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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과 討伐軍의 智異山 大血鬪|新東亞

빨치산과 討伐軍의 智異山 大血鬪

南北 모두에 버림받은 이현상, 最後를 맞다

  • 오세영│歷史作家, ‘베니스의 開城商人’ 著者│

    入力 2010-08-04 1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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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敵의 銃彈보다 더 무서운 게 內部 權力鬪爭이다. 6·25戰爭 中 南韓에서 活動하던 빨치산들은 이를 온몸으로 겪었다. 當場 自身들부터 舊빨치와 新빨치로 나뉘어 消耗的인 路線鬪爭을 벌였고, 北韓 政權이 平壤의 남로당 指導部를 逐出하면서 ‘曺國’으로부터도 徹底하게 버림받는 運命이 됐다. 그 渦中에 백선엽 將軍이 이끄는 2個 軍團의 莫强 電力이 大大的인 智異山 討伐에 나서자 銃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을 ‘세 가지 覺悟’를 했다는 빨치산들도 潰滅할 수밖에 없었다.
    빨치산과 토벌군의 지리산 대혈투

    智異山 빨치산을 이끈 남부군 總司令官 이현상.

    1951年7月 初.

    新綠이 우거진 德裕山 送致골에 빨치산 指導者들이 續續 모여들었다. 南韓에서 活動하는 6個 徒黨의 指導者들이 이곳에서 緊急 會同한 理由는 그동안 빨치산 鬪爭을 하면서 쌓은 서로의 經驗을 交換하고 向後의 鬪爭 方針을 確定하기 위해서다.

    “中國도 休戰에 應할 用意가 있는 것 같소.”

    俗稱 남부군으로 불리는 빨치산 獨立制4地帶를 이끌고 있는 이현상이 座中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中國軍의 參戰으로 戰爭은 새로운 樣相을 띠게 되었다. 鴨綠江까지 進擊했던 韓國軍과 유엔軍은 後退했고 及其也 1月4日에 다시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平澤과 원주를 잇는 線까지 後退했던 國軍과 유엔軍은 戰列을 再整備하고 反擊에 나서 3月22日에 서울을 再奪還했지만 中國軍의 春季大攻勢로 또 한 次例 危機를 맞았다. 以後로 유엔軍과 共産陣營 兩側이 一進一退를 거듭하면서 戰線은 只今의 休戰線 附近에서 固着됐다.



    戰線이 固着되고 戰鬪가 小康狀態로 접어들면서 休戰 論議가 오가기 始作했다. 兩側 모두 힘으로 完勝을 거둘 수 없다고 判斷한 것이다. 유엔軍 司令官 리지웨이 將軍의 休戰 提議를 中國 當局이 受諾하면서 兩側은 7月10日 開城에서 豫備會談을 열기로 合意했다. 休戰은 韓半島가 다시 南과 北으로 갈리는 것을 意味한다. 그럼 南韓에서 鬪爭하고 있는 빨치산은 어떻게 되는 건가. 빨치산 指導者들은 觸角을 곤두세우고 休戰會談을 지켜보았다.

    “休戰會談에서 有利한 高地를 차지하려면 鬪爭을 加一層 强化해야 할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部隊를 大單位로 再編할 必要가 있소.”

    “贊成할 수 없소. 戰線이 小康狀態로 돌아서면 南朝鮮은 大規模 討伐隊를 編成할 것이오. 그에 對備하려면 部隊를 小規模로 轉換할 必要가 있소. 앞으로의 鬪爭은 牙城攻擊(牙城攻擊)보다는 人民들 속으로 浸透해서 長期鬪爭을 꾀하는 것이 效果的일 것이오.”

    이현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준표가 反對하고 나섰다. 敎師 出身으로 모스크바 留學을 마치고 돌아와 全北道黨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다. 全北道黨은 남부군 못지않게 强한 戰鬪力을 維持하고 있었다.

    “나도 방준표 同志의 意見에 贊同하오. 이제부터는 地域別로 分散해서 小段位 鬪爭에 置重해야 할 것이오.”

    全南道當 委員長 박영발이 방준표의 意見에 同意하고 나섰다.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俗稱 ‘錢評(全評)’ 幹部 出身으로 방준표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留學을 마치고 돌아온 者다. 방준표와 박영발은 事事件件 이현상을 물고 늘어졌다. 빨치산을 統合해 强力한 第2電線을 構築해야 한다는 이현상과, 오히려 小規模로 分散시켜 人民들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는 방준표·박영발이 날카롭게 對立하면서 會議場에 터질 듯한 緊張感이 흘렀다.

    舊빨치와 新빨치의 葛藤

    빨치산에는 두 種類가 있다. 戰爭 前부터 左翼活動을 하던 俗稱 舊빨치, 그리고 洛東江 戰線에서 落伍한 人民軍들과 北韓 占領下에서 共産黨에 協力한 사람들로 構成된 新빨치가 그들이다. 빨치산 部隊도 두 種類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平壤의 남로당 指導部에서 直接 派遣한 이현상의 獨立制4地帶이고, 다른 하나는 地域別로 組織된 道黨 遊擊대다.

    두 種類의 빨치산 部隊는 只今 休戰을 앞두고 헤게모니 鬪爭을 벌이고 있었다. 이현상은 남로당 對南總責 이승엽으로부터 直接 任命받았다는 事實을 내세워 全體 빨치산을 統括하려 했는데 박영발과 방준표는 順順히 그의 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방준표와 박영발度 本來는 남로당 出身이지만 北韓軍이 湖南 一帶를 占領했을 때 북로당에 依해 各各 全北道黨과 全南道當 委員長으로 選出되면서 북로당과 直接 線이 닿아 있었다.

    平壤의 남로당 指導部는 休戰에 對備해 南韓에 强力한 根據地를 마련해둘 必要가 있었다. 南韓에 强力한 빨치산 部隊가 存在한다는 事實은 남로당 指導部가 平壤에서 큰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의 源泉. 그래서 6個 徒黨의 遊擊隊를 이현상의 獨立制4地帶 指揮 아래에 두기로 한 것인데 現地 道黨 委員長들의 反撥이 만만치 않았다.

    방준표와 박영발이 强力 反撥하고 나서자 忠南道黨과 忠北道當, 慶北道當, 그리고 慶南道黨 委員長들은 難堪한 表情으로 兩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獨立制4地帶와 全南, 全北道黨 遊擊隊는 빨치산의 主力을 이루는 部隊다. 그런데 只今 어느 쪽도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고 있었다.

    “이현상 同志는 이승엽 冬至로부터 美解放地區 鬪爭에 關해 全權을 委任받았소. 이현상 同志가 統合指揮를 決心한 以上 마땅히 各 道黨은 直轄 遊擊隊를 그에게 넘겨야 할 것이오.”

    暫時 沈默이 흐른 後에 남부군 政治委員 여운철이 發言을 하고 나섰다. 共産國家 軍隊에서 政治委員의 權限은 絶對的이다. 政治委員이 黨의 決定을 들먹이며 이현상의 便을 들고 나서자 방준표와 박영발은 不滿 가득한 얼굴로 한발 물러섰다.

