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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 農民 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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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 農民 革命
날짜 1894年 ~ 1895年
場所
結果 東學農民軍 의 敗北
交戰國
朝鮮
청나라 淸나라
東學農民軍 일본 제국 日本 帝國
指揮官
高宗
이용태
홍계훈
조병갑
이기동
청나라 光緖帝
청나라 李鴻章
청나라 정여창  
청나라 등勢窓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이방언
최시형
손병희
일본 제국 메이지 天皇
일본 제국 야마가타 아리토모
일본 제국 이토 스케유키
일본 제국 怒氣 마레스케
天道敎
主要 人物
최제우   ·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전봉준
經典
東經大全   · 龍潭遺詞
海月神社 法說
義菴成事 法說
敎理
侍天主   · 事人如天   · 人乃天   · 後天開闢
歷史
東學   · 東學 農民 革命
關聯 團體
天道敎 中央摠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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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遺産
天道敎 中央大敎堂   · 天道敎 任實敎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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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農民革命 (東學農民革命) [1] , 東學 革命 (東學革命), 東學 運動 (東學運動), 東學 農民 運動 (東學農民運動) 또는 東學 農民 戰爭 (東學農民戰爭)으로 불리기 始作한 東學亂 (東學亂)은 1894年 東學 指導者들과 東學 敎徒 및 農民들에 依해 일어난 百姓의 武裝 蜂起를 가리킨다. 크게 1894年 陰曆 1月의 고부 蜂起(1次)와 陰曆 4月의 全州城 蜂起(2次)와 陰曆 9月의 全州·廣州 蹶起(3次)로 나뉜다.

敎祖 최제우 의 身元 外에도 旣存 朝鮮 兩班 官吏들의 貪虐과 腐敗, 社會 混亂에 對한 不滿이 쌓이다가, 1892年 (高宗 19年) 全羅道 고부군 에 赴任된 조병갑 의 非理와 남형이 導火線이 되어 일어났다. 腐敗 剔抉과 內政 改革, 그리고 東學 敎祖 身元 等의 旗幟로 일어선 東學農民軍 中 一部는 흥선大院君 , 이준용 等과도 結託했다. 전봉준 은 大院君을 半信半疑 하면서도 명성황후 와 閔氏 勢力의 逐出을 위해 大院君과 손을 잡았다. 大院君 亦是 明成皇后의 除去를 위한 武力 集團이 必要했고, 東學農民軍과 提携하게 된다. 東學農民軍 中 一部는 貪官汚吏 處罰과 改革 外에 大院君의 攝政 [2] 까지도 擧兵의 名分으로 삼은 바 있었다.

한便 흥선大院君 科의 連帶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 은 隨時로 전봉준 과 衝突하다가 獨自的인 行動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 은 農民運動 鎭壓 直後 흥선大院君 이 特別히 赦免을 請하여 釋放되었으나 閔氏 系列의 官軍에 依해 殺害된다. 그밖에 최시형 , 손병희 等 北接의 指導者들은 남接의 擧兵에 쉽게 呼應하지 않다가 그해 9月 의 3次 蜂起 때부터 움직이기 始作한다. 한便 開化派 指導者이자 亡命政客人 윤치호 는 東學 農民 運動을 積極 支持하여 話題가 되기도 했다. [3]

初期에는 東學亂 , 동비의 난 [4] 으로 불리다가 1910年 大韓帝國 滅亡 以後 農民運動, 農民革命으로 格上되었다. 東學農民革命 (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甲午年 에 일어났기 때문에 甲午農民運動 (甲午農民運動), 甲午農民戰爭 (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東學農民軍을 鎭壓하기 위해 閔氏 政權에서는 淸나라 軍과 日本軍 을 번갈아 끌어들여 結局, 農民 運動 鎭壓 後 淸日 戰爭 의 直接的인 原因이 되었다.

背景 [ 編輯 ]

東學農民軍 側에서 使用한 斥倭양창의 (斥倭洋倡義, 日本 勢力과 西洋 勢力을 排斥하고 義를 내세운다) 旗발
崔時亨의 印章

1882年 以後의 各種 社會 混亂과 政府의 腐敗로 民心이 動搖하던 가운데 고부군 郡守 조병갑 의 橫暴가 導火線이 되어 農民運動을 일으켰다. 1882年 舊式 軍隊 廢止와 關聯하여 5軍營에 所屬되었던 軍人들에 依해 壬午軍亂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年에는 開化派의 甲申政變이 일어난다. [5]

壬午軍亂 (壬午軍亂) 때는 흥선大院君 이 叛亂 勢力을 등에 업고 宮中에 들어와 大權을 掌握했다가 곧 淸軍에 依해 拉致되었고, 1884年 甲申政變 때 宮中을 襲擊한 開化 勢力이 政權을 掌握하였으나 淸나라軍 에 依해 밀려남으로써 王權은 크게 失墜되었다. 뿐만 아니라 淸나라와 日本이 이 變亂을 契機로 朝鮮에 進駐해 勢力 다툼을 벌여 朝鮮의 自主權에 致命的인 損傷을 입게 되었다. [5] ( 톈진 條約 을 破棄시킬만큼) 閔氏 政權에서 淸나라 君을 끌어들여 開化派를 鎭壓瑕疵, 日本은 日本隊로 淸나라가 朝鮮을 武力으로 占領한다는 理由를 내세워 朝鮮에 兵力을 大大的으로 派遣하였다.

壬午軍亂 甲申政變 (甲申政變) 以後 閔氏 政權과 高宗은 親淸 政策을 펼치면서 새로운 局面을 摸索했지만 急激하게 變化하는 東아시아 情勢에 效果的으로 對處하지 못해 混亂은 漸次 加重化되었고 全國 곳곳에서 反封建, 反外勢의 旗幟를 내건 民亂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5] 及其也 그것은 1894年 3月 東學革命으로 暴發되어 官軍과 農民 사이의 全面戰으로 發展하였다. [5]

槪要 [ 編輯 ]

고부 蜂起와 自進 解散 [ 編輯 ]

1894年 2月 15日 ( 陰曆 1月 10日 ) 貪虐한 고부郡守 조병갑 의 貪虐에 고부군의 東學徒들과 農民軍들이 쟁기와 낫 等 農器具를 들고 集團으로 武裝 示威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곧 中央政府의 貪官汚吏들에 對한 憤怒로 向했다. '輔國安民'과 '閉廷改革'을 旗幟로 내건 農民들의 氣勢가 걷잡을 수 없이 全國的으로 擴散되자 [5] 大院君은 이 機會를 利用, 東學農民軍과 接線하여 孫子인 이준용을 推戴할 計劃을 세운다.

1886年 흥선大院君 은 閔氏 政權이 〈 條約 〉을 締結하자 不滿을 품은 위안스카이 (袁世凱)와 結託하여 長男 이재면 (李載晃, 高宗 의 兄,완興群/興親王)을 擁立하고 再執權하려다가 失敗하고, 1894年 東學革命이 일어나자 農民 勢力과도 聯合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東學農民運動이 失敗로 돌아가 實現되지 못하였다. [6] 東學軍 中에는 全琫準과 같이 大院君의 門下에 出入하던 人物들도 있었고, 閉廷改革과 大院君 推戴, 閔氏 外戚勢力 剔抉과 開化派 剔抉을 외치는 목소리도 强力했다. 大院君과 이준용은 閔氏 政權의 腐敗政治와 地方에 派遣된 貪官汚吏들에 對한 反撥을 注目했다.

한便 政府에서 按覈使(按?使) 이용태 를 보내 이들을 慰勞하고 貪官汚吏들을 處罰할 것을 約束하자 고부군의 東學軍은 解散하였다.(하지만 按覈使 이용태 마저 百姓들을 背信함.)

2次 蜂起(전주성 占領) [ 編輯 ]

그러나 按覈使 이용태 는 첫 蜂起를 ‘東學徒의 叛亂’으로 規定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宣言, 叛亂 關聯者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東學徒 取扱하였으며, 그 過程에서 東學과는 相關 없는 全羅北道, 忠淸南道 地域의 農民들을 東學徒로 몰아 逆賊罪로 處罰하였다. 이용태의 强勁策에 憤慨한 전봉준 과 農民들은 이에 屈服하지 않고 總鰭類와 農器具 等으로 武裝한 뒤, 態인 大接主 김개남 , 武裝(茂長) 大接主 손화중 等과 함께 蜂起하였다. 이것이 ‘2次 蜂起’, ‘白山 蜂起’, ‘三月 蜂起’ 等으로도 불리는 ‘ 東學農民革命 ’의 始作이다. 全琫準을 總大將, 김개남 , 손화중 을 掌令(將領)으로 삼은 農民軍은 1894年 陰曆 3月 下旬에 白山에 모여 蹶起한 뒤 전주성을 占領한다.

한便 東學農民軍은 姑婦의 황토현 (現在의 全羅北道 井邑市 덕천면 )에서 4月 7日(陽曆 5月 11日) 全州監營軍을 擊破했다. 이에 크게 놀란 朝廷에서는 全羅道 兵馬節度使 홍계훈 을 招討使로 임명하여 蜂起를 鎭壓하도록 하였다. 井邑 , 興德 , 高敞 , 武裝 等을 占領한 東學農民軍은 4月 23日 (陽曆 5月 27日), 將星 황룡촌 戰鬪에서 홍계훈 이 이끄는 政府軍을 相對로 勝利하였다. 4月 27日 (陽曆 5月 31日) 農民軍은 전주성으로 入城하였다. [7]

1894年 3月 21日 고부에서 蜂起한 지 석 달, 全州城 을 占領한 農民軍은 淸, 日에게 軍事駐屯 빌미를 주지 않기 爲해 甲午改革 의 始作되는 〈全州和約〉을 맺고 解散했다. [8]

全州和約과 淸日 兩國軍의 駐屯 [ 編輯 ]

事態가 擴散되자 高宗과 王妃는 唐慌하였다. 高宗과 閔氏 勢力은 淸나라에 援兵을 請하였고, 請이 이에 應하자 日本 亦是 톈진 條約을 빌미로 軍隊를 動員하였다. 이처럼 外勢가 介入하자 農民軍과 官軍은 會談을 통해 和議를 約束하고 싸움을 中斷하였다. [9]

하지만 朝鮮에 進駐한 淸, 日 兩國軍은 돌아가지 않았다. 日本은 淸에게 朝鮮의 內政 改革을 함께 實施하자고 提議하였지만 청은 이 提議를 拒絶했다. 그러자 日本은 不法으로 朝鮮 宮闕 景福宮을 侵犯(甲午倭亂) 명성황후 閔氏 政權을 몰아내고 흥선大院君 을 앉혀 꼭두각시 政權을 탄생시켰다. [9] 김홍집, 어윤중, 朴泳孝, 徐光範 等을 中心으로 한 第1次 金弘集內閣, 卽 親日 內閣은 日本公使 오토里의 입김 아래 一連의 改革措置를 取했다. 이것이 朝鮮政府와 東學農民軍과 맺은 自主的인 改革 全州和約 을 干涉한 親日內閣의 甲午改革 이다. [8]

그 뒤 改革 推進 機構로서 全州和約 當時에 設置된 校正廳 을 廢止 以後 軍國機務處 가 設置되었고, 校正廳 出身인 김홍집 이 中心이 되어 內政 改革이 斷行되었다. [9]

3次 蜂起와 失敗 [ 編輯 ]

日本은 이처럼 單獨으로 朝鮮의 內政 改革을 斷行함과 同時에 朝鮮 에 駐屯하고 있던 淸나라 軍을 攻擊하여 勝利한 뒤 正式으로 請에 宣戰布告를 하였다. 7月에 始作된 淸日戰爭은 두 달 만에 龜尾 列强의 支持를 등에 업은 日本 의 勝利로 끝났다. [9]

淸日戰爭에서 勝利한 日本 은 그 때부터 本格的으로 朝鮮 征服을 위해 內政 干涉을 實施하였다. [9] 이 때문에 解散되었던 東學農民軍이 外勢排擊에 旗幟를 내걸고 다시 召集되어 對日 農民戰爭을 敢行했다. [9]

蜂起한 東學農民軍 第1代는 全琫準의 指揮 下에 공주성으로 다가들었고, 第2代인 金開男의 指揮下에 淸州兵營으로 進擊했다. 農民軍의 最終 目標는 서울로 쳐들어가 腐敗한 政治家들과 外勢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敎祖身元運動에서 고부 蜂起, 그리고 第2次 蜂起까지 全琫準과 農民軍은 오직 그 날을 위해 달려갔다. [8] 하지만 官軍과 日本軍 의 火力에 밀린 農民軍은 그 해 12月 敗北하여 東學 農民軍의 蜂起는 失敗로 돌아가고 말았다. [9]

敎祖 身元運動과 大院君의 介入 [ 編輯 ]

1864年 敎祖 최제우 를 處刑하여 軍門 梟首하였다. 以後 東學 徒들은 每年 敎祖의 無罪를 主張하는 上疏를 올리는 等의 敎祖 身元 運動을 벌였다. 東學徒들은 東學徒들 臺로 每年 漢城으로 上京하여 敎祖 身元과 布敎 許容을 請願하는 上疏를 올렸다.

