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明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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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明淑
2006년의 한명숙
2006年의 韓明淑
大韓民國 第37代 國務總理
任期 2006年 4月 20日~2007年 3月 7日
大統領 盧武鉉
前任: 李海瓚 (第36代)
後任: 한덕수 (第38代)

身上情報
出生日 1944年 4月 16日 ( 1944-04-16 ) (80歲)
出生地 日帝强占期 平安南道 평양부
國籍 大韓民國
本館 淸州
學歷 이화여자대학교 佛文學 學事
이화여자대학교 大學院 女性學 碩士
正當 無所屬
配偶者 박성준
子女 박한길(아들)
宗敎 改新敎 ( 韓國基督敎長老會 )
웹사이트 公式 사이트

韓明淑 (韓明淑, 1944年 4月 16日 [1] ~)은 大韓民國의 第37代 國務總理이다. 政界 入門 以前에는 女性運動家로 活動하였고 政界 入門 以後에는 第8代 環境部 長官, 招待 女聲部 長官을 歷任하였다. 本貫은 淸州이며 平壤 出生이다.

1944年 平壤 에서 태어나 박성준 ( 성공회대학교 NGO大學院 平和學 兼任敎授)과 結婚하였다. 女性 社會 幹事를 맡았던 크리스천 아카데미 에서 活動하다 1979年 不穩書籍 耽讀과 容共團體 組織 嫌疑로 反共法 違反으로 拘束되어 서울刑事地方法院 抗訴8部(裁判長 안우만 )에서 懲役 2年 6月 및 資格停止 2年 6月을 宣告받았다. [2]

金大中 執權 以後 16代 國會 比例代表로 政界에 入門했고, 女聲部 初代長官을 歷任했다. 2003年 參與政府 出帆과 함께 環境部 長官을 맡았다. 2006年 3月 15日 李海瓚 總理가 辭任함에 따라 3月 24日 參與政府 의 세 番째 總理에 指名되었다. 2006年 4月 19日 大韓民國 國會의 總理任命 同意案이 可決되어 大韓民國 最初의 女性 國務總理가 되었다. 現在까지도 韓明淑은 大韓民國에서 國務總理를 歷任한 唯一한 人物이다, 2007年 3月 7日 總理職을 辭任하였다.

2007年 6月 18日, 2007年 12月에 있을 第17代 大統領 選擧 出馬를 公式 宣言하면서 大統合民主新黨 의 候補로 올랐다. 그러나 9月 14日 李海瓚 候補에 對한 支持를 宣言하며 候補單一化를 위해 競選에 不參했다. [3] 2008年 18代 總選 에서는 京畿道 高陽市 一山東區 에 出馬했으나 백성운 에게 敗하여 落選했다.

2009年에는 第16代 大統領 盧武鉉 國民葬의 共同掌醫委員으로서 永訣式에서 調査를 朗讀했다. [4] 2010年 6月 地方選擧에 民主黨 서울市長 候補로 出馬했으나, 吳世勳 候補에게 敗하여 落選했다. 2012年 1月 16日 民主統合黨 初代 代表에 選出되어 活動하였으나, 2012年 總選에 公薦 失敗로 辭退했다.

곽영욱 前 大韓通運 社長에게 人事請託으로 5萬 달러를 받았다는 賂物罪 嫌疑로 起訴되었으나, 2013年 3月 大法院에서 無罪 判決을 받았다. [5] [6]

韓明淑은 2007年 3~8月 세 次例에 걸쳐 한만호 前 한신건영 代表에게서 不法 政治資金 9億餘 원을 받은 嫌疑로 2010年 7月 不拘束 起訴됐다. [7] 2011年 10月 31日, 1審에서 無罪를 宣告받았으나, [8] 다시 檢察이 抗訴하여 2013年 9月 16日, 2審에서는 懲役 2年과 追徵金 8億8千餘萬원을 宣告받았다. [9]

2015年 8月 20日 大法院 全員合議體는 9億餘 원의 不法 政治資金을 받은 嫌疑로 裁判에 넘겨진 韓明淑에게 懲役 2年과 追徵金 8億 8千萬 원을 宣告한 原審을 確定했다. 大法院은 韓 前 代表가 檢察 調査 當時 한 陳述을 믿을 수 있다고 본 原審이 正當하다고 봤다. 한 前 代表가 1次 資金을 造成할 때 包含됐다고 말한 1億원 짜리 手票를 한 議員의 동생이 傳貰金으로 使用한 點도 한 前 代表가 檢察 調査 當時 했던 陳述의 信憑性을 높였다. 韓明淑은 國會議員職을 잃게 되고, 關聯法에 따라 2年間 服役 後에도 10年間은 選擧에 出馬할 수 없다. [10] 有罪가 確定되어 矯導所에 收監되면서 大韓民國 憲政(憲政) 史上 實刑(實刑)을 살게 되는 첫 總理라는 不名譽를 안게 됐다. [11]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幼年期 [ 編輯 ]

1944年 平壤 에서 出生하여, 韓國戰爭 이 일어나자 父母를 따라 越南河였다. 以後 서울에서 幼年時節을 보냈으며 서울영등포初等學校에 入學하였다. [12] 初等學校 時節에는 마라톤 選手로도 活躍했으며, 달리기를 잘해 늘 릴레이 選手로 뽑혔다고 한다. [13]

學窓 時節 [ 編輯 ]

韓明淑은 1957年 서울영등포初等學校를 卒業하고 서울 精神女子中學校에 進學했다. 1960年 서울 精神女子 中學校를 卒業하고 精神女子 高等學校로 進學하였다. [12] 1963年 精神女子 高等學校 卒業(1963)하였다. [12]

1967年 2月 이화여자대학교 佛文學科를 卒業하고 大學院은 韓國신학대學校 宣敎神學大學원으로 進學했다. 1977年 2月 韓國신학대學校 宣敎神學大學원에서 神學碩士學位를 받은 뒤 다시 이화여자대학교 大學院으로 進學하여 1985年 2月 女性學 碩士 學位를 받았다. 그 뒤 美國 에 遊學, 1999年 8月에는 美國 뉴욕유니온 神學大學校 客員硏究員 資格을 獲得하고 歸國하였다.

運動 參與 [ 編輯 ]

政界進出 移轉 [ 編輯 ]

韓明淑은 이화여자대학교 佛文學科 在學 中에 男便 박성준을 만나 1967年 結婚하였으나, 6個月만에 박성준이 統一革命黨 事件 當時 自身의 妻 韓明淑을 包攝하는 等의 嫌疑로 逮捕되어 15年型을 宣告받았다. [14] 以後 1981年에 釋放될때까지 13年間 男便을 獄바라지 하였다. [15] 男便을 獄바라지 하며 卒業 後 1970年 이화여자대학교 寄宿舍 舍監으로 在職中, 學生들의 示威를 支援한 것이 問題가 되어 寄宿舍 舍監을 그만두고 韓國 크리스천 아카데미 로 자리를 옮겨 韓國 民主化 運動 에 本格的으로 參與하게 된다. [16] 女性運動 草創期 疏外階層 女性의 人權問題 解決을 위해 活動하며 1974年 韓國 크리스천 아카데미 運動에 女性分課의 幹事가 된 韓明淑은 1977年 韓國신학대學校 宣敎神學大學원 神學碩士를 取得한다. 하지만 1979年 體制 批判的인 理念書籍을 學習·流布한 嫌疑로 李佑宰 , 신인령 等 아카데미의 同僚 幹事들과 함께 拘束되어 광주교도소에서 收監되었다. [16] [17] 2年 6個月間의 投獄 뒤 1981年 光復節 特別 赦免 으로 釋放되었고, 以後 13年째 收監中이던 男便의 釋放 運動을 하다가 結局 같은 해 지학순 主敎의 도움으로 크리스마스 에 特別 赦免 된 男便과 邂逅하게 되었다. [18]

敎育 活動 [ 編輯 ]

1977年 韓明淑은 韓國신학대學校 (現在 한신대학교)의 講師로 出講하였다. [12] 1985年에 韓明淑은 42歲의 나이로 아들 박한길을 낳았고, 3年 後 이화여대 大學院 에서 女性學 碩士를 取得하였다. 1986年부터 1987年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에서 女性學 講師로 일했으며, 留學을 떠나기 前까지 성심여대 에서 女性學 講師로 活動했다. 1987年 2月에 韓國女性團體聯合 이 結成되었고, 韓明淑은 이 團體의 一員으로 6月 民主 抗爭 에서 拘束者 어머니들과 함께 戰警들에게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다. [19]

1988年에는 誠心女子大學校 女性學科 講師로 講義하였다. [12] 以後 1989年부터 5年間 韓國女性民友會 의 會長으로, 1989年 韓國女性團體聯合 의 家族法 改正 特別委員會 委員長으로, 1990年부터 韓國女性團體聯合 의 副會長, 共同代表, 指導委員等으로 活動하며 女性 運動의 基盤을 닦았다.