    “政治委員의 말이 옳다고 봅니다.”

    慶南道黨의 김삼홍이 거들고 나섰다. 慶尙道 萬石꾼의 아들로 와세다대학을 卒業한 그는 平素에도 이현상에게 好意的이었다. 다른 道黨 委員長들度 크게 反對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이현상은 빨치산의 總帥가 되었고 獨立4地帶의 別稱이던 남부군은 南韓 全體 빨치산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남부군의 據點을 智異山으로 옮기겠소. 各 道黨은 麾下의 遊擊隊를 서둘러 智異山으로 집결시키고 連絡責과 비선을 새로 組織해서 都市로 浸透시키시오.”

    이현상은 智異山으로 돌아갈 것임을 公表했다. 智異山. 그곳은 舊빨치들에게는 마음의 故鄕이었다.

    봄날은 가고

    빨치산의 由來는 日帝强占期 野山隊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本格的으로 武裝을 갖추고 鬪爭에 나선 것은 麗水·順天 10·19事件(以下 旅順事件) 以後부터다. 남로당 幹部로 平壤에 머물며 모스크바 留學을 準備하던 이현상은 旅順事件 消息을 듣고 急히 南쪽으로 내려왔다. 旅順事件은 남로당 指揮部의 指示 없이 現地에서 偶發的으로 일어난 事件이었다.

    한때 麗水와 順天을 占領했던 叛軍은 鎭壓軍이 出動하자 곧 敗退했고 旅順事件은 失敗로 돌아갔다. 이현상은 敗走兵들을 이끌고 智異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以前부터 武裝鬪爭을 벌이고 있던 남로당願들을 糾合해서 빨치산을 組織했다. 이현상은 智異山을 根據地로 삼고 武裝鬪爭을 展開했고, 平壤의 남로당 指導部는 이현상을 支援하기 위해 人民遊擊隊를 次例로 南派했다. 하지만 期待했던 人民蜂起는 일어나지 않았고 人民遊擊隊는 모조리 討伐되면서 智異山 빨치산들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쫓겨 다니는 身世가 돼버렸다.

    그런데 가물가물하던 불씨가 6·25戰爭이 勃發하면서 다시 불타올랐다. 討伐隊에 쫓겨 德裕山을 헤매던 이현상은 그곳에서 북한군이 이미 서울을 占領했다는 놀라운 消息을 들은 것이다. 마침내 祖國解放의 그날이 온 것인가. 勇氣百倍한 빨치산들은 人民軍 部隊로 달려갔고 武裝을 새로 支給받고서 洛東江 戰線에 投入되어 活潑하게 遊擊戰을 展開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國土完整의 大業을 이룰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國軍과 美軍이 仁川에 上陸하면서 傳貰가 一時에 逆轉된 것이다.

    김병진이 못마땅한 表情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안진규는 김병진에 앞서 北에서 내려온 密使다. 그런데 안진규는 途中에 國軍에게 逮捕되어 轉向을 했다. 방준표와 박영발은 轉向한 채 智異山에 온 안진규를 疑心했지만 이현상이 감싸준 바람에 그냥 넘어갔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안진규가 逃走를 한 것이다.

    “어쨌거나 한番 終結된 事件인데 이제 와서 다시 擧論하는 것도 그렇고….솔직히 이현상이 남로당 指導部를 批判할지 疑問이오.”

    방준표는 죽을 맛이었다. 北에서는 몰아붙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지만 現地 事情은 그렇게 簡單치가 않았다. 北에서 빨치산을 外面한 마당이다. 窮地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에게 대든다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狀況이다.

    “그럼 中央黨 指令을 無視할 셈이오?”

    김병진이 言聲을 높였다.

    “그럴 理가 있겠소.”

    방준표가 허둥대자 김병진이 表情을 찡그리며 代案을 提示했다.

    “정 그렇다면 이현상을 英雄으로 만드시오.”

    “그게 무슨 말…?”

    방준표가 깜짝 놀라며 김병진을 쳐다봤다. 그러나 김병진은 입을 다물었고 방준표度 더 묻지 않았다. 그 以上의 質問은 愚問일 것이다.

    “北의 方針이 그렇다면 아무튼 9月10日 前에 다시 會議를 召集하도록 하겠소.”

    暫時 사이를 뒀다가 방준표가 決心한 듯 입을 열었다. 김병진의 말이 무슨 意味인지 充分히 理解한 것이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時間이 그리 넉넉하지 않소. 可能하면 期日을 앞당기도록 하시오.”

    할 말을 마친 김병진은 몸을 일으켰다. 남로당은 이미 뿌리가 뽑힌 마당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쯤 英雄으로 남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이다. 勿論 살아 있는 英雄은 必要 없지만.

    “하면 박영발 同志와 連絡해서 이현상을 一旦 平黨員으로 降等시키도록 하겠소.”

    방준표가 무거운 表情으로 입을 열었다.

    굴러들어온 ‘떡’

    1953年 9月17日 새벽 5時. 龍岡 서전警査 第2聯隊長室.

    西南地區戰鬪警察司令部 第2聯隊長 차일혁 總警은 쉽게 判斷이 서질 않았다. 情報를 綜合해보건대 두 사람의 陳述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선뜻 出動을 決心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뜻밖의 狀況이 發生했기 때문이었다. 申告를 받고 出動한 隸下 618部隊가 雙磎寺 附近에서 補給鬪爭에 나선 빨치산 두 名을 逮捕했는데 뜻밖에 김지회部隊員들이었다. 이현상의 親衛隊인 김지회部隊員들이 별다른 抵抗 없이 順順히 投降한 것도 異常한 마당에 두 사람이 이현상 生捕를 自處하고 나선 것이다. 김지회部隊원이 이현상 生捕를 自處하고 나서다니, 陷穽일까. 그렇지만 빨치산은 이미 陷穽을 파고 奇襲할 能力도 없는 狀態였다.

    “內部에서 뭔가 問題가 發生한 것 같습니다.”

    搜索隊 김용식 傾斜가 조심스럽게 意見을 내놓았다. 轉向 빨치산 出身인 그는 當然히 그쪽 事情에 精通했다. 차일혁 總警도 그리 斟酌하고 있었다. 어쩌면 남로당 指導部의 沒落과도 關聯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仔細한 것은 아직 把握되지 않았지만 얼마 前부터 山을 내려오는 빨치산이 크게 늘어났다.

    “거짓 投降은 아닌 듯합니다.”

    김용식 傾斜가 出動指示를 재촉했다. 꾸물대다간 남 警査에게 공을 넘기는 수가 있다. 只今 빗점골에선 남 警査 所屬의 56聯隊가 大大的인 作戰을 펼치고 있었다.