한便 1893年 흥선大院君 은 東學徒들이 上京하여 景福宮 앞에서 複合上疏運動을 벌이는 機會를 利用하여 이준용 을 王으로 推戴하려 하였다. [10] 精巧 1893年 2月 11日 부터 2月 13日 까지 3日間 박광호를 小斗로 하는 約 50名의 東學敎徒들이 上京하여 宮闕 앞에서 敎祖 身元을 歎願하며 連坐示威를 벌인 事件을 大院君이 시킨 일이라고 主張하였다. [10] 이때 精巧 는 大院君이 隱密히 東學黨 數萬 名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張差 不軌를 圖謀하여 그의 孫子 이준용을 王으로 推戴하려 했으나 結局 失敗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10]

고부 蜂起 背景 [ 編輯 ]

1892年 전봉준 이 살던 고부군 조병갑 이란 이가 郡守로 迎戰하여 왔다. 趙秉甲은 農民들에게 過重한 稅金을 賦課하는 것은 勿論 無辜한 사람의 財物을 빼앗아 喝取하고 이에 對抗하는 사람들에게는 假借없이 迥別을 加하였다. [11] 全羅道 고부군에 赴任된 조병갑 은 農民들을 괴롭혔다. 全羅道 姑婦는 본디 肥沃한 땅으로 貯水池가 하나만 있으면 充分했다. 그러나 趙秉甲은 農民들에게 억지로 貯水池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淫亂한 罪, 和睦하지 못한 罪 等 여러 罪名을 씌어 罰金을 받아 냈고, 父親의 碑石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고부郡守 趙秉甲의 貪虐 古阜 郡守 조병갑 은 아버지의 善政碑 또는 神道碑 를 세우는데 費用을 마련하기 위해, 自身의 任地인 고부군 군민들에게 稅金額數를 引上하여 거둬들였다. 조병갑 은 自身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農民들로부터 千 兩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住民들에게 갖가지 罪를 뒤집어 씌워 2萬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罰金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大同米를 代身하여 돈을 거두고, 萬石洑라는 貯水池를 만든답시고 쌀 700席을 着服하기도 했다. [11] 한便 조병갑 은 中央 調整에도 賂物을 바쳤다. 中央 朝廷에 바치는 賂物은 儀禮的인 것으로 賂物을 바치지 못하는 軍需나 縣監, 府使, 觀察使는 얼마 못가 罷職되거나, 政府에 莫大한 돈을 獻納하는 者를 軍需나 縣監, 府使, 監査로 任命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稅金이 引上되자 住民들의 不滿은 加速化되었다. 여기에 조병갑 의 虐政이 심해지자 古阜 住民들을 代身하여 전봉준 의 아버지이자 當時 勳章이던 전창혁은 農民들의 要請에 따라 官廳에 免稅를 申請하는 歎願書를 提出했고, 이로 인해 甚하게 매를 맞고는 歸家한지 한 달 만에 醬독으로 죽게 된다. [11]

虐政에 시달리다 못한 古阜 住民들은 1893年 11月 12月 두 番에 걸쳐 郡守에게 減稅 歎願書를 提出하였다. 하지만 趙秉甲은 陳情書를 提出하려고 온 農民 代表를 붙잡아 下獄시키고 拷問을 加하는 것으로 歎願書에 對한 對答을 代身했다. [11] 이어 全羅北道 觀察使 에게도 歎願書를 보냈지만 應答이 없었다. 歎願과 眞情으로 아무런 效果를 보지 못한 農民들은 結局 힘으로 郡守를 내쫓아야 한다는 結論에 到達했다. [11] 이어 一部 農民과 東學徒들은 武器와 火藥을 準備한다.

이에 憤激한 農民들은 勳章인 전봉준 을 先頭로 1893年 (高宗 30) 陰曆 12月과 이듬해 陰曆 1月, 2回에 걸쳐 郡守에게 是正을 鎭靜하였으나 逮捕 또는 逐出되었다. 以後 農民의 一部가 東學 敎徒들과 함께 漢城 으로 入境하여 貪官汚吏 處罰과 腐敗 政治人 罷職, 民生 救恤을 請하는 上疏를 올린다.

東學 農民軍의 指導者 전봉준 . 그는 農民 運動 當時 南接 所屬 東學軍 部隊 指揮官들 中의 한사람이었다.

1893年 12月 부터 1894年 1月 에 올린 東學徒 및 農民軍의 상소 中 최시형 의 彈劾 上疏에 依해 慶尙道 觀察使 조병식 (趙秉式), 令狀(營將) 윤영기 (尹泳璣) 等이 罷職되긴 했으나 以後 高官들은 農民들의 上疏文을 檢閱하였고, 事態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 전봉준 과 그의 一家를 잡아들이고, 全琫準의 父親에게 刑問을 加害 죽게 한다.

大院君 勢力의 介入 [ 編輯 ]

1894年 甲午農民戰爭이 勃發하고, 靑軍과 日本軍이 介入하자 大院君의 귀에는 農民들이 大院君 을 부르짖는다는 所聞이 들려왔다. 大院君은 密使를 派遣하여 農民軍 指導部와 接觸했다. [12] 1894年 2月 흥선大院君 은 이들을 利用하기로 하고 交涉을 試圖한다.

改革 運動 [ 編輯 ]

東學農民運動은 1894年 의 第1次 農民蜂起는 旣存 政府에 對한 不滿을 가진 農民들이 主導한 武裝改革 運動으로서 旣存의 閔氏 戚族 政權을 무너뜨리고 改革하자는 運動이다.

東學의 分裂 [ 編輯 ]

東學 敎祖 최제우 가 잡혀 죽은 後 東學은 크게 두 派로 갈라졌다. 하나는 최시형 系列이고 또 하나는 서장옥 系列이었다. [13] 그러나 이 두 派閥 모두 東學農民運動에 加擔하게 된다. 法包는 다시 최시형, 손병희 直系인 北接과 다시 全琫準, 金開男을 指導者로 하는 남접으로 나뉘게 된다. 서장옥은 佛敎 의 僧侶였다가 東學의 初期 弟子의 한 사람이 되었던 人物이다. 서장옥이 佛敎 僧侶였던 因緣으로 東學 農民軍이 擧兵할 때는 山寺의 僧侶들 動員이 可能하였다.

매천야록 을 쓴 黃玹 의 《오하기문 梧下記聞》에 따르면 "처음 東學에서는 그 무리를 抛(布)라고 불렀는데 法抛(法布)와 西浦(徐布 또는 西布)로 나뉘었다. 法包는 崔時亨을 받드는데 法軒이라는 崔時亨의 號에서 이름을 따왔다. 書舖는 湖西 或은 서장옥(서인주)의 姓을 따서 西浦라 불렀다. 서장옥은 水原 사람으로 崔時亨과 함께 敎祖 崔濟愚를 따라 배웠다. 崔濟愚가 죽자 各其 自己 徒黨을 세워 서로 傳授하면서 이를 布德이라 하였다. [13] 이들은 東學이 蹶起할 때 書舖가 먼저 일어나고 法砲가 뒤에 일어나기로 約束하였기 때문에 書舖는 또 氣泡(起布)라 하고 法包는 좌포(坐布)라 불렀다. 全琫準이 主動하여 일어날 적에는 모두 西浦였다."라고 記錄하고 있다. [14] 남접은 西浦의 한 갈래였다.

東學農民戰爭 後 살아남은 손병희 는 崔時亨의 둘째 사위이자 後繼者로, 崔時亨 死後 東學은 다시 內紛을 거듭하다가 天道敎 一進會 로 分裂되기에 이른다.

東學 農民軍의 派閥 [ 編輯 ]

東學 農民軍은 남접과 北接, 西浦(또는 瓠犀남椄)의 세 갈래의 派閥이 있었다.

남접 [ 編輯 ]

남접은 全羅道 地域에서 일어났던 東學農民軍으로 처음 擧兵한 集團을 말한다. 남접은 接主人 전봉준 , 武裝 待接主人 손화중 및 態인 待接主人 김개남 을 最高 指導者로 나뉘어 있었다. 全羅南道 , 全羅北道 에 影響을 미쳤으며 指導者들은 現地 出身 接主들 보다는 主로 高敞 , 태인 , 全州 , 옥구 , 금구 等 全羅北道 北部와 西部 出身들이 많았다. 慶尙北道 星州郡 , 漆谷郡 , 慶尙南道 河東郡 地域도 남接의 勢力圈이었다.

全州和約以後 全琫準은 湖南右道, 金開男은 湖南左道를 號令하였다. 寫眞은 金開男이 逮捕되어 全州로 押送될 때의 모습
穩健派인 武裝 大接主 손화중은 같은 穩健派인 
전봉준
에게 自身의 組織을 統率하도록 맡겼고, 强勁한 혁명파인 
김개남
은 革命을 함께 하면서도 때론 獨自的으로 움직인다. 全州和約 以後에는 全琫準이 금구에 대도소를 두고 全羅右道를 號令하고, 金開男은 
南原
에 대도소를 두고, 전라좌도를 號令하면서 
전봉준
과 달리 獨自的 行動을 하였다.
[15]

金開男은 내가 王사(王事)에 協力하자고 勸告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처음에는 相議한 바가 있었지만 끝에는 決斷코 相關하지 않았다. [16]
 
— 전봉준, 〈 全琫準空超 (全琫準供草)〉

김개남 전봉준 에게 呼應하면서도 흥선大院君 을 攝政으로 올리는 것과, 勤王主義的인 思想을 가졌던 點을 못마땅히 여겨, 全琫準과 隨時로 衝突하였다. 이는 전봉준 이 逮捕된 뒤 日本 領事館 兄文章에서 陳述한 公訴狀에도 一部 言及되고 있다.

北接 [ 編輯 ]

北接은 忠淸北道 報恩郡 과 忠北 以北 地方의 派閥로 法抛 또는 좌포라고도 불렸다. 최제우 의 正統 直系를 自處하는 集團으로 大道主人 최시형 손병희 , 손천민 等이 屬했다. 忠淸北道 報恩郡 , 論山郡 一帶에 影響力을 미쳤다.

當時에 東學의 主要 指導者였던 오지영의 陳述에 따르면, 崔時亨은 湖南의 全琫準과 湖西의 서장옥은 나라의 逆賊이고 斯文亂賊 이다 라 規定하고, 同時에 남接의 農民軍을 칠 豫定이었다. [17] 當時 남接의 指導者인 김개남 等은 朝鮮 政府를 否定하고 스스로 개남國王(開南國王)이라 稱하였다.

최시형 以下 北接 指導部는 布敎의 自由를 얻는 데에만 關心이 있었다. 1次 蜂起 때에도 北接은 參加하지 않았다. [18] 남접과 달리 北接은 中農 以上이 많아 改革에 關心이 없었다. [18] 北接의 目的은 최제우 의 名譽 回復과 東學의 布德 自由 許容이 目的이었다. 北接은 最大限 政治的 問題에서 回避하려 했고, 흥선大院君 과의 連結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남接耳 3次 蜂起를 準備하자, 北接은 남접 農民軍을 攻擊하려고까지 했다. [18] 그러다가 그해 9月 최시형 이 弟子들의 懇曲한 說得을 하면서 參與하게 되었다.

西浦 또는 瓠犀남椄 [ 編輯 ]

최제우 死後 東學은 法砲와 西浦로 나뉘었다. 法包는 崔時亨을 받드는데 法軒이라는 崔時亨의 號에서 이름을 따왔다. 書舖는 서장옥을 받든다. [13] 書舖는 다른 이름으로 湖西남접으로 불렸다. [19] 忠淸北道 淸州 忠淸南道 地域에 威力을 떨쳤다.

書舖에는 北接에서 急進的이라는 理由로 파면당한 이들 一部가 加擔해 왔는데, 남接의 根據地인 全羅道 보다는 書舖가 活動하는 忠淸南道 牙山, 保寧 地域이 더 가까운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東學 農民軍의 影響力은 黃海道 一帶, 慶尙北道 星州郡 漆谷郡 , 高靈郡 , 慶尙南道 河東郡 一帶까지 影響力을 미쳤다.

口號와 擧事 目的 [ 編輯 ]

東學 農民軍이 擧兵한 大義는 腐敗官吏 逐出과 貪官汚吏 處罰이 目的이었다. 東學農民軍의 口號는 '輔國安民', '除暴救民' 等으로 儒敎的인 充軍, 愛民 思想을 담고 있었다. [20]

1894年 가을에 이르러 東學 農民軍은 抗日義兵的인 性格으로 變化한다. 이를 두고 서울大學校 敎授 유영익은 그해 가을의 東學 蜂起를 " 日本軍 을 쫓아낼 目的으로 蹶起한 舊韓末 最初의 本格的인 抗日 義兵運動이었다. [20] "라고 하였다. 腐敗한 執權層 打倒, 閔氏 政權 逐出을 目的으로 始作된 東學農民革命은 抗日 義兵戰爭, 獨立運動的인 性格으로 變貌하였다.

蜂起 直前 [ 編輯 ]

1893年 末부터 1894年 1月 初, 巨事를 앞두고도 남接 內部에서도 擧沙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쉽게 斷案을 내리지 못했다. 남接의 實力者인 손화중 亦是 쉽게 決定을 내리지 못했다. 전봉준 은 '이런 저런 腐敗가 있는데 어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國民으로써 於此彼 避해다니면서 校를 形成하고 敎勢를 擴張하고 있는 車에 이 機會에 나서서 政治를 바로잡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요. 趣旨가 맞다고 생각하면 다같이 同參해서 힘이 되어 주시고, 接主님이 主管을 해주시요. [21] '라고 하였다.

그런데 손화중 은 쉽게 승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은 時機 尙早입니다. 只今은 때가 아니니까 더 있으면 自然히 그럴 때가 닥칠 수 있다. 그때를 맞춰서 해야지 只今 해서는 안된다'하고 전봉준 을 說得하였다. [21] 農民 運動 直前에 擧事에 東學 內 强勁派였던 南接 內에서도 論難이 많았다.

