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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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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파블로 피카소 (1962년)
파블로 피카소 (1962年)
身上情報
出生 1881年 10月 25日 ( 1881-10-25 )
스페인 말라가
死亡 1973年 4月 8日 ( 1973-04-08 ) (91歲)
프랑스 무쟁
職業 畫家 , 彫刻家 , 그래픽 디자이너 , 版畫家 , 按舞家 , 陶藝家 , 포스터 디자이너 , 揷畵가 , 寫眞家 , 衣裳 디자이너 , 디자이너 , 寶石 디자이너 , 그래픽 藝術家 , 制度史 , 壁畫가 , 아상블라주 作家 , 콜라주 製作者 , 舞臺 디자이너 , 데생畫가 , 脚本家 , 視覺 藝術家
宗敎 無宗敎
스승 호세 루이스 이 블랑코 , Isidoro Brocos , Antonio Munoz Degrain
弟子 쿨로 그린
分野 西洋畫, 彫刻, 詩文學
思潮 立體派 , 超現實主義 , 後期印象主義
受賞 레닌 平和賞 (1962)
父母 호세 루이스 이 블랑코 (簿)
마리아 피카소 이 로페스 (某)
配偶者 Olha Khokhlova (1918 - 1955)
Jacqueline Roque (1961 - 1973)
同居人 Nusch Eluard
도라 마르 (1936 - 1944)
Fernande Olivier (1904 - 1912)
Marie-Therese Walter (1927 - 1935)
Francoise Gilot (1948 - 1953)
Eva Gouel ( - 1915)
子女 파울로 피카소 , Maya Widmaier-Picasso , Claude Picasso , 팔로마 피카소
主要 作品
게르니카 , 아비뇽의 處女들 , 시카고 피카소 , 세 사람의 音樂家 , 科學과 自費 , 파이프를 든 少年 , 韓國에서의 虐殺
影響
앙리 루소 , 폴 세잔 , 아프리카 彫刻 , Maria Prymachenko
署名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 스페인語 : Pablo Ruiz Picasso , 1881年 10月 25日 ~ 1973年 4月 8日 )는 스페인 말라가 에서 태어나 主로 프랑스 에서 美術活動을 한 20世紀의 代表的 큐비즘 作家다. 代表作으로 《 아비뇽의 處女들 》, 《 게르니카 》 等이 있다.

피카소는 1萬 3,500餘 點의 그림과 700餘 點의 彫刻品을 創作했다. 그의 作品 數를 全部 합치면 3萬餘 點이 된다. 그 作品의 個數와 多樣性 때문에 많은 藝術史學者들이 그의 作品들을 時期別로 分類하는 作業을 繼續했지만 各 時期의 名稱을 定하고 時期를 '몇 個로 나눌 것 인가'를 놓고 繼續 意見이 나뉘고 있다.

1904年 피카소는 이른바 '薔薇빛 時代'를 열었다. 이 時期의 作品들 亦是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 때 그려졌지만, 오늘날 그것들은 그의 初期 作品들과는 달리 스페인 畫風이 아니라 프랑스 畫風에 가까운 것으로 評價되고 있다. 이 2年의 期間 동안 피카소는 前과는 달리 붉은色과 粉紅色을 많이 使用했다. 이러한 變化가 일어난 것은 그가 많은 그림들의 主題로 삼았던 페르낭드 올리비에 와의 로맨스 때문이라는 意見이 支配的이다.

피카소는 主로 프랑스 에서 活動하였지만, 프랑스 政府에서 社會主義者 로 分類되어 프랑스 市民權을 갖지는 못했다.

피카소는 프랑스 共産黨 원으로 活動한 社會主義者 였으며, 韓國 戰爭 에서 벌어진 美國 의 殘虐行爲(예: 美軍 忠淸北道 永同郡 노근리에서 韓國人들을 戰鬪機 機關銃 으로 虐殺 한 노근리 虐殺)에 對해서 批判하였다. 1951年 그는 '韓國의 虐殺'(Massacre in Korea)을 發表하였고, 유엔 과 美國의 韓國戰爭의 介入을 反對하였다. 1973年 92歲의 나이에 많은 그림들을 남기고 世上을 떠났다.

피카소는 美術 活動을 통하여 社會的 問題를 알렸다. 代表的으로 스페인 內戰 에서 게르니카 民間人들이 나치 獨逸 空軍의 暴力 으로 虐殺당한 게르니카 虐殺事件( 1938年 )을 告發한 《 게르니카 》가 있다.

生涯 [ 編輯 ]

1889年, 피카소와 그의 女同生 로라(Lola)

피카소는 1881年 10月 25日 에스파냐의 港口 都市인 말라가에서 出生하였다. 父親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畫家로 公立 美術 學校 敎師였고 피카소는 母親 마리아의 姓을 繼承하였다.

14歲에 집안은 바르셀로나로 옮겨 갔으며, 피카소는 父親이 敎鞭을 잡고 있던 그 곳 美術 學校에서 배웠다. 이 무렵에 이미 그는 수르바란과 벨라스케스의 事實에 눈을 떴고 美術展에서 賞을 받을 만한 力量을 發揮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5歲 때 그는 마드리드에 나와서 山페르난도 王立 아카데미에 入學하였다. 그러나 學校에서 授業에도 滿足하지 못하여 프라도 美術館을 每日 다니다시피 名畫를 鑑賞하였는데 特히 그레코 에 熱中하였다. 그리하여 漸次 父親과 官學派의 影響을 벗어난 그는 1901年에 當時 파리 몽마르트르 의 술집을 根據로 하여 機智와 諷刺를 武器로 삼고 世紀末의 風俗을 그리고 있던 畫家 로트레크 와 스텐렌의 作品에 이끌리어 파리의 땅을 밟게 되었다.

