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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
| 1928年 1月 22日
(
1928-01-22
)
日帝强占期
平安北道
井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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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
| 2016年 5月 8日
(
2016-05-08
)
(88歲)
大韓民國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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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別
| 男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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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籍
| 大韓民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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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館
| 溫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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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歷
| 延世大學校
經營學 學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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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歷
| 1980年 大韓民國 國家保衛立法會의 立法議員
[1]
延世大學校
理事長
朝鮮日報
會長
民主正義黨
常任顧問 兼 黨務委員
自由民主聯合
前任顧問 兼 黨務委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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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母
| 방재윤(簿), 이성춘(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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配偶者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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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女
| 방성훈, 방혜성, 房潤美, 방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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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當
| 無所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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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영
(方又榮,
1928年
1月 22日
~
2016年
5月 8日
[2]
,
平安北道
定州郡
)은
大韓民國
의 言論人, 企業人이다. 《
朝鮮日報
》 社長·會長·名譽會長,
延世大學校
理事長을 지냈다. 本貫은
溫陽
(溫陽)이고, 號는 佚民(逸民)이다.
1952年 朝鮮日報 工務局 見習生으로 入社, 8年間 社會部·經濟部 記者로 일한 뒤 1962年 朝鮮日報 常務로 復歸해 1963年 發行人, 1964年 專務 代表理事가 됐다. 1970年엔 代表理事 社長 等을 歷任했다. 1960年 朝鮮日報 系列社인 아카데미劇場 代表를 맡았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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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涯 全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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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年
1月 22日
平安北道
定州郡
에서 아버지 방재윤(方在胤)과 어머니 이성춘(李成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兄은
방일영
이고, 둘째 兄 房筆寧殷 2世 때 病으로 死亡했다. 號는 佚民(逸民)이다. 第9代
朝鮮日報
社長
방응모
의 養孫子이다. 本來
방응모
의 親兄
放鷹곤
의 孫子이다. 養할아버지이자 從祖할아버지人
방응모
은 본 夫人 承繼度에게서 아들 둘을 얻었지만 夭折했다.
방일영
과 방우영 兄弟는
放鷹곤
의 次男인 아버지
방재윤
이 叔父
방응모
의 養子로 가면서 방응모의 養孫子가 되었다.
그가 태어날 當時 방응모는 "一等인 兄(日影)과 더불어 또 繁榮하라는 뜻에서 우영이라고 하자"며 손수 孫子의 이름을 지었다.
[3]
그러나 1940年 4月 아버지
방재윤
이 定州郡의 나무 심기 事業에 出張갔다가 病院에 入院, 이때 看護師가 잘못 놓은 注射를 맞고 死亡하여 할아버지 방응모에 依해 養育되었다.
네 살 때 아이들과 놀다가 떨어져 다쳤는데, 이때 車를 타고 京城儀典으로 가서 手術을 받고 살아났다
[4]
한다.
1940年
朝鮮總督府
의 彈壓으로 조선일보가 폐간당한 해 定住에서 조일심上 小學校를 卒業했다. 養할아버지
방응모
를 따라
京畿道
楊州郡
時鈍면
可能리(現,
議政府
가능동
)로 移住한 뒤,
서울
로 留學하여 京城 更新高等普通學校를 거쳐
延世大學校
商科를 卒業했다.
6.25 戰爭
當時 避難갔다가 다시 서울로 歸還했다. 以後 兄
방일영
과 함께 조선일보를 再建하는 데 注力했다.
1959年
에 이선영과 結婚했는데, 이선영의 親庭어머니가 歷史學者 湖巖
문일평
의 딸이었다. 방응모와 文一平은 가깝게 지냈고, 文一平의 아들 中 한 名인 문동표는
朝鮮日報
社에 入社해서 編輯局長을 歷任하기도 했다.
1959年
5月 15日
이선영과 結婚式을 올렸는데, 이때 主禮는
高麗大學校
總長을 지낸
유진오
가 서고 송인상 재무부長官이 祝辭를 하였다.
조선일보의 經營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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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年 朝鮮日報 工務局 見習生으로 入社, 8年間 社會部·經濟部 記者로 일한 뒤 1960年 暫時
朝鮮日報
系列社인
아카데미劇場
代表를 맡았다.
1962年 朝鮮日報 常務로 復歸해 1963年 發行人, 1964年 조선일보 專務 代表理事가 됐다. 1970年엔 代表理事 社長에 就任했다. 兄
방일영
이
1970年
까지도 經營權을 行使하여, 1970年부터 實質的인 經營權을 넘겨받아 조선일보의 成長期를 主導하게 된다.
방우영 社長은 1等 新聞
朝鮮日報
에 對한 壓倒的인 支配力을 行使했다. 大韓民國 情·官·言論界에 莫大한 影響力을 行使하며 ‘밤의 大統領’이라는 別名을 얻기도 했다.
