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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滿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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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朝鮮
紀元前 194年 ~ 紀元前 108年
 

 

 

기원전 108년의 위만조선.
紀元前 108年 의 衛滿朝鮮.
수도 王儉城
政治
政治體制 新券君主制
國王
紀元前 194年 ~ ?
? ~ 紀元前 108年

위만王 (初代)
우거왕 (말대)
국성 魏氏
人文
公用語 藝脈어
데모님 朝鮮人
民族 藝脈
宗敎
宗敎 巫俗信仰
( 토테미즘 , 샤머니즘 )

衛滿朝鮮 (衛滿朝鮮: 紀元前 194年 ~ 紀元前 108年) 또는 魏氏朝鮮 (衛氏朝鮮)은 古朝鮮 의 마지막 王朝로, 紀元前 194年 燕나라에서 移住한 위만 이 易姓革命을 일으켜 檀君朝鮮 의 마지막 王인 準王 의 王位를 簒奪하고, 王儉城 에 都邑하여 建國했다. 位 滿潮線 (滿朝鮮)이라고도 불린다.

衛滿朝鮮은 中國系 流民과 土着民이 聯合한 國家로 여긴다. 이들은 鐵器 文化를 積極的으로 受容하여 周邊 地域을 活潑히 征服하였고, 中繼 貿易으로 莫大한 利益을 얻었다. 衛滿朝鮮 勢力이 成長하면서 진국 과 한나라의 交易路를 가로막게 되었고, 이에 傳한 無題 紀元前 109年 使臣 섭下 가 古朝鮮 軍에 살해당한 것을 빌미로 大大的으로 侵攻하였다.

衛滿朝鮮은 漢나라와 1年間 戰爭 끝에 內紛이 發生, 위만 의 孫子이자 古朝鮮의 마지막 王인 우거왕 이 殺害當하고, 性器 가 誅殺되면서 王儉城 은 陷落되어 紀元前 108年 滅亡하고 漢四郡 이 設置되었다. 또한, 建國者인 위만의 國籍이나 支配 勢力과 移住民, 流民과의 關係와 統治 方法에 關해서 異見이 있다.

歷史 [ 編輯 ]

建國 [ 編輯 ]

中國에서 秦나라 가 亡하고, 紀元前 206年에 高調 傳한 을 建國한 뒤 周圍의 여러 나라에 功臣(功臣)을 봉하여 諸侯를 삼았다. 이때에 노관 으로 옛 燕나라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後 傳한에서 周圍의 諸侯들을 猜忌하여 除去하기 始作하자 연왕 老官은 未然에 禍를 면하려고 反하여 匈奴 쪽으로 逃亡하고 [1] 蓮은 漢나라 軍隊에 점령당하게 되어 一時 混亂 狀態에 빠지게 되었다.

魏志 》(魏志)에 따르면, 이 틈에 燕나라의 위만 이 聯의 營內에서 流民 千餘 名을 이끌고 浿水(浿水)를 건너서 朝鮮에 들어와 朝鮮王 (準)을 말하여 高空地(故空地)의 守備를 하겠다고 하였다. [2] 準王은 그를 믿고 博士(博士: 地方 長官職)를 삼아 西邊 百 里의 땅을 봉하여 주었다. 그러나 위만은 이들 有望人을 統率하고 그들과 結託하여 自己 勢力을 기른 다음, 하루는 準王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나라 兵士가 十道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王을 護衛하겠다고 하여 갑자기 軍士를 몰아 準王을 몰아내고, 스스로 王位에 올라 衛滿朝鮮 을 建國한다. 이때를 《 詐欺 》(史記)에는 孝惠顧後市(孝惠高后時, 紀元前 194年~ 紀元前 180年)라고 하였다. 都邑은 以前의 朝鮮과 마찬가지로 王儉城 에 定했다.

이때 準王은 南쪽의 진국 方面으로 亡命하여 漢王(韓王)이 되었다고 한다. 위만은 《詐欺》 以下 《 漢書 》 等에 모두 戀人(燕人)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關하여 최남선 은 이를 國恥(國恥)로 여기고, 衛滿朝鮮을 漢四郡 과 더불어 ‘支那人의 북새질’이라 規定하고, 위만의 王位 簒奪을 ‘위만의 도둑질’이라고까지 하였다.