1994年 男便과 日本 으로 건너가 오차노미즈 女子 大學 에서 博士 論文을 準備하던 中, 1997年 美國 유니언 神學校 의 客員 硏究員으로 移動하며 中斷하게 되었다. [20]

政界 入門 初盤 [ 編輯 ]

政治入門부터 16代 國會議員까지 [ 編輯 ]

1999年 2月, 韓明淑은 美國에 滯留하면서 參與連帶 의 共同代表로 活動할 것을 受諾한다. 韓明淑은 1999年 9月 李在汀 當時 성공회대 總長과 金大中 의 勸誘로 새千年民主黨 創黨 作業에 女性 分課委員長으로 參與하면서 政界에 入門하게 되었고, 참여연대의 中立性을 해친다는 理由로 참여연대 共同代表職에서 辭退하게 된다. [21] 當時 韓明淑은 自身의 政治 參與에 對해 "女性의 政治參與,男女平等 水準은 後進國과 別般 差異가 없다.지난 25年間 在野運動을 해왔지만 亦是 가장 效率的인 길은 政治 參與를 통한 것이라고" 느껴 政治에 投身했다고 說明했다. [22]

2000年 韓明淑은 새千年民主黨 의 比例代表(第5番)로서 제16대 國會議員 에 選出되었다. 環境勞動委員會 活動을 통해 美軍 送油管, 非正規職, 工團들의 國立公園 毁損 等에 對한 問題를 提起하며 誠實하고 차분하다는 評價 [23] 를 얻었던 韓明淑은 2001年 招待 女聲部 長官에 就任하면서 議員職에서 辭退하게 되었으며, 박양수 에게 議員職을 承繼하였다.

韓明淑은 2000年度의 國政監査에서 環境部 에게 "새만금干拓地는 2011年 完工때까지 7億餘원이 더 드는 事業인데 經濟 收益이 保障되지도않는 狀況에서 그동안 들인 1兆餘원이 아깝다며 建設을 强行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새만금 事業 의 經濟性에 疑問을 提起했고, 勞使政委員會 에 週 5日制를 實施함과 더불어 週 5日 授業制, 餘暇施設 擴充 等을 함께 推進할 것을 要求했다. 또 京畿道 南漢江 整備事業에 前提된 무딘 環境 意識, 障礙人雇傭促進公團 이 就業을 斡旋한 障礙人들의 높은 이退職율, 半月시화工團의 높은 다이옥신 濃度, 急增하는 未成年者 不法雇用, 産業災害指定病院의 産災患者에 對한 診療費 過多청구, 公共機關의 國立公園 毁損 等을 指摘하여 뉴스메이커 , 文化日報 , 國監連帶 等이 各各 選定한 國政監査 베스트 議員으로 擧名되었고, 月刊 <말>지에 依해서도 國監스타 5人 中 하나로 뽑히었다. 또 法律聯盟 國監모니터團은 韓明淑을 國監優秀 議員으로 選定하기도 했다.

女聲部 長官 時節 [ 編輯 ]

政府組織法 의 改正과 함께 2001年 1月 29日, 韓明淑은 女性界의 오랜 宿願이었던 招待 女聲部 長官에 任命되었다. 當時 백경남 女性特委 委員長이 長官으로 有力視 되었으나, 김중권 民主黨 代表와 한광옥 靑瓦臺 祕書室長이 민주당內 人事를 重用하고자 韓明淑을 임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24] 當時 大部分의 女性團體들은 韓明淑의 長官 就任을 歡迎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韓國女性團體協議會 는 백경남 女性特委 委員長을 제치고 韓明淑이 任命된 것에 遺憾을 表示하였다. [25]

韓明淑은 女聲部 長官을 지내면서 自身이 發議한 母性保護法 通過에 決定的 役割을 했으며, 男女差別改善委員會를 통해 性戱弄에 對한 認識을 넓혔고 [26] , 戶主制 廢止에 앞장서 [27] 는 等 原則이 분명하게 일을 해냈다는 評을 받았다. [28]

母性保護法 發意와 國會 通過 [ 編輯 ]

韓明淑은 16代 國會議員이던 2000年 10月, 出産休暇를 90日로 擴大하고, 生理休暇, 有.死産 休暇, 胎兒檢診 休暇를 新設하며, 育兒 休職 給與를 導入하는 것을 뼈대로 한 勤勞基準法 , 男女雇傭平等法 , 雇傭保險法 에 對한 改正案(略稱 母性保護法)을 發議했다.

하지만 財界와 野黨의 反撥로 環境勞動委員會에서 漂流하게 되었으며, 이에 對해 民主黨 자민련 , 민국당 等 3黨은 2001年 4月 24日 國會에서 院內總務ㆍ政策委議長 連席會議를 갖고 施行을 2年 猶豫하는 條件으로 國會 通過를 合意하였다. [29] 하지만 이에 對한 非難輿論이 들끓자 3黨은 生理休暇와 有.死産 休暇, 胎兒檢診 休暇는 除外하는 條件으로 2001年 11月 1日부터 施行하는 案을 5月 10日에 合意하였으며, 結局 이 法案은 國會에서 7月 18日에 通過하였다.

하지만 母性保護法이 원안과 달라진 結果로 利用率이 低調하고 [30] 現實的으로 利用이 어려우며, 20萬원의 育兒 休職 給與는 事實上 別 도움이 안된다 [26] 는 指摘이 있었다. 이에 對해 主務 部處인 勞動部 는 2003年 30萬원, 2004年 40萬원으로 育兒 休職 給與를 引上하기도 하였다. [31] 그러자 이에 對해 韓國經營者總聯合會는 오히려 企業의 女性 雇傭 忌避 現象을 가져올 것이라며 反對하였다. [32]

環境部 長官 時節 [ 編輯 ]

2003年 2月 28日 盧武鉉 大統領 當選과 함께 參與 政府 의 初代 內閣 發表 前까지 韓明淑은 女聲部 長官으로 有力視 되었으나 [33] 結局 環境部 長官으로 拔擢된다. 大選 當時 競爭 候補들 中 環境 公約이 가장 保守的인 것으로 評價되었던 盧武鉉 候補의 環境 政策은 政權의 始作부터 憂慮를 낳았고 [34] 結局 核 廢棄場 論議에 排除되거나, [35] 새만금 事業 과 獨島 開發 特別法 等을 反對하며 다른 部署와 摩擦을 빚기도 하였다. [36] 結局 그는 "國務會議 等에서 環境政策을 支持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며 苦衷을 吐露하기도 했다. [37]

하지만 이런 中에서도 한명숙 長官이 이끄는 環境部 는 首都圈大氣環境改善에관한특별법안, 백두대간保護에관한법률, 野生動植物 保護法 等의 制定을 위해 앞장섰으며, 政府業務評價 最優秀 部處로 選定되기도 했다. [38] 特히 韓明淑은 中央日報의 長官리더쉽評價에서 1位에 選定되기도 하였다. [39] [40] [41] 韓明淑은 放送에 出演하여 上水道와 下水道도 區分하지 못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水質 얘기가 나오자 한 長官은 “植樹의경우 淨水場 물은 1級水인데 問題는 下水管渠가 老朽化해서...”라며 뜬금없이 下水管渠를 들먹였여, 環境 모르는 環境長官이라는 評을 받았다. 上水道와 下水道를 區分하지 못한 한 長官은 이날 “環境分野 專門家는 아니지만 요즘 熱心히 環境工夫를 하고 있다”고 自身을 辯護했다. [42]

政治 活動 [ 編輯 ]

17代 國會議員 時節 [ 編輯 ]

2004年 2月 15日 韓明淑은 17代 總選 에 出馬하고자 環境部 長官을 辭職하고 열린우리당 에 入黨한다. 3月 4日 京畿道 高陽市 일산구 甲選擧區에 公薦이 確定되어, 彈劾 의 主役인 한나라黨 5線 重鎭 홍사덕 總務를 相對로 4月 15日 選擧에서 勝利하고 17代 國會議員이 되었다. 當時 洪總務는 選擧 前 "내가 지면 政界를 隱退할테니 萬一 當選되면 盧武鉉 大統領이 辭退하라"며 盧武鉉 大統領과 自身의 選擧 結果를 聯關시켜 話題가 되기도 했었다. [43] 韓明淑은 當選 直後 "彈劾訴追案 可決 以後 國政秩序를 바로잡고 經濟回生에 注力하라는 住民들의 念願이 나타났다."고 所感을 밝혔다. [43]

韓明淑은 '眞實·和解를 위한 過去史 整理 基本法'에 對한 2005年 5月 國會 票決에서 贊成 黨論에도 不拘하고 한나라당과의 協商 過程에서 當初 內容이 後退했다며 棄權하는 等 過去事에 强勁한 立場을 보였으며, 自身의 홈페이지에 한나라黨 朴槿惠 當時 代表를 '獨裁者의 딸'이라며 批判하기도 했다. 또 2005年 쌀 協商 批准案의 國會 票決 때에는 黨論에 따라 贊成票를 던졌다. 2004年 자이툰 部隊 이라크 派兵 同意案 票決 때도 贊成했다. [44]

17代 國會 會期 동안 韓明淑은 統一外交通商委員會에 所屬되어 活動하면서 國家保安法 廢止 等을 위해 努力하였으며, 이 期間동안 黨 內에서는 新行政首都 建設特別委員會 委員長을, 家庭法院에서는 家事.少年制度改革委員會 委員長 等을 歷任했다.

