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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 <76>윤중식 '아침']겹겹이 쌓아올린 强烈한 色層...時間과 빛이 그려낸 風景 | 서울經濟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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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76>윤중식 '아침']겹겹이 쌓아올린 强烈한 色層...時間과 빛이 그려낸 風景

平壤 出身으로 中學生때부터 그림 才能

朝鮮美術展覽會에 應募 3年 連續 入選

日 데이코쿠美術學校 西洋畫科로 遊學

朝鮮學生 結束體였던 백우회서도 活動

黃昏 等 風景畫에 人物畫度 즐겨 그려

野獸派 畫風에 印象主義的 붓질 兼備

죽기 前날까지도 그림 그린 天生 畫家

윤중식 ‘아침’ 1953年, 캔버스에 油彩, 40.4x31cm /寫眞提供=국립현대미술관




서슬 퍼렇던 더위가 歲月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벽 바람에 살갗이 느끼는 딱 그 차가움 만큼의 파르람이 畫幅을 채운 윤중식(1913~2012)의 ‘아침’이다. 나뭇가지에 잎사귀 하나 없는 것을 보면 겨울인가 싶기는 하나 저쪽에서부터 둥글게 올라오는 太陽의 노란빛이 溫和한 雰圍氣를 내뿜어 춥지 않고 그냥 선선한 程度로 느끼게 한다. 멀리 草綠의 稜線을 따라 餘名이 노란色 띠를 이뤘다. 産科 맞닿은 자리는 좀 어둡게, 山 아래쪽 그림자 자리도 靑灰色 띠가 드리웠다. 벌판을 건너온 아침의 기운은 담牆에, 담 아래에, 마당에, 階段에 水平으로 層層이 “내 곧 가리다” 奇別 보낸다. 그렇게 時間은 層層이 내려앉는다. 아침의 동터오는 風景도 水平線이나 地平線, 或은 山의 稜線과 建物 숲의 빈자리를 따라 가로로 널찍하게 빛을 퍼뜨리며 찾아온다. 畫家 윤중식에게 時間과 빛이 그려낸 風景은 그렇게 ‘水平層’을 이뤘다. 그가 즐겨 그린 아침·黃昏·夕陽·江邊·太陽, 그리고 一連의 季節 風景畫는 한결같이 겹겹이 層을 그린다. 考古學 發掘現場에서도 쌓인 흙의 層位를 根據로 時代를 推定하니, 그게 時間의 屬性일까. 아니면 心性 고운 畫家의 눈이 하늘 한 조각, 들판 한구석, 나무와 숲과 풀 한 抛棄까지 찬찬히 쓸며 바라본 탓에 한 겹 한 겹 各自의 자리를 ‘層’으로 차지한 것일까. 아침도 노을도 아련하게 떠오르고 아득하게 잠긴다.

윤중식 ‘파랑새’ 1981年, 캔버스에 油彩, 97x130.3cm /寫眞提供=국립현대미술관


윤중식은 1913年 平壤에서 태어났다. 理解를 위해 比較해 보자면 金煥基(1913~1974)와 같은 해 났고, 李仲燮(1916~1956)李 故鄕 後輩다. 精米所를 運營하던 父親이 아홉 男妹가 뛰어놀아도 좁지 않아야 한다며 기와집 3채를 터서 生活했으니, 꽤 富裕했다. 여섯째이자 次男이던 그는 누나들이 音樂을 專攻해 樂器를 接할 일 잦았고 한때 作曲에도 關心을 뒀다. 하지만 美術大學으로 그를 이끈 決定的 契機는 아버지의 親舊 金觀鎬(1890~1958) 畫伯의 부추김이었다. 숭실중學校에 入學하면서부터 그림에 才能을 보인 윤중식은 2學年이던 1931年 美術 登龍門이던 朝鮮美術展覽會 西洋畫部에 應募했고 少女와 風景을 그린 油畫 두 點이 모두 入選했다. 이듬해, 또 그다음 해까지 3年 連續 入選하니 술 마시러 집에 들른 畫家 親舊에게 아버지가 그만 ‘아들 자랑’을 했던 것이다. 少年은 自然스럽게 畫家로 人生의 航路를 確定했다. 日本 도쿄의 데이코쿠美術學校 西洋畫科로 留學을 떠났다. 當時 도쿄에서 工夫하던 朝鮮人 美術學徒들의 結束體였던 백우회(白牛會)에서도 李仲燮 等과 함께 活動했다. 1940年에 卒業하고 1942年 朝鮮美術展에 出品한 ‘夕陽’李 入選했다. 저녁 햇살이 눈부신, 평화로우면서도 鄕土的인 夕陽 風景이었다고 한다. 只今은 傳하지 않으나 그때부터 따뜻하면서도 强烈한 色調와 情趣가 자리잡기 始作했다.

윤중식 ‘群舞A’ 1989年作. /寫眞提供=城北區립美術館


光復이던 1945年 서울에서의 첫 個人展 때 評論家인 故(故) 이경성 前 國立現代美術館長은 “作品 全般에 詩的 情緖가 넘쳐 흐른다”고 評했다. 畫風으로는 앙리 마티스의 野獸派를 떠올리게 하는데, 實際 美術大學 在學 時節의 日本人 先生이 마티스의 弟子였다고 한다. 風景畫에서는 印象主義的인 붓질이 感知되고 人物畫 等에서는 조르주 루오의 强靭한 검은 輪廓線이 뿜어내는 힘이 느껴진다.