[5]
1970年代부터 反共과 安保第一主義를 조선일보의 主要 價値로 내세워 왔다. 1960∼70年代 中央情報部 國內情報國 言論擔當官으로 조선일보를 擔當했던 美洲地域 同胞運動가 박기식은
2001年
'
民族21
' 12月號에서 "現在 조선일보 論調의 根源은 바로 방우영"이라고 밝힌 바 있다. 1971年 大選 前 中庭 狀況室에 各 新聞社 發行人들을 모아 北韓 映像物을 보여줬는데
金日成
朱錫이 幹部들에게 뭔가 이야기하는 모습이 나오자 김일성을 向해 삿대질을 하며 甚한 辱說을 퍼부었다고 證言했다.
[6]
1975年
兄
방일영
이 私財(私財)를 털어 '방일영奬學會'를 法人으로 發足했다. 방우영은 兄 방일영과 兄弟가 保有한 15%를 財團의 基金으로 새로 出演하는데 同參, 20年間 運營되어 왔던 '방일영奬學會'의 奬學基金 15億餘 원을 合해 그 해 11月 非營利 公益法人으로 방일영奬學會(財團)을 設立했다.
1980年 《월간조선》을 創刊했다. 1981年 韓國言論硏究院 初代 理事長과
延世大學校
同門會長을 各各 맡았으며, 중앙대에서 名譽法學博士 學位를 받았다. 1984年에는 연세대에서 名譽文學博士 學位를 받았다. 1985年 銅塔産業勳章을 授勳했고 프랑스
니스
時(市)로부터 名譽市民金裝과 感謝狀을 받았다. 1987年 韓獨(韓獨)協會 會長에 就任했다.
1990年 스포츠조선을 創刊했다.
1993年
방일영의 아들인 조카
방상훈
에게 社長 자리를 물려주고 조선일보 會長이 되었다.
[7]
1994年 ‘古堂 曺晩植先生 記念事業會’ 理事長, 1997年
延世大學校
財團理事長에 各各 就任했다.
生涯 後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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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年
3月 26日
조선일보 會長職에서 물러나고, 조선일보 名譽會長에 推戴됐다. 朝鮮日報側은 방우영 會長의 辭任과 關聯, "房 會長이 年歲가 많이 드셔서 以前부터 75世에 물러나겠다는 뜻을 여러 次例 밝혀왔다"며 "健康上의 問題나 다른 問題로 辭任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2006年
9月
京畿 의정부시 가능동 先山에서 家族 追慕 行事를 마치고 乘用車로 歸家하다가 身元未詳의 怪漢 2名에 依해 甓돌로 車 琉璃窓이 찍히는 襲擊을 받았다.
[8]
2006年 10月의 大韓民國 國政監査에서 한나라黨
金淇春
議員은 테러 事件의 襲擊 背後가 北韓일 可能性이 있다고 主張했다.
[9]
2008年 55年 동안 言論界 生活을 整理한 八旬 回顧錄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펴내면서 “밤새 戰爭을 치르듯 만든 新聞이 讀者들에게 傳해지는 每日 아침 新聞을 펼치는 讀者들이 우리 新聞에 滿足할지 언제나 가슴 떨렸다”고 回顧했다.
[10]
2010年 朝鮮日報 常任顧問으로 推戴됐다.
2016年
5月 8日
午前 11時 7分 宿患으로 別世했다.
學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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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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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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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生祖父: 放鷹곤(方應坤, 방응모의 親兄)
- 養祖父:
방응모
(方應謨,
1883年
~
1950年
)
- 아버지: 방재윤(方在允,
1902年
-
1940年
, 放鷹곤의 次男)
- 어머니: 이성춘(李成春)
- 兄 : 房筆英(方必榮, 1924年 ~ 1926年)
- 누나 : 방숙영(? ~ 1951年 1月)
- 配偶者: 이선영, 湖巖
문일평
의 外孫女
- 長女: 방혜성(1960年 ~ ):太平洋學院 理事
[12]
- 첫째 사위: 서영배(徐榮培, 太平洋開發 會長) -
서성환
太平洋그룹 會長의 아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會長의 兄
- 次女: 房潤美
- 三女: 방혜신
- 셋째 사위:
정연욱
(鄭然旭, 慶南에너지 副會長) -
정재문
의 아들
- 長男: 방성훈(方聖勳,
1973年
4月 3日
~ , 스포츠조선 代表理事
[13]
)
- 며느리: 최강민 -
최창근
고려아연
會長 딸
[14]
- 叔父:
방재선
(方在善,
1944年
~)
- 叔父: 房再孝(方在孝,
1946年
~)
- 叔父: 방재규(方在奎,
1948年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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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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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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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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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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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聞/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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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送/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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