열린우리당 常任中央委員 [ 編輯 ]

國會議員 當選 後 韓明淑은 黨議長으로 擧論되기도 했으나, 結局 열린우리당 內에서 靑瓦臺 의 國政 遂行을 支援하는 國政課題遂行特別委員會의 委員長으로 任命되었다. [45] 櫜鞬 國務總理의 後任으로 김혁규 國會議員이 擧論되던 中 6月 5日 再補選에서 慘敗하자 그 代案으로 擧論되기도 했으나, 6月 8日 李海瓚 議員이 먼저 總理 指名이 되었다. 當時 韓明淑을 總理에 指名하지 않은 것은 盧武鉉 大統領의 黨의 指導部였던 辛基南-千正培 體制에 對한 不信으로 인해 黨 內에 牽制勢力이 必要했기 때문이라는 意見도 있다. [46]

2005年 1月 2日, 열린우리당 李富榮 黨議長을 비롯한 指導部가 4代 法案 處理 不發에 책임지고 辭退하며 韓明淑도 함께 常任中央委員職을 辭退한다. 以後 새 指導部의 黨議長 候補로 文喜相 議員과 함께 이름이 擧論되다가 갑자기 議長 競選에 不出馬를 宣言한다. 이 渦中에 敎育副總理 物望에도 올랐으나 本人의 固辭로 除外되기도 한다. [47] 하지만 黨議長 競選에서 親鄭東泳側이 支持意思를 밝힌 뒤 다시 競選에 出馬하겠다는 意思를 밝혔으며, 이에 따라 朴映宣 , 金希宣 議員等 黨內의 女性 議員들은 모임을 갖고 한명숙 議員으로 候補를 單一化하기로 決定했다. 4月 3日 全黨大會 結果 文喜相 이 黨議長으로, 韓明淑은 4名의 常任中央委員 中 하나로 當選되었으나 "女性議員 1名을 常任中央委員會에 包含시킨다"는 黨規로 因해 排除投票가 行해진 結果 10.7%의 得票에 그쳐 그 意味는 退色되었다. [48] 特히 女性 代議員이 30%였다는 點에서 이런 得票率은 女性 票들마저 唯一한 女性 候補를 外面했다는 것으로 받아지기도 했다. [49]

2005年 4月 30日 再補選結果 열린우리당 은 5곳 모두에서 當選者를 내지 못했고, 이에 따라 韓明淑을 委員長으로, 柳時敏 을 副委員長으로 하는 黨革新委員會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人選이 理想主義에 對한 指導部의 同調라며 反撥한 염동연 議員은 常任中央委員에서 辭退했고, [50] 以後 염동연議員은 湖南忽待論을 主張하며 柳時敏議員이 主張한 期間黨員制에 對한 批判的인 視角을 보이 [51] 며 열린우리당 內部의 葛藤을 심화시켰다. 10月 26日 再選擧에서 4個의 前 選擧區에서 열린우리당이 敗北하자, 結局 2005年 10月 28日 文喜相 議長과 한명숙 議員 等 指導部는 6個月만에 電擊 辭退하게 되었다.

大韓民國 國務總理 [ 編輯 ]

2006年 3月 24日 노무현 大統領은 韓明淑을 李海瓚 前 總理에 이은 國務總理로 指名했다. 이는 장상 에 이은 두 番째 女性 總理 地名이었는데, 한나라黨 은 2006年 5月 31日의 地方選擧 를 공정하게 치르기 위해서 新任 總理는 黨籍을 버려야 한다고 主張하며 人事聽聞會 보이콧을 示唆하기도 했다. 한나라黨 國會議員 윤두환 은 人事 聽聞會 以前부터 對政府質問에서 "韓明淑 總理 指名者 男便은 大韓民國 顚覆을 企圖한 共産主義 組織의 核心이었다" [52] 며 攻擊하기도 했다.

2006年 4月 17日과 4月 18日 兩日間 이뤄진 한명숙에 對한 國會의 人事聽聞會에서 韓明淑의 黨籍 整理 問題와 國政 能力 및 이념적 偏向에 對한 疑問이 提起되었으나, 結局 4月 19日 國會의 任命 同意案이 可決되어 大韓民國 憲政 史上 最初의 女性 國務總理가 되었다.

任期 中 金秉準 副總理 兼 敎育人的資源部 長官의 去就 問題, 인터넷 로또 發行 取消 等 各種 懸案과 關聯해선 自己 목소리를 分明히 냈다는 評을 들었다. [53] 한便으로는 示威隊에 對한 彈壓을 傍觀했다는 指摘도 있다. [54]

2006年 10月 9日 北韓이 核實驗 을 强行하자 韓總理는 “包容政策이 核實驗을 막는 데 失敗했다고 自認한다.”며 “全般的인 抛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修正이 不可避한 狀況에 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對해 한완상 當時 赤十字 總裁는 "國務總理가 그런 말을 한 것 自體가 國民을 宏壯히 不安하게 한다."고 批判하기도 하였다.

2007年 1月 盧武鉉 大統領이 提案한 大統領 4年 連任制 改憲에 對해 韓明淑 總理는 改憲支援推進團을 構成하며 呼應했고, 이에 對한 國會의 批判에 예전과 다르게 攻擊的으로 對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對해 한나라黨 은 韓明淑의 달라진 모습에 大統領 選擧 候補로 나서기 위한 政治的인 움직임이라며 非難했다. [55]

2007年 3月 7日 韓明淑 總理는 退任하여 열린우리당 으로 돌아가면서 '앞으로 政治人으로서 나라의 發展과 國民의 幸福을 생각하며 일하겠다'는 便紙를 보냈다. 後任은 한덕수 總理다.

李海瓚과의 大選候補競選 單一化 [ 編輯 ]

열린우리당 으로 돌아온 뒤 韓明淑은 民主黨 과의 統合作業에 參與하는 同時에 大選 走者로 나서기 위한 準備作業을 進行했다. 2007年 3月 12日 金大中 前 大統領을 訪問한 자리에서 "흩어진 힘을 모으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겠다."는 말을 했으며, 3月 19日 "時代的 要請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回避하지 않겠다." [56] , 4月 12日 女性議員들과 만난 자리에서 "大選戰 뛰어들 確信 생겼다"며 [57] 大選 候補 競選에 參與할 것을 示唆했다. 이런 準備作業의 一環으로 한때는 自身이 熱心히 擁護했던 連任制 改憲에 對한 提案 撤回를 盧武鉉 大統領에게 要請하기도 했다.

當時 兩大 系派를 이끌 던 鄭東泳 , 김근태 는 5月 3日 黨을 解體하고 民主勢力이 統合되어야 한다고 主張하며 脫黨을 示唆했고, 盧武鉉 大統領은 이들이 湖南의 地域感情에 기대려는 것으로 判斷, "地域 政治는 湖南의 疏外를 고착시킬 것"이라며 이를 批判했다. 이런 渦中에 민주당 박상천 代表는 "노무현 大統領과 함께 總理나 長官을 하면서 政策決定을 한 사람, 黨議長을 지내면서 左偏向 路線을 固執한 사람들과는 統合하지 않겠다."며 韓明淑을 包含한 열린우리당 指導部와의 電擊的인 統合을 拒否했고, 5月 21日 柳時敏 長官이 辭退를 하고 黨으로 돌아오면서 混亂은 더 深化되었다. 이런 渦中에 李海瓚 은 3月, 김혁규 는 5月 訪北하기도 했고, 韓明淑은 4月 러시아를 弔問使節로 訪問하는 等 大選 豫備 走者로서의 活動을 보였다.

6月 12日 김근태가 大統合勢力의 밀알이 되겠다며 脫黨과 大選 不出馬를 宣言하고 한명숙 等을 呼名하며 競選의 參加를 要求하였고, 6月 14日 孫鶴圭 를 만나 平和改革勢力의 統合을 要求하는 等의 行步를 보였다.

6月 18日 韓明淑은 大選 競選 參加를 宣言한다. 當時 大選 參加를 宣言했던 汎與圈 候補들은 金斗官 · 金榮煥 · 金元雄 · 김혁규 · 문국현 · 孫鶴圭 · 辛基南 · 柳時敏 · 李仁濟 · 李海瓚 · 鄭東泳 · 秋美愛 · 千正培 ·한명숙 等 14名이었는데, 이 中 李海瓚, 韓明淑, 柳時敏, 김혁규는 親盧 系列 大選 走者로 認識되었다. [58] 그러나 韓明淑은 "나를 ‘親盧’로 分類한 것은 言論"이라며 親盧라는 範疇化에 異議를 提起했다. [59]

7月 4日 孫鶴圭·정동영·이해찬·한명숙·천정배·김혁규의 6人이 김근태 의 主導로 6人 連席會議를 가지고 國民競選 參與와 大統合新黨創黨 의 參與를 決意했다. 8月 4日 大統合民主新黨은 代表없는 混亂속에 創黨하였고, 이 創黨大會에 열린우리당쪽 大選 候補들은 參加하지 않았다.