北接을 이끌던 최시형 김개남 等의 개남國王설 所聞이나 전봉준 一派가 흥선大院君 과 結託한 것을 相當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日本軍이 官軍과 함께 農民軍을 壓迫하자, 崔時亨 等은 처음에는 協商論人 畫展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現實狀況의 急迫함을 認識하여 스스로 自身의 主張을 抛棄하고 北接을 全琫準의 武裝鬪爭 路線에 同參시켰다. [17] "人心이 卽 天心이고 이는 天運이 이르는 바이다. 故로 너희들은 途中(道衆)을 動員하여 全琫準과 協力, 이로써 敎主의 怨恨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道의 큰 뜻을 實現시키라!" 이로써 孫秉熙 等이 이끄는 北接이 남접과 힘을 합쳐 蜂起 [17] 에 加擔했다.

結果와 展開 過程 [ 編輯 ]

第1次 蜂起 [ 編輯 ]

1次 蜂起 創意와 沙鉢 通文 撒布 [ 編輯 ]

東學 農民 運動 當時 沙鉢通文(檄文)

東學 農民軍의 蜂起는 1894年 2月 15日 ( 陰曆 1月 10日 )에 始作되었다. 이날 새벽 1千餘 名의 農民軍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竹槍과 農器具를 武器로 삼아 말목場터에 集結하였다. [22] 마침내 全琫準을 中心으로 한 20名의 農民 指導部는 東學敎徒들에게 沙鉢通文 을 돌렸다. 沙鉢通文의 內容은 고부郡守 趙秉甲을 處斷하는 것은 勿論이고 전주영까지 陷落시키는 것을 目標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農民과 官의 大大的인 戰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2]

全琫準은 그 前날 밤에 태인의 최경선과 함께 3百餘 名의 農民들을 이끌고 夜陰을 틈타 40里 길을 行軍하여 말목場터에 미리 當到해 있었다. [22] 隊列을 가다듬은 農民軍은 가장 먼저 고부 官衙를 襲擊하여 占領하였다. 그리고 武器庫를 부수고 武裝한 後 그 동안 抑鬱하게 빼앗겼던 稅穀들을 倉庫에서 꺼내 農民들에게 나눠주었다. [22]

첫 戰鬪의 最高 指導者는 전봉준 外에도 남接에는 손화중 이 最高 指導者의 한 사람이었고, 書舖에는 서장옥 이 最高 指導者였다. 武裝 氣泡에서 황토현 戰鬪까지는 손화중 等 各 接主들이 聯合해서 싸웠는데, 황토현 戰鬪 以後 손화중은 全琫準을 大將軍으로 임명한다. "戰鬪에서는 當身이 다 館長을 하고, 그 咨文은 나한테 얻어서 施行만 하시오. [23] "라고 했다.

고부郡廳 占領과 按覈使 派遣 [ 編輯 ]

이리하여 農民들은 全琫準을 先頭로 數百 名이 1894年 (高宗 31) 2月 15日 萬石洑를 破壞하고 고부 官衙로 갔다. 이에 놀란 郡守 趙秉甲은 줄行廊을 놓았고, 그들은 官衙를 襲擊·占領하여 武器를 奪取한 다음 農民들은 收奪에 앞장섰던 衙前들을 處斷하고 不法으로 徵收한 稅穀을 奪取하여 貧民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農民들은 事後의 計劃을 세워놓지 않아 곧 新任 郡守 박원명의 溫乾한 撫摩策에 解散하였다. 또한 武力 蜂起와 政治的인 問題에 介入하는 것을 願치 않는 최시형 을 비롯한 指導部의 擧兵 反對와, 農民軍에 對한 初期의 傍觀的 對應도 作用했다.

고부郡守 趙秉甲을 生捕하는 일은 失敗하였다. 趙秉甲은 農民軍이 쳐들어온다는 消息을 듣고 遑急히 全州監營으로 避身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22] 고부 官衙가 農民軍에게 점령당했다는 消息을 들은 朝廷은 趙秉甲을 處罰하고 새로 長興府使 이용태를 按覈使로 삼고, 龍山縣監 박원명을 新任 고부郡守로 임명하여 事態를 收拾하고자 했다. [22]

朝鮮 末期 民亂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大槪는 朝廷에서 按覈使 (按?使)를 보내면 平定되는 것이 常禮였다. 按覈使 이용태 가 내려와 火藥을 請했고 東學 農民軍 代表들과 面談 後, 東學 農民軍의 要求事項을 들어주기로 하고 東學 農民軍은 自進해서 解散한다. 이것이 '第1次 東學 農民 運動'으로, 고부 蜂起, 1次 蜂起, 正月 蜂起 等으로 부른다.

第2次 蜂起 [ 編輯 ]

按覈使 이용태의 彈壓과 再蹶起 [ 編輯 ]

그러나 머지 않아 按覈使 이용태 는 위 事件을 東學徒의 叛亂으로 規定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宣言, 叛亂 關聯者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東學徒로 取扱하였으며, 그 過程에서 東學과는 相關 없는 一般 全羅北道 忠淸南道 地域의 農民들도 東學徒로 몰아 逆賊罪로 酷毒히 彈壓하였다. 이에 고부의 狀況은 바뀌게 된다. 이용태의 彈壓에 憤慨한 全琫準과 農民들은 이에 屈服하지 않고 總鰭類와 農器具 等으로 武裝한 뒤, 武裝(茂長)의 金開男, 손화중 等과 함께 蜂起하였다. 이것이 2次 蜂起, 白山 蜂起, 三月 蜂起 等으도 불리는 '第2次 東學 農民 運動'이다.

이때 全琫準이 이끄는 農民軍은 貰를 擴大하여 白山으로 移動하여 그곳에 駐屯하고 있었다. 그리고 按覈使로 내려온 이용태가 東學敎徒들에 對한 大大的인 彈壓을 恣行하자, 그 해 3月 全琫準은 隣近 各地의 東學敎徒들에게 通文을 보내 蜂起할 것을 呼訴하였다. 이에 따라 白山에 集結한 農民軍은 一時에 1萬으로 불어났다. [22] 集結한 敎徒들에 依해 農民軍의 동도大將으로 推戴된 全琫準은 손화중과 金開男을 總管領, 金德明과 오시영을 동도臺 總參謀, 최경선을 銃솔腸, 송희옥과 정백현을 祕書로 삼고 組織的인 戰鬪 準備에 突入했다. [22] 그는 싸움에 앞서 殺人과 財物 奪取를 禁止하고, 日本軍과 權力 貴族들을 몰아내는 것을 目標로 하는 4代 綱領을 發表하고, 規範 12組로 農民軍의 規律을 바로 잡고 軍事 訓鍊을 强化하였다. [22]

全琫準을 總大將, 김개남 (金開男)· 손화중 (孫和中)을 掌令(將領)으로 삼은 農民軍은 1894年 陰曆 3月 下旬에 白山에 모여 다음과 같은 農民軍의 4大 名의(四大名義) [24] 와 蜂起를 알리는 檄文을 發表하고, 百姓의 蹶起를 呼訴했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物件을 해치지 말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家畜을 잡아먹지 말라.]
  2. 忠孝를 穩全히 하여 世上을 救濟하고 百姓을 便安히 하라. [忠孝를 다하여 世上을 救하고 百姓을 便安케 하라.]
  3. 왜襄(倭洋)을 軸滅하고 聖君의 度를 깨끗이 하라. [日本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政治를 바로 잡는다.]
  4. 甁을 거느리고 서울로 進擊하여 捲歸(權貴)를 滅하라. [軍士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權勢家와 貴族을 모두 除去한다.]

이에 정읍시 態인·김제시금구(金溝)·부안 等地에서도 農民들이 合勢하여 그 數가 數千에 到達했다. 東學軍의 蜂起는 이로부터 本格化하였다. 그러나 全琫準이 倡義할 때의 行動綱領 中 腐敗한 外戚을 내쫓는다는 것과 興宣大院君을 攝政공으로 再推戴한다는 條項에 一部 農民軍은 술렁이기 始作하였다. 高宗과 王妃를 逐出한다는 條項을 期待했던 一部 農民軍 亦是 唐慌해하였다. 全琫準은 오늘의 이 事態를 불러온 것은 閔氏 家門과 貪官汚吏들이지 임금이 아니라며, 閔氏 家門과 腐敗官僚들만 몰아내면 되는 것이라며 이들을 안심시켰다.

各地의 蹶起 [ 編輯 ]

戰鬪 態勢를 갖춘 農民軍은 5月 8日 ( 陰曆 4月 4日 ) 扶安을 占領하고, 5月 11日 ( 陰曆 4月 7日 ) 황토현에서 官軍을 大破하는 한便 井邑, 興德, 高敞 地域을 습권하였다. 그리고 榮光, 咸平, 務安 一帶를 거쳐 마침내 5月 31日 ( 陰曆 4月 27日 ) 전주성을 占領하였다. [25]

東學軍은 全羅道에만 局限되지 않고 外部로 擴散되었다. 忠淸道의 회덕, 論山 一部 地域과 慶尙道의 星州, 칠곡, 大邱, 河東에서도 東學敎徒들이 蹶起하였다. 다만 農民軍의 勢力이 報恩郡 以北으로는 上陸하지 못했는데, 이들과 달리 東學敎主 崔時亨 等은 民亂에 多少 消極的이고, 否定的인 見解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民亂을 일으키다가 잘못하면 敎祖 崔濟愚의 名譽回復은 失敗로 돌아갈 것이고, 자칫하면 驛道로 몰려 敎勢에 彈壓을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이었다.

금구 원평 戰鬪와 全州城 入城 [ 編輯 ]

以後 農民軍은 全州城 陷落을 目標로 陰曆 4月 初 금구 원평에 陣을 쳤다. 實際로는 農民軍의 構成員은 大部分 一般 農民이었고, 東學敎徒는 比較的 적었다. 農民軍은 貪官汚吏의 除去와 租稅 收奪 是正을 主張하였으며, 均田使(均田使)의 廢止를 促求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監營 軍隊를 물리쳐 황토현 戰鬪를 勝利로 이끈 農民軍은, 中央에서 派遣된 政府軍을 誘引하기 위해 南쪽으로 向하였다. 여기에 刺戟을 받은 朝廷에서는 當時 全羅兵士 洪啓薰을 招討使로 임명하여 蜂起를 鎭壓하도록 하였다. 井邑, 興德, 高敞, 武裝 等을 占領한 農民軍은 5月 27日 ( 陰曆 4月 23日 ), 將星 황룡촌 戰鬪에서 洪啓薰이 이끄는 政府軍을 相對로 勝利하였다. 5月 31日 ( 陰曆 4月 27日 ), 이 氣勢를 몰아 農民軍은 전주성으로 入城하였다.

東學軍의 힘이 漸次 强盛해지자 調整은 淸國軍을 要請하였고, 淸國軍이 仁川에 上陸하자 텐진 條約을 憑藉하여 日本軍도 朝鮮에 進出하였다. 이렇듯 國家의 運命이 위태로워지자 東學軍과 官軍은 和議를 約束하고 交涉에 들어갔다. [25]

그러나 政府軍은 完山에 머물면서 砲擊을 繼續했고, 東學軍은 여기에 對抗할 만한 兵器가 없어 500名의 戰死者를 내는 慘敗를 當했다. 洪啓薰은 이미 蜂起의 直接的인 原因이던 고부郡守, 全羅監司, 按覈使 等이 懲戒를 當했으며 앞으로도 官吏의 收奪을 監視하여 懲戒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便으로는 淸나라 軍隊가 朝鮮 政府의 要請으로 到着하였으며 日本의 軍隊도 朝鮮 內 自國民 保護를 핑계로 淸나라를 牽制하기 위해 出兵하기로 했음을 알렸다. 6月 8日 淸나라의 援軍이 牙山灣에 到着하고, 뒤따라 日本 政府는 톈진 條約(1885年)에 따라 居留民 保護를 口實로 6月 7日 出兵할 것을 決定하였다.

全州 火藥과 政治 改革案 上程 [ 編輯 ]

東學軍은 여러 次例의 通文(通文)과 遠征(原情) [26] , 閉廷改革 要求案을 提示하면서 삼정(三政)의 改革을 促求하였다. 只今까지 남아 있는 資料를 바탕으로 最小限 다음과 같은 農民軍의 改革 要求를 確認할 수 있다. 4月 4日 扶安을 占領한 農民軍은 法聖浦 異鄕에게 '東學軍通文' 9個組를 보냈다.

1894年 5月 22日 ( 陰曆 4月 18日 ) 전봉준 은 非協調的이던 羅州 官衙의 戶長, 吏房, 署理 等에게 公文을 發送하였다.

殿下께 아뢰어 國太公( 흥선大院君 )을 모셔다가 나라일을 보도록 하려 함으로써 阿諂하고 鄙陋한 者들을 모조리 罷免시켜 내쫓으려는 것이니, 우리의 本意는 여기에 그칠 뿐이다.
 
— 羅州 監營에 보낸 沙鉢通文의 一部

이보다 앞선 5月 20日 ( 陰曆 4月 16日 ) 靈光郡 에서 倡義所 名義로 完營有進所에 보낸 通文에서도 '國太公께 甘菊케 하여 위로는 工事를 保全하고 아래로는 百姓을 便安케 한다'고 하였다.

5月 23日 ( 陰曆 4月 19日 ) 전봉준 은 中央軍을 이끌고 내려온 招討使 洪啓薰에게 正裝을 보냈는데 '億兆(億兆)가 마음을 같이 하고 온 나라가 議論을 모아 國太公을 모시고 父子 사이의 倫理와 君臣 사이의 義理를 穩全히 하여 아래로는 厲民을 便安히 하고, 위로는 宗廟社稷을 保全하는 것이 우리의 至極한 所願입니다. 將次 죽음으로써 盟誓하고 變치않을 것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굽어 살피옵소서'라는 內容이었다.

