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基데온 폰 라우돈 男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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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基데온 폰 라우돈
Ernst Gideon Freiherr von Laudon
빈 군사사 박물관에 소장된 라우돈의 초상화
軍事史 博物館 에 所藏된 라우돈의 肖像畫
出生地 라트비아 투첸
死亡地 체코 共和國 奴婢理致
服務 러시아 제국 러시아 帝國
신성 로마 제국 神聖 로마 帝國 (1742年부터)
服務期間 1732年 - 1741年
1742年 - 1790年
最終階級 陸軍 元首
主要 參戰 폴란드 王位 繼承 戰爭
러시아-튀르크 戰爭 (1735年-1739年)

오스트리아 王位 繼承 戰爭

7年 戰爭

바이에른 王位 繼承 戰爭
第8次 오스트리아-튀르크 戰爭

기타 履歷 보헤미아-모라비아-슐레지엔 方面 總司令官
以後 오스트리아軍 總司令官
徐薰 마리아 테레지아 軍事 勳章

에른스트 基데온 폰 라우돈 男爵 ( 獨逸語 : Ernst Gideon Freiherr von Laudon (元來는 Laudohn 或은 Loudon ) ( 1717年 2月 2日 투첸 (Tootzen); 只今의 라트비아 ) ~ 1790年 7月 14日 奴婢理致 (Novy Ji?in);只今의 체코 共和國 )은 오스트리아 陸軍 元首 이다. 그의 스승인 수보로프 에 依하면 18世紀 가장 成功한 指揮官 中 한 名이라고 極讚했다. 그는 1789年 베오그라드를 占領한 以後 죽을 때까지 코카 안델코빅 (Ko?a Anđelkovi?)의 레지스탕스 戰士들과 함께 協同하였고, 세르비아 王國 의 軍事 長官의 位置로써 勤務하였다.

背景 및 初期 經歷 [ 編輯 ]

라우돈 家門은 스코틀랜드 胎生의 獨逸 , 라트갈레인 系가 섞인 家計로 1432年 以前에 東 라트비아 라우도나 (?audona)近處 투첸(Tootzen)에 領地를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오토 게른하르트 폰 라우돈(Otto Gerhard von Laudohn)은 스웨덴 軍隊에서 中領 으로 服務하다 隱退하여 年金을 받았고, 1732年 라우돈을 러시아軍 士官候補生으로 보냈다. 라우돈은 1734年 그단스크 의 攻城戰에서 陸軍 元首 뮌니히 (Munnich's)를 도왔고, 1735年 라인에서의 러시아 軍團의 行軍 투르크 轉役 에 參加했다.

1741年 自身의 將來에 對한 不滿과 함께 軍에서 辭任하고, 다른 곳에서 軍事에 關聯되어 雇傭 받기 위해 찾아 다녔다. 라우돈은 처음엔 프리드리히 大王 에게 雇傭 받으려 했으나 大王은 그를 拒絶했다. 오히려 에서 그는 트렌크 (Trenck)의 自由 軍團의 指揮官으로 雇用되는 더 좋은 幸運을 얻게 되었다. 알자스 에서 負傷을 입고 捕虜가 될 때까지 그는 自身이 맡은 任務인 行進 中 殘酷行爲와 掠奪을 遂行했다. 얼마 안가 풀려난 라우돈은 主要 오스트리아 軍으로 轉補하게 되었다.

7年 戰爭 [ 編輯 ]

陸軍 元首 라우돈 肖像畫
쿠너스도르프 戰鬪의 戰場에서 라우돈의 모습.(빈 軍事史 博物館).

1745年 슐레지엔 山脈에서 트렌크의 指揮下에 默默히 勤務하며 警長部隊를 이끌고 全域에서 눈부신 活躍을 보였다. 라우돈은 또한 手語 에 參戰했다. 非正規軍에 있을 때 同僚들이 보인 無法的인 性向을 嫌惡한 그는 그 때문에 暫時 隱退를 考慮했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正規 業務로는 不足하지만 그에게 國境 連帶 中 한곳의 指揮官으로 마지막에 任命되어 카를로바츠 地球에서 半-行政業務를 맡아 班-軍士로서 10年을 보내게 되었다. 不닉 (Buni?)이란 場所에는 그가 세운 敎會와 工場, 오크(oak) 숲들이 現在 그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7年 戰爭 이 勃發하자 라우돈은 中領 階級으로 불림을 받아 다시 戰場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軍人으로서 名聲을 떨치게 되었다. 곧 大領으로 昇進했고, 뛰어난 活躍을 繼續해 1757年 Generalfeldwachtmeister(騎兵隊의 所長 )이 되었고, 最近에 制定된 마리아 테레지아 勳章 을 授與받게 되었다.