8月 7日 韓明淑은 親盧走者間 候補單一化를 提案했다. 韓明淑은 孫鶴圭 를 必敗카드라 規定하며, 이를 牽制하기 위해 "可及的 豫備競選 以前에 韓明淑, 李海瓚, 柳時敏 等 세 走者가 輿論調査를 통해 ‘3字 候補 單一化’를 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세 候補는 모두 各各 豫備 競選에 登錄했고, 豫備 競選을 위한 討論會에서 韓明淑은 參與政府 失敗論에 對해 "同意하지 않는다."며 "疏通에 있어선 과(過)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깨끗한 選擧를 만들었고, 國家均衡發展度 이뤘다. 政經癒着의 고리가 없어지고, 權威主義가 解體됐다"고 主張했다. 9月 5日 豫備競選에서 韓明淑은 9名 中 5位 (9.42%)로 豫備 競選을 通過하였으나, 이런 低調한 得票率은 黨 안팎의 關心이 李海瓚-柳時敏 競爭構圖로 쏠리면서 相對的으로 損害를 본 것으로 解釋되기도 하였다. [60]

5名의 候補로 本競選이 始作된 뒤, 各各 豫備競選 3, 4, 5位이던 李海瓚 , 柳時敏 , 韓明淑은 各自 自身으로 單一化되어야 한다고 主張하며, 1, 2位이던 孫鶴圭 , 鄭東泳 을 討論會를 통해 攻擊하였다. 9月 14日 韓明淑候補는 結局 이해찬候補로 單一化를 宣言하면서 "유시민 候補도 結局 單一化를 통해 正統性이 있는 候補가 勝利하는 大義에 合流하게 될 것"이라며 유시민 候補의 單一化를 促求했다. 柳時敏은 "다른 候補가 李明博 候補를 꺾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돕겠지만, 確信이 서지 않는다. 黨內 大勢論을 먼저 뒤엎어야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며 否定的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9月 15日 結局 柳時敏 亦是 李海瓚과 單一化를 宣言했고, 이에 對해 一角에서는 [ 누가 ?]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 아니냐"며 靑瓦臺 의 介入論을 提起하기도 했다. 그러나 單一化에도 不拘하고 李海瓚은 10月 16日 鄭東泳에 大統領 候補 자리를 넘겨주었다.

18代 國會議員選擧 落選 및 그 以後 [ 編輯 ]

大選 敗北 以後 大統合民主新黨 은 指導部 構成을 놓고 葛藤을 빚었다. 2008年 1月 10日 孫鶴圭 가 代表로 選出되자 親盧系列로 分類되던 李海瓚 , 柳時敏 은 韓明淑의 挽留에도 不拘하고 大統合民主新黨에서 脫黨한다. [61] 結局 韓明淑은 大統合民主新黨에 남았고, 3月 10日 高陽市 一山東區 選擧區(舊 일산구 甲選擧區)에 大統合民主新黨의 候補로 公薦을 받게된다.

高陽 一山 甲 選擧區에서는 李明博 大統領의 引受위 行政室長을 지냈던 백성운 과 競爭하였는데, 이 곳은 盧武鉉 政府와 李明博 政府의 象徵的 對決場으로 비춰졌다. [62] 總選을 19日 앞둔 輿論 調査結果 韓明淑이 백성운보다 約 10% 높은 支持率을 보였으나 [63] , 選擧 사흘 前 韓明淑의 選擧運動員이 地域 社會團體長과 저녁食事를 한 뒤 "잘 付託한다"며 飮食값을 낸 嫌疑로 不拘束 立件되었다.

結局 43.8%의 支持率을 얻은 韓明淑은 47.1%의 支持率을 얻은 백성운에게 敗北하였다. 이런 薄氷의 勝負를 두고 李明博은 백성운에게 "죽다 살아났지"라고 하기도 했다. [64]

以後 2009年 4月 29日 再補選 을 앞두고 韓明淑은 김근태 와 함께 民主黨 洪永杓 候補를 支援하기 위한 共同選擧對策委員長을 맡는다. 選擧 運動 中에 韓明淑은 金大中 前大統領이 公薦 脫落에 反撥해 脫黨한 鄭東泳 新件 을 가리켜 "이番 選擧는 반드시 민주당이 勝利해야 한다. 無所屬 한두 名이 當選돼 復黨하는 것은 아무 意味가 없다"고 말한 것을 傳達하였다. 結局 洪永杓 候補는 選擧에서 勝利하였으나, 民主黨은 全北에서 정동영 候補와 新件 候補에 모두 敗北하였다.

第16代 大統領 盧武鉉 國民葬 共同葬儀委員長 [ 編輯 ]

2009年 5月 23日 盧武鉉 大統領의 逝去 以後 遺族들은 國民葬 을 치르기로 決定했고, 이에 따라 參與政府 에서 國務總理 로 일했던 韓明淑은 政府 側의 한승수 國務總理와 더불어 遺族 側의 共同掌醫委員長을 맡았다. 韓明淑은 5月 29日 노무현 大統領의 永訣式에서 調査를 朗讀했다. [4] [65]

뒤이어 2009年 9月 發足된 財團法人 사람사는세상 盧武鉉財團 의 初代 理事長職을 2010年 4月까지 맡았다.

賂物罪 嫌疑 [ 編輯 ]

2009年 12月, 韓明淑은 지난 2007年 總理 在職 時 이미 拘束收監된 곽영욱 前 大韓通運 社長에게 人事請託으로 5萬달러를 받은 嫌疑로 檢察 搜査를 받게되었다 ( 서울中央地檢 特需2部 部長 권오성 ). 그는 檢察의 搜査에 對해 不當한 搜査라고 主張하면서 召喚에 應하지 않던 中 逮捕 令狀이 發付돼 같은 달 18日 노무현 財團에서 逮捕되었고, [66] 調査過程에서 곽영욱과의 對質訊問 等이 이어졌으나 韓明淑은 默祕權을 行使하였다. [67]

一部에서는 檢察이 곽영욱의 內部者 情報를 利用한 不法 株式去來 嫌疑에 對해 無嫌疑 處理로 終結한 것과 關聯해 一角에서는 韓明淑 總理에 對한 陳述을 두고 檢察과 곽영욱 間의 去來가 있지 않았느냐는 疑惑이 提起되었으며, [68] 한명숙에 對한 公判準備期日에도 辯護人團은 곽영욱에 對한 搜査와 關聯해 檢察이 搜査記錄을 提示할 것을 要求했으나, 檢察은 "본 事件과는 關係없는 別件이므로 檢察 內部 文書까지 公開할 수 없다"며 拒否意思를 밝혔다. [69]

곽영욱은 2次 公判부터 檢察側 證人으로 나와 證言을 했다. 하지만 檢察에서 한 陳述과 달리 5萬 달러를 直接 건네지 않고 나오면서 椅子에 놓고 나왔다고 證言했으며, 1~2時까지 繼續되는 檢察의 搜査가 心臟病 患者인 自身에게 너무 苛酷해 生命의 威脅까지 느꼈다고 말했다. [70] 3次 公判에서 檢察은 2002年 韓明淑이 長官 在職 時 곽영욱이 韓明淑에게 998萬원 相當의 골프채를 膳物해주었다는 主張을 펼쳤으나, 裁判長은 곽영욱에게 "膳物을 건넸다는 날이 水曜日인데, 長官이 平日 勤務時間에 골프賣場에 가서 골프채를 膳物 받은 게 異常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곽영욱은 "모르겠다"고 答했다. 4次 公判에서 韓明淑의 辯護人團은 곽영욱 陳述의 信憑性을 問題 삼았다. 特히 額數와 關聯해, 2009年 11月 9日 3萬달러를 줬다고 했다가 11月 19日에는 준 적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5萬달러로 바뀌게 된 經緯를 追窮했다. [71] 檢察의 無理한 搜査에 對한 批判이 提起되기도 하였다. 自由先進黨 李會昌 代表는 "매우 拙劣하다", "結果는 나와봐야 하겠지만 宣告를 앞두고 檢察이 別件 搜査를 發表한 것은 法官의 心證에 影響을 미치려는 것이라고 疑心받기에 充分하다"며 檢察을 批判했다. [72] 4月 9日, 이 事件의 1審 裁判 結果 한명숙에 對해 無罪가, 곽영욱에게는 橫領 嫌疑로 懲役 3年刑이 宣告되었다. 裁判部는 곽영욱의 陳述의 一貫性 不足을 指摘하며 "合理的인 疑心을 排除할만한 信憑性이 缺如"되었다고 判斷했고, 檢事가 提出한 나머지 證據 亦是 이런 疑心을 解消하기 不充分했다고 判決했다. [73] 以後 進行된 裁判에서도 證人들이 隨時로 말을 바꾸고 陳述을 飜覆하면서 證言에 信憑性이 全혀 없는 狀況에서 檢察이 起訴했다는 指摘이 提起되고 있다. [74] 2審에서 無罪를 宣告받고 [75] 2013年 3月 大法院에서 無罪 確定 判決을 받았다.

政治資金法 違反 [ 編輯 ]

韓明淑은 2007年 3~8月 세 次例에 걸쳐 한만호 前 한신건영 代表에게서 不法 政治資金 9億餘원을 받은 嫌疑로 2010年 7月 不拘束 起訴됐다.

