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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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그룹
現代그룹
HYUNDAI Group
形態 中堅企業
創立 1947年 5月 25日
創立者 鄭周永
産業 分野 서비스業
本社 所在地 서울特別市 鍾路區 율곡로 194 (연지동, 現代그룹빌딩)
核心 人物
대한민국 현정은 (現 會長)
대한민국 鄭周永 (創業主)
대한민국 정세영 (前 會長)
대한민국 정몽헌 (前 會長)
대한민국 鄭夢九 (前 會長)
某企業 대한민국 現代홀딩스컴퍼니
子會社 대한민국 現代峨山
웹사이트 [1]
現代그룹
改正 로마字 表記 : Hyeondae Group
公式 로마字 表記: HYUNDAI Group

現代그룹 ( 英語 : Hyundai Group , 現代그룹)은 1950年 1月 10日 出帆한 現代建設 을 母胎로 하여 鄭周永 會長이 創業한 大韓民國 의 企業集團이었다. 1977年 부터 2000年 까지 24年 동안 大韓民國 內 資産總額基準 財界序列 1位의 大規模 企業集團으로 자리잡아왔으나, 2000年 가을 의 2世代 오너들 間 經營權 紛爭, 2001年 3月 創業主 鄭周永의 死亡과 현대그룹의 大大的인 構造調整 , 系列社들의 分割·解體로 인해 事業部門別 系列 分離(小그룹化)를 겪으면서 規模가 相當히 縮小되었다.

2017年 基準으로, 한때 財界 序列 1位였던 현대그룹은 最近 現代商船 마저 系列 分割되면서 公正去來委員會 가 定하는 大規模 企業集團 (資産 規模 5兆원 以上)에서 除外되어 ' 中堅企業 '의 身分이 되었다.

그러나 이番에 현대그룹이 2012年 當時 賣却한 연지동 本社 社屋을 5年 만에 되찾는 것을 契機로 현정은 會長의 그룹 再建 作業이 本格化할 것이라고 觀測되고 있다.

현대그룹을 危機에 빠뜨렸던 현대商船이 2016年 7月 系列 分離되면서 그룹도 漸次 安定을 찾고 있으며, 그룹 主軸이었던 現代商船 과 現代證券(現 KB證券 )·현대택배 (現 롯데글로벌로지스 ) 等이 떨어져 나가면서 規模 面에서 매우 작아졌지만,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아산을 中心으로 孤軍奮鬪하며 再建을 摸索하고 있다. [1]

그룹의 '持株會社' 格인 현대엘리베이터의 昇降機 設置 臺數는 2017年 2·4分期 5,825臺로 前年 同期 5,024代보다 16% 急增했다. 2017年 6月에는 創社 以來 最初로 月刊 設置 臺數가 2,000臺를 넘겼다. 國內 信用評價社들은 ‘현대상선 支援에 따른 資金 負擔'李 사라졌다’면서 잇따라 信用 等級을 上向 調整했다. 持續 可能한 成長을 위해 占有率 1位인 國內 市場에 滿足하지 않고 海外로 눈을 돌려 海外 法人 數도 繼續해서 늘리고 있다.

현대아산은 2004年 中斷했던 크루즈 觀光 事業을 2017年 再開하기도 하였다.

現代그룹은 新事業 發掘을 위해 현대投資네트워크에서 현대投資파트너스로 變更했다.

沿革 [ 編輯 ]

日帝强占期 ~ 韓國戰爭 [ 編輯 ]

創業機 [ 編輯 ]

현대그룹의 母胎인 현대건설은 6·25 動亂期 美軍 下請工事에 動員되면서 成長軌道에 進入했으며 韓國戰爭 以後 復舊事業을 遂行하여 엄청난 富를 蓄積하였으며, 1960年代 中盤부터는 大韓民國 建設市場의 限界를 느끼기 始作하여 大韓民國 建設業界로서는 最初로 海外로 進出하였다.

形成期 [ 編輯 ]

1968年 부터 현대건설은 建設業을 통해 벌어들인 資金力을 바탕으로 當時 政府 主導의 重化學工業 推進冊에 힘입어 自動車 事業과 朝鮮 事業에 뛰어들었으며 마침내 1971年 현대그룹이 正式 出帆하였다.

擴張期 [ 編輯 ]

현대그룹의 事業擴張이 거둔 成功은 현대 그룹에 탄탄한 資金力을 가져다 주었음은 勿論, 大韓民國 社會 變化에 相當한 影響을 끼쳤으며, 이를 機會로 삼아 이 時期부터 創業主인 鄭周永 이 本格的으로 政界 進出을 宣言함으로써 旣存의 現代그룹은 정세영 , 李明博 等 專門 經營人이 이끄는 體制로 바뀌게 된다.

2世代 오너體制 突入 [ 編輯 ]

創業主인 鄭周永 이 政界에서 立地를 굳히는데 失敗한 以後 鄭夢九 , 정몽헌 等 2世代가 그룹을 이끄는 體制로 바뀌게 된다. 한便 이 時期 현대는 一貫製鐵所 建立을 試圖하였고 起亞自動車 引受 引繼를 통한 規模의 經濟實現을 이끌어냈으며 첫 母體 진로그룹 의 不實로 危機에 處한 GTV 引受 物望에 오르기도 했다. [2] 이렇게 기틀이 잡혀가는 時期 現代그룹은 國民의 政府 햇볕政策 과 同時에 對北 事業을 本格的으로 推進한다.