1758年 全域에서 總司令官의 指示에 따라 行動한 그에게 첫 機會가 찾아왔다. 그의 活躍에 依해 프리드리히 大王은 올로모우츠 의 攻城戰을 어쩔 수 없이 抛棄하고, 보헤미아로 退却하고 말았다( 돔魔소프 戰鬪 , 6月 30日). 그는 호크키르히 의 全域에서 指揮에 挑戰하여 뛰어난 活躍을 보이며, 中級 陸軍 元首(lieutenant-field-marshal)의 地位에 오르는 補償을 받았다. 라우돈은 마리아 테레지兒와 그女의 男便 프란츠 1歲 에게서 神聖로마帝國의 貴族이자 오스트리아 貴族인 프라이헤르 (Freiherr)를 授與 받았다. 또한 더 나아가 보헤미아의 쿠트나호라 近處 所有地를 保有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大 十字架 勳章과 함께 그에게 所有地를 膳物로 주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廣場에 있는 에른스트 基데온 폰 라우돈의 騎馬像

라우돈은 러시아의 命令을 받는 條件으로 聯合하는 오스트리아軍 指揮官이 되어 쿠너스도르프 에 參戰해 표트르 살티코프 (Pyotr Saltykov) 指揮 下에서 聯合한 러시아-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大勝利를 거뒀다. 그 結果 라우돈은 Feldzeugmeister으로 昇進하면서 보헤미아, 모라비아와 실레지아의 總司令官이 되었다. 1760年 그는 란츠후트 그라츠 重要한 要塞를 急襲 푸케 (Fouque) 指揮下의 프리드리히 君의 軍團을 擊破했다. 1760年 그는 리그니츠 戰鬪 (1760年 8月 5日)에서 거꾸로 프리드리히 손에 敗北했는데, 以後 라우돈이 主張하길 自身의 軍隊를 支援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主要 軍隊의 指揮官 다운 라시 (Lacy)의 行動에 對한 고통스런 論爭에 들어가게 되었다.

1761年 그는 行動을 再開해 平素처럼 실레지아에서 그의 러시아 同盟과 함께 쿠너스도르프 以後 小心해져 분첼비츠 (Bunzelwitz)의 프리드리히의 塹壕로 에워쌓여진 陣地를 發見하고, 그걸 相對로 모든 試圖를 해보았으나 失敗했다. 1761年 9月 30日/10月 1日 밤에 있었던 슈바이드니츠 (Schweidnitz) 急襲은 燦爛한 功績에 비해 그의 하나의 덧없는 號機였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行動은 戰爭이 끝난 뒤에도 이어져 다운과 라시의 臨時變通的인 戰略과는 눈에 띄게 달랐다.

7年 戰爭의 以後 全域을 工夫한다면 아마 다운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侵略力(aggressiveness)이 必要하다는 것을 認定할 것이다. 그리고 라우돈이란 天才와 한 雙을 이루는 것을 警戒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認定하지 않는다면 오스트리아 軍에서 이들을 가리켜 부르는 " 파비우스 "와 " 마르켈루스 "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衝突은 戰爭이 끝나는 마지막 3年 동안 繼續되었다.

以後 經歷 [ 編輯 ]

라우돈의 大理石 胸像 Giuseppe Ceracchi 作品.

平和가 찾아온 後, 다운은 事實上 軍의 總司令官이 되었고, 그러므로 라우돈은 背景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大帝로부터 提案을 받게 되었는데, 라우돈에게 自身이 있는 곳으로 옮겨 勤務하도록 說得했다. 라우돈은 提案을 拒絶했지만 비록 몇 年의 時間을 보내고 交涉 끝에 戰爭評議會의 議長인 다운으로부터 職位를 물려받은 라시로부터 步兵의 監視總監에 任命되었다. 그렇지만 라우돈과 라시 사이에서 意見衝突은 繼續되었고, 그의 라이벌과 親密한 關係였던 요제프 2歲 가 王位를 繼承瑕疵 라우돈은 쿠트나호라 近處 自身의 領地로 隱退했다.