    情報가 確實하다면 괜히 大兵力을 動員해서 騷亂을 떠는 것보다 少數 精銳兵을 길목에 埋伏시키는 게 效果的일 것이다. 問題는 逆情報日 境遇 沒殺을 當할 憂慮가 있다는 것인데…. 차일혁 總警은 苦心했다. 陳述에 따르면 이현상은 9月6日 開催된 道黨 委員長 會議에서 採擇된 決定書 10號에 따라 平黨員으로 降等된 狀態다. 박영발의 發議로 採擇된 決定書 10號로 이현상의 直轄 勢力인 第5지구당 要員들과 直屬 김지회部隊員들은 全部 各 都堂에 分散 配置됐다고 했다.

    “그럼 이현상은 只今 護衛兵도 없이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平黨員에게 護衛兵이 있을 턱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김지회部隊員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진 마당입니다.”

    暫時 생각하던 차일혁 總警은 決定을 내렸다. 狀況이 妙하게 展開되는 것 같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前後關係의 輪廓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의 김지회部隊院은 이현상을 살리기 위해서 投降한 것일지도 모른다.

    “出動이다.”

    차일혁 總警은 더 생각하지 않고 出動命令을 내렸다. 차일혁 總警은 나중에 아무도 이현상의 屍身을 引受하려 하지 않자 敵將에 對한 禮遇를 갖추고 屍身을 化粧한다.

    이현상의 最後

    時計는 벌써 23時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5時에 出動했으니 그 사이에 18時間이 흐른 것이다. 김용식 傾斜가 指揮하는 2聯隊 搜索隊員 38名은 빗점골로 통하는 길목 6곳에 分散 配置 中이었다. 投降한 김지회部隊員들의 情報에 依하면 17日 밤부터 18日 새벽 사이에 이현상이 慶南道黨으로 移送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相當한 時間이 흘렀건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埋伏하고 있어야 하나. 情報가 正確하다고 해도 어느 길로 갈지는 알 수 없는 狀況이다. 搜索隊員들은 나머지는 天運에 맡기기로 하고 빗점골에 埋伏해 있었다.

    天下의 이현상이 平黨員으로 降等되어 都堂으로 끌려가다니. 틀림없이 박헌영과 이승엽을 批判해야 하는 屈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용식 警査는 投降을 한 김지회部隊員들의 心情이 理解되었다. 이현상을, 同志를 告發하는 屈辱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은 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忠誠일 것이다.

    김용식 警査는 無名指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샐 때까지 쉬지 않고 巡察을 돌 생각이었다. 異常 없이 埋伏하고 있음을 確認하는데 葛味峯 方面에서 사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搜索隊員들은 一齊히 姿勢를 낮추고 射擊 姿勢를 取했다.

    果然 조금 있다가 一團의 사람들이 縱隊로 늘어서서 操心스레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 몇 名일까. 埋伏하고 있는 搜索隊員은 4名에 不過했다. 아직 人員을 確認하지 못했는데 埋伏을 눈치 챈 것일까. 다가오던 一行이 걸음을 멈췄다. 거리는 15m 程度 떨어졌다.

    걸음을 멈추고 周圍를 살피던 一行이 갑자기 方向을 틀었다. 發覺된 것 같았다. 搜索隊는 一齊射擊을 했고 應射가 이어지면서 조용하던 빗점골에 銃聲이 울려 퍼졌다. 김용식 警査는 搜索隊員들을 督勵하며 精神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交戰은 오래가지 않았다. 逃走를 했는지 應射가 멈췄다. 놓친 것일까. 搜索隊員들은 눈에 불을 켜고 附近을 搜索하기 始作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銃을 맞고 죽은 屍身 한 具를 發見했다. 나머지는 逃走한 模樣이었다. 김용식 警査는 입맛이 썼다. 生捕는 못해도 全員 射殺했어야 했는데…. 아무튼 上部에 報告해야 한다. 김용식 警査는 時計를 들여다보았다. 夜光時計는 9月18日 午後 11時10分을 가리키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서 차일혁 總警이 現場으로 달려왔고 投降한 김지회部隊員들이 被殺된 사람이 이현상임을 確認했다. 平生을 共産黨 活動에 바쳤고 5年의 歲月을 풍찬노숙하며 빨치산을 이끌던 이현상은 그렇게 파란 많은 生을 마감한 것이다.

    智異山에 銃聲은 멎었어도…

    그날 빗점골에서 交戰이 벌어진 것은 事實이지만 이현상의 죽음에 對해서는 異說이 있다. 軍은 交戰 中에 射殺된 것이 아니고 軍 搜索隊에 依해 그 前날 이미 射殺됐다고 主張했다. 君의 主張이 事實이라면 이현상의 死亡日子는 1953年 9月17日이 된다.

    軍과 警察이 서로 공을 다투자 李承晩 大統領이 直接 介入했다. 그리고 警察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게 되어 이현상의 公式的인 死亡日子는 9月18日이 됐다. 그런데 平壤 愛國熱사릉의 이현상 墓碑에는 9月17日 죽은 것으로 記錄되어 있다. 그에 根據해서 이현상은 警察도, 軍도 아니고 뒤에서 쏜 銃에 被擊됐을 것이라 主張하는 사람도 있다.

    公式 發表대로 9月18日 警察과 交戰할 때 죽은 것인지, 아니면 남 警査의 主張대로 그 前날의 交戰에서 이미 射殺된 狀態였는지, 또 一部의 推測대로 뒤에서 쏜 銃에 맞은 것인지 이제 와서 그 以上 詳細한 것을 確認할 길은 없다. 다만 이현상으로서는 어느 쪽에서 쏜 銃이든 避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이현상은 北韓의 愛國熱사릉에 묻혔다. 勿論 屍身이 묻혀 있지 않은 假墓다. 비록 平黨員으로 降等되어 移送되던 中에 죽었지만 그래도 間諜으로 몰린 박헌영과 이승엽에 비해 幸福한 事後를 맞은 셈이다. 나머지 빨치산 幹部들도 1953年 말과 1954年 初에 걸쳐서 次例로 最後를 맞았는데 大部分 信念을 지킨 채 討伐隊에 依해 射殺됐다. 그 後에도 제법 오랫동안 智異山을 헤매고 다닌 빨치산들도 있지만 좀도둑에 不過한 亡失共匪(亡失共匪)일 뿐이었다.

    無數히 많은 사람이 智異山 골짜기만큼이나 많은 事緣을 안고 쓰러져갔다. 그들 中에는 信念을 가지고 入山한 사람보다는 理念이 뭔지도 모르고 휩쓸렸던 사람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智異山에서 銃聲이 멎으면서 韓半島는 비로소 平穩을 되찾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停戰(停戰)에 不過했다. 南과 北은 繼續해서 尖銳한 對立을 이어갔다.

    빨치산과 토벌군의 지리산 대혈투

    太白山과 智異山 一帶의 共匪를 掃蕩하기 위해 1950年 12月 創設된 戰鬪警察司令部.

