杯는 없다”고 結論 내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勿論 地球上에 聖杯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릴 수 있는 結論은 但只 “聖杯가 있다는 證據를 우리는 못 찾았다”는 것일 뿐이다. ‘聖杯가 없다’고 結論 내리려면, 經驗的으로(역사적으로) 올바른 過程을 통해 ‘聖杯가 없다’는 것을 證明해줄 ‘肯定 證據(affirmative proof)’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不可能한 일은 아니다. 種種 歷史學者들이 “X는 깊게(넓게) 硏究되지 않았다”고 말하면, 實際 ‘X에 對해 깊게 硏究된 게 없는 게’ 아니라 大槪 “나는 X에 對해 거의 工夫하지 않았다”는 告白을 뜻한다.

    ‘可能한 證據(possible proof)의 誤謬’도 이런 部類에 屬한다. 이는 참 또는 거짓의 可能性만을 提起함으로써 事實 陳述이 實際 참인지 거짓인지 보여주려는 데서 생기는 誤謬다. 明白한 證據가 없을 때 생겨나게 마련인 問題 提起를 實際 참과 거짓을 가리는 證據로 들이대는 일은 深刻한 誤謬 中 하나다. 經驗的 證據는 可能性의 提起를 要求할 뿐 아니라 蓋然性도 要求한다. 벼락은 누군가가 平生에 서너 番 맞을 可能性은 있지만 그럴 蓋然性은 거의 없다. 可能性 中에 實際 現實化할 수 있는 것이 곧 蓋然性이다. 더구나 그냥 蓋然性이 아니라, 該當 事實을 支持하거나 否定하는 蓋然性의 均衡도 따져야 한다. 歷史社가 法律家처럼 合理的인 疑心이라는 敎理를 尊重한다면, 마찬가지로 非合理的인 疑心도 認識할 수 있어야 한다.

    ‘循環 論證의 誤謬’는 많은 讀者가 알고 있는 誤謬일 것이다. 專制를 ‘證明했다고 치고’ 結論을 내리는 方式으로 論議를 進行하면서 생기는 誤謬다. 이 誤謬와 兄弟쯤 되는 것이 ‘家庭 證明(presumptive proof)의 誤謬’로, 命題의 證明 責任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論議를 進行하는 것이다. 이들 誤謬와 四寸쯤 되는 誤謬가 다 알다시피 ‘證明(prevalent proof)의 誤謬’다. 이 誤謬는 證明 方法으로 多數의 意見을 끌어온다. 아마, 아, 그런 거, 하시는 분이 꽤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證明을 많이 듣는 環境에서 살고 있으므로.

    됐다고 치고…

    한때 朝鮮時代 硏究論文을 보면, 序論에 “朝鮮 後期에는 商品貨幣經濟가 發達하고 身分制가 動搖하면서…”라고 始作하는 게 流行이었다. 朝鮮 後期만 해도 300年 前이다. 大韓民國이 建國된 지 이제 겨우 半世紀 지났다. 300年이란 時間을 너무 쉽게 한마디로 整理해버린 것이다. 朝鮮 社會는 ‘商品貨幣經濟’에 友好的이지 않았다. 特히 資本主義 方式의 그것과는 距離가 멀었다. 奴婢를 平民으로 만들려는 思想과 政策으로 인해 身分制의 變化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이 ‘動搖한다’는 특별한 證據가 없다. 그런데 ‘다 안다고 치고’ 論議를 始作했다. 只今 생각하면 無知莫知하기 그지없는 敍述이지만, 그땐 그랬다.

    前에 栗谷 李珥의 十萬養兵說을 놓고 어떤 歷史小說家와 論爭 같지 않은 論爭을 한 적이 있다. 이 主題는 나중에 歷史 解釋의 代表的인 誤謬 事例로 다룰 作定이니, 여기서는 그 一部만 살펴보자. 그 小說家가 하도 어처구니없는 根據로 十萬養兵說을 否定하기에, 나는 ‘栗谷이 十萬養兵說을 主唱했다’는 證據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否定할 證據는 없다’ ‘栗谷의 十萬養兵說을 否定할 證據를 提示하라’고 말했다.

