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處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헤處 驅逐戰車
헤處 驅逐戰車의 모습.
種類 驅逐戰車
形式名 Sd.Kfz. 138/2
用途 및 目的 戰車 擊破
開發國家 나치 독일의 기 나치 獨逸
開發社 스코다
配置年度 1944年 ~ 1945年
歷史
開發年度 1943年
生産期間 1944年 ~ 1945年
使用國家 나치 독일의 기 나치 獨逸
生産 臺數 2584
一般 諸元
乘務員 4名
길이 6.38m
높이 2.17m
2.63m
重量 15.57t
攻擊力
州武裝 75mm pak39 L/48
部武裝 MG34
彈藥手 75mm pak39 L/48 41發 MG34 1200發
機動力
엔진 페트롤 R6 160馬力 엔진
魔力 160hp
懸架裝置 리프 스프링
노상 速度 42km/h
機動 可能 거리 177km
防禦力
全面 掌匣 60mm
側面 掌匣 20mm

138/2番 特殊目的車輛 38號 驅逐戰車 헤處 ( 獨逸語 : Jagdpanzer 38 Hetzer, Sd.Kfz. 138/2 )는 1943年 獨逸에 依해 開發되어 1944年부터 實戰 投入된 警 驅逐戰車 38(t) 戰車 의 車體에 75mm pak39 L/48 對戰車砲를 搭載하여 만들었다. 낮은 車體 德分에 防禦, 埋伏 같은 狀況에서 主로 使用되었다.

開發 [ 編輯 ]

1943年 3月 當時 機甲 總監이였던 하인츠 舊데리안 은 여러 가지 電車를 만드는 것보다 믿을만한 戰車와 驅逐戰車 몇 種類만 集中生産 하는 것이 賢明하다고 主張하였으나, 3號 돌격포의 工場이 1943年 11月에 폭격당해서 生産이 몇 달 中斷되는 바람에 一旦 4號 電車의 車대로 4號 돌격포를 生産하고, 38(t)戰車와 마더3를 生産했던 체코의 스코다에도 同級 驅逐戰車의 生産이 可能한지 質問하게 된 것이 헤處의 始作이되었다.

마더 3 의 車體로 活用되고 있던 38(t) 戰車 의 車體가 새롭게 開發될 驅逐戰車의 車體로 採擇되어 Leichtes Sturmgeschutz 38(t) 로 命名되었다. (헤處라는 이름은 兵士들의 別名이었지만, 히틀러에게 報告되는 公式的인 文書에도 發見되는 "미끼"라는 뜻의 이름이다.) 마더 III 의 차대는 좁아서 車內에 75mm 脯를 搭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더 III의 3가지 形態가 모두 車體의 上部에 76.2mm 砲나 75mm 脯를 搭載하는 形式이었지만, 헤處는 車對의 兩쪽 壁을 15度 程度 벌려 넓힘으로서 75mm 脯를 車內에 搭載하는 것에 成功해서 1944年 3月 첫 試製品이 完成되었다. 판터 以後 모든 獨逸 掌匣은 警査掌匣을 採擇해서 60mm 의 裝甲板이 피탄能力이 높은 60度의 傾斜路 容接되었다. 傾斜 때문에 水平에서 發射된 敵의 對戰車彈이 60道路 눕혀진 60mm 掌匣을 貫通하기 위해서는 티거의 全面掌匣 100mm 보다 두꺼운 120mm를 通過해야 했다. 車輛의 무게는 마더의 10톤에서 15톤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캐터필러 링크의 넓이도 293mm에서 350mm 로 넓혀서 接地面積을 넓혔다. 1944年 봄 헤處의 始作型은 앞쪽이 10cm程度 더 낮았다. 두터운 60mm掌匣과 그 掌匣에 附着된 75mm 抛, 그리고 앞쪽에 裝着된 變速機의 무게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서스펜션은 마더보다 넓은 板스프링을 使用했지만 44年 늦여름부터는 앞쪽 서스펜션의 個別 판 스프링의 두께가 7mm에서 9mm로 强化된다. 變速機의 中央 位置 때문에 脯는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裝着되는 바람에 初期에 計劃했던 座 15度 禹 15度 合 30度의 發射 角度는 不可能해져서 座 4度 禹 11度로 制限이 되었다. 이 때문에 發砲를 爲해서 車體를 돌려야 했기 때문에 기어에 無理가 생겨, 45年 1月頃에는 變速機의 기어比率도 1:7.3에서 1:8로 낮추어져서 기어의 破損을 막았다. 側面의 20mm 掌匣은 이미 戰線에서 隱退한 2號 戰車 F型의 20mm 側面掌匣과 같은 두께였기 때문에 戰場에서는 恒常 威脅을 앞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重要했지만, 햇치를 닫는 境遇 右側을 觀測하는 것이 不可能했다. 이러한 觀測의 問題 때문에 3號 돌격포나 페르디난드 驅逐戰車度 처음에는 全面 潛望鏡 하나가 後期型에는 360度 觀測이 可能한 形態로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해처의 개량형度 前次長의 潛望鏡이 左右로 回轉할 수 있도록했으나, 改良型은 實戰에 投入되지 않았다.

