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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다섯 庵子 숲길 걷기|新東亞

직지사 다섯 庵子 숲길 걷기

宇宙 뭇 生命이 한 몸 되는 瞬間

  • 전영우│國民大 山林資源學科 敎授│

    入力 2010-08-04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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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 太祖의 둘째아들 定宗의 胎室(胎室)을 모셨던 직지사. 王家의 胎室을 守護하는 査察답게 最高의 길지(吉地)에 자리해 있다. ‘氣(氣)를 瀑布水처럼 噴出하는 生氣處(生氣處)’라 했으니 그 氣勢를 斟酌할 만하다. 胎室에 이르는 솔숲길엔 ‘生命의 나무’들이 活氣를 뿜어내고, 절집 안으로 바짝 들어선 丹楓나무 숲은 철마다 色色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인다.
    • 요즘 같은 한여름에 눈부시도록 붉게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엔 ‘부처님 供養 꽃’이란 이름이 붙었다. 欲心과 執着을 버리고 나와 萬物이 한 몸이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時間이 걸리지 않는다.
    직지사 다섯 암자 숲길 걷기

    胎室 가는 길에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

    朝鮮의 2代 王 正宗(定宗·1357~1419)은 太祖의 둘째아들 放課다. 定宗은 第1次 王子의 亂이 收拾된 뒤 王位에 올랐으며, 在任 2年(1398~1400) 後 寶位를 방원에게 讓位하고 上王으로 물러났다. 절집 숲과 關聯해 흥미로운 事實은 2代 임금으로 卽位한 定宗이 다른 곳에 安置되어 있던 自身의 胎室(胎室)을 직지사 大雄殿 뒤便의 北峯(北峰)으로 옮겼다는 記錄이다.

    胎室이란 王室에서 産母가 胎兒를 出産한 뒤 나오는 胎盤을 묻는 場所로, 泰封(胎封)이나 太廟(胎墓)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우리 先祖들은 胎의 자리가 다음 아기의 孕胎(孕胎)에 決定的인 影響을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厄이 없는 方向에서 胎를 태우거나 埋葬하는 風習이 있었다. ‘三國史記’나 ‘高麗史’에는 新羅 金庾信도 胎를 묻었다는 記錄이 남아 있다. 이것으로 미뤄보아 胎를 묻는 風習은 오래前부터 내려온 것이라 하겠다.

    泰封은 百濟, 馬韓, 伽倻, 高麗時代의 記錄에도 나타나며, 風水地理를 重視하던 朝鮮時代에는 儀軌까지 編纂했을 程度로 王室의 重要한 儀禮였다. ‘朝鮮王朝實錄’에는 태봉에 關한 論議가 120餘 回나 나타나며, 胎室에 對한 朝鮮時代의 硏究資料(‘朝鮮의 胎室’)에 따르면 朝鮮의 國王과 그 子女의 胎盤을 묻은 具體的 位置나 地名이 90餘 곳에 達한다. 그밖에 ‘泰封’이라 불리던 地名까지 網羅하면 276곳이 濟州島를 除外한 全國 各地의 明堂에 分布해 있다고 한다. 朝鮮 王室이 100里 以內에 王陵을 썼던 것과는 달리 王室의 뿌리인 胎室을 全國 各地에 골고루 둔 것은 王室과 地域 住民 間에 一體感을 갖게 만들 意圖였으리라는 解釋도 있다.

    崇儒抑佛 견뎌낸 ‘胎室 垂直査察’

    直指寺의 正宗 胎室은 平素 査察림과 朝鮮 王室의 關係에 關心을 갖고 있던 나의 好奇心을 刺戟하는 데 不足함이 없었다. 願하지 않던 임금 자리를 억지로 맡을 수밖에 없었던 房과는 왜 2年(正確하게 26個月)이라는 짧은 在任 期間, 그것도 何必이면 卽位 첫해에 自身의 胎室을 직지사로 옮겼을까. 옮겨진 正宗 胎室은 그 後 직지사에 어떤 影響을 끼쳤을까. 胎室 周邊의 山林을 태봉산(胎封山)으로 指定해 徹底히 保護하던 朝鮮 王朝의 山林政策을 參考할 때 直指寺의 胎室은 寺刹林의 起源과 機能에 對한 事例를 찾던 나에게 좋은 硏究對象이었다.



