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라비아 商人 後裔는 簡單치 않아”|신동아

“아라비아 商人 後裔는 簡單치 않아”

Interview - ‘리비아桶’ 서종욱 대우건설 社長

  • 배수강 記者│bsk@donga.com

    入力 2011-09-21 14:30: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리비아 再建事業? 過渡政府 構成 지켜봐야 豫測
    • 民政(民政) 經驗 없어… 컨센서스 導出 過程 注目
    • 3000餘 名 職員 救出作戰…“建設 强國이 그냥 되나요?”
    • 14日間 工事現場에서 野營生活韓 ‘가 先生’
    • 카다피-이상득 面談은 大宇 現地法人腸이 ‘連結고리’
    • “韓國은 리비아 無視한다”던 카다피, 面談 後엔 “슈크란”
    “아라비아 상인 후예는 간단치 않아”
    “海外 建設은 한 사람의 스타플레이어에 依해 갑자기 成功하고 基盤을 잡는 게 아닙니다. 수없는 先輩의 犧牲과 努力, 그 犧牲을 통해 橋頭堡를 만들어야 비로소 工事가 進行돼요. 리비아는 만만치 않은 나라입니다. 努力한다고 곧장 工事 受注할 수 있는 市場이 아니에요.”

    두 時間餘 인터뷰하는 동안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가 唯一하게 커졌다. 소파의 나무팔걸이 끝 部分을 꽉 잡은 오른손의 두툼한 政權(正拳)李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여느 大企業 社長과 달리 心理狀態가 얼굴 表情과 몸짓으로 드러났다. 社長이라는 ‘겉옷’李 44年을 건설인으로 살아온 그의 DNA와 自負心까지 가리眞 못한 듯했다.

    記者는 9月5日 서울 신문로1街 大宇建設 本社에서 서종욱(62) 社長을 만났다. 徐 社長은 한·리비아 修交 以前(1980年)부터 리비아 現地에서 일을 했고, 以後 리비아 建設本部 管理部長을 맡는 等 國內 몇 안 되는 ‘리비아 專門家’로 통한다. 지난해 國家情報院 職員 追放 問題로 한·리비아 關係가 最惡으로 치달을 때도, 비선을 통해 特使인 이상득 議員과 카다피 當時 國家元首의 만남을 周旋한 人物도 그다.

    最近 리비아 再建事業에 建設業體의 關心이 쏠리면서 徐 社長의 行步를 지켜보는 눈도 많아졌다. 하지만 徐 社長은 ‘지켜보는 中’이다. 過渡政府 構成 等 向後 4個月間의 움직임을 읽어야 ‘포스트 카다피’ 體制를 豫測해볼 수 있다는 理由에서다. 리비아는 勿論 海外 곳곳에서 建設 工事를 遂行하는 會社의 代表인만큼 그의 말 한 마디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 그가 인터뷰 要請을 어렵게 받아들인 것도, 인터뷰 途中 두 次例 ‘오프 더 레코드(非報道)’를 要求한 것도 그 延長線上이었다. 인터뷰는 徐 社長과 리비아와의 因緣부터 始作했다.

    1979年 리비아와 첫 因緣



    ▼ 리비아에 처음 가신 게 1979年인가요?

    “맞아요. 入社 3年次였죠. 한때 反政府 勢力의 據點都市人 벵가지의 가리니우스 醫科大學 新築 工事 現場으로 發令이 났죠. ‘DC1 現場’이라고 했어요. ‘Daewoo Contract No.1’이라고, 大宇의 첫 契約이라는 意味였어요. 國交가 樹立되기 前에 리비아에서 韓國 會社가 受注한 첫 事業이었죠. 이 工事를 契機로 只今까지 리비아에서 114億달러의 工事를 遂行해왔으니 큰 因緣이라고 봐야죠. 그땐 正말 일밖에 몰랐어요.”

    ▼ 初期에는 힘들었겠어요.

