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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大勢를 통해 본 在日 코리안 100年|新東亞

正大勢를 통해 본 在日 코리안 100年

日本에 同化돼가는 在日僑胞 社會 稀薄해져가는 民族的 同一性

  • 이종각| 前 동아일보 記者 · 日本 주오大學 兼任講師 |

    入力 2010-08-04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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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아공월드컵에 北韓代表로 나선 韓國 國籍의 正大勢는 北韓 國家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가 흘린 눈물은 在日 코리안의 存在와 아픔을 全世界에 알리는 契機가 됐다. 1910年, 韓日强制合倂 當時 數百名에 不過했던 在日 朝鮮人은 1945年 光復 當時 240萬名으로 늘었고, 이들 中 相當數는 如前히 日本에 남아 差別과 偏見 속에서 모진 삶을 살아냈다.
    • 韓日强制合倂 100年인 올해는 在日 코리안 100年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民團과 總聯으로 나뉘어 두 曺國을 섬겨온 60萬 在日 코리안은 이제 歸化 等으로 徐徐히 日本에 同化돼가고 있고, 그들의 後孫인 在日 3~4歲의 民族的 同一性은 漸漸 엷어져가고 있다.
    정대세를 통해 본 재일 코리안 100년
    韓國, 北韓, 日本 3個國이 史上 처음 월드컵에 同伴 出戰한 남아공大會에서 北韓팀은 豫選 全敗로 탈락했다. 하지만 傑出한 스타가 한 名 誕生했다. 바로 在日僑胞 3歲인 正大勢(鄭大世)다. 그는 이番 남아공월드컵에 出戰한 아시아 選手 中 가장 有名해진 選手 中 한 사람이 됐다. 이番 大會를 契機로 正大勢는 蹴球選手로서의 位相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韓國 近·現代史의 悲劇을 象徵하는 在日 코리안의 存在를 世界에 널리 알리는 메신저 役割도 톡톡히 했다.

    大會 期間 中 北韓팀의 主攻擊手로 뛴 正大勢의 플레이와 北韓 國家를 들으며 펑펑 우는 까까머리 正大勢의 모습은 南北韓은 勿論 日本 言論에도 大大的으로 報道됐다. 日本 新聞 中 最大 發行部數(1000萬部)를 자랑하는 保守 右翼 性向의 요미우리(讀賣)新聞은 大會 前부터 始作한 正大勢의 ‘一騎當千(一騎當千)’이란 蹴球칼럼(週 1回)을 只今까지 繼續 揭載하고 있을 程度다.

    日本에선 北韓을 正式 國名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기타超센(北朝鮮, 北朝鮮)’으로 부른다. 現在의 日本人들에게 이 ‘기타超센’이란 나라는 日本人 拉致와 核問題 等으로 가장 嫌惡하는 나라이자 恐怖의 對象이다. 그런 理由 等으로 日本 言論의 對北 批判과 惡意的인 非難은 거의 日常化, 또 當然視돼 있다. 이 같은 狀況에서 正大勢에 對한 日本 社會의 關心과 評價는 運動選手라는 特殊性을 勘案하더라도 매우 異例的인 것이라 할 수 있다. 參考로 日本 言論은 ‘正大勢’가 아닌 ‘靜態稅’로 表記, 發音한다.

    正大勢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關心을 받는 理由는 勿論 北韓이 44年 만에 월드컵에 出戰하는 데 크게 寄與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關心을 끄는 것은 바로 그의 特異한 家族社다. 正大勢의 家族史에는 複雜多端했던 在日 코리안 100年의 歷史가 그대로 投影돼 있다.

    13歲 때 來日한 91歲 外할머니



    正大勢 家族의 在日(在日)의 뿌리는 그의 外할머니인 김홍선(金弘善·91)氏로부터 始作된다. 김홍선은 13歲이던 1932年, 故鄕인 慶北 安東에서 동생 둘을 데리고 日本으로 건너갔고 아이치(愛知)縣의 紡績工場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 生計를 이었다. 그 後 同胞와 結婚해 아이 둘을 낳았다. 日本이 中日戰爭(1937)을 일으키는 等 戰爭이 擴大되면서 日本 居住 朝鮮人들의 生活은 더욱 劣惡해졌고, 김홍선의 食口들 또한 입에 풀漆하기도 힘든 時間을 견뎌야 했다.

    太平洋戰爭 末期, 美 空軍의 日本 本土 攻襲이 심해지던 어느 날, 김홍선의 男便은 美軍이 投下한 爆彈의 影響으로 高熱에 시달렸는데, 얼마 後 日本憲兵隊 지프가 와서 그를 데려갔다. 그리고 며칠 後 김홍선에게는 男便의 遺骨이 담긴 흰 箱子가 傳해졌다. 그女는 男便의 죽음에 對해 아무런 說明도 듣지 못했다. 얼마 後 김홍선은 朝鮮人과 再婚해 히로시마(廣島)縣의 오다케(大竹)에 있는 朝鮮人 密集部落으로 移住해 生計를 꾸려나갔다.

