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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大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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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大帝
Carolus Magnus
알브레히트 뒤러의 카롤루스 초상화
알브레히트 뒤러의 카롤루스 肖像畫
로마인의 皇帝
在位 800年 12月 25日-814年 1月 28日
戴冠式 800年 12月 25日
共同在位子 루도비쿠스 1歲 피우스 (813年?814年)
後任 루도비쿠스 1歲 피우스
랑고바르드仁義 王
在位 774年 7月 10日-814年 1月 28日
戴冠式 774年 7月 10日
前任 데시데리우스
共同在位子 피피누스 카를로마누스 (781年?810年)
베르나르두스 (810年?818年)
後任 루도비쿠스 1歲 피우스
프랑크人의 王
在位 768年 10月 9日-814年 1月 28日
戴冠式 768年 10月 9日
前任 피피누스 3歲 브레비스
共同在位子 카를로마누스 1歲 (768年?771年)
카롤루스 이우니오르 (800年?811年)
後任 루도비쿠스 1歲 피우스
이름
카롤루스
別號 마그누스
身上情報
出生日 742年 4月 2日(或은 740年, 747年)
出生地 프랑크 王國 왈롱나 週 에르스탈 某處 (不確實)
死亡日 814年 1月 28日
死亡地 프랑크 王國 아헨 (現在 獨逸令)
國籍 프랑크 王國
王朝 카롤루스 王朝
父親 피핀 3歲
母親 베르트라다 드 랑
配偶者
子女
宗敎 로마 가톨릭교회
墓所 아헨 大聖堂
署名

카롤루스 大帝 ( 라틴語 : Carolus Magnus 카롤루스 마그누스 [ * ] , 獨逸語 : Karl der Große 카를 데어 그로세 [ * ] , 프랑스語 : Charlemagne 샤를마뉴 [ * ] , 英語 : Charlemagne 샬러메인 [ * ] , , 스페인語 : Carlomagno 카를로마뇨 [ * ] , 740年 或은 742年 4月 2日 또는 747年 ~ 814年 1月 28日 )는 카롤루스 王朝 第2代 프랑크 國王 이자 初代 로마인의 皇帝 이다. 大韓民國 에서는 라틴語 發音을 따른 카롤루스 마그누스 , 프랑스語 發音을 따른 샤를마뉴 , 獨逸語 發音을 따른 카를 大帝 로도 알려져 있다.

카롤루스는 西部, 中部 유럽 大部分을 차지해 프랑크 王國 을 크게 擴張했다. 在任하는 동안 이탈리아 를 征服하여 800年 12月 敎皇 레오 3歲 에게 東로마 皇帝 와 對比되는 서로마 皇帝 職을 授與 받았으며, 皇帝가 되고서 敎會 통해 藝術, 宗敎, 文化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 를 일으켰다. 國內外的인 카롤루스의 業績은 西유럽과 中世時代를 定義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프랑스 , 獨逸 , 이탈리아 , 神聖 로마 帝國 等 在任年表에서 샤를 1歲 또는 카를 1歲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피핀 의 뒤를 이어 동생인 카를로灣과 함께 王國을 統治하였고 後에 사이가 나빠지자 戰爭의 危機가 닥쳤으나 카를로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비를 넘겼다. 프랑크 王國을 威脅하던 사라센 과 戰爭을 일으키던 中 武勳詩 롤랑의 노래 에서 言及되었던 론세스바예스 戰鬪 ( 779年 )에서 끔찍한 敗北를 겪기도 하였으나 敎皇의 保護者가 된다는 아버지의 政策을 繼續 施行해 나아갔다. 778年부터 802年까지는 이베리아 半島의 사라센인들을 擊退하였다. 또한 롬바르드 王國 , 사라센 과의 長期戰爭을 끝낸 後 유럽 東쪽에 사는 民族 中 特히 작센族 을 778年부터 800年代까지 隨時로 遠征, 굴복시켜 가톨릭교로 改宗시킨 後 自身의 領土로 移駐시켜 後날 오토 王朝 出現에 발板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카롤루스는 프랑스, 獨逸에서 카롤링거 王朝 를 創業하고 神聖로마帝國 皇帝에 卽位한 最初의 人物이자 로마 帝國 以後 처음으로 大部分의 西유럽을 征服하여 政治的, 宗敎的으로 統一시킨 王으로 有名하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는 現在 유럽의 正體性에 발板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事後 그는 '大帝'로 飜譯되는 마그누스(라틴語) 또는 마뉴(프랑스어)의 稱號를 얻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初期 生涯 [ 編輯 ]

랭스 大聖堂 에 묻힌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 의 墓

카롤루스는 740年 또는 742年 4月 2日 벨기에 리에주 近處인 프랑크 王國 왈롱나 週 에르스탈 에서 피핀 3歲 와 레온 出身 베르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왈롱나 週 에르스탈 은 아버지 피핀 3歲 의 別莊이 있는 곳이었다. 카롤루스는 피핀 3歲 랑의 베르트라다 와 正式으로 結婚하기 前에 태어난 아들이었다는 傳承도 있다. 이때문에 카를로만 2歲 나 카롤루스의 反對派들은 샤를마뉴를 正式 結婚式을 올리기 前에 태어났다 하여, 카롤루스를 私生兒로 規定하며 人身 攻擊하였다.

어머니 랑의 베르트라다 는 母系로 메로빙거 王朝 의 外孫이었다. 카롤루스가 태어나기 前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 피핀 2歲 의 庶子였으나 嫡母 플렉트루디스 와 배다른 조카들을 몰아낸 뒤, 權力을 掌握하였다. 이어 사라센 君의 侵入에 抗拒, 프랑크 王國 을 救援하여 名聲을 쌓았고, 카롤루스가 어렸을 때 아버지 피핀 은 王族과 그의 兄弟들과의 싸움을 통해 權力을 차지했고 751年에는 敎皇 자카리아 의 承認을 받아 메로빙거 王朝 의 마지막 君主 힐데리히 3歲 를 廢位하고 프랑크 會議에 依해 王이 되었다. 한便 그는 少年期에 아버지 피핀이 兄弟들을 除去하고 權力을 爭取하는 過程을 目擊하면서 자랐다.

