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安氏 讓渡公派 墓域

순흥安氏 讓渡公派 墓域
(順興安氏 良度公派 墓域)
대한민국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種目 有形文化財 第74號
( 1990年 6月 18日 指定)
面積 1筆地, 總面積 2,247.1m 2 [1]
數量 墳墓 2期, 墓表 3期, 床石 3期, 文人石 4期, 長明燈 1期 [1]
時代 朝鮮時代
位置
서울 시흥동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서울 시흥동
서울 始興洞
서울 始興洞(大韓民國)
住所 서울特別市 衿川區 始興洞 산126-1번지
座標 北緯 37° 27′ 29″ 東經 126° 54′ 30″  /  北緯 37.45806° 東京 126.90833°  / 37.45806; 126.90833
情報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情報

순흥安氏 墓群 은 朝鮮 初期 開國功臣인 讓渡共(良度公) 안경공(安景恭)과 아들?孫子에 이르는 3代에 걸친 墓域이다. 1990年 6月 18日 서울特別市의 有形文化財 第74號로 指定되었고, 2017年 2月 9日 文化財 및 保護區域이 擴大 指定되었다. [1]

槪要 [ 編輯 ]

墓域은 크게 오른쪽 2基와 왼쪽 3期로 區分된다. 오른쪽에는 안경공과 門塾共(文肅公) 안숭선(安崇善)의 墓가 위 아래로 자리잡고 있고, 왼쪽에는 小允恭 안숭신(安崇信), 貞淑공(靖肅公) 안순(安純), 안천공(安川公) 안숭효(安崇孝)의 墓가 위에서 아래로 位置한다. 이들 墓主人의 關係는 안순이 안경공의 아들이면서, 안숭선ㆍ안숭신ㆍ안숭효의 아버지이다.

안경공은 自家 損保(遜甫), 諡號는 讓渡(良度)이며, 아버지는 朝鮮 建國에 參與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오른 안종원(安宗源)이다. 恭愍王 14年(1365) 國子監試(國子監試)에 合格하고, 禑王 2年(1376) 文科에 及第하였으며, 1382年에는 慶尙道按廉使(慶尙道按廉使)로 있으면서 合奏(陜州)에서 사노(私奴)들이 일으킨 亂을 鎭壓하였다. 恭讓王 2年(1390) 정몽주(鄭夢周)를 彈劾하였다가 오히려 左遷되었다. 이듬해에 藝文館提學에 補任되고, 1392年 左副代言(左副代言)을 거쳐 左代言에 올라 朝鮮 建國에 參與하였다. 곧 都承旨에 祭需되고 開國功臣이 冊封될 때 3等功臣이 되었다. 太祖 2年(1393) 全羅都觀察黜陟使(全羅道觀察黜陟使)로 나아갔으며, 이듬해에 興녕軍(興寧君)에 封해졌다. 太宗 6年(1406) 판公安部社(判恭安府事)에 이어 곧 판한성府使(判漢城府事)에 任命되었으며, 1410年에는 판開城府使(判開城府事)가 되었다. 1416年 輔國崇祿大夫 集賢殿大提學(輔國崇祿大夫集賢殿大提學)에 祭需되고 興녕府院君(興寧府院君)이 되었다.

안순은 自家 現地(顯之), 諡號는 정숙(靖肅)이며, 性品이 剛直하였다. 1389年 文科에 及第하고, 恭讓王 2年(1390) 성균학油價 되었다. 1392年 朝鮮이 建國되자 私財主婦(司宰注簿)로 拔擢되었다. 그 後 世宗 元年(1419) 好調參判으로 正朝使(正朝使)가 되어 明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工曹判書로 昇進하였다. 1424年 戶曹判書가 되었고, 1432年에 判中樞院事 兼版號調査(判中樞院事兼判戶曹事), 1435年에 議政府贊成事를 歷任하고, 1437年에는 忠淸道 地方의 飢饉을 收拾하기 위한 度순문賑恤使(都巡問賑恤使)로 그 任務를 잘 收拾한 功勞로 崇政大夫에 올랐다. 그는 오랫동안 戶曹判書 또는 版號調査를 겸하면서 國家의 全曲(錢穀)을 管掌하였는데, 警備出納이 正確하였다는 事實과 같이 特히 國家의 財政을 責任맡은 職責에서 큰 功勞를 쌓았다. 著述로는 曾祖父 安軸(安軸)의 文集인 ≪謹齋集(謹齋集)≫의 附錄에 유고가 실려 있다.

