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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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 조제순 (趙濟順)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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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
| 1929年 2月 4日
(
1929-02-04
)
(95歲)
慶尙南道
마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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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籍
| 大韓民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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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
| 映畫 俳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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活動
期間
| 1948年~1969年, 198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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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령
(趙美鈴
[2]
,
1929年
2月 4日
~ )은
大韓民國
의
俳優
이다.
慶尙南道
마산시
에서 태어났다.
生涯
[
編輯
]
일찍이 兒役 演劇俳優로 韓國 最初의 演劇 常設劇場人
서울
의
동양극장
에서 活動하였는데, 8歲 때 演劇 《임자 없는 子息들》로 데뷔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3]
[4]
1939年에
동양극장
專屬 公演團體 中 하나인 劇團 ‘청춘좌’에 들어가면서 本格的인 演技를 始作하였고,
1943年
에는
동양극장
後半期 最大 히트作인 演劇 《어머니의 힘》에 出演했다.
[3]
20歲 때인
1948年
,
이규환
監督의 作品 《갈매기》로 映畫界에 入門하였다.
[4]
23歲 때, 1934年에 東京留學生들이 組織했던 演劇團體 '
동경학생예술좌
(東京學生藝術座)' 中心人物 中 한名이자 映畫 《갈매기》의 企劃을 맡았던
馬山
出身 엘리트 演劇人인 프로듀서 이철혁과
結婚
하였다.
[3]
[5]
6.25 戰爭
直後인
1955年
,
국도극장
單一官으로 13萬名을 動員하는 記錄的인 興行을 記錄한 前後最大興行作 《
春香傳
》에서 성춘향 役割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다.
[6]
《
春香傳
》은 男便인
이철혁
이 製作한 映畫로
6.25 戰爭
直後 沈滯되어 있던 韓國 商業映畫가 復活하는 契機를 만들어 준 紀念碑的 作品이 되었는데, 女主人公 성춘향 役割을 맡았던 조미령은 端雅하고 淸純可憐한 이미지로 큰 人氣를 謳歌하게 되었다.
[7]
그 後 映畫 《
시집가는 날
》(
이병일
監督·1956年), 《
十代의 反抗
》(
김기영
監督·1959年), 《
馬夫
》(
강대진
監督·1961年) 等에 出演하면서 1956年부터 1960年代까지 不世出의 銀幕 스타로 名聲을 날린다.
[3]
그 中, 映畫 《
馬夫
》는 第11回
베를린 映畫祭
에서
銀곰賞
을 받으면서 西歐映畫界에 韓國映畫의 位相을 알린 最初의 映畫이기도 하다.
1969年
再婚한
在美僑胞
男便과
[8]
美國
으로 떠나면서 演藝界 隱退를 하였고 美國으로 간 後
하와이
에서 平穩한 家庭을 꾸며 슈퍼마켓을 運營하며 살았다.
[9]
조문진
監督의 勸誘로 映畫 《
두 아들 2
》에 出演하기 위해 12年만인
1981年
에 53歲의 나이로 一時 歸國하였다.
[10]
[11]
出演 作品
[
編輯
]
映畫
[
編輯
]
受賞
[
編輯
]
- 1957年 第2回 금룡상 女優主演賞
[12]
《王子 好童과 樂浪 公主》
- 1958年 第3回
夫日映畫賞
女優主演賞 《10代의 反抗》
- 1959年 第3回 國際映畫賞 優秀女子俳優賞
[13]
- 1960年 문교부 優秀國産映畫上 助演女優賞
[14]
《10代의 反抗》
- 1966年 第4回
靑龍映畫賞
女優助演賞 《羅雲奎의 一生》
離婚訴訟 및 詐欺 被訴
[
編輯
]
1962年
, 女俳優 조미령에게 男便 崔氏를 빼앗겼다고 崔氏의 아내 金氏가 서울地法에 離婚 및 慰藉料 請求訴訟을 내고 連이어 姦通 및 暴行嫌疑 事實을 들어 서울地檢에 刑事告訴를 提起하여 被訴를 當했다.
[15]
[16]
그 해 12月, 被告人 조미령과 崔氏가 慰藉料 60萬원을 내기로 하면서 和解가 造成되어 遲遲不進한 慰藉料 請求訴訟 및 離婚訴訟이 一段落 되었다.
[17]
또한 세 갈래로 얽힌 姦通, 暴行致傷, 名譽毁損 等 告訴事件에 對해서도 當事者 세사람에 對해 情狀을 參酌하여 서울地檢으로부터 不起訴 處分이 내려졌다.