    “그럼요. 새벽 5時 半에 일어나 團體 體操하고 食事하고 7時 半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으니…. 無(無)에서 有(有)를 만들면서 同僚들의 所重함도 알게 됐죠. 그땐 한 달에 두 番 쉬었는데, 쉬는 날에는 밤에 횃불을 들고 바다로 가 文魚를 잡았어요. 現地 住民들은 뼈 없는 動物을 먹지 않으니까 文魚가 至賤으로 널려 있었죠. 文魚를 잡다가 警察에 잡혀가기도 했어요. (現地 警察 생각에는) 쉬는 날에 쉬지도 않고 떼로 몰려다니니까 殊常했던 거죠.”

    ▼ 1982年 歸國했다가 1988年에 다시 리비아로 갔는데요.

    “88올림픽 期間이었어요. 1979年 갔을 때 現場所長 하시던 분이 本部長으로 있었는데, ‘SOS’를 친 거죠. 道路와 飛行場, 學校, 住宅建設 等 工事現場이 너무 많아 일손이 不足했거든요. 그때 職員들 비자 問題와 現場民願 때문에 移民國이나 市廳 不動産國을 數없이 드나들었죠. 對官(對官) 業務를 많이 하면서 알게 된 人脈이 20年 넘게 이어지고 있네요.”

    ▼ 그 ‘人脈’李 結局 빛을 發했군요.

    “네?”

    ▼ 이상득 議員이 特使資格으로 리비아를 訪問했을 때 徐 社長께서 카다피 當時 國家元首와 李 議員 만남을 周旋했으니까요.

    “거, 참. 그 얘기는….”

    헛헛하게 웃던 徐 社長이 卓子에 놓인 차가운 決明子茶를 半쯤 마셨다. 아랫입술을 윗입술에 포개더니 이마에 2個의 굵은 주름이 그려졌다. 가벼운 微笑를 짓는 그의 表情이 ‘그 얘기는 넘어갑시다’하고 말하는 듯했다.

    “아라비아 상인 후예는 간단치 않아”

    지난해 9月30日 리비아 시르테市에서 카다피 前 國家元首를 만나 關係 正常化에 合意한 直後 撮影한 寫眞. 왼쪽부터 週 요르단 주정훈 書記官, 김종근 아중동국장(현 에티오피아 大使), 이상득 議員, 카다피 國家元首, 서종욱 社長, 알리 딸落 시르테 保安司令官, 이권상 大宇建設 시르테 合作法人 代表.

    ▼ 카다피와의 因緣은 어떻습니까?

    “1979年 리비아 羽調飛行場 建設工事 現場에 ‘가 先生’이 나타났어요. 사하라 沙漠 南쪽 끝 차드와의 國境 隣接地域인데, 當時 現場 責任者인 서만석 常務(作故) 等이 처음 만났죠(그는 陪席한 강우신 專務에게 리비아 地圖를 달라고 하더니 地圖를 보며 仔細히 說明했다). ‘가 先生’은 豫告 없이 訪問해 그곳에서 14日間 텐트 치고 머물렀어요. 職員들과 卓球도 치고, 일하는 모습도 지켜봤죠. 當時 몇몇 職員이 ‘가 先生’과 함께 찍은 寫眞이 있었는데, 이 寫眞 한 張이면 空港은 勿論 리비아 全域을 다녀도 프리패스(Free Pass)였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職員들과 함께 野營 生活限 ‘가 先生’

    ▼ ‘가 先生은’ 왜 왔습니까?

    “그 工事는 當初 이탈리아 業體가 進行하다가 氣候 等 劣惡한 工事 環境 때문에 中間에 抛棄하고 撤收한 現場이었어요. 大宇가 隨意契約으로 넘겨받은 거죠. 한낮 氣溫이 40~50℃를 오르내리는 沙漠 한가운데서 韓國人들이 野營生活을 하면서 工事를 하는 게 궁금했나봐요. ‘가 先生’은 한밤中에도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韓國人의 熱意와 勤勉함에 讚辭를 보냈어요. 우리는 無事히 工事를 마쳤고요. 이를 契機로 韓國과 리비아 間에 國交가 樹立됐어요.”

