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수
(趙鏞壽,
1930年
4月 24日
~
1961年
12月 21日
)은
大韓民國
의 言論人이다.
[1]
민족일보
의 發行人이었는데,
朴正熙
의
5·16 軍士政變
勢力에 依해
絞首刑
에 處해졌고,
2008年
1月 16日
에 法院 再審 結果 無罪와 國家 賠償 判決을 받아 名譽를 回復했다.
[2]
[3]
[4]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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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涯 初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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號(號)는 山南(山南)이다. 조용수는
1930年
4月 20日
晉陽郡
(現
晋州市
) 대곡면 단목리의 富裕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판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外三寸
하만복
의 집인 진주시 옥봉동의 外家에서 四寸 하정자(차임)과 함께 줄곧 자랐고, 봉래초등학교(當時 제2보통학교)와 진주중學校를 다닐 때까지 晉州에서 자랐다. 그러나 只今은 조용수가
봉래초등학교
와
진주중學校
을 다닌 痕跡을 찾을 수 없다. 當時 在學生들의 學籍簿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唯獨 조용수의 學的記錄은 빠져 있다.
[5]
學窓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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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수는
1943年
진주중學校를 入學하여 2學年까지 다니고 自退를 하여, 大邱 대륜중學校에 編入學하여 卒業하였다.
[5]
그 後
大邱
大輪高等學校
를 卒業하고
연희전문학교
에 入學했다.
[1]
1950年
大學校에 入學하는 해에
韓國戰爭
이 勃發하자
釜山
으로 根據地를 옮겼다가, 大學校 2學年에 在學 中에 日本으로 건너갔다.
1951年
日本
메이지大學
(明治大) 政經學部 經濟科 2學年에 編入學하여 學業을 繼續하였으며, 1953年
民團
에 參與하여 活動하였다.
[1]
大學 卒業 뒤 民團에서
1959年
조봉암
救命運動 및
朝總聯
의
在日同胞
北送運動 反對事業에 從事하던 中
조봉암
의 祕書이던
이영근
과
朝鮮日報
論說委員이던
송지영
等의 進步性向 言論人과 因緣을 맺게 된다.
[
出處 必要
]
민족일보 創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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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수는
1960年
4.19 革命
直後에 치러진
5代 總選
에서 進步政黨
社會大衆黨
의 候補로
慶北
靑松
에 出馬했으나 3位로 落選했고
[1]
, 그의 敗北를 비롯해 社會大衆黨이 4席에 그치면서 保守性向
民主黨
의 一黨獨走體制를 許容하자 進步勢力의 團結 및 民主黨 政權의 保守性向을 國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言論의 重要性이 必要함을 認識하고 民團으로부터 資金을 調達받아 새 日刊新聞 創刊을 構想한다.
1961年
2月 13日
日刊新聞
민족일보
를 創刊했다. 민족일보는 斜視(社是)로 民族의 進路를 가리키는 新聞, 不正과 腐敗를 告發하는 新聞, 勞動大衆의 權益을 擁護하는 新聞, 兩斷된 曺國의 悲願을 呼訴하는 新聞 等 4個를 定하였고, 民族日報 社長 就任辭에서 그는 “우리 민족일보는 이러한 民族의 分裂과 悲願을 永續化시키는 一部의 作用에 對하여 온갖 精力을 기울여 싸울 것”이라며 “特히 積極的으로 南北間의 民族意識의 推進과 生活共同體的 連帶를 追求하는데 있는 紙面을 果敢하게 提供하는 것을 重要한 任務라고 생각한다”고 밝혀 平和統一이라는 主題가 民族新聞 發行의 論調임을 强調하였다.
[1]
민족일보는 第2共和國 民主黨 政權으로부터
朝總聯
으로부터 資金을 調達받았다는 疑心을 받기도 하고, 印刷를 代行하던
서울新聞
의 印刷 中斷 宣言으로 3日間 休刊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最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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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年
5·16 軍士政變
으로 執權한 軍部에 依해 連行되었다. 그를 비롯한 民族日報 幹部 13名을 "北韓을 讚揚·鼓舞한 罪"로 拘束한 뒤 이 中 그를 비롯한 8名에게 死刑宣告를 내렸다.
8月 12日
軍事裁判으로 열린 1審에서 死刑을 宣告받았다. 이 裁判에서 陸軍大領이 裁判長을 맡고 軍人 2名과 民間人 2名이 審判官을 맡았는데,
李會昌
이 當時 民間人 審判官으로 參與해 以後 論難이 됐다.
[6]
10月 31日
上告審에서도 死刑이 確定되었다. 死刑 理由는 조용수가 總聯 資金을 받아 民族日報를 創刊, 無分別한 平和統一論을 主張하여 北韓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다. 조용수의 死刑 判決이 定해지자 이에 對해 國際新聞人協會(IPI), 國際펜클럽(PEN) 等 國際的으로 抗議聲明이 이어지고 救命運動이 벌어졌다.
[1]
그는
1961年
12月 21日
에 社會黨 幹部
최백근
等과 함께
絞首刑
執行되어 조용수는 刑場의 이슬로 사라지기 前 立會한
윤형중
神父의 印度로
天主敎
에 歸依했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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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섭
은
國會議長
을 두 番 歷任한 政治人인데, 조용수의
高等學校
·
大學校
同窓이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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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譽 回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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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수의 死刑은
美國
으로부터
共産主義
者로 指目받은
朴正熙
의 犧牲羊이라는 見解가 있다.
《민족일보》와 조용수 事件은 동생 조용준에 依해
2006年
1月 10日
《
眞實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에 眞實糾明을 申請했고, 같은 해
2006年
11月 28日
過去事委員會
는 '死刑을 宣告한 革命裁判部의 判斷이 잘못됐다'는 決定을 내리고 國家에 再審을 勸告했다.
[7]
2008年
1月 16日
서울중앙지법 刑事合議22部가 再審에서 北韓의 活動에 同調했다는 特殊犯罪 處罰에 關한 特別法 嫌疑로 死刑이 宣告됐던 조용수에게 47年 만에 無罪를 宣告했다.
[8]
조용수의 遺家族은 國家를 相對로 損害 賠償 請求 訴訟을 提起했는데, 이 訴訟에서 '國家는 99億 원을 賠償하라'는 下級審 判決을 받았다. 그 後 大法院은 2011. 1. 13. 그 額數를 約 29億원으로 減額하는 趣旨로 最終 判決하였다.
[9]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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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三寸
조경규
는 大邱信保와 示唆新譜 社長을 지내고, 2代·3代·4代 國會議員으로
自由黨
院內總務를 두 番 지냈다. 外三寸
하만복
은 過渡政府 立法議員, 反民特委 委員, 2代 國會議員 等을 지냈다.
[1]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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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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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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