    직지사는 風水的으로 摩尼山, 太白山 文繡峯, 五臺山 적멸보궁과 함께 ‘氣(氣)를 瀑布水처럼 噴出하는’ 生氣處(生氣處)로 알려져 있으며, 定宗의 胎室은 風水에서 最高의 길지로 알려진, 뱀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形象의 머리 部分 穴(蛇頭血)에 該當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한다.

    동생 李芳遠의 뜻에 따라 王位에 오른 定宗은 목숨을 扶持하고자 王位를 太宗에게 물려주고 ‘擊毬, 사냥, 溫泉, 宴會 等의 悠悠自適한 生活’을 19年 동안 營爲하다가 63歲로 日記를 마쳤다. 사두穴에 胎室을 옮긴 德分인지 몰라도 定宗은 정안왕후 金氏 사이에는 子息이 없었지만, 나머지 7名의 夫人 사이에 15男 8女를 두었다. 冷嚴하고 非情한 權力 다툼의 世界에서 한발 벗어나 上王生活을 19年間이나 누리고, 또 23名의 子息까지 둔 定宗이 누린 映畫(?)가 風水的 最高의 吉地에 自身의 胎室을 옮긴 德分인지, 내 짧은 風水知識으론 堪當할 수 없다.

    朝鮮 王室에 胎室을 내어준 직지사는 어떤 影響을 받았을까. 定宗은 直指使를 垂直査察(守直寺刹)로 指定해 胎室 수호의 所任을 맡겼다. 直指寺의 住持는 守直군의 所任을 遂行하는 僧侶들의 首長이기도 했다. 德分에 직지사는 朝鮮 初期부터 始作된 崇儒抑佛의 모진 歲月 속에서도 比較的 順坦하게 사세(寺勢)를 維持할 수 있었다.

    한便 王室은 胎室을 保護하고자 직지사 周圍 30里 內에서는 伐木과 狩獵과 耕作을 禁했다. 胎室 垂直寺刹의 射擊(寺格)을 確保한 德分에 직지사는 胎室 周邊의 山林을 태봉산으로 守護하는 한便, 넓은 靈維持(領有地)를 確保할 수 있었다. 직지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現在 約 600㏊의 山林을 保有하고 있으며, 직지사에서 12㎞나 떨어진 金泉市內의 法院과 舊화사(九華寺)까지가 直指寺의 靈維持였다고 한다.

    직지사 다섯 암자 숲길 걷기

    직지사가 賃金의 胎室을 지키던 願刹임을 알려주는 安養루 앞 태석.

    朝鮮 王朝가 王族의 胎를 모신 産을 태봉산으로 指定하고, 査察(願堂)로 하여금 태봉산을 保護하게 한 理由는 王室의 無窮한 繁榮을 念願하고 權威의 象徵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王室의 冥福과 胎室을 지키고자 원당에 내려진 鳳山 수호의 責務는 該當 寺刹에 태봉산 一帶의 獨占的, 排他的인 利用權을 委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鳳山 守護寺刹의 事例는 醴泉의 名奉仕(文宗의 胎室), 洪川의 壽陀寺(世祖費 소헌王后의 胎室), 醴泉의 용문사(成宗妃 廢妃 尹氏의 胎室), 永川의 銀海寺(仁祖의 胎室), 扶餘의 五德社(宣祖의 胎室), 忠州의 정토사(仁祖의 胎室), 報恩의 法住寺(純祖의 胎室)에서도 찾을 수 있다.

    朝鮮의 王木이자 生命의 나무

    定宗의 語態(御胎)를 530年 동안 모셨던 直指寺의 獨特한 履歷을 생각하면 이 절집이 包容하고 있는 숲의 食率들은 나름의 意味를 지니고 있다. 그 食率들 中 가장 먼저 言及해야 할 숲은 무어라 해도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는 朝鮮의 王목(王木)이었고, 風水的 觀點에서 陽宅(陽宅)과 陰宅(陰宅)에 生氣를 提供하는 生命의 나무였다. 소나무가 風水的 素材로 植栽된 事例는 世界文化遺産으로 指定된 朝鮮時代의 王陵 周邊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王陵 周邊에 植栽된 소나무는 王의 幽宅을 吉地로 만들어 王朝의 無窮한 繁榮을 꾀할 수 있다고 믿은 祖上들의 風水思想이 反映된 痕跡이다. 王이나 王后의 胎를 모신 胎室 周邊도 例外는 아니다.