    韓國과 리비아는 1970年代 以前부터 修交를 推進했지만 正式 大使級 修交가 이뤄진 해는 1980年 12月이었다. 正式 修交 後 設置된 駐韓 리비아大使館은 2006年 리비아 外交官의 不正行爲 連累嫌疑로 2007年 經濟協力代表部로 格下됐지만, 지난해 이상득 特使의 訪問 以後 大使級 關係가 復元됐다. 北韓과는 이미 1974年 1月에 大使級 修交를 했다.

    ▼ 카다피 體制下의 리비아는 어땠나요?

    “리비아는 140餘 部族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카다피는 慣習과 傳統이 다른 部族들을 때로는 剛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統治하면서 全體 部族 間 和合으로 이끈 것으로 評價받았어요. 1969年 쿠데타 以後 反(反)西方 政策을 펴면서 肥效率性 같은 問題點은 있었지만 否定的 側面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長期執權에 따른 副作用은 歷史에서 배우는 敎訓이죠. 國民의 民主化 欲求가 잠재되어 있다가 올해 初 튀니지의 재스민革命 等 中東, 北아프리카 國家에 불어닥친 民主化運動 餘波로 한꺼번에 暴發한 것으로 봐요. 2011年 2月 最初로 蜂起가 일어난 벵가지 地域은 카다피 執權 以前의 首都이자 傳統的인 野도(野都)로 親政府 性向의 首都 트리폴리와는 對比되는 都市죠.”

    ▼ 리비아 事態가 一段落되면서 再建事業에 뛰어들려는 企業이 많은데요. 一角에서는 港灣, 精油施設 等 最小 1000億달러 以上의 事業이라고 分析합니다.

    “리비아에서의 비즈니스가 만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誤算입니다. 一般的으로 리비아 사람들은 親切하고 따뜻하지만, 歷史的으로 商術에 밝은 아라비아 商人의 後裔들이고, 政府나 發注處의 主要 人士들은 英國 等 先進國에서 留學한 엘리트들입니다. 自尊心이 매우 强해 처음부터 信賴關係를 構築하는 게 쉽지 않아요. 한마디로 西歐的 契約 慣習에 익숙하면서 비즈니스는 徹底히 따지는 性向입니다. 이런 性向부터 알고 綿密히 分析한 뒤 뛰어들어야죠.”

    徹底한 비즈니스 武裝

    ▼ 어렵군요.

    “大宇建設도 33年間 때로는 損害도 보고 無酌定 기다리기도 했어요. 行政 面에서 一貫性이 不足해 行政處理가 迅速히 이루어지지 않는 點에서는 忍耐가 必要해요. 리비아에 뛰어드는 企業이 留意해야 할 리스크 1順位는 ‘政策의 一貫性 不足’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政府가 들어선다고 해도 核心 人士들을 除外하고는 現在의 엘리트 中心의 國家運營은 큰 變化가 없을 겁니다. 얼마 前 國家過渡委員會(NTC)가 ‘카다피 政權 當時 進行된 工事契約을 承繼할 것’이라는 立場을 發表했으니 銳意注視해야죠. 한便으로는 人間關係와 信賴를 重視하는 東洋的인 情緖를 가지고 있어요.”

    ▼ 行政處理가 늦으면 ‘急行料’도 줍니까?

    “急行料요? 아, 아닙니다. 說明과 說得을 하고 事態의 緊迫性에 對해 理解를 시키는 努力이 必要한 거죠. 腐敗가 介入되는, 그런 延長線上은 아닙니다.”

    ▼ ‘포스트 카다피’의 리비아 政局은 큰 變化가 없다는 말씀이군요.

