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정운찬
鄭雲燦
大韓民國 第40代 國務總理
任期 2009年 9月 29日~2010年 8月 11日
大統領 李明博
前任: 한승수 (第39代)
後任: 김황식 (第41代)

身上情報
出生日 1947年 3月 21日 ( 1947-03-21 ) (77歲)
出生地 大韓民國 忠淸南道 公州郡
國籍 大韓民國
本館 連日 [1]
學歷 프린스턴 大學校 大學院 經濟學 博士
經歷 서울大學校 經濟學科 敎授
第23代 서울대학교 總長
第22代 韓國野球委員會 總裁
正當 無所屬
配偶者 최선주
子女 1男 1女
宗敎 改新敎

정운찬 (鄭雲燦, 1947年 3月 21日 [2] ~)은 大韓民國 의 經濟學者이다. 第22代 韓國野球委員會 總裁, 第23代 서울대학교 總長 을 지냈고, 最終的으로 제40대 國務總理 를 지냈다.

學歷 [ 編輯 ]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生涯 [ 編輯 ]

1947年 3月 21日, 忠淸南道 公州郡에서 태어났다. 忠淸南道 公州 出身이다. 경기고등학교 卒業을 거쳐 서울大學校 經濟學科에서 學事 學位를 取得했고, 1970年 韓國銀行 에 暫時 在職하다가 美國 으로 留學하여 마이애미 大學校 에서 碩士 學位 取得, 프린스턴 大學校 에서 經濟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1978年 에 母校인 서울대學校 經濟學科 敎授로 赴任하여 在職했고, 2002年 7月에는 第23代 서울대학교 總長 으로 就任하여 2006年 7月까지 지냈다. 以後 러시아 極東國立大學校(FENU)에서 名譽 國際敎育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平素 中央銀行 獨立을 主張하였다.

大統領 就任 以前 盧武鉉 이 經濟 改革과 人事 問題에 對해 助言을 求했고, 노무현은 財政經濟部 長官으로도 起用하려 했으나 정운찬은 이를 固辭하고 金鍾仁 을 代身 推薦했다. [4]

第17代 大選 에서 忠淸圈 有力 候補로 擧論되었지만 支持率 踏步로 結局 出馬하지 않았다.

李明博 政府 에서 憲法裁判所 諮問委員을 지내고 大統領 所屬 國家情報化戰略委員會 共同委員長을 거쳐 2009年 9月 29日 國務總理 로 國會 認准을 받고 赴任했다. 進步的 經濟學者이자 한때 李明博 의 對抗馬로 떠올랐던 터라 정운찬의 總理就任을 놓고 反撥이 있었다. 2010年 8月 世宗市 修正案이 國會 否決 後 辭退輿論이 거세지자 總理職에서 中途辭退했다. [5] 2010年 12月 招待 同伴成長委員長으로 委囑되었다. [6] 2011年 3月 에는 서울大學校 名譽敎授가 되었다.

留學 時節에 野球 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정운찬은 交通放送 의 프로 野球 開幕展 라디오 中繼 放送에 客員 解說者로 나오기도 했다. 2017年 11月 29日 第22代 KBO 總裁로 推戴되었다. [7]

學者로서 [ 編輯 ]

學者로서의 成就度는 KCI級 論文은 9篇, SSCI級 論文은 1篇 等 敎授로 任用 以後에도 普通 以上의 水準으로 볼 수 있다.

論文보다 더 重要한 그의 成就度는 現在 그가 大韓民國에서 가지고 있는 巨視經濟學 系譜의 時調로서의 位相. 大韓民國 學部 水準의 經濟學은 그의 스승인 調馴과 더불어 그에게서 始作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後述할 巨視經濟論의 初판부터 5판까지의 著者일뿐만 아니라, 그 以後의 版本 또한 그의 弟子인 김영식 敎授와 共著하는 等 學部 레벨의 經濟學徒들은 大部分 系譜를 거슬러 올라가면 結局 정운찬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學者로서의 成就度는 巨視經濟論이라는 前 大學校에서 使用하는 敎科書 하나만으로도 높다고 評價가 可能한 水準.

經濟學的 系譜는 스승인 調馴과 마찬가지로 케인즈主義者로 分類된다. 政府의 介入을 反對하는 新自由主義와는 相反되는 性向. 이는 現在 그가 寄稿하고 있는 칼럼에서도 如實히 드러난다. 同伴成長을 위해서는 現在 大韓民國에 存在하는 富의 再分配가 必要하며 또한 財閥改革이 必要하다고 主張한다.