    1945年 8月15日 日本이 敗戰한 後 오다케의 朝鮮人들은 子女들에게 日本語 代身 朝鮮語를 가르치기 위해 國語 敎習所를 열었다. 이 무렵 김홍선의 두 番째 男便도 病으로 死亡했다. 이 男便과의 사이에 3名의 子女가 태어나 그女는 5男妹를 두게 됐다.

    1946年 4月 오다케朝鮮初等學院이 開設됐지만 1948年 聯合國 軍司令部의 朝鮮學校 閉鎖令에 依해 學校는 門을 닫게 됐다.

    김홍선은 同胞의 손으로 中等學校를 만들자는 運動의 發起人이 돼 젖먹이를 업은 채 모래를 나르고 삽질을 하며 學校 建設 作業에 熱誠的으로 參與했다. 戰後의 極甚한 混亂 속에 當時 在日 朝鮮人들은 日本 政府로부터 아무런 支援이나 保護도 받지 못한 채 日本 社會의 蔑視와 差別 속에 生計를 解決해야 하는 苛酷한 狀況에 處해 있었다.

    정대세를 통해 본 재일 코리안 100년

    北韓 蹴球國家代表 正大勢 選手의 어머니 里正金氏.

    그러나 當時 韓國의 李承晩(李承晩) 政權은 在日朝鮮人에 對해 傍觀政策으로 一貫했다. 이에 反해 金日成(金日成) 政權은 이들을 在外公民으로 認定하고 在日 朝鮮人들의 民族學校 建設을 積極的으로 支援했다. 南韓地域 出身이 壓倒的으로 많지만(97% 以上) 이들 在日僑胞 中 20~30% 안팎이 北韓을 熱誠的으로 支持하는 總聯系가 된 것은, 社會主義를 支持하는 이념적인 性向 外에도 이 같은 歷代 南北韓 政權의 相反된 臺(對)在日僑胞 政策도 理由가 됐다.

    參考로 1974年 統計에 따르면, 總 63萬8806名의 在日僑胞 中 慶北 出身이 36.8%, 慶南이 24.8%, 祭主가 15.9%, 全南이 9.6%로 全體의 88.9%를 차지했으며 南韓의 다른 地域까지 합치면 그 數는 97.8%에 達했다. 反面 北韓 出身은 1.2%에 不過했다.

    高3 때 平壤으로 數學旅行

    김홍선은 日本人 家庭을 찾아다니며 ‘짠반(殘飯)’을 얻어 돼지를 키우고 막걸리 密酒를 만들어 내다 팔았다. 그렇게 해서 혼자 몸으로 다섯 子女를 키웠다. 가난한 살림에도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一念으로 새끼돼지를 擔保로 돈을 빌리는 等 學費를 마련해 5男妹 모두 朝鮮學校를 졸업시켰다. 아들은 高等學校까지 進學시켰다.

    김홍선의 次女 리정금(59)은 成人이 된 뒤 朝鮮學校 敎員이 됐다. 정금은 慶北 義城 出身인 정길부(鄭吉夫·69)와 結婚해 나고야(名古屋)에서 年年生으로 二世(二世·1983年生)와 大勢(1984年生)를 낳았다. 正大勢는, 子女는 아버지의 國籍을 따르게 돼 있는 日本의 國籍法(1984年,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 姓을 따라도 되도록 改定)에 따라 韓國 國籍을 갖게 됐다. 朝鮮學校 敎師로 在職 中인 리정금의 國籍은 ‘北韓’이다.

    正大勢는 나고야에서 初·中·高를 마쳤다. 모두 總聯系 朝鮮學校였다. 蹴球에 才能이 있어 朝鮮學校 初等部 때부터 選手로 뛰었다. 土建會社를 運營하는 아버지 정길부는 어릴 때부터 正大世에게 “日本人보다 2~3倍 努力하라”고 교육시켰다. 正大勢는 高校 3學年 때 처음 平壤에 갔다. 蹴球部의 修學旅行이었다. 마지막 날 양각도競技場 駐車場에서 열린 불고기파티에서 正大勢는 “가슴에 國旗를 달고, 이 競技場에 반드시 돌아오고 싶다”고 人事말을 했다. 그는 後日 北韓代表가 돼 이 競技場에서 競技를 한다.

    大學에 入學할 當時 正大勢는 蹴球 名門인 日本의 某大學으로부터 入學 勸誘를 받았지만 도쿄(東京)에 있는 總聯系 大學인 朝鮮大學校를 擇했다. 어릴 때부터 正大勢와 같이 蹴球를 해온 兄 李勢道 이 學校 축구팀의 골키퍼였다.

    正大勢는 大學 卒業 後 2006年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타레팀에 入團했다. 그리고 얼마 後 國家代表級의 스트라이커로 成長했다. 그러나 正大勢가 國家代表가 되는 데는 國籍이란 壁이 가로막고 있었다.

    韓國 國籍인 情大勢에겐 當時 세 가지 길이 있었다. 韓國代表로 뽑히는 길, 北韓代表가 되는 길, 日本人으로 歸化해 日本代表가 되는 길이었다. 韓國 國籍으로 J리그에서 뛰고 있던 이충성(李忠成)은 2008年 베이징올림픽 直前 歸化해 日本 蹴球 國家代表로 올림픽에 나갔다. 柔道 選手 추성훈(秋成勳)도 韓國팀에서 活動하며 올림픽 韓國 國家代表로 出戰하려 했으나 如意치 않자 日本으로 歸化, 아시안게임 決勝에서 韓國 選手를 누르고 金메달리스트가 됐다.