카롤루스가 태어난 뒤 동생인 카를로만 , 女同生 基셀라, 동생 피핀(Pepin), 카로테이스(Chrothais), 아델라이트(Adelaide) 等이 태어났다. 이 中 카를로만 2歲 와 基셀라를 除外하고는 모두 夭折하고 만다. 카롤루스는 일찍부터 父王을 닮아 欲心이 많았고, 權力에 對한 不屈의 意志를 갖고 있었다. 外的에 對抗해 斷乎하게 싸우고 機會만 있으면 領土를 넓히려는 傾向, 가까운 親戚들의 權利를 빼앗는 限이 있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欲心도 배우게 되었다. 한便 카를로만 2歲 는 카롤루스가 父母의 結婚 前에 태어났다며 그를 私生兒라고 깎아내렸다. 카롤루스나 카를로만 2世는 서로 自身만이 아버지의 眞正한 後繼者라고 主張했고, 아버지 피핀 3歲 는 두 兄弟에게 서로 協力할 것을 說得했지만 所用이 없었다.

幼年期 [ 編輯 ]

754年 字카리아의 뒤를 이어 敎皇이 된 스테파노 2歲 롬바르드族 의 攻擊으로 도움을 要請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王國을 訪問하였는데, 이때 카롤루스는 國王의 長子 資格으로 敎皇을 迎接했다.

스테파노 2世는 피핀 과 그의 아들인 카롤루스, 카를로萬에게 王號를 授與했고, 이에 피핀 은 스테파노 2世에게 敎皇의 領地 內에서 롬바르드族의 逐出을 約束한다.

以後 피핀은 760年부터 아키텐 地域으로 해마다 進出하면서 피레네山脈 까지가 프랑크 王國의 領土임을 確認하였고 그 遠征에는 언제나 카롤루스가 同行하였다. 父王 生前 貴族價의 딸 이멜트壘다와 結婚했으나 그가 畸形兒인 곱사등이 피핀을 낳자 카롤루스는 다시는 그女를 가까이 하지 않고, 랑고바르드 王國 의 王 데시데리우스 의 둘째 딸 데시데리아와 再婚했다. 그러나 771年 데시데리우스가 自身과 동생 카를로만 2歲의 競爭에서 동생 카를로만의 손을 들어주자 카롤루스는 데시데리아를 廢하고, 히스파니아 伯爵의 딸 힐데가르트와 再婚하였다.

768年 9月 24日 아버지 피핀 3歲 가 죽자 王位를 繼承하였다. 그는 아우스트라시아 와 北部 地域을 차지하고 프랑크 王國 의 王(Rex Francoeum)이라는 稱號를 받았다. 동생 카를로만 2歲 부르군트 프로방스 , 네우스트리아 를 相續받았다.

統治의 始作 [ 編輯 ]

772年 敎皇 아드리안을 訪問
모눌리스 大聖堂의 샤를마뉴 壁畫

卽位 初, 피핀의 죽음을 奇貨로 아키텐 에서 分離獨立을 試圖하는 叛亂을 일으켰다. 카를은 卽位 첫해 이들을 無慈悲하게 鎭壓하였다. 그해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 發生한 各種 게르만족 의 叛亂 亦是 無慈悲하게 鎭壓했다. 또한 바스크族 을 國境 밖으로 몰아내고 바스코니아와 툴루즈에 邊境伯을 派遣하여 城郭을 修築하고 變更을 防備하게 했다. 가스코뉴 라는 地名은 이때 그가 設置한 바스코니아 變更백령에서 地名이 由來되었다.

그는 40餘 年에 걸친 在位 期間 동안 四方을 占領하여 大統一 事業을 成就하였으며, 772年 작센을 征伐한 뒤 804年까지 작센의 分離獨立을 鎭壓하여 完全히 服屬시켰고, 774年에는 敎皇의 請으로 북이탈리아 랑고바르드 王國 을 멸망시켜 이를 合倂하였다. 777年과 778年에는 사라센을 討伐했지만 이베리아半島 遠征에서 慘敗했고 802年 사라센 族을 討伐하였다.

피핀이 죽은 뒤 동생 카를로만 2世와 王國을 分割하여 統治하였으나, 771年에는 동생 亦是 죽어 單一 統治者가 되었다. 이 過程에서 自身의 便을 들지 않고 동생 카를로만의 便을 든 랑고바르트 王國의 王 데시데리우스 를 치고, 이탈리아를 占領하였으며 占領한 이탈리아의 一部를 로마 敎皇 에게 寄贈했다. [1] 772年부터 804年까지 몇 次例의 遠征을 敢行하여 작센族을 征服하였으며,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王國도 征服하였다. 또한 스페인 國境에 變更令을 設置하고, 바이에른 케른텐 倂合하였다. 그리고 아바르族 · 벤드族 을 征服하는 等, 西유럽 의 政治的 統一을 達成하였다.

그는 이 廣大한 領土를 支配하기 위하여 各 部族이 施行하던 部族法典을 成文化하여 各 部族의 獨立性을 認定하였고, 아울러 中央에서 그라프·巡察使 等의 管理를 派遣하여 中央集權的 支配를 可能하도록 하였다. 地方 封建 制度를 積極的으로 活用하여 中世 여러 封建國家가 發展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支配한 部族에게는 基督敎 信仰으로 改宗시켜서 思想的 統一을 꾀하기도 했다.