小그룹化 (系列 分割) [ 編輯 ]

現代그룹은 김대중 政府 의 構造調整과 빅딜 政策計劃에서 現代그룹 밀어주기 政策의 一環으로 事業部門別 專門化를 構想하였으나, 結局 事業部門別 小그룹化라는 밑그림을 그려나가게 된다. LG半導體 , 韓華에너지 精油部門 韓華에너지프라자 引受合倂으로 엄청난 빚을 떠맡게 됨과 同時에 2世代 오너 間 經營權 紛爭과 더불어서 流動性危機에 直面하면서 현대系列의 모든 系列社들의 株價暴落과 현대그룹의 非理가 完全히 드러나면서 1977年 부터 財閥 財界序列 1位를 지켜왔던 현대그룹이 2001年 부터 三星그룹 LG그룹 에게 各各 1位, 2位 자리를 내줌과 同時에 현대그룹의 位相이 完全히 墜落하였다. 그러나 鄭周永 名譽會長의 현대는 여러財界로 나뉘었어도 현대자동차그룹 은 財界 1, 2位圈을 代身 지켜내고 있다.

현정은 會長 體制 出帆 [ 編輯 ]

2003年 8月 정몽헌 會長의 投身自殺 以後에 突然承繼한 현정은 會長이 같은 해 10月 會長으로 就任하면서 現代그룹은 女性經營人에 依해 이끌어졌다. 이 時期부터 現代그룹은 海運, 物流, 金融 等의 事業軸을 構成한 企業集團으로 다시 자리잡았으며 선대 經營者들의 遺志를 받들어 對北 事業을 持續해나갔다. 그러나 2008年 金剛山 被擊事件 以後 南北關係가 惡化 兆朕을 보이면서 對北 事業의 蹉跌을 빚게 되었고, 이는 현대그룹이 正常的인 企業活動을 하는데 負擔을 주는 契機가 되었고, 때문에 現代에서는 그룹 次元에서 新成長動力의 마련이 切實히 必要하였다. 代表的인 例로 2010年 에 進行한 현대그룹의 母胎인 現代建設 의 引受 引繼를 積極的으로 推進한 行步는 이를 仔細하게 立證해주었으나 結局 現代自動車그룹이 현대건설을 引受하고 말았다.

歷代 會長 [ 編輯 ]

臺數 聲明 任期 備考
第1代 鄭周永 1971年 1月 ~ 1987年 1月 현대그룹 創業主
第2代 정세영 1987年 1月 ~ 1995年 12月 현대자동차 會長
第3代 鄭夢九 1996年 1月 ~ 2000年 3月 현대자동차그룹 會長
第4代 (故) 정몽헌 1998年 11月 ~ 2000年 鄭周永 5男
第5代 현정은 2003年 9月 ~ 現在 정몽헌 配偶者

主要 系列社 [ 編輯 ]

  • 현대엘리베이터(週) - 持株會社 및 昇降機 製造會社
  • 現代峨山(週) - 對北事業(北韓 觀光, 南北經濟協力), 建設(土木, 建築, 플랜트, 住宅)
  • 現代무벡스(週) - 物流自動化시스템 및 SOC인프라事業(乘降場스크린도어 等)
  • 현대投資파트너스(週) - 代替投資 펀드, 資源開發
  • 現代經濟硏究院 - 硏究, 經營 컨설팅, 敎育 硏修
  • 現代글로벌(週) - 投資事業
  • 現代綜合硏修院(週) - 현대그룹 綜合硏修院
  • 現代 GBFMS - 아웃소싱 專門企業

로고 [ 編輯 ]

移轉 系列社 [ 編輯 ]

各州 [ 編輯 ]

  1. 한재영 記者 (2017年 7月 6日). ' 현정은의 現代' 復活 信號彈...'엘리베이터' 끌고 '牙山' 민다” . 《서울經濟》.  
  2. 박성완 記者 (1997年 9月 24日). “[放送街] "敎育專門 마이TV, 선경그룹에 賣却"..最終 協商中” . 《韓國經濟》.  
  3. 主宗國 記者 (1999年 8月 2日). “7月中 30大그룹 系列社 15個 줄어” . 《聯合뉴스》.  
  4. 김민형, 임지훈 記者 (2010年 12月 20日). “現代그룹, 現代建設 引受 霧散” . 《서울經濟》.  
  5. 윤보람 記者 (2016年 7月 14日). “現代商船 構造調整 完了…40年 만에 現代그룹 떠난다” . 《聯合뉴스》.  
  6. 안수찬 (1999年 7月 1日). “BUY KOREA컵 K-리그 富川 번개 2골 5連勝” . 한겨레新聞 . 2019年 10月 25日에 確認함 .  
  7. 배극인 김호성 (1999年 7月 8日). “水原'골 爆竹'先頭로” . 東亞日報 . 2019年 10月 25日에 確認함 .  
  8. 권오상 (1999年 8月 26日). “BUY KOREA 컵 K-리그 水原 土種蹴球 매운맛 誇示” . 한겨레新聞 . 2019年 10月 25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