홍계훈 은 東學 農民軍을 一網打盡하려 내려왔다가 正裝의 內容을 보고 놀라 멈칫하였다. 홍계훈 은 이들과 面談을 推進했고 바로 전봉준 外 農民軍 指導部는 招討使 洪啓薰에게 '湖南儒生遠征' 8個組를 提示하였으며, 5月 初 全州和約 直前 全州和約의 條件으로 招討使 洪啓薰에게 27個組를 追加로 提示하였다. 農民軍은 全州城에서 撤收한 後 5月 11日頃 巡邊使 이원회에게 '全羅道儒生等遠征' 14個組와 5月 17日頃 '遠征列錄追悼者' 24個組, 그리고 5月 20日頃 將星에서 全羅監司 김학진에게 '改革案' 13個組 等을 提示하였다. [27]

  1. 東學敎徒와 政府는 抒情(庶政)에 協力할 것
  2. 貪官汚吏 肅淸
  3. 橫暴한 富豪 處罰
  4. 不良한 유림과 兩班 處罰
  5. 奴婢文書 消却
  6. 7種의 賤人에 對한 待遇 改善, 白丁이 쓰는 平凉갓(平凉笠)을 없앤다.
  7. 寡婦 裁可 許諾
  8. 이름 없는 雜稅 廢止
  9. 人材 登用, 門閥 打破
  10. 日本과 姦通하는 者 嚴罰
  11. 公社債(公社債) 免除
  12. 土地 平均 分作
    ? 閉廷改革 12個組

그런데 서울大學校 敎授 유영익 에 依하면 이 때의 閉廷改革 12條는 虛構라 한다. 유영익 은 自身의 弟子 中 한 사람이 東學農民運動을 다룸에 있어서 다른 한 名의 共同執筆者와 함께 이른바 '東學 12個組 閉廷改革案'이란 것이 虛構라고 밝혀냈다고 主張하였다. [28]

全州城 에서 撤兵했으나 이미 靑軍 日本軍 은 朝鮮 內에 進入한 狀態였다. 한便 홍계훈 은 全州火藥 以後에도 이들을 逆賊으로 取扱했다. 이에 전봉준 6月 7日 ( 陰曆 5月 4日 )에 抗議文을 보내는데, '太公을 받들어 나라를 減毒토록 함은 그 理致가 甚히 마땅하거늘 왜 이를 不軌라고 하느냐?'라고 하였다.

12兆 改革案의 眞僞 問題 [ 編輯 ]

한便 이때 提出되었다는 12個組 改革案은 眞僞 與否가 不確實하다는 異見이 提起되었다. 서울대학교 敎授 유영익 은 "내가 國史敎科書 問題에 對해 깊이 생각하게 된 契機는 2002年 어느 날 나의 한 弟子가 내 硏究室로 찾아와 自己가 高等學校 檢認定 近現代 敎科書를 執筆했다고 자랑하면서 敎科書 執筆 過程에서 겪은 實話 한 토막을 털어놓았을 때이다."라고 告白하였다. [20]

유영익에 依하면 "그 弟子는 東學農民運動을 다룸에 있어 다른 한 名의 共同 執筆者 [20] 와 함께 이른바 '東學 12個組 閉廷改革案'이란 것이 虛構임을 알기 때문에 애當初 그 改革案을 敎科書에 싣지 않기로 作定했는데 當時 敎育人的資源部 에서 執筆者들에게 示達한 '國史 敎育內容 展開의 準據案'에 그 改革案을 義務的으로 引用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不得已 敎科書에 실었다고 告白했다. [28] ' 한다.

유영익 에 依하면 廢井 12個組 改革案은 出處가 不確實하다 한다. 그에 依하면 '나는 12個組 改革案이란 것이 1940年 에 어느 無名의 歷史가(오지영)가 歷史小說 東鶴寺 라는 冊에 任意로 揷入한, 歷史上 存在하지 않는 資料임을 論文을 통해 立證했기 때문에 이 告白을 듣고 깜짝 놀랐다. [28] '고 한다.

敎育部가 '國史 敎育內容 展開의 準據案'이라는 것을 내세워 事實에 어긋나는 非眞理를 國史敎科書에 싣도록 强要한 事實에 憤慨하였다. 이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 나는 우리나라 敎育附加 日本 문부성 못지 않게 歷史 歪曲을 恣行한다고 생각했고 그 後로 日本 政府의 歷史 歪曲에 對해 입을 다물게 되었다 [28] '고 告白하였다. 反面,이러한 主張에 對해 東學農民運動史를 專攻한 박맹수 원광대 敎授는 "오지영의 '歷史小說 東鶴寺'는 픽션으로서 小說이 아닌 回顧錄 性格의 글"이라며 柳 敎授 意見을 正面 反駁했다.

朴 敎授는 "오지영은 東學農民運動 當時 農民軍 指導者 出身으로 甲午年 에 體驗했던 바를 回顧錄 形式으로 글을 쓴 것"이라며 "確認되는 史料들로 봐서 東學農民運動 當時 이미 27個 條項 要求案이 있었음이 確認된다"고 說明했다.

執綱所 設置 [ 編輯 ]

6月 11日 ( 陰曆 5月 8日 ) 官軍과 2次 强化를 맺은 뒤 大部分의 農民은 撤收했으나 東學軍은 敎勢 擴張을 口號로 그들의 組織을 各地에 침투시키고 全羅道 53軍에는 執綱所를 設置하고 廢井 改革에 着手하였다.

交涉에 들어가 全琫準은 廢井 改革을 骨子로 하는 27個組에 達하는 條件을 내놓았고, 이에 官軍 代表인 洪啓薰이 無條件 受容함으로써 全州和約이 成立되었다. 그리고 東學軍은 各 地方에 執綱所를 設置하여 잘못된 政治의 改革을 위한 行政 官廳 구실을 하게 하였다. [25] 特히 金開男은 5 ~ 6萬 名의 農民軍을 이끌고 執綱所 設置에 反對하던 南原 府使 이용헌과 羅州의 縣令들을 殺害하여 그곳에도 執綱所를 設置했다.

執綱所의 行動 綱領은 總 12個組로 兩班 中心의 封建 社會를 革罷하고, 身分 差別을 없애며, 因習에 갇혀 사는 女性들을 解放시켜 農民의 生活을 豐足하게 만든다는 것을 骨子로 하고 있었다. 이 같은 執綱所 行動 綱領은 17世紀 以來 進步的인 實學者들이 내걸었던 改革案과 1884年 金玉均 等의 開化派가 主張했던 政策보다 훨씬 進步된 內容이었다. [25] 그만큼 時代를 멀리 내다보았던 全琫準의 改革 思想은 封建 社會인 朝鮮이 到底히 受容할 수 없는 革命的인 旗幟를 내걸고 있었다. [25] 그러나 全琫準은 이番 機會에 高宗 명성황후 를 廢位시키자는 一部 强勁派의 見解에는 同調하지 않았다.

第2次 蜂起의 性格 [ 編輯 ]

이 中 第2次 蜂起는 흥선大院君 전봉준 을 使嗾했거나, 適當한 때를 알렸다는 主張도 있다. 李相伯 에 依하면 '大院君은 全琫準의 妻族 8寸이자 全州大道所 度집醬 송희옥을 先攻注射로 任命하고 大院君의 側近인 박동진 정인덕 은 이 송희옥과 接線하여, 全琫準에게 密旨(密旨)를 보내 大院君의 뜻에 따라 再蜂起할 것을 注文하였던 것이다. [29] 김개남에게는 大院君의 孫子 이준용 을 통하여 全 承旨 李建榮 과 接觸하고 李建榮은 金開男을 만났다. [29] '는 것이다.

日本軍 의 介入 [ 編輯 ]

톈진 條約 이 破棄됨에 따라 靑軍과 함께 朝鮮에 進駐한 日本은 힘으로 內政 改革을 斷行하려 했고, 이 때문에 淸日 戰爭이 일어났다. 朝鮮朝 동안의 事大主義에 不滿을 품었던 開化派 政治人들은 日本을 積極 支持하였다. 또한 一部 開化派는 日本을 利用하여 先進 文明을 받아들여서 빨리 開花, 變革을 꾀해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東學 農民軍의 勢力이 强盛해지자 警戒心을 느낀 高宗은 臣下들에게 直接 "淸나라에 도움을 要請, 淸나라軍을 利用해서 이들을 鎭壓하게 하자"는 提案을 한다. 그러나 淸나라軍의 流入을 警戒한 日本 亦是 軍隊를 朝鮮에 駐屯시킨다.

東學軍의 勢力 形成을 警戒한 高宗 과 王妃 閔氏 政權은 淸나라 에 도움을 要請한다. 이때 안경수 는 日本, 민영준 은 淸나라와의 外交 交涉을 통한 東學亂의 收拾에 積極 앞장섰다. [30] 閔氏 政權은 淸나라에 使節을 보내 支援을 要請하였다. 朝鮮 에 들어온 日本軍은 官軍과 함께 '동비 索出'에 나선다.

淸日戰爭 에서 勝利한 日本은 朝鮮 朝廷을 掌握하였다. 輔國安民과 外勢排擊을 旗幟로 내걸었던 東學은 日本의 國權 侵奪 行爲에 憤慨하며 다시 한 番 蜂起했다. 그러나 東學 農民軍의 蹶起 目的에 閉廷改革과 閔氏 戚臣勢力 處罰, 大院君 擁立이라는 條項이 들어있음을 接한 閔妃는 東學軍에 對한 大大的인 鎭壓을 計劃한다. 또한 兩班 士大夫들은 崔濟愚가 似而非 宗敎를 만들다가 惑世誣民罪로 처형당한 것을 根據로 들어 동비들을 彈壓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東學農民軍의 勢力은 전라남북도와 忠淸南道, 그리고 慶尙北道 一部 地域에서 猛威를 떨쳤다. 忠淸道의 老論 衛正斥邪派 系列 兩班들과 保守的인 嶺南 南人들은 自體的으로 義兵을 倡義하여 東學軍과 交戰을 벌였다.

大院君의 接觸 試圖 [ 編輯 ]

大院君과 全琫準의 聯合 [ 編輯 ]

흥선大院君 . 東學 農民軍의 指導者 전봉준 1890年 부터 1892年 무렵 한때 흥선大院君 의 食客으로 있었다.
흥선大院君 의 孫子 이준용

전봉준 을 비롯한 東學 農民軍의 穩健派와 祕密裏에 連絡한 흥선大院君 은 東學軍 內의 穩健派가 大院君을 받들 것을 主張한다는 點을 注目했다. [2] 1894年 6月 흥선大院君 은 孫子 이준용 과 함께 東學 農民軍을 政治的으로 利用할 計劃을 樹立한다. 大院君派가 農民軍을 上京시키고, 淸國軍을 끌어들여 日本軍을 擊退하고 開化派를 除去하여 政權을 掌握하려는 計劃은 當初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時局對處 論議 속에서 그 輪廓이 짜여졌다. [2] [31]

當時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官職을 쉬고 外國으로 나가 10年 동안 見聞을 넓혀 名望을 얻은 以後에 돌아올 것을 勸하였다. 그 동안 高宗은 老衰하게 되고 王世子(純宗)도 그다지 큰 德이 없으니 그때에 外國 名望과 國內의 關心은 自然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努力하지 않고도 權力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2]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圖謀할 境遇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期待가 모두 大院君을 向하고 있고, 더욱이 東學軍이 大院君을 받들겠다는 主張을 펴면서 蜂起하고 있는 只今, 그들로 하여금 數十萬 大衆을 動員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眞實로 사람들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日本軍隊가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2]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便으로 日本軍을 挽留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便으로 밤을 재촉하여 群衆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提案하였다. [2] 두 사람의 提案을 이준용 大院君 에게 알렸고, 大院君은 이태용의 안을 支持하여 박동진과 박세강에게 數十萬 大衆을 糾合하여 速히 올라오게 하였다. [2] 한便 전봉준 等은 日本軍 의 流入으로 農民軍이 憤氣撐天해 있음을 大院君에게 알려왔다.

손화중 等 他 指導者들 包攝 [ 編輯 ]

흥선大院君 이 包攝한 東學 農民軍 指導者 中에는 손화중 도 있었다. 손화중의 婦人인 柳氏가 臨終 直前에 남긴 證言에 依하면 손화중 도 大院君을 만나고 [23] , 그의 書信도 받았다고 한다. [23]

손화중의 夫人 柳氏에 依하면 손화중 은 '동학 農民 運動 中에 서울 을 다녔는데, 大院君 하고 直接 相面을 했다 [23] '고 한다. '그때 大院君 의 書信도 받아 갖고 있었다는데 只今은 없어져서 傳해지지 않는다. [23] '는 證言을 했다.

남接의 分列 [ 編輯 ]

그러나 남接 內에서도 異見이 나뉜다. 大院君 家門의 食客 出身이었던 全琫準을 비롯해서 閉廷改革과 外戚 勢道가 退出, 大院君 擁立을 目的으로 했던 남接의 穩健派와 朝鮮王朝 自體를 否定한 김개남 一派는 葛藤하게 된다.

朝鮮王朝 體制는 認定하고, 外戚 勢力과 腐敗한 貪官汚吏들만 退治할 것을 主張하던 전봉준 一派는 朝鮮王朝 自體를 否定하는 김개남 一派와 갈등하였고, 이는 東學 農民軍 內部의 派閥 葛藤, 軋轢으로 發展한다.