試製品 完成 3個月 後인 1944年 6月부터 量産을 始作하여 獨逸 敗戰까지 11個月 間 總 2584臺를 生産하면서 마더 3 시리즈를 成功的으로 代替하고, 戰爭 末期에는 가장 흔히 發見되는 戰鬪車輛으로 頭角을 드러내게 되었다.

獨逸 敗戰 以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生産하기도 하였으며, 스위스에서 헤處를 採用하며 엔진을 交換해서 G-13으로 명명하여 1970年까지 使用한다.

實戰 [ 編輯 ]

4號 戰車 後期型의 主砲와 3號 돌격포, 4號 突擊砲와 同格의 火力을 가진 75mm pak39 L/48 對戰車砲를 搭載한 헤處는 聯合軍의 中(中)電車를 相對하기 充分한 威力을 가지고 있었고 60mm 全面掌匣은 60度의 傾斜가 주어지면서 全面 防禦力度 優秀했기 때문에 戰爭末期 防禦戰에 優秀한 役割을 했다. 낮은 車體를 利用하여 埋伏에 能하였던 이 驅逐戰車는 生産이 쉬운 構造를 가지고 있고 또 높은 機械的 信賴性과 適切한 性能으로 헤處는 戰爭 後期 가장 많이 生産되는 驅逐戰車였다.

하지만 헤處度 短點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代表的으로 작은 車體로 因한 좁은 內部와 나쁜 가시城이 있었다. 特히 運轉兵의 境遇 3號 突擊脯처럼 直接的인 防彈琉璃를 通해서 運轉을 하거나, 4號 突擊脯처럼 電線以外에는 헷치를 열고 運轉할 수 없이, 恒常 潛望鏡을 써야 했다는 短點이 있었다. 또한 어느 戰車와 마찬가지로 側面掌匣은 恒常 正面보다 얇기 때문에 次長이 敵을 發見해서 두꺼운 正面掌匣을 敵을 向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重要했지만, 車掌이 햇치를 닫으면 오른쪽을 全혀 볼 수 없었다는 點과 次長이 오른쪽 뒤로 配置되어 正面 아래의 觀測이 어려웠다. 좁은 車臺 때문에 포의 稼動角이 左로 5度 右로 11度로 너무 적었기에 빠르게 움직이는 標的을 조준하機 위해서 繼續 車體를 움직여야 하는 等 여러 問題가 發生하였다. 또한 運轉兵, 照準病, 그리고 裝彈/無電病이 왼쪽에 한줄로 配置되어 車輛을 脫出해야하는 境遇에는 3名 모두가 裝彈病의 햇치 하나로 빠져나와야 했기에 生産 中期부터는 運轉兵의 머리 위로 핸들을 두個 設置하여 運轉兵의 脫出을 容易하게 하였다. 傳統的으로 裝彈病은 포의 오른쪽에 位置하는데, 裝彈病이 왼쪽으로 配置된 것은 相當히 不便한 要素中의 하나였다.

헤處의 編制는 獨立 臺電車大隊의 2個 中隊에 各 17代, 指揮所臺에 5個 都合 22臺로 이루어졌고, 擲彈兵師團, 警擲彈兵師團, 山岳師團마다 1個 對戰車中隊씩 編入될 豫定이였다. 하지만 戰爭 末期 混亂으로 인하여 實際 編制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確認되지 않았다.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