    在日僑胞 出身 以外에도 日本 蹴球代表팀에는 브라질 出身 選手가 日本으로 歸化해 월드컵 出戰의 꿈을 이룬 境遇가 있다. 이番 남아공大會에도 日本系 브라질人인 툴리오가 主戰으로 뛰었고, 2002年과 2006年엔 산토스, 1998年엔 로페스 選手가 各各 日本代表로 월드컵에 出戰했다. 이들은 有名選手가 많은 브라질의 國家代表 選手로 월드컵에 나가는 것이 어렵다고 判斷, 日本代表의 길을 擇해 目的을 이룬 境遇다. 北韓代表로 나가고 싶으나 國籍 問題로 길이 막힌 正大勢와는 境遇가 조금 다르다.

    北韓, 韓國 國籍 正大勢에 旅券 發給

    正大勢는 “共和國은 父母와 같이, 恒常 나를 지켜주는 祖國이라고 생각한다. 日本으로의 歸化는 한番도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 말해왔다. 外할머니의 朝鮮學校 建設 參與, 어머니가 數十年間 朝鮮學校 敎師로 在職 中인 點, 初等學校부터 大學까지 朝鮮學校를 나온 것을 생각할 때, 正大勢가 韓國이 아닌 北韓의 國家代表가 되기로 決心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도 當然한 일이다.

    정대세를 통해 본 재일 코리안 100년

    日本 니가타 項에서 在日僑胞들을 태우고 있는 第2次 北送船.(1959年 12月21日)

    正大勢의 어머니 리정금은 아들의 北韓國籍 取得을 위해 百方으로 努力했다. 韓國 國籍에서 北韓 國籍으로 變更하려면 韓國政府의 許可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民團事務室을 찾아가 節次를 알아보고 必要한 書類를 提出했다. 그러나 許可가 나오지 않았다. 正大勢 母子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結局 韓國 國籍의 正大勢는 北韓代表가 되는 것은 不可能하다고 생각했다. 이番 월드컵에 正大勢와 같이 出戰한 在日僑胞 안영학(安英學)은 애初 北韓國籍이었기 때문에 代表選手가 되는 데 아무런 問題가 없었다.

    리정금은 北韓팀의 競技를 中繼로 보면서 “저기에 우리 大勢를 나가게 하고 싶다”며 큰 소리로 울었다. 이 같은 事緣이 傳해지자 周圍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在日本朝鮮人蹴球協會로부터 協助要請을 받은 北韓 當局이 正大世에게 旅券을 發給해준 것이다. 國際蹴球聯盟도 ‘在日’의 歷史的인 特殊性을 考慮해 正大勢의 國籍 問題를 特例로 認定했다. 이 같은 迂餘曲折을 거친 끝에 正大勢는 北韓의 國家代表가 될 수 있었다. 以後 正大勢는 北韓팀의 主攻擊手(3年間 代表選手로 22게임 出張, 15得點)로 活躍하며 世界랭킹 105位인 北韓을 44年 만에 월드컵에 출전시키는 데 決定的인 役割을 했다.

    그러나 正大勢는 代表팀이 된 뒤 北韓選手들과 크고 작은 文化的인 摩擦을 겪었다. 正大勢가 가지고 있는 iPod를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거나, 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가 달라고 하는 等 日本에서 나서 자란 正大세로線 쉽게 理解할 수 없는 狀況이 벌어져 火를 낸 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 文化的 差異에도 不拘하고 正大勢는 北韓에 對한 愛情을 잃지 않고 있다. 正大勢는 北韓이 核問題 等으로 世界에서 孤立되고 있는 것과 關聯해서도 “(北韓이) 이런저런 問題가 있고, 世界的으로 이미지가 나쁜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祖國은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 싫건 좋건 어머니를 바꿀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言論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自身의 祖國을 묻는 韓國 言論의 質問에도 “내 祖國 말입니까? 朝鮮民主主義 人民共和國입니다”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유럽 進出을 꿈꾸며 英語會話 工夫도 하고 있어 이番 월드컵 期間 中에도 北韓팀 選手 中 唯一하게 西方言論과 서툴지만 英語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正大勢는 원더걸스를 좋아하고 노래房에 가면 ‘獨島는 우리 땅’을 즐겨 부른다고 한다. 正大勢의 어머니는 이番 월드컵 때 南아共까지 가서 아들을 應援했다.

    그러나 세 게임 出戰한 正大勢는 得點을 하지 못했지만 다음을 다짐하고 있다. 正大勢는 日本에 돌아온 뒤 쓴 蹴球칼럼에서 “월드컵에서 ‘天國’과 ‘地獄’을 한 番씩 맛본 氣分입니다.…나에게도, 代表팀에게도 正말 좋은 經驗이 됐다고 생각합니다.…동경하는 드로그바 選手와 같이 핏値에 서고 싶습니다. 正大勢의 꿈은 더욱 더욱 繼續될 것입니다”(요미우리신문, 6月30日子)라고 적었다. 正大勢의 所屬球團은 7月2日 “正大勢를 獨逸 2部리그 보쿰팀으로 移籍키로 合意했다”고 發表했다.