    洛東江 戰線에서도 大大的인 反擊이 始作되면서 빨치산은 後退하는 人民軍을 따라 北上길에 올랐다. 백두대간을 따라 北으로 逃走하던 이현상은 江原道 細浦郡 후평리에서 平生 同志이자 上官인 이승엽과 再會했다. 이승엽은 빨치산을 獨立制4地帶, 俗稱 남부군으로 改編하고 司令官에 이현상, 政治委員에 여운철, 그리고 否定치위원에 김일성大學 敎授 出身인 차일평을 임명했다. 새로 남부군 司令官이 된 이현상에게는 速히 南下해서 유엔軍의 後方에 第2電線을 構築하라는 命令이 下達됐다. 그 무렵 남로당은 戰爭 失敗에 따른 責任 素材를 놓고 북로당과 날카롭게 對立하고 있었다. 이런 狀況에서 빨치산이 南韓에 第2電線을 構築하고 있다는 事實은 남로당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남부군의 任務는 中國軍의 參戰으로 退却 中인 國軍과 美軍의 後方에 第2電線을 形成하고 攪亂作戰을 펴는 것. 第2電線을 形成하려면 國軍과 美軍보다 먼저 南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현상은 남부군을 引率해 서둘러 南下했고 俗離山에 根據地를 마련했다. 그리고 後方 部隊를 奇襲하고 補給路를 遮斷하며 적지 않은 戰果를 올렸다. 1951年 3月에는 淸州를 占領하는 凱歌도 올렸는데 道廳 所在地가 빨치산의 手中에 떨어진 것은 前無後無한 일이었다. 當時 남부군은 再歸熱이라 불리던 發疹티푸스가 猖獗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이때가 남부군에는 全盛期였던 셈이다. 빨치산은 當時까지 國土完整의 꿈을 抛棄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中國軍의 春季攻勢가 失敗로 돌아가면서 戰線은 膠着되었고 休戰會談이 擧論되면서 남부군의 앞날에 짙은 먹구름이 끼었다. 休戰이 되면 國軍은 大規模 討伐隊를 組織할 것이다. 멀어져간 統一의 꿈과 눈앞에 닥친 冷酷한 現實. 빨치산 指導者들은 向後 鬪爭 方向을 定하기 위해 德裕山 送致골에 모였고 그 結果 道黨 遊擊隊는 모두 이현상의 指揮를 받게 된 것이다.

    德裕山을 出發한 남부군은 1951年 8月에 智異山으로 들어왔다. 1年 半 만이었다. 智異山에는 洛東江에서 後退할 때 落伍된 이영회部隊가 먼저 들어와 있었는데, 이어서 送致骨會議에 따라 各 道當 遊擊隊가 續續 智異山으로 들어오면서 남부군은 大部隊로 再編됐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環境에서 새로운 鬪爭을 展開해야 한다.

    激戰場으로 變한 智異山

    前에 쫓겨 갈 때와는 比較도 안 될 만큼 많은 人員에 新式 武器로 武裝을 하고 있지만 與件은 그때만 못하다는 事實을 이현상은 잘 알고 있었다. 빨치산과 住民은 물과 고기의 關係다. 그만큼 現地 住民의 協助가 絶對的이다. 그런데 住民들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들도 休戰이 멀지 않았다는 事實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招募(招募)事業과 補給鬪爭이 어려움을 빚었다. 더 以上 제 발로 入山하는 者는 없었고 제 손으로 食糧을 내놓는 住民도 거의 없었다. 强制로 끌고 가고 빼앗는 過程에서 住民들은 차츰 등을 돌렸다. 더욱이 新빨치들은 南쪽에 따로 緣故가 없는 마당이다.

    그렇지만 남부군은 熱心히 싸웠고 智異山 一帶는 그야말로 ‘낮에는 大韓民國, 밤에는 人民共和國’인 世上이 됐다. 南部軍이 活潑하게 鬪爭하면서 平壤에 對南事業을 總括하는 連絡部가 創設됐다. 對南事業 祕書는 司法上 이승엽이 겸했고 部長은 배철이 맡았다. 林和와 이강국, 설정식 等 남로당 出身들이 要職을 掌握했다. 남부군은 남로당의 所重한 資産이었다.

    그렇게 戰線에서 멀리 떨어진 智異山에 第2電線을 構築하고서 小規模 解放區를 組織해가던 가운데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다시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國軍의 本格的인 討伐戰이 始作됐다. 銃聲이 뜸해진 戰線을 代身해 눈 덮인 智異山이 激戰場으로 變한 것이다.

    ‘쥐잡기作戰’ 카운트다운

    1951年 11月30日. 智異山 上空.

    亂氣流를 만난 듯 L19 連絡機가 甚하게 요동쳤다. 南原을 離陸한 連絡氣는 성삼재를 지나고 般若峯을 넘어 雲峯을 向해 飛行하고 있었다. 百野戰社 司令官 白善燁 所長과 參謀長 김점곤 大領, 情報參謀 유양수 大領이 作戰 開始를 앞두고 現地偵察에 나선 것이다.

    間間이 작은 部落이 보이고 階段式 논이 눈에 들어왔지만 내려다보이는 光景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原始林 그대로였다. 저 넓고 깊은 山속에 숨어 있는 빨치산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地形地物을 살피던 白善燁 所長은 걱정이 됐다.

    戰線이 小康狀態로 접어들자 밴플리트 8軍司令官은 後方을 攪亂하는 빨치산을 本格的으로 討伐하기로 하고 그 任務를 백선엽 將軍에게 맡겼다. 백선엽 將軍은 빨치산 討伐을 專擔할 百野戰社를 새로 創設하고 首都師團과 8師團을 百野戰社에 配屬시켰다. 그동안 빨치산 討伐을 맡고 있던 西南地區戰鬪司令部도 百野戰社 麾下로 編入되었고, 또 戰鬪警察로 構成된 太白山地區戰鬪司令部와 智異山地區戰鬪司令部도 百野戰社의 統制를 받게 되면서 百野戰社는 3個 師團과 4個 戰鬪警察 連帶를 麾下에 둔 2個 軍團 規模의 莫强한 戰鬪力을 保有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빨치산은 여태까지의 軍警들과는 全혀 다른 莫强한 討伐隊를 相對해야 한다.

    “제법 큰 마을인데 아이가 한 名도 보이지 않습니다.”

    參謀長 김점곤 大領이 雙眼鏡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飛行機가 날아오면 好奇心 旺盛한 아이들이 뛰쳐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렇게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은 必是 빨치산이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規模에 비해서 밥 짓는 煙氣가 많이 나는 마을도 一旦 疑心해야 한다.

    連絡氣는 雲峯에서 方向을 틀어 南原 司令部로 向했다. 智異山 討伐作戰-쥐잡기作戰(Operation Rat Killer)-의 D데이 H아워는 12月2日 午前 6時. 원활한 作戰 遂行을 위해 12月1日 0時를 期해서 釜山과 大邱를 除外한 大田 以南 全域에 非常戒嚴令이 宣布될 豫定이었다.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로 봐서 아직 情報가 새지 않은 듯합니다.”