프랑크 王 卽位와 戰爭 [ 編輯 ]

卽位 初盤과 再統一 [ 編輯 ]

그의 治世期間을 記錄한 로쉬 修道院 의 文書(냄새가 좋다)

768年 피핀이 죽자 프랑크 王國의 오랜 慣習에 따라 王國은 그의 두 아들에게 分割되었다. 피핀 3歲 의 죽음을 契機로 아키텐 이 獨立을 試圖하였으나 카롤루스는 재빨리 軍士를 派遣하여 아키텐을 征伐하고 工作의 降伏을 받아냈다. 그러나 兄弟 사이에 葛藤이 일어났다. 카를로만 2世는 死亡했고 結局 카롤루스가 勝利했으며 自己를 背信하고 카를로만의 便을 든 이탈리아 北部의 롬바르드 王國 을 攻擊하여 멸망시키지 못했다.

同時에 데시데리우스 의 딸인 王妃 데시데리아 를 廢位시켜 修女院에 보냈다. 774年 初부터 롬바르드의 首都인 파비아 包圍 攻擊이 아직 進行되고 있는 동안 카롤루스는 로마 로 가서 敎皇과 함께 774年 4月의 復活節 祝祭에 參席하고, 롬바르드 王國令의 大部分을 敎皇領 으로 移讓하겠다는 아버지의 約束을 聖 베드로 聖堂 에서 再確認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가 實際로 넓혀준 敎皇領의 領土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로마 隣近地域을 除外한 롬바르드 王國令에 對한 統治權은 自身이 차지했다. 敎皇廳에서는 領土가 적다고 反撥하였으나 곧 撫摩되었다.

작센 遠征 [ 編輯 ]

772年 카롤루스는 니더작센 베스트팔렌 地方에 居住하던 작센族 을 攻擊했다. 그러나 774年 작센族은 다시 分離 獨立을 祈禱한다. 카롤루스는 775年부터는 征服 戰爭과 함께 작센族을 基督敎 로 改宗시켜 프랑크 王國 에 자연스럽게 吸收, 統合시키려는 試圖도 竝行하였다. 카롤루스는 自身의 뜻대로 된다고 速斷하였다. 작센族 貴族들이 그에게 忠誠을 誓約하고 775年~777年에 작센 에서는 大規模의 洗禮式이 擧行되고 改宗을 宣言했기 때문이다.

카롤루스는 가톨릭 宣敎師들을 작센에 派遣하여 布敎를 支援했다. 777年에 파더보른에서 開催된 프랑크 王國 議會에서는 작센族의 降伏을 調印했다. 그러나 작센族은 隨時로 分離獨立을 祈禱한다.

이베리아 半島 遠征과 慘敗 [ 編輯 ]

샤를마뉴가 보낸 使節을 맞이하는 하룬 알 라시드

777年 여름 사라고사 市의 무슬림 總督 이븐 알아라비 는 프랑크 王國의 年例 會議에 參席하였다. 이븐 알-아라비는 會議에서 自身은 사라센 君主 아브드 알라흐만 1歲 에 對抗해 叛亂을 벌이던 中이었고, 그가 自身을 保護해 준다면 그 代價로 都市를 바치겠다고 提案했다. 그 해 여름, 카롤루스는 이슬람系 우마이야 王朝 가 統治하던 히스파니아 (스페인)으로 進擊하여 사라고사 를 包圍했지만 그 都市를 占領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븐 알아라비 가 自身을 속였다는 事實을 알게 되었다.

778年 여름, 카롤루스는 다시 軍士를 이끌고 사라고사를 包圍하고 이븐 알-아라비 에게 名目에 不過한 服從을 받아낸 뒤, 론세스바예스 고갯길을 거쳐 피레네山脈 을 넘어 退却했다. 8月 15日 프랑크 軍隊는 피레네山脈을 넘어 退却을 開始하던 中 바스크族 의 攻擊을 받고 慘敗를 當했다. 브르타뉴 遠征 때 活躍했던 롤랑 도 이때 죽었는데 그는 나중에 《 롤랑의 노래 》이라는 詩가 文學에 登場하게 된다.

그의 外조카이자 브르타뉴 邊境伯 롤랑은 女同生 베르타의 아들로 아버지는 몰린(Mollin)이었다. 778年 여름 카롤루스가 이베리아 半島를 遠征할 때 롤랑은 撤軍 直前 後方을 指揮하고 있었다. 이때 베르타의 새 男便이던 가느롱은 和平交涉을 主張했다. 가느롱은 詩라고사의 王과 짜고 後退하는 프랑크 軍을 攻擊하게 했다. [8月 15日 가느롱의 背信으로 론세스바예스 고갯길을 내려오기 始作한 後위 扈衛隊는 롱스洑에서 롤랑 一行은 사라고사의 王 마르시르 의 大軍에게 襲擊을 받는다. 롤랑은 퉁소를 불어 카롤루스를 부르라는 親舊 올리비아 의 說得을 세 番이나 물리치고 열 두 將軍과 함께 奮戰한다. 그러나 數的으로 不利해지자 마침내 퉁소를 불었으나 이미 한참을 退却하던 카롤루스의 援軍이 오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고, 이들은 모두 神에게 起源을 드리면서 죽어간다. 또한 바스크族은 物資를 실은 馬車를 掠奪한 뒤 山 속으로 숨어버렸다.

뒤늦게 喇叭 소리를 듣고 롱스步 로 달려온 카롤루스는 戰死한 이들의 屍身을 보고 사라고사로 쳐들어가 焦土化를 시키고 돌아온다. 그 뒤 戰死者를 鄭重하게 葬事 지내는 한便 사라고사 王의 賂物을 받은 街느롱 을 處刑한다. 이 戰鬪에서 莫甚한 被害를 입었고 카롤루스는 戰鬪 自體를 緘口하게 하여 오랫동안 隱蔽하였으며, 802年까지 히스파니아 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론세스바예스 戰鬪 는 敗北로 끝났지만 이는 後代에 各種 文學 作品의 素材가 된다.