[18]
1966年
5月 19日
에는 夫婦가
詐欺罪
로 서울 地檢에 被訴되는 事件이 發生하였다.
[19]
忠武路
에 있는 統營工藝士 代表 金氏에 따르면 '
샌프란시스코
에서
百貨店
을 5個 運營한다는 조미령의 男便 崔氏가
螺鈿漆器
等을 代身
美國
에서 販賣해주겠다고 속여 9千달러 어치를 보내게 한 後 代金을 支拂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
그런데, 金氏가
샌프란시스코
駐在 總領事館을 崔氏의 身元을 照會한 結果 崔氏는 百貨店을 經營하고 있지 않으며 일정한 住所도 없이 轉轉한다는 事實이 밝혀졌다.
[19]
美國 市民權
까지 얻고
美國
陸軍
大尉
로 除隊한 崔氏와
1963年
에 結婚하여 4살 난 딸을 기르고 있었으나
1966年
에 男便과 함께 詐欺罪로 起訴된 渦中에, 조미령이 男便 崔氏를 相對로 離婚請求訴訟을
家庭法院
에 提起한 事實이 알려졌다.
[20]
韓國
에서 職場을 얻지 못한 崔氏가 事業資金 마련을 위해 조미령의 집을 3百萬원에 팔고 前妻 所生 男妹를 데리고
都彌
해버린 것이다.
[20]
1966年
9月, 조미령은 男便 최동원을 相對로
家庭法院
에 낸 離婚訴訟에서 勝訴하였다.
[21]
家庭法院
은 離婚請求 이유인 男便 崔氏가 家庭을 돌보지 않고
美國
에 데려가겠다던 約束을 져버렸다는 主張을 認定하여
離婚
을 許可하였다.
[21]
各州
[
編輯
]
- ↑
“銀幕의「스타」들은 藝名의「베일」쓰고”
.
朝鮮日報
. 1963年 8月 29日
. 2023年 3月 17日에 確認함
.
- ↑
“話題의 行方 (3) 愛情波動가신 趙美鈴孃”
.
東亞日報
. 1962年 12月 4日
. 2023年 3月 17日에 確認함
.
- ↑
가
나
다
라
留學派 映畫監督-銀幕의 스타 逆境과 사랑
《慶南道民一步》, 2012年 9月 5日
- ↑
가
나
아름답기에 더욱 悽絶했던 演技
《여성동아》, 2014年 4月 14日
- ↑
演藝手帖 半世紀 映畫界 23 藝術映畫의 開幕
《東亞日報》, 1972年 11月 23日
- ↑
演藝手帖 半世紀 映畫界 27 活力 불어넣은 春香傳
《東亞日報》, 1972年 11月 29日
- ↑
'춘향' 우리들의 永遠한 戀人
《東亞日報》, 1999年 3月 8日
- ↑
追憶의 스타들 共同出演 話題
《경향신문》, 1992年 7月 10日
- ↑
解放 後 1代 춘향 出身의 톱스타 조미령
《마이데일리》, 2008年 9月 22日
- ↑
조미령 윤정희 映畫出演 爲해 歸國한다
《東亞日報》, 1981年 3月 20日
- ↑
옛 同僚들 조미령 찾아 激勵
《경향신문》, 1981年 4月 29日
- ↑
2回 금룡상 深位 過半得票子 없어
《東亞日報》, 1957年 1月 26日
- ↑
22日에 施賞式 第3回 國際映畫賞
《東亞日報》, 1959年 3月 4日
- ↑
優秀映畫上 決定
《경향신문》, 1960年 9月 6日
- ↑
男便 崔氏와 女俳優 조미령氏 걸어 姦通罪로 告訴
《東亞日報》, 1962年 7月 12日
- ↑
여우 조미령氏 被訴
《경향신문》, 1962年 7月 4日
- ↑
助陽에 不起訴處分
《경향신문》, 1962年 8月 1日
- ↑
조미령量 和解 慰藉料 50萬원 2月에 週期로
《東亞日報》, 1962年 12月 4日
- ↑
가
나
다
조미령氏 夫婦 被訴
《每日經濟》, 1966年 5月 20日
- ↑
가
나
조미령量 離婚 訴訟
《東亞日報》, 1966年 5月 21日
- ↑
가
나
돌보지 않는 男便과 여우 조미령氏 離婚
《경향신문》, 1966年 9月 15日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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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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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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