畫家의 人生 轉換點은 6·25戰爭과 그로 인한 越南과 家族과의 生離別이다. 1·4後退 때 온 家族이 避難길에 올랐는데 黃海道 海州 近處에서 그만 婦人과 여섯 살 난 딸 혜경이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風景과 靜物, 새 그림 外에 윤중식이 種種 그린 人物畫 속 女人과 少女의 얼굴에 드리운 애잔함의 根源이 아마도 그 離別인 듯하다. 그는 홀로 큰아들의 손을 잡고 젖먹이 둘째 딸을 업은 채 南쪽을 向해 걸었다. 어린 것은 못 먹고 앓다가 結局 흔들어도 永永 깨어나지 못했다. 釜山까지 손목 꼭 붙들고 함께 내려온 아들 對境 氏가 살아야 할 理由가 됐다.

1953年 休戰 直後 윤중식은 서울에서 再開된 第2回 大韓民國美術展覽會 西洋畫部에 出品한 ‘가을 風景’李 特選을 받으며 作家的 力量을 널리 알렸다. 그렇게 國展에서 몇 番의 入選을 거듭하니 1959年부터는 國展 推薦作家 位置에 올랐다. 畫家로 살았을 뿐 아니라 敎職에도 몸담았다. 창덕여고에서는 學校 側의 配慮로 小講堂 한쪽에 作業室度 얻었다. 以後 이마동(1906~1981)의 推薦으로 弘益大 敎授가 됐다. 이때부터 그의 깐깐한 性格이 두드러지기 始作했다. 까칠하다기 보다는 곧고 맑은 性品이었던 것인데 그때만 해도 入試 請託, 審査 不正 等이 제법 있던 時節 윤중식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許諾하지 않았다. 學校 밖에서는 絶對 美大 入試準備生의 그림을 봐주는 일이 없었으며 오로지 作品만 놓고 사흘 밤낮을 苦心해 採點하곤 했다. 어떤 이들은 홍익대 美大가 名聲을 쌓은 契機 中 하나가 윤중식 敎授의 嚴格한 審査 德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윤중식은 1963年부터 성북동에 둥지를 틀었다. “새벽부터 돌 깨는 山울림에 떨”거나 “今方 따낸 돌溫氣에 입을 닦는” 存在는 詩人 金珖燮의 ‘성북동 비둘기’만이 아니었다. 윤중식 또한 自然에 對한 敬畏心으로 살았다. 그는 自身보다 더 나이 많은 큰 소나무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아들네 집을 핑계로 옆집까지 사들였다. 離散의 自身이 移植(移植)된 存在였기에 그 나무를 옮기는 게 그리도 싫었던 模樣이다. 種種 野外로 나가 이젤을 세워놓고 寫生하며 그림을 그릴 때도 風光을 앞에 둔 그의 마음 속에는 故鄕 大同江邊이 아른거리곤 했다. 그가 그린 風景畫의 水平層이 단단해진 것은 누르고 누른 그리움이 굳어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그림 中에 비둘기를 素材로 한 作品도 많다. 어릴 적 精米所를 하던 집에서 누룩工場도 運營한 德에 周邊 비둘기들이 잔뜩 모여들었고 그 비둘기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키웠던 記憶이 자꾸만 그림으로 이어졌다. 勿論 비둘기는 戰爭世代인 그에게 平和와 自由의 象徵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所藏한 ‘파랑새’는 70歲의 畫家가 마침내 發見한 希望의 파랑새를 溫和한 靜物과 더불어 담고 있다.

“가을은 浪漫과 哀愁와 期待의 季節, 天空을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들은 끊임없이 生과 自由의 渴望을 우리에게 啓示하며 사라진다. 먼 하늘과 깊은 숲과 燦爛한 黃昏이여! 맑은 가을이여! 길이길이 나에게 眞實과 사랑과 믿음을 住所서.” (1975年 季刊誌 ‘花郞’ 여름號에 쓴 윤중식의 글 中에서)

1990年代 初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壁에 걸어둔 그림들을 죄다 도난당했다. 그림값이 워낙 高價였던 터다. 事實을 안 作家가 맨 먼저 한 일은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壁에 나란히 걸어둔 그림이 두 孫女의 肖像畫였는데 애들이 그림 없어진 것을 알면 속상해 할까봐 눈치채기 前에 다시 그린다며 분주했던, 情 많은 할아버지였다.

아들 內外가 只今도 살고 있는 오래된 집에는 한 番도 展示한 적 없는 作品 뭉치가 담긴 스크랩북이 있다. 避難길에 艱辛히 救한 종이에 鉛筆과 水彩물감으로 急히 그린 避難 風景이다. 길게 늘어선 피난 行列, 길에 앉아 젖 먹이는 엄마, 銃질하는 軍人 等이 登場한다. 避難길에 人民軍에게 잡혔다 풀려나고, 國軍을 만나 太極旗 아래 선 男子의 등에는 粉紅 포대기에 싸인 아이가 업혀있고 손끝에 꼬마가 매달려 있다. 畫家의 自畫像이요, 經驗談이다. 빠른 筆致로 瞬間의 雰圍氣를 잡아챘다. 絢爛한 붓질 사이에 잊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읽힌다. 오래된 그림이 只今도 생생한 것은 그 아픔이 現在進行形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2000年 갤러리현대에서 연 88歲 米壽展(米壽展)과 2012年 城北區립美術館에서 開催한 100歲 上수전(上壽展)에서도 新作을 선보인 畫家는 世上 떠나기 前날까지도 그림을 그렸다. ‘또 오겠다’, ‘다시 만나자’는 約束을 決코 어기는 法 없는 아침의 太陽, 變치 않는 夕陽과 自然 等 작은 그림 몇 點이 未完成으로 남았다. 아마도 故人은 새가 되어 大同江 便 故鄕 집 周邊을 휘익 돌아본 後 소천(召天)하였으리라. 時間은 힘이 세다. 가을이 왔다.
/조상인記者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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