    유양수 大領이 말했다. 쥐잡기作戰의 成敗는 機動打擊隊를 맡을 송요찬 准將의 首都師團과 최영희 准將의 8師團 等 2個 師團을 如何히 隱密하게 移動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束草에 駐屯하던 首都師團은 海軍 LST를 타고 餘水로 移動해 智異山 南쪽에 集結했다. 永川의 8師團은 金泉과 電柱를 거쳐 智異山 北쪽으로 移動해왔다. 討伐部隊는 機密을 維持하기 위해서 낮에도 커튼을 내린 채 幕舍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빨치산에게 友好的인 現地民들이 作戰을 빨치산에게 알리는 것을 막기 위해 民間人 電話線은 이미 切斷했다. 作戰 內容이 事前에 새어나가면 빨치산들이 小規模로 分散해서 깊은 山골짜기로 숨을 것이다.

    情報參謀는 情報가 새지 않았다고 報告하지만 백선엽 將軍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無慮 2個 師團이 移動했다. 아무리 操心해도 그만한 大規模 人員이 움직이다보면 敵의 情報網에 捕捉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飛行場을 닦고 捕虜收容所를 세우느라 現地 住民들을 動員하면서 이런저런 所聞이 떠돌았을 테니 有能한 指揮官이라면 머지않아 大規模 討伐이 있을 것이란 事實을 눈치 챘을 것이다. 情報가 새면 빨치산들은 小規模로 分散해서 더 깊은 山속으로 逃走할 것이고 그러면 쥐잡기作戰은 別 成果를 올리지 못할 것이다.

    討伐隊 우습게 보다 潰滅

    그런데 백선엽 將軍의 憂慮는 事實로 判明이 났지만 結果는 全혀 다른 方向으로 흘렀다. 빨치산들은 大規模 討伐을 看破하고도 깊은 山속으로 逃走하는 代身에 果敢하게 正面勝負를 걸어온 것이다. 全北道黨과 忠南道黨은 300餘 名을 智異山에 派遣하며 남부군을 도왔다. 한마디로 討伐隊를 우습게 본 것인데, 이는 빨치산들은 그동안 제대로 된 討伐隊를 相對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빨치산 討伐은 現地 警察이 主導했는데, 管轄區域 槪念이 强한 現地 警察은 빨치산을 追擊하다가도 그들이 自身의 管轄區域을 벗어나면 未練 없이 追擊을 中斷했다. 이를 잘 아는 빨치산은 管轄區域을 넘나들며 討伐隊를 손쉽게 따돌렸다. 그러니 그間 討伐隊는 빨치산들에게 그리 두려운 相對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前方에서 差出된 精銳 2個 師團이 機動打擊隊가 되어 끝까지 追擊하고 地域 情報에 밝은 戰鬪警察이 豫想 逃走路에 埋伏하고 있다가 敗走하는 빨치산을 덮치는 것이 쥐잡기作戰의 要諦다. 쥐잡기作戰이 開始되면서 江陵에 駐屯하던 韓國 空軍의 F51 머스탱 編隊도 泗川으로 移動해서 地上作戰을 支援했다. 빨치산들은 이제 하늘로부터도 쫓겨야 할 판이다.

    智異山이 온통 횃불로 일렁였다. 討伐隊들이 추위를 녹일 目的으로 횃불을 피운 것이다. 埋伏戰에서 自身의 位置를 露出시키는 行爲는 絶對 禁物임에도 횃불을 밝힌 것은 그만큼 討伐隊가 壓倒的인 優勢를 보였기 때문이다. 智異山 자락을 환하게 밝히며 包圍網을 좁혀오는 횃불을 보며 빨치산들은 비로소 恐怖의 實體를 똑똑히 體驗하게 되었다. 그동안 相對하던 現地 警察과는 次元이 다른 討伐대였다.

    百野戰사는 住民 宣撫에도 積極的으로 나섰다. 前에는 빨치산들에게 쌀 한 톨, 김치 한 쪽만 줘도 통비(通匪)分子로 몰렸다. 그러다보니 本意 아니게 入山하는 境遇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念慮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捕虜도 寬大하게 處分해서 强制로 끌려갔거나 罪가 가벼우면 訓放措置했다. 그것은 逮捕되면 無條件 죽는 걸로 알고 있었던 빨치산들에게 적지 않은 混亂을 불러왔다.

    1951年 11月29日에 始作된 쥐잡기作戰은 1952年 3月14日附로 終結됐다. 100餘 日에 걸친 作戰이 終了되면서 남부군은 被殺 7000餘 名에 砲로 6000餘 名이라는 엄청난 打擊을 입고 再起不能 狀態에 빠졌다. 그러면서 남부군은 後方의 安保를 威脅하는 存在에서 地域의 治安을 攪亂하는 存在로 意味가 格下됐다. 그렇지만 남부군은 如前히 命脈을 이어갔고 智異山에서는 銃聲이 그치질 않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빨치산들은 停戰協商에서 自身들의 北送에 對해서 아무런 言及이 없다는 事實에 또 한 番 失望해야 했다. 國土完整의 꿈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 奧地의 住民들도 갈수록 非友好的이었다. 남은 希望은 北으로 돌아가는 것. 糖은 決코 우리를 잊지 않을 것이다. 빨치산들은 그 希望 하나로 힘든 現實을 참아냈다.

    세 가지 ‘죽을 覺悟’를 했건만

    1952年 4月 初. 智異山 대성골.

    어두워지기 前에 돌아가야 할 텐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걱정하던 이진범은 人기척을 느끼고 얼른 姿勢를 낮췄다. 日本軍 副士官 出身인 그는 旅順事件 以後 빨치산이 되어 鬪爭에 앞장서왔다.

    “날세.”

    송관일이 補給鬪爭에 나섰던 同志들을 引率하고 달려왔다. 表情이 어두운 것으로 봐서 補給鬪爭이 神通치 못한 模樣이었다.

    “갈수록 人民들이 非協調的이야.”

    송관일이 不滿을 吐露했다. 그도 이진범과 마찬가지로 旅順事件을 主導한 14聯隊 副士官 出身이다. 쥐잡기作戰 以後로 友好的인 住民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火田民들度 대놓고 빨치산을 멀리했다. 補給鬪爭에 나선 빨치산들에게 投降을 勸誘하는 사람도 있었다. 招募事業度 큰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自進해서 入山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强制로 끌고 와도 틈만 나면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제 智異山은 더 以上 빨치산의 故鄕이 아니었다.

