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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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근 (鄭致根, 1931年~)은 第32代 大韓民國의 法務部 長官 等을 歷任한 法曹人이다.

生涯 [ 編輯 ]

1931年 慶尙南道 蔚山市 에서 태어나 1950年 경남고등학교 1954年 서울大學校 法學科를 卒業하고 1956年 第8回 高等考試 司法科에 合格한 정치근은 釜山地方檢察廳 서울地方檢察廳 大邱地方檢察廳 檢査를 하다가 1969年 大檢察廳 搜査局 4課長으로 昇進한 以後 1971年 法務部 檢察課長 1973年 서울地方檢察廳 部長檢事를 하였으며 1977年에 서울地方檢察廳 城東支廳長을 거쳐 1979年에 檢事長으로 昇進하여 春川地方檢察廳 , 釜山地方檢察廳 에서 檢査場을 歷任하였다.

6尺 長身(177센터미터) [1] 의 寡默하고 緻密한 性格으로 알려진 정치근은 檢事로 있으면서 公安通으로서 釜山地方檢察廳 檢事長에 오른지 8個月만에 大檢察廳 次長, 서울地方檢察廳 檢事長 等 高等考試 8回 同期들을 제치고 大檢察廳 공안부장으로 昇進하여 公安事件을 總指揮하다 全斗煥 大統領에 依해 1981年 12月에 第18代 大韓民國의 檢察總長 , 1982年 5月에 第32代 大韓民國의 法務部 長官 으로 各各 任命되어 在職하다 1982年 6月에 退任하였다. 特히 高等考試 4回인 이길주 서울高等檢察廳 檢事長과 高等考試 3回인 유태선 光州高等檢察廳 檢事長, 高等考試 5回인 박준양 大邱高等檢察廳 檢事長, 高等考試 6回인 정명래 法務硏修院長 等의 高等考試 先輩를 제치고 釜山地方檢察廳 檢査場에서 電擊的으로 檢察總長에 拔擢된 것은 "檢察 史上 最大의 人事 改編"으로 法曹界에 衝擊을 주었으며 이에 對해 "새 時代에 맞는 새로운 檢察 體系를 定立하려는 政府의 意志가 反映된 것이다"는 評價가 있었다. [2] 前任 檢察總長이 低質 煉炭 事件을 파헤치다 동력자원부 로부터 "갓 出帆한 政府의 公信力을 失墜 시켰다"는 主張이 提起된 가운데 [3] 1981年 12月 17日에 있은 檢察總長 就任式에서 "激變하는 國內,外 情勢와 複雜한 政治經濟 社會現象을 冷徹히 直視하여 무엇이 國家와 國民을 위해 最善이며 檢察權 發動이 國家와 國民生活에 어떤 結果를 가져오는지를 넓은 眼目으로 銳意 觀察하면서 全人格과 前力量을 發揮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4] 1982年 5月 21日에 있은 法務部 長官 就任式에서는 40分에 걸쳐 "個人과 團體의 調和 및 上,하간의 人和가 있어야 法務行政에 發展이 期約된다"는 趣旨의 演說을 했다. [5] 1984年에는 韓國산업은행 理事長에 任命되어 1989年까지 5年동안 在職하였다. 경남고등학교 에 在學할 때 蹴球選手로 뛴 정치근은 우람한 體軀와 넘치는 스테미너로 황소라는 別名을 가지고 있으며 [6] 檢察 蹴球 競技때 代表 選手로 活躍하였다. 否認 白壽者와 2男2女가 있다. [7]

정치근은 서울地方檢察廳 공안부장으로 있을 때 金大中 等 在野 人士들의 鳴動 事件인 3·1 民主救國宣言 公判을 맡아 法廷에서 嚴格한 公訴 維持를 하였으며 [8] 문세광 事件 等 굵직한 事件을 맡아 5·16 民族賞 安保部門 賞을 受賞하였다.

各州 [ 編輯 ]

  1. 京鄕新聞 1991年 1月 19日子
  2. 東亞日報 1981年 12月 16日
  3. 한겨레 1993年 9月 14日
  4. 東亞日報 1981年 12月 17日子
  5. 京鄕新聞 1982年 5月 22日子
  6. 京鄕新聞 1982年 5月 21日子
  7. 京鄕新聞 1981年 12月 16日
  8. 東亞日報 1981年 12月 16日
前任
이종원
第32代 法務部 長官
1982年 5月 21日 ~ 1982年 6月 23日
後任
배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