또한 總長 時節에 新入生 세미나를 運營할 時 每番 5分 일찍 오고 5分 늦게 나갔으며, 그의 弟子인 황종휴 講師에 依하면 不誠實하거나 休講이 잦지 않았다고 하는 等 指導敎授 및 敎授로서는 성실하다는 評價가 多數다.

事件과 論難 [ 編輯 ]

2009年 9月21日 總理認准 聽聞會가 始作된 이날 정세균 민주당 代表는 정운찬 候補者는 非理百貨店이라며 國民을 代身해 徹底히 檢證할 것이라 밝혔다. [8]

2009年 9月 21日 정운찬 國務總理 候補者는 "總理로 任命되면 大統領에게도 할 말은 할 것이며, 國民 여러분에게도 要求할 것은 要求할 것"이라고 밝혔다. 各種 道德性 論難이 불거진 것과 關聯 "남의 눈의 티끌은 大들보처럼 보면서 저의 눈의 大들보는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아 自愧感을 감출 수 없다”고 自責했다. 그는 “總理로서 일할 機會가 주어진다면 謙遜한 마음으로 各界各層의 智慧와 經綸을 모으겠다. 原則과 程度로 차근차근 問題를 풀어나가려고 한다”고 말했으며 "조화로운 社會로 發展해나가는 均衡者로서의 役割에 邁進하고자 한다"면서 "社會正義를 確立, 强者와 弱者의 間隔을 좁히고 `다름과 差異'를 尊重하며 서로 配慮하는 社會를 實現하는데 最善을 다할 것"이라고 强調했다. [9] 하지만 檢證 過程에서 까도까도 問題點이 나온다 해서 洋파總理라는 비아냥도 듣게 되었다.

4大江 [ 編輯 ]

정운찬은 總理로 指名되면서 그동안의 所信을 一瞬間에 바꿔 論難이 되고 있다. 總理 任命 前에는 李明博 政府의 經濟 政策 全般에 關하여 否定的인 發言을 하였다. [10] 特히 4大江 事業 에 對해서는 可視的 成果만 執着한다는 發言을 하였다. [11] 그러나 指名 後에는 4大江 事業이 必要性 있는 事業이라고 말하는 等 旣存의 所信을 바꿔 論難을 惹起하였다. [12]

世宗市 [ 編輯 ]

聽聞會에서 정운찬은 "國土의 均衡 發展이란 趣旨에는 同感하지만 世宗市의 發展을 위해서는 自足 機能 强化 等 補完이 必要하다"는 所信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對해 민주당과 自由先進黨 議員들은 이미 執行 中인 世宗市 建設을 縮小하려는 意圖라며 强力하게 反撥했다. [13] 그리고 國會 人事聽聞會는 勿論 國務總理室까지 世宗市 修正 움직임이 보여 野黨과 忠淸圈의 反撥이 더욱 더 커졌다. 그는 2010年 1月 世宗市 修正案을 發表하면서 世宗市 推進方案을 밝혔고 世宗市 修正은 自身의 所信이라고 말했다. [14]

2009年 11月 28日 정운찬 國務總理 等 世宗市 民官合同委員會가 忠淸地域 民心을 把握하기 위해 世宗市 豫定敷地 隣近 地域을 찾았지만, 地域 住民들에게 `鷄卵洗禮`를 받았다. '行政都市 死守 燕岐郡 對策委員會'를 中心으로 한 住民들은 이날 集會에서 李明博 大統領과 정운찬 總理, 한나라당의 火刑式을 가졌다. 성난 住民들은 “"정운찬을 때려 잡자", " 李明博을 彈劾瑕疵” 等의 口號를 외치기도 했다. 정운찬 總理 等 民官合同委員會는 이날 幸福度市廳에서 午後 2時40分부터 40餘分 間 忠南 演技, 公州, 忠北 請願 等地에서 온 住民代表 6名과 非公開 懇談會를 가졌다. 丁 總理는 懇談會에 앞서 “(世宗市를)대전 大德 誤送과 連繫한 中部圈 新成長 클러스터로 만들 것”이라며 “科學 敎育 經濟 綠色 等이 融複合돼 最上의 시너지 效果가 發生하는 新成長 據點으로 만들겠다”고 約束했다. 그는 이어 “世宗市를 全面 白紙化하거나, 縮小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며 地域民들의 理解를 求했다. 하지만, 이 같은 丁 總理의 說得에도 不拘하고 住民들은 懇談會가 끝나고 난 午後 4時30分까지 示威를 繼續했다. 黃置換 行政都市 死守 對策委員會 事務處長은 “한마디로 말도 안되고 있어서도 없을 일을 정운찬氏가 하는 것”이라며 “ 燕岐郡 民들이 生存權도 걸려있고, 國家 政策만 믿고 지난 5年間 싸웠음에도 不拘하고 거짓말로 이렇게 만드는 李明博 大統領과 정운찬 總理를 認定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便, 이날 警察은 丁 總理 一行과 住民들과의 衝突을 막기 위해 43個 中隊 4500名을 幸福度市廳 附近에 配置했다. [15]