    성배(聖杯)는 없다? 성배(聖杯)는 못 찾았다!
    그 小說家는 ‘十萬養兵說을 主張한 것은 栗谷의 弟子들인 西人(西人)이다’ ‘庶人은 나쁘다’ ‘故로 十萬養兵說은 믿을 수 없다’는 主張을 反復했다. 西人이 그렇게 나쁜지는 모르겠으나, 論理學에서 이런 論證을 ‘人身攻擊의 誤謬’라고 한다. ‘庶人은 나쁘다’고 치고, 또 ‘나쁜 사람들이 한 말이니 거짓’이라고 치는 誤謬다. 孔子는 이런 事態를 豫防하기 위해 진즉에 “그 사람이 형편없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는 말까지 막아버려서는 안 된다(不以人廢言)”고 점잖게 타일렀다.

    나는 栗谷의 十萬養兵說에 對해 當時의 市場(諡狀·諡號를 내리면서 함께 주는 글), 墓碑, 目擊談 等 1次 史料 外에 “宣祖 7年(1574) 李珥(李珥)가 黃海監司로 赴任해 黃海道의 軍的(軍籍·軍事 名單)을 全國에서 가장 잘 整備했다는 評을 받았다”는 ‘先祖修正實錄’의 記錄을 引用한 뒤 “이런 李珥가 宣祖 16年 兵曹判書로 있으면서 ‘十萬養兵’을 主張하는 것이 常識的으로 語塞한 일일까요?”라고 反問했다.

    그랬더니 이분은 栗谷의 十萬養兵說을 否定하는 飼料로 自身이 쓴 冊을 내밀었다. 그때의 荒唐함이란…. 그러면서 “黃海道의 軍籍을 잘 整備한 것과 十萬養兵 主張이 서로 連結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라고 斷定했다. 軍籍 整備가 軍隊에 動員할 兵力을 把握하는 일인데, 이런 分野를 整備했다면 軍士 十萬 名을 養成해야 한다는 主張을 했을 蓋然性이 높을까, 하지 않았을 確率이 높을까. 이야말로 三尺童子에게 물어볼 일이다.

    많은 歷史家가 어떤 事件이 存在했다는 事實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事件이 存在했다는 事實을 모른다는 것과, 그 事件이 存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全혀 次元이 다르다. 어떤 事件이 存在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決코 그것이 存在하지 않았다는 것에 對한 妥當한 證據는 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떤 事件이 存在했다는 證據를 無視하는 것이 그 事件이 存在하지 않았음에 對한 證據가 될 수 없음은 더 말할 必要가 없다.

    歷史 證明의 規則들

    歷史探究에 必要한 證明이라는 點에서 確認해본 誤謬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첫째, 健全한 證據는 證明해야 할 事實(factum probandum)과 證據(factum probans) 사이에 滿足할 만한 關係가 設定돼야 한다. 너무 뻔한 말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歷史學徒는 ‘滿足할 만한 關係’에 對한 基準이 證明해야 할 事實의 性格에 依해 決定的으로 規定된다는 事實을 그렇게 鮮明하게 알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歷史學에서 모든 事實은 質問에 對한 答辯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質問B에 對해 쓸모 있고 참이며 充分한 證據가 質問A에 對한 答辯으로는 쓸모없고 잘못된 答辯일 수도 있다. 歷史學者는 ‘올바른’ 事實을 ‘제대로’ 確保해야 한다. 이로부터 論理的 矛盾이 없는 ‘整合性(整合性)의 規則’李 演繹될 수 있다. 歷史 證據는 다른 質問이 아닌 該當 質問에 對한 直接 答辯이어야 한다.

    둘째, 歷史學徒는 ‘그런대로 納得할 만한(good)’ 相應 證據를 提示해야 할 뿐 아니라, ‘가장 合當한(best)’ 證據를 提示해야 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가장 合當한 證據는 그 事件에 가장 直接的인 證據를 말한다. 勿論 最善의 證據는 事件 그 自體일 것이다. 그리고 그 事件의 信賴할 만한 痕跡, 直接 觀察 等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를 ‘直接性의 規則’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證據는 恒常 肯定 證據(affirmative evidence)라야 한다. 不正 證據(negative evidence)란 用語上 矛盾이다. 不正 證據는 全혀 證據가 아니다. 어떤 對象의 非(非)存在는 存在하지 않는 證據에 依해서가 아니라 그 對象이 存在하지 않았거나, 存在할 수 없었다는 事實을 보여주는 肯定 證據에 依해서 確認되는 것이다.

