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석
(李仁錫, ? ~
1939年
6月 22日
)은
日帝强占期
의 軍人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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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淸北道
沃川郡
군서면 出身이다. 8男妹 中 맏아들로 태어나 只今은 廢校된 沃川農業實習學校를 卒業하였다. 이 學校에 講師로 就業하였다가 志願兵으로
中日 戰爭
에 參戰하였고,
中國
에서 戰死하였다. 階級은
日本軍
陸軍 上等兵이었다.
이인석은
1938年
에 志願兵 制度가 實施된 以來 처음으로 戰死한 朝鮮人이라, 제1호 戰死者로 크게 宣傳되었다. 많은 勳章을 받고 言論에도 死亡 消息이 "志願兵 이인석群 最初의 榮譽의 戰死"로 報道되었다.
[1]
沃川 李仁石의 집으로는 敎師가 引率하는 學生들을 包含하여 巡禮客이 찾아왔고, 家族들은 賻儀金을 받아 生計를 維持하였다.
허영
의 映畫 《너와 나》에는 李仁石을 모티브로 삼은 主人公이
日本人
과 結婚하고 出征 前에
扶餘神宮
에 參拜하는 內容이 나오는 等, 日帝 强占期 末期의 戰爭 弘報에 널리 利用되었다.
[2]
김동환의 詩 〈卷群聚千名(勸君就天命)〉을 包含하여 李仁石을 素材로 한 藝術 作品이 여러 장르에서 만들어졌다. 小說家
박완서
는 自傳的 小說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李仁石의 一代記를 담은
나니와부시
가 每日 放送되었다고 回顧한 바 있다.
[3]
死亡 當時 이인석에게는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이 있었다. 夫人은 조카를 養子로 들여 李仁石의 代를 잇게 하였다.
2003年
의 《沃川新聞》 報道에 따르면, 夫人과 동생 等 家族들은 이인석이 自發的으로 志願兵이 된 것이 아니라 講師로 在職하던 學校의 校長 等 第3者의 慫慂으로 强制로 끌려가 犧牲된 것이라고 主張하였다.
[4]
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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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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