西南部 遠征 直後 [ 編輯 ]

다섯째 아들 경건왕 루이 를 데리고 축성받으러 가는 샤를마뉴

카롤루스가 히스파니아 에서 苦戰하는 동안 自治權을 되찾으려는 帝國 東部의, 작센族 이 다시 反旗를 들었다. 카롤루스는 이를 卑劣한 背信으로 規定하고 全面戰을 宣布한다. 카롤루스는 基督敎 로 洗禮를 받고 神의 이름으로 忠誠을 誓約한 이 작센族 의 抵抗은 政治的 背信이자 宗敎的 變節, 犯罪로 보고 이런 犯罪에는 苛酷한 膺懲을 내릴 必要가 있다고 宣言했다. 카롤루스는 18回에 걸쳐 작센 으로 出征, 작센族의 叛亂을 平定하였다.

한便, 781年 카롤루스는 再次 로마를 訪問해, 敎皇에게 自身의 두 아들인 피피노 루트비히 에게 築城케 하였다. 그리고 피피노와 루트비히에게 各各 롬바르드 아키텐 의 王位를 授與하였다. [2] 또한 東로마 帝國 콘스탄티누스 6歲 의 母后로서 攝政을 맡고 있던 이레네에게서 自身의 이탈리아 支配를 事實上 承認받았다. 그러나 프랑크 王國이 787年에 東로마 帝國이 다스리던 이탈리아 南部를 攻擊한 뒤 友好 關係는 깨어졌다.

788年 카롤루스는 튀링겐 바이에른 을 征伐, 할머니 로트루드의 親庭 一族이며, 自身의 親 姑從四寸이기도 한 바이에른 部族長 出身 바이에른 工作 타실로 3歲 를 廢位함으로써 라인江 東部에 남아 있는 게르만족 領土를 손에 넣었다. 이어 巡察使와 그라프, 邊境伯 等을 中央에서 派遣하여 直接 統治하였다. 게다가 아바르 王國 에 屬해 있던 公國들과 도나우江 流域에 새로 建設된 슬라브 界 不足 國家들도 프랑크 王國의 宗主權을 認定하고 間接 統治를 받게 되었다.

783年 王妃인 힐데가르트 와 어머니 랑의 베르트라다 가 連이어 죽었다. 그해 그는 파스트라다(Fastrada)와 再婚하였다. 794年 파스트라다가 죽자 그는 더以上 再婚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러 名의 後宮이 있었고 이름이 알려진 後宮은 7名이었다.

東部 異民族과의 戰爭 [ 編輯 ]

黃金第 카를 大帝 胸像

788年 아바르族 이 帝國을 侵略, 헝가리 오스트리아 北部, 프리鬱李 , 바이에른 等 內陸까지 侵入해 들어왔다. 카롤루스는 軍士를 일으켜 790年 까지 이들과 싸웠다. 790年 다뉴브江 가에서 아바르族을 크게 물리쳐서 國境 밖으로 몰아냈지만 아바르 族이 다녀간 곳은 크게 荒廢化되었다.

789年 初 카롤루스는 바이에른으로 가 할머니 로트루드의 親戚이기도 한 바이에른 不足工作 타실로 3歲 를 非正統 統治者라고 主張하며 廢位했다. 이어 타실로를 强制로 修道院으로 보내고 直轄領으로 삼았다. 이어 領地를 相續받지 못했던 靑年 샤를 네우스트리아 의 王과 마이네 伯爵 에 봉한다. 794年에는 바이에른을 다스리던 아길롤핑 家門의 權限을 剝奪한 뒤, 바이에른 에 細部 行政區域으로 分割하고 行政官들을 派遣하였다.

789年 오스트리아 밖에 있던 슬라브족 작센 으로 쳐들어와 엘베로 誤報트리테(Obotrite)를 占領했다. 카롤루스는 卽時 軍士를 이끌고 작센으로 出兵하여 슬라브족을 사로잡았다. 카를은 슬라브 指導者 非젠(Witzin)을 生捕하고 降伏을 받아낸 뒤 그는 많은 戰利品을 獲得했다. 同時에 카롤루스는 이 異敎徒들을 基督敎 로 改宗시키고, 宣敎師를 派遣했다. 791年 8月에는 다뉴브江 東쪽까지 進出한 아바르族을 攻略하였다. 아바르族이 建設한 쿠메오베르크 要塞로 進軍瑕疵 아바르族은 初期에 白兵戰을 計劃했지만 프랑크君의 重武裝한 狀態를 보고 白兵戰을 하다가는 警甲옷으로 武裝한 自身들에게 不利하다 보고 城을 버리고 逃走했다. 792年 작센族이 混亂을 틈타 叛亂을 일으켰지만 곧 鎭壓하였다. 이어 말머리를 돌려 노달氷期아(Nordalbingia)와 베스트팔렌 을 占領하였다. 그가 바이에른과 東北部를 征伐하러 간 사이 아들 꼽추 피핀 이 貴族들과 叛亂을 일으켰으나 곧 鎭壓했다. 火가 난 카를은 꼽추 피핀을 修道院에 監禁해버린다.

795年 작센族 이 다시 叛亂을 일으켰다. 카를은 일찍이 忠誠을 盟誓했던 작센族의 分離獨立 氣道를 卑劣한 叛亂으로 規定하고 强勁하게 鎭壓했다. 796年 작센族이 다시 에르기난(Engrian)을 中心으로 分離獨立을 祈禱했지만 亦是 쉽게 鎭壓한다. 796年 작센 叛亂을 直接 鎭壓할 동안 프리鬱李 侯爵 에릭 等에게 軍士를 주어 帝國 南西部로 판노니아 ,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를 征伐했다. 이때 크로아티아는 비體슬라프 라는 不足孔에 依해 統治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크로아티아에서 다시 叛亂을 일으켜 트라사트 戰鬪 에서 이를 鎭壓하던 프리鬱李 侯爵 에릭이 戰死하고 兵士를 잃어 프랑크 軍隊는 큰 打擊을 받았다.