    그렇다면 朝鮮人들은 언제부터 바다를 건너가 日本 땅에서 살기 始作했을까.

    鎖國政策으로 一貫하던 日本은 에도(江戶)시대(1603~1867) 末期인 1853年 페리艦隊 來日(來日) 以後 어쩔 수 없이 書房에 門戶를 開放하지만 그 以前, 唯一하게 交流하고 있던 나라는 朝鮮이었다. 그러나 朝鮮 亦是 鎖國政策을 펴고 있어 에도時代 末期까지 日本으로 건너가 居住한 朝鮮人은 거의 없었다.

    韓日合邦 以後 在日 朝鮮人 急增

    江華島事件을 일으킨 日本의 强要에 依해 1876年 朝日修好條規(江華島條約)가 締結된 以後인 1881年 最初의 日本留學生 2名이 게이오(慶應)義塾(義塾)에 入學하는 等 一部 朝鮮人이 日本에 살기 始作했다. 그러나 一般 商人이나 勞動者는 거의 없었고, 政治的인 亡命者나 留學生이 大部分이었다. 그 數字는 數十名에 不過했다.

    亡命者는 김옥균(金玉均)이나 박영효(朴泳孝), 明成皇后 弑害事件 때 日本 側에 加擔했던 우범선(禹範善) 等 閔氏 一派에 反對하는 開化派나 親日人士들이 大部分이었다. 이들 親日亡命者들에겐 日本 外務省이 每月 生活費를 補助해준 記錄이 남아 있다.

    정대세를 통해 본 재일 코리안 100년
    日本 政府의 統計(帝國統計年鑑)에 따르면 在日 朝鮮人은 1896年 19名, 1897年 155名으로 돼 있다. 淸日戰爭이 일어난 1904年엔 233名, 大韓帝國(1897~1910)李 日本에 强制合倂되기 直前인 1909年엔 790名이었다. 亡命者 以外에 鑛夫 等으로 臨時雇用돼 온 境遇도 一部 있었다. 한便 朝鮮이 開港한 지 30年이 넘은 1909年 當時 朝鮮엔 統監府職員 等 官吏들 外에도 日本商人 等이 大擧 몰려들어 朝鮮 滯留 日本人은 12萬6168名에 達했다.

    韓國이 日本의 植民地로 轉落(1910年 8月29日)韓 以後 在日朝鮮人은 數字가 急增한다. 1911年 2527名, 1915年 3917名이던 것이 1917年엔 1萬4502名으로 史上 처음 1萬名을 넘어섰고 1920年 3萬189名, 1930年 29萬8091名, 1940年 119萬444名으로 그 數가 폭증했다. 1945年 8月 日本 敗戰 直前엔 無慮 236萬5263名에 達했다. 當時 在日 朝鮮人 約 240萬名은 光復 當時 國內 人口(藥 2500萬名)의 約 10%에 該當하는 數値다. 1945年 光復 當時 韓國 居住 日本人 數가 約 76萬名이었던 點을 勘案할 때 그 數字가 相當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點에서 在日 코리안의 歷史는 韓日强制合倂으로부터 始作한다고 할 수 있고, 올해로 100年을 맞은 셈이다.

    光復 當時 在日 朝鮮人 240萬名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朝鮮人이 日本으로 건너갔을까? 그것은 朝鮮總督府의 植民地 支配政策과 日本 政府의 大陸侵略路線과 密接한 關聯이 있다. 于先 朝鮮總督府가 强制合倂 以後 始作한 土地調査事業(1910)과 産米增産計劃(1920年代)에 依해 土地를 잃어버렸거나 耕作 農産物을 收奪당한 農民들이 糊口之策을 찾아 日本으로 가기 始作했다. 第1次 世界大戰 以後 日本 國內의 道路, 鐵道工事, 鑛山開發 等을 서두르던 日本 政府는 朝鮮人들을 싼 勞動力(日本人 勞動者 半 값 以下의 賃金)으로 利用하기 위해 朝鮮人의 入國 要件을 緩和(1922)했다. 그 結果 1920年 3萬名 線이던 在日朝鮮人은 1924年엔 約 12萬名으로 4倍 以上 늘어났다.

    日本이 滿洲事變(1931), 中日戰爭(1937) 等 大陸侵略 戰爭을 擴大함에 따라 日本 靑壯年層은 大部分 軍隊에 動員됐다. 그리고 그로 인해 發生한 勞動力 不足을 메우기 위해 1930年代 後半부터 朝鮮人에 對한 露骨的인 强制連行, 徵用이 行해졌다. 그 數字는 數百萬名에 達한다. 이들은 主로 炭鑛, 土木建築 現場, 工場 等에 보내져 人間 以下의 取扱을 받으며 苛酷한 勞動을 강요받았다.

