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부는 少年
(
프랑스語
:
Le Fifre
)
프랑스
의 畫家
에두아르 마네
의 1866年 作品이다.
프랑스
파리
오르세 美術館
에 所藏되어 있다.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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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年 스페인 旅行을 떠난 에두아르 마네는
프라도 博物館
을 訪問했다가 그곳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
의 作品과 처음 마주하며 令監을 얻었다. 1866年 파리로 돌아온 마네는 새 作品의 作業에 나서는데, 스페인의 이름모를 部隊 피리 連奏病을 主題로 한 것이었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宮廷 肖像畫의 形式을 模倣하면서도 비틀었는데, 特히 無彩色의 뒷背景을 알아볼 듯 말 듯한 程度로 뭉개놓아, 人物의 크기, 나아가 무게感까지도 가늠하려는 視線을 妨害하고 있다.
피리 부는 少年이란 이름을 붙인 이 作品은 1866年
살롱 드 파리
에 出品하였으나 落選하였다. 일찍이 마네의 作品을 支持해 왔던
에밀 졸라
는 審査團의 決定에 激忿하여, 新聞 《레베느網》(L'Evenement) 지에 마네의 現實主義的 樣式과 모던한 內容物에 讚辭를 보내는 連續 記事를 投稿하였다. 1867年 5月 마네는
귀스타브 쿠르베
의 前例를 따라 私費를 마련하여, 그해 파리에서 열린
萬國博覽會
展示館에서 個人展을 主催하였다. 이 作品도
個人展에서 展示되었지만, 筆致가 特異하고 空間 設定도 헤아리기 어렵다는 理由로 大衆言論의 嘲弄을 받았다.
《피리 부는 少年》은 1872年 美術賞 뒤랑뤼엘이 購買하였고, 1873年에는 마네의 親舊이자 作曲家
張밥티스트 포르
에게 넘어갔다가 1893年 다시 뒤랑루엘에게 팔렸다. 마네가 일찍 世上을 떠난 지 1年이 지난 1884年에 열린 大規模 回顧展에 이 作品도 出品되었다. 그 後 여러 손을 거쳐 蒐集家
이사크 드 카몽度
의 所有가 되었는데, 1911年 稅金 納付의 形式으로 프랑스 政府로 接收되어 國家 所有가 되었다. 1914年부터
루브르 博物館
에 所藏되어 展示되던 이 作品은 1947年 罪드폼 博物館으로 넘어갔으며, 1983年 마네 死亡 100周年을 記念해
그랑 팔레
에서 열린 大規模 回顧展에 展示되었다.
1986年에는 國立 近代美術 博物館으로 新設된
오르세 美術館
으로 넘어가 只今까지 所藏되어 있다. 이따금씩 오르세 美術館 巡廻 展示에 參與하는 作品 中 하나로, 2007年에는
藝術의殿堂
오르세 美術館展 展示를 위해 처음으로
大韓民國
에서 展示되었다.
[1]
2017年과 2018年에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의
루브르 分館
에 貸與 形式으로 展示되기도 하였다.
[2]
分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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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
의 作品이 그랬듯이 마네는 이 그림에서 垂直 水平面이 거의 흐릿하게 處理된, 얕은 깊이感을 보여주고 있다.
[3]
피터 H. 페이스트
의 《The Player fife》에 따르면 마네는 "津한 輪廓線과 背景 表面 直前에 配置함으로서 큼직한 하나의 人物像이 보여주는 裝飾的 效果"를 나타내고 있다.
[4]
灰白色 바탕을 뒤로 한 가운데, 限定된 팔레트色으로 漆해진 두터운
임파스토
가 날카로운 검정色 겉옷과 신발, 붉은色 바지, 흰色 끈과 스패츠를 만들어내며 人物을 津하게 强調한다는 것이다. 그 結果 그림 속 人物은 "단단하고 매끈하며 生動感 있는" 모습으로 서 있게 된다.
[5]
[3]
뿐만 아니라 마네의 作品은 無名의 人物을 對象으로 그린 것인데, 이 亦是도 벨라스케스의 作品을 닮았다. 그림 속의 少年은 마네가 르존 中領에게 付託해 데려온
나폴레옹 3歲
皇帝 親衛隊 所屬 軍樂隊의 10代 連奏病으로,
[6]
"스페인의 貴族을 모시듯 했다"고 傳한다.
[3]
다만 少年만 描寫한 게 아니라 다른 모델도 參考했다는 說도 提起되는데, 少年의 얼굴과 形體에서 마네의 아들 레옹 리노프와 專門 모델
빅토린 뫼랑
과 닮았다고 한다.
[7]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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