2011年 10月 31日 서울중앙지법 刑事合議27部(김형두 部長判事)는 無罪를 宣告했다. [76]

다시 檢察이 抗訴를 하여 2013年 9月 16日 서울高等法院 刑事6部(部長判事 정형식)가 懲役 2年과 追徵金 8億8000餘萬원을 宣告했다. 該當 裁判에서는 한 前 代表의 陳述에 信憑性이 있다고 判斷하였다. [77] 한 前 代表가 1次 資金을 造成할 때 包含됐다고 말한 1億원 짜리 手票를 한 議員의 동생이 傳貰金으로 使用한 點도 한 前 代表가 檢察 調査 當時 했던 陳述의 信憑性을 높였다.

2015年 8月 20日 大法院 全員合議體(主審 이상훈 大法官)는 建設業者 한만호로부터 不法政治資金 9億원을 받은 嫌疑로 不拘束起訴된 한명숙 前 總理에 對한 上告審에서 原審 判決대로 懲役 2年刑을 確定했다. 大法院은 韓 議員이 이 돈을 한 前 代表에게서 받아 동생에게 줬다고 보는 것이 經驗則에 符合한다고 指摘하였다. 以後 有罪確定이 進行되어 韓明淑은 議員職을 喪失했다. 韓明淑 不法政治資金 事件은 起訴 5年만에, 大法院 上告審 2年만에 마무리됐다. [78]

第5回 地方選擧 落選 [ 編輯 ]

大韓通運 祕資金 疑惑을 벗고 난 以後, 韓明淑은 2010年 4月 21日 서울特別市 市長 選擧에 出馬할 것을 公式 宣言하였다. [79] 2010年 5月 6日, 100% 輿論調査로 이루어진 민주당 競選에서 이계안 前 國會議員에게 勝利하여 民主黨 서울特別市葬 候補로 出馬하게 되었다. [80] 서울特別市葬 選擧에 落選했다.

2010年 以後 [ 編輯 ]

韓明淑은 國會女性政策포럼 顧問과 大寒跆拳道聯盟 拷問으로 委囑되었으며, 그밖에 戰爭科女性人權博物館 建立委員, (假稱)民主化運動共濟會 設立發起人, 社團法人 유엔人權政策센터 理事, 아줌마가키우는연대 諮問委員, 民主統合黨 代表 等으로 活動했다. 그러나 第19代 國會議員 選擧 敗北에 對한 責任을 지고 2012年 4月 13日, 民主統合黨 代表最高委員職에서 물러나 評議員 身分으로 活動하였으나, 2015年 大法院에 依해 政治資金法 違反으로 最終判決되어 矯導所 에 收監되었다.

著書와 論文 [ 編輯 ]

著書 [ 編輯 ]

  • 첫째도 敎育 둘째도 敎育 (圖書出版 밈, 2007.08.30)
  • 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김영사, 2007.08.10)
  • 韓明淑: 부드러운 熱情 世上을 품다 (幸福한책읽기, 2010.02.25)

韓明淑拘束

賞勳 經歷 [ 編輯 ]

  • 1995年 淸朝勤政勳章
  • 1998年 7月 3日 國民褒章(女性地位向上과 男女平等促進에 寄與)
  • 2001年 7月 國軍看護士官學校 總同門會 感謝牌

學歷 [ 編輯 ]

主要 略歷 [ 編輯 ]

  • 1974年 韓國크리스천아카데미 幹事
  • 1977年 韓國신학대學校(現 한신대학교 ) 講師
  • 1986年 이화여자대학교 女性學科 講師
  • 1988年 誠心女子大學校(現 가톨릭대학교 ) 女性學科 講師
  • 1989年 韓國女性民友會 會長 (~1994年)
  • 1990年 韓國女性團體聯合 副會長
  • 1993年 韓國女性團體聯合 共同代表
  • 1996年 韓國女性團體聯合 10周年記念事業委員長
  • 1996年 韓國女性團體聯合 指導委員
  • 1997年 父母姓 함께쓰기 宣言文 代表團
  • 1999年 參與連帶 共同代表
  • 1999年 美國 뉴욕 유니온神學大學校 客員硏究員
  • 2000年 새千年民主黨 第16代 總選選擧對策委員會 副本部長
  • 2000年 第16代 國會議員(새천년민주당, 全國區)
  • 2000年 새千年民主黨 女性委員長
  • 2001年 女聲部 長官
  • 2003年 環境部 長官
  • 2004年 열린우리당 常任中央委員
  • 2004年 第17代 國會議員(열린우리당, 高陽 一山東區)
  • 2004年 열린우리당 選擧對策委員會 共同委員長
  • 2004年 家庭法院 家事少年制度改革委員會 委員長(~2005年)
  • 2004年 國政課題推進特別委員會 會長(~2005年 5月)
  • 2005年 黨革新委員會 委員長(~2005年 7月)
  • 2006年 4月 20日 ~ 2007年 3月 6日 第37代 國務總理
  • 2009年 사람사는세상 盧武鉉財團 初代 理事長(~2010年 4月)
  • 2012年 民主統合黨 代表最高委員(~2012年 4月)
  • 2014年 새정치민주연합 代表最高워院

現職 [ 編輯 ]

  • 아줌마가키우는연대 諮問委員

事件 [ 編輯 ]

檢察 搜査 論難 [ 編輯 ]

不法 政治資金 關聯 疑惑을 搜査하는 過程에서 檢察이 出國禁止 한 것으로 알려진 人物은 한명숙 前 總理의 側近으로 分類되는 金 모였다. [81] 檢察은 지난 2007年 建設業體 前 代表 한 某 氏가 한 前 總理에게 건넸다는 9億餘 원을 管理하는데 金 氏가 깊이 關與한 것으로 보고 있다. [81] 金某는 한 前 總理의 議員 在職 時節 祕書를 지냈으며, 總理 公館에서도 일했던 것으로 傳해졌으며 또, 곽영욱 前 社長에게서 5萬 달러를 받았다는 疑惑 搜査 裁判 過程에서 擧論되기도 했다. 때문에 建設業體 한 前 代表와 한명숙 前 總理를 連結하는 核心 人物로 指目돼 왔다. [81]

그 동안 別件 搜査라며 크게 反撥했던 한 前 總理 側은 檢察에 對한 攻勢 水位를 더욱 높였다. [81] 한 前 總理 側은 "檢察이 反省과 省察은커녕 捏造된 企劃·造作 搜査를 벌이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어 "檢察이 곽영욱 前 社長 裁判 때와 똑같이 피의 事實을 公表하고 있다"며 刑事 告訴하겠다고 警告했습니다. [81] 以後 서울市長 選擧로 搜査는 一旦 뒤로 미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뉴스로 報道되었다. 다음날인 4月 14日 한명숙 前 國務總理가 檢察을 告訴하고 一部 言論을 相對로 民事 訴訟을 提起하기로 했다. [82] 한명숙 前 總理 共同對策委員會는 14日 "檢察이 反省과 省察은커녕 捏造된 企劃·造作 搜査로 다시 '第2의 韓明淑 죽이기'에 나섰다"며 이같이 밝혔다. [82]

共對委는 이어 檢察이 "곽영욱 裁判 때와 똑같이 拘束된 詐欺犯에 對한 强壓脅迫으로 事件을 捏造하고, 亦是 不法的으로 被疑事實을 言論에 흘리는 方法으로 政治工作을 하고 있다"고 指摘했다. [82]

조선일보, 東亞日報 告訴 論難 [ 編輯 ]

韓明淑 檢察 搜査와 關聯 韓明淑共同對策委員會는 2010年 4月 14日 한명숙 前 國務總理에 對한 檢察의 別件搜査와 關聯, "被疑事實을 公表한 檢察을 刑事告訴 할 것"이라고 밝혔다. [83] 共對委는 이날 午後 報道資料를 내고 "檢察이 公表한 被疑事實을 그대로 報道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等 言論社를 相對로 今明間 名譽毁損으로 인한 損害賠償 訴訟을 提起하겠다"며 이같이 警告했다. [83] 共對委는 "檢察의 不法에 同調하는 報道를 繼續한다면 不可避하게 法的 措置를 取할 수 밖에 없다"며 "言論의 '받아쓰기'는 事實과 眞實 萬 報道해야 할 言論의 責任과 使命에 對한 明白한 職務遺棄 行爲"라고 批判했다. [83]

共對委는 또 "더욱 深刻한 것은 言論이 아무런 檢證 없이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無分別한 報道가 繼續될 境遇 法이 保障한 權利에 따라 분명하고 斷乎한 措置를 取할 것"이라고 警告했다. [82] 이에

그러나 朝鮮日報 東亞日報 에서 記事 報道를 繼續하자 法院에 訴訟을 提起한다. 法院 에서 5月 9日 지난 4月에 東亞日報 쪽에서 報道한 記事에 對한 取材源 公開를 要求해 結果가 注目된다. [84]

한명숙 前 總理가 "'數萬 달러 收受 疑惑' 報道로 名譽를 毁損당했다"며 조선일보와 取材記者, 國家를 相對로 낸 10億원의 損害賠償 請求訴訟에서 原告 敗訴 判決한 原審을 確定했다. [85] 2009年 12月4日子에 檢察이 곽영욱 前 大韓通運 社長으로부터 "한 前 總理에게 2007年 무렵 數萬 달러를 건넸다"는 陳述을 確保해 代價性 與否를 搜査 中이라는 內容을 報道한 것 等으로 한 前 總理는 "檢察이 被疑事實을 公表했고, 조선일보도 虛僞事實을 報道해 名譽를 毁損했다"며 朝鮮日報 를 相對로 訴訟을 냈다. [85] 그러나 朝鮮日報 關聯 1審 裁判部는 "檢察이 關聯內容을 提供했다는 證據가 없고, 조선일보는 賂物疑惑 搜査 進行狀況을 傳達했을 뿐 虛僞報道로 보기 어렵다"며 原告 敗訴 判決했고, 2審에서도 한 前 總理의 抗訴를 棄却했다. [85] 2012年 1月 6日 東亞日報 相對 損害賠償 訴訟에서도 敗訴했다. [86]

賂物罪 嫌疑 [ 編輯 ]

2009年 12月, 韓明淑은 지난 2007年 總理 在職 時 이미 拘束收監된 곽영욱 前 大韓通運 社長에게 人事請託으로 5萬달러(當時 換率로 4500萬원 程度)를 받은 嫌疑로 檢察이 起訴하였으나 無罪 判決을 받았다.

