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後送再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後送再

後送再
(後松齋)
대한민국 高靈郡 鄕土文化遺産
種目 鄕土文化遺産 第10號
( 2012年 8月 1日 指定)
面積 417m 2
時代 1938年
所有 조택상, 祖武
管理 조택상
(다산면 松谷길 13-8)
位置
고령 후송재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고령 후송재
高齡 後送再
高齡 後送再(大韓民國)
住所 慶尙北道 高靈郡 다산면 벌지로 10
座標 北緯 35° 48′ 12″ 東京 128° 22′ 59″  /  北緯 35.80333° 東京 128.38306°  / 35.80333; 128.38306

後送再 (後松齋)는 慶尙北道 高靈郡 다산면 벌지로 10에 있는 臨齋 서찬규(臨齋 徐贊奎)와 奸才 戰友(艮齋 田愚) 의 門下에서 受學한 봉강 祖上(鳳岡 曺?) 의 齋室이다. 봉강 先生에게 數學(受學)韓 弟子들이 스승의 恩惠에 報答하고 同門間 友誼를 敦篤하게 하고자 生時(生時)에 三逸界(三一契)를 모아 1938年 講學소(講學所)인 後送材를 스승의 故鄕인 高靈郡 다산면 松谷村 에 建築하여 每年 後學들이 井邑例(庭揖禮) [1] 를 行하였다고 한다. 2012年 입春節에 後學들의 모임인 三逸界(三一契)에서 봉강 先生의 學德을 기리고자 成均館 館長 최근덕이 謹撰(謹撰)하고 成均館 副官長兼前例委員長 강동숙이 近西(謹書)韓 ‘봉강先生昌寧朝貢頌德碑(鳳岡先生昌寧曺公頌德碑)’를 後送再 內部에 세웠다. 2012年 8月 1日 高靈郡 鄕土文化遺産 有形資産 第10號 로 指定되었다. [2]

봉강 祖上(鳳岡 曺?)의 齋室인 後送再(後松齋)

後送再 氣門 [ 編輯 ]

어느 날 金在哲(金在哲), 조긍환(曺兢煥)이 나에게 書信(書信)을 보내어 이르기를 今年 봄에 저희들이 스승을 위해 옛 城山(星山)의 南東쪽 송곡리에 書齋(書齋)를 지어 懸板을 後송재(後松齋)라 하고 氣門(記文)하기를 願한다 하니 그 스승은 곧 나의 동문학(同門學) 親舊인 兆봉강(曺鳳岡) 이름은 上(?), 字는 문보(文甫)이다. 義理上 글을 하지 못한다고 辭讓할 수 없어 이에 말씀하기를 무릇 草木과 花卉(花卉)의 이름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니나 德(德)으로 쓴다면 根本(根本)李 굳고 中心이 비어 있는 대나무가 있고 切開(節槪)로 쓴다면 바르고 곧음을 지닌 잣나무가 있고 香氣(香氣)로 쓴다면 가을 江에 깨끗한 鳶(蓮)과 깊은 골짜기에 아름다운 蘭草(蘭草)와 서리 아래 傑出(傑出)韓 國花(菊花)가 있고 壽命(壽命)으로 쓴다면 千年의 枸杞子(枸杞子)가 있는데 어찌하여 唯獨 소나무(松)를 取하였는가? 이는 居住地(居住地)의 이름을 인하여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아니하는 뜻을 取한 것이니 또 理致는 하나이라. 소나무의 理致는 대나무(竹)와 잣나무(柏)의 理致이고 대나무와 잣나무의 理致는 연(蓮)과 蘭草(蘭草)와 國花(菊花)의 理致인데 다만 물(物)의 理致는 便辟(偏僻)하고 막혀서 능히 서로 통하지 못하고 사람은 五行(五行) 卽 木(木), 火(火), 土(土), 金(金), 數(水)의 특수함을 타고 나서 萬物(萬物)이 다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를 들면 나마지는 可히 같은 種類로 미루어서 硏究할 것이라. 슬프다. 節義는 있고 學問이 없는 者는 있으나 學問만 있고 절의(絶義)가 없는 者는 學問이 아니다. 이와 같이 天地(天地)가 純全한 陰氣(陰氣)의 時代를 만나 특수하게 서있는 소나무와 같이 되어야 可히 學問韓 사람이 될 것이다. 알 수 없지만 그대들은 果然 능히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그 받은 바를 變함없이 하겠는가. 내가 일찍 德士(德社)에서 봉강(鳳岡)을 한 番 만났는데 봉강의 人品이 봄꽃의 고운 것이 없으니 오래된 소나무의 淳朴한 氣(氣)로 뿌리는 굳고 根源은 깊어서 남이 感動하여 四一知性(事一之誠) 卽 아버지와 임금과 스승을 同一하게 섬기는 精誠을 얻게 된 까닭은 비록 碧海(碧海)와 上典(桑田)李 百 番이나 變하는 사이라도 이 後送(後松) 卽 소나무는 추운 뒤에까지 있는 특수함이 있는 일이리오. 그러나 書齋(書齋)는 밖에 있는 것이니 物件(物件)이요 學問(學問)은 안에 있는 것이니 理致(理致)라. 物件은 반드시 흥(興)하고 肺(廢)하는 것이 있고 理致는 存在하고 亡하는 것이 없으니 다만 이로서 能事(能事)가 되고 스승이 되고 弟子가 되었다고 여기지 말고 나아가고 나아가 함께 學問에 힘써 形體(形體)가 없는 義理(義理)를 樹立하면 形體가 있는 物件도 길이 힘입어 肺(廢)함이 없으리라. 또 或是라도 代父송(大夫松) [3] 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蒼山(昌山) 성기운(成璣運)