南部 政策 [ 編輯 ]

카롤루스의 肖像畫, 1858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 이 다스리던 롬바르드 사라센 이 다시 쳐들어왔다. 798年부터 799年 사라센 海賊들은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Sardinia)를 侵略했고, 799年에는 발레아레스 諸島에도 種種 쳐들어왔다. 제노바와 토스카나의 貴族들은 이들을 막지 못한다 하여 카롤루스의 權威에 挑戰했다. 그는 바그다드 로 使者를 보내 侵略을 中斷할 것을 促求했고, 797年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하론 알 라시드와 協定을 締結한다.

히스파니아 邊境에 있던 무어인 들이 다시 掠奪과 騷亂을 피웠다. 當時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 스페인 國境을 防禦하고 있었다. 785年부터 카를은 西南쪽으로도 進出하였으나 이들도 分離獨立을 祈禱했다.

곧 軍士를 보내 797年 바르셀로나 를 占領했다가 다시 무어인들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799年 경건왕 루트비히 가 軍士를 이끌고 쳐들어가, 800年부터 801年까지 對峙한 끝에 801年 겨울 바르셀로나 를 陷落시켰다.

各地를 征伐한 카롤루스는 各 部族이 傳統的으로 施行하던 部族法典을 尊重하되 이를 文書로 成文化하여 各 部族의 獨立性을 認定하였다. 다만 不足孔이나 傳統的인 部族長 代身 中央에서 그라프, 巡察使 等의 管理를 派遣, 直轄統治를 하여 叛亂을 豫防하였다. 脂肪封建制度를 積極的으로 活用하여 中世 여러 封建國家가 發展케 하였다.

서로마의 皇帝 [ 編輯 ]

皇帝 卽位 [ 編輯 ]

로마 에서 祭官 授與 場面( 800年 12月 25日 )
812年-814年 사이에 發行된 데나리우스 銀貨. KAROLVS IMP AVG 라고 새겨져 있다.

799年 5月, 敎皇 레오 3歲 는 反對派들의 襲擊을 받자 카롤루스의 宮廷으로 避身해 支援을 要請했다. 카롤루스는 敎皇 레오 3世에게 支援을 約束하고 護衛兵力을 붙여서 이탈리아 로 되돌려보냈다. 서로마 帝國 滅亡 以後, 로마 帝國의 宗主權은 東로마 帝國 에게 있는 것으로 認識되었다. 當時 로마 가톨릭 敎會 東로마 皇帝 의 干涉을 받고 있었고 로마 敎皇 東로마 帝國 의 影響力에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그 適任者로 프랑크 王國 의 카롤루스를 選擇했다.

敎皇의 提議를 받아들인 카롤루스는 800年 11月 敎皇과 함께 로마로 가서 反對派를 除去하고 敎皇에게서 皇帝의 禮遇로 迎接을 받았다. 聖 베드로 聖堂 에서 열린 聖誕節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皇帝라고 讚揚하자, 敎皇은 성유식을 집傳하여 카롤루스에게 王冠을 씌워주고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 라는 이름으로 서로마 의 皇帝로 임명하였다. 그는 짐짓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祭官을 授與받았다. 이로써 서로마 帝國의 復活이 宣言되었으나 東로마 帝國에서는 그를 皇帝로 承認하기를 拒否했다. 나중에 812年 東로마 帝國 皇帝인 미카엘 1歲 랑가베 는 카롤루스를 皇帝로 承認하였다. 그러나 프랑크人 의 皇帝라 稱하여 로마 皇帝 로 認定한 것은 아니었다.

當時까지만 해도 프랑크 王國은 形式的으로 東로마 帝國의 宗主權을 認定하고 朝貢을 바치는 處地였다. 그러나 800年頃 카롤루스 自身이 옛날 로마 帝國 의 西部地域을 거의 다 차지했다는 것과 東로마 帝國은 皇太后人 이레네가 다스리고 있다는 點이 그로 하여금 自身도 皇帝가 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카롤루스는 로마를 統治했던 東로마 帝國 皇帝로 事實상의 最後의 로마 皇帝로 認識되는 유스티니아누스 大帝 以後 自身이 適法한 로마 皇帝라고 宣言하였다. 皇帝 卽位는 形式的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는 對內外的으로 프랑크 王國의 統治權을 分明히 하고, 로마 가톨릭 敎會 와의 紐帶를 더욱 强化하며 同時에 以後 유럽의 國家들의 理想的인 統治 方向을 提示하는 것이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 編輯 ]

793年 부터 812年 사이에 쓰인 프랑크 王國의 銅錢

794年 카롤루스는 獨逸 北西部의 아헨 에 宮廷과 王室 敎會를 짓고, 이곳을 事實上의 首都로 定했다. 그는 古代 로마 帝國 의 威嚴과 榮光을 되살리고, 유스티니아누스 大帝 때의 로마 帝國 의 繁榮을 부활시킬 것을 宣言하고 古代의 學藝復興을 宣言하였다.

라바누스?마우루스 (왼쪽)과 앨퀸 (가운데), 마인츠의 오트가르 主敎 (오른쪽)

카롤루스는 自身의 宮廷을 政治와 行政 中心地뿐 아니라 文化의 中心地로 만드려는 計劃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아인하르트 와 英國의 앨퀸 , 롬바르디아 라바누스 마우루스 等과 같은 學者들이 아헨으로 招聘되었다. 카롤루스는 이에 힘입어 敎會 神父들의 著述과 古代 作家들의 作品을 所藏하는 王室 圖書館을 設立했으며, 젊은 技士들을 가르치기 위해 宮廷 學校를 새로이 創設하였다. 또한 올바른 宗敎 觀念과 道德性을 重視했으며, 올바른 觀念에 對한 歪曲을 警戒하여 모든 修道院 學校와 聖堂 學校에 라틴語와 라틴 文學을 集中的으로 工夫하라는 指示를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알퀴누스를 비롯한 著名한 學者들을 招聘하여 敎育을 專擔하게 했다.