檢察側 證人으로 나온 곽영욱은 檢察에서 한 陳述과 달리 5萬 달러를 直接 건네지 않고 나오면서 椅子에 놓고 나왔다고 證言했으며, 1~2時까지 繼續되는 檢察의 搜査가 心臟病 患者인 自身에게 너무 苛酷해 生命의 威脅까지 느꼈다고 말했다. [70] 3次 公判에서 檢察은 2002年 韓明淑이 長官 在職 時 곽영욱이 韓明淑에게 998萬원 相當의 골프채를 膳物해주었다는 主張을 펼쳤으나, 裁判長은 곽영욱에게 "膳物을 건넸다는 날이 水曜日인데, 長官이 平日 勤務時間에 골프賣場에 가서 골프채를 膳物 받은 게 異常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곽영욱은 "모르겠다"고 答했다. 4次 公判에서 韓明淑의 辯護人團은 곽영욱 陳述의 信憑性을 問題 삼았다. 特히 額數와 關聯해, 2009年 11月 9日 3萬달러를 줬다고 했다가 11月 19日에는 준 적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5萬달러로 바뀌게 된 經緯를 追窮했다. [71]

2010年 4月 9日, 1審 判決에서 韓明淑은 無罪를 宣告받았다. 裁判部는 곽영욱의 陳述의 一貫性 不足을 指摘하며 "合理的인 疑心을 排除할만한 信憑性이 缺如"되었다고 判斷했고, 檢事가 提出한 나머지 證據 亦是 이런 疑心을 解消하기 不充分했다고 判決했다. [73] 以後 進行된 裁判에서도 證人들이 隨時로 말을 바꾸고 陳述을 飜覆하면서 證言에 信憑性이 全혀 없는 狀況에서 檢察이 起訴했다는 指摘이 提起되고 있다. [74] 2012年 1月 13日 韓明淑은 2審 判決에서도 無罪를 宣告받았고 [75] 2013年 3月 14日, 最終的으로 大法院에서 無罪 確定 判決을 받았다. [87]

政治資金法 違反 [ 編輯 ]

1審 判決 無罪 [ 編輯 ]

檢察의 別件搜査에 依해 한만호 前 한신건영 代表로부터 不法 政治資金 9億4000餘萬원을 받은 嫌疑로 起訴된 韓明淑은 最後陳述에서 "檢察의 起訴는 서울市長 出馬를 막거나 落選시킬 意圖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賂物嫌疑 裁判에서 無罪判決이 내려지기 하루 前날 政治資金法 足鎖를 채웠고 0.6% 差異로 選擧에서 졌기에 結果的으로 檢察의 意圖는 成功했다"며 無罪를 主張했다. 이어 "韓氏의 돈을 받은 적이 없다. 돈을 받았다는 2007年에는 韓氏를 만난 적이 없으며, 認知度가 높은 政治人으로서 國會 會期 中에 運轉士도 따돌리고 直接 運轉을 해서 1億원의 高額手票를 받았다는 等의 公訴事實이 可能한 일인지 常識으로 理解가 되지 않는다"고 强調했다. 또 "2年 前 國民에게 했던 `人生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는 말은 只今도 有效하고, 良心의 法廷에서 如前히 저는 自由"라며 "裁判過程에서 무엇보다 檢察 改革이 必須的임을 切感했다"고 덧붙였다. 2011年 10月 31日, 1審判決에서 無罪를 받았다. [88] 裁判部는 한 前 代表의 檢察 陳述에 對해서는 “强壓 搜査가 없었다고 是認했지만, 陳述 同期에 利害 關係가 介入돼 있어 虛僞 陳述 餘地가 있다.”고 判斷했다. 한만호 前 한신건영 代表가 빼앗긴 會社를 찾으려는 目的으로 檢察에 虛僞 陳述을 했다고 본 것이다. 法廷에 와서 ‘돈을 事業 目的으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거나 個人 用途로 使用했다.’고 바꾼 陳述도 믿지 않았다. [89]

裁判部는 1. 한 前 總理와 한 前 代表의 親分關係 2. 携帶電話 番號 入力時期 3. 집과 집 近處 道路로 特定된 政治資金 供與 場所 等에 對한 檢察 搜査의 客觀性 問題를 提起했다. 먼저 3次例에 나눠 집과 집 近處 道路에서 돈을 傳達한 場所에 對해 疑心이 든다고 밝혔다. 裁判部는 “韓氏와 韓 前 總理는 宗親이라는 것, 地域區 事務室의 賃貸·賃借人 사이라는 것, 앞서 韓氏의 父親과 食事를 한 番 했다는 水準의 親分인데 집에 直接 찾아가 政治資金을 提供했다는 것에 對해 疑問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巨額의 不法 政治資金을 받는 사람이라면 心理的으로 不安했을 것인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道路에서 받는다는 것이 語塞하다.”고 解釋했다. [89]

結局 2011年 10月 31日, 서울중앙지법 刑事合議27部(金祐鎭 判事)는 無罪를 宣告한다. [76]

2審 判決 (抗訴審) 有罪 [ 編輯 ]

다시 檢察이 抗訴를 하여 2013年 9月 16日, 서울高等法院 刑事6部(정형식 部長判事)는 한명숙 前 國務總理에게 無罪를 宣告한 原審을 깨고 懲役 2年과 追徵金 8億8千餘萬원을 宣告하였다. 裁判部는 "公訴事實의 直接證據인 한萬戶의 檢察陳述이 原審에서 飜覆됐더라도 다른 證據들에 依해 信憑性이 認定된다"며 有罪로 認定했다. 證據로 採擇된 한만호 前 한신건영(建設業) 代表의 陳述에 對한 信憑性을 認定한 것이다. 다만 1審 判決에서 無罪가 宣告된 點, 現職 國會議員인 點 等을 考慮해 法廷拘束하진 않았다. [90]

大法院 懲役 2年 有罪 判決 [ 編輯 ]

2015年 8月 20日 大法院 全員合議體(主審 이상훈 大法官)는 建設業者 한만호로부터 不法政治資金 9億원을 받은 嫌疑로 不拘束起訴된 한명숙 前 總理에 對한 上告審에서 原審 判決대로 懲役 2年刑을 確定했다. 有罪가 確定돼 韓明淑은 議員職을 喪失했다. 韓明淑 不法政治資金 事件은 起訴 5年만에, 大法院 上告審 2年만에 마무리됐다. 韓明淑은 서울拘置所에 收監된 뒤 受刑者 等級에 따른 分類 過程을 거쳐 矯導所 로 移送된다. [78]

동생의 不法政治資金 關聯 疑惑 [ 編輯 ]

한만호에게서 받았다는 資金 中 一部가 그의 동생에게로 흘러들어갔다는 疑惑도 提起되었다. [91] 2011年의 裁判 過程에서 韓明淑의 女同生이 아파트 傳貰資金으로 使用한 手票 1億원의 出處를 두고 法廷에서 熾烈한 攻防이 펼쳐졌다. 檢察은 동생이 傳貰資金으로 쓴 手票 1億원이 한만호 前 한신건영 代表가 한 前總理에게 건넨 것으로 推定되는 9億餘원의 政治資金 中 一部라는 疑惑을 提起해 왔다. [91] 韓明淑이 수수한 資金 中 一部가 그의 女同生의 傳貰 資金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刑事合議22部(金祐鎭 部長判事) 審理로 열린 公判 證人으로 出席한 한 前總理의 女同生 한모 氏는 "移徙 費用을 마련하기 위해 언니를 통해 서로 알고 지내던 金某(51.女)氏에게 빌렸다가 갚은 돈"이라며 "出處는 알지 못했다"고 主張했다. 女同生 韓氏는 "傳貰資金 때문에 定期 積金을 깨면 損害가 날 것 같다고 말했더니 金氏가 1億원을 잠깐 빌려쓰라고 해 手票를 받게 됐으며 該當 手票가 한신건영의 系列社에서 나온 돈이라는 事實은 나중에 言論 報道를 보고 알았다"고 말했다. 特히 韓明淑의 辯護人은 한 某氏가 1億원을 手票로 빌리고, 手票로 거슬러주고, 갚을 때도 現金을 手票로 바꿔서 手票로 준 點을 들며 "不法 수수한 現金을 追跡하기 쉬운 手票로 바꾸어 使用하는 犯罪者가 世上에 어딨냐?"고 主張했다. [91]