    日本 國內뿐 아니라 當時 日本 領土이던 사할린 等地에 보내진 사람들은 日本 敗戰 後 舊蘇聯 땅이 된 사할린에서 數十年間 韓國으로도, 日本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채 ‘飢民(棄民)’ 狀態의 崎嶇한 運命이 됐다. 한·러修交(1990) 以後 겨우 사할린 居住 同胞들의 歸國길이 열렸다. 한便 日本은 擴戰에 따른 兵力不足을 解消하기 위해 朝鮮人 徵兵政策도 實施, 36萬餘 名의 朝鮮人이 軍人, 軍屬으로 戰場에 끌려가 그 가운데 2萬餘 名이 死亡했다.

    1923年 9月1日 일어난 間土(關東)大地震은 蔑視와 差別 속에 살아가던 在日朝鮮人 社會에 가장 큰 被害를 안긴 受難이었다. 도쿄, 요코하마(橫濱) 等 간토地方 南部를 덮친 이 大地震으로 因해 10萬4619名이 死亡하거나 行方不明됐으며, 44萬7000洞의 建物이 全燒하는 等 日本 歷史上 未曾有의 大災殃이 發生했다.

    이때 日本 民間 防犯組織인 自警團은 ‘朝鮮人이 우물 속에 毒藥을 뿌렸다, 防火했다’는 等의 유어비어를 퍼뜨리며 朝鮮人을 無差別 虐殺했다. 戒嚴令 發動으로 出動한 軍人들 中 一部도 虐殺에 加擔했다. ‘特雇(特高)’로 불리는 朝鮮人 擔當 特別高等警察은 朝鮮人들을 닥치는 대로 拉致, 連行해 갔다. 이때 死亡한 朝鮮人은 5000~6000名 程度로 알려지고 있으나, 오늘날까지 眞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當時 在日 朝鮮人이 約 8萬名이었던 만큼 6000名이 死亡했다면 在日 朝鮮人 15名 中 1名꼴로 犧牲된 셈이다.

    在日 朝鮮人들은 또 1945年 8月, 美軍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長崎)에 原爆을 投下할 當時에도 큰 受難을 當했다. 特히 軍需工場 等에서 일하던 朝鮮人이 많이 살고 있던 히로시마의 原爆被害者(藥40萬名) 中 約 7萬名이 在日 朝鮮人이었고 그 가운데 相當數가 死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特히 히로시마에 大擧 移住해 있던 慶南 陜川 出身의 被害가 컸다.

    光復 後 民團과 總聯으로 分裂

    光復 後 많은 在日 朝鮮人이 歸國길에 올랐지만, 1946年 3月 現在 日本에는 朝鮮人 64萬餘 名이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 約 80%인 51萬餘 名이 歸國을 希望했으나 當時 曺國은 左右翼의 對立이 激化되는 等 極甚한 混亂이 繼續됐다. 在日 朝鮮人 사이에선 狀況을 좀 더 지켜보고 歸國 與否를 決定하자는 雰圍氣가 澎湃해졌다.

    이들 가운데 數萬名이 歸國했지만, 歸國한다 해도 生活基盤이 마땅치 않은 사람 等은 一旦 日本에서 生活하는 길을 擇할 수밖에 없었다. 時間이 갈수록 歸國 熱氣도 漸漸 식어갔다. 此日彼日 歸國을 미루던 사람들 中 相當數가 日本 殘留를 決定하기 始作했고 歸國한 사람들 中 一部는 混亂한 國內 政治狀況을 避해 日本으로 密航해 되돌아오는 現象까지 생겨났다.

    1947年 當時 外國人登錄令에 따라 登錄限 在日 코리안은 59萬8507名이었다. 이들은 在日僑胞 社會를 形成하는 原點이 됐다. 在日僑胞 社會는 1945年 10月 ‘在日本朝鮮人聯盟’(1955年 5月 재일조선인총연합회로 組織을 改編, 略稱 ‘朝鮮總聯’)를 結成했으나 이 團體가 左傾化로 치닫자 이에 反撥한 保守系가 1946年 10月 ‘在日本朝鮮居留民團’(1948年 10月 再日本大韓民國居留民團으로 改稱, 略稱 ‘民團’)을 結成하며 分裂됐다. 以後 두 團體는 南北韓으로 分斷된 各各의 曺國을 支持하는 立場으로 反目과 對立을 繼續해왔다. 外國人 登錄時 總聯系는 國籍欄에 朝鮮으로 記入하고, 民團系는 韓國으로 記入한다. 國籍이 朝鮮人 僑胞 가운데는 北韓도, 韓國도 支持하지 않는다는 立場에서 消滅된 나라인 朝鮮이 自身의 祖國이며, 自身은 現在 無國籍者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民團과 總聯의 分裂에 따라 日本 全國의 各級 朝鮮學校는 總聯이 掌握했고, 民團이 運營하는 韓國學校는 도쿄, 오사카 等에 있는 4個 程度에 不過했다. 現在 總聯이 運營하는 各級 朝鮮學校(總聯 홈페이지엔 120個) 敎室엔 김일성과 김정일 父子의 寫眞이 걸려 있고 朝鮮語, 造船社 等의 敎育 以外에 主體思想도 가르치고 있다. 日本語는 外國語로 가르치고 다른 科目은 日本의 各級學校 커리큘럼과 비슷하다.