마리아 테레지兒와 카우니츠 (Kaunitz)는 그를 다시 불러 1769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總司令官에 임명했다. 라우돈은 그 職位에서 3年을 보냈고, 時間이 지나자 深思熟考 끝에 職務에서 隱退하기로 決定하고 自身의 領地로 다시 돌아갔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한番 더 그에게 軍에 남아있으라고 說得하고, 보헤미아에서 農地 紛爭 때문에 價格이 떨어진 그의 領地를 1776年 그女는 厚한 條件으로 그에게서 다시 되샀다. 라우돈은 빈 近處 下데르스도르프 (Hadersdorf)에 定着했고, 얼마 안 있어 陸軍 怨讐가 되었다. 칼라일 의 記錄에 依하면 1776年 프리드리히 大王과 라우돈이 만났고, 皇帝가 參席한 자리에서 "Herr Feldmarschall"(안녕 元首님)이라고 일부러 人事말을 그에게 건넸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 端緖는 1778年 2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1778年 바이에른 繼承 戰爭 이 일어났다. 요제프와 라시는 當場에 라우돈과 和解하고 라우돈과 라시가 指揮하는 2個의 軍隊가 戰場에 나갔다. 이것은 특별한 일인데, 라우돈이 보기엔 라시가 프리드리히 軍隊에 對抗해 새로운 榮譽를 얻을 동안에 그의 名聲이 예전에 비해 보다 아래로 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2年이 지난 後 라우돈은 下데르스도르프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새로운 戰爭이 투르크에 依해 1787年(보기 오스트리아-투르크 戰爭 (1787年-1791年) 에 始作되었는데, 戰爭의 狀況이 매우 나빠지자 將軍의 交替가 提起되었다. 이리하여 라우돈이 불러져 그의 마지막 時間을 戰場에서 보내게 되었다. 비록 나이가 많고 健康이 나빴음에도 그는 이름에 걸맞게 能熟하게 總司令官을 맡아 1789年 3週 만에 베오그라드 를 占領해 그의 마지막 燦爛한 成功을 거뒀다.

그는 다음해 조용히 義務를 다하고 모라비아의 奴婢理致 에서 죽었다. 그가 마지막에 任命된 것은 오스트리아軍 總司令官職인데, 새로운 皇帝 레오폴트 가 그에게 하사한 것이다. 라우돈은 下데르스도르프의 땅에 묻혔다. 그가 죽기 8年 前 皇帝 요제프에 依해 戰爭 評議會 會議室에는 이 偉大한 軍人의 大理石 胸像이 彫刻되어 展示되었다.

그의 아들 요한 루트비히 알렉시스 프레이헤르 폰 라우돈(Johann Ludwig Alexius Freiherr von Laudon, 1762-1822)은 革命期 나폴레옹 戰爭 에서 싸워 名譽를 얻어 中-陸軍怨讐(lieutenant-field-marshal)의 地位까지 올랐다.

各州 [ 編輯 ]

첫 番째 戰艦 오스트리아-헝가리 海軍의 에르사츠 모나쉬 (Ersatz Monarch) 級(公式的으로 알려진 것은 쉬이프 8(Schiff VIII)은 라우돈이란 이름을 使用하였다. 이 戰艦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乾燥된 모든 主要 軍艦 中 唯一하게 中斷되지 않고, 世界大戰의 勃發 속에도 期日 內에 建造되었다.

'Fix Laudon' 이란 文句는 오스트리아에서 때때로 가벼운 辱說로 使用한다.이것은 無條件 마리아 테레지兒를 가리켜 말하는 것으로 프리드리히 大王에게 실레지아를 잃은 것에 對해 그女가 들으라고 한 것이다.

個人 이름에 關하여 : 프라이헤르 (Freiherr)란 타이틀은 飜譯하면 男爵 (Baron)이란 意味로 첫 番째 或은 中間 이름이 아니다. 女性型은 프라이프라우 (Freifrau)와 프라이人 (Freiin)이다.

參照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