檢察은 또 "數十萬원의 利子損害가 아까워 定期預金을 解止하지 않고 한 前 總理의 側近인 金某氏에게 傳貰資金 一部를 빌렸다는 韓氏가 平素 自身이 課外 等 아르바이트를 통해 번 돈을 집에 現金으로 모아둔다고 主張하고, 甚至於 美國에 滯留하는 동안 빈집에 數千萬원의 現金을 그대로 保管하기도 했다고 말하는 것은 理解할 수 없다"고 强調했다. [92]

이에 檢察은 當時 積金을 解止했을 境遇 發生하는 損害는 單 12萬원 뿐이었고(변호인은 利子 損害가 70萬원이라고 反駁함) 2009年 2月 全 世界藥이 이뤄질 當時 韓氏의 總 財産이 傳貰金을 내기에 充分했던 點 等을 들어 1億원을 金氏에게서 빌렸다는 主張을 納得하기 어렵다고 反駁했다. 檢察은 또 昨年 6月 1億원 手票에 對한 疑惑이 言論에 報道된 뒤 韓氏가 서울地域 한 銀行支店에 찾아가 該當 手票의 寫本을 發給받고서 언니인 한 前 總理와 만나 問題를 議論한 經緯도 캐물었다. [91]

韓氏는 "課外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子女敎育費 等으로 쓰고 남는 것은 現金으로 집에 保管해 쌓인 돈이 꽤 많았다"며 "그건 나만의 돈管理 方法일 뿐이고 언니돈을 管理한 적이 全혀 없다"고 맞섰다. 하지만 韓氏는 "쌓인 現金을 집 어디에 保管하느냐, 金庫가 있느냐, 發行한 手票가 곽영욱 前 大韓通運 社長이 發行한 手票와 함께 某 政治人計座로 함께 入金된 理由는 무엇인가" 等의 檢察追窮에는 證言을 拒否했다. 韓氏는 "내가 여기 온 理由는 내가 金氏에게 빌려 쓴 1億원券 手票에 對한 언니의 抑鬱함을 풀어주기 위함인데 무슨 犯罪嫌疑가 있는 양 資金源을 대라느니하며 몰아세우는 것은 理解할 수 없다"며 "檢事가 繼續 쏘아 봐 劫迫당하는 것 같아 힘들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前 總理의 辯護人들은 "向後 去來內譯이 드러나는 手票로 돈洗濯을 했다는 檢察主張은 理解할 수 없다"고 主張했다. [92] 韓明淑의 女同生 韓氏는 卽 手票에 對한 疑惑이 提起됐다면 1億원을 빌려준 金氏를 찾아가는 것이 자연스런 일인데도 언니를 바로 찾아갔고 이는 한 前 總理에게서 直接 돈을 받은 것이라는 疑心을 들게 한다는 것이다. [91]

5月 30日의 裁判에서 韓明淑의 側近이자 함께 起訴된 金 某氏는 한 前 總理 女同生에게 1億원을 빌려준 것은 個人 去來로 한 前 總理는 알지 못했다고 主張했다. 30日 서울중앙지법 刑事合議22部(部長判事 김우진) 審理로 열린 한 前 總理의 9億 不法 政治資金 收受 嫌疑(政治資金法 違反)에 對한 13次 公判에서 金氏는 "한만호氏로부터 3億원을 빌린 것은 個人的 必要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93]

金氏는 "男便이 事業을 擴張하고 싶어해 韓氏로부터 3億원을 빌려 집에서 保管하고 있었다"면서 "男便이 事業을 擴張하지 않게 되면서 欌籠에 保管하고 있던 現金 2億원을 돌려줬고 지난해 4月에 이런 事實을 한 前 總理에게 말했다"고 主張했다. [93] 이어 金氏는 "나머지 1億원은 手票로 冊床 서랍에 保管하고 있다가 한 前 總理의 女同生에게 빌려줬고 보름이 안 돼 돌려받았다"면서 "이런 事實은 지난해 6月에 한 前 總理에게 말했고 個人 去來였기 때문에 말할 必要性을 느끼지 못했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檢察은 "한 前 總理 女同生은 自身이 빌린 1億원의 出處가 韓氏라는 것이 言論에 報道된 以後에도 金氏를 만나거나 連絡하지 않았다"면서 "한 前 總理로부터 1億원을 받았기 때문에 金氏와 連絡할 必要가 없었던 것"이라고 主張했다. [93]

기타 論難 [ 編輯 ]

2011年 5月의 裁判에서 한 前 總理 辯護人은 公訴提起 後 繼續되는 檢察의 一方的 搜査, 謄寫要求 拒否 等에 對한 問題點을 指摘했다. 檢察은 "한 前 總理 동생 等이 어떤 陳述을 할지 모르는 狀況에서 證言을 彈劾하기 위해서였다."고 主張했다.

말 바꾸기 論難 [ 編輯 ]

한명숙 代表는 參與政府 時節 韓美 自由貿易協定 , 濟州 海軍基地 를 積極的으로 推進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李明博 政府 에서는 該當 政策들에 對해 反對하는 行步를 보여 새누리黨 等 他 正當 들에게 批判을 받았다. [94]

太極旗 關聯 論難 [ 編輯 ]

韓明淑 前職 國務總理가 2011年 5月 23日에 施行된 盧武鉉 前職 大統領 逝去 2周年 追悼式에서 太極旗 를 밟고 올라가 獻花한 事件이 있었다. 이를 두고 國家 象徵에 對한 冒瀆이라는 批判을 받았다. [95]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2000年 總選 16代 國會議員 比例代表 새千年民主黨 6,780,625 票
35.90%
比例代表 5番 初選
2004年 總選 17代 國會議員 京畿 高陽市 일산구 甲 열린우리당 48,286 票
49.00%
1位 再選
2008年 總選 18代 國會議員 京畿 高陽市 一山東區 統合민주당 37,902 票
43.83%
2位 落選
2010年 地方 選擧 34代 市場 서울特別市 民主黨 2,059,715 票
46.83%
2位 落選 民選 5期
2012年 總選 19代 國會議員 比例代表 民主統合黨 7,777,123 票
36.45%
比例代表 15番 3選

家族 關係 [ 編輯 ]

1967年 24歲에 박성준 과 結婚하여 아들 박한길을 두고 있다. 박성준 성공회대학교 NGO 平和學 敎授로, 現在 서울 통인동의 길淡書院을 運營하고 있으며 韓明淑과 함께 1968年 통일혁명당 事件 과 關聯, 實刑을 宣告받았었다. 當時 朴 氏는 1審에서 懲役 15年, 資格停止 15年을 宣告받고 이듬해 大法院에서 刑이 確定됐다. 檢察은 박성준氏에게 國家保安法 違反, 內亂陰謀, 反共法 違反罪를 適用했다. 韓 氏는 懲役 1年, 執行猶豫 1年, 資格停止 1年 刑을 받았다.