위만 時期 [ 編輯 ]

古朝鮮 의 支配者가 된 위만 은 外國으로의 出征뿐만 아니라 나라 안을 다스리는 整備에도 힘을 써 王位 世襲權이 確立되었을 뿐 아니라 土着民의 懷柔에도 相當히 成功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만 執權 初의 한나라 도 建國 初期로 國家的인 體制가 堅固하지 못하였으며 前부터 繼續하여 侵入하던 匈奴 에 對備하기가 汲汲하여 朝鮮에 對한 政策은 대단히 消極的이었다. 그러나 朝鮮의 政治的 變動은 隣接한 요동군 에 對하여 不安을 준 듯하여 요동 태수는 위만으로 하여금 恨의 外信(外臣)이 될 것과 搖動 塞外(塞外)의 敵이(狄夷)가 恨의 變更을 侵犯치 못하게 할 것 그리고 敵異議 第 軍將(君長)李 恨의 天子를 入見하려고 할 때 막지 말 것 等을 盟約하게 하고, 旱祭(漢帝)의 裁可를 얻게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위만은 限으로부터 兵力과 物資의 援助를 얻어 勢力을 伸張하였다. 特히 이웃의 작은 마을과 眞番 · 臨屯 等을 아울러 服屬하여 領土가 數千里에 達하는 地域을 다스리게 되었고, 周圍의 여러 氏族社會를 統合하여 葛藤을 줄이고 政治의 安定을 圖謀했다.

진무 等이 남月과 朝鮮이 兵力을 裝備하여 中國을 엿보고 있으니 이들을 치자고 奏請한 事實로 보아 위만은 周圍의 여러 氏族 社會를 統合하여 强力한 國家를 形成하고 機會가 오면 搖動 方面으로 進出하여 霸權을 잡아보려는 計劃을 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은 진무 等의 主張은 實現을 보지 못하였지만, 當時의 위만의 態度가 尋常치 않았던 것을 斟酌할 수 있다.

衛滿의 强盛은 그 自體의 實力도 있었지만 이때 北아시아에 强大한 帝國을 形成하였던 匈奴 諸國과 緊密한 連絡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事實이다. 衛滿의 아들 이름은 確實치 않으나 그의 孫子는 우거왕 이었다고 그 이름이 傳한다.

우거 時期 [ 編輯 ]