    人之常情. 누굴 탓할 것인가. 이미 大勢가 기운 마당이다. 이진범은 敗者 便에 서지 않으려는 住民들을 탓할 마음이 없었다. 겨우 감자 두 包袋로 補給鬪爭을 마친 빨치산들은 대성골 아지트를 向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조금 있으면 隣近 세석평전은 온통 철쭉으로 붉게 물들 것이다. 季節은 分明 봄이건만 빨치산에게 봄은 아직 먼 것 같았다. 이진범은 어쩌면 永遠히 봄이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다시는 人共旗가 휘날리던 解放區를 볼 수 없을 것인가. 太平洋戰爭에도 參戰했던 이진범은 敗戰의 徵候를 잘 알고 있었다.

    “수고들 했소.”

    빨치산과 토벌군의 지리산 대혈투

    1953年 西南地區戰鬪警察司令部 第2聯隊長으로 이현상 逮捕作戰을 指揮한 차일혁 總警. 그는 아무도 이현상의 屍身을 引受하려 하지 않자 ‘敵將’에 對한 禮遇를 갖추고 屍身을 化粧했다.

    아지트에 當到하자 勵猛委員長 조복애가 얼른 뛰어나왔다. 그女는 山淸 千石꾼의 딸로 모스크바 留學까지 마친 엘리트 女性이다. 나중에 조복애는 越北 指令을 받고 下山해서 親知의 도움으로 日本으로 密航했다 北韓으로 가는데, 그것이 浸透工作으로는 마지막이었다. 以後로는 智異山을 내려가는 대로 모조리 逮捕됐다. 住民들은 더 以上 빨치산을 숨겨주지 않았다.

    女性 빨치산들이 재빨리 싸리나무로 불을 때기 始作했다. 싸리나무는 煙氣가 나지 않아서 山中 炊事에는 安城맞춤이다. 隊員들은 허기진 얼굴로 밥 짓는 걸 멀거니 쳐다보았다. 빨치산이 되려면 세 가지 죽을 覺悟를 해야 한다. 銃 맞아 죽을 覺悟, 굶어 죽을 覺悟, 그리고 얼어 죽을 覺悟. 智異山의 겨울은 酷毒하다. 밤이면 體感溫度가 零下 30℃까지 떨어진다. 골짜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매서운 바람과 繼續되는 討伐, 그리고 굶주림. 언젠가는 討伐隊를 被害 얼음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半나절을 버틴 적도 있다.

    晝夜로 繼續되는 政治學習과 걸핏하면 열리는 娛樂會. 그 渦中에도 산 生活은 精神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빨치산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었다. 希望 없이 살아야 한다는 事實이다. 세 가지 죽을 覺悟를 한 빨치산들에게도 그것은 너무도 두려운 存在였다.

    씨가 말라간다

    저 아래로 마을의 불빛이 차가운 空氣에 깜빡깜빡 흔들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집 생각이 나는 것일까. 산 生活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豫告하는 것일까. 補給鬪爭을 마치고 돌아온 이진범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旅順事件에 加擔했다가 入山한 것이 1948年 10月. 精神없이 南北을 오가며 戰鬪를 벌이다 다시 智異山에 돌아온 지도 1年이 넘었다. 언제까지 이런 生活이 이어질까. 故鄕이 여기서 멀지 않다. 죽기 前에 故鄕땅을 다시 밟아볼 수 있을까. 왠지 自身이 없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해본 적은 없다. 빨치산이 된 것을 後悔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갈수록 가슴 한가운데가 허전한 것이 事實이었다.

    食事를 받아든 이진범은 三三五五 모여 食事를 하고 있는 隊員들 틈에 끼었다. 補給鬪爭이 어려워지면서 먹는 게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빨치산들에게는 食事 때가 第一 즐거운 時間이다. 빨치산들이 食事하는 모습은 特異하다. 손과 同時에 발도 부지런히 움직인다. 凍傷을 豫防하려면 쉴 새 없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야 하는데 그것은 銃을 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진범은 나중에 北쪽과 連絡하기 위해 北으로 가다가 月岳山 附近에서 討伐隊에게 射殺된다.

    “會議를 합시다.”

    政治委員 여운철이 默默히 山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현상에게 다가왔다. 이현상이 고개를 끄덕이고 幹部들을 召集했다. 部隊를 이끌고 있는 이진범과 송관일, 김홍복, 이영회, 그리고 조복애가 모였다. 쥐잡기作戰이 끝나면서 조금 餘裕를 얻었지만 討伐이 再開되기 前에 安全한 곳에 아지트를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當場 時急한 것은 머지않아 開催될 6個 道黨 全員會議에 對備하는 것이다.

    남부군 幹部들의 表情이 어두웠다. 박영발과 방준표를 爲始한 道黨 委員長들의 反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쥐잡기作戰은 智異山에 局限된 게 아니었다. 討伐隊가 회문산과 白雲山, 운장산, 內藏山, 德裕山 그리고 민주지산을 휩쓸고 다니면서 全北道黨과 全南道當, 忠南道黨, 慶南道黨度 엄청난 打擊을 입었다. 애初부터 제대로 된 兵力이 없었던 忠南道黨은 아예 씨가 말라버렸다.

    그에 비하면 智異山은 相對的으로 被害가 적은 便이었다. 남부군 直屬인 81師團과 92師團은 그런대로 健在했다. 勿論 師團이라고 해봤자 正規軍 大隊에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兵力이지만.

    道黨 委員長들의 不滿은 極에 達해 있었다. 그들은 이현상이 實情을 無視하고 部隊를 大單位로 再編하는 바람에 훨씬 큰 被害를 봤다고 생각했다. 빨치산이 怯 없이 百野戰師에게 正面對決을 試圖했다가 被害를 키운 것은 事實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현상이 못마땅하던 次에 道黨 委員長들의 心氣를 더욱 不便하게 만드는 일이 또 생겼다. 쥐잡기作戰이 한창이던 1952年 秒에 흔히 ‘94號 決定書’라고 불리는 勞動黨 中央政治委員會 名義의 ‘美解放地區에 있어서의 黨 事業과 組織에 對해서’라는 文件이 智異山에 傳達된 것이다. 94號 決定書는 休戰에 對備해서 南韓을 5個 地球로 나누고 旣存의 道黨 組織을 새로 組織된 地區黨에 移管하라는 內容을 담고 있는데, 具體的으로 서울과 京畿道를 제1지구로, 蔚珍郡을 除外한 江原道를 제2지구로, 論山郡을 除外한 충청남북도를 제3지구로, 慶尙北道와 蔚珍郡 및 洛東江 移動의 慶南地域을 第4地區로, 그리고 全南·全北과 慶南의 洛東江 李曙 地域 및 論山郡, 濟州島를 제5지구로 나누어 새롭게 鬪爭을 展開하라고 指示했다.

    빨치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한 第1, 第2, 第3地區는 別로 問題 될 게 없다. 누가 主導下件 새로 地球를 整備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제4지구는 當然히 慶北道黨의 박종근 委員長이 承繼하게 될 것이다. 問題는 巨物級 빨치산 指導者들이 櫛比한 第5地球다. 누가 제5지구당 委員長을 맡을 것인가. 一旦은 남부군 司令官 이현상이 有力하지만, 全南道當 박영발과 全北道黨 방준표가 이番에도 順順히 組織을 내놓을지는 疑問이었다.