    散文에서 一柱門에 이르는 들머리 숲에서는 大部分의 소나무가 사라졌지만, 散文 內 不渡前에서 兩옆으로 갈라지는 세 갈래 길의 오른便 숲길에서는 몇 그루 落落長松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소나무로 미뤄보아, 오른便 숲길이 胎室로 向하던 옛 길임을 推測할 수 있다. 가운데 길은 一柱門을 지나 萬歲樓를 거쳐 境內로 進入하는 길이며, 왼便 길은 山內의 여러 庵子로 向하는 鋪裝된 길이다.

    胎室을 向한 오른便 길을 따라 조금만 北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대나무 숲에 이어 꽤 넓은 面積의 鬱蒼한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大部分 樹齡 50年 前後의 어린 소나무이지만, 직지사 一帶에서는 쉬 볼 수 없는 소나무 單純林이라 異彩롭다. 胎室 周邊을 감싸고 있던 솔숲의 痕跡이라 할 수 있다.

    胎室을 지키는 원당의 位相에 비춰볼 때 직지사도 여느 절집과 마찬가지로 들머리를 비롯해 周邊에 솔숲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절집 周邊을 지키던 솔숲은 日帝 强占期와 6·25戰爭 等 社會的 混亂期를 거치면서 大部分 사라졌다. 옛 솔숲의 痕跡은 四天王門을 거쳐 萬歲樓에 이르는 進入路 곳곳에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에서 어렵지 않게 想像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定宗의 胎室은 북봉에 없다. 朝鮮總督府가 朝鮮 王室의 精氣를 遮斷하고자 1928年 全國 各地의 明堂에 埋藏되어 있던 王室의 태 53位(王의 胎室 21位, 公州 및 王子의 胎室 32位)를 파헤쳐 西三陵으로 옮겼을 때, 定宗의 태옹(胎甕)도 함께 옮겼기 때문이다. 定宗 임금의 옛 胎室 痕跡은 安養루 앞의 태석과 淸風料 마당에 展示된 胎室의 欄干石으로 確認할 수 있을 뿐이다.

    직지사는 高句麗 僧侶 阿道(阿道)火傷이 418年(新羅 訥祗王 2年)에 創建했다고 한다. 新羅時代에 磁場(慈藏)과 千묵(天默)이 重修하고, 高麗 太祖의 도움을 받아 重建했는데, 壬辰倭亂 때 불탄 堂宇(堂宇)들이 1970年代 以後 鹿苑스님에 依해 30年間에 걸친 復元事業으로 오늘의 모습을 이루게 됐다.

    ‘직지사(直指寺)’라는 절 이름은 直指人心 見性成佛(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善終(禪宗)의 가르침에서 由來했다는 說과, 創建主 阿道 和尙이 桃李寺를 建立하고 멀리 金泉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直指)‘저 山 아래에도 절을 지을 吉祥支持(吉祥之地)가 있다’고 한 데서 傳來했다는 說도 있다.

    壬辰倭亂에 赫赫한 功勞를 세운 四溟大師 惟政(惟政·1544~1610)은 이곳에서 出嫁했으며, 境內에는 石造藥師如來坐像(寶物 319號), 大雄殿 앞 3層石塔(寶物 606號), 毘盧殿 앞 3層 石塔(寶物 607號), 大雄殿 三尊佛 幀畫 3幅(寶物 670號), 淸風料(淸風寮) 앞 3層 石塔(寶物 1186號) 等의 重要 文化財가 있다.

    어느 절집엔들 숲이 없으랴만, 朝鮮 王室의 垂直査察이던 直指寺의 숲은 절집 안에 바짝 들어와 있는 것으로 有名하다. 절집 마당에서 四方 어느 곳을 둘러봐도 빈 구석이 없을 만큼 綠色世上을 이루고 있다. 그 綠色世上의 첫 構成員은 四天王門과 萬歲樓 오른便 언덕의 丹楓나무 숲이다. 썩 넓은 숲은 아닐지라도 이 一帶의 丹楓 숲은 철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제 方式대로 뽐낸다.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經驗한 이들은 봄철의 新綠과 여름철의 綠陰과 함께 가을 丹楓의 風光을 잊지 못한다. 다른 어떤 곳의 丹楓 숲과 견주어도 決코 뒤지지 않을 만큼 멋진 숲이기 때문이다.

