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령 (192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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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령
本名 조제순 (趙濟順) [1]
出生 1929年 2月 4日 ( 1929-02-04 ) (95歲)
慶尙南道 마산시
國籍 大韓民國
職業 映畫 俳優
活動 期間 1948年~1969年, 1981年
代表作
春香傳 1955年
시집가는 날 1956年
王子 好童과 樂浪 公主 1956年
自由 結婚 1957年
十代의 反抗 1959年
長마루村의 理髮師 1959年
역마 1967年
몽땅 드릴까요 1968年
눈나리는 밤 1969年

조미령 (趙美鈴 [2] , 1929年 2月 4日 ~ )은 大韓民國 俳優 이다. 慶尙南道 마산시 에서 태어났다.

生涯 [ 編輯 ]

일찍이 兒役 演劇俳優로 韓國 最初의 演劇 常設劇場人 서울 동양극장 에서 活動하였는데, 8歲 때 演劇 《임자 없는 子息들》로 데뷔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3] [4]

1939年에 동양극장 專屬 公演團體 中 하나인 劇團 ‘청춘좌’에 들어가면서 本格的인 演技를 始作하였고, 1943年 에는 동양극장 後半期 最大 히트作인 演劇 《어머니의 힘》에 出演했다. [3] 20歲 때인 1948年 , 이규환 監督의 作品 《갈매기》로 映畫界에 入門하였다. [4]

23歲 때, 1934年에 東京留學生들이 組織했던 演劇團體 ' 동경학생예술좌 (東京學生藝術座)' 中心人物 中 한名이자 映畫 《갈매기》의 企劃을 맡았던 馬山 出身 엘리트 演劇人인 프로듀서 이철혁과 結婚 하였다. [3] [5] 6.25 戰爭 直後인 1955年 , 국도극장 單一官으로 13萬名을 動員하는 記錄的인 興行을 記錄한 前後最大興行作 《 春香傳 》에서 성춘향 役割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다. [6]

春香傳 》은 男便인 이철혁 이 製作한 映畫로 6.25 戰爭 直後 沈滯되어 있던 韓國 商業映畫가 復活하는 契機를 만들어 준 紀念碑的 作品이 되었는데, 女主人公 성춘향 役割을 맡았던 조미령은 端雅하고 淸純可憐한 이미지로 큰 人氣를 謳歌하게 되었다. [7] 그 後 映畫 《 시집가는 날 》( 이병일 監督·1956年), 《 十代의 反抗 》( 김기영 監督·1959年), 《 馬夫 》( 강대진 監督·1961年) 等에 出演하면서 1956年부터 1960年代까지 不世出의 銀幕 스타로 名聲을 날린다. [3] 그 中, 映畫 《 馬夫 》는 第11回 베를린 映畫祭 에서 銀곰賞 을 받으면서 西歐映畫界에 韓國映畫의 位相을 알린 最初의 映畫이기도 하다.

1969年 再婚한 在美僑胞 男便과 [8] 美國 으로 떠나면서 演藝界 隱退를 하였고 美國으로 간 後 하와이 에서 平穩한 家庭을 꾸며 슈퍼마켓을 運營하며 살았다. [9] 조문진 監督의 勸誘로 映畫 《 두 아들 2 》에 出演하기 위해 12年만인 1981年 에 53歲의 나이로 一時 歸國하였다. [10] [11]

出演 作品 [ 編輯 ]

映畫 [ 編輯 ]

受賞 [ 編輯 ]

  • 1957年 第2回 금룡상 女優主演賞 [12] 《王子 好童과 樂浪 公主》
  • 1958年 第3回 夫日映畫賞 女優主演賞 《10代의 反抗》
  • 1959年 第3回 國際映畫賞 優秀女子俳優賞 [13]
  • 1960年 문교부 優秀國産映畫上 助演女優賞 [14] 《10代의 反抗》
  • 1966年 第4回 靑龍映畫賞 女優助演賞 《羅雲奎의 一生》

離婚訴訟 및 詐欺 被訴 [ 編輯 ]

1962年 , 女俳優 조미령에게 男便 崔氏를 빼앗겼다고 崔氏의 아내 金氏가 서울地法에 離婚 및 慰藉料 請求訴訟을 내고 連이어 姦通 및 暴行嫌疑 事實을 들어 서울地檢에 刑事告訴를 提起하여 被訴를 當했다. [15] [16] 그 해 12月, 被告人 조미령과 崔氏가 慰藉料 60萬원을 내기로 하면서 和解가 造成되어 遲遲不進한 慰藉料 請求訴訟 및 離婚訴訟이 一段落 되었다. [17] 또한 세 갈래로 얽힌 姦通, 暴行致傷, 名譽毁損 等 告訴事件에 對해서도 當事者 세사람에 對해 情狀을 參酌하여 서울地檢으로부터 不起訴 處分이 내려졌다. [18]