後送再 名 [ 編輯 ]

나의 親舊 祖上(曺?) 門褓(文甫)는 일찍부터 臨齋(臨齋) 徐氏(徐氏) 어른 卽 서찬규(徐贊奎) 어른을 섬겨 바른 길은 알았고 뒤에는 우리 奸才 戰友(艮齋 田愚) 先生을 스승으로 모셔 性(性) 審(心)의 祕訣을 묻고 교훈한 弟子가 甚히 많으니 金在哲(金在哲), 조긍환(曺兢煥) 같은 젊은이가 돈을 모아서 契(契)를 만들어 이름을 三逸界(三一契)라 하였다. 여러 해 동안 꾸준히 돈을 불려 元金과 利子가 若干의 金錢이 되었다. 城山(星山) 南쪽 居住知人 송곡리(松谷里)에 書齋(書齋)를 지어 後送再(後松齋)라고 懸板(懸板)하니 大槪 겨울이 추운 後에 松柏(松柏)을 取한 것이요 또 마을 이름을 인함이라. 金在哲(金在哲), 조긍환(曺兢煥) 두 사람이 이미 德川(德泉) 성기운(成璣運)의 氣門(記文)을 얻었고 나에게 와서 上樑文(上樑文)을 請하는데 갑자기 부지런한 뜻에 副應(副應)하지 못하였는데 只今은 金(金), 曺(曺) 두 사람이 받들지 못하고 또 世上을 떠났으니 이에 슬퍼하며 名(銘)을 지어 그 請하는데 報答하고 門褓(文甫)의 賞與止痛(喪予之痛) [4] 을 慰勞하며 名(銘)을 한다.


千 길의 醫鳳山(儀鳳山)이여 맑은 기운 높게 쌓았도다.

넓게 受容하였으니 아래는 송곡마을 있도다.

송곡(松谷)에 사람이 있으니 뜻은 높고 行實은 敦篤하도다.

只今 것을 斷絶하고 옛 것을 배워 뛰어나게 低速(低俗)되지 아니하도다.

골짜기에 나무가 푸르니 松木(松木)임을 알겠도다.

사람과 地域이 서로 걸맞으니 여기를 가려 建築하였네.

或是라도 이어지지 않음이 없으니 떨어진 우리 道(道)가 다시 回復하리라.

慶山(京山) 이종익(李鍾翼)

指定 事由 [ 編輯 ]

1900年代 昌寧조氏 봉강 祖上 先生의 門下生들이 先生의 遺業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齋室로 그 當時의 建立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2]

特히, 3량가 八作집에서 추녀와 서까래를 걸기 위한 大淸 上部家口의 技法이 세련되며 獨特하다. [2]

더욱이 거북이 模樣으로 彫刻된 礎石, 3個의 조각文樣이 있는 디딤돌 等은 매우 재미있는 裝置이다. [2]

後送再 周邊 [ 編輯 ]

後送材를 바라보았을때를 基準으로 左側에는 祖上(曺?)의 9大棗이자 陜川 에서 李麟佐의 亂 에 加擔한 조성좌(曺聖佐)의 遺墟碑(遺墟碑)가 있다. (昌寧曺公諱聖佐遺墟碑 - 昌寧조공휘星座遺墟碑)

後送材를 바라보았을때를 基準으로 右側에는 祖上(曺?)의 家長(家狀)을 쓴 조카이자, 文人이었던 학산 조을환(學山 曺乙煥)의 追慕碑가 있다. (學山昌寧曺公追慕碑 - 학산昌寧朝貢追慕碑)

各州 [ 編輯 ]

  1. 朝鮮後期, 書院이나 書堂들의 學校에서 學生들이 모여 스승과 弟子가 서로 人事하고 배운 바를 點檢하는 意識이다.
  2. 高靈郡公告 第2012-扈, 《高靈郡 鄕土文化遺産 指定告示》, 高齡郡守, 2012-08-01
  3. 秦始皇(秦始皇)이 泰山(泰山)에서 큰비를 만나 다섯 소나무 밑에서 비를 避할 수 있게 되어 벼슬을 내린 소나무를 말한다.
  4. 孔子(孔子)께서 首弟子(首弟子) 안자(顔子)가 別世하니 孔子께서 하늘이 나를 잃게 하셨다 하시며 哀痛(哀痛)韓 枯死(故事)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