    직지사에는 또 다른 丹楓 숲이 있다. 大雄殿에서 毘盧殿으로 向하는 通路에 심은 丹楓나무 터널이다. 이 땅 곳곳의 절집들이 멋진 들머리 丹楓나무 숲을 維持하고 있지만, 境內의 한 通路에 素朴한 터널 形態로 몇 百 年째 이어오고 있는 丹楓 숲을 간직한 곳은 직지사뿐이다. 이 丹楓 터널을 거닐 때는 나란히 난 水路(水路)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절집 大部分이 風水地理上 물을 담벼락 밖으로 빼내는 데 견주어 직지사는 오히려 그걸 보듬어 물을 境內 곳곳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丹楓 터널의 水路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과 함께, 천불암 담벼락을 타고 흘러온 물이 黃惡루 앞을 가로질러 흐르거나 萬歲樓 앞의 소나무 숲 사이로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물길을 만나는 것은 다른 어떤 절집에서도 쉬 經驗할 수 없는 風景이다.

    이처럼 절집 곳곳에 물이 흘러내리게 만든 水路 德分에 直指寺의 樹木들은 旺盛하게 자라는지도 모른다. 이 水路가 예부터 있어온 것인지 또는 復元事業이 大大的으로 進行된 1970年代에 만들어진 것인지 몰라도 절집 마당 곳곳으로 물이 흐르도록 親水空間을 配置한 스님들의 智慧가 예사롭지 않다.

    한여름에 獨也紅紅하는 배롱나무 꽃

    直指使를 가로지르는 여러 水路와 함께 視線을 固定해야 할 對象은 社名角 앞을 지키고 선 배롱나무다. 올해는 지난 봄의 늦추위 때문에 꽃눈이 많이 傷해서 꽃구경을 못하고 上京했지만, 지난해 7月 下旬에 滿發했던 百日紅 꽃을 잊을 수 없다. 배롱나무의 꽃은 百日이나 가기 때문에 목(木)百日紅, 또는 紫薇花(紫微花)라고도 불린다. 배롱나무 꽃은 7月과 8月과 9月 初에 各各 20餘 日間 피고, 以後 10餘 日 程度 시들어 모두 100日 程度 連續해서 피고 진다고 한다. 特히 8月 末에서 9月 初에 피는 唯一한 꽃으로 예로부터 祖上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다른 꽃이 別로 없는 한여름에 獨特하게 붉은 꽃을 피우는 特性 때문에 植物의 品格을 1品에서 9품으로 나눈 강희안(1417~1464)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百日紅이 梅花, 소나무와 함께 1품으로 가장 윗자리에 登載되어 있다.

    方外擧事 조용헌 先生의 解釋도 새롭다. 조 先生은 太極의 色이 廳과 洪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靑紅을 象徵하는 代表的인 植物로 소나무와 배롱나무를 든다. 소나무는 請을 象徵하는 代表的인 植物로 겨울에 獨也靑靑(獨也靑靑)하며, 배롱나무는 紅을 象徵하는 代表的인 植物로 여름에 獨夜홍홍((獨也紅紅)한다는 것이다.

    배롱나무가 직지사는 勿論이고 수많은 절집에서 오래前부터 자리를 잡게 된 背景도 꽃이 없는 季節에 부처님께 꽃 供養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절집에 純粹한 아름다움을 提供하기 위한 스님들의 眼目 德分일 것이다. 炎天에 땀 흘려 꽤 먼 距離의 들머리 綠色 숲을 通過한 佛子들이 大雄殿이 있는 절집 마당에 들어선 瞬間, 붉게 滿發한 百日紅을 만나는 感興은 유별날 것이다. 아! 하고 感歎詞를 내면서 百日紅의 아름다움에 빠지는 그 無垢한 瞬間은 하늘과 人間 사이에, 自然과 人間 사이에 어떤 間隔도 사라지고(天人無間), 하늘과 내가, 自然과 내가, 部處와 俗世 間에는 어떤 間隔도 없는 合一의 境地에 到達하는 것은 아닐까. 한여름에 배롱나무 꽃이 내뿜는 아름다움을 만나는 그 純粹한 마음이 바로 부처님을 만나는 마음 아니겠는가. 내 속에 부처가 있다는 平凡한 眞理를 절집의 배롱나무를 통해서도 깨칠 수 있다면, 天地萬物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때에 제대로 담을 수 있는 感性의 그릇을 키우는 일조차 修行 方法의 하나라고 主張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왜 何必이면 社名角 곁에 木百日紅이 심어졌을까. 그 理由는 알 수 없지만, 丹楓나무 터널의 錄音 곁에 선 붉은 배롱나무 꽃은 한여름 절집의 單調로운 風光에 變化를 주는 데 不足함이 없다. 密陽 표충사가 四溟大師를 기리는 表忠寺黨과 瓢蟲書院을 절집 안에 품고 있는 것처럼, 직지사도 社名角을 建立함으로써 四溟大師 惟政의 英탱을 奉安해 大使의 遺德을 기리는 것은 스님이 新묵大師의 弟子가 되어 이 절집에서 出嫁한 因緣 때문일 것이다.

