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1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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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1歲 뷰클레륵
Henry I Beauclerc
잉글랜드人의 王
在位 1100年 8月 2日-1135年 12月 1日
戴冠式 1100年 8月 5日
前任 윌리엄 2歲
後任 스티븐 (잉글랜드)
노르망디 工作
在位 1106年-1135年 12月 1日
戴冠式 1135年 12月 22日
前任 로베르 2歲
後任 블루아의 스티븐
身上情報
出生日 1068年頃
出生地 잉글랜드 王國 셀비
死亡日 1135年 12月 1日
死亡地 노르망디 公國 생드니엥리옹
王朝 노르만
家門 노르망디
父親 윌리엄 1歲
母親 馬틸데 드 플랑드르
配偶者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아델라이데 드 路傍
子女
墓所 리딩 修道院

헨리 1歲 ( 英語 : Henry I , 1068年 ~ 1135年 12月 1日 )는 잉글랜드 의 王이다. 그의 統治時期는 잉글랜드가 官僚 國家로 나아가는데 礎石을 다진것으로 評價받는다.

卽位 初期 [ 編輯 ]

兄인 윌리엄 2歲 가 疑問의 事故로 死亡하자 그는 3日뒤 急하게 웨스트민스터 寺院에서 戴冠式을 치른다. 事實 元來 序列上 그는 셋째 아들이였으므로 王位의 正當한 繼承者는 그의 兄인 노르망디公 로베르에게 돌아가야 했으나 그는 第1次 十字軍 遠征에서 막 돌아오고 있었고 이듬해에 到着할 豫定이었다. 實際로 相當數의 貴族이나 軍人들은 그의 兄인 로베르를 正當한 繼承者로 생각했으므로 헨리는 로베르가 돌아오기 以前까지 이러한 狀況을 打開하기 위하여 빠르게 움직이기 始作하였다.

그는 곧 自由 憲章 을 宣布하였는데 課稅를 公平하게 매기고 免稅對象이었던 敎會의 財産을 取하거나 파는 걸 禁하며 王室의 權力濫用을 禁止하는 內容을 骨子로 하였다. 또 애닉 戰鬪 以後에 疏遠해져 있던 스코틀랜드와의 關係를 緩和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윌리엄이 處刑했던 멜컴 3歲 의 딸인 마틸다와 結婚함으로써 外交的 安定을 꾀하였다. 그는 또한 兄과의 不和로 스스로 캔터베리를 떠난 안셀무스 를 다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얼마後 그의 兄인 로베르는 豫想대로 軍隊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侵入하여 自身이야말로 正當한 王位繼承者라고 主張하였는데 헨리의 그동안의 努力에도 不拘하고 大貴族들은 大部分 兄의 便에 섰다. 하지만 수많은 封建 貴族들과 特히 캔터베리의 大主敎 안셀무스의 絶對的 支持를 바탕으로 로베르와 對等한 싸움을 벌였으며 結局에는 妥協案을 이끌어내는데 成功한다. 이 妥協案으로 로베르는 잉글랜드에 對한 自身의 權利를 모두 抛棄하는 代身 노르망디 地方의 領土와 莫大한 年金을 要求하였다. 하지만 로베르의 統治는 노르망디 사람들의 不滿을 가져왔고, 노르망디 貴族들의 付託을 받은 헨리는 프랑스의 默認 아래 1106年 노르망디를 征伐하여 탱슈브레 戰鬪에서 로베르의 軍隊를 擊滅하고 노르망디를 手中에 넣는다. 以後 로베르는 잉글랜드로 押送되어 嚴重한 監視속에 餘生을 보내게 된다.

宗敎的 摩擦 [ 編輯 ]

兄과 달리 헨리 1世는 안셀무스와 初期에는 親近한 關係를 維持하였으나 얼마後부터는 不便한 關係를 이어가는데 理由는 亦是 聖職 任命權 때문이였다. 州敎職과 修道院長職이 莫大한 富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고있던 헨리는 數次例에 걸쳐 自身에게 任命權을 附與할 것을 要請하였으나 當時 敎皇 파스칼 2歲 는 그의 要請을 每番 拒絶하였으며 以後에는 아예 世俗 君主가 聖職者들에게 封土를 下士는 것과 聖職者들이 君主들에게 忠誠을 誓約하는 것을 禁止해버렸던 것이다. 안셀무스는 이에따라 헨리로부터 任命받은 聖職者들에 對한 築城을 拒否하였으며 王에 對한 忠誠誓約 亦是 拒否하였다. 結局 안셀무스는 두 番째로 캔터베리를 떠나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摩擦은 王과 敎皇 그리고 大主敎들 사이에 수많은 便紙와 懷柔, 脅迫이 오간 以後 1107年 탱슈브레 戰鬪 直前에 웨스트민스터 協約으로 妥結되었는데 利로인하여 王은 聖職 任命權을 抛棄하였으나 主敎와 修道院長들은 築城 前에 王에 對하여 敬意를 表示해야 하였다. 이는 後에 있을 보름스 協約 에 本보기가 되었다.

後繼 [ 編輯 ]

그의 외아들이었던 윌리엄은 1120年 11月에 타고있던 배가 暗礁에 부딪혀 沈沒한 事故로 溺死하였다. [1] 헨리에게는 다른 赤字가 없었으므로, 法廷推定相續人 은 딸인 마틸다 가 되었다. 1125年 獨逸 皇帝 하인리히 5歲 가 죽자 王妃였던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불렀고, 主要 貴族들 앞에서 그女를 自身의 後繼者로 認定할 것을 誓約하게 하였다. [2] 그女는 以後 貴族들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앙주 伯爵 풀크 의 아들인 조프루아 와 結婚하여 헨리 2歲 를 낳게 된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여도 女王의 前例가 없었고, 앙주 伯爵 家門에 對한 貴族들의 反感이 强한 狀態에서 그女에 對한 貴族들의 支持는 형편없었다. 結局 헨리 1歲가 世上을 떠난 以後 葛藤이 本格化되어 王의 조카였던 블루아의 스티븐 이 王位를 簒奪하게 된다.

業績 [ 編輯 ]

그는 잉글랜드의 行政, 官僚體系를 제대로 돌아가게끔 組織한 能力있는 君主였다. 또한 巡廻法定制度를 施行하여 國家社會의 틀을 잡아나가는데 至大한 貢獻을 한 것으로 評價받는다.

各州 [ 編輯 ]

  1. 김현수 <이야기 寧國寺> 청아출판사 2006.1.5, p112
  2. 김현수 <이야기 寧國寺> 청아출판사 2006.1.5, p113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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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任
윌리엄 2歲 (잉글랜드)
로버트 2歲 (노르망디)
잉글랜드의 王
노르망디 工作 (앙리 1歲로서)
1035年 - 1187年 (노르망디)/ 1066年 - 1187年 (잉글랜드)
後任
스티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