    朝鮮學校엔 北韓 國籍者만 다니는 것은 아니다. 韓國 國籍이거나 또는 日本 國籍이라도 父母 中 어느 한쪽이 韓國, 北韓 國籍이면 入學이 可能하다. 現在 朝鮮學校 在學生의 國籍別 分布는 北韓 46%, 韓國 51%, 日本과 中國 國籍의 朝鮮族 3%로 돼 있다.

    韓國 國籍者가 많은 것은 正大勢와 같이 北韓 支持者이지만 아버지 國籍을 따라 어쩔 수 없이 韓國 國籍이 된 境遇와, 韓國 國籍者 가운데 北韓을 支持하지는 않지만 子女의 朝鮮語敎育을 위해 朝鮮學校에 보내는 境遇가 많기 때문이다. 筆者의 어느 僑胞知人(韓國 國籍)은 韓國語를 가르치기 위해 아들을 집 隣近의 朝鮮學校 初等部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아들이 “學校에 가면 每日 김정일 將軍님에 對해 떠드니 더 異常 못 다니겠다”고 해 몇 달 後 다시 日本學校로 轉學시켰다고 한다.

    정대세를 통해 본 재일 코리안 100년


    정대세를 통해 본 재일 코리안 100년

    2002年 8月 朝總聯 同胞 69名이 大韓赤十字社의 周旋으로 우리나라를 訪問했다.

    1950年代 末 總聯系는 北韓을 ‘地上樂園’이라며, 僑胞들을 北韓으로 歸國시키는 曺國歸還事業을 展開했다. 1959年 12月 첫 歸還船이 니가타(新潟)에서 北韓으로 出發한 以來 1984年까지 約 9萬3000名이 北韓으로 건너갔다. 日本은 골치 아픈 存在인 在日 朝鮮人들을 國外로 내보내는 效果가 있었던 만큼 니가타까지의 交通費와 食事費 等을 支援했다. ‘地上樂園’이라던 北韓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日本에 있는 知人들에게 보낸 便紙에는 大部分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內容과 함께 돈과 物件을 보내달라는 付託이 반드시 적혀 있었다. 이 當時 兄이 北韓으로 건너간 한 總聯系 在日僑胞는 1990年代 夫人과 子女들을 韓國 國籍으로 變更했지만, 自身은 每年 北韓으로 가서 만나는 兄의 立場을 생각해 北韓 國籍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民團과 總聯은 南北和解와 交流協力을 내건 김대중·노무현 政權 時節 一時的으로 協助하는 雰圍氣가 形成됐지만 이명박 政權이 들어선 뒤 南北關係가 삐꺽距離자 다시 冷氣流가 形成되고 있다.

    頭角을 나타내는 在日 코리안

    最近에는 조금 달라졌지만, 在日 코리안들은 日本 社會의 差別과 偏見 때문에 一流大學을 나와도 번듯한 企業은 勿論 中小企業조차 就業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파친코, 야키니쿠가게 等의 家業을 이어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日本 社會에서 有無形의 差別과 障壁에 시달리면서도 各界에서 頭角을 나타낸 在日 코리안度 相當數 있다.

    文學界에선 作家 김석범(金石範), 양석일(梁石日)과 是認 김시종(金時鐘) 等 在日僑胞 1世들 外에도 日本에서 가장 有名한 文學賞인 아쿠타카와(芥川)상과 나오키(直木)賞을 受賞한 作家만 8名을 輩出했다. 이회성(李恢成), 이양지(李良枝), 유미리(柳美里), 哥네時로 가즈키(金城一紀) 等이다.

    강상중(姜尙中)은 在日僑胞로는 史上 처음으로 國立大學인 도쿄대 敎授로 任用(1996)돼 話題가 됐고, 活潑한 著述活動으로도 有名하다. 國公立大學과 私立大學엔 現在 數百名의 韓國系 敎授가 在職하고 있다.

    音樂界엔 南北과 日本을 오가며 活動하는 오페라歌手 전월선(田月仙), 指揮者 金性向(金聖響) 等이 있고, 映畫監督으론 최양일(崔洋一), 김수진(金守珍), 李相逸(李相日) 等이 活躍하고 있다.

    戰後 韓國系로 國會議員이 된 사람도 두 名 있다. 박경재(朴景在)는 16歲 때 歸化해 아라이 쇼스케(新井將敬)로 이름을 바꿔 大藏省 官僚 等을 지낸 뒤, 1986年 도쿄2區에서 자민당 所屬으로 衆議院에 當選됐다. 그는 4選 議員 時節이던 1997年 證券스캔들에 連累돼 檢察의 逮捕令狀이 發付되자 이는 民族差別에 起因하는 것이라며 호텔에서 自殺했다. 韓國系 現役議員의 自殺은 日本 社會에 큰 衝擊을 주었다.