    黃惡루 살구나무에 깃든 事緣

    직지사 다섯 암자 숲길 걷기

    大雄殿에서 毘盧殿에 이르는 丹楓나무 숲길.

    한便 나무와 關聯해 因緣의 뿌리를 생각할 때 黃惡루 앞의 살구나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직지사 숲의 獨特한 食率이다. 直指寺의 장원자 文化觀光解說師가 慶北 奉化에서 온 老人에게서 直接 들었다며 傳해준 이야기는 興味롭다. 老人이 少年時節 직지사에서 直接 經驗했던 일로, 어머니와 함께 直指使를 찾은 少年 朴正熙가 개구쟁이 模樣으로 黃惡루 앞의 살구나무를 타고 올라가 놀던 모습에 對한 記憶, 그리고 오늘도 變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살구나무의 健在함에 對한 老人의 感懷였다. 直指寺의 冥府殿에 朴正熙 前 大統領과 陸英修 女史의 影幀이 모셔져 있는 點, 大統領 在職時節 직지사 復元事業을 펼친 일, 四溟大師의 英탱을 모신 社名角(正祖 11年 建立)의 懸板을 쓴 일들은 少年 朴正熙가 어머니와 함께 직지사에서 보낸 幼年時節의 經驗과는 어떤 關聯이 있을까. 아는지 모르는지 이 모든 因緣의 끈을 지켜본 黃惡루 앞의 살구나무는 如前히 푸르고, 올해도 變함없이 알알이 푸른 살구를 달고 있었다.

    直指寺의 감나무도 유별나다. 이 절에 傳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朝鮮 定宗과 切親했던 住持스님이 王에게 직지사 감을 眞相했고, 그 맛이 너무나 좋아서 朝廷에서는 ‘직지사半時眞相法’까지 制定했다고 한다. 직지사 感이 朝鮮朝 末까지 王의 食卓에 올랐음은 勿論이다. 調整에 進上하던 감나무는 맛있는 紅柹를 生産하는 납작감(半時·盤枾)나무로, 淸風料 옆 굴뚝 옆이나 설법전 뒷마당에 서 있는 巨大한 감나무들에서 옛 榮光의 痕跡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아름드리 감나무는 如前히 맛있는 紅柹를 生産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들 감나무가 600年 程度 묵었다고 하지만, 크고 오래된 것일수록 이름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인지 몰라도 世上에 通用되는 나이 中에 나무 나이만큼 가늠하기 어려운 것도 많지 않다. 아무튼 감나무들이 절집에 터 잡은 德分에 제 天壽를 누리고 있는 것만은 否定할 수 없다.

    감나무와 함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歲月의 무게를 말없이 傳하는 直指寺의 늙은 개나리다. 우리 周邊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나리는 鉛筆보다 조금 더 굵은 줄기를 가진 것이 大部分이지만, 直指寺의 개나리는 周邊에서 쉬 찾을 수 없을 만큼 굵은 줄기로 歲月의 무게를 자랑한다. 어떤 이는 200年 묵었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이 亦是 正確한 나이는 알 수 없다.

    개나리와 關聯해서는 직지사 一柱門의 기둥 하나는 개나리 줄기로, 다른 하나는 1000年이 넘은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傳해온다. 淸風料 옆 마당의 어른 팔뚝만한 굵기의 줄기를 간직한 개나리가 200年 묵었다면, 一柱門 기둥감으로 쓸 개나리는 아마 數千 年 묵은 개나리라야 可能할 터인데, 키 작은 灌木이 키 큰 喬木처럼 자랄 수 없는 理致를 생각할 때 직지사 개나리의 빼어남을 자랑하려는 ‘판타지’이리라.