    이현상의 不安한 헤게모니

    그렇게 무거운 기운이 智異山을 내리누리는 가운데 마침내 6個 道黨 全員會議가 열렸다. 會議가 始作되자 豫想했던 대로 박영발과 방준표는 94號 決定書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激烈하게 反撥했다. 그들은 94號 決定書가 作成된 것은 쥐잡기作戰이 開始되기 前인 1951年 8月31日로, 그 사이에 狀況이 크게 變했음을 들어 現實과 어울리지 않는 措置임을 主張하고 나섰다. 나머지 道黨 委員長들度 이현상에게 好意的이지 않았다. 平壤의 남로당 指導部들이 自身들의 利益을 위해서 現實과 동떨어진 指針을 내렸다며 이현상은 勿論 對南事業 祕書 이승엽과 政治委員 여운철까지 싸잡아 非難하고 나선 것이다. 헤게모니 爭奪戰은 平壤에서 멀리 떨어진 智異山에서도 熾烈하게 展開되고 있었다.

    팽팽하게 對峙하던 會議는 북로당에서 派遣한 不政治委員 차일평과 中央民靑 副委員長 오운식이 道黨 委員長들의 便을 들고 나서면서 이현상에게 不利하게 展開되었다. 그렇지만 이현상은 脈없이 물러나지 않았다. 이현상이 强力한 主張을 펼치면서 6個 道黨 全員會議는 이현상이 제5지구당 委員長, 박영발이 副委員長을 맡는 것으로 折衷했다. 位相이 예전만 못한 것은 事實이지만 그래도 이현상은 如前히 빨치산의 象徵이었고 박헌영, 이승엽과 直接 이어지는 線은 아직도 權威를 維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어 이현상은 舊빨치 時節의 제2병단장에 이어 獨立制4地帶長, 남부군 司令官을 次例로 거치고 제5지구당 委員長이 되었다. 一旦 남로당 指導部의 뜻은 貫徹됐지만 여태까지의 指導者的인 位相과는 달리 다른 道黨 委員長들과 對等한 處地에서 相互牽制를 甘受해야 하는 處地가 된 것이다. 第5地區로 새롭게 體制를 갖춘 빨치산은 軍事組織도 改編했다. 남부군 直屬의 81師團과 92師團은 各各 김지회部隊와 박종하部隊로 改編됐고 全北道黨은 敗走兵들을 끌어 모아 抗美連帶와 複數連帶로 再編됐다. 休戰에 對備해서 小部隊 體制로 轉換한 것이다.

    실낱같은 希望도 사라지고

    討伐隊에 쫓기며 智異山 一帶를 轉轉하는 가운데 季節은 어김없이 흘러 여름, 가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돌아왔다. 겨울은 빨치산에게 가장 힘든 季節이다. 그야말로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기 딱 좋은 季節이다. 그렇지만 사람 목숨만큼 모진 것도 없다고, 빨치산들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 속에서 風餐露宿을 하며 짐승과도 같은 生存本能을 이어갔다. 討伐隊의 追擊을 避해 차가운 얼음물에 뛰어들기를 例事로 하며 智異山 골짜기를 누비는 사이에 해가 바뀌어 1953年이 되었다.

    새해의 아침이 밝았다. 빨치산들은 구름을 뚫고 떠오르는 해를 보며 所願을 빌었다. 여태까지 모질게 生存을 이어온 1500餘 빨치산의 所願은 살아서 北쪽으로 돌아가는 것. 武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빨치산들에게 生存은 最優先 課題였다.

    이 무렵부터 빨치산들은 ‘査察遊擊隊’라는 새로운 敵을 相對하게 되었다. 轉向한 빨치산들로 構成된 査察遊擊隊는 빨치산 戰術에 익숙한 데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齷齪같이 討伐에 나서는 바람에 빨치산들에게 두려움의 對象이었다. 支援도 끊긴 마당에 住民들은 등을 돌렸다. 거기에 이제는 옛 同志들과 서로 銃부리를 겨누는 處地가 된 것이다.

    세석평전에 철쭉이 滿發할 무렵에 기쁜 消息과 暗鬱한 消息이 同時에 들려왔다. 기쁜 消息은 곧 休戰이 될 것 같다는 것이고, 暗鬱한 消息은 유엔軍이 提案한 빨치산의 北送에 對해서 北韓이 冷淡한 反應을 보였다는 事實이다. 그것은 休戰이 成立되면 當然히 北으로 돌아갈 줄 알고 있던 빨치산들에게는 큰 衝擊이었다.

    하지만 會談이 本格的으로 進行되면 黨에서 對策을 마련할 것이다. 智異山 빨치산들은 九月山 等地에서 活躍하고 있는 反共遊擊隊와 맞交換될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希望으로 힘든 歲月을 이겨나갔다.

    그렇지만 그 실낱같던 希望도 1953年 7月27日 板門店에서 停戰協定이 調印되면서 絶望으로 바뀌고 말았다. 北은 끝내 빨치산 送還에 아무런 關心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빨치산에게 남은 選擇은 둘. 投降하는 것과 信念을 지켜서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다. 黨에서는 個別的으로 都市로 潛入해서 長期鬪爭에 對備하라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不可能한 狀況이었다. 緣故가 있는 舊빨치들도 내려가는 족족 逮捕되고 있었다.

    慘澹한 心情으로 對策을 마련하던 이현상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消息이 또 傳해졌다. 이승엽을 비롯해서 平壤의 남로당 指導部들이 줄줄이 逮捕된 것이다. 이강국과 林和는 美國 間諜이라는 嫌疑로 逮捕됐고 對南事業祕書 이승엽도 撤職되어 調査를 받고 있었다. 副首相 박헌영은 艱辛히 逮捕는 免했지만 언제 끌려갈 지 모르는 處地였다.

    朝鮮共産黨의 法統을 이은 남로당이 어떻게 이리 虛妄하게 沒落한단 말인가. 이현상은 靑天霹靂과도 같은 消息에 茫然自失했지만 남로당 指導部의 沒落은 休戰과 더불어 豫見된 것이었다. 豪言했던 國土完整이 失敗로 돌아간 데 對해 누군가에게 責任을 지울 必要가 있었던 北韓 指導部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남로당은 제格이었다. 平壤 남로당 指導部의 沒落으로 因한 後暴風은 早晩間 智異山에도 미칠 것이다. 이현상은 討伐隊에 包圍됐을 때보다 더한 恐怖에 휩싸였다.

    “組織的, 思想的 總整理 責任을…”

    1953年 8月26日 智異山 빗점골.

    休戰 以後 처음으로 제5지구당 指導部가 한자리에 모였는데 豫想대로 會議는 險惡한 雰圍氣에서 始作됐다.

    “反黨分子 박헌영과 이승엽은 宗派主義 思想에 立脚해서 南半部의 實情을 無視하고 94號 決定書와 111號 決定書를 濫發함으로써 無數한 戰死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各 徒黨의 革命 力量을 消渴시켰소.”