    朝鮮日報 日本支社長을 지내며 텔레비전 人氣프로에 出演해 얼굴을 알린 백진훈(白眞勳)은 2003年 歸化, 다음해 參議院 選擧에 民主黨 比例九老 出馬해 當選됐다. 이름도 本名의 日本式 發音인 ‘하쿠 新쿤’을 그대로 使用했고, 選擧公約도 ‘일·韓이 더욱 사이좋게’를 내걸었다. 그의 當選은 한류붐과 함께 달라진 韓國과 在日韓國人에 對한 日本 社會의 認識을 보여주는 좋은 事例로 꼽을 수 있다. 그는 이番 參議員 選擧에서도 當選돼 再選 議員이 됐다. 經濟界에서는 롯데그룹 創業者인 辛格浩(辛格浩), 소프트뱅크 社長 孫正義(孫正義)가 가장 有名하다.

    김경득(金敬得)은 司法試驗에 合格했으나 國籍을 理由로 司法硏修生에 採用되지 않자 最高裁判所에 不當함을 指摘하는 請願書를 提出(1977), 鬪爭을 벌였다. 結局 ‘日本 國籍이 아닌 것을 理由로 司法硏修生을 不採用해서는 안 된다’는 決定이 내려져 辯護士가 됐다. 以後 數十名의 在日코리안이 辯護士가 돼 活動하고 있다.

    演藝界에는 在日 코리안이 적지 않다. 每年 年末에 人氣歌手가 總出動해 競合을 벌이는 人氣프로인 NHK歌謠紅白戰을 두고 “在日 코리안이 없으면 열 수 없을 程度”라는 말이 나올 程度다. 自身이 韓國系이지만 日本 國籍을 取得했다고 公開的으로 밝히는 有名 歌手, 俳優 等도 最近 들어 늘어나고 있다.

    1960年代 人氣歌手인 미야코(都) 하루미가 公開한 以來 最近엔 俳優 이하라 쓰요시(伊原剛志) 等이 韓國系임을 스스로 밝혔다. 2002年에 데뷔한 아이돌歌手人 소닌(ソニン)은 自身의 韓國 이름 聖僧임(成勝任)을 그대로 使用하고 있다. 그러나 如前히 韓國系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判斷 아래 公開하지 않는 演藝人도 많다.

    日本 프로野球에서 最多 安打를 記錄한 張勳 選手는 처음부터 韓國系임을 드러내고 活動한 境遇이고, 現在 韓信타이거즈의 强打者로 活躍 中인 가네모토 도모아키(金本知憲)처럼 人氣選手가 된 뒤 밝힌 境遇도 있다.

    在日僑胞 每年 1萬名씩 歸化

    그러나 韓國系 프로野球 前·現職 選手 中 相當數는 아직도 韓國系임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프로蹴球 選手도 마찬가지다. 韓國系임을 숨기고 있는 演藝人 等을 週刊誌 等이 찾아내 惡意的으로 罵倒하는 報道도 적지 않다.

    日帝强占期는 勿論이고 光復 後 日本에 살고 있는 外國人 中 ‘韓國,朝鮮’사람이 가장 많은 數를 차지했다(일본법무성의 出身國家別 分類에는 民團系는 韓國, 總聯系는 朝鮮으로 表記). 光復 以後 日本에 居住하는 在日僑胞는 現在까지 53萬~69萬名 程度다. 그래서 通稱 ‘60萬 在日僑胞’라 했다. 在日僑胞는 日本 內 外國人 총수에서 차지하는 比率에서도 1950年 91.0%, 1990年 64.0% 等으로 恒常 不動의 1位를 차지해왔다.

    그러나 2005年 末 基準으로 韓國·朝鮮 出身은 1960年代 末 以來 維持돼오던 60萬名線이 처음 깨진 뒤 繼續 減少해 2007年엔 59萬3489名으로 日本 內 外國人 數에서도 처음 2位로 내려앉았다. 代身 中國 出身이 史上 처음 60萬名을 넘어서면서 1位(60萬6889名)가 됐다.

    中國 出身은 10年 前인 1997年에는 25萬2164名에 不過했으나 中國의 經濟發展에 따른 비즈니스맨 移住, 海外留學生 增加 等으로 그 數가 每年 暴發的으로 增加, 不過 10年 사이에 約 2.4倍가 불어났다.

    2008年 末 現在 日本에 살고 있는 外國人은 221萬7426名(法務省調査 外國人登錄子 數)으로 日本 全體 人口(1億2769萬2000名)의 1.74%를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中國人이 65萬5537名 (前年度 對比 約 5萬名 增加)으로 全體의 29.4%를 차지한다. 韓國·朝鮮人은 前年度에 비해 4250名이 減少한 58萬9239名(全體의 26.6%)으로 2位를 記錄하고 있다. 이 가운데 特別領主者로 分類되는 在日僑胞는 41萬6309名이고, 나머지는 ‘뉴 커머’로 불리는 韓國에서 온 移住者 等이다.

    在日僑胞가 減少하는 가장 큰 原因은 日本으로 歸化하는 數字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日本人과 在日僑胞의 結婚은 1989年 처음 年間 1萬名을 넘어선 以來(厚生勞動省 人口動態統計) 90年代 以後엔 每年 7000~1萬名 善을 記錄하고 있다. 이들 中 90% 以上이 日本 國籍을 取得하고 있고, 2008年 末 現在까지의 歸化 韓國·朝鮮人은 29萬6168名(表3 參照)에 達한다.