    다섯 庵子에 이르는 숲길

    직지사 다섯 암자 숲길 걷기

    少年 朴正熙가 타고 올랐다는 黃惡루 앞의 살구나무.

    큰절(직지사)에는 다섯 庵子가 있는데, 명적암(明寂庵)과 중암(中庵)은 황악산의 中央에, 백련암(白蓮庵)과 運輸癌(雲水庵)은 황악산의 오른便 山麓에, 은선癌(隱僊庵)은 황악산의 왼便 山麓에 자리 잡고 있다. 直指使를 품은 황악산은 忠北 永同郡과 慶北 김천시 境界에 있는 海拔 1111m의 山이다. 온 山이 闊葉樹로 鬱蒼한데, 암봉과 바위로 이뤄진 骨山(骨山)李 아니고 土壤이 豐富한 肉山(肉山)이기 때문이다.

    다섯 庵子에 이르는 숲길은 暫時나마 都市의 欲望을 내려놓기 좋은 場所다. 于先 그렇게 멀지 않다. 시멘트로 包裝된 點이 아쉽지만, 幅이 꽤 넓은 通行路이기에 발 밑의 障礙物에 神經을 쓸 必要가 없으며, 은선癌을 除外하곤 運輸癌으로 가는 길에 次例로 명적암과 중암과 백련암을 둘러볼 수 있게끔 모두 連結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숲길에서는 느리게 걷는 것이 좋다. 그리고 생각의 고리를 하나하나 끊어내고 自身과 대면하면서 어디를 向해 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기에 安城맞춤이다.

    은선癌은 萬德戰을 지나 登山路 初入에서 왼便으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오르면 갈 수 있는데, 登山路와 같은 方向에 자리 잡은 다른 庵子들과는 달리 왼便 山麓에 있어서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登山客은 大部分 오른便 山麓에 자리 잡은 백련암과 運輸癌으로 난 길을 따라 황악산을 오르기 때문이다. ‘은선癌’에는 ‘神仙이 스스로 살 곳을 選擇해서 산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神仙들이 사는 곳답게 은선癌에 오르는 숲길은 闊葉樹林이 鬱蒼하고, 傾斜가 좀 있지만 鋪裝된 길이라 家族이나 同僚들과 함께 걷기 좋다. 神仙의 世界에 들어간다는 姿勢로 마음을 비우고 느리게 걸어볼 일이다. 이 숲길을 갈之字처럼 몇 굽이를 돌면 豫想치도 못한 곳에서 傳統 韓屋에 어울릴 것 같은 大門을 가진 은선癌이 불쑥 나타난다.

    은선癌으로 오르는 숲길度 좋지만, 은선癌에서 내려다보는 直指寺의 情景도 印象的이다. 非專門家의 눈에도 ‘天下의 吉地’라는 名聲을 얻은 理由를 首肯할 수 있을 만큼 황악산 자락에 바구니처럼 감싸인 模樣의 아늑한 直指使를 한눈에 確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악산의 中央이나 오른便에 자리 잡은 庵子로 가려면 은선癌에서 다시 내려서야 한다. 은선癌으로 오르는 처음의 갈림길에서 運輸癌까지는 約 2㎞ 거리이지만, 이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숲으로 덮여 있어 最上의 散策길이다. 황악산 中央의 명적암은 큰절의 案內板에도 標示되어 있지 않을 程度로 最近에 建立된 庵子다. 세 番째 庵子인 중암은 14칸 規模의 端雅한 韓屋 建物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곁에 새로 지은 法堂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日本에 滯留하다 어머니 一葉스님을 따라 66歲에 뒤늦게 出嫁해 和承(畵僧)으로 奉職한 일당스님(俗名 김태신·一葉스님의 외아들)李 계시던 곳이다. 일당스님은 日本의 權威 있는 美術賞인 아사히賞을 受賞했을 뿐만 아니라, 現在 北韓의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려 있는 김일성 主席의 肖像畫를 그린 이로 알려져 있다.

    직지사 다섯 암자 숲길 걷기

    社名角 앞의 배롱나무. ‘붉은 여름’을 膳賜한다.