  • 配偶者: 박성준 (1940年 ~ )
    • 아들: 박한길 (1982年 ~ )
  • 아버지
  • 어머니
    • 女同生: 한선숙 [96]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1944年 陰曆 3月 24日 , 링크
  2. 1980年 1月 30日子 京鄕新聞
  3. 李海瓚-韓明淑, '李海瓚' 單一化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文化放送, 2007年 9月 14日
  4. “님 지키지 못해 痛歎” 韓明淑 調査에 울음바다 한겨레, 2009年 5月 29日
  5. "韓明淑 前 總理, '5萬 달러 收受' 嫌疑 無罪 確定"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法律新聞, 2013年 3月 14日
  6. 최원규 (2015年 8月 22日). “[데스크에서] 韓明淑의 거짓말” . 朝鮮日報.  
  7. "한나라당 김성식 議員 “檢察 ‘韓明淑 別件搜査’ 中斷해야”" 한겨레新聞, 2010年 4月 10日
  8. "韓明淑 ‘無罪’, 政治檢察 다시 쥐구멍?" 미디어오늘, 2011年 10月 31日
  9. "한명숙 有罪判決韓 抗訴審, 1審과 比較해 보니" 來日新聞, 2013年 9月 17日
  10. 이신영 (2015年 8月 20日). ' 9億 不法政治資金' 한명숙 議員 實刑 確定…議員職 喪失” . 聯合뉴스.  
  11. 전수용 (2015年 8月 20日). “歷代 總理 受難史…韓明淑, 實刑 社는 첫 總理 不名譽” . 朝鮮日報.  
  12. “韓明淑의 웹둥지” . 2016年 3月 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2月 17日에 確認함 .  
  13. 韓明淑 總理 就任 "初等校땐 마라톤 選手" "男便이 아침 챙겨줬다"(경향신문 2006-04-21)
  14. “신영복,” . 2018年 2月 6日에 確認함 .  
  15. 미니自敍傳 2 - 긴 戀愛, 짧은 結婚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6. 李大學步 - 韓明淑 同門 國務總理로 指名
  17. “韓明淑 指名者, ‘크리스챤 事件’때 北放送 聽取” 論難일듯
  18. 미니自敍傳 7 - 虜亂손手巾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9. "벅찬 勝利였고 시린 傷處였다"
  20. 國會議員 學歷檢證 - 受講은 ‘修了’ 中退는 ‘卒業’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1. 韓明淑 참여연대 共同代表 / 新黨創黨 參與로 辭表提出 (한겨레신문 1999-09-07)
  22. 新黨 推進人士 릴레이 인터뷰(4) - 韓明淑 女性委員長 (서울新聞 1999-10-16)
  23. 이사람 한명숙 議員/'母性保護' 一貫性 誠實.차분함 돋봬 (한겨레신문 2000-10-31)
  24. 1.29補閣 뒷얘기-김중권.한광옥 幕後 윈윈게임? (경향신문 2001-01-30)
  25. '女聲部 첫 長官 歡迎합니다' / 女性團體 '性差別 改善' 期待 (한겨레신문 2001-01-30)
  26. 女聲部 出帆 1年(上)/달라진 制度,안달라진 現實 (경향신문 2002-01-28)
  27. 戶主制 없애고 家族簿로 代替 推進 (東亞日報 2002-11-27)
  28. 노무현 政府 첫 內閣 프로필 (한겨레신문 2003-02-28)
  29. 母性保護法 施行延期 女性·財界 反應 (서울新聞 2001-04-25)
  30. 母性保護法 施行 1年… 實態와 問題點/"母性保護, 아직 먼 얘기" (韓國日報 2002-11-01)
  31. 育兒休職給與 10萬원 올려 月40萬원 (東亞日報 2004-02-18)
  32. 經總 "育兒休職給與引上 反對" (韓國日報 2004-01-12)
  33. 12~13個部處 長官 오늘 發表 (한겨레 2003-02-27)
  34. 한겨레가 만난 사람 / 한명숙 環境部 長官 (한겨레 2003-04-15)
  35. <記者메모>核廢棄場 論議 環境部 王따 (경향신문 2003-04-24)
  36. 새만금 干拓事業 論難 再演 / "强行" vs "反對" 國政混亂 (동아일보 2003-05-22)
  37. 뒤로 가는 環境政策…팔당周邊 建築制限 留保 (동아일보 2003-07-31)
  38. 2002年度 最優秀機關 施賞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9. 신완선 敎授팀 共同 長官 評價 (中央日報 2003.12.16)
  40. 成績表- 雜音 많았던 부처長官 낮은 評價 (中央日報 2003.12.16)
  41. 하지만 이 調査는 國會議員과 民間 專門家들만을 對象으로 하고 있으며, 民間 專門家들 또한 公開되지 않아 恣意的으로 選定되었을 可能性이 높아 그 目的과 信賴性이 疑心된다. 무엇보다 공정한 調査라면 잘하는 長官에 對한 激勵의 意味와 못하는 長官에 對한 叱責을 同時에 해야 하는데, 이 調査는 잘하는 長官은 "큰 雜音 없었던" 部處로 貶下하고 못하는 長官은 退陣해야 한다며 壓迫하는 一貫的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李明博 政府 들어서 中央日報의 이런 壯觀評價는 아직까지 다시 이뤄지지 않았다.
  42. 環境 모르는 環境長官
  43. 4.15民心/ 汝矣島에 ‘여풍’ 豫告…16代 갑절 當選(한겨레신문 2004-4-16)
  44. 한나라당 ‘韓明淑 카드’ 牽制 (東亞日報 2006-03-23)
  45. 열린우리당 進路는 - 鄭議長 곧 辭退… 當分間 ‘신기남 體制’(東亞日報 2004-05-17)
  46. 盧武鉉, 分讓原價 公開 ‘公開的 反對’(한겨레 2004-06-11)
  47. 敎育部總理 김진표氏 檢討 (東亞日報 2005-01-27)
  48. <政治 읽기> '全大後遺症' 몸살앓는 韓明淑 (경향신문 2005-04-05)
  49. <이광훈 칼럼> 女性의 적은 女性인가 (경향신문 2005-04-07)
  50. 與常任中央委員 電擊辭退 염동연議員 인터뷰 (東亞日報 2005-06-10)
  51. 염동연,"생각은 다르지만 柳時敏을 非難하지는 않겠다"
  52. 與野 對政府質問 代身 弱點잡기 氣싸움 (한겨레 2006-04-11)
  53. 盧政權 任期末 總理-靑祕書室長 同伴交替…‘實務內閣+親衛祕書室’ 밑그림 (東亞日報 2007-03-06)
  54. [詩論]韓明淑 國務總理님께(한겨레신문 2006-12-07)
  55. 與野政 協議體 提案-木浦空港 周邊 高度制限 緩和… “韓總理 行步 政治的 냄새”(東亞日報 2007-02-15)
  56. 韓明淑 "時代的 要請 回避하지 않겠다"(조선일보)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7. 韓明淑 "時代的 要請 回避하지 않겠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8. 靑 "汎與圈이라니..." 孫鶴圭도 손보나, 盧大統領 눈밖의 走者들 '솎아내기'공세 (傾向一步 2007-05-04)
  59. ‘親勞’ 陣營도 噴火 兆朕 (한겨레 2007-06-14)
  60. 1·2位 0.29%P 差異 ‘超薄氷’..“豫想 깨졌다.” 緊張感 (한겨레 2007-09-06)
  61. 刷新 對象 李海瓚, 脫黨 ‘選手치기’(동아일보 2008-01-11)
  62. 한나라 vs 民主 續續 드러나는 總選 對陣表 (東亞日報 2008-03-12)
  63. 總選 D-19 / 本報-MBC, 關心地域 15곳 輿論調査 (東亞日報 2008-03-21)
  64. 李大統領, 黨 內 系譜政治 終熄 强調 “어느 黨에도 내 競爭者 없다.” (東亞日報 200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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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백일현 記者 (2010年 4月 10日). “李會昌 “檢察의 韓明淑 別件 搜査 매우 拙劣”” . 中央日報 . 2010年 4月 10日에 確認함 .  
  73. 金鍾民 (2010年 4月 9日). “[票]'韓明淑 無罪' 判決 要旨”. 뉴시스.  
  74. 證人들 말 바꾸기… 韓明淑 裁判 混戰 京鄕新聞 2011年 1月 13日
  75. 韓明淑 前總理 抗訴審에서도 賂物收受 無罪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法律新聞 2012年 1月 13日
  76. 이番에도 物證 없이 起訴… 檢察 慣行에 ‘制動’ 京鄕新聞 2011年 10月 31日
  77. 한명숙 懲役 2年 確定, 議員職 喪失 미디어오늘 2015年 8月 20日
  78. “大法, 韓明淑 '9億 不法政治資金' 事件 懲役 2年 確定…議員職 喪失” . 朝鮮日報. 2015年 8月 20日.  
  79. “韓明淑, 서울市長 出馬宣言” . 東亞日報. 2010年 4月 21日 . 2010年 4月 21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80. 송수경; 金正恩 記者 (2010年 5月 6日). “一瀉千里로 끝난 民主黨 서울市長 候補競選” . 聯合뉴스 . 2010年 5月 6日에 確認함 .  
  81. 한명숙 前 總理 側近 出國禁止..."檢察 告訴"
  82. 韓明淑, '被疑事實 空表 嫌疑' 檢察 告訴하기로
  83. 韓明淑共對委 "檢 刑事告訴…造船·동아 損賠訴" 警告 머니투데이 2010年 4月 14日
  84. 東亞日報, 韓明淑 報道 取材源 밝힐까
  85. “韓明淑, 朝鮮日報 相對 損賠訴 敗訴 確定” . 2011年 7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7月 23日에 確認함 .  
  86. 韓明淑, 東亞日報 相對 損賠訴 敗訴
  87. 大法院, 한명숙 前 總理 賂物收受 嫌疑 無罪 確定 京鄕新聞, 2013年 3月 14日 장은교 記者
  88. 한명숙 前 總理 '無罪'… 1次 事件과 '版박이' 노컷뉴스 2011年 10月 31日
  89. 韓明淑 前總理 ‘正字法 違反’ 無罪. “9億 줬다… 안줬다… 한만호 陳述 信憑性 없다” 서울新聞, 이민영 記者
  90. '9億收受' 韓明淑 前總理 抗訴審 懲役 2年 뉴시스(朝鮮日報), 2013年 9月 16日
  91.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018464
  92. 檢察, "한명숙 前 總理 동생 통해 資金 管理" 主張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3. 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607811&sid=E&tid=0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4. 파이낸셜 뉴스 作成 : 2012-03-02 10:27
  95. 아시아투데이 作成 : 2011-12-14 16:55
  96. ‘韓明淑 無罪’에 共感하기 어려운 理由 文化日報 2011年 11月 2日子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한덕수
(權限代行)
第37代 國務總理
2006年 4月 20日 ~ 2007年 3月 6日
後任
권오규
(權限代行)
前任
백경남
(女性特別委員會 委員長)
招待 女聲部 長官
2001年 1月 29日 ~ 2003年 2月 26日
後任
지은희
前任
金明子
第14代 環境部 長官
2003年 2月 27日 ~ 2004年 2月 16日
後任
곽결호
前任
元惠榮 · 李庸瑄
(臨時共同代表)
招待 民主統合黨 代表最高委員
2012年 1月 16日 ~ 2012年 4月 12日
後任
문성근
(代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