    “지켜봐야 합니다. 國際社會의 支持를 받는 NTC가 리비아를 代表하는 機構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NTC가 本格 活動하는 9月부터 4個月間 國政運營 狀況을 注視할 必要가 있어요. NTC는 9月 中 臨時 內閣을 構成하고 3個月 內에 憲法 草案을 마련한 뒤, 8個月 內에 總選擧를 實施해 200名의 國會議員을 選出한다는 靑寫眞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하지만 리비아는 지난 42年間 카다피 政權下에 民情(民政) 經驗이 없고, 現在의 NTC는 140個의 리비아 不足 指導者들이 參與하고 있잖아요? 이 中에는 이슬람主義者, 世俗主義者, 西歐式 民主主義者, 이슬람式 民主主義者 等 政治觀이 다른 다양한 勢力이 參與하고 있거든요. 早速한 內部 컨센서스(Consensus) 導出이 可能한지 4個月間 지켜봐야 한다는 얘깁니다. 저희도 躁急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 推移를 지켜보고 있어요.”

    ▼ 國內 企業 間 競爭도 熾烈하겠어요.

    “걱정이에요. 競爭은 當然합니다만, 우려스러운 部分도 있어요. 海外 工事 受注에서 韓國 業體끼리 ‘제 살 깎기 式’過當競爭을 하는 거요. 이건 止揚해야 합니다. 特히나 國內 建設 市場이 成熟期에 접어들면서 發注 物量이 줄고, 海外 工事 經驗이 없는 業體들이 無分別하게 海外 市場에 進出하면서 이런 問題가 深刻해지고 있어요. 이는 該當 業體의 損害뿐 아니라, 國家的 損失로 이어질 수 있어 신중해야 합니다. 1位를 認定하면 되는데….”

    ▼ 1位요? 제 살 깎기라면….

    “公開入札에서 落札받은 會社가 工事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2, 3等 한 業體들이 落札받은 1位 業體보다 더 싸게 工事해주겠다고 나서는 거죠. 發注處에서 (싼 工事를) 要求한다고 해도 應하면 되겠어요? 밑지고 工事하면 되나요.”

    ▼ 지난 6月 政府 代表團이 리비아 東部 벵가지를 訪問해 市民軍과 만났고, 韓國 企業의 再建事業 進出에 關心을 가져달라고 促求했는데요, 只今 생각해보면 適切한 對應이었어요.

    “6月 말이죠? 外交通商部 實務代表團이 벵가지로 떠날 때 우리가 車輛과 宿食을 提供하고 一部 NTC 人士들과의 面談 周旋을 志願했어요. 當時에는 市民軍 側과의 友好 關係를 만드는 게 出張 目的이었던 것으로 記憶합니다. 시의적절했어요.”

    ▼ 美國과 英國도 리비아 再建 安定化 支援팀을 보내겠다고 했죠.

    “그렇죠. 이미 터키, 中國 等에서도 政府 또는 民間 次元에서 NTC에 對한 支援을 公式的으로 決定했고, 우리 政府도 100萬달러 規模의 人道的 支援을 推進 中이에요. 또 政府 代表團을 東部地域에 派遣해 緊急 支援物品을 把握 中이고요. 우리는 政府 支援과는 別個로 現地에 進出한 建設業體를 中心으로 한 海外建設協會를 통해 50萬달러 內에서 人道的 支援을 하기로 合意했고요. 政府와 함께 共同 支援을 準備하고 있어요.”

    海外建設協會도 50萬달러 支援

    ▼ NTC 人士들과도 親分이 있는가 보네요.

    “우리(대우건설)가 리비아에서 여러 工事를 遂行하는 동안 各界各層의 수많은 人士와 因緣을 쌓아왔어요. 우리가 처음 進出한 곳이 벵가지人 만큼 地域的 紐帶關係를 갖고 있는 분들이 NTC 高位 關係者로 參與하고 있죠. 戰鬪가 熾烈해도 벵가지 메디컬센터 工事 現場에는 대우건설 職員 3名과 방글라데시 勤勞者 29名이 撤收하지 않고 남아 있어요. NTC 關係者들은 이를 무척 고마워하죠.”