    중암으로 오르는 갈림길에서 백련암과 運輸癌으로 가는 길은 幻想的이다. 가을 丹楓철에 꼭 다시 한 番 오리라는 다짐을 하게 할 만큼 鬱蒼한 숲이다. 이 숲길은 황악산을 오르는 登山路와 겹치지만, 내가 찾은 날은 장마철의 궂은 날씨 때문에 찾는 이 없는 숲길을 獨차지하며 걷는 特惠도 누렸다. 鬱蒼한 숲길을 쭉 따라 걷다보면 次例로 백련암과 運輸癌이 나오는데, 모두 比丘尼 스님이 계신 곳이다. 이 두 庵子에는 큰절의 影響 때문인지 열매를 실하게 맺고 있는 호두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다.

    直指使를 네 番째 찾은 끝에 마침내 山內 庵子를 모두 둘러보았다. 하지만 夏安居 中이라 어느 庵子에서도 스님을 뵙고 말씀을 請해 들을 수 없었던 點이 조금 아쉽다. 절집은 遂行 精進으로 깊은 沈默에 빠졌지만, 다섯 庵子의 水閣 물은 어떤 制限도 없이 繼續 흐르고 있어서 訪問客의 渴症을 풀어줬다. 또한 절집에 이르는 閑寂한 숲길은 都市에서 안고 온 欲心과 期待와 執着을 비우는 데 不足함이 없을 만큼 淸淨했기에 都市의 欲望을 暫時나마 비울 수 있었다.

    숲을 즐기는 데 季節을 가릴 必要는 없다. 우리 周邊의 어떤 숲에서나 自己 스스로 風景 속의 한 點景(點景)李 되어보는 것이 숲을 즐기는 가장 쉬운 方法이다. 그 方法에 對해 說明을 조금 덧붙이면, 그냥 숲 바닥에 널려 있는 바위에 걸터앉거나 또는 땅바닥에 그대로 퍼질러 앉아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일이 먼저다. 그러나 이런 고요한 狀態에 이르기란 쉽지 않다. 우리 大部分은 몸과 마음이 모두 煩多하거나, 마음은 고요한데 몸이 煩多하거나, 또는 몸은 고요한데 마음이 煩多한 狀態이기 때문이다. 欲心과 期待와 執着이 波濤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데, 어떻게 하면 한瞬間이라도 몸과 마음을 고요한 狀態로 維持할 수 있을까.

    숲에서 비우고 채우기

    나는 지난 글에서도 몇 番이나 言及했듯이 ‘只今 이 瞬間 이 空間’에 穩全히 머무는 일에 集中한다. 時間과 空間의 合一에 依해 만들어진 風光 속에 놓인 나 自身에 集中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雜念을 떨쳐버리고, 다른 일을 벌이고 싶은 欲望을 내려놓는다. 이런 마음으로 숲(自然)에 沒入하면, ‘欲心과 期待와 執着’李 잦아들기 始作하며, 작은 것에도 마음의 豐饒를 느낄 수 있다.

    직지사 다섯 암자 숲길 걷기
    全 瑛 宇

    1951年 慶南 馬山 出生

    高麗大 林學科 卒業

    美國 아이오와 주립대 碩士, 博士

    現 국민대 山林資源學科 敎授

    著書: ‘숲과 韓國文化’ ‘나무와 숲이 있었네’ ‘우리가 正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숲 보기 읽기 담기’ ‘韓國의 名品 소나무’ 外 多數


    이런 나의 方式이 모든 사람에게 通用될 수 있을지 自信할 수 없지만, 몸과 마음을 고요한 狀態로 만드는 나만의 다음 順序는 10番쯤 천천히 深呼吸을 하는 일이다. 여러분도 한 番 試圖해보시라. 單純한 深呼吸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다음으로 몸이 便安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狀態에 이르게 되면 다음 段階로 들어가기가 쉽다. 나무가 내쉰 날숨(酸素)을 내가 들숨으로 마시고, 내가 내쉰 날숨(二酸化炭素)을 나무들이 들숨으로 마셔 營養分이 되어 自身의 몸을 서로 키워간다는 想像이다.

    이런 想像을 키워가면 우리 周邊을 둘러싼 自然이 單純한 事物이 아님을 自覺하게 된다. 나무와 내 自身이 딴 몸이 아니라는 自覺이 深化되면, 우리 周邊의 모든 自然이 우리와 다른 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萬一 여러분이 이런 境地에 이르게 되면 自身이 周邊의 天地萬物과 거미줄처럼 서로 連結돼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宇宙 안의 뭇 生命이 한 몸이 되는 瞬間이다. 佛家에선 이런 깨달음을 胴體大悲(同體大悲)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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