이에 따른 文化的 自負心은 791年頃에 나온 《샤를마뉴의 冊》 (Libri Carolini)에 잘 反映되어 있다. 이 冊은 그리스인들과 敎皇의 全權 大使가 聖像 禮拜를 贊成하는 니케아 公議會 (787)에 對抗하고, 聖像 破壞令에 對해서 批判하는 內容을 실었다. 또한 아헨에 라벤나의 산 비탈레聖堂을 本으로 한 宮廷 聖堂等을 建立하여 標本으로 삼기도 했다.

한便, 各 地方에서 統治者를 代理하는 사람은 伯爵 侯爵 , 主敎였다. 地方官을 派遣할 수 없는 地域은 伯爵, 侯爵, 主敎 等에게 統治權을 一任했고, 이들과 宮廷의 關係는 카롤루스의 命令에 따라 各地를 돌아다니는 使節들을 통해 維持되었다. 王의 使節團은 大槪 2,3名이 한 組를 이루었는데 管理와 高位 聖職者로 이루어지는 境遇가 많았다. 이에 따라 前例를 깨고 王의 命令을 글로써 布告하였다.

카롤루스는 다양한 民族과 部族의 傳統的 權利를 原則的으로 尊重했고, 皇帝가 된 뒤에는 그 傳統的 權利를 記錄하게 했다. 프랑크 王國의 法令集은 여러 작은 部族의 律法을 反映하여 修正하고, 가장 다양한 方面에 適用시켜, 모든 階層에게 내려진 特殊한 法令이기도 했다.

덴마크의 海賊 [ 編輯 ]

샤를마뉴의 署名

카롤루스가 살아 있을 때 이미 海岸은 노르만族 의 威脅을 받고 있었고, 帝國의 東南部는 헝가리人 , 마자르族 , 슬라브족 等의 侵略이 繼續되었다. 또한 內部에서는 獨立하려는 다른 게르만 部族들의 叛亂도 隨時로 터졌다. 792年 노달氷期아를 征服 한후, 프랑크 王國의 國境은 스칸디나비아半島 와 接境하게 됐다. 스칸디나비아半島 에 있던 덴마크人 핀란드人 들은 카롤루스가 各地를 征服한 뒤 異常한 宗敎로 洗腦한다는 所聞을 듣고 憤怒와 恐怖感을 품게 된다.

末年에 이르자 카롤루스의 帝國도 조금씩 衰退해가고 있었다. 神權이 날로 成長하였으며, 厖大한 領土를 管理할 經濟的 與件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르만族 等 北方의 새로운 部族들이 海岸을 자주 侵攻하였다.

808年 덴마크의 王 고드프리(Godfred)는 덴마크를 保護할 생각으로 다네비르케(Danevirke) 地峽에서 슐레스비히에 이르는 地域에 將星을 쌓았다. 다네비르케 將星을 거의 다 쌓았을 무렵 덴마크의 海賊이 프랑크 王國 의 領土인 프리슬란트 와 플랑드르를 襲擊하고 돌아갔다. 고드프리는 프리슬란트 侵攻으로 프랑크 族의 侵略이 두려워서 프랑크 王國을 訪問했다가 아헨 에서 갑자기 살해당하고 만다. 出兵을 計劃한 카롤루스는 計劃을 取消했다. 고드프리의 조카이자 繼承者인 헤르만은 811年 下旬 프랑크 王國을 訪問하여 힐리겐 條約을 締結한다.

아바르族 征伐 [ 編輯 ]

샤를마뉴는 791年 8月부터 아바르族 에 對한 攻掠을 繼續하였다. 795年과 796年에는 아바르族이 판노니아 平原에 建設한 링 城郭을 攻掠, 이때 重武裝한 機甲兵을 帶同하였는데, 輕武裝이던 아바르族은 白兵戰을 計劃했다가 取消하고 逃走했다. 795年과 796年에는 그의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 아바르族 판노니아 平原에 만든 都市인 링을 攻擊하여 陷落시켰다. 이때 피피노 카를로만 아바르族 게르만 民族의 大移動 의 混亂期부터 掠奪로 모은 財物과 寶石을 全部 奪取하고 돌아왔다.

샤를마뉴는 軍士를 보내 판노니아族을 繼續 攻掠하게 했다. 結局 803年 아바르族 의 칸 조던은 降伏을 決定, 프랑크 王國 의 數도 아헨을 訪問하고 샤를마뉴의 臣下임을 盟誓했다. 조단은 그리스도교 洗禮를 받아 테오도르라는 洗禮名을 받아 되돌아갔다. 以後 아바르族을 판노니아 平原의 西部로 이주시키고 全部 그리스도교로 改宗시키게 된다.

末年 [ 編輯 ]

프랑크푸르트 에 세워진 카롤루스의 銅像

803年에는 판노니아 밖에 있던 크로아티아 部族長 비體슬라프 (Visheslav)를 비롯한 크로아티아의 部族長들이 自發的으로 歸順해왔다.샤를마뉴는 그 中 비體슬라프 크로아티아 工作 으로 임명해 이들을 다스리게 하고 事實상의 自治權을 認定해준다.

806年 카롤루스는 프랑크의 慣習대로 帝國을 分割해 모든 아들들한테 나누어줄 計劃을 세웠지만, 둘째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 밀라노 에서 死亡한 뒤, 셋째 아들 소 샤를 , 첫째 아들 피핀 4歲 等이 연이어 죽자 813年 아헨의 法廷에서 살아남은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 1歲 를 合法的인 後繼者로 宣言한 뒤, 그 해 경건왕 루트비히 1歲를 共同 皇帝로 戴冠式을 하고 唯一한 後繼者로 確定한 뒤, 아키텐으로 되돌려보냈다. 아들 루트비히를 아헨으로 召喚했고, 11月 1日 아헨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사냥을 다녔다.

그는 平素 肋膜炎 과 깊은 憂鬱症 으로 苦生하였다. 以後 아헨 으로 隱退하여 餘生을 보내다가 1月 22日 病席에 누웠다. 814年 1月 28日 아헨 의 宮殿에서 肋膜炎 및 憂鬱症 等의 合倂症으로 世上을 떠났다. 아헨의 한 聖堂 地下에 埋藏되고, 以後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1世紀 頃 아헨 伯爵 오토에 依해 發見되었다. 그의 陵은 성역화되어 프리드리히 2歲 에 依해 再整備되었다가 뒤에 大空位 時代 에 實戰, 19世紀에 재발굴되었다.

