納哈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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納哈出 또는 나枷杻 ( 韓國 漢字 : 納哈出  납合出 , ?年 ~ 1388年 )은 北元 (北元)의 將軍이다. 納哈出는 本來 징기스칸 사준 中 한 名인 무칼리 의 後裔로, 그의 집안은 代代로 搖動 地方의 軍 指揮官을 歷任했다.

生涯 [ 編輯 ]

(元) 末期가 되자 스스로를 瀋陽行聖僧上(審陽行省丞相)으로 稱하고, 滿洲 地方에서 勢力을 떨쳤다. 원이 몽골 高原으로 쫓겨나 北원이 된 以後에도 北元의 大칸 阿諛시리다르 는 繼續 을 壓迫하였는데, 이를 위해 滿洲 잘라이르의 納哈出와 協力하였다.

공민왕 11年인 1362年 의 2月, 納哈出는 高麗 가 收復한 雙城摠管府 를 奪還하기 위해, 雙城摠管府의 盞當 조소생 과 함께 高麗의 동북면( 咸鏡南道 弘遠 脂肪 )으로 쳐들어 갔다. 이에 高麗 調整은 李成桂 를 동북면兵馬使(東北面兵馬使)로 삼아 敵을 막게 하였다. 여러 次例의 激戰 끝에 마침내 咸興 平野에서 納哈出의 軍隊는 大敗하였다. 이 때문에, 雙城摠管府의 盞當 조소생, 濁度頃 勢力이 完璧히 沒落했다.
이 戰鬪 後 納哈出는 恭愍王과 李成桂에게 禮物을 보내 和親을 맺었다. [1]