大院君 一派와 謀議 [ 編輯 ]

이에 따라 大院君과 함께 大院君派의 中心이었던 이준용은 官職을 內務協辦에서 統衛使로 옮겨 兵權을 掌握, 不時의 兵力 使用에 對備하고 多數의 壯丁들을 모아 大闕 內에 隱匿하여 日本軍隊가 北進하여 兵力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農民軍과도 內外 相應하여 擧事하려고 하였다. 農民軍이 금강에 이르러 그 氣勢가 놀랄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討伐한다는 名分으로 [32] 兵力을 일으켜 漢城을 占領한다는 計劃이었다.

東學農民軍과 事前에 計劃을 짠 뒤, 이준용 이 討伐을 名分으로 部隊를 構成하면 東學農民軍은 빠진다는 計劃이었다. 이준용은 이들을 討伐한다는 名分으로 出陣命令을 얻어, 軍兵과 數百 名의 歷史(力士)를 帶同하고 果川, 水原 사이에 個部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合勢 回軍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王이 避難할 때를 타서 한便으로는 그 部下인 統衛營 兵隊 [32] 를 動員하려 했다.

大院君과 이준용의 計劃은 "農民軍이 再起하면 그 討伐을 핑계로 軍士를 일으켜서 開花政府를 顚覆하고 政權을 잡으려던 것으로 再起病을 促求하는 密使를 보냈던 것 [33] "이었으며, 또 萬一 日本軍이 東學農民軍을 鎭壓하러 내려가게 되면 卽刻 解散하였다가 그 해 11~12月 頃에 江이 結氷하기를 기다려 淸國病이 오게 될 形便이 되면 協力하여 日本軍을 擊退하고 政府를 更新하고 새로운 王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은 東學 農民軍에게 擧兵하여 寒性까지 오면 自身은 東學軍을 鎭壓하는 척 할 것이니 適切히 싸우는 척 하다가 解散하라고 自身을 찾아온 一部 東學軍 指導者들에게 알렸다.

이준용 이 이끄는 桶衛兵 英大路서 王室을 掌握하고, 다른 한便으로는 下手人들을 指揮하여 김홍집 , 曺喜昖 , 김가진 , 김학우 , 안경수 , 유길준 , 이윤용 等을 죽이고 政府를 顚覆하여 政權을 掌握한 뒤 高宗을 上王으로 推戴하고, 王妃와 太子를 廢하여 이준용을 王位에 올리기로 決定하였다. [32] 한便 흥선大院君 이준용 의 擧事에는 爲政 斥邪派 系列 儒學者들도 同意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준용은 全琫準과 東學軍 指導者들에게 이 點을 說明했다.

大院君, 이준용 의 陰謀 綻露 [ 編輯 ]

흥선大院君 이준용 等은 東學 農民軍이 蹶起하여 非常事態를 만든 後, 사람들을 動員, 올라온 大衆을 한便으로는 서울 近方에 配置하고, 다른 한便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鍾路에 都會시켜 萬人疏廳을 設置하고 書札을 政府에 投與하여 各國 公館에 照會시킨다는 計劃을 세우기도 하였다. [34]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數十萬 名의 일이고 또 外國에 어떠한 害를 끼치는 [32] 일도 아니기 때문에 外國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34] 일이 이루어지면 使臣을 密派하여 淸國軍에게 알려 앞으로의 是非에 對備하게 하고, 萬一 日本軍이 먼저 움직이면 一旦 四方으로 흩어졌다가 1894年 10月 中에 淸國軍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挾攻하면 日本軍을 擊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34]

그리고 大院君派의 사람을 中心으로 新政府를 構成하여 박준양을 領議政 에, 이태용과 金某를 各各 左議政, 右議政에 앉히려고 하였으며, 고운정을 忠淸感謝나 嶺南監査에, 그리고 高宗株를 全羅監査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34]

8月 24日 靑·日의 平壤城 戰鬪에서 期待했던 淸나라의 敗北消息이 알려진 後 大院君側의 一部 人士가 '政變計劃'을 留保하자고 主張하자 [33] , 이준용은 머뭇거렸다. 이에 大院君의 側近인 박동진은 다음과 같이 主張하였다. [33]

臺詞는 時機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물망이 모두 盧大監(大院君)을 따르고 하물며 또 東學黨은 相逢國太公(上奉國太公)의 설로 倡義한 者들이다. 萬若 몇十萬 名을 이끌고 捲土重來한다면 實로 所謂 人衆勝天(人衆勝天) [35] 인바 日本軍이 움직인다 한들 어쩌겠는가. [33]

東學農民軍의 主張 中 農民軍이 閉廷改革을 要求하는 가운데 大院君의 甘菊(攝政)도 要求하고 있었다. [33] 전봉준 과 大院君 사이에 事前謀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農民軍이 閉廷改革을 要求하는 가운데 大院君의 감國道 要求하고 있었음을 注目한 大院君側이 農民軍을 利用하여 日本軍과 親日開化派를 逐出하고 權力을 掌握하려 했음을 示唆해준다. [33]

그러나 大院君과 이준용의 政變 陰謀는 日本 公使館의 諜報網에 걸려 失敗로 돌아간다. 흥선大院君 이준용 은 日本 公使館에 召喚되었고 淸나라와 손잡고 日本軍을 逐出하려는 意圖를 追窮당한다. 危機意識을 느낀 日本 公使館은 1894年 9月 日本 本國에 連絡하여, 日本軍 兵力을 增員하여 慶尙南道 동래군 釜山港 을 통해 派遣한다.

第3次 蜂起 [ 編輯 ]

第3次 蜂起 蹶起 [ 編輯 ]

1894年 9月 전봉준 , 김개남 等은 다시 沙鉢通文을 띄워 蹶起를 呼訴하였다. 全羅道 , 忠淸南道 等地에서는 남접과 西浦 所屬 東學軍과 農民軍이 蹶起하였다. 全琫準을 中心으로 한 남접은 敎主 崔時亨의 北接에 도움을 請해 聯合 戰線을 폈다. 第2次 蜂起에 動員된 農民軍은 남접 10萬과 北接 10萬을 合해 約 20萬 兵力이었다.

東學 農民軍의 一部가 흥선大院君 過度 內通했다는 事實이 알려지면서 閔氏 內閣의 朝鮮 朝廷은 農民軍을 除去할 計劃으로 日本 淸나라 에 도움을 要請하였고, 이에 전봉준 , 김개남 , 손화중 , 손병희 , 최경선 , 김덕명 , 최시형 , 성두환 , 김낙삼 , 김두행 , 손천민 , 김봉득 , 김봉년 , 유한필 等이 全羅北道 前主婦 삼례역 驛村에서 다시 새로운 蜂起를 일으켰다. 日本軍의 王宮 占領에 憤激한 農民軍은 이 해 陰曆 9月 斥倭(斥倭)를 口號로 내걸고 再起하였다. 이제는 內政 改革을 目標로 하지 않고 日本과의 抗爭이라는 反外勢가 擧兵의 主要 目標였다. 이를 '第3次 東學 農民 運動'으로, 9月 蜂起 또는 第3次 蜂起, 三禮蜂起로도 부른다.

妥協論과 決死抗戰論의 對立 [ 編輯 ]

손병희 , 農民戰爭 敗戰 後 敎壇을 收拾하였다.

第1次, 第2次 蜂起의 休戰은 東學軍에 不利하여 政府는 强化 條件을 履行하지 않는 한便, 淸軍은 勿論 日本軍도 6月 9日 ( 陰曆 5月 6日 )부터 1萬의 軍隊로 仁川에 上陸하였다. 1894年 7月 23日 ( 陰曆 6月 21日 ) 새 內閣이 親日 人士들이 있자, 日本은 外交通인 이노우에 가오루 를 새 週日 朝鮮 工事로 임명했다. 7月 25日 ( 陰曆 6月 23日 ) 드디어 淸日戰爭 을 일으키는 等 險惡한 情勢를 調整하였다.

이에 東學軍은 10月 12日 ( 陰曆 9月 14日 ) 三禮에서 會議를 연 結果 전봉준·金開男 等의 過激派는 최시형·이용구(李容九) 等 穩健派의 妥協論을 拒否한다. 그 뒤 전봉준 이 4千 名의 農民軍을 이끌고 三禮 에서 日本軍을 몰아낸 뒤 남접과 北接의 聯合을 試圖했다. 전봉준 公州 - 水原 - 서울 北上路를 選擇하고 南原 에 駐屯한 김개남 은 錦山- 淸州 -서울로 進擊路를 定한다. 그동안 全琫準의 蜂起에 反對 立場을 보였던 孫秉熙는 敎主 崔時亨의 承認 下에 忠淸道 農民軍(北接)을 이끌고 淸算(靑山)에 集結하여 論山(論山)에 合流했다. [36] 그로써 김개남 代身 陰曆 10月에 北接의 손병희 論山 에서 合流하여, 남接 1萬과 北接 1萬을 合해 總 2萬餘 軍勢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 南北聯合 農民軍은 日本軍을 擊退하기 위해 日本軍의 兵站基地를 襲擊하고 電信줄을 切斷하면서 서울을 向해 北上하다가 公主를 總攻擊하기로 決定했다. 이에 朝鮮 朝廷과 日本軍은 신정희 , 허진 , 이규태 , 이두황 等에게 3,200名의 官軍과, 日本軍 미나미 考試로 가 이끄는 2,000名의 日本軍을 이끌고 맞섰다.

공주성 進入 遲延 [ 編輯 ]

6月 末, 日本은 이 機會에 朝鮮에서 淸의 勢力을 完全히 몰아내려고 戰爭을 始作했다. 淸日戰爭은 日本도 淸나라도 아닌 朝鮮 땅에서 벌어졌다. 9月 16日 ( 陰曆 8月 17日 ), 平壤 戰鬪에서 日本은 勝利를 거두었다. 平壤은 完全히 廢墟가 되었다. 外勢가 판을 치는데도 無氣力한 政府를 본 全琫準과 農民軍 指導部는 9月 12日, 마침내 2次 起兵을 決定했다. [18] 農民軍은 公主를 손에 넣고 곧장 서울로 進擊할 作定이었다. 그런데 意外로 出發이 늦어지는 바람에 政府軍과 日本軍 聯合軍이 먼저 公主에 入城했다. [18]

農民軍이 늦어진 理由는 戰爭을 願치 않는 東學 北接 敎團의 非協調 때문이었다. [18] 최시형 以下 北接 指導部는 布敎의 自由를 얻는 데만 關心이 있었다. 1次 蜂起 때에도 北接은 參加하지 않았다. [18] 전주성을 陷落시키고 湖南 一帶에 執綱所를 두어 韓國 最初의 農民自治를 實行한 것은 全的으로 남接 農民軍의 힘이었다. 남접과 달리 北接은 中農 以上이 많아 그만큼 改革에 關心이 없었다. [18] 남接耳 2次 蜂起를 準備하자, 北接은 남접 農民軍을 攻擊하려고까지 했다. [18] 9月 下旬, 弟子들의 懇曲한 說得에 崔時亨은 마지 못해 合流를 許諾했다. [18] 論山에서 北接軍과 남接軍이 合流한 것이 10月 9日이니 蜂起 決定 後 한 달을 끈 셈이었다. [18]

日本軍과의 戰鬪 [ 編輯 ]

農民軍과 조일 聯合軍은 11月 20日 ( 陰曆 10月 23日 )부터 23日( 26日 )까지 公州 異人 咆哮 等地에서 第1次 接戰을 벌였고, 農民軍은 크게 敗北해 後退했다.농민군은 곰티와 檢詳 마을, 곰內, 하고개, 駐美山 方面을 攻擊했다. 洪城 農民軍은 錦江 건너便의 遺構 쪽에서 맞섰으나 세성산 戰鬪 에서 敗北해 後退했다. 農民軍은 다시 陳列을 整備하고, 12月 5日 ( 陰曆 11月 9日 ) 남접과 北接 聯合軍 1萬餘 名이 公州 우금치 를 向해 突進하면서 戰鬪가 始作되었다. 하지만 東學 農民軍은 數的으로만 優勢할 뿐 訓鍊을 받은 軍人도 아니었고, 병기도 原始的이어서 新式 武器로 武裝한 日本軍과 官軍의 相對가 되지 않았다. 10月 中旬 10萬 部隊로 公主城을 包圍하고 對共激戰을 展開하였으나 敗退하였고, 11月 다시 公主 附近의 우금치戰鬪에서 敗北하여 後退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農民軍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日本軍과 官軍에 鎭壓되어 全琫準은 쫓기는 身世가 된다.

우금치, 公州 戰鬪, 淸州 戰鬪 敗戰과 退却 [ 編輯 ]

12月 5日 ( 陰曆 11月 9日 ) 전봉준 은 드디어 總攻擊을 命令했다. 農民軍 主力 部隊가 우금치를 目標로 움직이기 始作했다. 우금치는 견준산과 駐美산이 만나 만든 가파른 고개로 개금티라고도 부른다. 물밀 듯 올라오는 農民軍에게 政府軍과 日本軍의 最新 武器가 불을 뿜었다. [37] 時間이 갈수록 農民軍의 敗色이 짙어갔다. [37]

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4,50里에 걸쳐 길을 爭奪하고 山봉우리를 占據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旗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義理이고 무슨 膽略인가. 그 情況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덜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萬若 兵力이 前後左右에서 防備하지 못해 兵士들의 士氣가 떨어졌다면 猛烈히 밀어붙이는 氣勢에 代價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結局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37]

政府軍의 左先鋒將 이규태는 나중에 이렇게 實吐했다. [37] 主力部隊가 우금치에서 決死 抗戰하는 동안 農民軍 一帶는 公州로 向했다. [37] 들은 公主 監營을 背後에서 치기 위해 鳳凰山을 攻擊했다. 組를 짜서 組別로 攻擊했지만 力不足이었다. 監營을 눈앞에 두고 數없이 많은 東學 農民軍이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갔다. 屍體가 山같이 쌓이고 이루어 錦江으로 흘러들어갔다. [15]

한便 
김개남
의 東學農民軍은 電柱를 거쳐 錦山을 占領하고, 신탄진을 거쳐 淸州로 進擊하였으나 淸州戰鬪에서 日本軍에 敗하고 後退하였다.