    ▼ 지난 4月에 힐러리 클린턴 美國 國務長官이 李明博 大統領에게 人事를 했죠? 리비아 撤收 當時 美國人을 도와줬다고.

    “本社에 狀況室을 만들고 리비아 派遣 勤勞者 3000餘 名을 待避시켜야 했는데,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배를 求하기도 어렵고 價格도 비쌌어요. 艱辛히 배 3隻을 빌려 未遂라타, 벵가지, 트리폴리, 시르테 等에서 勤勞者들을 그리스로 옮겨와 그곳에서 飛行機에 태워 보냈죠. 印度, 이집트,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等 8個國 外國人 勤勞者 2800餘 名과 韓國人 職員 210名을 모두 安全하게 故鄕으로 보냈어요. 4次例에 걸쳐 海上과 陸路로 事故 없이 無事히 復歸시켰죠. 그때 리비아를 脫出하지 못해 발을 구르던 美國人 1名과 우즈베키스탄人 等 여러 外國人을 함께 태웠어요. 힐러리 國務長官이 고맙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죠. 그들 中 一部는 몸만 빠져나와 우리가 飛行機票를 끊어줬어요. 그때는 正말 戰爭이었습니다. 戰爭….”

    ▼ ‘리비아 엑소더스’였네요.

    “다른 나라 企業의 外國人 勤勞者들은 大部分 國境 隣近 難民村으로 몸을 避했죠. 우리도 撤收 作戰에만 150億원 程度가 들어갔어요.”

    ▼ 戰鬪 中이었는데….

    “그땐 우리 스스로 決定해야 했어요. 도움 받을 곳이 없으니까. 마지막 撤收할 때에는 나토(北大西洋條約機構)가 ‘安全을 保障할 수 없다. 배는 들어오지 마라’고 하는 거예요. 政府에 SOS를 보냈고, 駐(駐)이탈리아大使館 김영석 臺詞가 나서 나토를 說得했어요. 週(駐)리비아 조대식 大使와 現地 職員들, 外交部의 全幅的인 도움을 받았어요.”

    當時 現場에서 大規模 撤收作戰을 陣頭指揮한 人物은 강우신 專務(海外營業本部長)였다. 姜 專務는 入港 許可가 나지 않거나 港口에 接岸 空間이 없을 때는 平素 잘 아는 國營會社 會長에게 付託했다. 그는 “그동안 리비아에서 人的 네트워크를 만들어놓은 게 大規模 撤收 作戰에 決定的인 役割을 했다”고 말했다.

    나토 “安全을 保障할 수 없다”

    ▼ 大規模 撤收를 決定한 理由가 있었나요?

    “아무리 어렵더라도 責任을 다한다는 使命感이 컸죠. 當場 돈은 들지만, 다시 工事가 再開되면 優秀한 人力들은 待遇로 돌아올 겁니다. 外國人 勤勞者들도 無事히 故鄕까지 보내준 會社를 記憶하니까요. 建設 强國이 그냥 되는 건 아니죠.”

    여기에서 記者는 지난해 한·리비아 外交 葛藤 當時로 話題를 돌렸다. 建設 强國 같은 愛國心을 刺戟하는 表現이 登場해 對話 雰圍氣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豫想은 들어맞았다.

    ▼ 지난해 한·리비아 外交 葛藤 當時에도 韓國人 2名을 無事히 ‘救出’했는데요.

    “그건 제가 한 건 아니고요. 政府와 이상득 特使, 企業인 모두가 머리를 맞댄 結果였어요.”