그러나 李成桂가 納哈出를 大敗시켰다는 이야기는 '飼料의 交叉檢證 '이 되지 않아 事實인지 疑問이 드는 面이 있다. 李成桂側의 官撰司書人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通鑑, 朝鮮王朝太祖實錄叢書 等과 李成桂의 最側近인 鄭道傳의 '三峯集'이나 高麗王朝 滅亡 以後 李成桂에게 出仕해 朝鮮의 臣僚가 된 權近의 '陽村集' 等의 李成桂側의 記錄들에만 보일뿐, 李成桂의 反對便 人物들, 例를 들어 李穡, 李崇仁, 정몽주, 元天錫 等의 文集들에서는 全혀 言及이 없고, 또 中國쪽 記錄에서도 이 이야기가 없을 뿐더러 몽골側의 記錄에도 亦是 없는 內容이라 無條件 李成桂가 납합출을 大敗시켰다는 이야기에 疑問點이 들 수 밖에 없다. 또 朝鮮王朝側의 記錄들인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通鑑, 朝鮮王朝太祖實錄叢書에도 李成桂가 納哈出를 大敗시키고 나서 高麗 朝廷에 賞을 받았다는 事實이 言及되어 있지 않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以後에도 納哈出는 우리나라를 侵犯하기도 했다. 李成桂의 活躍 한 番으로 모든 것이 完全히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對한 反論도 存在하는데, '飼料의 交叉檢證'이 안 되므로 高麗史에 記錄된 內容 自體를 믿을 수 없다는 건 危險한 發想이다. 黃山大捷度 日本 側 記錄에는 없으므로 交叉檢證이 안 되니 없었던 일인가. 高麗史家 朝鮮 王朝의 立場에서 記錄된 側面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歷史的 事實을 바탕으로 이에 對한 史觀의 立場을 말함이다. 高麗史家 厖大한 歷史를 다루는 만큼 實際 있었던 일이나 人物이 漏落된 境遇는 있어도, 아예 없던 事實 自體를 만들어서 記錄할만큼 虛構로 가득찬 司書가 아님을 周知해야 할 것이다. 高麗史는 歷史를 記錄하는 司書(史書)이지 眞實 與否를 가리는 冊이 아니다. 卽 禑王, 昌王이 辛旽의 아들, 孫子가 아니라고 해도 朝鮮 王朝 立場에서 辛旽의 아들, 孫子라고 했으니 高麗史에 그렇게 記錄된 것이지 이들이 眞짜 辛旽의 아들, 孫子인지 아닌지 判斷까지 高麗史에 바랄 수는 없다. 이런 部分들에 對해서는 後代에 論議가 되고, 다른 評價도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 亦是 高麗史의 記錄이 있었기에 論할 수 있는 것이다. 勿論 高麗史家 後代에 編纂된 史書이다 보니 먼 高麗 前期, 中期의 일은 記錄의 不實이 있을 수도 있으나, 李成桂와 納哈出의 戰鬪는 먼 高麗 前期, 中期의 일도 아니고, 當代 或은 後代에라도 反撥과 論議가 일었을 것인데, 이런 情況이 單 한番도 없었다. 라고 말했지만, 이와 反對로 李之蘭의 神道碑에서는 李之蘭의 活躍으로 李成桂가 納哈出에게서 無事했고 그의 活躍으로 納哈出가 後退했다는 이야기가 傳한다. 勿論 이 이야기는 李之蘭의 後孫들이 自身들의 祖上을 事實과 다르게 造作, 誇大包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最小限 李成桂가 納哈出를 大敗시켰다는 것에 對한 理論이 있다는 證據가 된다. 또 그동안 너무 安逸하게 朝鮮王朝側의 記錄들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風土여서 疑心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한다. 밑에서도 이야기가 되지만 李成桂가 納哈出를 大破했다는 것은, 勿論 어쨌든 事實일 可能性이 現在로서는 더 높지만 그래도 한 番 생각해 볼 餘地는 있다 하겠다. 世上의 모든 歷史서, 特히 三國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같은 官撰司書들은 權力者의 指示에 依해서 쓰여지는만큼 權力者의 立場에서 事實을 造作하거나 歪曲한 事例가 많다. 官撰司書들이 政府에 依해서 公式的으로 쓰여지는만큼 正確性, 詳細性 面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하겠으나 公正性 面에서는 個人에 依해 쓰여지는 野史보다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은 周知의 事實이다. 高麗史를 그대로 다 믿는다면, 禹, 昌王도 辛旽의 아들, 孫子이고, 金佇의 獄舍와 尹이, 이초의 獄舍도 正當한 獄事이고, 朝鮮王朝斷種, 世祖, 宣祖實錄에 쓰여진 것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다면 김종서 , 死六臣 , 김덕령 도 逆賊,罪人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朝鮮時代의 糧食 있는 臣僚들과 선비들中 이런 이야기들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只今의 學界에서도 마찬가지로 믿고 있지 않다. 김종서,死六臣,金德齡의 境遇는 아예 後代의 朝鮮王朝에서 忠臣으로 公式的으로 復權이 되어 이들 當時의 實錄들이 造作 되었다는 것을 朝鮮王朝 스스로 認定하고 있다. 李成桂가 納哈出를 大破했는지에 對해서는 아직까지는 事實에 가깝다고 해야겠으나 앞으로 더 생각해 볼만한 餘地는 있다 하겠다. 다만 黃山大捷의 境遇 李成桂의 反對쪽 人物인 목은 異色 의 '牧隱集'이나 다른 高麗側 人物의 記錄에도 分明히 言及되고 있고, 또 高麗史,高麗史節要,東國通鑑에서는 이 戰果를 바탕으로 李成桂가 高麗 朝廷에 賞을 받은 記錄도 分明히 存在한다. 交叉檢證에도 符合이 되고, 또 交叉檢證과는 別個로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通鑑의 記錄들도 充分히 信賴할 수 있는 部分이다.

李成桂와의 交戰 以後 納哈出는 1372年 名君의 補給 基地였던 禹家長을 奇襲해 名의 兵力 5000名을 죽이고 糧穀 10萬 席을 被害했다. [2]
1386年 12月, 明 太祖 朱元璋 李 將軍 風勝에게 搖動 攻擊에 나서라고 指示하자 明軍은 오늘날의 承德 附近에 兵站基地를 設置한 뒤, 1387年 6月 納哈出를 攻擊하여 錦山(金山) 地域을 掌握했다. [2] 이런 狀況에 飢饉까지 發生하자 納哈出는 名에 投降하여 해서후(海西侯)에 封해졌다. [3]
1388年 , 雲南 征伐에 나섰다가 病으로 死亡하였다.

納哈出가 登場한 作品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朝鮮王朝實錄, 【太白山史庫本】 1冊 1卷 7張 B면, 【影印本】 1冊 4面
  2. 한명기. “名-北元 勢다툼 틈타 ‘요동征伐’ 칼 빼든 공민왕” . 한겨레.  
  3. 名士(明史) 本紀(本紀) 太祖(太祖) 紅무(洪武) 20年(1387) 9月 無人(戊寅)일, 納哈出가 首都에 當到하자 해서후(海西侯)에 封하였다. (九月戊寅,納哈出至京,封?海西侯)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