敗戰과 失敗 [ 編輯 ]

12月 10日 ( 陰曆 11月 14日 ) 새벽, 敵의 奇襲攻擊을 받고 農民軍은 論山으로, 다시 全州로 後退했다. 戰列을 가다듬어 원평, 태인에서 決戰을 벌였지만 亦是 敗했다. 全琫準은 直屬部隊만 남기고 農民軍에게 解散命令을 내렸다. [15]

곧이어 政府軍 側의 掃蕩作戰이 始作되었다. 이들은 罪없는 良民까지 마구잡이로 逮捕, 虐殺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婦女子를 凌辱했다. 그동안 쌓아 올린 農民的 社會經濟의 基盤은 여지없이 무너져나갔다. [15] 白羊寺에 숨어 動靜을 살피던 全琫準은 政府軍이 殺戮에 精神 없는 틈을 타서 直屬部隊를 서울로 潛入케 하고 세 名의 部下와 함께 淳昌으로 갔다. [15]

東學軍과의 싸움에서 勝利한 官軍과 日本軍 聯合軍은 全琫準을 生捕하면 莫大한 賞金을 준다는 布告文을 내걸었다. 全琫準은 井邑과 淳昌 等地를 轉轉하며 몸을 숨겼다. 그러나 過去 自身의 部下였던 김경천의 密告로 逮捕되어 12月 28日 ( 陰曆 12月 2日 ) 漢陽으로 押送되었다. [38]

逮捕와 最後 [ 編輯 ]

金開男은 12月 27日(陰曆 12月 1日) 태인에서 親舊인 임명찬의 密告로 逮捕되어 全州로 押送된 後 處刑된다. 1894年 12月 28日 ( 陰曆 12月 2日 ) 淳昌에서 全琫準은 賞金에 눈 먼 옛 同志김경천의 背信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日本軍에 依해 서울의 日本領事館으로 護送되었다. 그 後 法務衙門으로 넘겨져 1895年 3月 5日(陰曆 2月 9日)부터 4月 4日(陰曆 3月 10日)까지 5次例 審問을 받았다. [15] 法務衙門 에서는 拷問을 加하며 大院君 전봉준 의 關係를 캤지만 그는 一切 大院君을 言及하지 않았다. 逮捕된 全琫準은 審問을 받으면서 自身의 政治的 構想을 이렇게 밝혔다.

  • "서울에 쳐들어온 後 누구를 推戴할 생각이었는가? [39] "
  • "日本病을 물러나게 하고 嶽干(惡奸) 官吏들을 逐出해서 임금 곁을 깨끗이 한 後에 몇 사람 主席(柱石)의 선비를 내세워 政治를 하게 하고 우리는 곧장 農村에 들어가 常直(常職)인 農業에 從事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國事를 들어 한 사람의 勢力家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弊害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名士에게 協合(協合)해 合意法에 依해서 政治를 擔當하게 할 생각이었다. [39] "

全琫準은 大院君과의 關係를 頑剛하게 否認하였다. 그러나 김개남 等은 大院君과의 關係를 陳述하였고 卽刻 處刑된다. 結局 1895年 4月 23日(高宗 32年 陰曆 3月 29日 ) 裁判長 전봉준 外 逮捕된 東學農民軍 指導部에게 不待時참을 宣告했다. 全琫準은 무릎을 치고 일어나면서 외쳤다. [15] 全琫準은 自身이 逆賊이 아님을 들어 逆賊의 陋名을 쓰는 것은 抑鬱하다고 呼訴하였다.

程度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逆賊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 [15]

1895年 4月 23日( 陰曆 3月 29日 ) 손화중 , 최경선 , 김덕명 , 成痘한 等과 함께 死刑에 處해졌다. 이로써 東學 農民蜂起는 完全히 幕을 내리게 된다. [38] 한便 一部 農民軍 指導者는 흥선大院君 의 特別 赦免 歎願으로 釋放되기도 하였으나 大部分 공에 눈이 먼 故鄕 사람의 손에 依해 閔氏 政權 人士들에게 넘겨져 大部分 처형당했다. 죽기 前, 全琫準은 詩 한 數를 지어 自身의 悔恨을 읊었다.

때를 만나서는 天下도 힘을 合하더니 / 時來天地 皆同力

運이 다하니 英雄도 어쩔 수 없구나 / 運去英雄 不自謨 百姓을 사랑하고 正義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야 / 愛民正義 我無失 나라를 위한 一片丹心 그 누가 알리 / 愛國丹心 誰有知 [15]

한便 김개남 等 一部는 態인 산내면 鐘訟理에 있는 妹夫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親舊 林秉瓚의 告發로 全州에 있는 강화영의 重軍人 황헌주에게 잡혀 不法으로 全州 서교장에서 처형당했다. [40] 나머지 人士들은 시골에 숨어살거나 술酒酊꾼 行世를 하면서 겨우 疑心을 避해 生存하였다. 農民戰爭의 失敗와 함께 東學 農民軍을 利用하여 명성황후 를 打倒하고 이준용 을 推戴하려던 흥선大院君 의 再執權 祈禱도 水泡로 돌아갔다.

主要 戰鬪 [ 編輯 ]

황토현 戰鬪 [ 編輯 ]

農民軍이 全北 井邑 황토현 一帶에서 官軍을 무찌르고 첫 勝利를 거둔 戰鬪로 後에 황룡촌 戰鬪에서도 勝利하게 되었다. 農民軍이 蜂起하고 태인과 扶安 官衙를 잇따라 占領하자 朝廷에서 全羅監司 김문현, 領官 이경호 等이 領內 雜色軍 等 總 1萬 名의 大軍을 이끌고 와 井邑 황토현에서 激突했다. 4月 7日 새벽 農民軍은 官軍에게 脯를 쏘아 混亂에 빠뜨린 뒤 미처 對處하지 못한 官軍을 追擊해 敗戰시켰고 이 過程에서 領官 이경호가 農民軍들에게 逮捕되어 戰死했다. 이 戰鬪의 勝利로 農民軍은 士氣가 衝天하게 되었고 全州로도 進擊할 수 있었다.

황룡천 戰鬪 [ 編輯 ]

全州城 戰鬪 [ 編輯 ]

異人 戰鬪 [ 編輯 ]

態인 戰鬪 [ 編輯 ]

우금치 戰鬪 [ 編輯 ]

1894年 陰曆 11月 公州 南쪽의 우금치 (牛禁峙)에서 官軍 및 日本軍과 큰 激戰을 벌였다. 約 1週日 間 50餘 會議 攻防戰을 벌인 이 戰鬪에서 農民軍은 武器의 劣勢를 克服하지 못한 채 大部分의 兵力을 잃고, 500餘 名의 生存者가 全州 南쪽의 금구 원평(院坪)으로 後退하였다.

農民軍은 무너미 고개와 異人 쪽에서 맞서 官軍을 밀어붙이고 조일 聯合軍은 모리誤 마사이치 大尉가 指揮하는 官軍을 우금치 옆 뱁새蔚 앞山에 駐屯하고 우금치 , 금학동, 곰티, 哮咆 烽燧臺에 官軍을 配置했다. 農民軍은 이 곳을 集中 攻擊했으나 고갯마루 150미터 앞까지 조일 聯合軍의 優勢한 武器의 砲彈과 銃彈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以上 進擊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 조병완 이 農民軍의 左側과 右側을 攻擊해 農民軍은 큰 死傷者를 내고 公州 東南쪽 봉우리로 後退했다. 農民軍 1臺가 鳳凰山으로 進擊해 公州監營을 攻擊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金鶴골 골짜기에서 官軍의 攻擊으로 失敗했다. 이로써 農民軍은 4日 間의 第2次 接戰에서도 敗北했고, 전봉준 은 軍人, 李曙, 商人들에게 支持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聯合軍은 12月 10日 ( 陰曆 11月 14日 )에 魯省 駐屯 農民軍을 攻擊해 農民軍은 大村 뒷山과 小土産으로 繼續 後退해 詐欺까지 떨어졌다. 12月 23日 ( 陰曆 11月 27日 ) 最後의 戰鬪인 태인戰鬪에서도 全琫準 將軍의 主力部隊로서는 日本의 新式 武器에 多數의 戰死者를 낳고 敗하였다.

1894年 12月 逮捕되어 漢城府 로 押送되는 전봉준 (巧者에 捕縛되어 앉아있는 李)

東學農民革命 當時 全羅道, 忠淸道, 慶尙道 地域 各地에서 많은 接主들이 抗拒하여 蜂起하였으나 그 規模는 少數였고, 全琫準의 部隊만이 大規模로서 湖南의 5千名을 이끌고 日本軍 數萬 名을 相對로 抗戰을 벌였으나 戰略 未熟과 甁氣流를 充分히 갖추지 못하여 마침내 日本軍을 끌어들인 朝鮮 朝廷의 官軍과 日本軍 聯合軍에 依해 敗하고 말았다. 마침내 陰曆 11月에 전봉준 等은 淳昌에서 逮捕되어 漢城府 로 押送된 後 日本 公使 또는 朝鮮 義禁府 의 裁判을 받고 이듬해 死刑되었으며(1895년 陰曆 3月), 以後 조일 聯合軍의 湖南 一帶의 農民軍 大虐殺前이 일어났다. [41] 이로써 東學農民戰爭은 擧兵한 지 1年 만에 失敗로 끝났다.

朝鮮軍의 戰爭 犯罪 [ 編輯 ]

東學農民運動 當時 朝鮮軍 百姓 들을 相對로 戰爭犯罪 를 저지른 적도 있었는데 [1] 東學農民運動을 鎭壓하러 全州 로 내려온 京軍 兵士들은 3달 前부터 月給을 못 받은 狀態라 [2] 軍紀 고 뭐고 없이 百姓 들을 相對로 殘忍하게 掠奪 强姦 을 저지르는 것이 盜賊떼들보다도 더 甚했기 때문에 [3] 朝鮮 百姓들이 日本軍 의 駐屯을 希望한 적이 있을 地境이었으며 [4] 鎭衛隊 亦是 任務에는 關心이 없고 國王의 軍隊라는 것을 앞세우면서 百姓들에게 强盜 質과 暴行 을 일삼으며 女子들에게는 性犯罪 를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5] 百姓들에게 不當한 稅金을 거두려는 貪官汚吏의 사냥개가 되어 自身들이 지켜야 할 百姓들을 밤에 몰래 집에 쳐들어가서 銃으로 쏘아 죽이기까지 했다. [6] 이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 가 鎭衛隊의 解散 命令을 내리자 朝鮮 百姓들이 손을 들고 慶祝한 일도 있었다. [7]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東學農民運動에 參與한 僧侶 [ 編輯 ]

東學 農民運動에는 佛敎 僧侶들도 參與하였다. 이는 東學 農民軍의 主要 派閥 中 하나인 西浦의 指導者 서장옥이 佛敎 僧侶 出身인 點이 作用하였다.

東學 農民軍의 指導者 中에는 佛敎 僧侶 出身의 接主가 있었다. 남接의 指導者의 한 사람인 서장옥 (다른 이름은 서인주)는 佛敎 僧侶 出身으로 최시형 과 함께 최제우 의 弟子가 되었다. 當時 逃走였던 최시형 科 同門이었으므로 一般 接主였지만 최시형 의 弟子들에 비해 相當한 影響力을 發揮하고 있었다. 서장옥은 忠淸南道 地域에서 活動한 東學 接主였다. [42]

서장옥 은 일찍이 佛敎 僧侶 로 30餘 年을 遂行하다가 東學에 投身, 1894年 전봉준 과 함께 倡義하니, 서장옥이 이끄는 접은 瓠犀남椄 或은 西浦라고 불렸다. [19]

1893年 2月 의 集會 때 南接 쪽에서는 北接이 主催하는 報恩 集會의 動靜을 살피려고 肯葉(亘葉)이라는 僧侶를 派遣까지 하였다. 甲午 東學農民戰爭에는 서장옥 뿐만 아니라 수많은 僧侶도 參加하였다. 卽 원평의 남접 湖南勢力과 西浦의 聯合 集會에 불甲紗의 人員(仁原), 禪雲寺의 右葉(愚葉), 白羊寺의 수연(水演) 等 湖南 地方 僧侶들이 參加했다. [43] 그밖에 忠淸南道 山寺의 一部 僧侶들도 書舖에 加擔하였다.

鎭壓 以後 [ 編輯 ]

1907年 高宗 의 特旨로 北接의 최시형 等 一部는 身元되었다. 그러나 전봉준 김개남 等은 1910年 (隆熙 4年) 朝鮮 이 滅亡할 때까지도 復權되지 못하였다. 一部 農民軍은 朝鮮이 滅亡할 때까지 山中에 隱身하거나 抗日 義兵 戰爭에 吸收되기도 했다.

其他 活動 [ 編輯 ]

大院君派와 連結 [ 編輯 ]

大院君派는 1894年 7月 頃부터 日本 勢力을 退治하기 위해 請地方의 社會勢力과 平壤의 淸나라軍의 協力을 받으려 하였다. [44] 이때 東學 農民軍에게도 사람을 보내 協力을 要請했다.