兵役忌避 疑惑 [ 編輯 ]

野黨 議員들이 1977年 高齡(31歲)을 事由로 정운찬이 召集을 免除받은 데 對해 兵役忌避 疑惑을 提起했다. 정운찬은 大學 1學年이던 지난 1966年 補充役 判定을 받았으나 1968年 `父先亡 獨自'(아버지를 일찍 여읜 외아들)라는 理由로 한 次例 徵兵檢査를 延期했고, 1970年 에 재검을 받아 이듬해 再次 補充役으로 判定받았었다.

人事聽聞特委 민주당 幹事인 白元宇 議員은 鄭 候補者가 1977年 兵役을 免除받기 以前인 1970年 美國 마이애미 大學校 에 提出한 入學許可申請書에 `兵役을 免除(exempted)받았다'고 記載했다고 主張하면서 "兵役免除가 안됐는데 免除됐다고 하는 것은 書類 造作으로 海外留學을 통해 免除받고자 하는 意圖가 있었다고 본다"고 攻擊했다. "只今 나와있는 疑惑 水準만해도 過去엔 絶對로 總理 指名者가 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主張했다. [16]

이에 對해 정운찬 總理候補者는 1970年 徵兵檢査後, 兵務廳長의 國外留學 許可를 받아 適法하게 出國하였고 當時 兵役法 第62條(1970年 12.31)에 依해 '國外 滯在中인자는 防衛召集 保留對象者'였으므로 國外留學終了時點까지(1978년 12月)까지 召集入營通知書가 發送되지 않았던 것으로 當時 兵役法에 依해 合法的으로 免除를 받았다고 밝혔으며, 當時 人事聽聞會 證人으로 出席했던 兵務廳 擔當局長도 法的 問題가 없음을 證言하였다('09.9.22(화) 國會人事聽聞會 會議錄)

美國 마이애미代 入學許可서 '兵役免除(exempted)'記載와 關聯하여 入學許可書에 'I am exempted from military service'라고 記載한 것은 當時 '美國 軍隊에 갈 必要가 없다'는 意味로 表現한 것이지 韓國軍隊를 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解明하였고 이러한 內容은 人事聽聞會視 이혜훈 議員의 質疑內容中 마이애미代 부르스코크 大學院長의 이메일 答辯을 통해서도 確認되었다고 밝혔다 : It was in fact in reference to US military service rather than service in his own country.(이것은 美國 軍隊에 關한 것이지 韓國 軍隊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이애미代 부르스코크 大學院長 이메일 答辯)('09.9.22 國會 人事聽聞會 會議錄 5페이지)

僞裝轉入 [ 編輯 ]

정운찬의 아내가 1988年 2月 住所地를 京畿道 抱川市 내촌면 마명리로 옮겼다가 같은 해 4月 다시 元來 住所인 서울 방배동으로 移轉한 것은 僞裝轉入이라는 게 野圈의 疑惑이나 앞서 鄭 候補者는 "抱川에 땅이나 집을 산 적은 없고 한때 田園生活을 하려고 住所地를 잠깐 옮겼다가 抛棄한 것"이라는 趣旨로 解明했었다. 白元宇 議員은 "두달間에 不過하지만 僞裝轉入은 分明히 있었다"며 "이것은 詩人하고 謝過해야할 問題"라고 主張했다. [16]

公務員法上 兼職 禁止 違反 [ 編輯 ]

