肝도 共産黨 事件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光州學生運動_東亞日報
1927年 9月 13日子 東亞日報

肝도 共産黨 事件 (間島共産黨事件)은 1927年 에서 1930年 사이, 肝도 에서 活動하던 共産主義 運動家들을 日本 帝國 (日帝)李 檢擧한 事件이다.

背景 [ 編輯 ]

肝도 共産黨 事件을 3次에 걸쳐 發生했는데 이中 第1次 肝도 共産黨이 設立되기 前, 1926年 3月에 朝鮮 共産黨 은 中央 執行委員會를 滿洲 總局, 傷害 總局, 日本 總局으로 다시 建立할 것을 決定하였다. 이에 조봉암(曺奉岩) , 최원택(崔元澤) 等은 1926年 5月 16日 滿洲 總局을 組織하였고 이와 同時에 高麗 共産 靑年會 滿洲 總局이 建立되었다.

1926年 10月 28日 朝鮮 共産黨 滿洲 總局 桐萬國 執行委員會는 雜誌 『火焰』을 2000餘 部를 發行하였다.

1927年에 이르러 滿洲 總局은 13個 支會와 3個 郡會, 43名의 黨員으로 勢力을 키워 나갔고, 高麗 共産 靑年會 滿洲 總局은 軍幹部 6個所에 59個 洗草, 230名 會員으로 發展하였다.

第2次 肝도 共産黨은 第1次 肝도 共産黨 事件 以後에 獨立鬪爭을 繼續해서 이어나가기 위해 北風派閥(북풍회) 과 交流를 하면서 發生하였다. 1928年 組織을 回復한 後에 勞動者들에 對한 組織 工作을 强化하고, 勞動 組合·農民 同盟 等의 創設을 奬勵하였다.

勞動 組合·農民 同盟과 靑年 總同盟은 김봉익(金鳳翼) · 주채희(朱埰熙) 의 指導 아래 5·1記念 示威 行進과 5·30 流血社 3周年 講演會를 가지고 日本의 蠻行을 퍼뜨렸다.

第3次 肝도 共産黨 事件은 張學良(張學良) 의 中東로 事件과 光州 學生이 中心이 된 全國的인 學生 反日 鬪爭과 맞물려 延邊 靑年 學生들이 反日 鬪爭을 展開하여 發生하였다. [1]

事件 [ 編輯 ]

第1次 肝도 共産黨 事件 [ 編輯 ]

1927年 10月 2日 舂精 日本 總領事館이 舂精大成 中學校와 동흥 中學校 敎員 舶載하, 임계학 等을 逮捕하면서 始作하였다. 이에 依한 反撥로 朝鮮 共産黨 滿洲 總局 동만國은 日帝의 强壓的인 方式에 抗議하고 逮捕된 敎員들을 救出하기 위해 數 百 名의 學生들과 示威行進을 하였다. 學生들은 붉은旗를 들고 삐라를 뿌렸으며 '日本 帝國主義를 打倒하자!'라는 文句 아래에 그들의 목소리를 높였다. 日本 警察들은 地方 軍警들과 손을 잡고 朝鮮 共産黨 滿洲 總局 責任 祕書 代理이며 組織部長人 최원택과 桐萬國 責任 祕書 안기성 等 100餘 名을 逮捕하였다. [2]

第2次 肝도 共産黨 事件 [ 編輯 ]

1928年 9月 2日 동만도 靑年 幹部 이정만 等에 依해 進行된 國際 靑年節 記念 活動을 利用하여 삐라를 뿌리고 標語를 붙히며 各種 講演會와 群衆 大會를 開催하였다. 또한 示威行進을 通해 日本의 帝國主義의 蠻行을 批判하고 日本 警察의 强壓的인 逮捕 方式에 抗議하였다. 이에 日本 總領事館은 日本 軍警들을 動員하여 高麗 共産黨 靑年會 滿洲 總局 동만도의 幹部이자 責任 祕書인 이정만 等 72名의 幹部와 群衆을 逮捕하였다. [3]

第3次 肝도 共産黨 事件 [ 編輯 ]