右渠王 때는 中國 한 武帝(紀元前 140~87) 때에 該當하는 時期였다. 이때 中國은 四方을 侵略하여 領土를 擴張하고 있었다. 無題에게는 匈奴 가 가장 두려운 存在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匈奴를 치기 위하여 張騫 大月氏 에 派遣하여 同盟 關係를 맺으려고 한 것도 이때였다. 無題의 東方에 對한 朝鮮 政策에는 匈奴 勢力을 牽制하기 위한 方便도 있었을 것이다. 《 漢書 》에는 “ 東이 (東夷)의 예군(濊君) 南呂 (南閭) 等의 28萬 人이 投降하였으므로 이곳에 滄海郡 (蒼海郡)을 設置하였다.”라고 記錄되어 있지만, 《 後漢書 》에는 數年이 지나자 滄海郡을 革罷하였다고 하여 南呂 가 牛車의 支配下에 있다가 限에 投降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 武帝는 그곳에 滄海郡을 設置하고 烹誤(彭吳)를 시켜 이곳에 이르는 通路 開拓을 命하였으나 工事費와 勞動力이 莫大하게 投入되는 事實 때문에 滄海郡이 設置된 지 3年 만인 紀元前 126年에 革罷하고 말았다. 또 寓居는 위만 때와 달리 韓의 亡命人을 包攝하고 勢力을 養成하여 恨에 對抗하여 入見(入見)하지 않을 뿐더러 眞番에 남接한 진국 이 恨에 入朝하려는 것을 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問題가 되었다. 이것이 恨의 東邦侵略의 한 口實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匈奴가 衛滿朝鮮과 同盟을 맺게 되면 한으로서는 큰 負擔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 武帝는 外交的 方法으로 牛車의 巨漢 政策(拒漢政策)을 撫摩하려 하였다. 武帝는 紀元前 109年에 使臣으로 섭下를 派遣하여 說得시키려 하였으나 寓居는 提議를 拒絶하고 從前의 態度를 굽히지 않았다. 韓銀 섭下를 요동군 동부도位(東部都尉)로 임명하였는데 朝鮮은 이 消息을 듣고 軍士를 일으켜 그를 殺害하였다. 이 事件이 한 武帝가 朝鮮에 侵略軍을 일으킬 구실을 준 것이며, 한 武帝의 根本 政策은 卽位하여 四方을 侵略하고 領土를 擴張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한 武帝는 罪人들을 募集하여 朝鮮을 칠 準備를 하였다. 紀元前 109年 가을에 이르러 肉海路를 통하여 侵略을 開始하였다. 洋服 渤海 를 거쳐 王儉城(王儉城)으로 쳐들어가는 水路君을 맡았고, 順遞 는 搖動으로 出發하여 브라이언 浿水)에 이르는 陸路君을 指揮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攻擊으로 온 陸·數로 兩軍이 모두 무너지자 戰爭은 膠着狀態에 빠지게 되었고, [3] 朝鮮 征服이 不利한 局面으로 展開되자 한 武帝는 다시 寓居에게 平和的 方法을 提議하게 되었다. 胃酸(衛山)을 派遣하여 和議를 交涉케 하였다. 寓居度 態度를 바꾸어 和議에 同調하면서 和議 交涉에 應하고 太子를 派遣하여 謝禮하는 뜻을 표하게 하였다. 그러나 1萬餘 名의 軍士를 이끌고 會社길에 나선 太子가 패수를 건널 때 交涉史 胃酸과 順遞는 太子의 護衛軍士의 武裝을 解除하라고 要求하였고, 身邊을 걱정한 太子는 渡江을 中止하고 王儉城으로 돌아오니 和議는 決裂되었다. 이리하여 順遞와 洋服은 王儉城에 이르러 西北과 南쪽에 陣을 치고 包圍하였다. 하지만 順遞와 洋服은 主戰論, 和議論으로 各其 그 意見이 엇갈려 戰爭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한 武帝는 胃散의 平和 交涉 失敗와 順遞·洋服 間의 不和로 인한 作戰의 不振 等을 勘案하여 現象 打開를 위한 方法으로 濟南 태수 公孫樹(公孫遂)를 現地에 派遣하여 이 問題를 解決토록 하였다. 公孫樹가 戰爭터에 이르자 順遞는 前날 洋服의 所行을 들어 洋服과 朝鮮이 함께 我軍을 滅할지도 모른다고 그의 意中을 밝히자 公孫樹는 順遞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洋服을 잡아 가두고 水路君을 順遞의 麾下에 倂合시켜 作戰의 一元化를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公孫樹로부터 이러한 顚末을 報告받은 武帝는 公孫樹를 斬刑에 處하였다.

順遞가 總攻擊을 敢行하는 中에 王儉城 內의 朝鮮 朝廷에서는 火·前 洋파로 對立이 深刻하여 主和派(主和派)는 集團的으로 離脫하거나 한군에게 投降하는 現象까지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洋服과 몰래 和議를 推進하던 一派로 보이는 한음 · 왕겹 · 老人 은 모두 逃亡하여 한軍에 投降하다가 老人은 中途에서 죽고 말았다. 이러한 支配層의 內紛 때문에 電力은 弱化되었고 紀元前 108年 主和派로써 城內에 殘留하고 있던 尼谿相 三 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 을 죽이고 한軍에 가서 降伏하게 되었다.

우거왕 被殺 後에도 王儉城의 抵抗은 頑强하였다. 牛車의 大臣이었던 性器 가 反擊戰을 펴 順遞는 앞서 投降한 王子 張沆 과 老人의 아들 로 하여금 城內의 百姓을 懷柔하게 하여 性器를 죽였다. 이렇게 하여 衛滿朝鮮의 3代 80餘 年 繼續된 王朝는 幕을 내리고 韓銀 漢四郡 을 設置하게 되었다.

衛滿 朝鮮의 國家的 槪念 [ 編輯 ]

最近에는 위만 朝鮮을 中央 政治 組織을 갖춘 强力한 國家로 보고 있는데 이 때에는 '國家란 무엇인가'라는 槪念 定義가 必要하다 [4] . 이것은 族長社會에 對한 論議와도 連結되는 問題이다.