1966年 5月 19日 에는 夫婦가 詐欺罪 로 서울 地檢에 被訴되는 事件이 發生하였다. [19] 忠武路 에 있는 統營工藝士 代表 金氏에 따르면 ' 샌프란시스코 에서 百貨店 을 5個 運營한다는 조미령의 男便 崔氏가 螺鈿漆器 等을 代身 美國 에서 販賣해주겠다고 속여 9千달러 어치를 보내게 한 後 代金을 支拂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 그런데, 金氏가 샌프란시스코 駐在 總領事館을 崔氏의 身元을 照會한 結果 崔氏는 百貨店을 經營하고 있지 않으며 일정한 住所도 없이 轉轉한다는 事實이 밝혀졌다. [19]

美國 市民權 까지 얻고 美國 陸軍 大尉 로 除隊한 崔氏와 1963年 에 結婚하여 4살 난 딸을 기르고 있었으나 1966年 에 男便과 함께 詐欺罪로 起訴된 渦中에, 조미령이 男便 崔氏를 相對로 離婚請求訴訟을 家庭法院 에 提起한 事實이 알려졌다. [20] 韓國 에서 職場을 얻지 못한 崔氏가 事業資金 마련을 위해 조미령의 집을 3百萬원에 팔고 前妻 所生 男妹를 데리고 都彌 해버린 것이다. [20] 1966年 9月, 조미령은 男便 최동원을 相對로 家庭法院 에 낸 離婚訴訟에서 勝訴하였다. [21] 家庭法院 은 離婚請求 이유인 男便 崔氏가 家庭을 돌보지 않고 美國 에 데려가겠다던 約束을 져버렸다는 主張을 認定하여 離婚 을 許可하였다. [21]

各州 [ 編輯 ]

  1. “銀幕의「스타」들은 藝名의「베일」쓰고” . 朝鮮日報 . 1963年 8月 29日 . 2023年 3月 17日에 確認함 .  
  2. “話題의 行方 (3) 愛情波動가신 趙美鈴孃” . 東亞日報 . 1962年 12月 4日 . 2023年 3月 17日에 確認함 .  
  3. 留學派 映畫監督-銀幕의 스타 逆境과 사랑 《慶南道民一步》, 2012年 9月 5日
  4. 아름답기에 더욱 悽絶했던 演技 《여성동아》, 2014年 4月 14日
  5. 演藝手帖 半世紀 映畫界 23 藝術映畫의 開幕 《東亞日報》, 1972年 11月 23日
  6. 演藝手帖 半世紀 映畫界 27 活力 불어넣은 春香傳 《東亞日報》, 1972年 11月 29日
  7. '춘향' 우리들의 永遠한 戀人 《東亞日報》, 1999年 3月 8日
  8. 追憶의 스타들 共同出演 話題 《경향신문》, 1992年 7月 10日
  9. 解放 後 1代 춘향 出身의 톱스타 조미령 《마이데일리》, 2008年 9月 22日
  10. 조미령 윤정희 映畫出演 爲해 歸國한다 《東亞日報》, 1981年 3月 20日
  11. 옛 同僚들 조미령 찾아 激勵 《경향신문》, 1981年 4月 29日
  12. 2回 금룡상 深位 過半得票子 없어 《東亞日報》, 1957年 1月 26日
  13. 22日에 施賞式 第3回 國際映畫賞 《東亞日報》, 1959年 3月 4日
  14. 優秀映畫上 決定 《경향신문》, 1960年 9月 6日
  15. 男便 崔氏와 女俳優 조미령氏 걸어 姦通罪로 告訴 《東亞日報》, 1962年 7月 12日
  16. 여우 조미령氏 被訴 《경향신문》, 1962年 7月 4日
  17. 助陽에 不起訴處分 《경향신문》, 1962年 8月 1日
  18. 조미령量 和解 慰藉料 50萬원 2月에 週期로 《東亞日報》, 1962年 12月 4日
  19. 조미령氏 夫婦 被訴 《每日經濟》, 1966年 5月 20日
  20. 조미령量 離婚 訴訟 《東亞日報》, 1966年 5月 21日
  21. 돌보지 않는 男便과 여우 조미령氏 離婚 《경향신문》, 1966年 9月 15日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