死後의 影響力 [ 編輯 ]

카롤루스 大帝가 죽자 프랑크 王國 은 急速히 衰退하기 始作했다. 남族은 이슬람 勢力이 地中海 의 制海權을 掌握했고, 北쪽으로는 바이킹족 이 隨時로 侵攻해 왔으며, 東쪽으로부터는 騎馬 民族인 마자르族 의 侵攻이 잦았다. [3] 그러나 그의 後繼者들 中 이를 제대로 防禦한 人物은 드물었다.

40年間의 治世 期間 中 周邊의 國家를 征服하여 거의 大部分의 게르만 族 과 葛盧 로망族을 하나의 國家, 하나의 宗敎로 統一하는데 成功한다. 이는 後代의 作家들에 依해 많은 浪漫的인 作品과 武勳詩, 喜劇의 素材가 되었다. 또한 유럽을 形成하는 3代 文化 要素인 古典 文化, 그리스도교, 게르만 民族 精神을 그가 完全한 統合을 이루었다고 보기에 後代의 유럽의 各 國家들은 카롤루스에게서 그 傳統, 正統性을 찾으려 하였다.

그의 死後 프랑크 王國은 3代 로타르 1歲 臺에 이르러 3個로 分裂 되었다. 그 뒤 884年 뚱보王 카롤루스 가 一時的으로 再統一했지만 바이킹, 마자르 等의 侵略을 막아내지 못하고 結局 帝國은 崩壞되고 만다. 그러나 그의 影響力은 如前히 남아있었다. 神聖 로마 帝國 오토 1歲 는 스스로 카롤루스의 繼承者라 自處했으며, 敎皇 파스칼리스 3歲 프리드리히 1歲 의 要請으로 1165年에 카롤루스를 成人 으로 追贈 (追贈)했다. 프리드리히 2歲 는 그의 墓所를 丹粧하고 그의 石棺을 金으로 裝飾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에서도 필리프 2歲 가 카롤루스를 기리는 傳統을 되살리는 命을 내리기도 하였다.

以後 그는 中世 유럽과 르네상스 時代 의 各種 民譚과 文學, 作品의 素材가 되기도 했다. 《 롤랑의 노래 》와 같은 民間의 傳說이나 詩歌 文學에서도 카롤루스가 登場하며, 오늘날 西유럽의 基盤을 닦은 王으로 描寫되기도 한다.

個人 記錄 [ 編輯 ]

誕生日과 誕生場所 [ 編輯 ]

一般的으로 카롤루스의 誕生年은 740年 또는 742年으로 알려져 있으나 다른 說도 있다. 742年에 태어났다는 記錄은 그가 죽은 後에 記錄되었다. 또 다른 說은 747年 4月 2日에 태어났다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復活節 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論難의 餘地가 있었으나 그 날이 復活節이란 記錄이 全혀 없으며 그저 카롤루스를 기리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는 推測이 뒤따르고 있을 뿐이다.

어떤 論評者들은 그가 748年에 태어났다는 記錄에 中心을 두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카롤루스의 正確한 誕生을 計算하는 것은 不可能하며 그나마 가장 信憑性 있는 推測이 747年 4月 1日 또는 15日 以後 아니면 748年 4月 1日이다.

카롤루스는 메로빙거 王朝 카롤링거 王朝 가 생겨난 에르스탈 에서 태어났으며 7살이 될 무렵 有필레 로 移徙하였다. 그가 프럼 , 듀렌 , 街右팅 , 아헨 으로 移徙했다는 說도 있으나 大部分의 歷史冊에서는 유필레로 記錄되어있다.

使用한 言語 [ 編輯 ]

카롤루스(15世紀 프랑스 作品)

카롤루스가 使用한 모어는 여러 가지 論難이 있다. 리프吏案 프랑크 의 獨逸 사투리를 썼다는 說도 있으나, 言語學者들은 그의 身元과 連帶를 보면 다르다고 한다. 一部 言語學者들은 그가 古代 프랑크 王國이 滅亡한 때인 742年(또는 747年)에 태어났다는 理由로 古代 프랑크語를 쓰지 않았다고 主張할 程度다. 그外 카롤루스는 모어뿐만 아니라 라틴語 도 能熟하게 驅使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어 도 어느 程度 驅使할 수 있었다.

外貌 [ 編輯 ]

카롤루스가 살던 時期에 쓰인 그의 外貌에 對한 記錄은 없지만 偉大한 카롤루스의 삶 (Vita Karoli Magni)을 쓴 아인하르트 는 第 27章에서 그에 對해 詳細히 썼다. 아인하르트 에 依하면 그는 키가 191cm 假量의 長身이라 한다.

7피트에 達하는 長身에 매우 튼튼한 體格과 剛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크고 또렷한 눈에 코는 普通 사람보다 若干 컸으며 흰머리지만 如前히 魅力的인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밝고 明朗한 목소리를 내서 淸明한 느낌을 주었으며 普通 男子의 목소리보단 조금 더 높은 音을 내었으며 짧고 굵은 목에 조금 배가 튀어나왔다. 카롤루스는 몇 年間 몸살 때문에 運動을 못했지만 그 以前엔 즐겨했다. 카롤루스는 醫師들의 助言을 拒否하면서 自身이 하고 싶은 일은 끝까지 매달려 하고야 말았다. 그는 醫師를 매우 嫌惡했는데, 그 理由는 醫師들이 고기를 구워서 먹지 말고 삶아서 먹으라는 助言을 繼續해댔기 때문이다.