1901年부터 4年 동안 피카소는 파리와 父親이 있는 바르셀로나를 往來하면서 社會의 敗殘者, 뒷거리의 영락한 사람들, 老人, 孤獨者 等의 人間 賞을 畵面에 捕捉하였다. 그러나 決코 基地와 諷刺를 쓰지 않고 對象에 充分한 共感을 가지고 그렸던 것이다. 對象은 짙은 파랑의 거의 한 가지 色 속에 表現되고 있었다. 畵面의 形體는 야위었고 線은 病的일 만큼 섬세하며, 色彩는 어둡고 안타깝고 또한 아름답다. '눈물에 흥건히 젖은 藝術, 촉촉한 溪谷의 푸르름'(시인 아폴리네르의 坪), 이것이 이른바 '淸 色의 時代'이다. 이 時代의 作品에는 <愛情>, <늙은 유대人>, <다림질하는 女人> 等이 有名하다.

파블로 피카소 (1908年)

이 時代를 이어 짧은 期間인 '粉紅色의 時代'(1904∼1906)가 繼續된다. 畵面은 밝은 年 粉紅色으로 彩色되고 簡素한 形體 把握으로, 對象은 겨우 물 속에서 이제 막 떠올라 와 畵面에 붙여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當時에 피카소는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바토 라보아르' (詩人 막스 자콥의 命名)에 居處를 定하고 親舊와 戀人도 사귀게 되어 視野를 內面에서 外面으로 넓혀 갔다. 그는 서커스에도 興味가 있어 <功을 타는 少女> <아를퀴앵의 家族> 等 流浪하는 演藝人을 많이 對象으로 하였다. 有名한 銅版畫 <살探訪크>(16점, 1913年 出版)의 製作도 거의 이 무렵이었다. 이 銅版畫는 油菜와 같이 方今이라도 形體를 잃을 것만 같은 섬세한 線으로 그려져 있다.

피카소는 큐비즘을 推進하고 있던 時期에도 때로는 생생한 手法으로 돌아왔으며, 이 傾向은 第1次 世界 大戰으로 인하여 큐비즘에 事實上의 終止符가 찍혀진 무렵부터 더욱 그러하였다. 特히 1917年 피카소에게 한 電氣가 닥쳐온다. 이 해에 張 콕토 로부터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 團을 위한 舞臺 裝飾의 共同 作業을 勸誘 받은 피카소는 콕토와 더불어 로마에 갔다. 그리하여 같은 그 해에 一旦 파리로 돌아온 피카소는 다시금 나폴리·폼페이·피렌체 等地로 古代와 르네상스의 美術行脚을 한 後, 1920年 드디어 神 古典主義의 앵글을 생각하게 하는 畫風을 擇했던 것이다. 이 以後의 3年 肝을 피카소의 '神 古典派 時代'라고 한다. 아내인 오르가와 長男 폴을 모델로 한 '母子' 시리즈는 이 時期의 作品으로서 有名하다. 그런데 같은 時期에 <歲 사람의 音樂家>와 같은 矛盾된 手法의 大作도 나왔으나, 1924年에는 다시 畵面 構成을 主로 하는 臺靜物 시리즈에 着手하였는가 하면 다음 1925年에는 幻想·奇怪의 表現으로 登場한 쉬르레알리즘 運動에 關與했다. 또한 1930年에는 로마의 詩人 오비디우스의 <변신보>와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는 傑作>에 古典主義的 手法인 銅版畫에 依한 揷畵를 그렸다.

1934年 피카소는 長期間 母國에 머물렀다. 이 滯在의 膳物로서 그는 그 해에 많은 鬪牛度를 그렸다. 이 묘화는 언제부턴가 그리스 神話의 미노타우로스 傳說의 幻想이 되어 이듬해에 아름다운 銅版畫를 製作하였다. 그러나 1937年 獨逸 空軍이 바스크 地方의 無防備한 小都市인 게르니카를 爆擊 하자 그는 卽時 붓을 들어 이에 抗議하는 大作을 그렸다. 이것이 그해 파리에서 열린 萬國 博覽會의 에스파냐 管을 裝飾한 有名한 < 게르니카 >이다. 퀴비슴 以來에 오로지 藝術의 範圍 內에서만 行하여진 듯이 보인 閨門의 姿勢를 피카소는 <게르니카>로써 平和와 自由를 威脅하는 侵略者를 向하여 糾彈했던 것이다.

第 2次 世界 大戰 直後 피카소는 남 프랑스에 있으면서 主로 石版畫와 陶器의 製作에 熱中하였다. 어느 것이나 當時 새로이 손을 댄 分野였으나 이 分野에서도 그는 現代美術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 評價 받은 그대로 發見하고 學習을 硏究하고, 開拓하고, 創造하는 旺盛한 意欲을 불태워 커다란 成果를 올렸다. 또 1950年代부터는 걸쳐서는 벨라스케스 , 들라크루아 , 크라나하, 마네 , 다비드 等의 名作과 對決하여 이것을 自己의 樣式化한 獨特한 模作에서 새로운 進路를 追求하였다.

關聯書籍 [ 編輯 ]

  •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한다》(앙드레 말로 저, 박정자 飜譯, 2007年 5月 기파랑)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