    例를 들어 어떤 記者가 大統領과 通話를 하지 않았는데, 通話를 했다고 報道했다고 치자. 이때 이를 批判하려면 記者나 大統領의 입에서 肯定 證據가 나와야 한다. 아니면, 그때 記者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든지, 大統領이 다른 日程을 消化하고 있었다든지 하는 證據가 있어야 한다. 이런 證據가 確保되지 않는다면 記者의 報道를 反駁할 수 없고, 疑心이 가더라도 歷史學徒는 反駁이 不確實함을 率直히 認定해야 한다. 이를 ‘肯定 證據의 規則’이라고 부르자.

    넷째, 어떤 歷史的 見解에 對한 證明의 責任은 恒常 著者에게 있다. 批評家도, 讀者도, 弟子도, 나아가 다음 世代도 아니다. 이를 ‘責任性의 規則’이라고 부르자.

    다섯째, 經驗的 證據에서 나온 모든 推論은 蓋然的이다. 그러므로 團地 A가 可能한 證據임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充分하지 않다. 歷史學徒는 自身이 할 수 있는 限 다른 代案의 蓋然性과 聯關시켜 A 證據의 蓋然性을 判斷해야 한다. 마찬가지 方式으로, 歷史學徒는 非(非)A가 可能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A를 反駁할 수 없다. 오직 비-A가 A보다 더 蓋然性이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만 反駁할 수 있다. 이를 ‘蓋然性의 規則’이라고 부르자.

    正朝와 애덤 스미스

    여섯째, 어떤 事件에 對한 敍述의 意味는 그 事件이 元來 갖고 있던 脈絡에 依해 決定된다. 어떤 歷史的 證據가 되는 敍述도 時間과 空間을 떠나 마음대로 떠다닐 수는 없다. 어떤 證據도 抽象的이거나 一般的으로 適用될 수 없다.

    “영종大王(英祖) 52年-淸나라 乾隆 41年이다-3월 病者일(丙子日)에 令終이 훙(薨)하고, 6日 만인 신사일(辛巳日)에 王이 慶熙宮(慶熙宮)의 崇禎門(崇政門)에 卽位하였다.”

    朝鮮의 22代 王 正祖(正祖)가 1776年에 卽位했던 事實에 對한 實錄의 記錄이다. 이 陳述은 오직 朝鮮의 漢陽이라는 指導와 英祖 52年 丙申年(丙申年)이라는 朝鮮 사람들의 달曆이 없이는 意味가 없다. 아메리카 앵글로색슨들에게 獨立宣言은 英祖 52年度, 丙申年도 아닌 1776年이라는 全혀 다른 해에 이뤄졌다. 애덤 스미스가 ‘國富論’을 發表한 해 亦是 丙申年이 아닌 1776年으로 유럽의 經濟學者들에게는 記憶될 것이다. 그나마 달曆에 照會해볼 수 있는 날짜나 年度의 相對性은 눈에 쉽게 띈다. 그러나 다른 많은 事實과의 脈絡에서 볼 때 그 相對性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일곱째, 하나의 經驗的 事件에 對한 敍述이 그 事件에 對한 證據보다 正確하다고 할 수 없다. 勿論 正確度는 證據마다 사뭇 다르다. 後날 歷史家는 통계학자를 본떠 自身들의 陳述이 지닌 量的(量的)인 意味를 하나하나 列擧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해도 같은 效果가 言語의 뉘앙스에 依해 發生할 것이다. 이를 ‘正確性’의 規則이라고 부르자.

    위의 일곱 가지 規則은 正常的인 歷史家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고 無意識 中에 適用하는 規則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意識的으로 이런 規則을 念頭에 두고 歷史를 探究하고 證明한다면 實際로 어느 程度는 改善되는 點이 있을 것이다. 硏究 訓鍊을 받은 歷史學者들이 저지르는 實際 誤謬에 對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이런 規則은 讀者들의 批評의 眼目도 높여줄 것이다. 그렇지만 正말 危險한 것은 歷史學者가 讀者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그 自身을 속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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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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