아인하르트의 描寫는 루브르 博物館 에 展示된 카롤루스의 얼굴이 새겨진 貨幣와 8인치짜리의 銅像을 보면 이와 一致한다. 또한 카롤루스 카롤루스가 7피트(現在 單位로 換算하면 6피트 3인치, 卽 190.50센티미터)에 이르는 長身이라는 것도 그리 부풀려 진 것이 아니다. 21世紀 基準으로도 長身이고, 營養 狀態가 좋지 못해 成人 男性 平均 身長이 160cm에 채 美치치 못했던 8世紀頃 基準으로 보면 말 그대로 巨人이다. 1861年 考古學者들과 科學者들이 카롤루스의 무덤을 열어 뼈를 다시 맞추어 본 結果 카롤루스의 키는 正確히 74.9인치(190센티미터)였다.

衣裳 [ 編輯 ]

카롤루스의 胸像
1112年 / 1114年 獨逸 에서 그려진 샤를마뉴의 肖像畫

아인하르트의 글에 따르면 카롤루스는 華麗하고 貴族的인 것과는 距離가 먼 프랑크족의 傳統衣裳을 입었다고 한다.

大帝는 한 마디로 말해 프랑크족의 傳統衣裳을 입었다. 리넨纖維의 셔츠와 바지, 그 위에 실크로 만든 가두리 裝飾의 튜닉을 걸쳤으며 또 벨트를 차고 있었고 추위에 對備해 水獺가죽과 담비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몸에 꼭 맞게 입고 있었다

카롤루스 大帝는 파랑망토를 매고 恒常 칼을 차고 다녔다. 大槪 그 칼자루에는 金이나 銀 裝飾이 박혀있었는데 大帝는 宴會를 열 때나 使節團을 歡迎할 때만 華麗한 칼들을 찼었다.

大帝는 아무리 그 옷이 멋지고 華麗하더라도 外國衣裳이라면 無條件 輕蔑했다. 또 그런 옷들을 戰利品으로 蒐集하는 것도 禁止했다. 大帝가 外國衣裳을 입은 적은 딱 두 番인데, 한 番은 敎皇 아두리아누스 의 要請으로, 또 한 番은 아두리아누스 敎皇의 다음인 敎皇 레오 를 기쁘게 하려고 로마樣式의 신발, 튜닉과 망토를 입었다.

카롤루스는 꼭 必要한 때가 아니면 華麗한 衣裳을 입지 않았는데, 그가 그러한 衣裳을 입을 때는 宴會나 使節團 歡迎會 같은 行事가 있을 때뿐이었다. 그 날에는 自首와 寶石이 박힌 옷과 신발을 신고 黃金色 단추가 달린 망토를 걸치고 王冠을 썼는데, 아인하르트가 言及했듯이 그는 그런 衣裳을 싫어했다. 平素 카롤루스는 平凡한 사람들처럼 수수한 衣裳을 입었다고 한다.

12名의 팔라딘 [ 編輯 ]

카롤루스는 敎皇을 保護한다는 아버지의 政策을 따라 이탈리아로 向해 進擊했었는데, 이때 當時 12名의 팔라딘 과 함께 갔다고 한다. 팔라딘의 本來 뜻은 카롤루스의 側近이자 그를 保護하는 勇士라는 뜻이다. 狂亂의 오를란도 에서는 브라다만테 라는 女性 팔라딘이 12팔라딘 中 하나로 登場하는 等 그 構成하는 人物들은 作品들마다 다르다.

  1. 亞스톨抛 (Astolpho)
  2. 페룸부라 (Ferumbras or Fierabras)
  3. 플로視마르 (Florismart)
  4. 街넬롱 (Ganelon) - 롤랑을 背信하여 단테 新曲 에서 地獄에 떨어진 것으로 描寫된다.
  5. 마우그리스 (Maugris)
  6. 나某 (Namo or Nayme)
  7. 奧地에 르 單와 (Ogier the Dane)
  8. 올리비에 (Oliver)
  9. 오투엘 (Otuel)
  10. 리날도 (Rinaldo)
  11. 롤랑 (Roland)
  12. 空席 - 이 자리에는 여러 가지 論難이 있는데, 카롤루스 自身이라는 말도 있으며 그外 다른 人物들 中 한 名이라는 說도 있다.

家計 [ 編輯 ]

샤를마뉴
샤를마뉴와 그의 長男 곱사등이 피핀 (오른쪽), 士官 (가운데 아래)

後宮이었다가 王妃로 昇格한 힐데가르트, 파스트라다 外에도 그에게는 여러 名의 後宮이 있었으며, 그 中 7名의 後宮의 存在가 傳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關聯 文獻 [ 編輯 ]

  • 패트릭 기어리, 《메로빙거 世界-한 뿌리에서 나온 프랑스와 獨逸》 (이종경 옮김, 圖書出版 知識의 風景, 2002)
  • 토마스 불핀치, 《샤를마뉴 皇帝의 傳說》 (이성규 옮김, 범우사, 1998)

各州 [ 編輯 ]

  1. 바티칸 의 起源
  2. 그러나 障礙가 있던 長男 곱사등이 피핀에게는 王位授與가 除外되었다.
  3. 김영기, 《歷史 속으로 떠나는 背囊旅行》(北코리아, 2005) 290페이지

外部 링크 [ 編輯 ]

第1代 神聖 로마 皇帝
800年 12月 25日 - 814年
後任
루트비히 1歲
前任
피핀 3歲
프랑크人의 王
768年 - 814年
後任
루트비히 1歲
前任
카를로만 2歲
네우스트리아 의 王
774年 - 788年
後任
프랑크의 샤를
前任
카를로만 2歲
부르군드의 王
774年 - 781年
後任
피피노
前任
데시데리우스
랑고바르드仁義 王
774年 - 781年
後任
피피노
前任
피피노
랑고바르드仁義 王
810年 - 814年
後任
베른하르트
前任
타실로 3歲
작센의 王
775年 - 790年
後任
샤를 2歲
前任
타실로 3歲
바이에른 工作
788年 - 814
後任
로타르 1歲
前任
(크로아티아 倂合)
크로아티아의 王
803年 - 814年
後任
보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