    깡마른 몸에 눈매가 날카로운 박영발이 毒氣를 뿜으며 남로당 指導部를 批判하고 나섰다. 아직 正式으로 裁判에 回附되지도 않은 박헌영까지 公公然하게 反動分子로 몰았지만 누구도 異議를 提起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헌영을 向한 화살이 窮極的으로는 이현상을 노리고 있다는 事實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현상은 94號 決定書와 ‘美解放地區에 있어서 우리 黨事業을 더욱 强化하는 데에 對해서’라는 이름의 第111號 決定書에 依해 名目上이나마 各 徒黨을 統括하는 最高指導者의 자리에 있었다.

    이현상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섣불리 남로당 指導部를 擁護했다가는 反黨分子로 몰리게 될 판이다.

    “反黨分子의 術策에 속아 同志들을 죽음으로 내몬 데 對해 나부터 自我批判하겠소. 그리고 副委員長을 辭退하고 平黨員으로 돌아가겠소.”

    박영발이 辭退宣言을 하며 이현상을 몰아붙였다. 指導部의 視線이 一齊히 이현상에게 쏠렸다. 박영발의 辭退는 當身도 委員長에서 물러나라는 無言의 壓力이었다. 副委員長이 平黨員을 自處한 마당에 委員長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현상은 박영발과 방준표, 김상홍, 김선우, 남경우와 조병하, 노영호 等 參席한 指導部의 얼굴을 次例로 쳐다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政治委員 여운철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이현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責任을 痛感하고 있소. 그래서 副委員長과 마찬가지로 平黨員으로 돌아가서….”

    “當然히 自我批判을 해야겠지만 只今은 그것보다 狀況을 收拾하는 것이 더 時急하다고 생각합니다.”

    全南道當 副委員長 兼 人民遊擊隊 司令官 김선우가 이현상을 制止하고 나섰다. 그는 틈만 나면 讀書를 하는 學區風의 사람이다.

    “그렇소. 副委員長이 辭退를 한 마당에 委員長까지 자리에서 물러나면 混亂만 加重될 것이오. 收拾이 于先이오.”

    노영호가 거들고 나섰다. 서울大 工大에서 建築을 專攻한 노영호는 와세다大學 出身으로 慶南道黨 副委員長을 맡고 있는 김삼홍과 더불어 穩健派로 分類되는 사람이다.

    反撥하고 나서려는 박영발의 팔을 방준표가 슬며시 붙들었다. 强性으로 따지면 박영발에 뒤지지 않는 그다. 하지만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좋지 않다. 事實 북로당이라고 只今 無條件 큰소리를 칠 마당도 아니었다. 빨치산의 北送에 對해서 無關心한 것에 對해서 不滿이 高調된 마당에 북로당 出身으로 事事件件 남로당을 牽制하고 舊빨치들을 無視했던 不政治委員 차일평은 討伐軍에게 逮捕된 後 轉向해서 投降放送을 하고 다녔다.

    “그럼 이현상 同志는 9月10日까지 제5지구당의 組織的, 思想的 總整理를 責任질 對策을 마련토록 하시오.”

    방준표가 發言하고 나섰다. 아무도 反對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되어 빗점골會議는 ‘反黨, 反國家的 破壞 暗害分子, 宗派分子人 박헌영, 李承燁 反逆徒黨의 殘滓와 影響을 根絶, 淸掃하기 爲한 諸般 對策’이라는 긴 이름의 決定書 9號를 採擇하고 解散했다.

    “山을 내려가시오”

    이현상은 暗澹한 心情으로 일어섰다. 南과 北 모두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일까.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렇지만 나 하나만을 믿고 여태까지 따라온 저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현상은 퀭한 눈으로 自身을 쳐다보고 있는 빨치산들을 애써 外面하며 골짜기로 向했다. 決定書 9號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모든 責任을 自己에게 떠넘긴 것이다.

    골짜기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季節이 바뀌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현상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尊敬하는 박헌영 先生과 이승엽 同志를 批判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이현상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戰爭은 끝났고 人民解放은 失敗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더 以上의 無謀한 犧牲은 막아야 한다. 이현상은 願하는 사람은 모두 하산시키기로 決心했다. 오로지 나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사람들. 그들에게 意味 없는 죽음을 强要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자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腦裏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부군 全盛時節을 이끌던 勇將 박종하와 이진범, 송관일, 그리고 女丈夫 양봉순, 더 멀리 第2兵端 時節의 김지회와 지창수의 얼굴이 그 뒤를 이었다. 모두 이미 이世上 사람이 아니다. 옛 同志 中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慶南道黨으로 配屬된 이영회 程度다.

    “先生님.”

    고개를 돌리니 하수복이 근심 가득한 表情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看護師 出身으로 빨치산에 合流한 하수복은 이현상의 ‘山中處’-內緣의 女人-로 통하고 있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이현상이 소리를 죽이며 하수복에게 다가갔다.

    “機會를 봐서 指示를 내릴 테니 그때 저들을 따라 山을 내려가시오.”

    이현상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周圍를 살피고 있는 護衛兵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山을 내려가라는 말은 投降하라는 뜻이다. 하수복이 깜짝 놀라며 이현상을 쳐다봤다.

    “예전과 달리 下山하는 빨치산을 寬大하게 다룬다고 들었소.”

    이현상은 아직은 어린 하수복을 虛無하게 山속에서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이현상은 부들부들 떠는 하수복에게 아무 말하지 말라고 이르고 두 護衛兵에게 가까이 올 것을 指示했다. 이현상의 護衛를 책임지고 있는 김지회部隊 所屬의 두 사람은 잔뜩 緊張해서 다가왔다.

    ‘죽은 英雄’ 만들기

    “9月10日이면 너무 늦은 것 아니오?”

    회문산 全北道黨 아지트에서 방준표를 기다리던 김병진은 決定書 9號 內容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현상을 肅淸하기 위해서 北에서 急派된 사람이다.

    “이현상은 아직도 빨치산에게는 象徵的인 存在고 김지회部隊度 無視할 수 없소.”

    김병진이 몰아붙이자 방준표가 不滿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마냥 꾸물댈 수는 없소. 中央黨에서 注視하고 있다는 事實을 銘心하시오.”

    “잘 알고 있소.”

    김병진이 中央黨을 들먹이자 방준표는 正色을 했다.

    “于先 제5지구당을 解體하고 이현상을 平黨員으로 降等시키시오. 그리고 박헌영과 이승엽을 批判토록 하시오. 또 김지회部隊度 解體하고 部隊員들을 各 都堂에 分散시키시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오. 김지회部隊員들은 이현상의 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者들이오. 無理해서 몰아붙이면 아무리 中央黨 指令이라고 해도 反撥할지 모르오.”

    방준표가 愼重히 行動할 것을 勸했다.

    “안진규 事件을 積極 내세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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