具體的으로 大院君은 東學農民軍, 地方의 土豪勢力, 兩班儒林, 功臣의 子孫들, 褓負商 等에게 密使를 派遣하여 義兵補益와 軍需支援을 促求하였다. [45]

開化派 除去 祈禱에 參與 [ 編輯 ]

서울에서 東學 農民軍 一部와 大院君派는 隱密히 刺客을 動員하여 開化派의 重鎭人物人 김홍집 , 김학우 , 김가진 , 안경수 , 曺喜昖 , 유길준 , 김종한 , 이윤용 等을 暗殺하려 하였다. [45] 農民軍은 이 計劃에 協助한다.

이 暗殺計劃은 東學農民軍이 이준용 麾下의 統衛營 과 協力하여 서울을 攻擊하기로 하였던 1894年 8月 中旬頃에 實踐에 옮겨질 豫定이었다. 그러나 軍國機務處 內에서 大院君과 이준용의 叛亂 謀議를 調査하자고 主張했던 김학우를 暗殺하는데 그침으로서 制限的인 結實만을 거두었다. [45] 以後 農民軍은 감쪽같이 빠져나갔고 흥선大院君 을 逮捕할 수 없었던 內部 에서는 이준용 을 逮捕하여 義禁府 에 監禁하였다.

評價 [ 編輯 ]

東學 農民 運動은 최제우 가 創始한 東學에 基礎를 둔 農民 中心의 抗爭이라고 할 수 있다. 東學은 身分制의 打破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混亂한 朝鮮末 狀況에 가난한 農民들이 依支할 수 있는 宗敎였기 때문이다. 東學農民運動의 性格은 簡單하게 “反封建的, 反外勢的 農民抗爭”이다. 農民이 主軸이 되는 運動으로 支配階層에 對한 朝鮮 時代의 最大의 抗爭이다. 淸나라와 日本의 介入으로 結局 失敗했으나 後에 3.1運動 으로 繼承되었다.

東學農民戰爭은 東學이라는 宗敎 組織과 東學人의 指導下에 일어난 農民 抗拒라는 點에서 以前의 民亂과 다르며, 外勢 排斥을 目標로 했다는 點도 처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當時의 歷史的 條件下에서 東學農民戰爭은 몇 가지 限界도 가지고 있었다. [46]

첫째, 農民軍은 朝鮮 官軍을 넘어선 外勢의 介入에 對하여 맞서 싸울 만한 效果的인 武器와 兵力이 不足하였다. 둘째, 農民들 中心의 東學軍에 對抗하여 旣得權을 가진 鄕村社會의 地主·富豪·兩班들의 民保團(民堡團)等을 통한 抵抗을 過小 評價하였다. 셋째, 社會 改革을 위한 革命을 遂行 하면서도 大院君에 依支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47]

더구나 東學軍 내 過激派는 朝鮮 王朝를 否定하고 새 政府를 構成하려는 試圖를 보였고, 穩健派 中 전봉준 等은 흥선大院君 과 協力하는 等 東學軍 內部에서도 意見이 一致되지도 않았다는 短點도 있었다.

全琫準이 白山 에서 全羅監司에게 내놓은 改革要求書와 全州和約을 맺기 直前 官軍 最高司令官 洪啓薰에게 보낸 歎願書에는 大院君이 다시 權座에 復歸하기를 바라는 內容이 들어 있다. [47] 그럼에도 不拘하고 甲午 東學 農民 運動은 愛國的이고 愛民的인 動機에서 일어난 舊韓末 最大의 農民 中心의 抗爭이었다. 한便, 農民軍이 近代的 民主主義나 社會主義를 志向하는 社會革命이나 階級戰爭을 꿈꾸었다는 歷史家의 見解도 있다. [46]

結局, 東學農民戰爭은 淳朴하고 愛國的인 農民들의 自己生存을 위한 悽絶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失敗經驗을 바탕으로 農民層의 反日愛國主義가 다음 時期의 義兵運動에 兩班儒生과 더불어, 함께 參與하는 成熟性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農民들의 內政改革要求는 甲午改革 에 部分的으로 反映되는 成果를 가져왔다. 反映된 內容으로는 寡婦의 再嫁 許容과 身分制 廢止 等이 있다. [46] 그러나 이 改革에는 農民들의 所望이었던 土地 改革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支持를 받지는 못했다. [46] 김개남 等 一部 過激派의 國王 僭稱이라던가, 전봉준 等 一部는 흥선大院君 等과 內通했던 點 亦是 大衆에게 否定的인 視角을 갖게 하면서 많은 支持를 받을 수 없는 하나의 要因이 됐다.

더욱이 農民 抗爭 運動의 週 發生地가 特定 地域이다 보니 現代에 와서도 地域 嫌惡主義者들에 依해 否定的으로 評價되고 있으며 特히 東學 農民軍 內部에 防彈 符籍 같은 非科學的 部分이 傳播되어 東學 農民 運動을 否定的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먹이감이 되거 있다.

關聯 人物 [ 編輯 ]

大院君과 전봉준 [ 編輯 ]

1888年(高宗 25) 무렵 전봉준 은 손화중(孫和中)과 接觸했다. [48] 그리고 그의 印度로 東學 에 入道한다. 1890年 무렵 전봉준 自身의 表現에 依하면 "그의 用武之地(用武之地)로서 東學 校門이 있음을 發見하고", 서장옥(徐璋玉)의 幕僚인 황하일(黃河一)의 紹介로 東學에 入敎했다. 뒷날 東學 農民 運動의 失敗로 官軍에 逮捕된 뒤 1895年 日本 領事館에서 있었던 第2次 裁判에서 "東學은 水深(守心)하여 忠孝(忠孝)로써 根本을 삼고 輔國安民(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東學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道(道)였다. 때문에 나는 東學을 極히 좋아했다"고 하여 스스로 東學에 入敎하게 된 經緯를 밝혔다.

그러나 전봉준 1890年 雲峴宮 을 찾아갔다. 以後 1890年 代 初盤 全琫準은 雲峴宮 에서 흥선大院君 의 門客 生活을 하였다. [49] 1892年 初 全琫準은 雲峴宮 門客 生活을 淸算하고 다시 故鄕인 全羅北道 고부군으로 내려와 農事를 지으며 洞里 書堂의 訓長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893年 2月 전봉준 漢城府 로 올라가 흥선大院君 을 訪問하였다. [48] 大院君은 暫時 食客으로 있었던 全琫準을 厚하게 待接하였다. 이때 全琫準은 흥선大院君 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人民을 위하여 한番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48] 이로부터 世間에는 全琫準과 大院君 사이에 무슨 密約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48]

全琫準과 천우협 [ 編輯 ]

한便 기요후지 高시치로(?藤幸七郞)의 著書 《 천우협 》(千佑俠, 덴유쿄)에서는 1894年 6月 27日 에 釜山을 통해 朝鮮에 들어온 日本 의 政治 暴力 組織 천우협 會員 一部가 全琫準을 만나 東學 洞民 運動을 支援했다고 主張하고 있다. 그러나 《천우협》에 나타난 만난 곳과 〈동도(東徒)의 罪人 全琫準 共初〉에 나타난 場所가 다르며, 〈동도(東徒)의 罪人 全琫準 共初〉에서는 當時 全琫準을 따른 軍勢는 고작 20餘 名이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5百餘 名으로 記述하여 그 數値가 매우 差異가 크다. 決定的으로 《천우협》에 나타난 時期인 6月부터 8月 末까지는 全혀 戰鬪가 없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천우협 會員들과 전봉준 一同이 協助하여 官軍을 擊破했다고 하였다. [50] 全琫準은 흥선大院君 系列 外에도 閔氏 政權을 打倒하고 淸나라 勢力을 몰아낼 目的으로 천우협 의 會員들로부터도 支援을 받았다. 그러나 日本의 暴力 組織 천우협은 八紘一宇를 바탕으로 아시아 에 對한 侵略을 바닥에 깔고 있는 組織으로 다른 나라의 獨立이나 富國 强兵을 도울 만한 組織이 아니라는 點에서도 《천우협》李 全琫準이나 東學軍을 도우려 했다는 主張은 信憑性이 낮다는 視角도 있다. [ 出處 必要 ]

한便 東學側 資料에서도 전봉준 과 천우협(天佑俠)의 接觸을 確認해주고 있는데 『天道敎 창건사』에 依하면 "日本人 다케다 限時(武田範之) 等 15名이 金時計 1個와 마노 (瑪瑙) [51]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面會를 請한 卽 全琫準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面談하고 時局을 서로 論하였다 [52] '하여 全琫準과 천우협 側의 面談 事實을 記錄하고 있다. 閔氏 勢力이 淸나라 軍隊를 끌어들일 때만 해도 천우협은 東學 農民 運動에 好意的이었지만, 日本軍까지 鎭壓에 끌어들이게 되자 多少 曖昧한 立場을 表明하였다. 東學 農民 運動이 完全히 鎭壓되어 事態 收拾이 어렵다고 여겨지자 천우협은 東學과의 關係를 끊었다. 그러나 東學 農民 運動이 鎭壓된 뒤 천우협은 다시 東學側과 사람을 주고받으며 交流를 한다.

興宣大院君의 農民運動 使嗾 [ 編輯 ]

한便 흥선大院君 이 東學 農民軍에게 擧兵을 使嗾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外交官의 祕密 便紙에도 나타난다.

나는 나의 情報院을 통해 다음과 같은 諜報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大院君)가 主謀者로 나서서 重大한 暴動을 造成하고 있으며, 이 暴動은 오는 여름 或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以前에 暴發할 것이며, 共謀者와 代理人들이 日本과 中國에서 武器를 購入하고 있으며 이미 4千餘正義 小銃이 구매되었는바, 그 中 一部는 日本에서 나왔고 少數의 日本人이 이에 加擔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陰謀에 對해 日本 政府는 全혀 모르고 있다. [53]
 
1894年 2月 21日 , 駐日本 러시아 公使 미하일 히트露布 (Mikhail Hitrovo)가 駐朝鮮 러시아 公使 칼 베베르 (Karl L. Weber)에게 보낸 祕密 情報

한便 興宣大院君은 東學 農民運動이 鎭壓된 뒤, 農民軍의 한 사람인 이방언이 처형당하기 前에 살려주었다. 그러나 이방언은 故鄕으로 내려다가다 全羅道 觀察使 가 잡아다가 그 아들과 함께 불에 태워 죽였다.

그 曾孫子의 證言에 依하면 '大院君과 接線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證據로서 席大戰이 끝나고 그 兩班이 잽혀서 羅州를 거쳐 서울로 押送되어자기조 死刑 아니면 無罪 方面, 只今 나온 裁判 記錄에 엊그저께가지도 總務處 記錄保管所에서 裁判記錄 冊을 보냈습디다. 그 兩班은 無罪 方面이 되지 않았습니까? 無罪 方面이 될 수가 없는 분이었는데. 그렇게 된 것은 大院君이 周旋을 해서 無罪 方面을 받았다. [54] '고 한다. 이어 이방언의 曾孫子의 證言에 依하면 '그래가지고 (이방언이) 高宗 앞에까지 가서 歸化草食이란 말이 뭔 말인지는 모르지만, 돌아올 때 [54] 鬼子, 될 話者, 풀 硝子, 먹을 識者, 歸化草食의 承奉을 받고, 나락 平定이 되면 다시 부를 테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때 國家에 功을 세워라 하는 크나큰 銀錢을 입고 내려왔는데 [55] '라는 것이다.

이방언과 興宣大院君과의 關聯說은 송기숙이 綠豆將軍 에도 썼듯이 꾸준히 이야기꺼리가 되고 있다. 이런 關係로 하여 이방언은 無罪 放免되었다는 것이다.(총무처 記錄保管所 發行의, 東學關聯判決文집 參考). 그러나 이방언은 놓여 나와도 곧바로 故鄕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55]

이방언의 曾孫의 證言에 依하면 '東學은 彼此가 出血이 많고 死傷者가 많이 나서 여기로 바로 못 오시고 회천면에 있는 寶城 郡守 에게로 갔대. 寶城 郡守가 異常한 것이 그 말이 맞어들어가. 거시기를 보면 寶城 郡守 가 裁判을 받았어요. 郡守도 東學에 協助했다고 해가지고. 근데 寶城 郡守 도 無罪 方面을 했어. 그 사람도 東學에 協助한 사람이여. 寶城 郡守의 協助로 寶城郡 회천면 쇳대에 隱身해 있다가 全羅 監査의 再逮捕令에 依해서 잽혀가지고 長興 長대에서 自己 외아들 성호와 같이 同參을 當하셨어요. 只今 星雲高等學校 자리라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들려오는 말에 依하면 銃殺도 아니고 孝수도 아니고 산 사람을 묶어놓고 그 위에다. [55] ' 흥선大院君 의 歎願으로 살아난 이방언은 全羅道 觀察使에 依해 처형당한다. 이방언은 짚을 씌워 불에 태워죽이는 분살型을 當했던 것이다. 그래도 屍身을 집안 어른들이 收拾해서 墓를 쓴 것은 여느 農民軍 指導者들의 境遇보다 나은 便이었다. [55]

金九 [ 編輯 ]

東學 農民 運動이 일어나자 金九 는 東學軍을 指揮했다. 指導者 최시형 의 指示를 받고 黃海道 東學軍의 先鋒將으로 海州性 을 襲擊하였으나 끝내는 官軍에게 敗頹하고 몸을 숨겼다.

기타 [ 編輯 ]

윤영렬 , 東學農民軍 鎭壓軍 指揮官의 한사람이다.
윤치소 內外, 東學 農民軍 鎭壓 義兵將의 한 사람이다.
박성빈, 東學農民軍의 高齡, 星州地域 接主였다.