國家에 對한 正義로써 마셜 살린스 (M. Sahlins)는 武力의 合法的인 使用과 中央集權化된 組織의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最近까지도 가장 公約數가 많은 見解이다. 켄트 플래너리 (K. Flannary)는 위의 特徵 外에 法律, 都市, 職業의 分化, 徵兵 制度, 稅金 徵收, 王權, 社會 身分의 階層化 等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제 特徵들이 衛滿 朝鮮 關係 記事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詐欺 의 朝鮮列傳에는 職業的인 階級을 가진 中央 官僚 政府와 莫强한 軍事力, 階層化된 身分 組織, 行政 中心地로서의 王儉城 , 王權의 世襲化 等의 要素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위만 朝鮮은 初期에 周圍의 流離民 集團을 征服해 나가다 차츰 時間이 흐를수록 完璧한 國家 體制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衛滿 朝鮮의 國家的 性格 [ 編輯 ]

衛滿朝鮮은 征服 國家로 보는 見解와 貿易에 基礎를 두고 成長한 國家로 보는 見解가 있는데, 最近에는 後者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에 依하면 變한 , 辰韓 , 馬韓 , , 예 等 철을 中心으로 하는 交易이 南部 地方에 行해지고 있을 때 위만 朝鮮은 韓半島 北쪽의 地理的인 要衝地에 자리잡아 그 地理的 利點을 最大限으로 利用한 中心地 貿易을 展開하면서 莫大한 黑字를 보았다. 이를 土臺로 國家를 성립시킴과 同時에 勢力을 擴張, 强化시켰다는 것이다.

當時의 貿易路는 明刀錢 의 出土地로 보아 난평 - 療養 - 무筍 - 委員 , 江界 - 平壤 이 될 것으로 推定되기도 하며, 산둥半島 를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다고 推定되기도 한다.

歷代 君主 [ 編輯 ]

  1. 위만王 (紀元前 194年 ~ ?)
  2. 不明 (? ~ ?)
  3. 우거왕 (? ~ 紀元前 108年, 衛滿의 孫子)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司馬遷 “연왕 노관(盧?)李 배반하여 匈奴로 들어가자,...” / “燕王盧?反,入匈奴,”
  2. 司馬遷 “위만(魏滿)이 亡命하여 千餘 名의 무리를 모아서 상투를 틀고, 敵이(狄夷)의 衣服을 입고 東쪽으로 要塞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陳(秦)나라의 빈 땅의 아래位 堡壘에서 살면서 ...”/“滿亡命,聚黨千餘人,?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
  3. 司馬遷 “天子는 罪人을 뽑아 朝鮮을 쳤다. 그 해 가을, 淚腺將軍(樓船將軍) 洋服(楊僕)을 派遣하여, 옛 第(齊)나라 땅으로부터 보하이 해〔渤海〕를 건너니 軍士가 5萬에 達했다. 左將軍(左將軍) 順遞(荀?)는 우거(右渠)를 討伐하고자 搖動(遼東)에서 나왔다. 寓居는 軍士를 풀어 險한 곳에서 막았다. 左將軍의 卒情(卒正) 다(多)가 搖動(遼東)의 兵士를 이끌고 먼저 放縱(放縱)하다가, 敗하여 흩어지고, 다(多)는 달려서 되돌아오니, 法에 따라 斬首되었다. 淚腺將軍은 옛 제나라 땅 出身의 兵士 七千名을 거느리고 먼저 王儉(王險)에 到達하였다. 寓居는 城(城)을 지키다가 淚腺將軍의 軍士가 적은 것을 알고 꾀를 내어 淚腺將軍을 물리치니 淚腺將軍은 敗하여 달아났다. 將軍 洋服은 무리를 잃고 산(山) 속에서 十餘日을 숨었다가, 漸次, 흩어진 兵卒을 救하고 거두니, 다시 갖추어졌다. 左將軍은 朝鮮 패수의 西쪽 軍을 攻擊하였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 / “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距險。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走。將軍楊?失其?,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
  4. “衛滿朝鮮(衛滿朝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019年 2月 1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9年 11月 25日에 確認함 .  

參考 文獻 [ 編輯 ]

  • 古朝鮮의 國家的 槪念
  • 有 엠 不찐저, 國史編纂委員會 飜譯, 「古朝鮮1(露語 飜譯本)」, 1986
  • 노태돈, 「檀君과 古朝鮮史」, 2000
  • 김정배, 「韓國 古代史 硏究」, 1979
  • 司馬遷, 「詐欺 中 朝鮮列傳」, 紀元前 109~91
  • 古朝鮮의 國家的 性格
  • 김정배, 「韓國 古代史 硏究」, 1979
  • 朝鮮民主主義 人民共和國 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朝鮮 遺跡 遺物 도감」, 1989

外部 링크 [ 編輯 ]

韓國 의 歷史
以前 時代 衛滿朝鮮
紀元前 194年~紀元前 108年
다음 時代
古朝鮮 ( 箕子朝鮮 ) 樂浪郡 ( 한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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