民主黨 崔宰誠 議員은 21日 國會에서 實施된 人事聽聞會에서 “(정운찬 當時 서울對 敎授 [17] 가) 給與 名目의 돈을 받으면서 該當 行爲에 對해 所屬 機關長인 이장무 서울대 總長으로부터 兼職에 對한 許可를 公式的으로 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現行 國家公務員法 第64條는 “公務員은 公務 外에 營利를 目的으로 하는 業務에 從事하지 못하며 所屬 機關長의 許可 없이 다른 職務를 겸할 수 없다”고 規定하고 있다. ‘國家公務員 服務規程’은 ‘繼續的으로 財産上의 利得을 目的으로 하는 業務’를 怜悧業務로 規定하고 있다. 이에 앞서 정운찬은 지난 18日 國會에 提出한 書面質疑 答辯書에서 예스24 拷問 活動에 對해 “學者로서 좋은 冊을 널리 普及하는 일은 社會奉仕의 一環으로 생각했고 ‘拷問’은 經營에 參與하지 않고 諮問에 應하는 자리로만 생각해 職을 受諾했다”며 “當時 大學 事務局에 質疑했는데 ‘承認 받을 必要가 없다’는 答辯을 들은 것으로 記憶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社會奉仕 活動을 하면서 1年 9個月 만에 1億 원 가까운 돈을 벌었다는 것이 된다. [18]

예스24 拷問 活動 外에 다른 企業體에서는 活動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 續續 다른 企業體에서 活動했다는 證據가 發見되었다. [19] 하나금융연구소 顧問職을 兼職하며 年俸 1億 원을 받았으며, 2007年부터 2年 동안 日本의 情報通信 分野 大企業인 詩에스케이(CSK)그룹의 硏究機關인 持續成長硏究所(CSK-IS) 理事로 在職했다. 한便 서울대 敎務處 關係者는 “普通 敎授들이 社外理事를 할 境遇 兼職許可 申請을 내고 總長 許可를 받는데 정운찬 總理는 2007年과 2008年 兼職許可 申請을 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

731部隊 發言 [ 編輯 ]

國會 對政府質問 이틀째인 2009年 11月 6日 , 國會 本會議場 外交·統一·安保 分野 對政府質問에서 정운찬은 " 731 部隊 는 抗日 獨立軍 部隊"이라는 發言을 하였다.

이러한 發言이 나오게 된 過程은 다음과 같다. 自由先進黨 朴善英 議員은 丁 總理를 相對로 한 質疑에서 '731 部隊 抗日 獨立軍 犧牲者 證憑 資料'란 名稱의 資料를 보여주며 韓國人으로 밝혀진 이들은 抗日 獨立鬪士였다는 點을 밝힐 豫定이었다. 이 過程에서 朴 議員은 丁 總理에게 ' 마루타 '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戰爭과 關聯된 捕虜인 것 같다"는 答辯을 하였고, 731 部隊 [20] 에 對해서 묻자 "抗日 獨立軍인가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21]

이에 對해 民主黨 송두영 副代辯人은 論評을 내어 "너무 荒唐해 말門이 막힌다"고 慨歎했으며, "國際 亡身거리다. 外信에 報道될까 더욱 염려스럽다"라고 밝혔다. 정운찬은 後에 '抗日獨立軍 部隊를 괴롭히던...'이라고 말하는 사이 朴議員이 말을 잘라 제대로 傳達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22] [23]

인터넷 文化 卑下 論難 [ 編輯 ]

2010年 5月 25日 서울市 中浪區 원묵高等學校에서 열린 特講에서 정운찬은 "文字로 印刷된 新聞을 보는 것이 인터넷보다 훨씬 有益하다"며 "인터넷 普及이 韓國 文化의 水準을 相當히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해 論難이 빚어졌다. 이에 對해 민주당 조대현 副代辯人은 "世界的인 자랑거리인 우리나라의 인터넷 普及이 韓國文化의 水準을 떨어뜨린다는 억지逆說은 都大體 어디에 根據하는지 總理의 敎養水準조차 疑心하지 않을 수 없다"고 批判했다. [24] 오마이뉴스 는 "新聞과 인터넷의 어떤 內容을 接하고 있는가에 따라 評價가 달리 나올 수 있다."며 發言에 더 愼重을 加했어야 했다고 批判했다. [25]

國史 試驗 英語 論難 [ 編輯 ]

2011年 2月 17日 歷史 敎育의 必要性을 强調하면서 정운찬은 "大學入試에서 國史를 英語로 테스트해야 한다"고 發言해 네티즌들의 批判이 잇따랐다. [26]

著書 [ 編輯 ]

  • 2016年 《우리가 가야할 나라 同伴成長이 答이다》 “우리가 가야할 나라 同伴成長이 答이다” . 2017年 1月 26日에 確認함 .   </ref>
  • 2007年 《가슴으로 생각하라》 ISBN   978-89-91274-17-4
  • 2005年 《스무 살에 選擇하는 學問의 길》 ISBN   978-89-5733-052-4
    《巨視經濟論》 ISBN   978-89-91830-21-9
  • 2003年 《貨幣와 金融市場》 ISBN   978-89-91830-15-8
    《中央銀行의 理論과 實際》 ISBN   978-89-85177-95-5
  • 1999年 《韓國經濟 아직도 멀었다》 ISBN   978-89-88138-08-3
    《預金保險론》 ISBN   978-89-521-0023-8
  • 1998年 《統計學》 ISBN   978-89-420-0536-9
  • 1997年 《韓國經濟 죽어야 산다》 ISBN   978-89-7327-132-0
  • 1995年 《中央銀行論》
    《金融改革論》 ISBN   978-89-18-13003-3

