珍島 勇將性

珍島 勇將性
(珍島 龍藏城)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種目 私的 第126號
( 1964年 6月 10日 指定)
面積 472,915m 2
時代 高麗時代
所有 國有,事由
位置
진도 용장성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진도 용장성
珍島 勇將性
珍島 勇將性(大韓民國)
住所 全南 珍島郡  군내면 용장리 106
座標 北緯 34° 30′ 56″ 東經 126° 20′ 17″  /  北緯 34.51556° 東京 126.33806°  / 34.51556; 126.33806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珍島 勇將性 (珍島 龍藏城) 또는 용장산성 (龍藏山城)은 全羅南道 珍島郡 용장리에 있는 高麗時代 酸性 이다.

몽골軍의 侵入 을 받아 抗爭하던 高麗가 元宗 때 講和條約을 맺고 開京 으로 還都하자, 이에 反對한 三別抄 軍이 元宗의 6寸인 왕온 을 王으로 推戴하고 進度로 내려와 抗拒하였는데, 이때 三別抄軍이 大夢抗爭 (1270~1271)의 根據地로 삼은 城이다.

東國輿地勝覽 에 依하면 섬의 둘레는 3萬 8,741隻, 높이 5隻이라 하였을 뿐, 그 以上의 狀況은 밝혀지지 않았다.

1964年 6月 10日 大韓民國 私的 第126號로 指定되었다.

槪要 [ 編輯 ]

高麗의 將軍 裵仲孫 이 이끌던 三別抄 가 몽골의 侵略에 對抗하여 抗爭을 벌였던 場所이다.

高麗 高宗 18年(1231)부터 侵略해 오던 몽골과의 戰爭을 벌이기 위해 高麗는 首都를 開京에서 强化로 옮겼다. 그리고 40餘 年 동안 三別抄가 中心이 되어 몽골과의 戰爭을 벌였으나, 元宗 11年(1270年) 高麗 朝廷이 몽골에 降伏을 하였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던 裵仲孫을 비롯한 三別抄는 王族인 승화후 왕온(承化候 溫)을 王으로 삼고 南쪽으로 내려와 進度에 宮闕과 城을 쌓고 몽골과의 戰爭을 繼續하였다. 이때 쌓은 城이 바로 勇將性이다.

只今은 龍萇山 기슭에 若干의 城壁이 部分的으로 남아있으며, 城 안에는 용장사가 있던 절터와 宮闕의 자리가 남아있다. 勇將性 안에는 성황산이 있는데, 이 山에도 酸性을 쌓은 痕跡이 보인다.

性이 만들어진 年代가 確實하고 나름의 宮闕이 만들어진 點에서 價値있는 遺跡이다.

現地 案內文 [ 編輯 ]

性(城)이란 一定地域을 保護하고 行政이나 軍事의 中心地로 活用하기 위해 돌이나 흙銀露 쌓은 建造物을 말한다. [1]

용장산성은 高麗 三別抄가 蒙古의 斟量에 對抗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高麗 元宗 11年(1270年)부터 14年(1273年)까지 根據地로 삼았던 城터이다. 考慮는 首都를 江華島 로 옮겨 蒙古軍을 相對로 40年 동안 맞서 싸웠으나, 元宗 11年(1270年) 마침내 蒙古와 和親을 맺고 江華島를 抛棄하고 首都 開京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裵仲孫(裵仲孫) 以下 三別抄의 軍士들은 大夢抗爭의 굳은 決意를 다짐하고 王族인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推戴하여 王으로 삼아 江華島에서 抗爭하였다. 그러나 江華島가 開京과 너무 가까우므로 長期間 抗戰에 어려움이 있어 千餘 隻의 배와 兵力, 家族, 物資를 싣고 南天하여 이곳 珍島 勇將으로 옮겨왔는데, 이 때 쌓은 城이 甕匠性이다. [1]

周邊이 山으로 이루어진 山城안에 建物址가 남아 있는데, 雄壯한 石築과 용장사 그리고 行宮 터가 남아 있다. 現在 城의 길이는 12.85km이며 가장 높은 곳은 4m 程度이다. [1]

三別抄 大夢抗爭의 代表的인 遺跡地로 만들어진 年代가 確實하고 나름의 宮殿이 建立되었다는 點에서 價値가 크다. [1]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現地 案內文 認容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