第3次 肝도 共産黨 事件은 光州 學生 抗日 運動 이 일어난 後 學生들이 日本 警察에 依해 逮捕되었다는 消息에 憤怒한 舂精의 各 學校 學生들로 인해 퍼져나갔다. 이와 同時에 大聲, 동흥 中學校 學生들도 反日 鬪爭에 加擔하면서 規模는 더 커졌다. 1930年 2月 28日부터 3月 5日까지 舂精, 소오道具, 內퐁桐, 대동구, 4道具, 2道具, 3道具, 약수동 等의 地域에서 數 千 名의 學生들과 農民들이 '日本의 帝國主義를 打倒하자!'는 口號를 외치며 示威를 展開하였다. 3月 5日 滿洲 總局 동만도 幹部들은 會議를 열어 '3.1 暴動 11周年 記念 準備委員會'를 '전동만 暴動 委員會'로 바꾸고 5月 1日 前 동만에서 暴動을 벌일 것을 決意하였다. 하지만 5月 中旬에 이르러 朝鮮 共産黨 滿洲 總局 幹部와 革命 群衆 130餘 名이 逮捕되면서 計劃은 霧散이 되고 만다. [4]

朝鮮共産黨 [ 編輯 ]

서울에서 開催된 朝鮮 共産黨 第21周年 創立記念 行事

朝鮮共産黨은 1925年 4月 17日 創建된 共産主義 政黨이다. 朝鮮의 社會主義 運動이 朝鮮人 留學生들에 依해 擴散되기 始作하면서 共産主義가 朝鮮人들 사이에서 水面 위로 떠오르자 10月 革命의 影響을 받은, 沒落한 兩班과 民族主義 系列 等이 中心이 되어 朝鮮 共産黨이 創立되었다.

共産黨 創團 專門 [ 編輯 ]

"朝鮮共産黨은 國際共産黨이 그러함과 마찬가지로 그 한 支部로서 暴力革命에 依據하여 共産主義 建設을 目的으로 하는 것임은 勿論이다. 朝鮮問題로서는 共産黨 指導 아래에 勞動者 農民 의 結合에 依하여 共同前線을 展開하고, 日本帝國 의 統治를 變革하여 그 私有財産制度를 否認하려는데 있다.

世界 프롤레타리아 國家 建設을 위해서는 資本主義 들인 日本의 帝國主義 를 打破하고 植民地 朝鮮의 獨立을 圖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民族問題의 解決은 프롤레타리아 獨裁 의 一部로 된다. 朝鮮에서의 革命的 意義는 이와 같이 理解되어야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獨裁로의 民族運動을 援助함은 勿論, 戰術로서 民族主義 敵 團體와 提携하여 이를 利用하는 것은 이미 배우고 있다. 勞動運動 으로, 小作爭議로 파고들어간다. 學校의 盟休度 그 對象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 組織에서는 各 方面의 野涕洟카를 腐蝕하고, 모든 表現團體에 프락치를 만든다."

考慮共産靑年會 [ 編輯 ]

考慮共産靑年會는 1925年 朝鮮 社會主義 靑年運動의 總 指導機關으로 役割을 한 祕密地下團體이다. 1925年 4月 18日, 朝鮮 共産黨을 創建한 다음날, 서울 훈정동 4番地 박헌영의 집에서 高麗 共産 靑年會 創立代表會를 開催하였다. 이들은 靑年團體의 '30歲 年齡制限'과 軍聯盟, 道聯盟, 總同盟의 靑年團體 組織 方針과 '努力群衆'을 中心으로 한 革命的 民族主義者 및 革命的 宗敎團體와의 協力을 통해 朝鮮革命 等의 目標를 가지고 社會運動을 實施하였다. [5]

結果 [ 編輯 ]

肝도 共産黨 事件은 第1次, 2次, 3次에 걸쳐 發生한 事件이다. 이 事件으로 인해 肝도 地域의 共産主義 獨立 運動家들이 많은 打擊을 입고 그들의 日本의 帝國主義 의 蠻行을 暴露하고자 하는 示威는 번번히 霧散이 되었다. 하지만 이로 因해 間島地域에서 活潑하게 獨立運動이 發生할 수 있었으며 肝도 共産黨 事件으로 인해 派生되는 示威行進과 獨立鬪爭이 增加하였다.

各州 [ 編輯 ]

  1. “世界韓民族文化大展” . 2019年 12月 2日에 確認함 .  
  2. “世界韓民族文化大展” . 2019年 12月 3日에 確認함 .  
  3. “世界韓民族文化大展” . 2019年 12月 3日에 確認함 .  
  4. “世界韓民族文化大展” . 2019年 12月 3日에 確認함 .  
  5. “考慮共産靑年會(高麗共産靑年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019年 12月 3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