    여기서 暫時 지난해 6月로 時計바늘을 돌려보자. 當時 ‘리비아 事態’로 報道된 이 事件은 리비아 駐在 大使館에서 活動하던 國精院 職員(2等書記官)李 리비아 國家元首와 家族, 政府要人, 武器 保有 現況 等에 關한 諜報活動을 벌였다는 理由로 追放된 事件이었다. 하지만 리비아의 對應은 追放으로 그치지 않았다. 領事業務를 하던 駐韓 리비아 經濟協力代表部를 撤收시켰고, 不法 宣敎嫌疑로 現地 僑民 2名을 拘禁했다. 이들에게는 領事接見權도 不許했다. 當時 대우건설만 해도 7個 工事現場에서 22億달러 規模의 工事를 進行 中이었지만, 비자 發給과 原産地 證明 發給이 中斷돼 工事 進行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政府는 이상득 議員을 特使로 임명했고, 이 特使와 서종욱 社長 等은 7月과 9月 두 次例 리비아를 訪問했다. 2次 訪問 때는 어렵게 카다피 當時 國家元首를 만나 이 問題를 解決했다. 만남 過程에서 徐 社長의 人脈이 決定的인 役割을 했지만, 그는 只今까지 具體的인 活動에 對해 言及을 避했다. 이어지는 徐 社長의 말이다.

    “當時 企業들은 앞이 안보였어요. 宏壯히 危急한 狀況이었죠. 當時 17個 韓國 業體가 100億달러가 넘는 工事를 하고 있었는데 모두 발만 구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2010年 7月4日 國土海洋部에서 連絡이 왔어요. 이상득 議員과 外交部, 國土部 關係者, 17個 業體 代表가 모여 리비아 事態 解決을 위해 머리를 맞댔죠. 다음날에는 저를 包含해 4個 業體 代表가 모여 도시락을 먹으며 會議를 했어요.”

    이상득 特使와 企業人들의 7月 첫 訪問 當時에는 카다피를 만나지 못했다. 總理와 카다피 最側近인 對外保安部 部長을 만났지만, 리비아의 南北을 가르는 1600㎞의 高速道路 建設에 韓國이 돈을 대라는 要求만 들었다.

    ▼ 2次 訪問 時에는 公式的으로 大宇가 지은 ‘트리폴리 호텔 竣工式’에 參加하기로 했죠?

    “네. 竣工式에 카다피의 둘째아들이 參席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出發 1時間 前에 둘째아들이 日程을 바꿔 海外로 떠났다는 連絡을 받았어요. 그래도 누구든 만나야 했습니다. ‘山 넘어 山’이라고, 두바이에 到着했는데 리비아 入國 비자가 發給되지 않았어요.”

    이상득 特使는 最近 펴낸 ‘資源을 經營하라’는 冊에서 當時 狀況을 이렇게 回顧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心情으로 모든 루트를 통해 비자 發給을 체크했으나 願하는 答을 들을 수 없었다. 絶望的이던 瞬間, 大宇建設 現地 라인을 통해 喜消息이 들려왔다. 日前에 리비아軍 高位 司令官을 만나 카다피 面談을 도와달라고 付託했는데 그가 許諾을 했다는 것이다.…그 루트를 통해 艱辛히 리비아 入國에 成功했다.”

    ▼ ‘리비아 루트’는 누구입니까?

    “카다피의 故鄕 시르테의 合作法人張이었어요. 그가 다리를 놓아준 겁니다. 리비아에서는 恒常 次善策을 準備하거든요.”

    두 番째 訪問에서 이상득 特使와 徐 社長, 김종근 外交部 아중동국장 等은 카다피를 만났다. 카다피는 “韓國 企業에 最優先權을 주었지만 大統領이 訪問한 적도 없고 企業人들은 리비아에 寄與한 게 없다. 게다가 韓國 外交官이 벌인 일에 對해 調査 結果를 받지 못했다”며 서운함을 나타냈다. 同時에 “리비아가 核武器 開發 計劃 抛棄 以後 韓國 高位人士에게 美國을 說得해 補償해줄 것을 要請했지만 成果가 없었다”고 不滿을 吐露했다고 한다.