안숭선의 者는 中止(仲止), 號는 옹再(雍齋)이며, 諡號는 문숙(文肅)이다. 太宗 11年(1411) 生員試에 合格하고, 世宗 2年(1420)에 다시 文科에 壯元으로 及第하여 地平으로 昇進하였고, 그 이듬해에 吏曹銓郞이 되었다. 1429年에 大護軍으로 昇進하여 書狀官으로 明나라에 가 任務를 成功的으로 遂行하고 돌아왔고, 1437年 大司憲이 되었다. 1443年에 刑曹判書, 1444年에 聖節使로 明나라에 다녀와서 知中樞院事?集賢殿大提學, 1445年에 兵曹判書兼知春秋館事로서 ≪高麗史≫ 修撰에 參與하였고, 1448年에는 兵曹判書로서 藝文館大提學을 겸하였다. 文宗 卽位年(1450)에 議政府 右參贊을 거쳐 左參贊에 이르렀고, ≪謹齋集≫ 附錄에 유고가 傳한다.

안숭효는 自家 契忠(季忠), 號는 한백당(寒栢堂)이다. 일찍이 進士試에 合格하였으나, 音步로 벼슬길에 나아가 知司諫院事(知司諫院事)?戶曹參議를 지내고, 端宗 2年(1454) 京妓觀察使가 되었다. 이어서 德녕府尹(德寧府尹)을 歷任하면서 世祖의 執權에 協助하여 左翼原從功臣(佐翼原從功臣) 2等에 책록되었다. 그 뒤 大司憲과 共助參判?好調參判?中樞院副使를 지냈다. 忠淸道 地域에 災變이 深刻하여 才德을 兼備한 人物이 要請되자 이에 選拔되어 世祖 5年(1459) 동지중추원사兼忠淸道觀察使에 任命되어 貪官汚吏를 肅淸하고, 流亡民에 對한 賑恤事業을 效果的으로 폈으나, 이듬해 過勞로 任地에서 죽었다.

墓域에는 무덤 以外에, 神道碑(神道碑) 3期, 墓碑 3期, 文?武人石 8期, 長明燈 2期 等이 있다. 안경공의 墓碑는 높이 225cm, 幅 56cm로 尹游(尹惟)가 지었고, 안순의 墓碑는 높이 226cm, 幅 95. 6cm로 변계량(卞季良)의 글이며, 안숭선의 碑는 높이 244cm, 幅 88cm로 성삼문(成三問)의 글이다.

순흥安氏 墓軍은 무덤들이 原形대로 잘 保存되어 있어서 朝鮮 前期 墳墓의 形式을 理解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으며, 墓 앞에 세워진 碑石과 各種 石物 等을 통해 墓祭 變遷史를 硏究하는 데도 重要한 資料가 되고 있다.

文化財 擴大 指定事由 [ 編輯 ]

안숭신(安崇信)은 開國功臣인 讓渡(良度) 경공(景恭)의 아들 順(純)의 사남 가운데 三南으로 1395年 衿川 始興에서 나시고 1441年 卒(卒)하셨다. 五衛都摠府 辭職(五衛都摠府司直)과 景氣도 察訪(京畿道 察訪)을 거쳐 引受部 소윤(仁壽府 少尹)에 올랐다. 배우자는 牧師(牧使) 숙야(叔野)의 따님 英人 閑散李氏(令人 韓山李氏)로서 現在 금천구 시흥동 該當 墓域에 合窆(合?)되어 있다. [1]

안숭선(安崇孝)는 경공(景恭)의 아들 順(純)의 사남으로 나시어 字는 契忠(季忠)이며 1454年 京畿道觀察使와 以後 大司憲, 共助參判, 戶曹參判에 除授되었다. 文獻上 生年은 未詳이며 1460年에 졸하였다. 配偶者 政府인 閑散李氏(貞夫人 韓山李氏)는 判書(判書) 숙무(叔畝)의 따님으로 該當 墓域에 合掌되어 있다. [1]

순흥安氏 讓渡公派 墓域의 숭孝·숭신의 墓는 15世紀에 造成된 藝場墓所로서 當代의 墓祭와 石物 原形이 잘 保存되어 있어, 歷史的 價値가 높아 文化財로서의 指定 價値가 充分하므로, 基指定된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第74號 순흥安氏讓渡公派 墓域에 包含下與擴大 指定하고 保存하고자 한다. [1]

各州 [ 編輯 ]

  1. 서울特別市告示 第2017-34號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擴大 指定 告示》, 서울時報 第3394號, 8-17面, 2017-02-09

參考 資料 [ 編輯 ]

본 文書에는 서울特別市 에서 知識共有 프로젝트 를 통해 퍼블릭 도메인 으로 公開한 著作物 을 基礎로 作成된 內容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