家族 關係 [ 編輯 ]

各州 [ 編輯 ]

  1. 조선닷컴 포커스
  2. 本來의 生年月日은 1947年 陰曆 2月 29日 이지만 出生申告 時 生年이 1946年 으로 잘못 登錄되었다고 한다. 陽曆으로 1946年 2月 29日 은 存在하지 않는 날짜이다.
  3. 炭川初等學校에서 轉學
  4. 유병권 (2003年 2月 20日). “盧政府 ‘立脚枯死派’ 속앓이” . 《文化日報》.  
  5. '떠나는 정운찬 總理'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 정운찬 前總理 同伴成長委員長 內定
  7. [오피셜 정운찬 前 總理, KBO 第22代 總裁 滿場一致 推薦]
  8. 丁世均 "정운찬 '非理百貨店' 徹底히 檢證"
  9. 정운찬 候補 "大統領, 國民에게 할말 하겠다"
  10. “정운찬 前總長 "綠色뉴딜은 成果 中心主義 " . 韓國日報 . 2009年 1月 13日. 2010年 10月 2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9月 19日에 確認함 .  
  11. “정운찬 “綠色뉴딜은 土木工事에 綠色 이미지 입힌 것”” . 쿠키뉴스 . 2009年 9月 4日. 2010年 10月 2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9月 19日에 確認함 .  
  12. “정운찬 "4大江 事業, 政府 發表대로 推進 " . 뉴시스 . 2009年 9月 19日.  
  13. 李鍾九 記者 (2009年 9月 21日). “世宗市法 發言 集中 追窮” . YTN . 2009年 9月 21日에 確認함 .  
  14. {必要}
  15. “延期 住民, 정운찬 總理 等 世宗市 民官委에 `鷄卵洗禮`” . 2011年 11月 1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12月 1日에 確認함 .  
  16. 이정훈 記者 (2009年 9月 21日). “總理聽聞 爭點 兵役忌避 僞裝轉入 疑惑” . 聯合뉴스 . 2009年 9月 21日에 確認함 .  
  17. 國公立大 敎授는 敎育公務員이지만 私立大 敎授는 公務員이 아니다. 例를 들어 서울大學校 敎授는 公務員이고, 延世大學校 高麗大學校 敎授는 公務員이 아니다. 정운찬은 敎育公務員이었다.
  18. 이광효 記者 (2009年 9月 21日). “정운찬 候補者, 國家公務員法 違反 論難 激化” . 투데이코리아 . 2009年 9月 24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9. 丁 總理, 日本 企業 理事도 맡았다 - 한겨레, 2009年 10月 14日.
  20. 731 部隊는 日本帝國 陸軍 關東軍 所屬의 祕密 生物學戰 硏究 및 開發 機關이다.
  21. 신승근, 정운찬 “731部隊는 抗日獨立軍” , 한겨레, 2009年 11月 6日
  22. 안홍기 (2009年 11月 6日). “荒唐한 정운찬 "731部隊는 抗日 獨立軍 部隊 " . 오마이뉴스 . 2009年 11月 6日에 確認함 .  
  23. 김동현 (2009年 11月 6日). “民主 "정운찬 731發言, 外信에 報道될까 걱정 " . 뷰스앤뉴스 . 2009年 11月 6日에 確認함 .  
  24. 정운찬 總理 이番엔 ‘인터넷 文化 卑下’ 論難 京鄕新聞 2010年 5月 27日
  25. 정운찬 "인터넷 普及이 韓國 文化 水準 떨어뜨려" 오마이뉴스 2010年 5月 26日
  26. 정운찬 “國史試驗 英語로” 發言에 네티즌 발끈
前任
한승수
第40代 國務總理
2009年 9月 29日 ~ 2010年 8月 11日
後任
(權限代行) 윤증현
김황식
前任
이기준
第23代 서울대학교 總長
2002年 7月 20日 ~ 2006年 7月 19日
後任
이장무
前任
구본능
第22代 韓國野球委員會 總裁
2018年 1月 1日 ~ 2020年 12月 31日
後任
정지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