    在日僑胞 40萬名 中 8000名假量이 每年 歸化한다고 計算하면, 每年 100名 中 2名꼴로 日本사람이 돼간다는 意味가 된다. 日本 社會 同化現象이 빠르게 進行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數値다. 이와는 反對로 1980年代 以後 韓國에서 日本으로 留學온 뒤 卒業 後 就職해 日本에 繼續 살거나, 비즈니스 關係 等으로 日本에 定着한 이른바 ‘뉴 커머’도 많이 增加하고 있다. 그러나 在日僑胞의 結婚 等에 依한 歸化와 老齡層 人口의 死亡 等으로 인해 韓國·朝鮮 出身은 每年 減少하고 있는 趨勢다.

    韓國의 民主化와 經濟發展, 한류붐 等의 影響도 있어 日本 社會의 韓國 및 在日 韓國人에 對한 差別과 偏見은 예전에 비해 相當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結婚과 事業 等에서는 韓國系란 事實은 如前히 負擔이 되고 있고 그것이 歸化者 數字에도 投影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대세를 통해 본 재일 코리안 100년


    ‘코리아界 日本人’의 登場

    在日僑胞 가운데는 롯데그룹의 신격호 會長처럼 日本 國籍을 取得하면서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와 같이 日本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一般的이었고 現在도 그렇다. 偏見과 差別이 甚했던 만큼 日本 이름으로 歸化해 韓國·朝鮮 出身임을 감추는 것이 日本 社會에서 살아가고 事業을 하는데 유리하다고 判斷했던 것이다. 그런 意味에서 歸化하지 않은 在日僑胞들도 大體的으로 本名 以外에 通聲(通姓)이라 하는 日本式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近來엔 韓國式 이름을 그대로 使用하면서 歸化하는 境遇도 늘고 있다. ‘코리아界 日本人’의 登場이다. 美國 等에서 말하는 이탈리아系 美國人이나 韓國系 美國人과 같은 槪念으로 볼 수 있다. 소프트 뱅크의 손정의 社長, 파친코業界 最大 그룹인 마루恨을 運營하는 한창우 會長, 蹴球選手 이충성 等이 代表的인 事例다.

    손정의 社長은 漢字 이름을 그대로 使用하지만 發音은 日本語式의 ‘손 마사요시’다. 베이징올림픽에 日本 蹴球國家代表로 出戰한 이충성度 ‘里 다타노리’라는 日本式 發音이다. 그러나 2000年 歸化한 한창우 회장은 “歸化해 成功한 韓國系로 살아가자”는 것이 그의 持論으로 이름도 日本式 發音이 아니라 ‘한창우’란 韓國式 發音을 그대로 使用하고 있다.

    格鬪技의 추성훈(秋成勳) 選手는 本來 城을 日本式인 아키야마(秋山)로 하고 이름은 漢字를 日本式으로 發音한 요시히로(成勳)다. 張勳 選手도 같은 形式의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다.

    在日僑胞뿐만 아니라 比較的 젊은층인 韓國에서 온 뉴 커머 中에도 日本人과 結婚 後 國籍을 바꾸는 境遇가 늘어나고 있다. 젊은층일수록 國籍과 民族的인 同一性을 別個로 생각하는 傾向이 剛해 日本人이 된다는 데 對한 拒否感이 別로 없다. 日本에 歸化하는 것을 美國市民權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이다.

    在日 中國人 가운데는 朝鮮族도 相當數 包含돼 있다. 朝鮮族의 境遇 國籍이 中國人만큼 日本에 온 中國人 가운데 어느 程度인지는 發表되지 않아 正確히 把握하기 힘들지만 在日朝鮮族團體에 따르면 2009年末 現在 5萬名으로 推算되고 있다. 日本에서 生活하고 있는 朝鮮族은 大體로 日本語에다 中國語와 朝鮮語 等 3個 國語를 할 수 있는 것이 큰 强點이다.

    共生 아닌 童話를 强要하는 日本 社會

    在日코리안은 閉鎖的이고 排他的인 日本社會에서 差別과 偏見 속에 힘겨운 마이너리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 日本의 法과 制度, 그리고 日本 社會는 共生이 아닌 童話의 길을 强要하고 있고, 日本으로의 歸化는 곧 童話를 選擇한다는 意味를 갖는다. 이제 在日 1世는 全體 僑胞의 不過 2~3% 線으로 推定되고, 在日 5歲가 學校를 다니고 있다. 在日 3~4歲로 내려갈수록 民族的 同一性은 漸次 稀薄해지고 있다.

    正大勢는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親舊들도 많이 있는 日本이 앞으로 살아가고 活躍할 터전”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在日 3~4世들은 韓國이나 北韓이 自身의 生活據點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大部分 태어나고 자란 日本에서 生活해 나갈 길을 찾고 있다. 在日 1~2歲 等이 겪었던 모진 辛酸(辛酸)은 歲月의 흐름과 함께 徐徐히 風化돼가고, 그 後孫들은 民族的 同一性보다는 個人의 삶을 더 重要視하는, 各自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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