東學農民運動 當時 司憲府 監察人 윤치소 (尹致昭)는 牙山 出身 조중양 과 함께 300名 程度를 모아서 義兵 [56] 을 組織하고 創意通文을 天安, 牙山, 溫陽 地域에 돌리고 天安 地域에서 活動을 벌이기도 했다.그는 日帝下 大地主이자 事業家로서 親日로 變身, 해평 尹氏 一族인 윤웅렬, 四寸인 尹致昊 等과 함께 親日人名事典에 登載되었다. [57] 윤치소 는 後日 大韓民國 第4代 大統領이 되는 윤보선 , 京畿道知事 를 지낸 윤원선 의 아버지였다. 한便 東學農民軍 高齡, 星州 地域의 接主로 活動하다 逮捕, 死刑을 謀免한 박성빈 大韓民國 의 5~9代 大統領을 지낸 軍人 出身 政治人 朴正熙 의 아버지이자 總理 金鍾泌 의 妻祖父가 된다.

1894年 10月 討捕使 윤영렬 은 牙山(牙山)에 사는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章程 300名을 모아 天安郡 목천면에 出沒한 盜賊을 討伐하였다. 以後 東學 農民 運動의 討伐에 參與한다. 윤영렬 1894年 東學 農民 運動 當時 조중양 과 함께 討伐軍에 別軍官으로 差出되었다. [57] 別軍官으로 差出된 그는 官軍 外에도 檄文을 돌려 義兵을 募集하였다. 이어 官軍과 義兵 兵力을 이끌고 忠淸南道 牙山 天安 一帶의 東學 農民軍討伐에 參與하였다. 윤영렬 윤보선 大統領 의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상하이 에 亡命中이던 윤치호 는 東學 農民運動을 積極 支持하여 話題가 되기도 했다.

失敗 原因 [ 編輯 ]

명성황후 는 2次 蜂起 때는 淸나라軍을 끌어들였고, 3次 蜂起 때는 日本軍을 끌어들여 交戰케 하였다. 2次 蜂起 때에는 全州 火藥 을 締結하였지만 3次 蜂起때는 日本軍과 朝鮮 官軍, 淸나라軍과 官軍 聯合軍의 火力을 當해내지 못하였다.

또한 政權 顚覆을 願치 않는 北接의 反撥과 王室을 否定하는 남接 內 急進派의 存在 亦是 農民軍의 內紛을 불러왔다. 東學軍 남接耳 2次 蜂起를 準備하자, 北接은 남접 農民軍을 攻擊하려고까지 했다. [18] 남접과 西浦의 軍事에 對한 北接의 非協調 亦是 農民軍의 活動을 어렵게 했다. 論山에서 北接軍과 남接軍이 合流한 것이 10月 9日이니 蜂起 決定 後 한 달을 끌었다. [18] 北接과의 聯合에 너무 時間을 消費했고, 또 南原의 金開男 部隊가 獨自 行動을 한 [15] 것 亦是 勢力 弱化의 한 原因이었다.

《全琫準空超》(全琫準供草) [ 編輯 ]

全琫準空超 》(全琫準供草)는 全琫準이 逮捕된 後 다섯 次例 進行된 全琫準에 對한 法定 審問 記錄이다. 법부아문의 裁判官과 日本 領事가 陪席한 가운데 1894年 2月 9日부터 3月 10日까지 다섯 次例에 걸쳐 심문한 內容으로 構成되어 있다.

政府나 日本側에서 가장 重點을 두고 追窮한 것이 農民運動과 興宣大院君과의 關係였다. 그러나 全琫準은 大院君과 東學革命과의 關聯性을 否定하고 모든 것을 自身의 責任으로 돌리는 等 革命家로서의 毅然한 態度로 一貫하고 있다.

甲午東學革命의 原因 및 經過, 農民軍의 人的 構成, 全琫準과 東學의 關係, 東學의 敎理 ·組織 ·敎勢 및 農民運動에 미친 影響 等을 알 수 있는 貴重한 資料이다. 두 冊 모두 原本은 서울대학교 奎章閣에 保管돼 있다.

서광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이다.

서: 전명숙(全明淑)이라는 者는 누구냐?

前: 名宿은 나의 者(字)다.

서: 전녹두는 누구냐?

前: 사람들이 나를 그리 부른다.

서: 왜 亂을 일으켰으냐?

前: 어찌하여 날보고 亂을 일으켰다 하느냐? 作亂(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倭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腐敗한 너희 高官들이 아니냐?

서: 官衙를 부수고 民兵을 일으켜 罪없는 良民을 죽게한 것이 亂이 아니고 무엇인가?

前: 일어난 것은 亂이 아니라 百姓의 怨聲이다. 民兵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救하고자 함이요 百姓의 삶에서 暴力을 除去코자 했을 따름이다.

서: 그리하면 地方의 方伯守令을 魂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入城코저 했는가?

前: 國際를 無視하고 宮闕을 侵犯한 倭놈들을 膺懲코저 한 것이다.

서: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外國人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前: 아니다. 外國人은 通商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倭놈들은 軍隊를 駐屯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意味가 있을손가?

서: 너는 東學의 怪獸(魁首)냐?

前: 나는 義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東學의 怪獸라 함은 可當치 않다.

서: 東學엔 언제 入黨하였느냐?

前: 三年前이다.

서: 왜 入黨하였는냐?

前: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恭敬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 東學의 注意(主意)가 무엇이냐?

前: 輔國安民(輔國安民)이다.

서: 그렇대면 그대는 하늘님을 恭敬하는 것 보다는 輔國安民이라는 政治的 目的을 위해 東學이라는 組織을 利用한 것밖에 더 되느냐?

前: 東學은 本是 우리 해동 朝鮮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道學(道學)에 宗敎와 政治의 區分이 있을 수 없다.

서: 송희옥(宋喜玉)을 아는가?

前: 面識은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者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이 全羅일도 都執綱(都執綱)이요 너의 가까운 親戚이라는데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前: 그는 本是 浮浪者로 忽往忽來했을 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의 奇書(奇書)에 依하면 너의 再次 氣泡는 國太公(國太公) 大院君과의 密約에 依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事實이냐?

前: 어찌 斥洋斥倭가 大院君 한사람의 主張일까보냐? 그것은 萬百姓이 願하는 바이다. 내 彰義門에 써있는 몇句節로써 그런 臆測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大院君은 우리의 義擧가 解散되기만을 曉諭했을 뿐이다. 우리의 義擧는 大院君과 何等의 關聯도 없다.

서: 너는 大院君을 서울 雲峴宮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前: 流言蜚語日 뿐이다. 나는 大院君을 만난 적이 없다.

서: 東學에 남접 北接이 있다는데 그 區別은 무엇이뇨?

前: 그것은 湖南과 湖西의 地域的 區別일뿐 東學이 두個인 것은 아니다. 東學은 三十年展 慶州에 살던 최제우(崔濟愚)로부터 始作하였고 東學의 모든 接主는 崔法軒(崔法軒)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崔法軒이 八道(八道)의 接主의 職責을 總括한다.

서: 崔法軒이 누구인가?

前: 海月 崔時亨이다. 이름은 최경상이다.

서: 그럼 너도 氣泡의 許諾을 崔法軒으로부터 받았는가?

前: 眞理를 펴는데 무슨 許諾이 必要한가? 忠의(忠義)란 本心(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許諾을 받고 치우겠는가?

? 《全琫準空超》(全琫準供草)


갤러리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기타

關聯 書籍 [ 編輯 ]

  • 釜山藝術文化大學東學硏究所, 《海月 崔時亨과 東學 思想》 (예문서원, 1999)
  • 조광환, 《疏通하는 우리歷史》 (살림터, 2008)
  • 임종국, 《實錄 親日派》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돌베개, 1991)
  •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5》 (역사비평사, 2003)
  •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京仁文化史, 2007)
  • 김중현·이희근 外 共著, 《不滅의 15人 施工 超越 맞장 인터뷰》 (서해문집, 2008)
  •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4》 (역사비평사, 1995)
  • 歷史問題硏究所, 歷史批評:1997年 겨울號 (역사비평사, 1997)
  • 배항섭, 《朝鮮後期 民衆運動과 東學農民戰爭의 勃發》 (京仁文化史, 2002)
  • 신복룡, 《韓國史 새로 보기》 (圖書出版 풀빛, 2001)
  • 장영민, 《東學의 政治 社會運動》 (京仁文化史, 2004)
  • 이돈화, 《天道敎 창건사》 (天道敎中央宗理院, 1950)

參考 資料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東學革命"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各州 [ 編輯 ]

  1. 본 事件과 東學의 關聯性에 對한 疑問을 提示하는 意見도 있는데 이 境遇에는 '1894(甲午) 農民戰爭(또는 革命이나 運動)' 等이 적합하다는 意見도 있음. 왕현종, 東學農民戰爭 用語 및 性格 討論: 1894 農民蜂起 어떻게 부를 것인가, 1990年 8月, 가을號(通卷 12號), 357-364面 參考
  2.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5》 (역사비평사, 2003) 241페이지
  3. 尹致昊의 三寸 윤영렬과 四寸 동생 윤치소는 義兵을 일으켜 東學農民軍과 交戰하였다.
  4. 東學 農民軍은 동비(東匪), 東學 非敵으로 卑下해서 불렀다.
  5. 朴榮圭, 《한 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圖書出版 들녘, 1996) 436페이지
  6. 朴榮圭, 《한 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圖書出版 들녘, 1996) 442페이지
  7. 歷史學硏究所 <講座 韓國近現代史> 풀빛 1996.8.29 p56
  8.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58페이지
  9. 朴榮圭, 《한 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圖書出版 들녘, 1996) 437페이지
  10.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2007.4, 京仁文化史) 315~316쪽.
  11. 朴榮圭, 《한 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圖書出版 들녘, 1996) 448페이지
  12. 任用한, 《亂世에 길을 찾다》(시공사, 2009) 306페이지
  13. 임혜봉, 《한卷으로 보는 佛敎史 100 場面》 (嘉藍企劃, 1994) 265페이지
  14. 임혜봉, 《한卷으로 보는 佛敎史 100 場面》 (嘉藍企劃, 1994) 266페이지
  15.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61페이지
  16.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41b
  17. 양필승, 世界史 속에서 전봉준:韓國民族主義의 形成과 文明史的 危機, 中央日報 WIN, 1996年 7月號
  18.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59페이지
  19. 임혜봉, 《한卷으로 보는 佛敎史 100 場面》 (嘉藍企劃, 1994) 267페이지
  20.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2:改新敎 立國에서 乙未事變까지》 (人物과 思想史, 2007) 272페이지
  21. 歷史問題硏究所, 《다시 피는 綠豆꽃》 (역사비평사, 1994) 138페이지
  22. 朴榮圭, 《한 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圖書出版 들녘, 1996) 449페이지
  23. 歷史問題硏究所, 《다시 피는 綠豆꽃》 (역사비평사, 1994) 139페이지
  24. 農民軍의 綱領에 該當
  25. 朴榮圭, 《한 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圖書出版 들녘, 1996) 450페이지
  26. 事情을 하소연함 네이버 漢字辭典 2011年 6月 22日 確認
  27. 김광재, 東學農民運動의 歷史的 意義, 2002年 2月, 東學硏究 第11輯, 99-126面 中 104面
  28.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2:改新敎 立國에서 乙未事變까지》 (人物과 思想史, 2007) 273페이지
  29. 李相伯, 東學黨과 大院君, 1962
  30.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박광희 驛, 茶山草堂, 2010) 397페이지
  31. 駐韓日本公使關記錄 8 58~60쪽
  32.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5》 (역사비평사, 2003) 242페이지
  33. 歷史問題硏究所, 歷史批評:1997年 겨울號 (역사비평사, 1997)167페이지
  34.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5》 (역사비평사, 2003) 243페이지
  35. 사람 大衆이 하늘을 이긴다.
  36. 第1次 蜂起 때에는 최시형 도 反對 立場을 보였다. 신복룡 (2001年 12月 20日). 《韓國史 새로 보기》, 初版 2刷, 서울: 圖書出版 풀빛, 168~179쪽. ISBN   89-7474-870-3 .
  37.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60페이지
  38. 朴榮圭, 《한 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圖書出版 들녘, 1996) 452페이지
  39.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62페이지
  40. 歷史問題硏究所, 《다시 피는 綠豆꽃》 (역사비평사, 1994) 175페이지
  41. “日本軍 東學農民 虐殺 '鎭重일지' 公開” . 2001年 5月 31日 . 2023年 4月 7日에 確認함 .  
  42. 釜山藝術文化大學東學硏究所, 《海月 崔時亨과 東學 思想》 (예문서원, 1999) 246
  43. 임혜봉, 《한卷으로 보는 佛敎史 100 場面》 (嘉藍企劃, 1994) 268페이지
  44.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2007.4, 京仁文化史) 318쪽
  45.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2007.4, 京仁文化史) 319쪽
  46.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 〈東學革命〉
  47. 서울로 끌려간 綠豆將軍 全琫準 끝까지 大院君 감싸다 處刑돼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中央日報
  48. Daum百科事典 中 全琫準의 出身 및 背景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9.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230쪽
  50. 임종국 (1991年 2月 1日). 《實錄 親日派》.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서울: 돌베개. 23~24쪽쪽. ISBN   89-7199-036-8 .  
  51. 寶石의 一種
  52. 한상일, 「東學과 日本 右翼:천우협(天佑俠)과의 提携에 關한 考察
  53. 유영익, 「甲午農民蜂起의 保守的 性格
  54. 歷史問題硏究所, 《다시 피는 綠豆꽃》 (역사비평사, 1994) 249페이지
  55. 歷史問題硏究所, 《다시 피는 綠豆꽃》 (역사비평사, 1994) 250페이지
  56. 東學農民運動 討伐軍
  57.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4》 (역사비평사, 1995) 268페이지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