    카다피, 이상득 特使 파워 認定

    이에 이 特使와 徐 社長은 “美國 主導로 리비아에 유엔 經濟制裁가 있었을 때 우리 企業만큼은 남아서 大水路 工事를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恩惠를 아는 나라다. 貴國의 情報를 빼내는 反國家的 行爲는 하지 않는다”고 說明했고, 同時에 抑留된 韓國人 2名의 釋放을 要求했다. 이 特使는 “核武器 抛棄에 對한 美國의 補償 說得 問題는 外交部와 協議해 반드시 措置하고 回信하겠다”고 答했고, 카다피는 가슴을 치며 “슈크란(고맙습니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리비아 事態’는 그렇게 解決된 것이다. 徐 社長의 說明이다.

    “이 特使는 깨알 같은 글씨로 自身이 해야 할 말을 메모했어요. 카다피의 말도 꼼꼼히 받아 적었죠. 카다피는 그런 모습이 좋았던지 우리를 便하게 對해줬어요. 여기에 그동안 韓國 業體의 이미지가 좋았고, 이 特使가 카다피에게 謝過하고 懸案 解決方案을 具體的으로 提示한 것도 먹혔던 거 같아요. 아랍 사람들은 實勢를 認定하고 待接하거든요. 任命職은 ‘파워(實勢)’라고 認定하지 않아요. (이 特使는) 現職 大統領의 兄인데다 6選 議員이고, 그리고 나이도 많아 카다피가 認定한 겁니다. 아랍 사람들도 長幼有序(長幼有序) 情緖가 强하거든요.”

    ▼ 왜 그런가요?

    “沙漠에서 不足끼리 살 때 모든 決定權은 部族長이 쥐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實勢의 權威를 認定하고 나이 든 사람을 尊重해요. 當時 저보고 ‘大宇 무디르(리더) 왔느냐’고 한 것도 權威를 認定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問題는 解決했지만, 그는 두 番의 歸國길에 좋지 않은 評을 들어야 했다. 마침 社長 任期가 끝나던 터여서, 一部 言論과 野黨은 ‘政治權 줄서기’라고 批判했다. 한 國會議員은 “徐 社長은 고려대 出身에 이상득 議員의 系譜인 慶北 尙州 出身”이라며 “連任을 앞두고 벌이는 로비”라고 말하기도 했다.

    ▼ 努力에 對한 評價치고는 서운했겠어요.

    “….”

    그는 “괜한 論難을 만들 수 있다”며 對答을 避했다. 記者가 “이상득 議員과 아는 사이냐”고 再次 묻자 그는 虛脫한 表情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답답함이 깔려 있었다. 그가 인터뷰 初盤에 特使 關聯 質問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도 理解할 수 있었다.

    “이상득 議員은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상주가 아니라 聞慶 出身이거든요. 當時 企業으로서는 正말 危機狀況이었고, 生死가 걸려 있는데 어떻게든 解決해야 했어요. 特使가 누구든 間에 非常狀況을 打開하기 위해서는 積極 協助했을 겁니다.”

    李 議員은 自身의 冊 ‘資源을 經營하라’에서 이를 두고 不便한 마음을 披瀝했다.

    “萬若 自身들(서종욱 대우건설 社長, 김중겸 현대건설 社長)의 安危를 위한 政治權 줄書記였다면 내가 拒絶했을 것이다. 그들의 바람은 오직 事態 解決이었다. 自身의 企業이 리비아에서 束手無策으로 被害를 볼 수 있는 狀況이었기 때문이다. 속事情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野俗하기만 했다.”

    徐 社長은 經營哲學을 묻는 質問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며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外換危機 때나 대우그룹 解體 때나,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流動性 危機 때나, 우리가 겪은 어려운 時期마다 恒常 最善을 다했다고 自負해요. 建設業은 사람이 全部라 할 수 있는 業種이에요. 職員들이 會社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10餘 年間 그 險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結局은 職員들의 힘이었어요. 그런 會社를 最善을 다해 살려야 하는 게 제 役割이었죠.”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